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기자수첩

아직도 구권 화폐를 쓰는 사람들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목록
  • 프린트
  • 스크랩
  • 글자 크게
  • 글자 작게
⊙ 중견기업 관계자가 내민 1만원짜리 구권 50장
⊙ 시중에 유통 또는 어딘가 잠자고 있는 舊 1만원권 규모는 1조5000억원
  몇 달 전 미용업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미용업은 업의 특성상 10회 쿠폰, 30만원 선결제 등 미리 돈을 내고 지속적으로 서비스를 받기도 한다.
 
  “중견기업인 A사 식구가 저희 집 단골이에요. 미리 결제한 쿠폰이 끝나서 새로 한다며 두둑한 봉투를 건넸어요. 현금으로 선결제를 하는 고객이 많아서 그러려니 했는데, 봉투 안의 돈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쓰던 1만원짜리 구권 50장이 들어 있더라고요. 제가 깜짝 놀라니까 은행에 갈 시간이 없어서 집에 있는 돈을 꺼내왔다고 하더군요. 집에 이런 돈을 쌓아놨나 싶어 사람이 다시 보이고, 또 순간 이 돈을 받아도 되나 싶었어요. A사가 이름 있는 회사인 만큼 위조지폐일 확률은 없겠지만, 이게 통용되는 화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옛날 돈이었거든요.”
 
  기자는 이 관계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문득 또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무속인 김원홍씨에게 속아 회삿돈으로 선물에 투자해 물의를 빚었을 때였다. 김원홍씨는 중국으로 잠적한 상태였고, 기자는 그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던 중 김씨의 집에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한 여자를 만났다. 다리가 좀 불편한 분이었는데, 그는 김씨(당시에는 선생님이라고 호칭) 집에 간 얘기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돈 냄새가 얼마나 고약한지 아세요? 선생님 댁에 갔는데 어떤 방 하나 앞에서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했어요. 방 가운데에 돈이 쌓여 있더군요. 녹색 플라스틱 네모난 트레이 위에 옛날 만원권이 비닐로 덮여 있었습니다. 대단한 선생님인가 보다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하나 있고, 돈이라는 것이 한곳에 쌓아놓으니 정말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구나 생각한 게 기억나요.”
 
  구권 화폐 얘기는 대개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지난 2014년 새누리당 박상은 의원은 돈 가방을 도둑맞았다고 신고했는데, 당시 아들 집에 6억원이 넘는 현금이 있는 게 드러나 파장을 일으켰다. 박 의원의 ‘뭉칫돈 미스터리’가 커졌을 때 그의 측근은 “박 의원이 평소 1만원권 구권을 자주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아들 시형씨가 아파트를 전세로 얻으면서 지불한 돈(6억4000만원) 중에 1억4000만원이 1만원짜리 구권 화폐로 드러나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적도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재국씨가 운영한 출판사 직원들은 지난 2013년 “2005년 보너스를 구권 화폐로 받았다”고 증언한 적도 있다. 그리고 요즈음에는 구권 화폐가 위조지폐로 변조돼 사기에 사용되기도 한다. 물론 A사의 오너가 집에 얼마의 구권을 갖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급히 꺼내 들고 와도 티 안 날 정도’라는 것은 꽤 흥미롭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구권에 대한 정확한 개념은 없다. 1만원권 ‘최신 버전’이 2007년에 나왔으니 그 이전에 나온 돈을 가리키는 것이 정설인 듯하다. 최근 8년 동안 한국은행에서 찍어내지 않은 돈이니, 바꿔 말하면 집 혹은 제3의 장소에 최소 8년째 보관 중인 돈이라는 얘기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72년에 발행한 1만원권 화폐는 한 번도 발행중지, 유통중지가 된 적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요즘 1만원권과 똑같은 가치를 지닌다. 유통이 가능하기에 이 지폐를 받았을 때 시중은행에 들고 가야 할 필요도 없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나이 드신 분들이 장롱에 모아놨다가 돌아가신 뒤에, 자식들이 구권을 발견해 은행으로 들고 오는 일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1만원권 구권 유통을 꼭 삐딱한 시각으로만 보지 말라는 얘기다.
 
  지난 2014년 6월을 기준으로, 회수되지 않은 1만원권 구권은 1조50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할아버지들의 꼬깃꼬깃한 쌈짓돈 말고, 탈세 혹은 검은돈의 탈을 쓰고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는 돈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조회 : 8152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NewsRoom 인기기사
Magazine 인기기사
댓글달기 0건
댓글달기는 로그인 하신 후 남기실 수 있습니다.

201907

지난호
전자북
별책부록
프리미엄결제
  • 지난호
  • 전자북
  • 별책부록
  • 정기구독
영월에서 한달살기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