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베풀 여력이 있는 사람이 인색하면 사회는 험악해지고, 험악해진 사람들은 합심하여 완력(腕力)으로라도 빼앗으려는 유혹을 받기 쉽다. 이것이 바로 베풀지 않으면 빼앗긴다는 역설의 핵심이다.
⊙ 현금 10억원 포함해 30억원의 자산을 보유해야 한국에서 부자 소리 들어
⊙ 부에 대한 불평등이 계급갈등으로 촉발될 수 있어
⊙ 토지소유의 양극화가 한국사회 양극화의 원인
⊙ 부와 부자의 상징인 강남은, 한국사회에서 상류층 요새도시 내지 벙커도시를 지칭
⊙ 강남좌파는 하나의 취향일 뿐, 부자들의 자기반성을 찾아보기 어려워
⊙ “한국의 기업과 부자들은 자신이 얻은 부를 사용하는 데는 인색하고 서툴렀다”
⊙ 현금 10억원 포함해 30억원의 자산을 보유해야 한국에서 부자 소리 들어
⊙ 부에 대한 불평등이 계급갈등으로 촉발될 수 있어
⊙ 토지소유의 양극화가 한국사회 양극화의 원인
⊙ 부와 부자의 상징인 강남은, 한국사회에서 상류층 요새도시 내지 벙커도시를 지칭
⊙ 강남좌파는 하나의 취향일 뿐, 부자들의 자기반성을 찾아보기 어려워
⊙ “한국의 기업과 부자들은 자신이 얻은 부를 사용하는 데는 인색하고 서툴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부에 대한 놀라운 진실은,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잘못이 아니라 참으로 마땅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중략) 가난은 신이 인간을 위해 무한하게 베풀어 놓은 자원 앞에서 스스로 등을 돌림으로써 저주를 받는, 일종의 지옥이다. 또한 가난은 불편하고 자존심 상하는 경험이기도 하다. 가난은 도둑과 살인자들이 득실대는 감옥이다.…>
― 《부의 법칙》(2003), 캐서린 폰더 지음, 국일미디어 刊
사람들은 누구나 부(富)를 꿈꾼다. 가난이 지옥일 수 있다는 사실은 가난을 겪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누구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듯, 누구나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처럼 양극화가 심한 나라에서 부자가 되는 길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바늘을 뚫기 위해 부러진 허리를 세우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기꺼이 ‘새(early bird)’를 자처한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부자란 누구인가?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분석한 <2011년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부자는 ‘금융자산(資産) 10억원 이상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지난해 말 기준 13만명으로 전년(10만8000명) 대비 20%가량이 늘어났다고 한다.
10억원을 부자의 기준으로 잡은 까닭은 서양의 예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미국 등 해외에서 거론되는 부자의 재산은 100만 달러, 즉 밀리언에어(millionaire)다. 한국 돈으로 약 10억원가량이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관계자의 말이다.
“한국 부자의 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에 일시 감소했으나 한 해를 제외하고는 2006년 이후 매년 20% 이상 증가할 정도로 크게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한국 부자는 금융 및 기타자산에 비해 부동산 비중이 높은 자산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총자산 규모가 클수록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죠. 이는 일정 금액까지만 금융자산으로 운용하고 나머지는 부동산에 투자하는 자산관리 행태로 이해할 수 있어요. 10억원 이상 금융자산 보유자들의 평균 자산은 34억원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부자들은 부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아 본인을 부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며, 4명 중 3명은 최소 50억원 이상의 자산이 있어야 부자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를 학문으로 연구하는 ‘부자학연구학회’ 한동철(韓東哲·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 회장은 “한국에서 부자로 불리는 기준은 서양보다 높아 30억원의 자산을 보유해야 한다”고 했다.
30억원은 동산 10억원과 부동산 20억원의 평균자산을 더한 것으로, 부자들이 생각하는 부의 기준(50억원)보다는 낮지만, 서구(10억원)보다는 높음을 알 수 있다. 한 교수는 “30억원이란 액수는 한국의 높은 물가상승률이 반영됐을 뿐만 아니라 물질에 특히 더 높은 가치를 두는 한국인의 가치관이 투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럽은 부의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르고, 미국 역시 100년이 훨씬 넘지만 우리나라는 광복 후 부자들이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지요. 그러나 왜 부자가 돼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부족했고, 부자가 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적었습니다.”
한국인의 가치관 속에 투영된 부와 부자에 대한 이미지는 자산의 규모를 넘어 훨씬 복잡하다.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을 건네면서도, 부자들을 경원(敬遠)한다. 심지어 부자, 특히 재벌 기업가를 공공연하게 증오(憎惡)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본가(資本家)’의 개념에는 탐욕과 착취의 악마적 의미가 포함돼 있다. 한국사회에서 부자는 그런 자본가의 속성을 ‘비슷하게’ 담고 있다.
부의 불평등 증가는 계급 내 불평등 결과
한국사회에서 반(反)부자 정서는 과거에 비해 얼마나 달라졌을까. 완화되어 가고 있을까, 경직되어 가고 있을까.
한나라당 이주영(李柱榮) 정책위의장은 지난 9월 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비정규직 문제와 양극화 등으로 인한 사회갈등은 이제 폭발 직전에 와 있다”며 “빨리 가려면 혼자 가면 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이젠 ‘빠른 성장’이 아니라 ‘장기적인 성장’이 정책기조”라고 말했다. ‘성장’ 중심의 정책기조를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일종의 정책의 ‘좌향좌(左向左) 선언’이었다.
실제로 부의 기준이 서구보다 높은 한국사회에서 불평등 수준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 동(東)아시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申光榮) 교수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불평등 증가 추세는 ‘계급 간 불평등’의 증가와 더불어 ‘계급 내 불평등’의 증가에 따른 결과라고 한다. 이 같은 불평등 증가는 소득격차 때문이다. 신 교수는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 계급의 규모가 더 커진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불평등 수준이 높아진 것은 양극화가 심화한 것을 의미한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빈자(貧者)는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인의 부와 부자에 대한 복잡한 심리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노동계급)들의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1997년 IMF 이후 노동시장 유연화가 급속하게 이뤄지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수가 증가하고 있고 지금도 그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2009년 8월에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855만명(임금노동자의 51.9%), 정규직은 793만명(48.1%)으로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나타났다. 비정규직 수는 2001년 8월 737만명에서 2009년 3월 855만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비율은 56.6%(2002년)를 정점으로 51~56% 안팎에서 고착화되고 있다.
신 교수는 “비정규직은 고용 불안정뿐만 아니라 저임금과 낮은 복지로 근로빈곤층의 상당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여기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저임금 하층 노동자들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고 말한다.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구인회(具仁會) 교수는 지난해 <비정규 노동과 근로빈곤의 관계>라는 논문을 통해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빈곤율은 11.3%로, 정규직 빈곤율 3.3%와 비교해 약 4배 가까이 높았다”며 “비정규직 월 임금 역시 정규직의 54.6%로 큰 격차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비정규직이 한국의 빈곤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전체 노동자들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은 권력자원(노조)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소외됐다. 즉 분배 차원(임금)과 국가에 의해서 이뤄지는 재분배 차원(조세와 복지)에서도 박탈을 경험하고 있다. 시장과 국가에 의해서 배제된 노동계급의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정치권의 ‘무상’ ‘공짜’ ‘반값’ 포퓰리즘은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부자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평상심(平常心)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신광영 교수의 주장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계급 문제는 조직화된 형태보다 조직화되지 않은 형태로 경험하게 됩니다. 최근 용산참사나 전세난과 같은 사회현상은 한국사회에서 드러나는 제도나 정책상의 공정성 정도를 드러냈지요. 일반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직간접으로 보고 느끼지만 그런 경험이 분산돼 있기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공정함과 불리함에 대한 누적된 경험과 감정이 사회적 사실로 존재하는 경우, 계급갈등이 예상치 못한 시기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에 대한 불평등이 어느 날 갑자기 계급갈등으로 촉발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계급갈등이 집권 여당에 대한 부표(否票) 심리로 작동하고, 한국사회의 부와 부자를 ‘부패한 자본과 자본가’로 느끼게 만든다. 사실, 불평등의 의식은 생애과정을 통해 쌓인 누적적 불평등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가난한 이들이 부와 부자에 대해 갖는 경원의 시선은 누적적 불평등의 원망(怨望)이 오랫동안 지속돼 온 결과가 아닐까.
