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초 수용목적에 쓰지 않는다면 돌려받아야
⊙ 정부와 주민들 간 신뢰가 무너진 것이 가장 큰 손실
⊙ 2월 설 연휴 때 여론 흐름이 수정안 운명 가를 듯
⊙ 정부와 주민들 간 신뢰가 무너진 것이 가장 큰 손실
⊙ 2월 설 연휴 때 여론 흐름이 수정안 운명 가를 듯
- 2009년 1월 11일,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 발표된 후 ‘행정도시 원안사수 충청권 연대회의 회원’들이 충남 연기군청 마당에서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정부가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하던 1월 11일 오전 10시, 기자는 충남 연기군 조치원 역사(驛舍)를 막 빠져나가고 있었다. 대합실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몇몇의 사람들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채 TV를 통해 나오는 정운찬(鄭雲燦) 국무총리의 세종시 수정안 발표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 시간 조치원은 대한민국 뉴스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지만, 역의 풍경은 여느 시골이나 다름없이 평온했다.
연기군청에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는 농성자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택시를 타고 군청(郡廳)으로 향했다. 군청 정문을 들어서자 왼쪽 마당 앞에 천막이 하나 보였다. 한 번에 20명은 족히 둘러앉을 만한 크기의 천막 안에는 전기장판과 히터·TV 등이 갖춰져 있어 천막을 친 지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유한식(兪漢植) 연기군수가 10여 명의 주민과 함께 천막농성장 안에서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발표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정안은 원안에서 행정부처만 뺀 것”
굳은 표정으로 TV를 지켜본 유 군수와 주민들은 농성장 앞으로 나와 기자회견을 했다. 유 군수는 “정부가 발표한 세종시 수정안 내용은 이미 원안에 다 포함되어 있던 것”이라며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이 행정기능 이전만 백지화된 이번 수정안을 수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정부가 발표한 수정안의 핵심은 기존 ‘행정중심복합도시’를 ‘교육과학중심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원안은 9부2처2청의 정부 부처(部處)를 옮기겠다고 했지만, 수정안은 이를 전면 백지화(白紙化)하고 대신 삼성·롯데 같은 대기업과 고려대·카이스트(KAIST) 같은 대학을 유치하기로 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기자는 군수실에서 유한식 군수와 만났다. 군청 앞 천막에서 주민들과 릴레이식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유 군수의 얼굴은 초췌했다. 유 군수는 “오늘 수정안은 외부인들이 보면 대단히 거창해 보이지만 정부 부처 이전계획을 제외하기 위한 것이 핵심내용”이라고 말했다. 유 군수의 설명이다.
“기존의 행정중심복합도시는 정부기관 이전을 핵심 내용으로 하면서, 기업도시를 함께 추진했던 사업이었습니다. 의료·복지, 첨단지식산업, 교육·연구기관, 국제·문화 시설 등이 모두 포함된 복합도시이자 자족도시로 설계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심’인 행정이 빠지면 그냥 단순한 기업도시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기업도시 유치하자고 수백 년 삶의 터전을 버리는 희생을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유 군수는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려 12차례나 행정도시에 대해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며 “대통령의 약속이 이렇게 쉽게 뒤집히는데 앞으로 무슨 약속을 한들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세상에 이런 나라도 있습니까. 정부시책에 의해 5년간 추진되었고, 예산의 4분의 1이 집행된 국가사업을 뿌리째 뒤바꾸는 경우가 있는지요? 우리는 지금 신뢰를 배신당한 것입니다. 이주민들은 지금 애초 수용목적으로 쓰이지 않는다면 사기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다시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연대회의 “영호남에서 이런 欺罔행위 할 수 있나”
오후 2시가 되자 군청 앞마당이 다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행정도시 원안사수 충청권 연대회의’란 단체에서 ‘원안사수 투쟁 선포식’을 연 것이다. 연대회의는 성명서에서 “이명박 정권이 과연 영호남을 대상으로도 이런 기망행위를 시도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집회에 참석한 100여 명이 머리에 ‘행정도시 사수’라는 붉은 띠를 맨 채 연방 과격한 구호를 외쳤다.
