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 ⑧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김현철 사건 (中) : 월간조선

1차 수사를 거친 한보사건은 1997년 3월 중순 대통령 주치의인 박경식씨의 이른바 ‘김현철 진료녹화 테이프’ 공개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박씨가 환자들의 향후 진료에 참고하기 위해, 환자 동의를 거쳐 진찰치료 과정을 촬영해 오던 CCTV 내용을 공개한 것. 이로 인해 김현철씨가 인사(人事) 개입 등 국정 전반을 주물렀다는 의혹이 강력히 제기됐고, 자연스럽게 바로 그가 한보사태의 몸통이리라는 추측이 더더욱 힘을 얻게 됐다.

이처럼 한보사태가 급속히 김현철게이트로 확산되던 1997년 4월 8일 이른 아침, 서울 서초동의 대검(大檢) 검찰총장실, 한보와 관련해 수사 진전 상황을 총장에게 보고하는 아침회의 자리. 평소처럼 김기수 총장과 최명선 차장검사, 중수부장인 나와 김상희 수사기획관이 둘러앉았다.

여느 때와 달리 이날 회의 분위기는 무겁고 침통하기까지 했다. ‘은행장 배임(背任) 처리 문제’가 네 사람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제일, 조흥, 외환, 산업, 서울 등 은행장들이 한보에 대출해 준 것은 개인비리 말고도 업무상 배임죄(背任罪)로 처벌해야 한다”는 나와 수사팀의 주장에 총장이 제동을 거는 상황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최 차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실 청와대 결정으로 은행장이 (한보에) 대출을 해주었다면 그게 범죄 성립은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우리 검찰이 이것(은행장들 사법처리) 말고도 할 일이 많아요.”

그동안 수사 방향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견 없이 가급적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해 온 최 차장이, 이제 은행장 처리 문제를 놓고는 총장의 속내를 대변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어찌됐든 이미 회의에 들어오기 전부터 다 예상했던 이야기라 나는 최 차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되받아쳤다.

“심 부장 임명한 거, 쇼야 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총장님, 저 오늘 사표 냅니다.

일동은 말이 없었다.

―그러니 총장님도 약속 지키십시오. 그저께 은행장들 (배임죄) 처리를 연기해 달라고서는, 그것을 관철시키지 못하면 총장직 그만두겠다고, 저한테 분명히 약속했잖습니까. 그러니 사표 내십시오.

“…”

―일구이언(一口二言) 하실 겁니까.

“…”

―사표, 사표 말입니다. 당장 내십시오!!

내가 격앙해 소리치자 정작 김 총장보다 최 차장이 더 놀란 눈으로 말리듯 나섰다.

“이봐요 심 부장. 당신이 사표 내면, 같이 고생하는 우리는 놔두고 혼자만 살겠다는 거요? 영웅이 되겠다는… 너무 이기적인 생각 아니오?”

―영웅이라뇨? 제가 25년 넘게 몸바쳐온 평생직장을, 그것도 지금 이런 시점에 자리를 내놓는다는 게 바로 죽는 거나 마찬가진데 그게 무슨 이기적인 일이고 혼자 살려는 생각이란 겁니까. 정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다들 같이 사표 내면 될 것 아닙니까. 내가 뭣 하러 여기, 중수부장으로 왔습니까.

이 대목에서 김 총장 혹은 최 차장이라고 실명을 밝히지 못할 누군가의 대답이 튀어 돌아왔다.

“어허 이것 참. 심 부장을 중수부장 임명한 거, 쇼야 쇼. 심 부장이 여기(중수부장) 와서 해야 될 몫은 솔직히 아무것도 없어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자 그제야 김 총장이 입을 열었다.

“일단 은행장들 (배임) 범죄가 성립된다는 입장은 정리된 것 같고…. 따지고 보면 결국 청와대의 ○○○가 나쁜 놈이지. 하지만 심 부장, 어떻게든 헌정(憲政) 중단은 막아야지 않겠나. 아무래도 은행장들은 불구속이 어떨까. 내가 오늘 오후에 대통령을 직접 만나 이런저런 다른 문제들을 다 해결할 테니까….”

그러나 김 총장의 이런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김 수사기획관이 말을 받았다.

“은행장 문제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으면 저도 사표 냅니다. (중수)부장님 사표 수리되는 대로 저도 거취를 같이하겠습니다.”

회의는 결국 이렇다저렇다 더는 말없이 끝이 났다. 내가 대검 중수부장으로 임명돼 한보 재수사를 맡은 지 18일째. 그날은 한보 수사, 내 검사 인생 모두에 있어 중대 고비였다 할 수 있다. 온 국민의 눈길이 집중된 커다란 사건 수사를 앞에 놓고, 그것도 다른 누구보다 호흡이 척척 맞아야 할 검찰총장과 중수부장이 정면충돌(?)했다. 왜 이런 사단이 벌어지게 됐는가.