‘마음대로 돈 쓸 권한’ 對 ‘제대로 쓸 책무’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黃相旻) 교수는 최근 펴낸 《한국인의 심리코드》(추수밭 刊)에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부자는 ‘돈을 번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돈을 쓰는 방식’을 통해 그 사람을 부자로 인식하려 한다. 다시 말해 잘 베푸는 사람이 부자이지,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부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부정적인 이유는 자본주의를 부정한다거나 부자를 질시해서가 아니다”라며 “단지, 우리 사회의 부자들이 자신이 가진 돈을 ‘정승처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사회의 리더인 특권층 부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너무나 부족했다. 베풀지 못했기 때문에 수전노라는 손가락질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특히 벼락부자, 땅부자가 많은 한국의 부자들은 베풀기보다는, 남의 발을 씻기기보다는 자신의 발을 씻겨 달라고 거드름을 피웠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부자라서 많이 누리기보다 많이 베풀어야 하는 책임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박효종(朴孝鍾) 교수는 “특권층 리더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로마 귀족들에게서 현저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로마 부자들과 귀족들은 평민들에 비해 많은 특권을 누렸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책임감도 철저했다. 전쟁이 나서 나라를 지킬 때는 언제나 평민들보다 30% 이상 희생자를 많이 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말 타 본 사람, 즉 귀족들만 전쟁에 나가 말을 탈 수 있었다. 그의 주장이다.
“한국의 특권층들은 어떤가요? 이들은 봉사하는 리더나 우선승차자인 퍼스트 라이더(first rider)가 아니라 무임승차자인 프리 라이더(free rider)로 살아 왔다는 비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어요. 이들의 행태를 보면 특권을 즐겼을 뿐, 조국과 공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명예로 간주하기보다 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질투와 시기의 패러다임
어떤 사회건 질투란 있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속언을 유행시킬 만큼 질투는 개인의 속성이기도 하다. 이 질투의 감정은 인간의 능력이 동일하지 않은 한, 또한 노력에 대한 결과나 보상이 다른 한 우리가 지고 살아야 할 업보(業報)다. 한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조차 살육의 질투가 존재한다는 것은 카인이 아벨을 살해한 후 증명됐다. 박 교수의 말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플 뿐 아니라 친형제가 땅을 사도 배가 아픈 경우처럼 ‘불합리한 질투’가 있고, 노력의 양에 따라 보상이 차등지급될 때 느끼는 ‘합리적인 질투’도 있지요. 이러한 질투를 잠재우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계층이 힘닿는 한 베푸는 방법밖에 없어요.
베푸는 것은 ‘자선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보험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남에게 베풀 여력이 있는 사람이 인색하면 사회는 험악해지고, 험악해진 사람들은 합심하여 완력(腕力)으로라도 빼앗으려는 유혹을 받기 쉽지요.”
박 교수는 “이것이 바로 베풀지 않으면 빼앗긴다는 역설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부자와 부패한 보수주의자들이 베풀기를 주저하자, 이제 통째로 빼앗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베풀지 못한 탓에 한국의 부자와 기득권 주류들은 선거의 역풍(逆風)에 노출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부자와 기성 정치권이 복지 포퓰리즘을 아무리 걱정한들 가난한 이들의 귀에는 부자의 투정으로 비친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부패한 부자의 주머니를 털어 빈자를 돕겠다’는 좌파세력에게 민주주의 의제도 빼앗겼고, 보수라고 부르는 이념의 가치도 빼앗겼으며, 남북통일의 열정도 빼앗겼다.
부자들에 대한 분노는 집권 여당 내에서도 존재한다. 한나라당 홍준표(洪準杓) 대표는 서슴없이 “한국사회의 주류는 비겁하고 탐욕적”이라며 “주류들이 자기 것을 뺏긴다고 생각하니 변화가 없다. 자기 것을 나눠준다고 생각하면 저항이 없을 텐데, 뺏긴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주류층에 속하는 그가 주류를 욕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홍 대표는 심지어 “한국사회 주류들은 과연 그분들이 부 축적과정에서 정당성이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고도 했다. 홍 대표가 말하는 ‘주류’는 베풀지 않는 부자와 토지 자본가, 부동산 소득자를 의미한다(《월간조선》2011년 9월호 참조).
한국사회의 부와 부자의 상징, 江南 공화국
한국사회의 부와 부자를 상징하는 말이 있다. 바로 ‘강남(江南)’과 ‘강남사람’이다. 강남에는 값비싼 집(특히 아파트)이 있고, 그 집에 사는 부자가 있으며, 이들을 떠받치는 화려한 교통·복지·소비·사교육 시스템이 있다. 한국인은 신분상승을 위해, 자녀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몰려간다. 한 사회학자는 이를 ‘중증급성 강남증후군(severe acute kangnam syndrome)’이라 부른다. 이 병원체는 전염성이 아주 높다고 한다.
포스코 출신으로 정치에 관계하다 최근 10년 넘게 아파트 짓는 일에 관여해 온 대우엔지니어링 조용경(趙庸耿) 대표·부회장은 몇 해 전 ‘강남 권력’의 실체를 이렇게 묘사했다. ①한국 고급 아파트의 65.9%가 강남에 몰려 있고 ②한국의 파워 엘리트 중 절반 이상이 강남 지역에 집중 거주하고 있으며 ③강남의 개원의 수는 서울시내 총 개원의의 28%를 차지하고 ④전국 성형외과 개원의의 절반가량이 강남에 밀집해 있으며 ④서울신용보증재단의 지원이 70% 이상 강남 지역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용경 부회장은 “이미 강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증상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환각에 빠져 끊임없이 경제적 신분상승 욕구를 추구한다는 점”이라며 “그러나 경제적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강남 사람들 중 일부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하고, 더러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려는 편집증상을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반면 “‘강남증후군’에 감염되고도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의 대표적 증상은 피해의식이며, 조금 악화되면 ‘내 자식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남으로 진출시키겠다’는 욕구로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강남과 비(非)강남의 구분이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구분과 일치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대한생명 경제연구원 최성환(崔聖煥) 상무의 말이다.
“일단 강남에 산다고 하면 웬만큼 재산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지방 사람들조차 누가 강북에 산다고 하면 ‘그 나이에 아직까지 강남에 못 사느냐’고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저녁약속을 하면서 ‘중계동 은행사거리에 근사한 레스토랑이 하나 생겼다’고 하면, 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얼굴색이 달라지는 것을 안 봐도 알 수 있지요. 반면, 청담동이나 방배동 외진 골목의 와인바에서 만나자고 하면 금세 얼굴이 밝아집니다. 일부 강북사람들은 이제 한강을 ‘건널 수 없는 강’ 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통계적으로도 고가 아파트와 종부세 납부자의 80~90% 이상이 강남에 몰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자 하면 강남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고 있지요.”
이제 강남은, 계층을 뛰어넘는 오버클래스(over class)의 개념으로 부상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강남은 집값이 비싸기도 하지만 교통과 학원, 쇼핑, 레저 및 문화공간 등 사회적 인프라가 잘 갖춰졌다는 점 외에도, 사는 계층들이 학력·재산 정도 등에서 다른 어떤 지역에 비해 ‘동질적(homogeneous)’이라는 점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계속된 최 상무의 주장이다.
“울산과 마산, 창원과 같은 지방 대도시도 강남과 같은 지역 또는 신도시 지역이 있지요. 이들은 강남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지방이란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학교, 학원, 문화적 공간 등에서 강남에 크게 못 미치면서 강남은 부자 중의 부자, 초부유층(HNWI·High Net Worth Individual) 중에서도 ‘수퍼 HNWI’ 또는 ‘수퍼 리치’로 볼 수 있지요.”
부와 부자의 상징인 강남은, 한국사회에서 상류층 요새도시 내지 벙커도시를 지칭한다. 그들이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거치며 흘린 땀과 노력의 결실이 강남을 요새화시켰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이를 ‘배타의 경쟁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위계와 배타의 성채(城砦)는 선망과 질투를 한 몸에 받기 마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 안 거주자들의 부와 그 부의 정당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의 부가 정당한지에 대해 답할 차례가 왔는지 모른다.
불로소득, 나쁜 부자의 원천은 땅
한국인의 부와 부자를 논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 부동산이다. 부동산이라 불리는 주택문제는 따지고 보면 토지문제다. 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減價)하는 데 비해 토지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준공한 지 30~40년이 넘은 강남의 재건축 대상 아파트를 보라. 건물가치는 형편없지만 거래가격은 지방의 새 아파트를 서너 채 구입하고도 남을 정도다. 바로 토지가치 때문이다. 고려대 철학과 이승환(李承煥) 교수의 지적이다.
