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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

백선엽의 친일 행적에 대한 재검토

108회에 걸친 간도특설대 실상 파악에도 ‘백선엽’ 이름 없어

글 : 김형석  역사학 박사,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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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선엽 회고록의 간도특설대 내용에 조선인 항일무장 세력과 전투 없어
⊙ 간도특설대 연구에 인용된 중국 측 자료는 모두 공안국의 공술 자료
⊙ 피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여과 없이 인용하고, 시기별로 구분하거나 피해 정도에 대한 비교 검토 없어… 사실 여부 검증 필요

金亨錫
1955년생. 건국대 사학과, 경희대 대학원 박사 / 총신대 교수, 한민족복지재단 회장, 《조선일보》 통일과나눔재단 운영위원장, 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장 역임. 現 고신대 석좌교수, 대한민국역사와미래재단 이사장 / 저서 《안익태의 극일 스토리》 《한국교회여 다시 일어나라》 《기적을 이루는 사람들》
  지난 2020년 7월 10일 백선엽(白善燁·1920~2020년) 장군이 100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그에 대한 장례의식으로 뜨거운 논쟁이 일었다. 고인의 장의 기간 중에 미국 국가안보회의(NSC)가 “백선엽 장군과 같은 영웅 덕분에 한국은 번영한 민주공화국이 됐다”며 애도 성명을 발표했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성명은 끝내 없었다. 백선엽의 장례를 둘러싸고 이렇게 큰 파장이 일어난 것은 그가 ‘반공(反共)’과 ‘한미동맹’을 기저로 하는 보수 세력의 상징적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역사적 인물이라도 이념 대립의 대상이 되면 정당한 평가가 이뤄지기 어렵다. 따라서 필자는 그의 친일(親日) 행적을 둘러싼 갈등을 이념이 아닌 역사학적인 입장에서 검증해보려고 한다.
 
  백선엽을 친일파로 처음 규정한 것은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이다. 이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보고서〉에는 “백선엽은 1941년부터 일본 패전 시까지 만주국군 장교로 침략 전쟁에 협력하고, 특히 항일 세력을 무력 탄압하는 조선인 특수부대인 간도특설대 장교로서 일제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함(2조 10호)”이라고 기록되었다. 이상이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백선엽의 친일 행적인데, 간도특설대의 경우 활동이 악랄했다는 이유로 장교는 물론 사병까지 전원이 대상자로 포함되었다. 이로 인해 백선엽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한 범죄자(친일반민족행위자)로 판명된 것이다. 그러나 역사 해석은 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로만 판단해야 한다.
 
 
  “전투행위 전무했다”
 
  1989년 6월 백선엽의 회고록 《군과 나》가 처음 출판되었고, 이후 국내외에서 8종의 회고록이 나왔다. 그런데 일본에서 1993년에 나온 백선엽의 《대 게릴라전 - 미국은 왜 졌는가》에는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간도특설대의 비밀〉이란 새로운 내용이 수록되었다. 이런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자 백선엽은 큰 비난을 받았다.
 
  의문이 생겼다. 백선엽은 왜 새로운 간도특설대 얘기를 일본 출간 회고록에 소개했을까? 따라서 필자는 〈간도특설대의 비밀〉 중에서 특별히 문제가 된 부분을 검토해보았다.
 

  〈우리가 쫓은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 주장이 달라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니 일본의 ‘이이제이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29쪽, 백선엽, 《對ゲリラ戰—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原書房, 1993
 
  이 문장의 주어 ‘우리’는 당연히 ‘나’(백선엽)를 포함하는 의미다. 그런데 백선엽은 이에 대해 “간도특설대 초기의 동족 간 전투와 희생에 대한 가슴 아픈 소회를 밝힌 것일 뿐 본인은 전투행위 사실이 전무했다”고 해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말한 의도는 “내가 부임했을 때는 게릴라의 활동이 수그러들어 순찰을 나가도 게릴라와 교전하는 일이 없었다”는 뒷부분과 연결된다. 더욱이 〈간도특설대의 비밀〉 전문(全文)을 모두 읽어보면 그 의미가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 책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패배한 후, 일본 출판사(原書房)에서 그 원인을 분석하는 책을 기획하면서 백선엽에게 저술을 의뢰한 것이었다. 이런 배경을 이해한 후 이 책에 서술된 〈간도특설대의 비밀〉 전문을 읽어보면, “간도특설대가 승리할 수 있었던 비밀은 민심을 장악한 데 있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간도특설대의 비밀은 다름 아닌 민심을 얻는 것이었다.
 