국면전환의 첫 카드, 수사팀 재편

한보사건의 주임검사를 맡았던 이훈규 검사(왼쪽)와 세무전문가로 수사팀에 합류한 노관규 검사(오른쪽).

중수부장으로 첫 출근하기로 돼 있던 3월 24일 새벽, 내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가장 급한 일은 ‘국면전환’이었다. 당장 검찰 안팎의 분위기부터 바꿔야 했다. 따져볼 필요도 없이, 1차 수사의 터널을 빠져나온 한보 수사팀은 ‘몸통은 건드릴 수 없다’는 내부적 패배감과 ‘정권의 시녀인 마피아 검찰’이라는 여론의 질타에 잔뜩 주눅 들었을 터였다. 어떻게 이 국면을 확 뒤집을 것인가? 답은 두 가지였다. 안으로는 사람과 조직을 재편하고, 밖으로는 ‘정태수 쪽의 불의’에 대해 검찰의 정의롭고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먼저 수사팀 재편. 세상 어떤 일이든, 당장 현장에서 기름때 묻혀가며 일하는 사람이 신명나야 일이 되게 마련이다. 앞서(※지난 호 제1편) 본 것처럼 나는 “수사팀 보강은 과천(법무부장관)의 지시”라고 둘러대 부임 인사하던 자리에서 검찰총장의 내락을 받아냈다. 총장실을 나서자마자 지체없이 미리 구상해 두었던 대로 내부 조직을 재편하는 한편 대검 외부, 이미 점찍어 두었던 검사들도 불러들였다.

‘총감독’은 물론 나였고 바로 아래 ‘수석코치’는 김상희 수사기획관이 맡았다. 이미 현철씨 혐의 부분을 배당받아 수사를 진행하고 있던 대검 중수부 3과의 이훈규 과장을 주임검사로 하고, 그 휘하의 김준호·송해은·신현수 검사가 당연직으로 포함됐다. 여기에 특별수사로 이름난 외부 검사들을 각 지검 및 지청에서 ‘차출’했다. 김수남·홍만표·김경수·오광수·지익상 검사가 그들이다. 나는 새로이 수사팀에 합류한 이들이 1차 수사팀과 뒤섞여 신바람을 불러일으켜 주기를 기대했다. 세무 전문가도 필요해 서울 북부지청의 노관규 검사를 합류케 했다.

이들을 다시 ▲한보그룹 금융특혜 조사팀 ▲정 총회장 일가 재산 추적팀 ▲김현철 비리 수사팀 등 셋으로 나눠 조직을 재편했다. 그러면서 검사 및 수사관들 각자가 맡은 일 외에는 다른 쪽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도록 조치해 수사 정보의 유출을 원천봉쇄했다. 이렇게 해서 중수부장이 된 지 불과 이틀 만에 2차 수사팀을 꾸렸다. 언론에서는 그런 우리 수사팀을 ‘드림팀’이라고 불렀다.

“저런 X은 알거지를 만들어놔야”

사람과 조직이 짜였으니 그들과 나의 ‘코드’를 일치시키는 일이 남았다. 공식적인 자리, 비공식적인 자리 막론하고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물론 수사가 끝날 때까지) 검사들에게 사명감을 불어넣기 위해 진력했다. 새로 합류한 검사와 수사관들은 말할 것도 없고, 특히 기존 1차 수사 때부터 계속 함께 일하게 된 이들의 사기를 돋워주려 노력했다. 각 수사팀과 돌아가면서 거의 매일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할 때마다 “지금의 난국을 우리가 수습해서 국가도 살리고 검찰도 살려야 한다. 정권은 유한하다. 눈치를 봐선 안 된다. 필요하면 누구든지, 모든 것을 조사해야 한다”며 분위기를 띄우고 그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조직 재편과 함께 당시 세간에 근거 없이 돌아다니던 ‘검찰과 정태수 간의 야합설’도 불식시켜야 했다. 악(惡)과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는 수사진의 신념과 집념을 보임으로써 국민에게는 믿음을, 정치권과 검찰 내부에는 ‘어떤 입김도 수사에 작용할 수 없다’는 의지를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 바로 정 총회장의 재산 압류, 그리고 그의 셋째 아들인 정보근 한보그룹 회장 구속이었다.

중수부장이 되어 대검 조사실에서 여유만만한 표정의 정 총회장을 마주하면서 나는 앞서 언젠가 택시를 탔을 때 기사가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다. 차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 뉴스에서 한보 이야기가 나오자 “감옥에 몇 번씩이나 갔다 온 X이 노상 재기한다고 하는데 저런 X은 알거지를 만들어놔야 정신을 차린다”는 얘기.

예전에 다른 일로 검거돼 감옥을 드나들었어도 보란 듯 건재하며 오히려 기업을 키워온 정 총회장이다. 그런 만큼 재기의 발판이 될 재산도, 뒤를 봐줄 권력도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해야 비로소 기가 꺾일 터였다.

정보근 구속

1997년 3월 28일 횡령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정보근 한보그룹회장이 영등포구치소로 가기 위해 대검청사를 나서고 있다.

