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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한국의 선진화와 스위스 ③

노사분규와 복지병이 없는 나라

글 : 장철균  서희외교포럼 대표·前 스위스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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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哲均
⊙ 62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존스홉킨스대 국제정치학석사.
⊙ 제9회 외무고시. 주 중국 공사·외교부 공보관·주 라오스 대사·주 스위스 대사.
⊙ 現 서희외교포럼 대표.
전통복장을 한 스위스인들이 연방을 구성하는 각 주(州)의 깃발을 들고 국경일 행사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월남전에 참전하던 196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였다. 30년 후인 1994년 1만 달러를 넘어섰고, 지난해는 2만2778달러였다. 반세기 만에 소득은 230배, 무역규모는 7000배 성장해서 세계 10위권의 중진국으로, 선진국의 문턱에 와 있다.
 
  산업경쟁력에서 세계 5위, 세계특허 4위로, 산업·기술력도 최상위권에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3월 한국이 2016년에 선진국 대열인 소득 3만 달러 시대에 들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들을 돌아볼 때 선진국 진입이 순항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신중히 생각해 보아야 한다.
 
  2만 달러 소득의 중진국에서 선진국 진입을 못한 채 위기를 맞은 나라들이 있다.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등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여야 간 극단적 대립의 후진적·소모적 정치체제, 양극화에 편승한 노사분규의 장기화, 그리고 성장이 뒷받침되지 못한 분배와 복지 논쟁이 정치적으로 포퓰리즘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위 ‘중진국의 함정’이다.
 
  이들 국가는 냉전시대 군부의 독재체제가 장기간 유지되면서 경제개발을 이루어 국민소득 1만 달러의 중진국에 접어들었다. 소득증가에 따른 자유와 평등의 열풍으로 민주화를 성취하면서 노조를 등에 업은 진보세력과 사회당이 약진했다. 보수·진보 세력이 모두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강조하면서 중진국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늘날 국가부도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한국의 산업화·민주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대립으로 치닫고 있는 정치적 양극화·장기화한 노사갈등, 경제민주화와 표를 의식한 복지논쟁이 그렇다. 우리는 이러한 나라들의 뒤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스위스는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고 중진국의 함정에서 벗어나 노사분규가 없는, 복지병이 없는, 그리고 삶의 질이 가장 높은 나라로 평가된다. 우리는 실패한 국가건설의 사례를 뒤쫓지 말고 성공한 스위스에서 선진화의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인구 비례로는 스위스가 최고 선진국
 
  스위스 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2008년 공공행정연구소(IDHEAP)가 ‘외국에서의 스위스 이미지’에 대해 설문 조사한 바에 따르면, 스위스에 대해 일반적으로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스위스 하면 연상되는 것으로 아름다운 경치, 은행, 치즈, 초콜릿, 맥가이버칼, 그리고 영세중립국가가 우선적으로 떠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스위스의 글로벌 기업이나 혁신적 제조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으며, 스위스에 본부가 있는 국제적십자사와 스위스의 인도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낮은 인지도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갤럽이 지난 8월 ‘한국인이 좋아하는 나라’를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국(25%) 호주(19%) 스위스(8.0%) 캐나다(7.4%)와 올림픽 개최국인 영국(5.1%) 순으로 나타났다. 10년 전 조사에서도 스위스는 3위권에 있었다. 스위스의 이미지는 ‘세계의 정원’, ‘알프스의 진주’와 같은 별칭이 웅변하듯이 스위스라는 국가 이름 자체가 세계적 브랜드의 가치를 갖고 있다. 그래서 가장 가 보고 싶은 나라, 가장 살아 보고 싶은 나라 중에서도 으뜸 국가 중의 하나이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10대 도시 가운데는 언제나 스위스의 취리히, 제네바, 수도 베른 등 3개 도시가 포함된다. 그래서 그런지 스위스에는 많은 외국인 부자들, 고액 연금자들이 살고 있다. 2008년 통계에 의하면 세계의 억만장자(10억 스위스프랑 이상)의 상위 300명 중 113명이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Forbes)》의 조사에 의하면 세계의 억만장자는 1256명이라고 하는데 이들 10명 중 한 명은 스위스에 살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스위스에 살고 있는 최고 부자는 스웨덴 가구회사 IKEA의 창업주 잉그바르 캄프라트(Ingvar Kamprad)라고 한다.
 
