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신밍의 남편 ‘J’는 ‘기관’을 만나면서 함께 음모를 꾸미게 된다. ‘J’는 덩 여인을 압박, ‘J’의 명의로 덩 여인이 투자한 재산을 가로채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 상하이 총영사관이나 영사들이 덩신밍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
⊙ ‘법무영사’와 덩 여인의 불륜설이 나돌고, ‘경제영사’는 법무영사 부인과 불륜 관계라는 벽보가 나붙어
⊙ ‘기관’은 나에게 앙심을 품고, 개인연락처에 불과한 자료들을 국가기밀로 둔갑시켜
金正基
⊙ 52세. 미 뉴욕주립대 정치학과 졸업. 미 마퀘트대(Mar-quette) 법무학 박사(JD),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최고지도자 과정 이수.
⊙ 거로출판 CEO, 중국 베이징대학 동방학연구원 연구교수, 한국사이버대 초대 학장,
駐 상하이총영사 역임. 現 중국 난징대학 국제경제연구소 객좌교수.
⊙ 상하이 총영사관이나 영사들이 덩신밍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
⊙ ‘법무영사’와 덩 여인의 불륜설이 나돌고, ‘경제영사’는 법무영사 부인과 불륜 관계라는 벽보가 나붙어
⊙ ‘기관’은 나에게 앙심을 품고, 개인연락처에 불과한 자료들을 국가기밀로 둔갑시켜
金正基
⊙ 52세. 미 뉴욕주립대 정치학과 졸업. 미 마퀘트대(Mar-quette) 법무학 박사(JD),
미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최고지도자 과정 이수.
⊙ 거로출판 CEO, 중국 베이징대학 동방학연구원 연구교수, 한국사이버대 초대 학장,
駐 상하이총영사 역임. 現 중국 난징대학 국제경제연구소 객좌교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정직은 가장 좋은 외교정책”이라고 했다. 대중국 외교를 펴는 한국 외교관들은 솔직하지 못했다. 적어도 2011년 중국의 심장부에 설치된 상하이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외교관들은 그 자신과 국가에 대해 정직하지 않았다. 가학적 관음증(觀淫症) 취미를 ‘알 권리’로 포장해 비정상적으로 흥분했던 언론도, 그런 언론을 통해 대리만족을 했던 국민도 정직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제가 된 조직의 책임자였던 나는 제아무리 열심히 일을 했고, 문제의 여인 ‘덩신밍(鄧新明)’과 사사로운 관계는 없었으며, 상하이 총영사관 조직 내부의 내홍으로 인한 음모와 무고가 사건의 실체라고 하더라도, 국가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미리 막지 못한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상하이 총영사관의 업무 폭증과 ‘관시(關係)’를 중시하는 중국 관료사회의 특징,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한 여인을 국익의 차원에서 활용했으며, 그것 때문에 흔들리는 조직의 밑동을 도려내지 못한 과오는 씻을 수 없다.
나는 구차하게 결백을 주장하거나 재차 진상을 밝혀 변명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해외 공관에 공관장을 두고 그 아래에 정보 요원을 배치해 조직을 이원화(二元化)한 데 따른 문제점을 새삼 들추려는 의도는 더욱 없다.
‘상하이 파동’이 술자리 안줏거리로 회자될 때는 이런 글을 쓸 용기조차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무능한 자의 변명으로만 들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세월이 약이 됐다.
찾아온 기회
지난 2008년 6월 나는 상하이 총영사 발령을 받고 진심으로 기뻤다. 자랑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20대 초반 펴낸 영어교재가 밀리언셀러가 됐을 만큼 잘나가던 영어강사였다. 그리고 미국에 건너가 로스쿨을 마치고 미국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귀국 후 40세에는 한국사이버대학교 초대 학장으로 선출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정치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이후 세계패권, 특히 ‘팍스 시니카(Pax Sinica)’를 향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한중 관계에 대한 연구에 천착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총영사로 취임한 것은 2008년 6월 13일이었다. 첫 일정은 6월 16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방문이었다. 상하이의 중요성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중국의 수도는 베이징이지만, 상하이는 미래권력을 배출하는 정치적 비중은 물론 무역, 금융, 물류의 중심지이며 중국 개혁과 개방의 상징적인 국제도시다. 세계 65개국이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세계 500대 글로벌 기업 가운데 450개가 상하이에 진출해 있으며, 그 가운데 150개 회사의 아시아태평양지역본부가 거점을 두고 있다.
10만여 명의 우리 교민과 유학생들이 있고, 삼성전자, LG전자, 하이닉스, 기아자동차, 포스코, 한화석유화학을 비롯하여 무려 3000개의 우리 기업이 총영사관 관할구역인 상하이와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에 자리 잡고 있다. 당연히 총영사관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내가 부임하기 한 달 전인 2008년 5월, 한중 관계가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됐다. 더욱이 2010년에는 상하이세계박람회(EXPO)가 열릴 예정이었다.
총영사관 업무는 교민보호, 비자발급 등 영사업무를 비롯해 경제교류와 우리 기업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외교활동, 교육, 문화 등,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정치인, 당의 중견간부들과의 친분은 물론, 행정기관들과도 원만한 유대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당시 국위를 선양할 2010년 상하이 엑스포를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2009년, 2010년에는 국내에서 대통령, 200명 이상의 국회의원, 대부분의 장차관, 100대 대기업 총수, 문화예술계 지도자 등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VIP들이 모두 상하이를 다녀갔다. 상하이를 찾은 공식방문단도 100개가 넘었다.
문제의 여성, 덩신밍
이들이 방문 성과를 얻고 귀국하려면 중국 공산당의 최고 실력자들과 만나야 한다. 사실 중국의 VIP를 만나려는 국내외 인사가 너무나 많았다. 그러나 계획되지 않은 면담은 성사가 쉽지 않았다. 특히 엑스포를 앞두고 상하이 시장이나 당서기의 면담 대상은 각 국가의 총리급 이상으로 격상돼 있었다. 엑스포 기간 중 전 세계에서 상하이를 방문한 총리급 이상의 지도자가 200명에 가까웠으니 충분히 이해가 될 일이다. 그들과의 스케줄을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중국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시(關系)’다. 즉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 한다. 우리 총영사관도 비공식라인으로 활용할 수 있는 ‘관시’가 필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각된 인물이 ‘상하이 파동’의 중심인물인 중국 여인 덩신밍이었다. 물론 나는 덩 여인을 알지 못했다. 상하이 총영사관에는 총영사인 나를 비롯해 부총영사, 그리고 정무, 경제, 법무 등 각 분야를 관장하는 22명의 영사, 50여 명의 행정원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덩 여인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일부 영사들은 내가 부임하기 훨씬 전부터 덩 여인과 친분을 유지해 온 것 같았다.
그들에 의하면, 덩 여인은 당시 30세로 일찍이 한국남자와 결혼해 상하이에서도 부유층이 거주하는 지역에 우리 돈으로 시가 30억~40억원을 호가하는 고급 빌라에 살고 있으며, BMW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자녀도 학비가 1년에 3만 달러가 넘는 외국인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 최고위층과의 친분이 두텁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관시’가 아주 좋은 여인이어서 우리 영사들도 국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덩 여인은 중국의 최고위층과 돈독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내가 부임하기 전 주중(駐中)대사는 신정승(辛正承)씨였다. 그는 부임 당시부터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냉랭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2008년 5월 중국의 부총리급으로 공산당 정치국원인 상하이 당서기, 장관급인 상하이 시장과 동시에 면담이 성사됐다고 한다. 덩 여인의 ‘힘’이 없었다면 성사되기 어려운 면담이었다는 게 ‘정무영사’의 설명이었다. 사실 상하이 당서기와 시장을 동시에 면담하는 것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외교가의 통설이다.
내가 총영사로 부임한 직후인 2008년 8월의 일이다. 새로 총영사관에 부임하게 된 ‘경제영사’가 자신의 이삿짐을 옮기면서 민간인의 이삿짐을 함께 통관하려다가 중국해관(세관)에 적발됐다. 중국에서는 이런 유형의 사건을 밀수사건으로 간주한다. 상하이 총영사관이나 외교통상부로서는 상당한 곤경에 빠질 수 있는 일이었다. 나중에 경제영사에게 들어보니 덩 여인이 수완을 발휘해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고 한다.
덩 여인, 저장성에 가 있는 원저우시장을 설명회에 불러오기도
그뿐만 아니다. 2009년 상반기 ‘치안영사’가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와 상하이의 우호도시 협정을 맺는 MOU 체결을 추진해서 9월 25일 협약이 체결되었다. 뜻밖의 성과였다. 상하이는 한국과의 우호도시 체결에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상하이와의 우호도시 체결을 시도하고 있는 서울시가 3년째 전혀 진전이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치안영사는 덩 여인이 주선해 준 덕분이라고 말했다.
2009년 6월에는 저장성 원저우(溫州)시에서 상하이 총영사관 주관으로 대규모 한국투자설명회를 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코트라, 대한무역협회, 은행, 증권, 보험관계자 등 70여 명이 참가했다. 원저우자본(원저우 출신 기업가그룹)은 중국 내 최대자본으로 1000억 달러의 현금 동원능력을 지니고 있다. 미국의 유대자본과 비유되기도 한다. 그만큼 비중이 큰 행사였다.