집회장에서 만난 행정도시사수 연기군 대책위원회 김성구(金成九·56) 위원장은 “세종시 규모가 7290만㎡(2200만평)인데 이는 연기군 면적의 절반에 해당한다”며 “연기군의 노른자위 땅이 모두 행정도시에 포함됐기 때문에 이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연기군은 앞으로 미래가 없는 기형적인 군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먼저 행정도시를 하자고 한 것이 아니잖으냐”며 “정부의 배신으로 연기군민과 충청도민의 자존심에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행정도시 사업을 무슨 청계천 사업 대하듯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택시를 타고 세종시 건설 부지를 돌아보았다. 군데군데 부지 조성을 위한 중장비만 보일 뿐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이 있던 곳은 빈집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고, 종촌면이란 곳은 아예 면 소재지 자체가 없어졌다.
3년 전 조치원 읍내에 아파트를 사서 이주한 이완수(李完秀)씨는 “이주민들은 주로 연기군에 70%가 살고 있고, 나머지는 주변 공주나 대전, 청원군 등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고 말했다. 이주 전에는 종촌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작은 가게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이주민 향우회 대표를 맡고 있다. 이주민 2000명 정도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고 한다. 그는 “고향을 떠난 대부분의 사람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그냥 놀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사는 아파트 33평형이 현재 1억5000만원입니다. 2년 전 보상비 받아서 이주할 때 많은 사람이 2억2000만원에 분양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비싸게 분양받아 왔는데 아파트 미분양으로 값이 내려가 손해를 본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씨에 의하면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제기된 노무현 정부 때부터 조치원읍 내에는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 아파트 대부분은 시세 차익을 노린 서울 등의 외지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많은 아파트가 들어서다 보니 분양이 안돼 부도난 건설회사도 많다고 했다. 이완수씨 본인이 사는 아파트도 미분양으로 건설회사가 자금난에 시달리자 2억2000만원짜리를 1억5000만원에 공매처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민들은 왜 그렇게 쉽게 이주에 동의했는지요.
“당시 입주권만 되팔아도 2억~3억원은 받는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시골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 와중에 그해를 넘기면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도시를 추진하지 못할 것이라는 온갖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합의를 해 준 것입니다. 주민들은 이런 국책사업을 처음 겪는 노인들이고, 상대는 노련한 토지공사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들의 수완에 놀아난 것 같아요.”
“심각하게 손상된 자존심이 문제”
세종시 문제는 처음부터 정치적 타산 속에서 탄생했다. 결국은 문제 해결의 열쇠도 정치권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년 12월 초 세종시 원안고수를 주장하며 현직을 사퇴한 이완구(李完九) 전 충남지사는 “수정안 발표는 새로운 논쟁의 출발점”이라며 “결국 이명박 대통령에게 모든 부담이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정안대로 실제 추진하기 위해 법률 준비 하고 세부 설계 하는 등 준비하는 데 최소 2년이 걸립니다. 제가 지사직에 있으면서 프로젝트를 많이 해 봐서 잘 압니다. 그렇다면 그 2년 동안은 어떤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정치인들이 대통령에게 ‘도대체 세종시 수정안 만들어 놓고 해 놓은 것이 뭐냐’고 엄청나게 공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는 “한 치 앞을 못 보는 참모들이 이 대통령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전 지사는 또한 “현재 조성된 토지를 평당 40만원 안팎에 기업에 분양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시장 교란”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큰 틀을 깨는 것이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수정안에 쉽게 동의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전 지사는 “이번 수정안은 국가균형발전, 수도권 과밀화, 충청권의 근본적인 발전, 혁신도시와의 관계, 타(他) 도시와의 역차별 문제 등 애초 행정중심도시가 추진되었던 문제의 본질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따라서 세종시 문제는 수정안 발표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 표류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이 전 지사는 “지금 충청주민들은 정부가 충청도를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상태”라며 “정치권은 당리당략(黨利黨略)이 아닌 국가라는 큰 틀에서 문제를 봐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고 말했다.
역시 충남지사를 지낸 심대평(沈大平) 의원은 충남 연기군이 지역구다. 그는 이번 정부 발표와 관련해서 ‘충청권 자주결정론’이라는 것을 주창하고 나섰다. 즉 세종시에 대해 더는 정부나 정치권에 끌려다니지 않고 충청도민의 의사를 반영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심 의원의 설명이다.