 
  백선엽의 친일 3단 논법은…
 
다부동 전투 당시 국군 1사단장이었던 백선엽(가운데) 장군.
  이처럼 전체 내용을 놓고 보면 너무나 명확한 내용이지만, 위의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그의 해명은 문법적으로나 문맥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저자의 의도와 문장이 다르게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담은 다른 사료와의 비교를 통해 판단할 수밖에 없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하면서 독립군을 토벌했는가의 문제는 그가 반민족행위자인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잣대이다. 일반적으로 백선엽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주장할 때는 “①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장교다. ②간도특설대는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했다. ③고로 백선엽은 친일반민족행위자다”라는 3단 논법이 활용되었다.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선엽이 직접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글이 2005년에 발표된 적이 있다. 매우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백선엽은 1942년 중반, 늦어도 1943년 초부터 간도특설대에 차출되어 조선인 항일무장 세력 소탕전에 투입되어 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이는데, 주된 임무는 백두산 주변의 변경에서 동북항일연군을 추적, 토벌하는 것이었다.〉
 
  -335쪽, 안정애, 〈만주군 출신 장교의 한국전쟁과 주한미군에 대한 인식〉
 
  따라서 이 글을 검증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 필자가 출처를 조사한 결과, 사사키 교수의 《한국전 비사》에서 인용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원문과 대조해 보니 “조선인 항일무장 세력 소탕전에 투입되어 활동을 벌인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이것은 안정애의 새로운 주장이 《비사》의 내용을 왜곡한 것임을 알게 한다. 또 하나는 ‘김일성 게릴라’를 ‘동북항일연군’으로 수정한 것이다. ‘김일성 게릴라’는 1933년에 동북항일연군이 창설될 때부터 휘하 부대로 참여했지만, 이미 1940년에 소련으로 도피하였다. 이 때문에 ‘김일성 부대’라고 인용할 때, 예상되는 논란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보다 상위 부대인 동북항일연군으로 수정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결국 이 주장은 거짓인 것이다.
 
 
  옌볜產 口述史들
 
  1985년 조선족 작가 차상훈에 의해 《안도문사자료》(제2집)에 〈간도특설부대〉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그의 직업은 중국 공산당 조직선전사업 담당자로 직위는 안도현 정치협상회의 문사자료판공실 주임이었다. 이 글은 지린을 거쳐서 베이징에까지 소개되었고, 다시 《결전》이라는 책에 〈악명 높은 간도특설부대〉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국내에 반입되었다.
 
  이후 국내에는 옌볜 조선족 사회에서 발굴한 구술사가 무분별하게 소개되었다.
 
  그 가운데 2004년 조선족 소설가 류연산의 《일송정 푸른솔에 선구자는 없었다》가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박정희가 신경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1939년 8월 대사하 전투에 참여했으며, 이때의 연고로 간도특설대에 입대해서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나섰다”는 글이 있었는데 이것이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박정희는 문경 심상소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사실을 왜곡한 것이었다. 이 일로 차상훈도 구설에 시달렸다. 이전에 “박정희가 간도특설대 장교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차상훈은 “자신이 쓴 것이 아니고, 문필가 이○○가 덧붙였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처럼 조선족 사회에서 공분의 대상이었던 간도특설대에 관한 조선족 작가들의 글은 구술에 기초한 것으로 부정확하고 과장된 표현이 많기 때문에 연구자에게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더욱이 그동안 간도특설대에 관한 연구에 인용된 중국 측 자료는 모두 공안국의 공술 자료다.
 