나의 공항 영접에 나온 원저우시 고위간부는 투자설명회 참석 예정이던 원저우 시장이 행사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왜 일정이 바뀌었느냐”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저장성 성장(省長)이 갑작스럽게 원저우시를 방문하게 된 게 그 이유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계속해서 언성을 높이며 항의하자, 실무담당자인 경제영사가 급히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원저우 시장이 참석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덩 여인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원저우 시장은 황급히 예정대로 행사장을 방문해서 축하를 했다. 투자유치설명회는 200여 명의 원저우 자본가들이 참가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덩 여인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여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덩 여인에 대해 ‘누구누구한테 들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다. 총영사관 업무체계로 볼 때, 각 부문 담당영사들이 있다. 그들이 먼저 해당 업무를 추진하고 원만하게 진행되면 총영사인 나의 결재를 받고 업무를 성사시킨다.
그 과정에서 난관이 생기면 총영사가 나서야 하지만, 대개는 영사들이 업무를 책임지고 처리한다. 이 때문에 덩 여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자세히 듣게 됐다.
말로만 듣던 덩 여인과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내가 총영사로 부임하고 1년이 지난 2009년 10월 1일이었다. 그것도 내가 적극적으로 덩 여인을 만나려고 한 것이 아니다. 10월 1일을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그날이 중국 국경일이기 때문이다.
덩 여인이 총영사에게 한 ‘사소한’ 부탁
내가 외국 귀빈으로 국경일 행사장에 참석했을 때, 한 젊은 여성이 상하이 영도자와 환담하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됐다. 내가 상하이 영도자와 인사를 마치자, 그 여인이 나에게 자기소개를 하며 반가워했다. 바로 덩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 총영사관에 여러 가지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총영사인 나로서는 당연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중국인들은 무척 실용적이다.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것이 관례다. 덩 여인이 우리 영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면, 우리도 무언가 보답해야 한다. 총영사관은 인허가권을 갖고 있지 않다. 규제기관도 아니다. 경제적 이권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나중에 알았지만 덩 여인이 우리 영사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의외로 손쉬운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비자발급과 관련하여 편리를 봐주는 정도였다. 한국행 비자를 얻으려는 중국 사람이 워낙 많아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비자발급 절차와 심사도 까다로운 편이다. 덩 여인에게 준 우리 영사의 도움은 비자를 빨리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해준 정도였다. 물론 총영사인 나에게는 일일이 보고할 사항도 아니었다.
정부합동조사 과정에서 밝혀졌지만 덩 여인과 관련된 비자발급에서 불법행위는 없었다. 단순한 지침위반이 있었을 뿐이다. 덩 여인은 거주비자(F-2)를 소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비자를 분실했다며 비자신청을 했다. 덩 여인이 신청한 복수비자(단기종합비자·C-3)는 당일 발급됐다. 언론에서 보도한 것과는 달리, 비자를 부정 발급한 것이 아니라 이중 발급을 금하고 있는 지침을 위반한 것이다. 이는 법무부 출입국관리본부의 대변인 성명에서도 확인됐다. 분실된 여권의 유효기간이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덩 여인의 비자발급 과정에서 중국 출입경관리국 부국장의 부탁이 있었다는 얘기를 훗날 법무영사로부터 들었다.)
두 영사의 갈등이 드러나다
‘2010 상하이 엑스포’(2010.5.1~ 10.31)가 열렸다. 세계 최대의 경제행사로 192개 국가, 52개 국제기구, 기업관(18개), 도시관(50개) 등이 참가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나는 ‘대한민국 정부 교체대표’로 임명됐다. 한국관, 기업연합관, 서울도시관 등의 운영을 총괄 지휘했다.
엑스포를 앞두고 국내 최고위층 인사들과 단체장들이 잇달아 상하이를 방문했다. 나는 이들을 영접해야 했다. 중국의 고위층과의 면담을 주선해야 했다. 지난해 4월에는 유명환(柳明桓) 당시 외교부장관이 방문했다. 상하이 시장과의 면담이 꼭 필요했고 내가 직접 나서서 적극 주선할 일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엑스포라는 특수상황에서 상하이 시장의 면담 대상은 총리급 이상으로 제한된 상황이었다. 덩 여인이 떠올랐다. 공식 석상에서 그가 상하이 영도자들과 아주 친밀하게 환담하는 모습을 몇 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직자가 아닌 덩 여인을 공식 절차를 통해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만나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경제영사’에게 지시해 덩 여인에게 연락을 취했다. 상하이 시내 메리어트 호텔 라운지에서 경제영사와 함께 그녀를 만났다. 나는 덩 여인에게 정중하게 부탁했고 그녀가 받아들였다. 그러나 절차상의 문제로 공식, 비공식 라인이 충돌하면서 면담이 성사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직접 나서서 덩 여인에게 부탁한 전부다.
유 장관에 이어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상하이 엑스포 개막에 맞춰 2010년 4월 30일과 5월 1일 이틀간 상하이를 공식 방문할 예정이었다.
총영사관은 태스크포스까지 설치, 후진타오 주석과의 한중 정상회담, 대기업 CEO 간담회, 교민 환영회, 상하이 엑스포 개막식 참석 등 이 대통령이 여러 일정을 원만히 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대통령이 거쳐간 ‘한국관’은 엑스포 전체 관람객의 10%에 해당하는 725만명을 유치했다. 중국관 다음으로 단독 해외국가관 가운데서는 최다 관람객 수를 기록했다. BIE(세계박람회 사무국)로부터 건축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기업연합관은 관람객 수 470만명으로 기업관 가운데 3위를 차지, ‘체험이 풍부한 전시관’ ‘엑스포 오스카상’ ‘과학기술상’ 등을 수상했다.
그런데 엑스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감춰져 있던 두 영사의 갈등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사건의 불씨였으며, 중심인물은 엉뚱하게도 덩 여인이었다.
뜻밖의 投書, 사건의 불씨가 되다
총영사관의 여러 영사 가운데 ‘경제영사’가 있었다. 담당업무의 특성상 그는 누구보다 먼저 덩 여인을 알게 됐고 여러 차례 업무 도움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법무영사’는 단신으로 부임했다. 그의 부인은 1년 뒤인 지난해 8월 상하이에 왔지만 부부간 불화가 심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어떻게 개입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덩 여인이 경제영사를 갑자기 멀리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경제영사는 그 이유가 덩 여인과 법무영사가 가까워졌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실은 상하이로 들어온 법무영사 부인에게 알려졌다. 경제영사와 법무영사는 서로 반목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으로 파악한 나는, ‘기관’에게 총영사관 내부의 일이니 조용히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단 한 차례 관련 보고를 받았다.
지난해 10월 31일 6개월간의 상하이 엑스포가 끝나던 날, 나는 한국정부의 대표로 폐막식에 참석해 상하이 지도자와 환담하는 중에 덩 여인이 옆에 서 있어서 인사했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경제영사, 법무영사와의 문제가 떠올랐지만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1월 2일, 엑스포를 차질 없이 끝냈다는 해방감으로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총영사인 내 앞으로 한 통의 투서가 전달되었다. 익명이었다. 내용도 ‘카더라’식이었다. 요점은 법무영사와 덩 여인이 부적절한 내연 관계이며 비자발급에도 법무영사와 덩 여인이 연관돼 있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민원영사’에게도 교민투서가 있었는데 법무영사의 비자발급과 관련해서 덩 여인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투서도 익명이었다. 추후 추적 감찰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져 ‘제1 부총영사’에게 임의 보관하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다.
두 통의 투서가 모두 익명이었고 내용이 동일했으며 겉봉투의 수신자만 달랐다. 익명투서는 규정에 따라 원칙적으로 처리대상이 아니었다. 더욱이 내용이 법무영사에 대한 음해성격이 짙었다. 투서자가 실명이었다면 당연히 법무영사와 관련해서 정식으로 내사(內査)를 지시할 사항이었지만 익명이었기에 나는 법무영사를 불러 구두 해명을 요청했다. 그때 법무영사는 투서내용을 강력히 부인했다.
술렁이는 교민사회… 불륜 관계 벽보 나붙어
그런데 법무영사 부인이 “남편에게 폭행당했다”며 총영사인 나를 만나려 했다. 나는 민원실장인 제1 부총영사에게 면담을 하도록 지시했다. 법무영사가 부인을 폭행했는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공관장이 가정사에 개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서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1월 5일에는 경제영사와 법무영사 부인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벽보가 교민사회에 나붙었다. 법무영사와 덩 여인의 불륜설이 나돌고, 경제영사는 법무영사 부인과 불륜 관계라는 벽보가 나붙자 교민사회가 크게 술렁거렸다. 더욱이 법무영사 부인이 교민사회에 계속 떠들고 다니면서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적인 문제였지만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1월 7일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두 영사의 해명을 들었고, 두 차례에 걸쳐 법무영사와 경제영사의 대질심문까지 했다. 그러나 총영사관은 수사기관이 아닐 뿐 아니라, 당사자들이 일관되게 부인하니 소문과 익명의 투서만 가지고는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당사자들을 조기 귀국시키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 무렵 외교통상부가 특채파동으로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는데, 해외공관의 불미스런 일까지 터진다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다.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관련 부처의 책임자들인 외교부 차관, 지식경제부 차관, 법무부 출입국관리본부장과 구두로 협의했다.
