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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난중일기》 거짓 인용한 유언비어 난무

경상도 군졸은 오합지졸?

글 : 이정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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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에 떠다니는 충무공 괴소문들
⊙ 경상도 폄훼, 기생과의 관계 등은 대부분 거짓
⊙ 충무공, 자살(自殺)인가 전사(戰死)인가?
⊙ 선거철에 이용되는 《난중일기》 문구
⊙ 영화 〈명량〉은 어디까지 사실인가?
  충무공(忠武公)의 《난중일기》를 사칭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글들이 최근 들어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유포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이다.
 
  〈경상도 군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에 한 놈 목을 쳐야 군율이 보전된다(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 軍令保全). 충무공 《난중일기》 中에서〉
 
  비슷한 예는 많다. 경상도에서 벌어진 사건·사고 기사 중 댓글이 많다 싶으면, 갑자기 《난중일기》 사칭 댓글이 등장하곤 한다. 구체적인 사례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경상도에서 뽑은 졸병은 평소에는 군량을 받아먹으며 할 일 없이 노닐다가도 일단 출진의 북이 울리면 죄다 밤 사이에 도망하여 흩어지고 만다(慶尙道招集下卒 饋軍穀則默然食之而遊遊消日 戰鼓鳴卽 皆夜半逃散也).〉
 
  〈경상도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머리를 깎고 왜 옷을 입고 왜적의 앞에 서서 충청·전라 지방에 침입하여 죽이고 뺏고 불지르고 강간함이 왜적보다 더 심한 바가 있다(慶尙徒 剃頭倭裝 導倭賊侵寇忠淸全羅 殺傷擄掠放火怯奸 又諶於倭賊也 取老少婦女首及獻上倭將).〉
 
  〈경상도 사람들은 노인, 어린이, 부녀자의 머리를 베어 왜의 장수에게 진상하기도 한다.〉
 
  이 글들은 항상 ‘《난중일기》 중에서’라며 출처를 명시한다. 온라인 검색 포털을 통해 관련 내용을 검색하면, 온라인 동호회 모임방·블로그 등을 통해 끝없이 관련 글이 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자 역시 그럴듯한 한문어구로 쓰여 있고,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전라도 수군절도사 시절부터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갈등을 겪었기에 《난중일기》에 관련 내용이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넷 글들은 유언비어(流言蜚語)에 불과했다.
 
 
  인터넷의 거짓 충무공 소문
 
국보 76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7월 초 대표적 충무공 연구가인 노승석(盧承奭) 여해고전연구소장(47·전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교수)을 만나 충무공 관련해 자문하는 과정에서 악의적 루머(Rumor)가 넘쳐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루머는 그럴듯하게 《난중일기》 등 역사적 기록을 가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루머뿐 아니라 역사 비틀기를 시도하는 소설·영화 등을 통해 역사적 사실이 왜곡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문답식으로 관련 의혹을 정리했다. 우선 경상도 폄훼 논란의 진실은 이러하다.
 
  ― ‘경상도 군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고 했다는 등 일련의 소문은 사실인가요?
 
  “원문과 해석내용이 《난중일기》에 나오는 것으로 표기돼 있으나 《난중일기》는 물론 이순신이 왕에게 보고한 장계 모음집인 《임진장초(壬辰狀草)》에도 없습니다. 혹시나 해서 고전번역원과 국사편찬위원회, 규장각 등의 고전들을 모두 찾아보았으나 유사한 글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문장들은 지어낸 거짓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전문헌자료에서 보이는 관용적인 한문투가 아닙니다. 호사가들이 한문단어를 조합하여 새롭게 만든 문장으로 보입니다.”
 
  경상도 폄훼 주장과 더불어 《난중일기》에는 관비(官婢·관청 소속 여자 종) 및 관기(官妓·관청 소속 기생)와 관련한 내용 또한 많이 적혀 있다는 이야기도 떠돌고 있다. 사실은 어떤가. 《난중일기》를 찾아보면 다음의 내용이 전부다.
 
  《난중일기》 병신년
 
  ① 3월 9일 : 저녁에 좌수사가 와서 이별주를 마시고 전송했다. 그런 뒤 술에 취해서 대청에 쓰러져 잤다. 종 개(介)와 함께 있었다(介與之共).
 
  ② 9월 11일 : 영광에 이르니 영광군수가 교서에 숙배(肅拜·왕에게 절)한 뒤에 들어와 함께 이야기했다. 내산월(萊山月)도 와서 만나고 술 마시며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③ 9월 14일 : 하루를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함께했다(女眞共).
 