  스위스에 대해 부정적 시각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지식인은 “위대한 혁명이 휩쓸고 있는 이웃나라들 사이에 스위스는 홀로 중립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불행으로 부유해지고 인류의 비극을 토대로 은행을 차리는 족속이다”라고 했다. 나치가 유대인으로부터 빼앗은 금을 나치에 수출한 물건 대금으로 받은 일, 은행 비밀계좌와 세금 도피처, 전쟁 중에도 돈을 버는 나라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유럽인들은 스위스가 유럽연합(EU)에 가입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며 경제적 이득만을 취하는, 즉 ‘돈만 아는 나라’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스위스가 가장 지방색이 강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이런 상반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스위스는 삶의 질에서, 행복지수(GNI)에서, 1인당 국내총생산(GDP·2011년 8만4983달러)에서, 국가경쟁력에서 모두 세계 3~4위권에 있다. 그러나 빈곤율은 유럽 선진국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해 부의 양극화를 고민하지 않고 있으며, 전국이 골고루 잘사는 특징도 갖고 있다.
 
  브랜드 평가기관인 ‘브랜드 파이낸스’가 세계국가브랜드가치 상위 20위국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1위 미국, 2위 독일, 3위 중국, 4위 일본이며, 한국은 16위, 스위스는 17위였다. 인구에 비례한 국가브랜드가치는 스위스가 1위이다. 스위스의 주가총액은 세계 11위이지만 인구비례로는 1위이다. 외국에 대한 은행대출 규모도 3위, 해외직접투자액도 5위이지만 인구비례로는 1위국이다. 나라이름이 곧 브랜드인 ‘작지만 큰’ 경제선진국이다.
 
 
  용병으로 이름 떨치던 스위스
 
교황을 호위하는 바티칸의 스위스 용병들. 이들의 군복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
  스위스는 인구 780만, 면적은 남한의 40%(경상도와 전라도를 합친 크기) 정도의 작은 나라로, 국토의 75%가 산과 호수이다. 지하자원도 없어 인적자원이 유일한 자산이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에 둘러싸인 내륙국으로 외세에 시달리면서 그 영향을 받아야 했던 비극적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과 유사하다.
 
  1848년 연방제를 채택하여 오늘날의 산업화를 이루기 전까지 스위스는 유럽 최빈국의 하나였다. 산의 경사면에 목초를 키워 소를 기르고 우유를 가공해서 보존식품인 치즈를 만들어 겨우 생활을 유지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용병을 수출해야 했던 쓰라린 과거를 갖고 있다.
 
  스위스의 용병은 오늘날에도 유명하다. 로마 교황청 앞에는 근위병 교대식을 보기 위한 인파로 매일 북적인다. 근위병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다고 하는 특이하고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다. 조건은 키 174cm 이상, 나이 19~30세의 용모 준수한 스위스 출신의 미혼 남자로 구교(가톨릭) 신자여야 하고 수염을 기르지 않아야 한다. 근무기간은 2년으로 월급은 1000달러 정도라고 한다.
 
  바티칸의 스위스 용병 역사는 15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위스 용병의 용맹과 신의는 1527년 부르고뉴의 왕 샤를 5세가 로마를 침략한 ‘로마약탈’에서 증명되었다. 189명의 근위병 중 147명이 교황 클레멘스 2세를 끝까지 지키다 목숨을 잃었으며, 나머지 42명이 교황을 호위하여 피란시켰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5월 6일 교황청에서 충성 서약식이 거행되고 있다.
 
  스위스의 용병은 프랑스에서 다시 진가를 발휘한다. 1792년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 혁명군중이 침입했을 때 루이 16세와 왕족들을 피신시키며 800여 명의 스위스 용병 호위군이 사망한 것이다. 스위스의 루체른 호수 인근에는 이들의 충성심과 용맹성을 기리기 위하여 1821년 사자상을 조각했는데 오늘날에는 중요한 관광지가 되고 있다.
 