“부동산 문제의 근본원인은 부동산의 소유 및 처분 시에 발생하는 불로소득에 있어요. 수많은 사람이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고 수많은 기업이 기술개발이나 정상적인 생산활동보다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는 것도 바로 불로소득 때문입니다. 얼마 전 드러난 부산 저축은행 부실사건은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주는 한 단면에 불과하지요. 정상적인 기업활동에서 얻는 이익보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얻게 되는 이익이 더 크니까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국세청이 2000~2005년 사이에 매매된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34평형)를 조사한 결과, 이 기간 내 거래된 2351채의 아파트 중 60%인 1425채의 소유주가 주택을 3채 이상 보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 교수는 “대한민국 전체 가구의 절반 가까이 되는 무주택자들은 근면하게 일해 얻은 노력소득을 다주택 소유자에게 전·월세금으로 바치고, 다주택 소유자는 일하지 않으면서도 전세금 이자와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불로소득을 취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치 봉건시대에 소작농이 힘들여 노동한 결과물을 대토지 지주에게 고스란히 바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토지는 강남의 문제만이 아니다. 2005년 말 기준 우리나라 국민의 토지소유 상위 1%(약 50만명)가 전체 사유지의 57%를 소유하고, 토지소유 상위 10%(약 500만명)가 전체 사유지의 98.3%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이태경 著, 《위기의 부동산》). 수많은 고위 공직 후보자들이 국회 청문회에서 진땀을 흘리는 것도 바로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절대농지 불법소유 등의 땅 문제 때문이다.
한국은행 사회경제실 남상호(南尙昊) 실장의 논문 〈가계자산 분포와 불평등도의 요인별 분석〉(2007)에서도 확인된다. 그에 따르면 1999년에는 상위 1% 계층의 자산점유율이 9.6%였는데 2006년에는 16.7%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범위를 좀 더 넓혀 상위 10% 계층의 자산점유율을 보면 1999년에는 46.2%였는데 2006년에는 54.3%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남 실장은 “가구 순자산의 불평등도를 구성요소별로 분석해 본 결과, 부동산 자산의 불평등 기여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다시 말해 부동산, 더 정확히 말해 토지소유의 양극화가 전체 양극화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非강남의 심리, 이웃효과
강남에 대한 비(非)강남의 질투를 ‘이웃효과(neighbors effect)’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는 “집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주변의 집들이 똑같이 작다면 그것은 거주에 대한 모든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킨다. 만약 작은 집 옆에 궁전이 솟아오르면 그 작은 집은 오두막으로 위축된다”고 했다. 강남이 있는 한 강북과 지방은 모두 변방과 오두막으로 전락되고 만다. 강남은 부의 척도이자, 비교대상, 메인스트림이 되어 비강남 사람들의 일상과 감동의 소재들을 시시하게 만들고 활력을 잃게 한다.
지난해 3월 영국 위릭대학 크리스토퍼 보이스 교수가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저널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영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7년 동안 수입과 삶의 만족도를 추적했더니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과 만족감은 소득 크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보이스 교수는 “누군가 더 큰 집을 사게 되면 현재 사는 집에 불만을 갖게 되고 더 큰 집을 쳐다보게 된다. 돈을 인생의 목적처럼 추구하는 사람은 행복해지는 정도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레이야드(R.Layard) 영국 런던정치경제대 교수의 연구도 흥미롭다. 미국 하버드대 학생을 대상으로 “당신은 연봉 5만 달러를 받고 남들은 당신의 절반만 받는 상황과, 연봉 10만 달러를 받고 남들은 당신의 두 배를 받는 상황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응답자 대부분이 “5만 달러를 받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남 잘되는 건 싫다는 심리와 함께 상대적 박탈감보다 상대적 우월감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레이야드 교수는 “수입의 증가와 행복은 비례하지 않으며, 타인과 자신의 수입을 비교하는 것이 불행의 지름길”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게 바로 ‘이웃효과’다. 그 어떤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이웃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평가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를 말한다. 비강남이 느끼는 ‘이웃효과’의 박탈감은 불가피한 것일지 모른다. 서울여대 한동철 교수는 “비강남 사람들의 질투와 박탈감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지만 한국인의 특성상 남의 일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교수의 말이다.
“제가 몸담고 있는 부자학회에서 강남, 비강남의 벽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는데 쉽지 않아요. 강남 부자들의 자녀와 비강남 장애우를 데리고 1박2일 캠프를 기획한 일이 있는데 잘 안됐어요. 아주 파격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서로 교류하는 일이 불가능할지 몰라요. 강남을 대표할 만한 사람과 비강남 지역 사람이 의형제를 맺거나 강남구에서 걷히는 세금 일부로 가난한 지역의 전기료를 대납하면 어떨까요? 또 비강남인에게 강연을 통해 정당하게 돈 버는 법을 가르치면 어떨까요?”
대한생명 경제연구원 최성환 상무는 “끼리끼리 모여 사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비용이 더 들더라도 강남에 살겠다는 사람을 막을 수 없는 노릇 아니냐”며 “앞으로 강남은 진입장벽이 더 높아지고, 그들만의 리그, 또는 그들끼리만 교류·소통하는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남 ‘취향’ 좌파의 등장이 강남의 변화?
그런데 다는 아닐지라도 부자들의 성채인 강남에서도 변화의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강남 좌파’가 등장한 것이다. 강남 좌파는 강남에 살면서 좌파적 발언을 한다 하여 붙인 말이다. 다만, 가난한 좌파였다가 나중 부자가 되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부자가 좌파가 되어 ‘취향 좌파’의 모습을 띠는 것인지는 좀 더 규명이 필요하다.
지난 4·27 재·보궐 선거에서 경기도 성남 분당을 지역에 민주당 손학규(孫鶴圭) 대표가 당선되자 ‘분당 좌파’라는 말까지 생겼다. 선거에서 패한 청와대와 여당은 부자들의 ‘좌향좌’에 충격에 빠졌다.
강남 좌파와 비슷한 말로 ‘리무진 리버럴’이란 말이 있다. 미국 사회에서 ‘부유한 좌파’를 의미한다. 이들은 입으론 분배, 평등 같은 가치를 외치면서 고급차를 타고 다닌다. 리무진 리버럴은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위선을 비꼬는 뜻이 강하다.
기자는 강남 좌파들의 자기고백을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보았다.
“연봉이 1억원을 훌쩍 넘어도 스스로 강남 서민이라 생각합니다. 국산 고급차를 타는 사람은 외제차를 타지 않기 때문에 강남 좌파라 불리기에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구독하려면 눈치가 보입니다. 경비원들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부자였던 체 게바라처럼 순수한 좌파가 강남에서 나오길 기대합니다.”
“종부세 때문에 일 년에 4번 가던 해외여행을 2번으로 줄일 수도 있고 벤츠 S클래스 사려다가 VW페이톤으로 눈높이를 낮출 수도 있습니다. 그런다고 큰일 나지 않습니다.”
“분당과 과천에 집이 한 채씩 있지만 합쳐도 강남 평균 집값에 못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연봉 7000만~8000만원, 아내가 5000만원이니 억대는 넘는군요. 이것저것 감안하면 강남 좌파의 제일 아래 단계인 듯 ….”
“저는 ‘영혼 없는’ 공무원 좌파입니다. 실천은 내 팔자가 아니라 생각하고 뒤에서 구시렁대는 공무원 좌파지요.”
강남 좌파 현상을 두고 한 사회학자는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와 같은 본격적인 취향 좌파가 우리 사회에 등장하고 있다”고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어쨌든 강남 좌파의 특징은 자본주의에 아주 비판적이다. 스스로 자본주의의 단맛을 잘 알고 몸으로 느끼고 살지만, 정신은 분배·인권·평등 같은 가치를 중시한다. 그래서 사회주의식 자본주의 복지모델인 유럽식 복지국가를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가 지난 2월 25일 강남 3구에 주택을 보유한 중산층 이상 시민 109명에게 ‘강남 좌파들이 진보적 이념을 지지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39.4%가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꼽았다. 이들에게 “강남 좌파의 진보적 성향이 허위 의식과 지적 허영의 발로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응답자의 57.8%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고 42.2%는 비판을 수긍했다고 한다.
강남 좌파는 이명박(李明博) 정권 출범에 기여한 지식인 그룹인 ‘뉴 라이트(New Right) 연합’을 연상케 한다. 부패한 보수 대신, 종북적(從北的)이고 반(反)시장적인 좌파 대신, 새로운 우파의 기치를 올리자는 게 뉴 라이트 운동이었다.