  ④ 9월 15일 : 체찰사가 무장현에 이르렀기에 들어가 인사하고 대책을 의논하였다. 여진(女眞)과 함께했다(女眞共).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노 소장은 “그 당시 조선 사회에서 관리가 근무할 때 관기나 종이 시중을 드는 일은 관습상 허용된 일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생활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며 고전을 바탕으로 설명했다.
 
  ― 《난중일기》에 관기와 관련한 내용은 4곳뿐입니까.
 
  “이순신 관련 다른 문헌에 더 나오지만 여인과 관련한 대표적인 예는 4가지입니다. 내산월(萊山月)은 임진왜란 당시 한양 기생의 이름으로 제가 처음 밝힌 것입니다. 이 명칭이 1795년 유득공과 윤행임에 의해 이순신의 문집으로 간행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는 빠져 있고, 1935년 조선사편수회에서 《난중일기》 초고본을 탈초하여 간행한 《난중일기초(亂中日記草)》에는 ‘세산월(歲山月)’로 되어 있었습니다. 초서 글씨 내(萊)자를 세(歲)자로 오독한 것인데, 북한학자 홍기문과 국학자 노산 이은상이 이를 세산월이라고 잘못 읽은 것입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춘원(李春元·1571~1634)의 시문집인 《구원집(九畹集)》에 보면 한양 기생 내산월에게 준 시(贈洛妓萊山月)가 있습니다. ‘스스로 예쁜 것만 믿다가 홍등가에 잘못 드니 궁지에서 초라한 신세 뉘 알아주랴. 번화한 거리에서 한번 더럽혀지고 바닷가 꽃 속에서 부질없이 풍월 읊네. 한 가득한 오주에서는 봄풀이 푸르고 꿈 깨는 금곡에서는 석양빛 짙어라. 아름다운 얼굴 빌려오지 못하고 나이만 먹었으니 붉은 촛불과 맑은 술잔 그대 어이하리오(自信嬋娟誤狹斜 豈知零落在天涯 塵埃一失城南道 風月空隨海上花 恨滿筽州春草綠 夢驚金谷夕陽多 韶顔不借年華晩 紅燭淸尊奈爾何).’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 18권 〈조관기행(漕官紀行)〉에도 내산월이 한양의 기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 ‘내산월’과 관련한 다른 내용은 없나요.
 
  “구전설화에 의하면 내산월이 평소 이순신을 흠모하였는데 몇 차례 편지를 올리고서야 이순신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거북선을 만들 때 많은 금괴를 바친 의기(義妓)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한양에서 지내다가 중년 이후에는 영암 법성포에 살았다고 합니다. 《난중일기》 병신년 9월 11일자에 이순신은 영암에 갔을 때 내산월을 만나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진 것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기생 여진(女眞)의 실체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
  ― ‘여진’ 관련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되나요.
 
  “여진(女眞) 관련 내용은 《이충무공전서》에는 없고 《난중일기초》에는 ‘여진입(女眞卄)’ ‘여진입(女眞卅)’으로 잘못되어 있습니다. 일본인들이 초서로 써진 공(共)자를 스무 입(卄), 서른 삽(卅)자로 오독한 것입니다. 홍기문은 여진족으로 보고 여진 20명으로 달리 해석했지만 이은상은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제가 처음 바로잡은 것인데, 원본 글씨가 공(共)자라는 본인의 견해에 대해 많은 초서연구가가 의견을 함께했습니다.
 
  《난중일기》에 보면, ‘인명 + 共(~와 함께하다)’ 형태의 문구가 자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介)와 여진(女眞)을 여자 종으로 본 것입니다. 여진과 관련하여, 15세기 전남 해남 지방의 노비관계 문서를 보면, ‘여자 종 여진(婢女眞)’이란 이름이 보이고 다른 임진왜란 기록에도 ‘성주의 여자 종(城主婢) 여진(女眞)과 관기 등이 노래를 불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여진이 주로 여자 종의 이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만난 여진도 여자 종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간혹 여진을 여진족 또는 남자로 보기도 하나 용례와 문헌에 비추어볼 때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충무공, 자살인가 전사인가?
 
  충무공의 죽음과 관련해, ‘갑옷을 벗고 일부러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 사람이 많다. 소설·영화에서 갑옷을 벗고 북을 치며 적의 공격을 유도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선조와의 갈등으로 일부러 자살을 기도했다는 주장이 정설처럼 믿어지고 있다.
 
  ― 이순신 자살설이 나온 배경은 무엇인가요.
 