그리고 본부에 구두 보고한 뒤 승인을 얻어 법무영사와 경제영사로 하여금 자진 귀국하도록 조치했다. 그로써 모든 일은 일단락됐다.
‘J’와 덩의 관계는…
2010년 12월 말, 법무부, 외교부, 총리실, 청와대 등 관계기관과 국내 언론기관에 투서가 들어갔다. 투서자는 덩 여인의 한국인 남편으로 알려진 ‘J’씨였다. 그는 투서에서 “나의 처인 중국여성 덩신밍과 2~3명의 영사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으며, 그녀에게 국가의 기밀문서들을 유출했다”고 주장했다.
언론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삿거리였다. 몇몇 언론은 곧장 ‘스캔들’로 포장해 앞다퉈 보도했다. 그들이 기자의 본분인 사실(Fact) 확인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몇 차례의 조사에서 나도 확인 못 한 것을 아무리 그런 일에 전문인 기자라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했겠는가. 나로서는 억울한 심정보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터무니없이 날조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면 먼저 덩 여인의 한국인 남편이라는 ‘J’부터 알아야 한다. ‘J’는 10여 년 전에 덩 여인과 결혼한 것으로 교민사회에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행태가 이상했다. 우선 함께 살지 않았다. 덩 여인은 상하이 최고 상류층과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고급빌라에 살았다. ‘J’는 주로 한국 교민들이 거주하는 시가 3억~4억원 정도 하는 아파트에 살았다.
나는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지만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사생활일 뿐이었다. 덩 여인은 공적으로 우리 총영사관에 많은 도움을 준 ‘관시’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훨씬 뒤에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J’와 덩 여인은 정식 부부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결혼’과 같은 관계였다. 그들이 왜 그런 계약을 하게 됐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2010년 8월경, 덩 여인이 ‘계약결혼’ 관계를 파기하자고 통보했다고 한다.
문제의 사진 세 장
‘J’가 첨부한 세 장의 사진, 그 사진들이 어떻게 나온 사진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난 그녀와 의도적으로 단둘이 사진을 찍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중에 세 장의 사진을 보았다. 두 장의 사진은 덩 여인과 나, 단둘이 찍은 사진이었고, 나머지 사진 한 장은 개인연락처가 적힌 문서 사진이었다. 문서 사진과 같은 날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의 장소는 2010년 6월 1일, 이태리 국경일 행사가 열린 상하이 힐튼호텔 컨벤션홀 로비였다. 사진에 나타난 촬영시각은 오후 6시55분. 저녁 7시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 그곳에 온 덩 여인을 우연히 만났을 때 찍은 것 같다.
당시 내 옆에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파크 하얏트의 총지배인 크리스토퍼 부부가 함께 있었다. 사진의 오른쪽에는 요리사가 요리를 하고 있었고 나는 왼손에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공개 장소에서 우연히 찍힌 사진이었다. 그런데 내가 덩 여인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렸다고 해서 문제의 사진이 되어버렸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정말 부적절한 관계였다면 공개된 외교행사장에서 일부러 그걸 드러낼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당시는 영사들과 문제가 불거지기 여러 달 전이었다.
또 한 장의 사진은 같은 장소에서 밤 9시19분에 찍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이태리 국경일 행사장은 800여 명의 참석자들이 스탠딩 파티를 하면서 외교활동을 하는 무대였다. 되도록 많은 인사(人士)와 만나 잠깐씩 환담해야 하기 때문에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사진으로만 보면 내가 행사 시작 전에 덩 여인을 만난 후 두 시간 뒤인 9시19분에 다시 만나 주요인사 연락처 등 기밀자료를 넘겨주었고, 덩 여인이 그 자료들을 촬영한 것처럼 되어 있다. 만약 필자가 덩 여인에게 기밀자료를 넘겨줄 생각이었다면 시간적 여유가 많고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공간을 택하지, 굳이 수백 명이 북적이는 공개적인 행사장을 택할 까닭이 있겠는가?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 나타난 촬영시각 표시는 컴퓨터 폴더상에서 얼마든지 손쉽게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 전문가들이 시연해 본 결과, 조작하는 데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따라서 6시55분의 사진은 정확한 시각이고, 9시19분의 사진은 누군가 시각을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
세 번째 사진은 나와 덩 여인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의 배경을 보면 상하이 밀레니엄 호텔 13층에 있는 클럽 라운지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2010년 9월경, 그곳에서 프랑스 총영사와 면담 중에 덩 여인이 와서 인사를 했고, 개방된 공간인 클럽 라운지여서 사진촬영에 응했던 기억이 났다. 덩 여인은 프랑스 총영사와도 친분이 있어 보였다.
클럽 라운지에는 사진 속 배경과 같이 오른쪽 상단에 액자로 된 그림이 있고, 그림 하단에는 원형의 예술품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밀레니엄 호텔 클럽 라운지의 구조를 모르는 사람들이 사진을 보면 마치 가정집 거실의 소파에 앉아 찍은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사진 폴더가 조작됐다고 보도해
마치 사진 찍힌 장소가 호텔 객실이나 가정집처럼 보이게 해, 나와 덩 여인이 부적절한 관계라고 판단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사실은 사진에 나타난 촬영일자와 시각에도 잘 나타나 있다.
촬영날짜는 2010년 12월 22일 새벽 2시36분으로 되어 있다.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날짜를 12월 22일로 조작한 것은, 문제가 된 법무영사와 경제영사가 자진 귀국한 시점이 11월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 이후에 덩 여인을 만났다고 조작하기 위해 날짜를 바꾼 것이 틀림없었다.
12월 22일 새벽 2시36분이라면 21일의 내 스케줄과 이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사건 경위를 현지조사하게 된 정부 합동조사단 조사관들에게 21일의 내 일정표가 제출되기도 했다. 그날은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정이 꽉 차 있었다. CEFRI 중국경제금융센터 민간초빙연구원들과 만찬을 하고 그 뒤 우리 공관 일부 영사들과 밤 10시30분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밤 10시50분에 관용차로 관저에 도착해서 바로 잠들었다. 관용차는 밤 11시에 총영사관 차고에 입고된 기록이 있다. 술자리를 함께했던 영사들의 증언도 있다.
그런데 새벽 2시36분이라니…. 더구나 호텔 13층 클럽 라운지의 영업 마감시각은 밤 11시다. 잘 알다시피 중국에서 영업 마감시각은 절대적이다. 또한 이 클럽 라운지는 호텔 투숙객이나 VIP 손님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덩 여인과 필자가 그 호텔에 투숙했다면 숙박부에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더구나 사진의 내 모습은 옷매무새가 상당히 단정하다. 새벽까지 함께 있는 여성과 남성의 옷차림이 결코 아니다. 분명한 조작이었다.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실에서도 디지털 폴더상의 사진 정보조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합조단 발표문에도 이런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J’가 총리실에 제공한 폴더 정보와 언론기관(연합뉴스)에 제보한 폴더 정보가 서로 다른 것임은 SBS뉴스에서도 보도됐다. 또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도 사진 폴더가 조작됐다고 사실보도를 했다.
기밀문서로 둔갑한 개인자료들
‘J’의 투서에 첨부된 자료는 모두 4종이다. 일부 언론이 내가 국가기밀문서들을 덩 여인에게 넘겨줬다고 요란을 떤 자료들은 ①MB선대위 비상연락망 ②서울지역 당협위원장 비상연락망 ③서울 선대위 조직본부 비상연락망 ④타이틀이 없는 국회의원 자료였다. 모두 2007년 전후로 작성된 자료들이다. 이것들이 과연 국가기밀문서인가?
더욱이 이 자료들은 내가 4~5년 전에 비닐 코팅해서 집에 보관해 두고 연락처를 찾을 때 이용하던 전화번호부 같은 자료들이다. 실제로는 서울 노원병(丙) 지역 비상연락망까지 다섯 종인데 정보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빠져 있었다. 현재 이 자료들은 내가 원본을 갖고 있는데, 총영사 재임 당시 누군가가 이것을 꺼내 관저의 1층 부엌 싱크대 대리석판 위에 올려놓고 몰래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대선 당시 MB 선거운동 관계자 대다수가 갖고 있던 이 공개된 자료들은 국가기밀도 아니거니와 정보가치도 거의 없다. 이름과 전화번호만 기재돼 있다. 알다시피 그 이후에 대부분의 휴대전화 번호들이 ‘010’으로 바뀌면서 거의 대다수가 완전히 달라졌다.
2008년 총선을 거치면서 등재된 위원장의 절반 이상이 교체되었다. 그리고 서울선대위 조직본부 비상연락망은 대부분이 나하고 개인적으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타이틀이 없는 국회의원 자료는 국회의원 수첩에 노출돼 있는 공개된 자료들이다.
결과적으로 덩 여인이 스파이라면 정보가치도 없는 오래된 자료를 무엇에 쓰려고 요구했단 말인가?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 나를 덩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로 모함하고 그것을 더욱 크게 문제화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도둑 촬영한 것이다.