취임 사흘째 되던 날 나는 노관규 검사를 따로 불러 정 총회장의 회계 및 세무장부를 들춰보라 일렀다. 30년 경력의 세무공무원 출신으로 재산을 숨기거나 세금을 피하는 데 ‘선수’라고 알려진 정 총회장이다. 그런 그를 뒤지기 위해 이쪽에서도 역시 ‘선수’를 동원한 것이었다. 노 검사는 검사가 되기 전 세무공무원으로 장기간 근무했던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노 검사는 한보 세무장부를 파고들어 일을 맡긴 지 2~3일 만에 정 총회장의 탈루세액과 은닉재산 등 5000여억 원을 찾아냈다. 내가 그것을 전부 압류 조치하게 한 것이다.

이어 정 총회장의 셋째 아들 보근씨를, 회사 돈 370억여 원 횡령 혐의로 구속했다. 그는 한보사태 직후 구속된 아버지를 대신해 재기한다면서 정·관계와 금융계, 그리고 법조 주변을 오가며 한창 활동 중이었다. 이처럼 부임한 지 며칠 만에 내가 자신의 재산을 압류하고 아들까지 구속하자, 이후 검찰 조사실에 나온 정 총회장의 얼굴에서는 그 전과는 달리 여유와 활기가 싹 사라진 듯 보였다.

이처럼 국면전환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그 며칠 동안 나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수사팀에 실제로 어떠한 외압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름의 ‘정지(整地)작업’도 해나갔다. 취임 인사를 겸해 안팎의 고위 인사들을 만날 때면 으레 지나치듯 가볍게 “혹시 제가 모르는, 정태수 회장과 어떤 약속이나 언질을 주고받으신 것은 없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그때가 어떤 때인가. 당연히 열이면 열 모두가 행여 한보 쪽에 실오라기 하나라도 걸쳐질까 손사래를 치며 “무슨 소리냐” 펄쩍 뛰었다.

물론 내가 그렇게 말하고 다닌 것은, 나중에 우리 수사팀이 한보와 관련해 그 누구를 조사하든 혹은 그 무엇을 압수하든 정 총회장이나 한보 쪽을 편드는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침을 찔러놓은 것이었다. 그처럼 안팎으로 다지고 밟으면서 수사 의지를 키운 목적은 언제나 선명했다. 한보사태의 ‘몸통’을 잡아낸다는 것이었다.

은행장 윗선은 누구

국가경제를 위기로 몰아간 한보 ‘몸통’의 추적. 그것이 국가와 국민이 나를 포함한 2차 수사팀에 내린 지상명령(至上命令)이었다. 이미 당시 국민과 여야 정치권, 그리고 언론과 검찰 안팎에서는 그 ‘몸통’이 사실상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라고 공공연히 주장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수사를 맡은 검찰로서는 ‘풍차가 바로 저기 있다’ 해서 대놓고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 방식과는 달라야 했다. 큼지막한 타깃을 겨냥해 과감히 칼을 꺼내 휘두르며 돌진하는 모습은 겉보기에는 멋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들다 결국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거나, 최종적으로 법원에서 검사가 판정패한 사건들이 검찰사(史)에는 적지 않다.

무턱대고 ‘경기장에서 지쳐 쓰러지도록’ 달려들기만 한다 해서 바라는 결과가 덜컥 나오는 것은 아니다. 큰 사건일수록 실패한 수사가 되지 않으려면 그만큼 치밀한 전략과 준비, 그리고 증거 수집이 생명이다. 추적 대상의 덩치가 클수록, 또 비밀이 깊이 묻혀 있을수록 그것을 치고 들어가는 전략은 정확하고 정교해야 한다.

검찰로서는 속된 말로 ‘털어보아야 할’ 대상이 너무도 많았다. “검찰은 왜 빨리 수사를 진행하지 않느냐”고 여론이 재촉한다 해서 수사 대상이 된 이들 가운데 아무나 붙잡아 조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여 그 누구도 제쳐 놓을 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정 총회장의 재산을 압류하고 그 아들을 구속시킨 직후, 나는 내 방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아직 용도가 며칠 남은 3월자 달력을 북 찢어 그 뒷면에 한보 ‘불법대출’의 ‘흐름도’를 얼기설기 연필로 그려보았다. ‘누가 뭐라 하든지 사태의 제1차 책임은 한보에 대출해 준 은행장들에 있다. 총액 5조7000억원, 한보에 지원한 대출 규모라면 반드시 은행장 결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은행장들에게도 수조 원대 대출 결정은 버겁다. 은행의 대출 절차에 모든 게 합당하다 해도 결국 주저할 수밖에 없는 액수다. 더욱이 당시 철강 쪽에 돈을 들이붓던 한보의 신용상태는 탄탄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굴지의 은행들이 천문학적 액수의 대출을 계속 내준 것은 보나마나 배후의 ‘어떤 힘’이 작용한 결과다. 여기까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당장 추측할 수 있는 배후는? 그것은 세상에서 거론되는 것처럼 김현철씨일 수도 있고 청와대 수석들일 수도 있다. 또 권력을 가진 실세 정치인들일 수도 있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1차 타깃은 경제수석들, 그러려면…”