MB의 친서민·반기업 행보의 속뜻은…
뉴 라이트는 MB 정권 출범의 전위대 역할을 했지만 출범 이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득권 세력이 돼 권력 잡기에 혈안이었다. 여기에 실망한 강남 사는 지식인들이 “우파가 이래선 안 된다”며 왼쪽을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 좌파를 ‘뉴 레프트(New Left)’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이들의 ‘좌향좌’ 성향은 위선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윤창현(尹暢賢) 교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과실을 다 따먹고 나서 그 체제를 부인하려는 발언은 위선적이 아니냐”고 강남 좌파를 공개 비난하기도 했다. 자녀교육, 재테크, 소비행태 등에서는 말과 행태가 다르다는 얘기다. 윤 교수의 지적이다.
“강남좌파는 미국의 ‘리무진 리버럴’의 한국버전으로 봐야 합니다. 체제에 대한 애정이 없이 체제가 주는 과실을 향유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나누자. 그러나 세금은 네가 내라’는 식의 접근도 관찰되는바, 뼛속까지 좌파는 아닌 듯 보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반기 들어 추진 중인 ‘공정사회’ ‘공생발전’ 담론은 불의(不義)를 대물림하는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대통령과 참모들의 발언도 대개는 부와 부자에 대한 언급, 즉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다룬다.
‘親서민’의 핵심은 富의 재분배
이명박 대통령은 “‘공정한 사회’가 기득권자에게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며 ‘공정사회’ 지표의 방향을 친(親)서민으로 잡았다. 이 대통령은 “공직사회가, 권력을 가진 자가, 잘사는 사람이, 정부와 여당이 많은 고통과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대통령의 심중(心中)에 정통한 김영수(金永壽)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은 좀 더 구체적이다. 김 비서관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노동을 하고 다른 임금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말했다. 노동계급 간 불평등 문제를 다루겠다는 의미다. 또 “시장을 유지하면서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은 가진 사람들의 책임이다. 워런 버핏의 기부운동 같은 것도 공정한 사회를 위한 수단”이라고도 했다.
한나라당과 정부는 지난 9월 7일 고위 당정청 회의를 열어 소득세와 법인세 최고 구간에 대한 추가 감세를 중단하되 중소기업은 당초 계획대로 감세 혜택을 주기로 했다. ‘MB노믹스’의 핵심이었던 ‘부자감세’ 정책은 힘을 잃게 됐다.
한나라당 비정규직특별위원회와 정부는 이틀 뒤인 9월 9일 당정협의를 갖고 현재 정규직 임금의 57% 수준인 비정규직 임금을 장기적으로 80%로 점차 늘려 나가기로 했다. 또한 대기업 정규직 노조와 사측이 단체교섭을 체결할 때 비정규직 처우 개선안을 의무적으로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MB 정부의 ‘친서민, 반기업’ 행보는 기업 입장에서 볼 때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한나라당 정책위 고위 관계자는 “한국의 기업과 부자들이 밤낮으로 일해 경제발전을 견인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다”면서도 “그럼에도 한국의 기업과 부자들은 자신이 얻은 부를 사용하는 데는 인색하고 서툴렀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재벌과 부자들은, “정경유착은 물론이고 기업 내부에서 벌어지는 변칙상속이나 경영권 세습 등은 국민들에게 ‘가진 자의 위선’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서구사회에서 이미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공익적인 기부활동이나 청부(淸富)의 전통도 여전히 미미하다. 김만제(金滿堤) 전 경제부총리의 말이다.
“우리 사회가 부와 부자를 곱지 않게 보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동안 가지지 못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경쟁을 근본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본질은 어쩔 수 없지만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도 필요하지요. 최근 선거의 이슈가 성장보다 분배, 복지가 중심이었던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어쨌든, 이 대통령의 이런 의지에 화답하듯 정몽구(鄭夢九)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8월 28일 국내 개인기부 사상 최대 금액인 5000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정 회장은 이번 기부금을 저소득층 자녀들의 교육에 집중적으로 사용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사흘 뒤인 8월 31일 이 대통령이 30대 대기업 총수들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기업인들은 “중소기업과의 공생발전의 중요성에 공감한다” “공생발전을 위해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고 육성하겠다” “중소기업과 협력을 강화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화답했다.
달라진 재계의 반응, 과연 따라올까?
이런 재계의 반응은 불과 반년 전과 크게 다른 것이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출신의 곽승준(郭承俊)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이 지난 4월 25일 “324조원인 국민연금을 신(新)성장동력 투자에 동원하겠다. 또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을 최대한 행사하겠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재계는 화들짝 놀라는 분위기였다.
사실 국민연금의 삼성전자 지분(5.0%)은 삼성생명(7.45%)에 이어 두 번째로, 이건희 회장(3.38%)보다도 많다. 국민연금은 비록 국가 지주회사이지만 삼성전자의 2대 주주로서 정부 입김을 기업에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또 “신성장동력 투자에 동원하겠다”는 표현도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신사업을 ‘국가사업’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이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현대차와 삼성, LG, SK 등 100여개 기업이 주주인 《한국경제신문》은 지난 4월 27일자 사설을 통해 ‘(곽 위원장의 발언은) 한국 시장경제를 죽이고 기업가 정신을 훼손하며 잘해도 국가자본주의, 잘못하면 국가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열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한다’고 비난했었다.
“대기업의 초과이익을 협력 중소기업과 나누자”는 정운찬(鄭雲燦) 동반성장위원장의 구상 역시 반기업 정서라는 지적이 많았다. ‘초과이익공유제’란 대기업이 예상보다 많은 초과이익을 냈을 경우 협력사에도 이익의 일부를 돌려주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물건값(MB물가)을 누르고, 기업이 이윤을 혼자 다 먹지 말라는 압력이 ‘반시장적, 반자본주의적’으로 보일지라도 적어도 ‘반사회적, 반윤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게 국민정서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는 “한국인이 가진 부자의 심리코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설은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존경받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존경받는 부자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베풀었느냐의 문제입니다. 베풀 수단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베풀면 됩니다. 굳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가진 것을 남과 나누려 한다면 그는 존경받는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황 교수는 “정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잘 쓰는 ‘부자 만세’의 심리가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부자를 많이 만들어 낼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탐색 계속해야
정부 여당의 정책전환은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 제도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국가체제다. 자본주의는 궁극적으로 개인들의 자기이익 추구 활동이 서로 조화를 이뤄 전체 사회가 움직이고 유지된다는 이상(理想)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재산에 대한 권리가 재산의 형성에 공헌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을 중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효율성과 자유, 경제성장 면에서 성과를 냈지만 경제의 불안정성과 빈부격차 면에서의 약점은 해결할 수 없었다.
숙명여대 영문과 여건종(呂健鍾) 교수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끌어안고 가기 위해 자본주의에 대한 탐색은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막 등장했던 초기 산업자본주의 단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풍요로운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효과적인 제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안정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제도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모순을 규명하고 수정하는 노력을 중단해선 안 된다. 이상배(李相培)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의 말이다.
“재벌과 대기업의 오만, 고위직 공무원의 염치없는 돈 욕심이 자본주의를 멍들게 합니다. 따뜻한 자본주의는 성장과 효율, 경쟁의 물신(物神)체제를 옹호하는 ‘자유시장 주주(株主)자본주의’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대신 함께 나누고 부족한 것을 메우며 사회안전망을 튼튼히 구축하는 사회를 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진행형이 틀림없어요. 한국사회의 부와 부자에 대한 시각도 이와 함께 변화될 게 틀림없습니다.”⊙
― 《부의 법칙》(2003), 캐서린 폰더 지음, 국일미디어 刊
사람들은 누구나 부(富)를 꿈꾼다. 가난이 지옥일 수 있다는 사실은 가난을 겪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말이다. 그러나 누구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듯, 누구나 지옥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처럼 양극화가 심한 나라에서 부자가 되는 길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려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 바늘을 뚫기 위해 부러진 허리를 세우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기꺼이 ‘새(early bird)’를 자처한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부자란 누구인가?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분석한 <2011년 한국 부자 보고서>에 따르면, 부자는 ‘금융자산(資産) 10억원 이상을 가진’ 사람을 뜻한다. 지난해 말 기준 13만명으로 전년(10만8000명) 대비 20%가량이 늘어났다고 한다.
10억원을 부자의 기준으로 잡은 까닭은 서양의 예를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미국 등 해외에서 거론되는 부자의 재산은 100만 달러, 즉 밀리언에어(millionaire)다. 한국 돈으로 약 10억원가량이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관계자의 말이다.