  스위스는 1874년 자국인의 외국군 입대를 헌법으로 금지했지만 교황청 근위대는 예외로 인정하고 있다. 스위스가 주요 수입원이던 용병수출을 금지하게 된 이유는 유럽의 강대국들이 스위스 용병을 고용하면서 강대국들의 전쟁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30년 동안 계속된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스위스 용병들이 프랑스군과 네덜란드군으로 나뉘어 결전 끝에 쌍방이 전멸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후 스위스는 중립을 선언하고 용병은 교전당사국 중 한쪽만 지원하기로 제한했다.
 
  용병은 16세기에는 생계형 인력수출이었으나 18세기부터는 급속히 증가된 인구과잉과 길드제도로 인해 국내 일자리가 제한되자 높은 보수가 보장되는 용병으로 해외에 취업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동족상잔의 비극과 생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국민적 열망이 이후 스위스 산업화를 촉진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용병으로 주변 선진국에 체류하면서 선진사회의 발전상을 경험한 용병이 이후 산업전사로 변신하여 산업화와 자유무역의 기수가 된 것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한국도 1960년대 이후 광부·간호원 독일 파견, 월남전 참전 등을 통해 산업화와 무역국가로 성장하는 유사한 과정을 거쳤다.
 
 
  섬유와 시계로 산업화를 성취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위스 시계들. 스위스의 시계산업은 프랑스 위그노의 망명에서 시작되었다.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은 방직업에서 시작해 공작기계, 화학, 제약으로 발전했다. 스위스의 산업화도 섬유에서 시작했다. 정부와 길드제도에 의해 독점되지 않았던 면방직 산업은 스위스의 동부, 오늘날의 생갈렌(St.Gallen) 지역에서 번성했는데 인근의 산간 농촌지역으로 확산되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선진국의 면화를 배정받아 완제품을 만들었고 이들의 무역망을 통해 여러 나라로 수출하는 오늘날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의 산업구조였다. 스위스는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의 고향으로 알려진 글라루스(Glarus) 지역에서 1764년 영국에서 처음 제작된 방적기를 수입, 섬유제품을 대량생산해 수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주요 고객이었으나 차츰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선진국 시장에 경험이 있었던 용병이 산업전사로 무역의 일선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을 고립시키는 대륙봉쇄가 발동하자 영국으로부터 기계수입과 서비스(A/S)가 불가능해졌다. 스위스는 자체적으로 방적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805년 방적기 제작에 성공하고, 나아가 방적기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디젤엔진을 최초로 제작했다. 모방에서 창조로의 일대 변혁이었다. 스위스는 ‘필요에 의해서‘ 또는 ‘필요가 미덕’이기 때문에 기계를 만들고 산업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필요하면 만든다는 스위스의 실용정신이다.
 
  섬유와 함께 스위스의 산업을 이끈 것은 시계였다. 시계는 섬유와 달리 스위스의 고유한 산업이 아니었다. 종교적 이유로 옆 나라 선진대국인 프랑스의 신교도(위그노, Huguenots)가 박해를 받아 스위스로 이주하면서 갖고 온 것이었다.
 
  16세기 종교혁명의 와중에 프랑스는 확산되는 신교를 억압하기 위해 ‘신교와의 전쟁’ 소위 위그노 전쟁을 벌였다. 특히 왕실까지 관련된 이 전쟁에서 하룻밤에 3000명이 죽었다.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제의 학살’이다. 박해 받은 위그노들은 칼뱅, 츠빙글리 등 종교혁명의 선구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스위스로 이주했다. 국경을 넘어 신교도와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요람인 제네바 지역에 정착한 후 인접한 주라(Jura) 산악지대로 영역을 넓혔다. 이들의 생계수단이 당시 첨단산업이었던 시계였다. 기록에 의하면 1785년에 약 2만명이 시계산업에 종사하여 약 9만 개의 시계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시계산업도 초기에는 무역상인들의 주문을 받아 이들을 통해 수출하는 구조였으나 귀국한 용병들이 자유무역의 첨병 역할을 하면서 스위스 시계는 산업화와 일자리, 기술과 창조, 부의 축적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되었다.
 