  “선조의 불신과 당쟁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이순신이 자살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자살설의 근거는 숙종 때 이민서(李敏敍)가 의병장 김덕령을 평가한 《김장군전(金將軍傳)》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김덕령이 억울하게 죽은 것을 본 여러 장수는 저마다 자신을 보전하지 못할까 의심하게 되었다. 곽재우는 마침내 군대를 해산하고 떠나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한창 싸우는 중에 투구를 벗고서 스스로 탄환을 맞고 죽었다(方戰免冑, 自中丸以死). 호남과 영남에서는 부자(父子)와 형제(兄弟)들이 의병이 되는 것을 서로 금하여 경계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어요. 원문의 스스로 ‘自’가 자살설의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죠.
 
  여기서 먼저 면주(免胄·투구를 벗다)에 대한 해석이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면주는 장수가 결사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춘추(春秋)》의 고사에서 나온 말인데, 이 문맥에서는 이순신이 최후의 상황에서 선택한 것, 즉 죽기를 각오하여 투구를 벗고 결사적으로 싸웠다는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해 싸운 것으로 보면 ‘전사’가 맞고, 원문의 ‘自’자에 의미를 부여하면 ‘자살’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죠. 전체 문맥은 김덕령이 억울하게 죽었기 때문에 곽재우나 이순신도 달리 작심한 고의성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고의성 때문에 면주의 주(冑·투구주)자를 갑옷으로 보고 이순신이 자살한 것으로까지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이순신의 최후를 면주로 표현한 또 다른 기록은 이민서의 조카인 이이명(李頣命·1658~1722)이 지은 〈이 장군을 조문함(弔李將軍)〉과 임진왜란의 전말을 기록한 《선묘중흥지(宣廟中興誌)》가 있습니다.”
 
  ― 그렇다면 자살인가요.
 
  “‘자살’이 아니라 ‘전사’입니다. 안방준의 노량해전에 대해 기록한 〈노량기사〉에 ‘이순신이 죽었을 때 송희립이 이순신의 갑옷과 투구를 벗기고(解公甲冑) 자신이 이를 착용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순신이 죽기 전까지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음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미 이순신이 투구를 벗고 격전했다는 의미의 면주 내용과는 서로 모순이 됩니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애매하게 써놓은 이민서가 이순신의 명량대첩을 칭송한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에서는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진영에 임하여 운명하니, 마침내 몸을 바쳐 순국하였다(臨陣殞命 卒以身殉國)’고 적은 것이죠. 이순신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김장군전》에서는 모호하게 되어 있지만, ‘명량대첩비’에는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순신의 죽음과 관련하여 기록된 여러 사료를 보면, 대부분이 ‘이순신은 최후에 적들의 화살과 총탄을 무릅쓰고 직접 나아가 북을 치다가 홀연히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종합해 볼 때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투구를 벗고 결사적으로 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선거철에 이용되는 《난중일기》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물리쳐 불멸의 해전사로 길이 남은 ‘명량대첩’ 재현행사.
  선거철이 다가오면 정당들은 호남의 지지를 호소할 때, 충무공이 남겼다는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었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문구를 많이 이용한다. 출처는 어디일까.
 
  ―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의 출처는 어디인가요.
 
  “호남 지방은 우리나라에서 곡물 생산량이 가장 많은 식량 보급의 요충지로서 작전상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이순신은 1593년 7월 15일 수군의 진영을 전라도 여수에서 왜적 침입의 길목인 한산도로 옮겼는데, 쳐들어오는 왜선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튿날 인척관계인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 ‘호남은 국가의 울타리이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가 없는 것입니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 그러므로 어제 한산도에 나아가 진을 치고 바닷길을 막을 계책을 세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8월에 한산도에 통제영(統制營)이 설치되었어요. 이 내용은 이순신의 편지를 모아 만든 국보76호 《서간첩》에 나오며, ‘약무호남 시무국가’란 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 임진왜란 중 전라 지역민의 역할은 어떠했나요.
 
  “임진왜란 중 호남 지방의 민간인과 승려들이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왜군을 막는 데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입니다. 명량해전 때 전라 의병 마하수(馬河秀)는 지방의 향선(鄕船)을 모아 충무공 부대를 지원하며 민간인들의 동참을 유도했고, 특히 전북 고창 출신인 의병장 오익창(吳益昌)은 13척의 판옥선에 승선한 병사들에게 방탄용 솜이불을 제공하고 그들에게 동아(冬瓜)를 먹여 해갈하게 하는 등의 지원활동을 했습니다. 이들은 민간인의 배를 동원하여 조선 수군의 후방을 성대하게 보이는 위장전술도 구사했습니다. 명량대첩의 승리 요인은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 우수한 화포력, 지형적 이점 등입니다. 전라 지역민의 의병 활동 공로도 지대하므로, 결국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한 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전라 지역민들이 전쟁에서 크게 기여한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 수군을 재건하여 조선을 망하지 않게 하는데 전라 민간인들이 기여한 공로는 이순신 다음으로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이충무공전서》와 오익창의 문집인 《사호집(沙湖集)》에 나옵니다.”
 