이들 가운데 내가 가장 먼저 눈을 둔 것은 청와대 경제수석들이었다. 시중 은행장에 가장 직접적으로, 또 막강한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가 경제수석이다. YS의 문민정부 출범 이후 한보사태까지 경제수석은 박재윤, 한이헌, 구본영, 이석채 씨 등 네 사람. 이 가운데 앞서 검찰의 1차 수사 및 공판 과정을 통해 한보 대출에 개입한 것으로 밝혀진 이들은 한이헌·이석채 씨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한보 대출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드러났음에도) 한·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어떠한 사법처리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들에 대한 1차 수사팀의 분석 보고서를 보니, 설사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해도 불법행위나 비리의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직권남용)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려져 있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보 불법대출로 인해 국가와 국민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한 불법대출, 즉 시중 은행의 불법행위에 직간접으로 압력을 행사했다면 그것은 누가 뭐래도 직권남용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어떠한 정책이나 조치를 ‘결정’하는 것은 대통령이나 소관부처 장관 혹은 해당 권한을 가진 책임자들의 몫이다. 한이헌이나 이석채씨와 같은 참모나 비서들의 업무도 아니고 권한도 아니다. 그들은 참모로서 대통령에게 ‘건의’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어떤 정책 결정에 참여하거나 개입하려면 소관부처의 장관이나 책임자와 협의하는 등 적법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런 것도 없이 소관부처나 금융 쪽 관계자들에게 자신이 직접 지시나 업무 종용을 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1차 수사와 공판 과정을 되짚어보면 그들은 직접 은행장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것 자체가 벌써 직권남용이요 나아가 업무상 배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그들의 그런 행위로 인해 결국 엄청난 국가적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정작 현실에서는 법적 책임을 묻지 못한다?

“은행장이 무슨 힘이 있나”

그처럼 은행장들을 움직인 ‘직접적인 윗선’조차 어쩌지 못하면서 어떻게 ‘몸통’을 찾아내고 죄를 물을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의 압력을 받았다는 은행장들의 업무상 배임 혐의부터 확인하여야 그렇게 만든 상선(上線)을 추급(追及)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1차 수사를 통해 은행장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일단락된 시점이었다. 한보에 불법대출을 해주고 커미션을 받은 것이 확인된 신광식 제일은행장과 우찬목 조흥은행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수재 혐의로 구속, 기소, 다른 죄목으로 기왕에 수감돼 있던 이철수 전 제일은행장은 한보 관련 비리 혐의가 추가돼 거듭 기소된 상황이었다. 반면 금품수수 등 개인비리가 드러나지 않은 장명선 외환은행장이나 이형구, 김시형 산업은행 총재 등은 사법처리 대상에서 제외돼 있었다.

말하자면 1차 수사에서 은행장들에게 따진 것은 대출과 관련해 금품을 받았는가 여부, 곧 개인비리 여부였다. 이들이 그러한 금품수수를 넘어 업무상 배임 혐의로 처벌되어야 비로소 압력을 가한 윗선의 불법행위에 대해 털어놓을 것이었다. 따라서 1차 수사 때 이미 개인비리로 구속된 제일은행장과 조흥은행장은 물론 다른 은행장들에 대해서도 본격 재수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은행장들을 업무상 배임으로 몰아가는 것은 한마디로 한이헌·이석채 두 경제수석을 사법처리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아가 그들이 바로 YS의 측근 실세들이란 점에서 ‘청와대’, 곧 대통령 및 그 가족까지도 검찰 수사대상이 된다는 것을 암시했다. 그러니 나의 그러한 복안을 당장 정권 실세들이 순순히 용인할 리 없을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아무래도 은행장들의 배임 부분을 다시 수사해야겠다”고 내가 이야기를 꺼내자 당장 김 총장부터 “안 된다”고 딱 잘랐다.

“…설사 한보 쪽의 신용상태나 담보가 부족하다 해도 국가 경제정책에 부합하면 은행으로서는 대출해 줄 수 있는 것 아니냐. 은행장들이 무슨 개인비리가 있으면 처벌돼야 하지만 그런 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국가 경제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은행장들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라며 만류한 것이다.

은행장들, 배임 혐의로 사법처리키로

직접적으로 청와대니 경제수석이니 하는 표현들은 전혀 없었지만 은행장 배임 수사가 곧 그쪽을 겨냥한 것임을, 정권 차원에서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은행장에게는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으니, 오랜 관행에 비추어 우리 은행장들이 자기 윗선 권력자들의 뜻을 거스르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빼도 박도 못 할 분명한 사실은 모든 대출이 은행장 자기 이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대출과 관련한 문제가 생겼을 때, 은행장이 1차적으로 법적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은행장은 부당한 외압이 있을 경우 마땅히 자기 자리를 걸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관장이 어려운 자리인 것이다. 부당한 일인 줄 알면서도 자리보전을 위해 거기에 야합하거나 동조한다면 당연히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설사 은행장들의 개인비리가 밝혀지지 않더라도 그들을 배임 혐의로 사법처리해야 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당시 수사를 맡은 나로서는, 은행장을 넘어 보다 윗선으로 (수사의) 전선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도 은행장들의 배임 문제를 방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사를 강행하기로 했다.