 
  산업화와 정치적 갈등
 
  스위스의 산업화 과정은 유럽의 종교혁명과 산업혁명-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이어지는 유럽 국제사회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스위스는 1513년까지 신·구교가 혼재한 13개 주의 동맹체였다. 종교혁명과 종교전쟁의 영향을 받아 보수적 구교 주(칸톤)와 자유적 신교 주 사이에서도 내전이 발생했다.
 
  두 세력은 정치, 종교, 문화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동맹을 유지하기로 하고 종교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무장중립으로 30년 종교전쟁의 전화를 차단했다. 전쟁을 마무리하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조약에서는 신·구교 공존의 독립국가로 인정받았다. 스위스는 대외적 중립과 국내 정치적 안정으로 산업화를 가속화해 나갈 수 있었다. 스위스는 1815년까지 주변 12개 주를 동맹에 가입시켜 오늘날의 스위스 국경을 건설했다. 나폴레옹 전쟁을 종식시킨 빈 회의에서 유럽의 열강들은 스위스를 영세중립국으로 인정한다.
 
  종교적 갈등을 극복하고 산업화를 이루었으나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시계산업과 산업화로 부자가 된 주들이 신교로 전환하면서 자유·진보 진영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농업과 부가가치가 낮은 생계형 산업에 의존하고 있던 내륙 산간지역 구교 주민들의 반발이 일어나 분리동맹을 결성했다. 1847년 또다시 내란으로 발전했다. 정치적·종교적·경제적 양극화에 직면한 것이다.
 
  다수의 자유세력은 중앙집권을, 소수의 보수세력은 기존의 자치동맹을 주장했다. 두 세력은 스위스의 분리보다 ‘유지’가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다시 한번 정치적 타협을 시도했다. 보수의 독립적 지방자치 입장을 진보가 받아들이되 보수는 진보가 주장하는 중앙정부의 필요성에 공감하여 연방제를 수용함으로써 타협에 이른 것이다. 다수가 소수에게 양보하여 1848년 미국에 이어 두 번째 연방국가가 탄생했다.
 
 
  스위스 은행 비밀주의 관행의 연원
 
스위스의 은행업은 예금주에 대한 비밀엄수로 유명하다. 사진은 취리히에 있는 크레디트 스위스 은행의 본사.
  산업화로 축적된 부는 금융산업으로 옮아갔다. 스위스인의 근검절약과 높은 저축성은 축적한 자산을 은행에 맡겼다. 오늘날도 스위스의 저축률은 일본에 이어 세계 2위이다.
 
  금융업은 스위스의 정치, 경제가 안정되면서 주변국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 영세중립국으로 전화를 입지 않았고, 용병으로 쌓은 신의의 이미지가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스위스 은행의 안정성에 외국의 돈이 몰리기 시작했다. 스위스 화폐도 기축통화 못지않은 역할을 하면서 스위스의 금융산업은 국제적 명성과 함께 국제금융으로 진화하게 된다.
 
  스위스는 금융업의 부가가치에 착안, 1848년 연방헌법을 제정하면서 진보와 보수 세력의 합의로 중앙은행을 설치했다. 스위스는 금융산업의 안정적 성장을 위해 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을 확대했다. 오늘날에도 스위스 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은 세계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약 3분의 1로 독일, 프랑스 등에 이어 5위권이다.
 
  스위스 금융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예치한 고객의 자산을 공개하지 않는, 즉 법으로 규정된 은행의 비밀준수 의무이다. 이 법은 2차대전 시 히틀러가 자금을 도피시키는 독일인을 사형으로 처벌한다는 법을 제정하고 비밀경찰을 동원해 스위스 은행에 은닉된 독일인 예금을 조사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스위스 연방정부가 1934년 은행 비밀의무를 법제화하고 위반시 형사처벌을 명문화한 데서 비롯되었다.
 