“한국 부자의 수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에 일시 감소했으나 한 해를 제외하고는 2006년 이후 매년 20% 이상 증가할 정도로 크게 늘어나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한국 부자는 금융 및 기타자산에 비해 부동산 비중이 높은 자산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총자산 규모가 클수록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죠. 이는 일정 금액까지만 금융자산으로 운용하고 나머지는 부동산에 투자하는 자산관리 행태로 이해할 수 있어요. 10억원 이상 금융자산 보유자들의 평균 자산은 34억원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부자들은 부에 대한 기대수준이 높아 본인을 부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며, 4명 중 3명은 최소 50억원 이상의 자산이 있어야 부자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를 학문으로 연구하는 ‘부자학연구학회’ 한동철(韓東哲·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 회장은 “한국에서 부자로 불리는 기준은 서양보다 높아 30억원의 자산을 보유해야 한다”고 했다.
30억원은 동산 10억원과 부동산 20억원의 평균자산을 더한 것으로, 부자들이 생각하는 부의 기준(50억원)보다는 낮지만, 서구(10억원)보다는 높음을 알 수 있다. 한 교수는 “30억원이란 액수는 한국의 높은 물가상승률이 반영됐을 뿐만 아니라 물질에 특히 더 높은 가치를 두는 한국인의 가치관이 투영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럽은 부의 역사가 수백 년에 이르고, 미국 역시 100년이 훨씬 넘지만 우리나라는 광복 후 부자들이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지요. 그러나 왜 부자가 돼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이 부족했고, 부자가 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도 적었습니다.”
한국인의 가치관 속에 투영된 부와 부자에 대한 이미지는 자산의 규모를 넘어 훨씬 복잡하다.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을 건네면서도, 부자들을 경원(敬遠)한다. 심지어 부자, 특히 재벌 기업가를 공공연하게 증오(憎惡)한다.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본가(資本家)’의 개념에는 탐욕과 착취의 악마적 의미가 포함돼 있다. 한국사회에서 부자는 그런 자본가의 속성을 ‘비슷하게’ 담고 있다.
| ▣ 부자가 되는 두 가지 방법 부자학연구학회 한동철 회장은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자를 상대로 돈을 버는 방법’과 ‘일반인을 상대로 부자가 되는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 부자를 상대로 돈을 벌기란 상당히 어렵다. 일단 시작부터가 만만치 않다. 한 회장은 “부자를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는 일반인을 상대하는 것보다 적어도 4~5배는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공하면 20배 이상의 이득을 보게 된다. 왜 기업들이 부자 고객에 대한 마케팅과 서비스에 집중하는지, VIP보다 한 단계 높은 극소수의 상류층 고객을 의미하는 VVIP(Very Very Important Person)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를 알면 금방 답이 나온다. 부자가 되는 두 번째 방법은 일반인을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수많은 부자가 일반인을 상대로 하여 부자가 되었다. 한국의 재벌들은 평균적 소시민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주부에게 설탕을, 남성에게 양복을 팔아 부자가 된 것이다. 한 회장은 “부자가 되고 싶으면 부자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대한민국 전체 국민의 2%에서 10% 정도 되는 부자들은 아무리 돈을 써도, 매달 500만원에서 1000만원을 써도, 절대로 살림이 줄지 않고 편히 생활할 수 있다. “21세기에는 월 소득이 700만원이 안되는 대한민국 전체 국민 중에 90% 이상의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비즈니스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어느 호텔에서 단 한 명의 고객을 상대로 패션쇼를 했어요. 모델이 8명 출연했고 패션쇼를 준비한다고 7~8명이 분주하게 움직였지요. 비용은 1000만원이 들었고 손님은 5000만원어치를 구매했지요. 해볼 만한 장사라고 호텔은 느꼈지요. 또 어느 백화점에서는 단 두 명의 고객을 상대로 패션쇼를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1억8000만원의 매출을 올렸고 단지 비용은 2000만원밖에 안 들었습니다. 다른 백화점도 부자 2명을 상대로 하는 패션쇼를 확대하려고 합니다.” |
부의 불평등 증가는 계급 내 불평등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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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회는 현재 비정규직 문제와 양극화 등으로 인한 사회갈등이폭발 직전에 와 있다. 작년 11월 한 대기업 비정규직 근로자 가족들이 파업 근로자들에게 음식물을 제공하려다 정문 철책에 가로막히자 절규하고 있다. |
한나라당 이주영(李柱榮) 정책위의장은 지난 9월 8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비정규직 문제와 양극화 등으로 인한 사회갈등은 이제 폭발 직전에 와 있다”며 “빨리 가려면 혼자 가면 되지만,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한다. 이젠 ‘빠른 성장’이 아니라 ‘장기적인 성장’이 정책기조”라고 말했다. ‘성장’ 중심의 정책기조를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일종의 정책의 ‘좌향좌(左向左) 선언’이었다.
실제로 부의 기준이 서구보다 높은 한국사회에서 불평등 수준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현상은 한국만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 동(東)아시아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중앙대 사회학과 신광영(申光榮) 교수에 따르면, 한국사회의 불평등 증가 추세는 ‘계급 간 불평등’의 증가와 더불어 ‘계급 내 불평등’의 증가에 따른 결과라고 한다. 이 같은 불평등 증가는 소득격차 때문이다. 신 교수는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 계급의 규모가 더 커진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불평등 수준이 높아진 것은 양극화가 심화한 것을 의미한다.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빈자(貧者)는 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인의 부와 부자에 대한 복잡한 심리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근로자(노동계급)들의 불평등과 빈곤의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1997년 IMF 이후 노동시장 유연화가 급속하게 이뤄지면서 비정규직 노동자 수가 증가하고 있고 지금도 그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통계청이 2009년 8월에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855만명(임금노동자의 51.9%), 정규직은 793만명(48.1%)으로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나타났다. 비정규직 수는 2001년 8월 737만명에서 2009년 3월 855만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비율은 56.6%(2002년)를 정점으로 51~56% 안팎에서 고착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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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에는 값비싼 집(특히 아파트)이 있고, 부자를 떠받치는 화려한 교통·복지·소비·사교육 시스템이 있다. 사진은 올 봄 강남의 유명백화점 의류매장. |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구인회(具仁會) 교수는 지난해 <비정규 노동과 근로빈곤의 관계>라는 논문을 통해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빈곤율은 11.3%로, 정규직 빈곤율 3.3%와 비교해 약 4배 가까이 높았다”며 “비정규직 월 임금 역시 정규직의 54.6%로 큰 격차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비정규직이 한국의 빈곤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전체 노동자들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비정규직은 권력자원(노조)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소외됐다. 즉 분배 차원(임금)과 국가에 의해서 이뤄지는 재분배 차원(조세와 복지)에서도 박탈을 경험하고 있다. 시장과 국가에 의해서 배제된 노동계급의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 정치권의 ‘무상’ ‘공짜’ ‘반값’ 포퓰리즘은 더욱 위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부자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평상심(平常心)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신광영 교수의 주장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계급 문제는 조직화된 형태보다 조직화되지 않은 형태로 경험하게 됩니다. 최근 용산참사나 전세난과 같은 사회현상은 한국사회에서 드러나는 제도나 정책상의 공정성 정도를 드러냈지요. 일반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직간접으로 보고 느끼지만 그런 경험이 분산돼 있기에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공정함과 불리함에 대한 누적된 경험과 감정이 사회적 사실로 존재하는 경우, 계급갈등이 예상치 못한 시기와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부에 대한 불평등이 어느 날 갑자기 계급갈등으로 촉발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계급갈등이 집권 여당에 대한 부표(否票) 심리로 작동하고, 한국사회의 부와 부자를 ‘부패한 자본과 자본가’로 느끼게 만든다. 사실, 불평등의 의식은 생애과정을 통해 쌓인 누적적 불평등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가난한 이들이 부와 부자에 대해 갖는 경원의 시선은 누적적 불평등의 원망(怨望)이 오랫동안 지속돼 온 결과가 아닐까.