온갖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는 4월 초 박상길 중수부 1과장을 불러 한보와 거래한 은행장들의 업무상 배임 부분에 대해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곧바로 중수부 1과 검사들이 제일은행장, 외환은행장, 서울은행장, 산업은행장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청와대·법무부에 수사보고 안 해

주요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의 진행상황은 청와대나 법무부 등에 정식 또는 비선(秘線)으로 보고되는 게 관행이다. 한보 수사도 마찬가지였다. 1차 수사 때만 해도 검찰이 누구누구를 조사하는지, 구속 대상인지 아닌지 하는 사항들이 속속 청와대에 보고됐었다. 그런 덕분에 청와대는, 검찰이 수사 상황을 언론에 공식 발표하기 전에 미리 적절히 대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중수부장에 취임하고 2차 수사를 재개하면서 의도적으로 청와대와 검찰 간 커뮤니케이션을 단절했다.

내가 그렇게 조치를 취한 이유는 첫째, 외압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것이었다. 검찰이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청와대에서 모종의 지침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은 검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하는지 미리 파악해야 가능하다. 그것은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검찰 내부 사정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압력을 넣거나 어떤 형태로든 검찰에 대응할 수 있다. 검찰에서 어떻게 수사가 진행되는가, 모르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사전 대응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검찰의 수사 상황에 관한 정보가 새어나가 특정세력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1차 수사 때는 그런 일이 허다했다. 검찰이 누구누구에게 이러저러한 혐의를 두고 있다, 하는 이야기가 검찰의 공식 발표가 있기도 전에 먼저 보도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검찰의 운신 폭은 대단히 좁아진다. 언론에 거명된 해당 인사는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당장 무슨 비리라도 있는 것처럼 비친다. 또 실제로 비리를 저지른 사람의 경우, 검찰 상황을 파악하고는 모종의 대응책을 마련할 시간을 갖게 된다. 수사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특히 그렇게 새어나간 검찰 정보가 대부분 현철씨에게 먼저 들어갔고 현철씨가 그것을 언론에 흘려 엉뚱한 이들을 몸통으로 내세웠다는, 언론 일각에서의 심층보도도 나와 있던 터였다. 그렇게 검찰 수사 정보가 누설된 루트를 되짚어 따져보면 대부분 검찰에서 청와대에 보고하는 중간에 틈이 발견됐다.

셋째, 정경유착형 대형비리 사건에서는 당연히 정부 권력(청와대, 안기부, 국세청 그리고 경제부처)이 수사대상이 된다. 그런데 수사대상인 그들에게 모든 상황을 사전 보고하고 수사한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검찰총장, “청와대 보고해야”

김기수 검찰총장(오른쪽)과 최명선 대검차장.

4월 5일 토요일 오후 4시, 각 은행장의 배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최종 결정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검찰총장과 차장, 나, 조사를 맡았던 중수부 1과 검사들이 참석했다. 수사팀은 이날 자리에서 두 가지 의견을 준비해 총장에게 보고했다. 제1안은 이미 구속된 제일·조흥은행장 외에도 산업·외환·서울은행장을 (배임 혐의로) 구속시킨다는 것이었다. 제2안은 이 가운데 서울은행장은 불구속 처리키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결론을 압축하면 은행장들의 업무상 배임이 충분히 성립한다는 쪽이었다. 최종 결론은 그 이튿날 최상엽 법무부장관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내리기로 했다. 김 총장도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이제 장관에 대한, 사실상의 형식적인 보고 절차만 거치면 당초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 ‘액션’에 들어가게 돼 있었다.

이윽고 4월 6일 오전 10시. 한가로운 일요일 아침의 광화문. 법무부장관의 안가에서 ‘한보 각 은행장의 업무상 배임죄 적용’이란 주제로 회의가 열렸다. 최 장관과 김 총장, 중수부장인 나와 김상희 수사기획관, 중수부 1과장과 2과장, 그리고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박순용 검찰국장도 자리를 함께했다.

이미 전날 검찰총장에게까지 보고됐던 내용이어서 참석자들 간에 별다른 이견 없이 회의결과는 무난히 도출됐다. 앞서 1차 수사 때 사법처리에서 제외됐던 외환·산업·서울은행장을 구속기로 하고 제일은행장 등을 (배임 혐의로) 추가 입건하기로 한 것이다. 나아가 이런 조치를 토대로 한이헌·이석채 두 경제수석의 한보 대출 개입 여부를 계속 수사한다는 방침도 세웠다.