  차상훈도 〈간도특설부대〉 끝머리에 “본문은 원 특설부대 성원들의 구술에 근거하고, 주·현의 공안국에 있는 유관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피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을 여과 없이 인용하고, 시기별로 구분하거나 피해 정도에 대한 비교 검토도 없이 항일무장 세력의 탄압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사실 여부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간도특설대의 비밀〉에 나온 ‘우리’는…
 
2020년 7월 15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백선엽 장군의 영결식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공동 취재단
  주목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상훈의 〈간도특설부대〉가 발표된 후 독립군 토벌과 조선인 학살 만행을 고발한 많은 자료가 발굴되었고, 108회에 걸친 간도특설대의 토공(討共)작전의 실상이 모두 밝혀졌지만 지금까지 백선엽의 이름이 등장한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중국 측 자료로 일컫는 옌볜조선족자치주와 지린성에 소장된 항일혁명 자료에도 없는 사실임을 입증한다. 또 백선엽 회고록에 소개한 간도특설대 내용에도 조선인 항일무장 세력과의 전투는 기록되지 않았다. 따라서 백선엽이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했다는 기록은 현재까지 발굴된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 나온 ‘우리’는 그가 부임하기 이전의 ‘우리 부대’를 뜻한다는 백선엽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이런 경우는 사법적으로도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된다. 하물며 역사 서술에서 확인되지 않은 것을 추측만으로 사실인 것처럼 단정 짓는 것은 역사가의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그렇다면 백선엽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일본식 교육을 받고 일본의 괴뢰정권이던 만주국 군인이 된 백선엽은 자연스럽게 ‘친일의 길’을 걸었다. 그가 만주국군에 자원입대한 것이나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것을 자랑스럽게 기술한 역사인식은 오늘의 시선에서 보면 ‘친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그럴지라도 역사적 사실은 정확하게 인식하고 바르게 기록해야 한다. 그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된 것은 만주국군 장교로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경력 탓이지, 조선인 독립군을 토벌하고 동족을 살해한 때문은 아니었다. 덧붙일 것은 6·25가 끝난 지 70년이 되었고 북핵 문제로 인해 한반도에 긴장이 최고로 고조된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 전쟁터에 나가 희생한 일본군·만주국군 출신 장교들을 모조리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올바른 역사인식이 아니다.
 
 
  “정의는 관용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시 생각한다.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조지 워싱턴은 영국군의 영관 장교로 복무하면서 프랑스군은 물론 인디언을 토벌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그는 참전을 통해 영국군의 군사 전술을 훤히 꿰뚫게 되었으며,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는 중요한 자양분으로 삼았다. 지금 미국에서는 그를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한다. 또 가혹할 정도로 대독 협력자를 처벌했던 프랑스는 망국·관용·정의의 이름으로 ‘1947년 8월 16일 법’ ‘1953년 8월 6일 법’을 제정하여 반역자, 밀고자, 고문자 등을 제외한 대독 협력자에 대해 대대적인 사면을 단행했다. 사면을 위한 입법 사유서에는 “정의는 관용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적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가르치는 목적은 올바른 미래를 향한 교훈을 얻기 위함이지, 과거로 돌아가서 싸우고 갈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미국과 프랑스의 사례는 우리가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의 서거 2주기를 맞이하여 그의 삶과 역사적 행적을 되돌아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백선엽 장군과 일면식도 없다. 그런데 선친(고 김신규 대위)이 임관하기 전 학도병 신분으로 다부동 전투에 참전하였다. 이런 연고로 어렸을 적부터 다부동 전투와 백선엽 장군의 얘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김형석의 역사산책〉 “어느 서울대생 학도병의 이야기” https://blog.naver.com/wif0691/ 222442298717 참조). 특별한 인연을 떠올리면서 이 글이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길 기대하며 마무리한다.
 
  (이 글은 2022년 7월 5일 육군발전협회(회장 권오성) 주최로 육군회관에서 열린 〈백선엽 장군 서거 2주기 추모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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