 
  영화 〈명량〉은 어디까지 사실인가?
 
2014년 흥행에 성공한 영화 〈명량〉.
  최민식 주연의 영화 〈명량〉이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영화에서 나오는 조선 수군과 왜군이 칼을 들고 싸우는 백병전(白兵戰)이 실제로 있었는지 논란이 됐다. 영화 제작 과정의 창작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많았다. 사실은 무엇일까.
 
  ― 실제 임진왜란에서 백병전이 있었나요.
 
  “영화 〈명량〉에서 충무공의 배에서 백병전이 치러졌습니다만, 실제는 부하 안위(安衛)의 배에서 백병전에 준하는 교전행위가 이루어졌습니다. 백병전의 백병(白兵)은 본래 시퍼런 칼과 창의 뜻으로, 즉 무기를 말합니다. 이는 병사가 무기를 사용하여 교전하는 전술인데 주로 왜군들이 사용했습니다. 왜군은 배에 화포를 많이 장착할 수 없었고 조선에 비해 화포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판옥선에 올라가 백병전을 했던 것입니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6일자를 보면, ‘안위와 그 배에 탄 군사들이 각기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수마석(水磨石·물에 깎여 반들거리는 돌) 덩어리로 무수히 난격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이순신의 생애에 대해 쓴 《행록(行錄)》의 명량해전 당일의 내용을 보면, ‘피란하는 선비들이 높은 산에 올라가 보니 오직 안개 속에서 흰 칼날이 허공에 날고 포격소리가 바다에 진동했다’고 했습니다. 《난중일기》의 ‘몽둥이’ ‘긴 창’과 《행록》의 ‘흰 칼날이 허공에 날다(白刃飛空)’라는 내용을 볼 때, 무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영화 〈명량〉과 관련해 논란이 되는 내용은 무엇이 있나요.
 
  “영화에서는 거북선에 불을 지른 장면이 나오는데 학계에서는 《행록》을 근거로 명량해전에는 거북선이 출전하지 않았고 판옥선을 거북이 모양으로 꾸민 ‘꾸며 만든 거북함(粧作龜艦)’만이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저 역시도 명량해전에는 ‘꾸민 거북선’만이 있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달리 볼 수 있는 문헌 내용들이 확인되었습니다. 바로 ‘꾸민 거북선’이 일반적으로 거북선에 대한 지칭어로 사용된 예가 이순신 종가에 전하는 《귀선도(龜船圖)》와 나대용 관련 문헌에 있는 것입니다. 즉 중요한 문헌에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표현이 꾸밀 장(粧)자를 써서 기록된 것입니다. 효종 10년(1659)에 승지 이경억(李慶億)이 ‘원균이 패배했으나 그 후 이순신이 거북선(龜船)으로 대적을 격파했다’고 말한 자료(《효종실록》)도 있습니다. 오익창의 《사호집》에는 ‘정유년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 때 오익창이 지휘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비 출신 의병인 정운희가 이순신에게 보낸 〈명량대첩을 축하하며 보낸 시〉에는 ‘배의 거북이 등은 신이 준 나무로 만들었다(船龜背制神輸木)’는 문구가 있습니다. 혹자는 칠천량 패전 이후 명량해전이 발생한 9월까지의 짧은 기간에 거북선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명량해전의 거북선 이용설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조경남의 임진왜란 상황을 적은 《난중잡록》 계사년 자료를 보면 ‘이순신은 한 달을 넘기지 않고서 수비를 완벽히 하였고 그때 거북선이 출현했다(不閱月而守備已完 時出龜船)’는 내용이 있습니다.”
 
  ― 〈명량〉에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또 있나요.
 
  “영화에는 왜선 330척이 등장하지만 《난중일기》 기록에는 왜선 133척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배설이 이순신의 암살을 기도하고 화살에 맞아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는 10여 척의 잔선을 이순신에게 인계하고 정유년 9월 2일 도주하여 전쟁이 끝난 뒤 권율에게 붙잡혀 처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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