그런 결과가 도출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안심했다. ‘이제 해당 은행장들을 곧바로 검찰로 소환해서 결정된 내용대로 사법처리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회의 막판에 김 총장이 뜻밖의 의견을 내놓았다. 간단히 줄여 말하면 회의결과를 청와대 민정수석을 통해 ‘위’에 사전 보고하자는 것이었다.

김 총장, “절대로 번복되는 일 없을 것”

“은행장 세 명을 배임 구속하는 것은 아무래도 청와대 쪽에, 문종수 민정수석에게 미리 알리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것 같은데…. 만에 하나 청와대하고 갈등도 있을지 모르고 또 협조받을 일도 있을지 모르니까….”

김 총장의 이런 의견을 내가 받았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사안이 아니라면 이번에는 그냥 (청와대 보고 없이) 우리 검찰 차원에서 추진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혹시 청와대에서 반대한다고 하면… 검찰이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또 궁지에 몰릴 수도 있고 말입니다.

나는 그날 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회의결과를 청와대에 미리 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청와대 입장에서야 일이 수습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커지는 것을 달가워할 리 만무했다. 은행장들에 대한 배임 처리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와 김 수사기획관은 “청와대에 이야기해 봤자 수사에 도움될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반대한 것이다. 취임한 지 얼마 안 되는 최 장관은 그저 침묵을 지키는 쪽이었다. 그렇지만 김 총장은 완강했다.

“저쪽(청와대)이나 이쪽이나 이왕이면 서로가 다 좋은 쪽으로 일하자는 것이니까 별 문제 없을 거요. 그냥 절차상 보고하자는 것뿐이니 절대로 (여기서 결정된 내용이) 번복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 일만큼은 나를 한 번만 믿어주시오.”

검찰을 책임진 총수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도리가 없었다. 그날 중으로 박 국장이 문 수석에게, 검찰의 은행장 처리 방침을 알려 위에 보고되도록 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가 다 지나도록 이렇다저렇다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한 채 모처럼 초저녁에 퇴근, 귀가했다. 그런데 밤 10시가 한참 넘어 비상전화가 울렸다. 김 총장이었다.

“문 수석이 밖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와서 박 국장이 아까 늦게야 보고한 모양입디다. 그런데 문 수석이 굉장히 화를 내더라는데. 아무래도 수석들 문제도 걸려 있고 하니까… 자기는 그런 내용을 도저히 각하께 보고할 수 없다, 그랬던 모양이라.”

―아니 그쪽 비서실에서야 검찰 방침을 전달받은 그대로 위에다 보고하면 그만 아닙니까. 이미 알맹이는 다 되어 있는데 그것을 보고조차 안 하겠다는 건 직무유기 아닙니까. 그것도 법무부장관이며 검찰총장한테 상세히 보고되고 협의까지 마친 내용인데, 그것을 어떻게 해서 자기 마음대로 보고를 안 한다는 겁니까.

“직접 윗분을 모시는 입장에서야 나름 곤란한 점들이 있겠지. 어쨌든 은행장들을 당장은 불러들이지 말고 심 부장이 하루만이라도 참아 봐. 자리를 걸고 맹세하는데, (문 수석이 보고를 안 하면) 내가 대통령을 직접 면담해서라도 은행장들 구속 관철시킬 테니까. 성사 안 되면 내가 사표 낸다고.”

전화를 내려놓으면서 낙담했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처음부터 일이 이런 식으로 틀어지는구나. 이번 수사가 도대체 어느 쪽으로 흘러가려고 이러나, 답답했다.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부옇게 밝아오는 4월 7일 새벽, 일찌감치 청사로 출근했다.

구치소청문회 생중계

까맣게 타들어가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상 사람들은 그날 아침 TV가 전하는 한보 관련 또 다른 이슈에 눈길을 집중하고 있었다. 국회 한보 국정조사 특위가 한보사태 관련 증인들을 상대로 한 청문회가 그날 시작된 까닭이었다. 특히 이날에는 정태수 총회장이 당시 수감되어 있던 서울구치소에서 우리 헌정 사상 처음으로 청문회가 열리고 그것이 생중계됐다.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답변과 진술이 모호한 터에 청문회에서 정 총회장이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뻔했다. 의원들의 질문에 정 총회장은 ‘생각나지 않는다, 잘 모른다, 그런 일이 없다’ 등의 답변으로 일관했다.

국회든 검찰이든 그의 진술에서 ‘굵직한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설사 정 총회장이 그 무언가를 털어놓는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의 진술이 될 가능성이 크다. TV를 통해 무덤덤하게 정 총회장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그의 입’이 아닌, 다른 길을 통해 반드시 한보사태의 몸통을 찾아내 단죄하리라, 전의를 다졌다.

정 총회장에 대한 청문회를 시청하는데 문득 최명선 차장에게서 호출이 왔다. 그의 방으로 갔다.

“문 수석이 이쪽 사람들 고생한다고 오늘 저녁식사 내겠다는데.”