‘마음대로 돈 쓸 권한’ 對 ‘제대로 쓸 책무’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黃相旻) 교수는 최근 펴낸 《한국인의 심리코드》(추수밭 刊)에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부자는 ‘돈을 번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신 ‘돈을 쓰는 방식’을 통해 그 사람을 부자로 인식하려 한다. 다시 말해 잘 베푸는 사람이 부자이지, 많이 가졌다고 해서 부자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부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부정적인 이유는 자본주의를 부정한다거나 부자를 질시해서가 아니다”라며 “단지, 우리 사회의 부자들이 자신이 가진 돈을 ‘정승처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사회의 리더인 특권층 부자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너무나 부족했다. 베풀지 못했기 때문에 수전노라는 손가락질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특히 벼락부자, 땅부자가 많은 한국의 부자들은 베풀기보다는, 남의 발을 씻기기보다는 자신의 발을 씻겨 달라고 거드름을 피웠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부자라서 많이 누리기보다 많이 베풀어야 하는 책임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서울대 국민윤리교육과 박효종(朴孝鍾) 교수는 “특권층 리더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로마 귀족들에게서 현저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로마 부자들과 귀족들은 평민들에 비해 많은 특권을 누렸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책임감도 철저했다. 전쟁이 나서 나라를 지킬 때는 언제나 평민들보다 30% 이상 희생자를 많이 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말 타 본 사람, 즉 귀족들만 전쟁에 나가 말을 탈 수 있었다. 그의 주장이다.
“한국의 특권층들은 어떤가요? 이들은 봉사하는 리더나 우선승차자인 퍼스트 라이더(first rider)가 아니라 무임승차자인 프리 라이더(free rider)로 살아 왔다는 비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어요. 이들의 행태를 보면 특권을 즐겼을 뿐, 조국과 공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명예로 간주하기보다 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질투와 시기의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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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의 기부금 총액은 약 8조4000억원으로, 국민 1인당 평균 9만9000원을 기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대오일뱅크 임직원들은 9월부터 퇴직 때까지 매달 급여의 1%를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하는‘급여 1% 나누기’를 시작했다. |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플 뿐 아니라 친형제가 땅을 사도 배가 아픈 경우처럼 ‘불합리한 질투’가 있고, 노력의 양에 따라 보상이 차등지급될 때 느끼는 ‘합리적인 질투’도 있지요. 이러한 질투를 잠재우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뿐입니다. 질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나 계층이 힘닿는 한 베푸는 방법밖에 없어요.
베푸는 것은 ‘자선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보험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남에게 베풀 여력이 있는 사람이 인색하면 사회는 험악해지고, 험악해진 사람들은 합심하여 완력(腕力)으로라도 빼앗으려는 유혹을 받기 쉽지요.”
박 교수는 “이것이 바로 베풀지 않으면 빼앗긴다는 역설의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부자와 부패한 보수주의자들이 베풀기를 주저하자, 이제 통째로 빼앗기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베풀지 못한 탓에 한국의 부자와 기득권 주류들은 선거의 역풍(逆風)에 노출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부자와 기성 정치권이 복지 포퓰리즘을 아무리 걱정한들 가난한 이들의 귀에는 부자의 투정으로 비친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부패한 부자의 주머니를 털어 빈자를 돕겠다’는 좌파세력에게 민주주의 의제도 빼앗겼고, 보수라고 부르는 이념의 가치도 빼앗겼으며, 남북통일의 열정도 빼앗겼다.
부자들에 대한 분노는 집권 여당 내에서도 존재한다. 한나라당 홍준표(洪準杓) 대표는 서슴없이 “한국사회의 주류는 비겁하고 탐욕적”이라며 “주류들이 자기 것을 뺏긴다고 생각하니 변화가 없다. 자기 것을 나눠준다고 생각하면 저항이 없을 텐데, 뺏긴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주류층에 속하는 그가 주류를 욕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홍 대표는 심지어 “한국사회 주류들은 과연 그분들이 부 축적과정에서 정당성이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고도 했다. 홍 대표가 말하는 ‘주류’는 베풀지 않는 부자와 토지 자본가, 부동산 소득자를 의미한다(《월간조선》2011년 9월호 참조).
한국사회의 부와 부자의 상징, 江南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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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2005년 사이 거래된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34평형)를 조사한 결과, 거래된 2351채 아파트 중 60%인 1425채의 소유주가 주택을 3채 이상 보유한 부자인 것으로 파악됐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은마아파트. |
포스코 출신으로 정치에 관계하다 최근 10년 넘게 아파트 짓는 일에 관여해 온 대우엔지니어링 조용경(趙庸耿) 대표·부회장은 몇 해 전 ‘강남 권력’의 실체를 이렇게 묘사했다. ①한국 고급 아파트의 65.9%가 강남에 몰려 있고 ②한국의 파워 엘리트 중 절반 이상이 강남 지역에 집중 거주하고 있으며 ③강남의 개원의 수는 서울시내 총 개원의의 28%를 차지하고 ④전국 성형외과 개원의의 절반가량이 강남에 밀집해 있으며 ④서울신용보증재단의 지원이 70% 이상 강남 지역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용경 부회장은 “이미 강남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증상은 자신이 특별하다는 환각에 빠져 끊임없이 경제적 신분상승 욕구를 추구한다는 점”이라며 “그러나 경제적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강남 사람들 중 일부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하고, 더러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려는 편집증상을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반면 “‘강남증후군’에 감염되고도 강남에 살지 않는 사람의 대표적 증상은 피해의식이며, 조금 악화되면 ‘내 자식만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남으로 진출시키겠다’는 욕구로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강남과 비(非)강남의 구분이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구분과 일치한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대한생명 경제연구원 최성환(崔聖煥) 상무의 말이다.
“일단 강남에 산다고 하면 웬만큼 재산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지방 사람들조차 누가 강북에 산다고 하면 ‘그 나이에 아직까지 강남에 못 사느냐’고 한심하게 생각합니다. 만약 저녁약속을 하면서 ‘중계동 은행사거리에 근사한 레스토랑이 하나 생겼다’고 하면, 전화를 받는 상대방의 얼굴색이 달라지는 것을 안 봐도 알 수 있지요. 반면, 청담동이나 방배동 외진 골목의 와인바에서 만나자고 하면 금세 얼굴이 밝아집니다. 일부 강북사람들은 이제 한강을 ‘건널 수 없는 강’ 쯤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통계적으로도 고가 아파트와 종부세 납부자의 80~90% 이상이 강남에 몰려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자 하면 강남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고 있지요.”
이제 강남은, 계층을 뛰어넘는 오버클래스(over class)의 개념으로 부상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강남은 집값이 비싸기도 하지만 교통과 학원, 쇼핑, 레저 및 문화공간 등 사회적 인프라가 잘 갖춰졌다는 점 외에도, 사는 계층들이 학력·재산 정도 등에서 다른 어떤 지역에 비해 ‘동질적(homogeneous)’이라는 점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계속된 최 상무의 주장이다.
“울산과 마산, 창원과 같은 지방 대도시도 강남과 같은 지역 또는 신도시 지역이 있지요. 이들은 강남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지방이란 한계를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학교, 학원, 문화적 공간 등에서 강남에 크게 못 미치면서 강남은 부자 중의 부자, 초부유층(HNWI·High Net Worth Individual) 중에서도 ‘수퍼 HNWI’ 또는 ‘수퍼 리치’로 볼 수 있지요.”
부와 부자의 상징인 강남은, 한국사회에서 상류층 요새도시 내지 벙커도시를 지칭한다. 그들이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거치며 흘린 땀과 노력의 결실이 강남을 요새화시켰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혹자는 이를 ‘배타의 경쟁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위계와 배타의 성채(城砦)는 선망과 질투를 한 몸에 받기 마련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 안 거주자들의 부와 그 부의 정당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는 자신의 부가 정당한지에 대해 답할 차례가 왔는지 모른다.
불로소득, 나쁜 부자의 원천은 땅
한국인의 부와 부자를 논할 때 빠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 부동산이다. 부동산이라 불리는 주택문제는 따지고 보면 토지문제다. 건물은 시간이 지날수록 감가(減價)하는 데 비해 토지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준공한 지 30~40년이 넘은 강남의 재건축 대상 아파트를 보라. 건물가치는 형편없지만 거래가격은 지방의 새 아파트를 서너 채 구입하고도 남을 정도다. 바로 토지가치 때문이다. 고려대 철학과 이승환(李承煥) 교수의 지적이다.“부동산 문제의 근본원인은 부동산의 소유 및 처분 시에 발생하는 불로소득에 있어요. 수많은 사람이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고 수많은 기업이 기술개발이나 정상적인 생산활동보다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리는 것도 바로 불로소득 때문입니다. 얼마 전 드러난 부산 저축은행 부실사건은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려주는 한 단면에 불과하지요. 정상적인 기업활동에서 얻는 이익보다 부동산 투기를 통해 얻게 되는 이익이 더 크니까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국세청이 2000~2005년 사이에 매매된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34평형)를 조사한 결과, 이 기간 내 거래된 2351채의 아파트 중 60%인 1425채의 소유주가 주택을 3채 이상 보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 교수는 “대한민국 전체 가구의 절반 가까이 되는 무주택자들은 근면하게 일해 얻은 노력소득을 다주택 소유자에게 전·월세금으로 바치고, 다주택 소유자는 일하지 않으면서도 전세금 이자와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불로소득을 취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치 봉건시대에 소작농이 힘들여 노동한 결과물을 대토지 지주에게 고스란히 바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게 이 교수의 생각이다.