조작과 음모의 배후
앞에서 밝혔듯, 나와 덩 여인을 부적절한 관계로 모함하고 조작과 허점투성이의 사진과 복사물을 첨부해 국가의 주요기관과 언론기관들에 투서한 인물은 덩 여인의 한국인 남편으로 알려진 ‘J’씨다.
그렇다면 당연히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는 왜 범죄행위를 자행했을까? 투서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무얼까? 그는 첨부한 사진들을 어떻게 습득하고 왜 조작했을까? 또 그러한 조작과 음모를 과연 혼자서 한 것일까? 배후가 있다면 그들은 누구이며 ‘J’를 앞세워 얻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마침내 이른바 ‘상하이 파동’은 화제의 사건으로 크게 부각됐고 정부 해당기관에서도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진상조사에 나섰다.
나는 소명자료를 만들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특별히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터무니없는 조작과 음모가 생겨났을까?
어떻든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결코 ‘J’가 단독으로 실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을 백번 이해해서 덩 여인과 나 사이를 터무니없이 오해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진과 자료들은 누군가의 협조 없이는 취득이 불가능하다.
또 사진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덩 여인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자료들은 누군가 관저에 잠입해 몰래 촬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리고 도둑 촬영한 것을 ‘J’에게 넘겨줬기 때문에 투서에 첨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모자가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관저에 직접 잠입하거나 관저 가정부나 청소부를 매수할 수 있는 공모자는 누구인가?
내 머릿속에는 주저 없이 ‘기관’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부임하고 일 년이 조금 넘은 지난 2009년 8월에 부임했다. 그는 직책의 특성에서 벗어나 부임 초기부터 각종 공식, 비공식 모임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노출시키는가 하면 불필요한 언행이 잦았다.
그가 부임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2009년 11월 3일에 교민 수천 명이 참가한 ‘한민족 큰잔치’ 행사가 열렸다. 헤드 테이블에는 교민지도자들과 총영사 부부가 앉고 부총영사들은 그 옆 테이블에 자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관’ 부부가 느닷없이 헤드 테이블에 앉더니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까지 피우는 등 무례한 행동으로 나이가 지긋한 교민지도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처럼 직책에 맞지 않게 과도한 행동이 되풀이됐다. 나는 은근하게 그가 소속된 본부에 언행의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시정조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 그가 속한 본부에서도 그를 ‘문제 있는 인물’로 보는 기류가 탐지됐다. 그의 강제소환까지 검토했다고 한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나에 대한 원한을 품게 한 것으로 보인다.
‘기관’의 보복
그 뒤 ‘기관’은 나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를 본부로 보냈던 모양이다. 심지어 지나치게 주관적 평가를 담아 본부에서 객관적 보고서를 보내도록 요청한 사실까지 있었다고 한다.
또 내가 18개 한국상회 연합회가 있는 도시들을 순회 방문하는 동안, 연합회의 사무총장이 당시 경제영사를 공개 비판하는 등 교민사회와 총영사관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와 관련해 내가 발언한 내용 가운데 부정적인 부분만 보고한 사실도 추후에 확인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북한과 관련해 발언한 내용이나 강연 내용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보고했다. 내가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양 보고했다.
어쨌든 그러한 것은 나에 대한 ‘기관’의 감정적 처사라고 하자. 그럼 ‘J’와 공모해서 나를 모함함으로써 ‘J’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또 ‘기관’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한 보복일까? ‘J’와 그는 어떻게 의기투합했을까?
내가 이임하기 2주 전인 지난 2월 중순경 나는 심야에 ‘기관’을 관저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내가 ‘J’와의 관계를 묻자, 그는 ‘J’와 일면식도 없고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발뺌했다. 이것은 ‘J’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기관’이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답변한 사실과 크게 어긋난다. 또한 《내일신문》에 이메일을 통해 ‘기관’의 개입설을 언급했고, 그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다며 신변보호 요청을 했다고 보도된 것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J’와 ‘기관’, 그들의 어설픈 합작
그 뒤 내가 여러 경로를 통해 각종 정보를 얻고 확인한 바에 따르면 나의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J’와 ‘기관’의 공모가 있었다는 정황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그에 따라 사건의 경위를 재구성해 보면 그들의 공모 시나리오는 대략 이러하다.
<‘J’는 2010년 8월 서류상 처(妻)로 되어 있는 덩 여인으로부터 계약결혼 파기통보를 받고 상심하다가 ‘기관’을 만나면서 함께 음모를 꾸미게 된다. ‘J’는 덩 여인과 내가 함께 찍은 친밀감이 있어 보이는 사진을 확보한 뒤 부적절한 관계를 주장함으로써 덩 여인을 압박, ‘J’의 명의로 덩 여인이 투자한 재산들을 가로채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기관’은 내가 본부를 통해 자신을 원격 훈련시킨 것에 앙심을 품고, 개인연락처에 불과한 자료들을 국가기밀로 둔갑시켜 나의 정치생명을 끊어 놓고자 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J’는 법률혼 관계로 사실상 동거하지 않는 덩 여인의 집에 잠입해 사진파일을 훔치고, ‘기관’은 내가 아내와 함께 관저를 장시간 비운 시기(2010년 2월 총영사회의 참석, 5월 장모의 장례 때 서울 방문, 9월 업무차 한국방문, 11월 엑스포를 끝내고 미국 LA휴가 등)에 관저에 침입해 내 책상서랍에 보관 중이던 개인연락처 자료들을 직접, 또는 가정부나 청소부를 매수해 확보하는 등의 역할분담을 했다.
‘기관’은 관저 침입을 감추기 위해 내가 잘 모르는 제3의 장소인 부엌을 선택했거나, 가정부나 청소부를 통해 이들이 익숙한 부엌 싱크대 대리석판 위에 놓고 사진촬영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난 3월 22일 아내에게 처음으로 몰래 촬영된 사진을 보여주자 단번에 관저 부엌 싱크대 대리석판이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3년 동안이나 부엌을 드나들었으니 단번에 알아봤다.
‘J’는 ‘기관’의 지도 아래 밀레니엄 호텔 클럽 라운지에서 찍은 사진 폴더의 시각과 날짜를 조작, 마치 나와 덩 여인이 부적절한 관계인 것처럼 꾸민 뒤, 덩 여인에게 약점을 잡힌 내가 힐튼호텔 이태리 국경일 행사장에서 기밀문서(?)들을 직접 넘겨준 것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1단계로 지난해 12월 말, ‘J’는 자신의 이름으로 국내의 관련기관들에 투서했다. 그 영향으로 법무영사가 사직하게 됐고, 동시에 기자들의 특종심리를 자극했다. 이어 2단계로 내가 총영사직을 마치고 이임하자, ‘기관’은 ‘J’를 통해 연합뉴스와 《동아일보》에다 조작된 정보를 흘렸다. 치밀하게 계산된 공작이었다. 특종에 목마른 사회부 기자들을 원격 조종한 것이었다. 그 결과, 사실확인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보도로 필자는 정치생명에 치명상을 입었다. ‘기관’의 음모와 공작은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정부 합동조사단 발표 후 언론에서 대서특필했던 사진은 조작되고 국가기밀은 개인연락처로 결론이 나면서, 신분이 불확실한 제보자와 공모자에게 농락당한 언론이 심한 허탈감을 느꼈다고 한다.
내가 이임을 한 뒤에도 ‘기관’의 수상한 행보는 계속됐다. 시기적으로 민감할 때 불안한 표정으로 관저에 침입하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 그 전에도 관저에 들어가 필요한 정보를 빼내갔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근거였다. 또한 정부 합동조사단이 현지에 도착하기 전, 나에 대한 근거 없는 헛소문을 만들어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에 따라 언론에 보도된 어처구니없는 기사들을 보면, “2010년 11월, 김 총영사가 덩 여인과 함께 LA로 여행갔다.”(연합뉴스), “비자대행권을 주는 데 김 총영사가 압력을 행사했다.”《중앙일보》, “2010년 11월 초,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김 총영사가 ‘기관’의 조사를 방해했다.”《서울신문》 등등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악의적인 음해였다. 물론 합동조사단이 이 모든 보도가 사실무근임을 밝혀주어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다.
11월에 나는 집사람과 함께 LA로 휴가를 다녀왔다. 완전히 공개된 일정이었다. 그 주장대로라면 내가 아내와 덩 여인을 데리고 LA로 휴가를 갔단 말인가? 팩트 자체가 완전 조작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누구며, 언론기관이 나에게 확인도 하지 않고 쓸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정보 제공자가 누구였겠는가.
씁쓸한 합동조사
정부 합동조사단은 현지조사를 하고, 지난 4월 16일 중앙징계위원회를 열어 나의 ‘해임’을 의결했다. 그리고 4월 22일 퇴임을 하루 앞두고 해임 처분되었다. 통상적으로 60일 걸리는 과정을 초고속으로 처리한 결과였다. 해임 처분의 기본골자는 ‘관리소홀’이었다.