―저녁이요?

“그렇지. (법무)장관하고 총장, 그리고 중수부장, 자기까지 넷이.”

즉각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총장이 대통령 면담하겠다고 한 게 (즉, 은행장들 구속이) 물 건너갔구나, 한 술 더 떠서 아예 민정수석이 장관-총장-중수부장 라인에 직접 말뚝 박을 말도 있는 모양이고…’ 뱃속에서 와락 짜증 비슷한 것이 치고 올라왔다.

민정수석과 김상희 수사기획관 회동

“7시에, 저 옆에 리츠 칼튼 (호텔의) 일식부….”

―저는 안 갑니다. 그렇게 좀 전해 주세요.

“아 뭘 그리 고집을 피워요.”

―고집이라뇨? 지금 안 그래도 검찰이 청와대며 정치권에 끌려다니는 수사를 한다, 앞서 1차 수사 때부터 밖에서는 계속 그렇게 호된 매질을 해대고 있는데, 이런 판에 민정수석하고 얼굴 볼 일이 뭐가 있습니까. 민정수석과 중수부장이 야간에 비밀리에 회동했다, 그런 기사가 언론에 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 그러니까 비밀을 지켜야지요.”

―무슨 비밀이요? 어떻게요? 무엇을 위해서요? 어쨌든 저는 도저히 그 자리에 참석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중요한 얘기가 있다면 (김상희) 수사기획관이 저 대신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날 밤. 저쪽(리츠 칼튼)에서 사람들이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마당에 퇴근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밤 9시 훨씬 넘어 10시쯤 됐을까. 나를 대신해서 예의 저녁 자리에 참석했던 김 수사기획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팔레스호텔로 넘어와 있는데 곧바로 좀 뵈어야겠습니다.”

김 수사기획관은 “저야 이야기할 위치에 있지 않아서 듣기만 했다”면서 자기 수첩을 꺼냈다. 수첩 안에는 따로 4장의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앞서 민정수석과의 저녁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가 토씨까지 빠짐없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요지는 결국 ‘은행장들에 대한 배임 처벌은 안 된다’라는 것으로, 문 수석의 주요 발언은 이런 것이었다.

민정수석의 제동

―한보 대출이란 것이 고도의 정책 결정 아래 이루어진 것인데 은행장들이 무슨 죄가 되겠는가.

―경제정책이란 것도 모두 대통령께서 직접 지시하신 것이고 경제수석들은 보좌만 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 ○○○가 ‘만약 나에게 문제가 생기면…’하면서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은행장들을 업무상 배임으로 처리하고 한이헌·이석채를 수사한다는 것은 헌정 중단 사태, 대통령 하야까지도 몰고 올 수 있다.

―업무상 배임 문제가 가장 가벼운 것인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더 이상 지뢰밭을 밟게 할 수는 없다. 검찰만 살고 다른 쪽은 다 죽으란 소리냐.

―이 정권이 교체되고 난 뒤 나는 구속될 각오까지 되어 있다.

검찰 수사가 은행장을 넘어 청와대로, 곧 대통령 주변으로까지 확대되는 것만은 자신이 몸을 던져서라도 막겠다는 강경한 태도였다.

그런 문 수석에게 김 수사기획관이 조심스럽게 “만약 청와대에서 (은행장 건을) 막으면 중수부장이 그 기질 때문에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문 수석은 “심 부장이 뭘 어떻게 하든 그건 김 총장이 다 알아서 처리할 일”이라 답했다고 한다.

모임의 내용과 분위기를 전해 들으면서 나는 ‘결국 이렇게 끝나고 마는구나’ 싶었다. 만약 문 수석의 말처럼 은행장 배임 건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나로서는 중도하차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시점에 그냥 휙 사표를 내던지는 것은 무책임한 ‘회피’ 혹은 ‘도피’로 비칠 수도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일단 김 수사기획관에게 “구속하기로 한 은행장들을 내일 소환하지 못하면 나로서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고 속을 내비쳤다. 우울했다.

“김현철 수사는 물 건너간 것 같다”

1997년 3월 24일 심재륜 중수부장(오른쪽)과 김상희 수사기획관이 검찰청사를 나서고 있다.

한보 수사의 차석(次席) 책임자였던 김 수사기획관은 민정수석과의 회식이 있고 나서 이튿날, 그러니까 4월 8일 새벽 자신에게는 대선배인 이명재 당시 사법연수원 부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선배님, 이번에 ‘몸통’까지 가려면 아무래도 은행장들부터 치고 올라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저쪽에서 꿈쩍도 안 하는데…. 어쨌거나 위에서 막아서면 당장 중수부장도 그렇고, 검사들도 그렇고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밀어붙이는 참인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 부원장의 대답은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 사건이야 항상 어떤 쪽으로 튈지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니까, 너무 한쪽으로만 딱 정해 놓고 밀어붙이면 곤란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부임한 지 10여 일밖에 안 되는 중수부장이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지 않으냐. 물러난다 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대사(大事)를 이뤄내려면 섣불리 결정 말고 변화 속에 묘수를 찾아보는 게 좋지 않을까.”