  스위스의 금융비밀주의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프랑스의 신·구교 간 종교갈등 이후 1598년 낭트칙령(Edict of Nantes)으로 신교가 인정되었으나 1658년 루이 16세가 왕위에 올라 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탄압하자 위그노의 2차 이주가 시작되어 제네바에서 금융업을 하게 된다. 이들 신교도는 프랑스 상인 출신으로 신흥재력가가 많았다. 이들은 고리대금 성격의 대출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루이 16세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고 왕가의 사치로 재정난에 봉착하자 자신이 내쫓은 제네바의 위그노에게 고리의 은행대출을 타진했다. 제네바의 위그노는 박해 받은 원한은 있지만, 엄청난 수익이 보장되는 큰 고객을 받아들였다. 루이 16세는 신교도에게 돈을 대출한 사실을 밝힐 수 없기 때문에 이 거래는 상호비밀 유지가 가능하여 성사되었고, 이후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에 기초가 되었다고 한다. 은행비밀주의는 은행과 고객 사이에 서로 필요로 하는 비밀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금융업이 번성한 제네바 정부에서 1713년 법제화하고 1907년에는 민법에 포함시킨 후 1930년 은행비밀주의를 확고히 하면서 오늘날 탈세천국의 오명을 얻게 되고 미국, EU 국가들로부터 탈세은닉 공개의 압력을 받기에 이르렀다. 스위스 금융업은 스위스 총생산액의 16%를 차지하는 최대 산업이다.
 
 
  기술개발과 글로벌 경영으로 브랜드 강국 건설
 
스위스인들의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보여주는 스위스 밀리터리 나이프.
  스위스의 산업은 기술이 말해 준다. 영국의 방적기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방적기를 만들어 수출했다. 방적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디젤엔진을 최초로 개발했다. 달에 착륙한 아폴로 우주선의 외벽에 부착된 알루미늄(aluminum foil)은 태양열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스위스 베른대학에 의뢰해 제작한 최첨단 기술이다. 스위스 나이프에서 시계, 엘리베이터와 한국에 배치되어 있는 대공포에 이르기까지 기계제품의 수출국가로 자리매김했다.
 
  자신들이 우위에 있는 기술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개발한다. 17세기 이래 세계적 명품의 위치에 있던 스위스 시계의 진화를 보자. 당시의 시계는 300여 년 동안 회중시계였다. 1910년 스위스는 최초로 손목시계를 개발했다. 1931년에는 방수시계, 1931년 자동회전시계, 1945년 자동으로 바뀌는 날짜시계, 1962년 흠이 가지 않는 유리금속시계와 같이 시계의 기술을 창조하고 시계시장을 석권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스위스의 제품 하나하나가 세계적 명품브랜드가 되었다.
 
  기술로 앞서지 못하는 분야에서는 글로벌 경영전략으로 맞섰다. 역시 시계를 보자. 시계는 태엽을 감아 작동하는 방식이었는데 1967년 오늘날 보편화한 건전지에 의해 작동하는 방식의 시계(Quarz Uhr)가 스위스에서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스위스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난감 같은 시계로 인식되어 수제명품을 만드는 스위스 시계산업에서 배척되었다.
 
  이 건전지 구동방식의 특허는 일본에 넘어가고 저가로 대량생산한 일제시계가 세계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시계는 위기를 맞았다. 한 발 더 나아가 70년대에는 디지털 방식이 도입되어 더욱 간편하고 싸지면서 시계는 일용상품, 생필품이 되었다. 스위스의 고가 공예품 시계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오늘날의 스와치 시계이다. 1983년 위기를 느낀 ‘시계산업 스위스연합’과 ‘스위스 시계연합’이 합병해 SMH그룹을 만들었다. 그리고 배터리 시계에 플라스틱 외형을 조합하여 저렴한 패션시계를 고안해 질과 가격경쟁력을 동시에 해결했다. 저렴한 패션시계로 다시 시계시장을 탈환한 스와치 그룹은 기존의 산하 명품시계들인 오메가, 브레게, 블랑팡 등 수제명품 시계들의 명성에 더욱 고가의 보석을 장식하여 시계를 최고가의 보석시계로 진화시켰다. 스위스 시계는 저렴한 패션시계와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고가의 보석 공예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글로벌 경영의 한 사례이다.
 
  스위스는 섬유와 시계로 산업화를, 금융과 관광으로 경제선진국을 일구고, 자체 개발한 기술을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분야에 적용했다. 화학, 제약, 첨단산업 등에서 그랬다. 화학산업에서 발전한 제약산업에서도 글로벌 경쟁력을 위해 동종의 기업이 합병하여 세계 2위의 노바티스, 5위의 로슈가 탄생했다. 스위스의 다국적기업들이다. 합병을 통한 글로벌 경영의 또 다른 사례이다.
 