내가 재임하는 동안, ‘공관 영사들과 신분이 불확실한 중국여성 덩신밍 사이에 일련의 부적절한 행위들이 발생하고, 그에 대해서 제대로 지휘감독하고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교민사회 등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는 게 핵심이다. 종합적으로 공관장으로서 공관의 기강을 확립하지 못하고 관리가 소홀했다는 것이 가장 큰 해임사유였다.
그러나 ‘징계처분 사유설명서’ 어디에도 내가 덩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였다든가, 국가기밀문서를 유출했다는 지적은 없었다. 오히려 투서에 첨부된 사진들의 조작 가능성을 지적했고, 대수롭지 않은 개인자료지만 누군가 관저에 침입하여 불법촬영된 것도 관리소홀로 지적됐다. 나는 공식적으로 퇴직 하루 전, 법적 책임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으로 해임 처분되었다. 억울했다. 나는 해임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취지의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여기에다 ‘J’를 서울중앙지검에 사진폴더 등을 허위 가공해 ‘출판물에 의해 명예훼손’을 한 혐의로 고소했다. 투서 내용, 보도 경위, 허위날조 과정, 배후 등이 샅샅이 밝혀져야 한다.⊙
문제가 된 조직의 책임자였던 나는 제아무리 열심히 일을 했고, 문제의 여인 ‘덩신밍(鄧新明)’과 사사로운 관계는 없었으며, 상하이 총영사관 조직 내부의 내홍으로 인한 음모와 무고가 사건의 실체라고 하더라도, 국가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미리 막지 못한 정치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상하이 총영사관의 업무 폭증과 ‘관시(關係)’를 중시하는 중국 관료사회의 특징,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한 여인을 국익의 차원에서 활용했으며, 그것 때문에 흔들리는 조직의 밑동을 도려내지 못한 과오는 씻을 수 없다.
나는 구차하게 결백을 주장하거나 재차 진상을 밝혀 변명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해외 공관에 공관장을 두고 그 아래에 정보 요원을 배치해 조직을 이원화(二元化)한 데 따른 문제점을 새삼 들추려는 의도는 더욱 없다.
‘상하이 파동’이 술자리 안줏거리로 회자될 때는 이런 글을 쓸 용기조차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무능한 자의 변명으로만 들릴 것이라는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세월이 약이 됐다.
찾아온 기회
지난 2008년 6월 나는 상하이 총영사 발령을 받고 진심으로 기뻤다. 자랑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20대 초반 펴낸 영어교재가 밀리언셀러가 됐을 만큼 잘나가던 영어강사였다. 그리고 미국에 건너가 로스쿨을 마치고 미국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했다. 귀국 후 40세에는 한국사이버대학교 초대 학장으로 선출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정치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이후 세계패권, 특히 ‘팍스 시니카(Pax Sinica)’를 향해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한중 관계에 대한 연구에 천착했다. 그리고 기회가 찾아왔다.
총영사로 취임한 것은 2008년 6월 13일이었다. 첫 일정은 6월 16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방문이었다. 상하이의 중요성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중국의 수도는 베이징이지만, 상하이는 미래권력을 배출하는 정치적 비중은 물론 무역, 금융, 물류의 중심지이며 중국 개혁과 개방의 상징적인 국제도시다. 세계 65개국이 총영사관을 두고 있다. 세계 500대 글로벌 기업 가운데 450개가 상하이에 진출해 있으며, 그 가운데 150개 회사의 아시아태평양지역본부가 거점을 두고 있다.
10만여 명의 우리 교민과 유학생들이 있고, 삼성전자, LG전자, 하이닉스, 기아자동차, 포스코, 한화석유화학을 비롯하여 무려 3000개의 우리 기업이 총영사관 관할구역인 상하이와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에 자리 잡고 있다. 당연히 총영사관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내가 부임하기 한 달 전인 2008년 5월, 한중 관계가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됐다. 더욱이 2010년에는 상하이세계박람회(EXPO)가 열릴 예정이었다.
총영사관 업무는 교민보호, 비자발급 등 영사업무를 비롯해 경제교류와 우리 기업 지원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외교활동, 교육, 문화 등,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정치인, 당의 중견간부들과의 친분은 물론, 행정기관들과도 원만한 유대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당시 국위를 선양할 2010년 상하이 엑스포를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2009년, 2010년에는 국내에서 대통령, 200명 이상의 국회의원, 대부분의 장차관, 100대 대기업 총수, 문화예술계 지도자 등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VIP들이 모두 상하이를 다녀갔다. 상하이를 찾은 공식방문단도 100개가 넘었다.
문제의 여성, 덩신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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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25일 정부중앙청사에서 ‘상하이 파문’ 관련, 합동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합동조사단은 “중국 여성 덩신밍이 이권을 노리고 한국 영사들에게 접근해 벌어진 공직기강 해이 문제”라고 결론내렸다. |
중국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시(關系)’다. 즉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 한다. 우리 총영사관도 비공식라인으로 활용할 수 있는 ‘관시’가 필요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부각된 인물이 ‘상하이 파동’의 중심인물인 중국 여인 덩신밍이었다. 물론 나는 덩 여인을 알지 못했다. 상하이 총영사관에는 총영사인 나를 비롯해 부총영사, 그리고 정무, 경제, 법무 등 각 분야를 관장하는 22명의 영사, 50여 명의 행정원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덩 여인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일부 영사들은 내가 부임하기 훨씬 전부터 덩 여인과 친분을 유지해 온 것 같았다.
그들에 의하면, 덩 여인은 당시 30세로 일찍이 한국남자와 결혼해 상하이에서도 부유층이 거주하는 지역에 우리 돈으로 시가 30억~40억원을 호가하는 고급 빌라에 살고 있으며, BMW 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자녀도 학비가 1년에 3만 달러가 넘는 외국인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국 최고위층과의 친분이 두텁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관시’가 아주 좋은 여인이어서 우리 영사들도 국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덩 여인은 중국의 최고위층과 돈독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내가 부임하기 전 주중(駐中)대사는 신정승(辛正承)씨였다. 그는 부임 당시부터 중량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로부터 냉랭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2008년 5월 중국의 부총리급으로 공산당 정치국원인 상하이 당서기, 장관급인 상하이 시장과 동시에 면담이 성사됐다고 한다. 덩 여인의 ‘힘’이 없었다면 성사되기 어려운 면담이었다는 게 ‘정무영사’의 설명이었다. 사실 상하이 당서기와 시장을 동시에 면담하는 것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외교가의 통설이다.
내가 총영사로 부임한 직후인 2008년 8월의 일이다. 새로 총영사관에 부임하게 된 ‘경제영사’가 자신의 이삿짐을 옮기면서 민간인의 이삿짐을 함께 통관하려다가 중국해관(세관)에 적발됐다. 중국에서는 이런 유형의 사건을 밀수사건으로 간주한다. 상하이 총영사관이나 외교통상부로서는 상당한 곤경에 빠질 수 있는 일이었다. 나중에 경제영사에게 들어보니 덩 여인이 수완을 발휘해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고 한다.
덩 여인, 저장성에 가 있는 원저우시장을 설명회에 불러오기도
그뿐만 아니다. 2009년 상반기 ‘치안영사’가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와 상하이의 우호도시 협정을 맺는 MOU 체결을 추진해서 9월 25일 협약이 체결되었다. 뜻밖의 성과였다. 상하이는 한국과의 우호도시 체결에 매우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상하이와의 우호도시 체결을 시도하고 있는 서울시가 3년째 전혀 진전이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치안영사는 덩 여인이 주선해 준 덕분이라고 말했다.
2009년 6월에는 저장성 원저우(溫州)시에서 상하이 총영사관 주관으로 대규모 한국투자설명회를 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코트라, 대한무역협회, 은행, 증권, 보험관계자 등 70여 명이 참가했다. 원저우자본(원저우 출신 기업가그룹)은 중국 내 최대자본으로 1000억 달러의 현금 동원능력을 지니고 있다. 미국의 유대자본과 비유되기도 한다. 그만큼 비중이 큰 행사였다.
나의 공항 영접에 나온 원저우시 고위간부는 투자설명회 참석 예정이던 원저우 시장이 행사에 참석할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는 “왜 일정이 바뀌었느냐”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저장성 성장(省長)이 갑작스럽게 원저우시를 방문하게 된 게 그 이유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계속해서 언성을 높이며 항의하자, 실무담당자인 경제영사가 급히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원저우 시장이 참석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덩 여인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원저우 시장은 황급히 예정대로 행사장을 방문해서 축하를 했다. 투자유치설명회는 200여 명의 원저우 자본가들이 참가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덩 여인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여성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덩 여인에 대해 ‘누구누구한테 들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다. 총영사관 업무체계로 볼 때, 각 부문 담당영사들이 있다. 그들이 먼저 해당 업무를 추진하고 원만하게 진행되면 총영사인 나의 결재를 받고 업무를 성사시킨다.
그 과정에서 난관이 생기면 총영사가 나서야 하지만, 대개는 영사들이 업무를 책임지고 처리한다. 이 때문에 덩 여인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자세히 듣게 됐다.
말로만 듣던 덩 여인과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된 것은 내가 총영사로 부임하고 1년이 지난 2009년 10월 1일이었다. 그것도 내가 적극적으로 덩 여인을 만나려고 한 것이 아니다. 10월 1일을 내가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그날이 중국 국경일이기 때문이다.