총장 및 차장과의 그날 아침회의에 들어가기 전 김 수사기획관이 먼저 내 방에 찾아왔다. 행여 내가 돌발적인 기자회견을 하거나 당장 은행장들을 소환할까 봐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부장님, 사태의 추이를 보기 전에 기자회견을 하거나 하는 것은 시기상조입니다. 한번 쏟아부으면 다시는 주워담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어느 쪽으로 어떻게 결정하시든 일단 총장 이야기부터 들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김 수사기획관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 사실 내 윗도리 속주머니 속에는 이미 사직서가 들어 있었다. 아침회의 때 만약 김 총장이 거듭 은행장 소환을 반대하거나 연기하자고 할 경우, 그것을 바로 꺼내놓을 작정이었다. 그러고는 앞서 본 것처럼 회의가 열리고, 총장과 차장이 은행장 소환을 말리고, 내가 격앙해 사표를 낸다 하고, 내게 약속했던 대로 총장도 사표를 내라 다그치고, 이런 사단이 벌어졌던 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총장실을 나오는데 옆의 김 수사기획관이 거기다 무쇠 한 덩어리를 더 얹는다.

“사실 어제 나온 얘기 중에 부장님께 말씀 못 드린 게 있는데, 김현철 쪽(수사)도 물 건너간 것 같습니다. 다른 얘기들보다 ‘김현철 수사 꿈도 꾸지 마라’가 먼저 나왔습니다.”

“은행장 대신 정치인들 합시다”

과연 김현철이 ‘몸통’인지 아닌지는 모를 일이지만, 뭐가 됐든 아예 그쪽이나 청와대 쪽으로 가는 수사는 ‘다 안 된다’는 뜻이었다. 나는 일단 중수부 1, 2, 3과장을 모두 내 방으로 불렀다.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자 역시 다들 침통한 얼굴이었다. 이어진 말은 이런 것이었다.

―중수부장께서 먼저 사표를 내면 모든 검사가 흥분할 것이다. 차라리 수사팀 전원을 거듭 교체해서 또다시 수사를 해보라고 하자.

―사태가 이렇게 됐다면 당연히 총장부터 사표 내야 한다. 총장부터 사표를 내는 게 마지막 명예회복의 길이다.

―중수부장 혼자 사표를 내는 것은 개인에게나 조직에나 모양새가 좋지 않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꾹 참고 몇 번이고 위를 들이받아서 우리 뜻을 관철시켜 갈 길을 가야 한다.

전반적으로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사람을 통해 과천(법무부장관) 쪽 분위기도 타진해 보았다. ‘이쪽 얘기나 저쪽 얘기나 다 일리가 있지만… 검찰만 살겠다고 어떤 액션을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검찰이야 검찰의 길을 가야 하겠지만 저쪽(청와대) 사람들도 죽겠다고 난리다. 난감하다. 많이 생각해 달라’는 것이었다.

힘센 상대를 수사할 때면 늘 있는 일이요, 충분히 예상도 했던 난관이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는 몰랐다. 나 한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느냐, 그것에 따라 상황은 여러 가지로 달라질 것이었다. 도통 일머리를 잡지 못하고 점심식사도 거른 채 고민을 거듭했다. 그런데 오후 몇 시쯤인가, 최 차장이 “좀 보자”며 전화를 걸어왔다.

“이래저래 중수부 일이 원체 많다 보니 신경이 많이 쓰일 겁니다. 어떻게든 업무를 좀 줄여나가는 방안을 검토할 테니…. 그건 그렇고, 아까 아침에도 잠깐 얘기했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래도 정치인들 수사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정치인 리스트 쪽으로 국면을 돌리자고 총장님하고도 이야기는 다 됐거든.”

마지노선, 넘어야 할 산

정치인 리스트로 수사방향을 돌린다? 나는 솔깃했다. 아침에는 경황이 없어 그냥 지나쳤지만 이는 분명히 뜻밖의, 게다가 내가 절실히 바라던 제안(?)이었다. 그동안 김 총장은 ‘정태수의 일방적 진술’에만 의존한 정치인 수사는 진행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어왔다. 그런데 은행장 배임 문제를 덮으려 새로운 제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침묵으로 동의했다.

은행장 배임 부분을 건드린 덕분(?)에 한보 수사는 일단 은행장 차원을 넘어 훨씬 더 크고 넓은 쪽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차장실을 나오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이 앞으로 또 다른 소리를 하면 그때마다 은행장들 배임 수사를 하겠다, 고집 부려야겠구나~’

은행장들이 배임 혐의로 허물어지면 그 다음엔 청와대 몇몇 경제수석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곧 대통령도 위험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까닭에 은행장 문제는 ‘저쪽’에서는 어떻게든 지켜내야 할 ‘마지노선’이었고 현장의 우리 수사팀에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