  식품산업의 네슬레도 유사한 글로벌 경영으로 세계 굴지의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한 스위스 기업이다. 네슬레는 브랜드 현지화 전략으로 세계의 식품시장을 석권했다. 금융사업도 프라잇뱅크에서 UBS, 크레디트 스위스(Credit Swiss) 같은 세계 굴지의 은행으로, 보험에서 재보험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다. 재보험회사 스위스리는 세계 2위이다. 시장이 좁은 국내에 머물지 않고 기술과 경영으로 글로벌화에 성공한 것이다.
 
 
  노사 평화협정으로 분규 없애
 
  스위스의 산업화는 부의 양극화와 함께 새로운 정치·사회적 문제를 만들어 냈다. 1845년 연방헌법과 연방국가체제로 국가해체의 위기는 극복했으나 유럽 국제사회의 자본주의 병폐에 대한 논란과 노동자와 자본가의 갈등은 확산되었고 스위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동안 확고한 무장중립 정책에 따라 동원령이 내려지고 병사들의 급여는 생계에도 못 미치게 되었다. 근로임금도 최저생활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1914년부터 5년간은 식료배급제가 실시될 정도였다. 그러나 스위스 기업은 엄청난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대기업과 자본가들은 갈수록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반적이었다. 후유증으로 독일에서는 바이마르헌법이 제정되고, 러시아에서는 1918년 공산주의혁명이 일어났다. 스위스도 영향을 받아 최초의 총파업이 발생했다. 정치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약진했고, 정국은 임금근로자 보호의 방향으로 선회했다. 잘나가던 대기업, 자본가들도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전후 대공황으로 각국이 보호무역으로 문을 굳게 닫기 시작하자 수출에 의존해 온 스위스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기 시작했다. 관광객이 줄어 관광업도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 와중에 정치적으로 급상승한 노동자와 노조세력의 임금인상 투쟁이 격렬해졌다. 스위스의 경제가 총체적 위기를 맞게 되었다. 노사협상이 결렬되자 재무부가 조정하는 강제적 제도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노동조합뿐 아니라 경영자 측에서도 이를 반대했다. 자유경제체제하에서 국가권력의 개입을 배격해 온 기존 입장 때문이었다. 스위스의 대표산업인 철강, 기계, 시계산업 노사대표가 공동전선을 형성했다. 그리고 1937년 노사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쌍방이 총파업, 사업소 폐쇄 등 실력행사의 배제와 모든 문제를 우호적으로 타협하여 해결할 것임을 상호 확인했다. 노동시간, 질병수당, 유급휴가, 종군 중의 보상, 아동수당 등에 관해 상세한 규정을 마련했다. 이 협정을 준수하기 위한 보증금으로 양측은 국립은행에 각기 25만 프랑을 기탁했다. 이 협정은 처음 2년 동안 구속력을 갖고 그 후에는 5년마다 갱신되었다.
 
  노사협정이 성사된 배경에는 1933년 이웃 독일에서 히틀러가 등장하여 전체주의가 스위스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하에 자본가와 노동자가 한배에 타고 있는 공동운명체임을 자각하고 전체주의의 파고부터 막자는 인식도 한몫했다. 또한 나치가 유럽을 점령하고 스위스 침공이 예견되자 사회당도 기본입장을 포기하고 국방력 강화에 동의하면서 초당적 협력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정치적 타협도 노사평화협정을 이끌어 내는 데 일조했다.
 
  최대 노조인 철강, 기계, 시계 분야의 평화협정은 오늘날까지 계속 준수되고 있고, 중앙은행에 예치한 50만 프랑의 공탁금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채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다고 한다.
 