토지는 강남의 문제만이 아니다. 2005년 말 기준 우리나라 국민의 토지소유 상위 1%(약 50만명)가 전체 사유지의 57%를 소유하고, 토지소유 상위 10%(약 500만명)가 전체 사유지의 98.3%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이태경 著, 《위기의 부동산》). 수많은 고위 공직 후보자들이 국회 청문회에서 진땀을 흘리는 것도 바로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절대농지 불법소유 등의 땅 문제 때문이다.
한국은행 사회경제실 남상호(南尙昊) 실장의 논문 〈가계자산 분포와 불평등도의 요인별 분석〉(2007)에서도 확인된다. 그에 따르면 1999년에는 상위 1% 계층의 자산점유율이 9.6%였는데 2006년에는 16.7%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범위를 좀 더 넓혀 상위 10% 계층의 자산점유율을 보면 1999년에는 46.2%였는데 2006년에는 54.3%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남 실장은 “가구 순자산의 불평등도를 구성요소별로 분석해 본 결과, 부동산 자산의 불평등 기여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했다. 다시 말해 부동산, 더 정확히 말해 토지소유의 양극화가 전체 양극화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이다.
非강남의 심리, 이웃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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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부왕이자 세계적인 투자가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 그는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를 통해 자신의 실질 소득세율(18% 정도)이 자기 직원보다도 낮다며 부자증세 입장을 밝혔다. |
사회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1818~1883)는 “집은 클 수도 작을 수도 있다. 주변의 집들이 똑같이 작다면 그것은 거주에 대한 모든 사회적 수요를 충족시킨다. 만약 작은 집 옆에 궁전이 솟아오르면 그 작은 집은 오두막으로 위축된다”고 했다. 강남이 있는 한 강북과 지방은 모두 변방과 오두막으로 전락되고 만다. 강남은 부의 척도이자, 비교대상, 메인스트림이 되어 비강남 사람들의 일상과 감동의 소재들을 시시하게 만들고 활력을 잃게 한다.
지난해 3월 영국 위릭대학 크리스토퍼 보이스 교수가 《심리과학(Psychological Science)》저널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영국인 1000명을 대상으로 7년 동안 수입과 삶의 만족도를 추적했더니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과 만족감은 소득 크기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보이스 교수는 “누군가 더 큰 집을 사게 되면 현재 사는 집에 불만을 갖게 되고 더 큰 집을 쳐다보게 된다. 돈을 인생의 목적처럼 추구하는 사람은 행복해지는 정도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레이야드(R.Layard) 영국 런던정치경제대 교수의 연구도 흥미롭다. 미국 하버드대 학생을 대상으로 “당신은 연봉 5만 달러를 받고 남들은 당신의 절반만 받는 상황과, 연봉 10만 달러를 받고 남들은 당신의 두 배를 받는 상황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고 물어보았다.
응답자 대부분이 “5만 달러를 받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남 잘되는 건 싫다는 심리와 함께 상대적 박탈감보다 상대적 우월감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레이야드 교수는 “수입의 증가와 행복은 비례하지 않으며, 타인과 자신의 수입을 비교하는 것이 불행의 지름길”이라고 결론 내렸다.
이게 바로 ‘이웃효과’다. 그 어떤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이웃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평가함으로써 발생하는 효과를 말한다. 비강남이 느끼는 ‘이웃효과’의 박탈감은 불가피한 것일지 모른다. 서울여대 한동철 교수는 “비강남 사람들의 질투와 박탈감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지만 한국인의 특성상 남의 일에 너무 신경을 쓰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한 교수의 말이다.
“제가 몸담고 있는 부자학회에서 강남, 비강남의 벽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는데 쉽지 않아요. 강남 부자들의 자녀와 비강남 장애우를 데리고 1박2일 캠프를 기획한 일이 있는데 잘 안됐어요. 아주 파격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서로 교류하는 일이 불가능할지 몰라요. 강남을 대표할 만한 사람과 비강남 지역 사람이 의형제를 맺거나 강남구에서 걷히는 세금 일부로 가난한 지역의 전기료를 대납하면 어떨까요? 또 비강남인에게 강연을 통해 정당하게 돈 버는 법을 가르치면 어떨까요?”
대한생명 경제연구원 최성환 상무는 “끼리끼리 모여 사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비용이 더 들더라도 강남에 살겠다는 사람을 막을 수 없는 노릇 아니냐”며 “앞으로 강남은 진입장벽이 더 높아지고, 그들만의 리그, 또는 그들끼리만 교류·소통하는 현상이 심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강남 ‘취향’ 좌파의 등장이 강남의 변화?
그런데 다는 아닐지라도 부자들의 성채인 강남에서도 변화의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강남 좌파’가 등장한 것이다. 강남 좌파는 강남에 살면서 좌파적 발언을 한다 하여 붙인 말이다. 다만, 가난한 좌파였다가 나중 부자가 되어 과거를 회상하는 것인지, 아니면 부자가 좌파가 되어 ‘취향 좌파’의 모습을 띠는 것인지는 좀 더 규명이 필요하다.
지난 4·27 재·보궐 선거에서 경기도 성남 분당을 지역에 민주당 손학규(孫鶴圭) 대표가 당선되자 ‘분당 좌파’라는 말까지 생겼다. 선거에서 패한 청와대와 여당은 부자들의 ‘좌향좌’에 충격에 빠졌다.
강남 좌파와 비슷한 말로 ‘리무진 리버럴’이란 말이 있다. 미국 사회에서 ‘부유한 좌파’를 의미한다. 이들은 입으론 분배, 평등 같은 가치를 외치면서 고급차를 타고 다닌다. 리무진 리버럴은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위선을 비꼬는 뜻이 강하다.
기자는 강남 좌파들의 자기고백을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보았다.
“연봉이 1억원을 훌쩍 넘어도 스스로 강남 서민이라 생각합니다. 국산 고급차를 타는 사람은 외제차를 타지 않기 때문에 강남 좌파라 불리기에 부족한 것 같습니다.”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구독하려면 눈치가 보입니다. 경비원들도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부자였던 체 게바라처럼 순수한 좌파가 강남에서 나오길 기대합니다.”
“종부세 때문에 일 년에 4번 가던 해외여행을 2번으로 줄일 수도 있고 벤츠 S클래스 사려다가 VW페이톤으로 눈높이를 낮출 수도 있습니다. 그런다고 큰일 나지 않습니다.”
“분당과 과천에 집이 한 채씩 있지만 합쳐도 강남 평균 집값에 못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제가 연봉 7000만~8000만원, 아내가 5000만원이니 억대는 넘는군요. 이것저것 감안하면 강남 좌파의 제일 아래 단계인 듯 ….”
“저는 ‘영혼 없는’ 공무원 좌파입니다. 실천은 내 팔자가 아니라 생각하고 뒤에서 구시렁대는 공무원 좌파지요.”
강남 좌파 현상을 두고 한 사회학자는 “파리지앵이나 뉴요커와 같은 본격적인 취향 좌파가 우리 사회에 등장하고 있다”고 그럴듯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어쨌든 강남 좌파의 특징은 자본주의에 아주 비판적이다. 스스로 자본주의의 단맛을 잘 알고 몸으로 느끼고 살지만, 정신은 분배·인권·평등 같은 가치를 중시한다. 그래서 사회주의식 자본주의 복지모델인 유럽식 복지국가를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일보》가 지난 2월 25일 강남 3구에 주택을 보유한 중산층 이상 시민 109명에게 ‘강남 좌파들이 진보적 이념을 지지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39.4%가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는 사회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꼽았다. 이들에게 “강남 좌파의 진보적 성향이 허위 의식과 지적 허영의 발로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응답자의 57.8%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고 42.2%는 비판을 수긍했다고 한다.