덩 여인이 총영사에게 한 ‘사소한’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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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 스캔들’의 주인공 덩신밍 씨. 덩 씨의 한국인 남편이 사진을 언론사에 유출했다. |
중국인들은 무척 실용적이다. 은혜를 입으면 반드시 보답하는 것이 관례다. 덩 여인이 우리 영사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면, 우리도 무언가 보답해야 한다. 총영사관은 인허가권을 갖고 있지 않다. 규제기관도 아니다. 경제적 이권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나중에 알았지만 덩 여인이 우리 영사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의외로 손쉬운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비자발급과 관련하여 편리를 봐주는 정도였다. 한국행 비자를 얻으려는 중국 사람이 워낙 많아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비자발급 절차와 심사도 까다로운 편이다. 덩 여인에게 준 우리 영사의 도움은 비자를 빨리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해준 정도였다. 물론 총영사인 나에게는 일일이 보고할 사항도 아니었다.
정부합동조사 과정에서 밝혀졌지만 덩 여인과 관련된 비자발급에서 불법행위는 없었다. 단순한 지침위반이 있었을 뿐이다. 덩 여인은 거주비자(F-2)를 소지하고 있었다. 어느 날, 비자를 분실했다며 비자신청을 했다. 덩 여인이 신청한 복수비자(단기종합비자·C-3)는 당일 발급됐다. 언론에서 보도한 것과는 달리, 비자를 부정 발급한 것이 아니라 이중 발급을 금하고 있는 지침을 위반한 것이다. 이는 법무부 출입국관리본부의 대변인 성명에서도 확인됐다. 분실된 여권의 유효기간이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덩 여인의 비자발급 과정에서 중국 출입경관리국 부국장의 부탁이 있었다는 얘기를 훗날 법무영사로부터 들었다.)
두 영사의 갈등이 드러나다
‘2010 상하이 엑스포’(2010.5.1~ 10.31)가 열렸다. 세계 최대의 경제행사로 192개 국가, 52개 국제기구, 기업관(18개), 도시관(50개) 등이 참가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나는 ‘대한민국 정부 교체대표’로 임명됐다. 한국관, 기업연합관, 서울도시관 등의 운영을 총괄 지휘했다.
엑스포를 앞두고 국내 최고위층 인사들과 단체장들이 잇달아 상하이를 방문했다. 나는 이들을 영접해야 했다. 중국의 고위층과의 면담을 주선해야 했다. 지난해 4월에는 유명환(柳明桓) 당시 외교부장관이 방문했다. 상하이 시장과의 면담이 꼭 필요했고 내가 직접 나서서 적극 주선할 일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엑스포라는 특수상황에서 상하이 시장의 면담 대상은 총리급 이상으로 제한된 상황이었다. 덩 여인이 떠올랐다. 공식 석상에서 그가 상하이 영도자들과 아주 친밀하게 환담하는 모습을 몇 차례 목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직자가 아닌 덩 여인을 공식 절차를 통해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만나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경제영사’에게 지시해 덩 여인에게 연락을 취했다. 상하이 시내 메리어트 호텔 라운지에서 경제영사와 함께 그녀를 만났다. 나는 덩 여인에게 정중하게 부탁했고 그녀가 받아들였다. 그러나 절차상의 문제로 공식, 비공식 라인이 충돌하면서 면담이 성사되지 않았다. 이것이 내가 직접 나서서 덩 여인에게 부탁한 전부다.
유 장관에 이어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상하이 엑스포 개막에 맞춰 2010년 4월 30일과 5월 1일 이틀간 상하이를 공식 방문할 예정이었다.
총영사관은 태스크포스까지 설치, 후진타오 주석과의 한중 정상회담, 대기업 CEO 간담회, 교민 환영회, 상하이 엑스포 개막식 참석 등 이 대통령이 여러 일정을 원만히 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대통령이 거쳐간 ‘한국관’은 엑스포 전체 관람객의 10%에 해당하는 725만명을 유치했다. 중국관 다음으로 단독 해외국가관 가운데서는 최다 관람객 수를 기록했다. BIE(세계박람회 사무국)로부터 건축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기업연합관은 관람객 수 470만명으로 기업관 가운데 3위를 차지, ‘체험이 풍부한 전시관’ ‘엑스포 오스카상’ ‘과학기술상’ 등을 수상했다.
그런데 엑스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감춰져 있던 두 영사의 갈등이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사건의 불씨였으며, 중심인물은 엉뚱하게도 덩 여인이었다.
뜻밖의 投書, 사건의 불씨가 되다
총영사관의 여러 영사 가운데 ‘경제영사’가 있었다. 담당업무의 특성상 그는 누구보다 먼저 덩 여인을 알게 됐고 여러 차례 업무 도움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법무영사’는 단신으로 부임했다. 그의 부인은 1년 뒤인 지난해 8월 상하이에 왔지만 부부간 불화가 심했다. 안타깝게도 내가 어떻게 개입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덩 여인이 경제영사를 갑자기 멀리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경제영사는 그 이유가 덩 여인과 법무영사가 가까워졌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실은 상하이로 들어온 법무영사 부인에게 알려졌다. 경제영사와 법무영사는 서로 반목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생각보다 심각한 것으로 파악한 나는, ‘기관’에게 총영사관 내부의 일이니 조용히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단 한 차례 관련 보고를 받았다.
지난해 10월 31일 6개월간의 상하이 엑스포가 끝나던 날, 나는 한국정부의 대표로 폐막식에 참석해 상하이 지도자와 환담하는 중에 덩 여인이 옆에 서 있어서 인사했다.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경제영사, 법무영사와의 문제가 떠올랐지만 별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11월 2일, 엑스포를 차질 없이 끝냈다는 해방감으로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총영사인 내 앞으로 한 통의 투서가 전달되었다. 익명이었다. 내용도 ‘카더라’식이었다. 요점은 법무영사와 덩 여인이 부적절한 내연 관계이며 비자발급에도 법무영사와 덩 여인이 연관돼 있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민원영사’에게도 교민투서가 있었는데 법무영사의 비자발급과 관련해서 덩 여인이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투서도 익명이었다. 추후 추적 감찰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져 ‘제1 부총영사’에게 임의 보관하도록 지시한 적이 있었다.
두 통의 투서가 모두 익명이었고 내용이 동일했으며 겉봉투의 수신자만 달랐다. 익명투서는 규정에 따라 원칙적으로 처리대상이 아니었다. 더욱이 내용이 법무영사에 대한 음해성격이 짙었다. 투서자가 실명이었다면 당연히 법무영사와 관련해서 정식으로 내사(內査)를 지시할 사항이었지만 익명이었기에 나는 법무영사를 불러 구두 해명을 요청했다. 그때 법무영사는 투서내용을 강력히 부인했다.
술렁이는 교민사회… 불륜 관계 벽보 나붙어
그런데 법무영사 부인이 “남편에게 폭행당했다”며 총영사인 나를 만나려 했다. 나는 민원실장인 제1 부총영사에게 면담을 하도록 지시했다. 법무영사가 부인을 폭행했는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공관장이 가정사에 개입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서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1월 5일에는 경제영사와 법무영사 부인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내용의 벽보가 교민사회에 나붙었다. 법무영사와 덩 여인의 불륜설이 나돌고, 경제영사는 법무영사 부인과 불륜 관계라는 벽보가 나붙자 교민사회가 크게 술렁거렸다. 더욱이 법무영사 부인이 교민사회에 계속 떠들고 다니면서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사적인 문제였지만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1월 7일 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두 영사의 해명을 들었고, 두 차례에 걸쳐 법무영사와 경제영사의 대질심문까지 했다. 그러나 총영사관은 수사기관이 아닐 뿐 아니라, 당사자들이 일관되게 부인하니 소문과 익명의 투서만 가지고는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나는 당사자들을 조기 귀국시키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 무렵 외교통상부가 특채파동으로 언론의 뭇매를 맞고 있었는데, 해외공관의 불미스런 일까지 터진다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다.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관련 부처의 책임자들인 외교부 차관, 지식경제부 차관, 법무부 출입국관리본부장과 구두로 협의했다.
그리고 본부에 구두 보고한 뒤 승인을 얻어 법무영사와 경제영사로 하여금 자진 귀국하도록 조치했다. 그로써 모든 일은 일단락됐다.
‘J’와 덩의 관계는…
2010년 12월 말, 법무부, 외교부, 총리실, 청와대 등 관계기관과 국내 언론기관에 투서가 들어갔다. 투서자는 덩 여인의 한국인 남편으로 알려진 ‘J’씨였다. 그는 투서에서 “나의 처인 중국여성 덩신밍과 2~3명의 영사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으며, 그녀에게 국가의 기밀문서들을 유출했다”고 주장했다.