  섬유 등 다른 산업에서는 평화협정이 없지만 1937년 이래 스위스에는 모든 업종에서 총파업이나 노사분규가 거의 없다. 대외적으로 전화를 입지 않고 내부적으로 노동쟁의가 없다는 것이 오늘날 스위스의 경제적 번영과 지속적 성장의 주요한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복지는 필요한 사람에게 일시적으로만 제공
 
  오늘날 선진국이 겪는 또 하나의 문제는 복지정책이다. ‘무덤에서 요람까지’의 복지사회를 구현하고 있는 스웨덴의 기준에서 보면 스위스는 복지국가라고 볼수 없다. 위기를 맞고 있는 그리스 등 EU 국가들의 잣대로도 스위스는 복지국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운영하는 의료보험도 없고, 최소 생계비를 보장하는 시스템도 없다. 그런데 빈곤율이 가장 낮고 가난의 대물림도 적다. 선진 복지국가들이 겪고 있는 소위 복지병도 없다.
 
  스위스의 복지정책은 가난을 최소화하는 것과 비생산적인 복지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복지는 필요한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제공하여 복지혜택에만 의존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지혜택을 받는 사람도 다음 세대에 가난이 대물림하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위스는 복지에도 생산성 개념을 적용해서 수혜자의 형편에 따라 혜택을 달리하고 수혜자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혜택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고령층이나 장애인에 대해서는 무제한 혜택을 주지만 일반 수혜자는 본인이 재활, 교육, 사회프로그램을 통해 소득창출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혜택을 받은 사람은 사회에 환원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도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다. 생산적 복지를 지향하고 있다.
 
  중앙에서 통제하는 복지는 없지만 복지정책에 대한 만족도는 가장 높다. 세금을 더 거두어 복지혜택을 증가시키는 것이 최선책이 아님을 스위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스위스가 이러한 생산적 복지를 현실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것은 대선과 같은 대권정치가 없고 여야가 없으며, 직접민주주의로 세금의 부담과 복지수준을 주민이 모여 결정하므로 정치·사회적 안정성과 행정적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원칙의 스위스 복지정책은 오늘날 국가재정 위기에 직면한 유럽의 여러 선진국에서 나타나는 사례와 잘 비교된다. 한국의 복지가 대선의 주요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실패한 나라의 복지를 답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위스의 성공 비결은
 
스위스 특허청에서 일하던 시절의 앨버트 아인슈타인. 스위스인들은 아인슈타인을 스위스인으로 간주한다.
  스위스의 국가건설은 오늘날 모든 나라의 이상적 모델이 되고 있다. 유럽의 선진국에서도 스위스는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최고의 삶의 질과 높은 행복지수에, 양극화가 없고 복지병도 없는 나라, 고도의 산업화와 친환경국가, 노사분규 없이 지속성장이 가능한 스위스의 성공 비결은 무엇인가.
 
  첫째,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Entreprenoeship)과 창의적 기술개발이다. 용맹과 신의로 무장된 용병의 전통은 산업전사로서 그 명맥이 계승되었다. 가난의 대물림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가 미덕’이라는 실용정신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 또한 신교적 자유주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결합은 기업정신으로 이어져 고난과 위험을 극복하고 끊임없는 기술개발로 글로벌 기업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둘째, 정치·사회적 안정과 법적·제도적 뒷받침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스위스는 여야가 없이 타협에 의한 합의정치와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사회의 심각한 갈등이 표출될 때마다 스위스는 대립과 충돌을 피하고 갈등을 타협으로 조정하는 상생의 정치를 구현하고 있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이 아니라 해결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무장중립의 확고한 안보태세로 전화를 입지 않았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으로 강대국 전쟁에 영향을 받아야 했던 종속변수의 위치에서 무장중립으로 나라를 지켜 지난 200여년 동안 전화를 입지 않았다. 자유와 보수의 신·구교 간 내란은 이었지만 정치적 타협으로 연방국가를 건설하여 제2의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만들어 냈다.
 
  넷째, 인적자산을 중시하고 포용했다. 자원이라곤 인적자원밖에 없는 스위스는 교육을 통해 인적자산을 극대화했다. 노벨상 수상자가 23명으로 인구비례 세계 1위이다. 외국의 인적자산도 적극 포용했다. 시계기술을 갖고 온 위그노가 좋은 예이다. 스와치 시계로 스위스 시계의 부활을 가져온 하이에크 회장도 레바논 출신이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스위스 명사들 중에는 외국인 출신이 상당히 많다. 오늘날에도 스위스에는 부자뿐 아니라 세계적 명사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스위스의 다국적기업들은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많이 고용하고 있다. 인재이면 국적을 가리지 않는다.
 