강남 좌파는 이명박(李明博) 정권 출범에 기여한 지식인 그룹인 ‘뉴 라이트(New Right) 연합’을 연상케 한다. 부패한 보수 대신, 종북적(從北的)이고 반(反)시장적인 좌파 대신, 새로운 우파의 기치를 올리자는 게 뉴 라이트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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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31일 오후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중구 남대문로 대한상의에서 30대 대기업 총수들과의 오찬 간담회에 참석했다. 국내 개인 기부 사상 최대 금액인 5000억원을 기부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왼쪽 두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
MB의 친서민·반기업 행보의 속뜻은…
뉴 라이트는 MB 정권 출범의 전위대 역할을 했지만 출범 이후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기득권 세력이 돼 권력 잡기에 혈안이었다. 여기에 실망한 강남 사는 지식인들이 “우파가 이래선 안 된다”며 왼쪽을 돌아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 좌파를 ‘뉴 레프트(New Left)’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이들의 ‘좌향좌’ 성향은 위선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윤창현(尹暢賢) 교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과실을 다 따먹고 나서 그 체제를 부인하려는 발언은 위선적이 아니냐”고 강남 좌파를 공개 비난하기도 했다. 자녀교육, 재테크, 소비행태 등에서는 말과 행태가 다르다는 얘기다. 윤 교수의 지적이다.
“강남좌파는 미국의 ‘리무진 리버럴’의 한국버전으로 봐야 합니다. 체제에 대한 애정이 없이 체제가 주는 과실을 향유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나누자. 그러나 세금은 네가 내라’는 식의 접근도 관찰되는바, 뼛속까지 좌파는 아닌 듯 보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반기 들어 추진 중인 ‘공정사회’ ‘공생발전’ 담론은 불의(不義)를 대물림하는 경제적 곤궁과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대통령과 참모들의 발언도 대개는 부와 부자에 대한 언급, 즉 한국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다룬다.
‘親서민’의 핵심은 富의 재분배
이명박 대통령은 “‘공정한 사회’가 기득권자에게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며 ‘공정사회’ 지표의 방향을 친(親)서민으로 잡았다. 이 대통령은 “공직사회가, 권력을 가진 자가, 잘사는 사람이, 정부와 여당이 많은 고통과 피해를 볼 수 있다”는 강경한 입장이다.
대통령의 심중(心中)에 정통한 김영수(金永壽) 청와대 연설기록비서관은 좀 더 구체적이다. 김 비서관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노동을 하고 다른 임금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고 말했다. 노동계급 간 불평등 문제를 다루겠다는 의미다. 또 “시장을 유지하면서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은 가진 사람들의 책임이다. 워런 버핏의 기부운동 같은 것도 공정한 사회를 위한 수단”이라고도 했다.
한나라당과 정부는 지난 9월 7일 고위 당정청 회의를 열어 소득세와 법인세 최고 구간에 대한 추가 감세를 중단하되 중소기업은 당초 계획대로 감세 혜택을 주기로 했다. ‘MB노믹스’의 핵심이었던 ‘부자감세’ 정책은 힘을 잃게 됐다.
한나라당 비정규직특별위원회와 정부는 이틀 뒤인 9월 9일 당정협의를 갖고 현재 정규직 임금의 57% 수준인 비정규직 임금을 장기적으로 80%로 점차 늘려 나가기로 했다. 또한 대기업 정규직 노조와 사측이 단체교섭을 체결할 때 비정규직 처우 개선안을 의무적으로 포함시킬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MB 정부의 ‘친서민, 반기업’ 행보는 기업 입장에서 볼 때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한나라당 정책위 고위 관계자는 “한국의 기업과 부자들이 밤낮으로 일해 경제발전을 견인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긴 힘들다”면서도 “그럼에도 한국의 기업과 부자들은 자신이 얻은 부를 사용하는 데는 인색하고 서툴렀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재벌과 부자들은, “정경유착은 물론이고 기업 내부에서 벌어지는 변칙상속이나 경영권 세습 등은 국민들에게 ‘가진 자의 위선’을 느끼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서구사회에서 이미 보편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공익적인 기부활동이나 청부(淸富)의 전통도 여전히 미미하다. 김만제(金滿堤) 전 경제부총리의 말이다.
“우리 사회가 부와 부자를 곱지 않게 보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동안 가지지 못한 사람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이해와 관용, 배려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경쟁을 근본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본질은 어쩔 수 없지만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도 필요하지요. 최근 선거의 이슈가 성장보다 분배, 복지가 중심이었던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어쨌든, 이 대통령의 이런 의지에 화답하듯 정몽구(鄭夢九) 현대차그룹 회장이 지난 8월 28일 국내 개인기부 사상 최대 금액인 5000억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정 회장은 이번 기부금을 저소득층 자녀들의 교육에 집중적으로 사용할 뜻을 밝혔다고 한다.
사흘 뒤인 8월 31일 이 대통령이 30대 대기업 총수들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기업인들은 “중소기업과의 공생발전의 중요성에 공감한다” “공생발전을 위해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고 육성하겠다” “중소기업과 협력을 강화해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기업생태계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화답했다.
달라진 재계의 반응, 과연 따라올까?
이런 재계의 반응은 불과 반년 전과 크게 다른 것이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출신의 곽승준(郭承俊)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장이 지난 4월 25일 “324조원인 국민연금을 신(新)성장동력 투자에 동원하겠다. 또 국민연금 등 공적 연기금의 주주권을 최대한 행사하겠다”고 말했을 때만 해도 재계는 화들짝 놀라는 분위기였다.
사실 국민연금의 삼성전자 지분(5.0%)은 삼성생명(7.45%)에 이어 두 번째로, 이건희 회장(3.38%)보다도 많다. 국민연금은 비록 국가 지주회사이지만 삼성전자의 2대 주주로서 정부 입김을 기업에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또 “신성장동력 투자에 동원하겠다”는 표현도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신사업을 ‘국가사업’으로 만들겠다는 발상이 위험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현대차와 삼성, LG, SK 등 100여개 기업이 주주인 《한국경제신문》은 지난 4월 27일자 사설을 통해 ‘(곽 위원장의 발언은) 한국 시장경제를 죽이고 기업가 정신을 훼손하며 잘해도 국가자본주의, 잘못하면 국가사회주의로 가는 길을 열게 된다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갖게 한다’고 비난했었다.
“대기업의 초과이익을 협력 중소기업과 나누자”는 정운찬(鄭雲燦) 동반성장위원장의 구상 역시 반기업 정서라는 지적이 많았다. ‘초과이익공유제’란 대기업이 예상보다 많은 초과이익을 냈을 경우 협력사에도 이익의 일부를 돌려주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물건값(MB물가)을 누르고, 기업이 이윤을 혼자 다 먹지 말라는 압력이 ‘반시장적, 반자본주의적’으로 보일지라도 적어도 ‘반사회적, 반윤리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게 국민정서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는 “한국인이 가진 부자의 심리코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역설은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존경받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존경받는 부자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부를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베풀었느냐의 문제입니다. 베풀 수단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베풀면 됩니다. 굳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가진 것을 남과 나누려 한다면 그는 존경받는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황 교수는 “정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잘 쓰는 ‘부자 만세’의 심리가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는 부자를 많이 만들어 낼 것”이라고 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탐색 계속해야
정부 여당의 정책전환은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는 사유재산 제도와 시장경제에 바탕을 둔 국가체제다. 자본주의는 궁극적으로 개인들의 자기이익 추구 활동이 서로 조화를 이뤄 전체 사회가 움직이고 유지된다는 이상(理想)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재산에 대한 권리가 재산의 형성에 공헌한 사람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을 중시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효율성과 자유, 경제성장 면에서 성과를 냈지만 경제의 불안정성과 빈부격차 면에서의 약점은 해결할 수 없었다.
숙명여대 영문과 여건종(呂健鍾) 교수는 “자본주의를 제대로 끌어안고 가기 위해 자본주의에 대한 탐색은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는 그것이 막 등장했던 초기 산업자본주의 단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풍요로운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효과적인 제도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안정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제도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모순을 규명하고 수정하는 노력을 중단해선 안 된다. 이상배(李相培) 정부공직자윤리위원장의 말이다.
“재벌과 대기업의 오만, 고위직 공무원의 염치없는 돈 욕심이 자본주의를 멍들게 합니다. 따뜻한 자본주의는 성장과 효율, 경쟁의 물신(物神)체제를 옹호하는 ‘자유시장 주주(株主)자본주의’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대신 함께 나누고 부족한 것을 메우며 사회안전망을 튼튼히 구축하는 사회를 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재진행형이 틀림없어요. 한국사회의 부와 부자에 대한 시각도 이와 함께 변화될 게 틀림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