언론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삿거리였다. 몇몇 언론은 곧장 ‘스캔들’로 포장해 앞다퉈 보도했다. 그들이 기자의 본분인 사실(Fact) 확인 절차를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고 나는 확신한다. 몇 차례의 조사에서 나도 확인 못 한 것을 아무리 그런 일에 전문인 기자라고 어떻게 그렇게 빨리 했겠는가. 나로서는 억울한 심정보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터무니없이 날조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면 먼저 덩 여인의 한국인 남편이라는 ‘J’부터 알아야 한다. ‘J’는 10여 년 전에 덩 여인과 결혼한 것으로 교민사회에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들의 결혼행태가 이상했다. 우선 함께 살지 않았다. 덩 여인은 상하이 최고 상류층과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고급빌라에 살았다. ‘J’는 주로 한국 교민들이 거주하는 시가 3억~4억원 정도 하는 아파트에 살았다.
나는 그러한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됐지만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사생활일 뿐이었다. 덩 여인은 공적으로 우리 총영사관에 많은 도움을 준 ‘관시’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훨씬 뒤에 언론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J’와 덩 여인은 정식 부부 관계가 아니라 일종의 ‘계약결혼’과 같은 관계였다. 그들이 왜 그런 계약을 하게 됐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2010년 8월경, 덩 여인이 ‘계약결혼’ 관계를 파기하자고 통보했다고 한다.
문제의 사진 세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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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기 전 총영사는 지난해 6월 1일 이태리 국경일 행사가 열린 상하이 힐튼호텔 컨벤션홀 로비에서 덩신밍을 만나 사진촬영에 응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곁에는 파크 하얏트의 총지배인이 있었고 호텔 요리사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
나중에 세 장의 사진을 보았다. 두 장의 사진은 덩 여인과 나, 단둘이 찍은 사진이었고, 나머지 사진 한 장은 개인연락처가 적힌 문서 사진이었다. 문서 사진과 같은 날 찍은 것으로 보이는 사진의 장소는 2010년 6월 1일, 이태리 국경일 행사가 열린 상하이 힐튼호텔 컨벤션홀 로비였다. 사진에 나타난 촬영시각은 오후 6시55분. 저녁 7시 행사가 시작되기 직전 그곳에 온 덩 여인을 우연히 만났을 때 찍은 것 같다.
당시 내 옆에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파크 하얏트의 총지배인 크리스토퍼 부부가 함께 있었다. 사진의 오른쪽에는 요리사가 요리를 하고 있었고 나는 왼손에 와인잔을 들고 있었다. 공개 장소에서 우연히 찍힌 사진이었다. 그런데 내가 덩 여인의 어깨에 오른손을 올렸다고 해서 문제의 사진이 되어버렸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정말 부적절한 관계였다면 공개된 외교행사장에서 일부러 그걸 드러낼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당시는 영사들과 문제가 불거지기 여러 달 전이었다.
또 한 장의 사진은 같은 장소에서 밤 9시19분에 찍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당시 이태리 국경일 행사장은 800여 명의 참석자들이 스탠딩 파티를 하면서 외교활동을 하는 무대였다. 되도록 많은 인사(人士)와 만나 잠깐씩 환담해야 하기 때문에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사진으로만 보면 내가 행사 시작 전에 덩 여인을 만난 후 두 시간 뒤인 9시19분에 다시 만나 주요인사 연락처 등 기밀자료를 넘겨주었고, 덩 여인이 그 자료들을 촬영한 것처럼 되어 있다. 만약 필자가 덩 여인에게 기밀자료를 넘겨줄 생각이었다면 시간적 여유가 많고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공간을 택하지, 굳이 수백 명이 북적이는 공개적인 행사장을 택할 까닭이 있겠는가?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 나타난 촬영시각 표시는 컴퓨터 폴더상에서 얼마든지 손쉽게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 전문가들이 시연해 본 결과, 조작하는 데 불과 5분도 걸리지 않았다. 따라서 6시55분의 사진은 정확한 시각이고, 9시19분의 사진은 누군가 시각을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
세 번째 사진은 나와 덩 여인이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의 배경을 보면 상하이 밀레니엄 호텔 13층에 있는 클럽 라운지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2010년 9월경, 그곳에서 프랑스 총영사와 면담 중에 덩 여인이 와서 인사를 했고, 개방된 공간인 클럽 라운지여서 사진촬영에 응했던 기억이 났다. 덩 여인은 프랑스 총영사와도 친분이 있어 보였다.
클럽 라운지에는 사진 속 배경과 같이 오른쪽 상단에 액자로 된 그림이 있고, 그림 하단에는 원형의 예술품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밀레니엄 호텔 클럽 라운지의 구조를 모르는 사람들이 사진을 보면 마치 가정집 거실의 소파에 앉아 찍은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사진 폴더가 조작됐다고 보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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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기 전 총영사는 “덩신밍과 지난해 12월 22일 새벽 2시36분 만났다고 사진 폴더가 조작됐다”며 “그해 9월경 상하이 밀레니엄 호텔 13층에서 프랑스 총영사와의 면담 도중 잠시 만나 사진촬영에 응했다”고 했다. |
촬영날짜는 2010년 12월 22일 새벽 2시36분으로 되어 있다.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날짜를 12월 22일로 조작한 것은, 문제가 된 법무영사와 경제영사가 자진 귀국한 시점이 11월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그 이후에 덩 여인을 만났다고 조작하기 위해 날짜를 바꾼 것이 틀림없었다.
12월 22일 새벽 2시36분이라면 21일의 내 스케줄과 이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나중에 사건 경위를 현지조사하게 된 정부 합동조사단 조사관들에게 21일의 내 일정표가 제출되기도 했다. 그날은 아침 9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정이 꽉 차 있었다. CEFRI 중국경제금융센터 민간초빙연구원들과 만찬을 하고 그 뒤 우리 공관 일부 영사들과 밤 10시30분까지 술을 마셨다. 그리고 밤 10시50분에 관용차로 관저에 도착해서 바로 잠들었다. 관용차는 밤 11시에 총영사관 차고에 입고된 기록이 있다. 술자리를 함께했던 영사들의 증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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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기 전 총영사는 “덩신밍과 사진 찍은 곳은 밀레니엄 호텔 클럽 라운지”라며 “호텔 객실이나 가정집처럼 밀폐된 공간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실에서도 디지털 폴더상의 사진 정보조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합조단 발표문에도 이런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J’가 총리실에 제공한 폴더 정보와 언론기관(연합뉴스)에 제보한 폴더 정보가 서로 다른 것임은 SBS뉴스에서도 보도됐다. 또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도 사진 폴더가 조작됐다고 사실보도를 했다.
기밀문서로 둔갑한 개인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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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과 정치인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등재된 ‘비상연락망’ 사진. 김정기 전 총영사는 “9시19분에 찍힌 사진은 누군가 시각을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
더욱이 이 자료들은 내가 4~5년 전에 비닐 코팅해서 집에 보관해 두고 연락처를 찾을 때 이용하던 전화번호부 같은 자료들이다. 실제로는 서울 노원병(丙) 지역 비상연락망까지 다섯 종인데 정보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빠져 있었다. 현재 이 자료들은 내가 원본을 갖고 있는데, 총영사 재임 당시 누군가가 이것을 꺼내 관저의 1층 부엌 싱크대 대리석판 위에 올려놓고 몰래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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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기 전 총영사는 “누군가 관저에 침입, 비상연락망을 꺼내 관저의 1층 부엌 싱크대 대리석판 위에 올려놓고 몰래 촬영했다”고 주장한다. “총영사 관저 부엌 싱크대 대리석 문양과 비상연락망 뒷배경 문양이 비슷하다”는 입장이다. |
2008년 총선을 거치면서 등재된 위원장의 절반 이상이 교체되었다. 그리고 서울선대위 조직본부 비상연락망은 대부분이 나하고 개인적으로 친분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타이틀이 없는 국회의원 자료는 국회의원 수첩에 노출돼 있는 공개된 자료들이다.
결과적으로 덩 여인이 스파이라면 정보가치도 없는 오래된 자료를 무엇에 쓰려고 요구했단 말인가?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누군가 나를 덩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로 모함하고 그것을 더욱 크게 문제화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도둑 촬영한 것이다.
조작과 음모의 배후
앞에서 밝혔듯, 나와 덩 여인을 부적절한 관계로 모함하고 조작과 허점투성이의 사진과 복사물을 첨부해 국가의 주요기관과 언론기관들에 투서한 인물은 덩 여인의 한국인 남편으로 알려진 ‘J’씨다.
그렇다면 당연히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는 왜 범죄행위를 자행했을까? 투서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무얼까? 그는 첨부한 사진들을 어떻게 습득하고 왜 조작했을까? 또 그러한 조작과 음모를 과연 혼자서 한 것일까? 배후가 있다면 그들은 누구이며 ‘J’를 앞세워 얻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일까?
마침내 이른바 ‘상하이 파동’은 화제의 사건으로 크게 부각됐고 정부 해당기관에서도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진상조사에 나섰다.
나는 소명자료를 만들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특별히 원한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터무니없는 조작과 음모가 생겨났을까?
어떻든 많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결코 ‘J’가 단독으로 실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을 백번 이해해서 덩 여인과 나 사이를 터무니없이 오해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진과 자료들은 누군가의 협조 없이는 취득이 불가능하다.
또 사진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덩 여인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자료들은 누군가 관저에 잠입해 몰래 촬영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리고 도둑 촬영한 것을 ‘J’에게 넘겨줬기 때문에 투서에 첨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모자가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관저에 직접 잠입하거나 관저 가정부나 청소부를 매수할 수 있는 공모자는 누구인가?