  현재도 진행 중인 인적자산 논쟁이 있다. 아인슈타인 논쟁이다.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 독일 태생이며 스위스 공대에 유학 중에 상대성원리를 완성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를 피해 미국에 이주했다. 이스라엘, 독일, 미국 모두 아인슈타인이 자국인임을 강조한다. 스위스의 주장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과학자로서 명성이 있는데, 그것을 스위스대학에서 연구하여 완성한 것이므로 스위스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섯째, 근검절약과 함께 ‘필요가 미덕이다’라는 스위스의 실용정신이다. 척박한 환경에서 주변 강대국에 종속되어 가난이 대물림되었던 농경사회의 역사 속에서 잉태된 근면하고 검소한 생활은 스위스인의 공통적인 덕목이다. 필요하면 모방하여 만들고, 싸우지 않고 타협하며, 천사에게 내민 청구서와 같은 사례는 스위스의 경제건설에 기초가 된 실용정신의 다른 모습들로 보인다.
 
 
  스위스의 성공이 한국에 주는 교훈
 
  한국이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룩한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의 압축성장 과정은 지난 200년 동안의 스위스 국가건설 과정과 유사한 점이 많다. 다만, 스위스가 유럽 국제사회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면서 자유주의 사상과 산업혁명 유입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150여 년 앞당겼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점은 지난 200년간 한반도에서는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구한말 일제에 병합된 것, 그리고 해방 후에도 분단되고 북한의 남침전쟁이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는 이러한 위기 때마다 정치적 타협과 유비무환의 무장중립으로 독립을 유지하고 전화를 입지 않은 것이 다르다.
 
  한국이 3만 달러 소득의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스위스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정치적 양극화를 극복하여 정치적 안정성을 정착시켜야 한다. 우리가 선진국의 문턱에서 방황하는 이유는 바로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는 정치적 기능과 역할이 실종됨으로써 국민이 체감하는 정치적 안정성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의 정치체제는 서구식 민주정치의 경험이 일천한 반면, 유교적 농경사회의 가부장적 전통과 권위주의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정당정치는 대권과 정권의 창출을 목표로 이전투구하고 있다. 승자독식의 다수결 민주주의와 한국적 붕당정치의 결합은 정치가 사회적 갈등을 오히려 증폭시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대권주의 정치는 포퓰리즘을 수반하여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를 허약하게 만들고, 나아가 국가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둘째, 유비무환의 안보태세와 경제적 선진화가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유사시에 강했다. 그러나 평상시에 약하다. 평소에는 국론분열과 안보불감증이 자리 잡고 있다. 위기 시에는 단결하지만 위기를 미리 막고 대비하는 일에는 소홀하다. 선진국이 되기도 전에 성장보다는 분배, 복지가 우선하면 실패한 나라의 뒤를 따르게 된다. 스위스는 평화 시에도, 위기 시에도 모두 강했다. 그래서 오늘날 모두의 선망이 되는 선진국이 되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셋째, 법치를 구현하고 행정적·제도적 장치를 선진화해야 한다. 법과 제도가 경제를 뒷받침해야지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경제학자들이 제시하는 6가지 국정거버넌스 지표에도 법치가 포함되어 있다. 범죄발생률, 사법재판 결과의 예측가능성, 계약의 집행력 등이다. 경제주체들이 얼마나 법과 규범을 준수하고 존중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세계은행이 조사한 법치지수를 보면 미국 1.58, 영국 1.71, 캐나다 1.75, 브라질 -0.21, 아르헨티나 -0.71, 멕시코 0.26 등이다. 한국은 0.67로 선진국과 중진개도국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스위스의 세계경제포럼(WEF)은 한국경제의 가장 주요한 문제로 정책불안, 관료의 비효율성, 금융, 노동법, 조세, 부패, 범죄 등을 지적했다. 한국이 3만 달러의 소득과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가능한 스위스형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법치의 정착과 함께 정치, 경제, 사회, 교육의 전반에 걸친 선진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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