내 머릿속에는 주저 없이 ‘기관’이 떠올랐다. 그는 내가 부임하고 일 년이 조금 넘은 지난 2009년 8월에 부임했다. 그는 직책의 특성에서 벗어나 부임 초기부터 각종 공식, 비공식 모임에서 자신을 지나치게 노출시키는가 하면 불필요한 언행이 잦았다.
그가 부임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은 2009년 11월 3일에 교민 수천 명이 참가한 ‘한민족 큰잔치’ 행사가 열렸다. 헤드 테이블에는 교민지도자들과 총영사 부부가 앉고 부총영사들은 그 옆 테이블에 자리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기관’ 부부가 느닷없이 헤드 테이블에 앉더니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까지 피우는 등 무례한 행동으로 나이가 지긋한 교민지도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처럼 직책에 맞지 않게 과도한 행동이 되풀이됐다. 나는 은근하게 그가 소속된 본부에 언행의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시정조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때 그가 속한 본부에서도 그를 ‘문제 있는 인물’로 보는 기류가 탐지됐다. 그의 강제소환까지 검토했다고 한다.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이 그로 하여금 나에 대한 원한을 품게 한 것으로 보인다.
‘기관’의 보복
그 뒤 ‘기관’은 나에 대한 부정적인 보고를 본부로 보냈던 모양이다. 심지어 지나치게 주관적 평가를 담아 본부에서 객관적 보고서를 보내도록 요청한 사실까지 있었다고 한다.
또 내가 18개 한국상회 연합회가 있는 도시들을 순회 방문하는 동안, 연합회의 사무총장이 당시 경제영사를 공개 비판하는 등 교민사회와 총영사관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와 관련해 내가 발언한 내용 가운데 부정적인 부분만 보고한 사실도 추후에 확인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북한과 관련해 발언한 내용이나 강연 내용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보고했다. 내가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양 보고했다.
어쨌든 그러한 것은 나에 대한 ‘기관’의 감정적 처사라고 하자. 그럼 ‘J’와 공모해서 나를 모함함으로써 ‘J’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또 ‘기관’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한 보복일까? ‘J’와 그는 어떻게 의기투합했을까?
내가 이임하기 2주 전인 지난 2월 중순경 나는 심야에 ‘기관’을 관저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내가 ‘J’와의 관계를 묻자, 그는 ‘J’와 일면식도 없고 전화번호도 모른다고 발뺌했다. 이것은 ‘J’가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기관’이 이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답변한 사실과 크게 어긋난다. 또한 《내일신문》에 이메일을 통해 ‘기관’의 개입설을 언급했고, 그로부터 협박을 받고 있다며 신변보호 요청을 했다고 보도된 것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J’와 ‘기관’, 그들의 어설픈 합작
그 뒤 내가 여러 경로를 통해 각종 정보를 얻고 확인한 바에 따르면 나의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J’와 ‘기관’의 공모가 있었다는 정황들이 하나씩 드러났다. 그에 따라 사건의 경위를 재구성해 보면 그들의 공모 시나리오는 대략 이러하다.
<‘J’는 2010년 8월 서류상 처(妻)로 되어 있는 덩 여인으로부터 계약결혼 파기통보를 받고 상심하다가 ‘기관’을 만나면서 함께 음모를 꾸미게 된다. ‘J’는 덩 여인과 내가 함께 찍은 친밀감이 있어 보이는 사진을 확보한 뒤 부적절한 관계를 주장함으로써 덩 여인을 압박, ‘J’의 명의로 덩 여인이 투자한 재산들을 가로채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기관’은 내가 본부를 통해 자신을 원격 훈련시킨 것에 앙심을 품고, 개인연락처에 불과한 자료들을 국가기밀로 둔갑시켜 나의 정치생명을 끊어 놓고자 한 것이었다.
그에 따라 ‘J’는 법률혼 관계로 사실상 동거하지 않는 덩 여인의 집에 잠입해 사진파일을 훔치고, ‘기관’은 내가 아내와 함께 관저를 장시간 비운 시기(2010년 2월 총영사회의 참석, 5월 장모의 장례 때 서울 방문, 9월 업무차 한국방문, 11월 엑스포를 끝내고 미국 LA휴가 등)에 관저에 침입해 내 책상서랍에 보관 중이던 개인연락처 자료들을 직접, 또는 가정부나 청소부를 매수해 확보하는 등의 역할분담을 했다.
‘기관’은 관저 침입을 감추기 위해 내가 잘 모르는 제3의 장소인 부엌을 선택했거나, 가정부나 청소부를 통해 이들이 익숙한 부엌 싱크대 대리석판 위에 놓고 사진촬영을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난 3월 22일 아내에게 처음으로 몰래 촬영된 사진을 보여주자 단번에 관저 부엌 싱크대 대리석판이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3년 동안이나 부엌을 드나들었으니 단번에 알아봤다.
‘J’는 ‘기관’의 지도 아래 밀레니엄 호텔 클럽 라운지에서 찍은 사진 폴더의 시각과 날짜를 조작, 마치 나와 덩 여인이 부적절한 관계인 것처럼 꾸민 뒤, 덩 여인에게 약점을 잡힌 내가 힐튼호텔 이태리 국경일 행사장에서 기밀문서(?)들을 직접 넘겨준 것으로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1단계로 지난해 12월 말, ‘J’는 자신의 이름으로 국내의 관련기관들에 투서했다. 그 영향으로 법무영사가 사직하게 됐고, 동시에 기자들의 특종심리를 자극했다. 이어 2단계로 내가 총영사직을 마치고 이임하자, ‘기관’은 ‘J’를 통해 연합뉴스와 《동아일보》에다 조작된 정보를 흘렸다. 치밀하게 계산된 공작이었다. 특종에 목마른 사회부 기자들을 원격 조종한 것이었다. 그 결과, 사실확인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보도로 필자는 정치생명에 치명상을 입었다. ‘기관’의 음모와 공작은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정부 합동조사단 발표 후 언론에서 대서특필했던 사진은 조작되고 국가기밀은 개인연락처로 결론이 나면서, 신분이 불확실한 제보자와 공모자에게 농락당한 언론이 심한 허탈감을 느꼈다고 한다.
내가 이임을 한 뒤에도 ‘기관’의 수상한 행보는 계속됐다. 시기적으로 민감할 때 불안한 표정으로 관저에 침입하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 그 전에도 관저에 들어가 필요한 정보를 빼내갔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근거였다. 또한 정부 합동조사단이 현지에 도착하기 전, 나에 대한 근거 없는 헛소문을 만들어 언론 플레이를 했다.
그에 따라 언론에 보도된 어처구니없는 기사들을 보면, “2010년 11월, 김 총영사가 덩 여인과 함께 LA로 여행갔다.”(연합뉴스), “비자대행권을 주는 데 김 총영사가 압력을 행사했다.”《중앙일보》, “2010년 11월 초,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김 총영사가 ‘기관’의 조사를 방해했다.”《서울신문》 등등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악의적인 음해였다. 물론 합동조사단이 이 모든 보도가 사실무근임을 밝혀주어 그나마 위안을 삼고 있다.
11월에 나는 집사람과 함께 LA로 휴가를 다녀왔다. 완전히 공개된 일정이었다. 그 주장대로라면 내가 아내와 덩 여인을 데리고 LA로 휴가를 갔단 말인가? 팩트 자체가 완전 조작된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누구며, 언론기관이 나에게 확인도 하지 않고 쓸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정보 제공자가 누구였겠는가.
씁쓸한 합동조사
정부 합동조사단은 현지조사를 하고, 지난 4월 16일 중앙징계위원회를 열어 나의 ‘해임’을 의결했다. 그리고 4월 22일 퇴임을 하루 앞두고 해임 처분되었다. 통상적으로 60일 걸리는 과정을 초고속으로 처리한 결과였다. 해임 처분의 기본골자는 ‘관리소홀’이었다.
내가 재임하는 동안, ‘공관 영사들과 신분이 불확실한 중국여성 덩신밍 사이에 일련의 부적절한 행위들이 발생하고, 그에 대해서 제대로 지휘감독하고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교민사회 등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는 게 핵심이다. 종합적으로 공관장으로서 공관의 기강을 확립하지 못하고 관리가 소홀했다는 것이 가장 큰 해임사유였다.
그러나 ‘징계처분 사유설명서’ 어디에도 내가 덩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였다든가, 국가기밀문서를 유출했다는 지적은 없었다. 오히려 투서에 첨부된 사진들의 조작 가능성을 지적했고, 대수롭지 않은 개인자료지만 누군가 관저에 침입하여 불법촬영된 것도 관리소홀로 지적됐다. 나는 공식적으로 퇴직 하루 전, 법적 책임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으로 해임 처분되었다. 억울했다. 나는 해임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취지의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여기에다 ‘J’를 서울중앙지검에 사진폴더 등을 허위 가공해 ‘출판물에 의해 명예훼손’을 한 혐의로 고소했다. 투서 내용, 보도 경위, 허위날조 과정, 배후 등이 샅샅이 밝혀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