“저는 앞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충청 주민의 마음을 달래는 데 최선을 다할 겁니다. 현재 국가 정책 지도자 중에 충청인들의 정서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행정기능의 반이라도 옮기자고 해서 추진된 사업입니다. 이런 것을 지역 정서를 모르는 사람들이 나서서 하루아침에 뒤집었으니 얼마나 배신감과 낙담이 크겠습니까.”
그는 “충청도가 서울이 된다는 자긍심이 아니었으면 주민들이 이주에 대한 거의 아무런 민원도 일으키지 않고, 희생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번 사태로 정부와 충청도민 간에 신뢰가 무너진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충청인들의 상한 마음은 모른 채 ‘이때다’ 하며 지역에 내려와서 이 지역 민심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충청인은 이 지역을 정쟁의 도구나 희생물로 삼는 것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 東西 양상 띤 여론 … 대세는 설 연휴 후 결판날 듯
정치권만 떼놓고 보면 세종시 여론은 복잡다단하다. 여야뿐 아니라 여당 내 ‘전쟁’도 일촉즉발이다. 여기에다 지역구에 따라 다르고 지역의 사정에 따라서도 또 다르다. 어느 한쪽으로 현저하게 기울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는 세종시 수정안 발표 후 수정안의 국회통과 열쇠를 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의견을 분석했다. 수정안에 대해 찬성 50%, 반대 20%, 유보 21%였다. 계파별로 볼 때 친이(親李) 계열은 50%가 ‘수정안 강행’인 반면, 친박(親朴)계의 80%는 ‘원안에 자족기능을 강화해서 추진’이었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은 현재 당론으로 수정안에 반대다.
이와 달리 아직 대세가 이렇다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국민 여론을 놓고 보면 대체로 흐름이 나온다. 세종시 수정안 발표 직후 한국일보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긴급 조사한 결과로는 세종시를 ‘교육·과학 중심 경제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수정안 지지 답변이 51.3%, 원안대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은 37%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지율 격차는 17.3%포인트로 지난해 12월 26일 조사와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동아일보가 1월 11일 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시행한 조사는 좀 더 복합적이다. 수정안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54.2%로,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37.5%)보다 16.7%포인트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충청권만 놓고 보면 53%가 원안, 40.7%가 수정안을 지지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호남권에서 원안 추진 찬성이 54.9%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오차 범위 내이지만 논란의 중심인 충청권에서보다 오히려 높은 수치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세종시 문제가 단순한 정책사안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 여부를 바탕에 깔고 있는 복잡한 정치 사안이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자동응답전화로 주로 하는 여론조사 기관인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오히려 원안 지지율이 42.1%, 수정안 지지율이 37.4%여서 전화 설문조사 방식을 쓴 다른 조사와는 상반된 결과를 나타냈다.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한 여권은 앞으로 대대적인 여론전을 펼친다는 계획이다. 향후 1~2주일 안에 세종시 수정안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충청과 호남의 강한 수정안 반대 기류가 뒤집힐 것인가. 지금 단계에서 어느 쪽이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울에 있는 한 여론조사기관 전문가는 사견을 전제, 이렇게 말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여론이 확 뒤집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추세에 크게 변화가 없을 것이란 게 정확한 진단일 것입니다. 그러나 설 연휴(2월 13~15일) 때가 중요합니다. 대가족이 함께 모여 어떤 얘기들을 나누고 그게 어느 방향으로 모이느냐에 따라 수정안의 생사가 갈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간 조치원은 대한민국 뉴스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지만, 역의 풍경은 여느 시골이나 다름없이 평온했다.
연기군청에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하는 농성자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택시를 타고 군청(郡廳)으로 향했다. 군청 정문을 들어서자 왼쪽 마당 앞에 천막이 하나 보였다. 한 번에 20명은 족히 둘러앉을 만한 크기의 천막 안에는 전기장판과 히터·TV 등이 갖춰져 있어 천막을 친 지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침 유한식(兪漢植) 연기군수가 10여 명의 주민과 함께 천막농성장 안에서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 발표를 지켜보고 있었다.
“수정안은 원안에서 행정부처만 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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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한식 연기군수. 그는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 행정기능을 뺀 것 외에 기존의 원안에서 추가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
이날 정부가 발표한 수정안의 핵심은 기존 ‘행정중심복합도시’를 ‘교육과학중심도시’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원안은 9부2처2청의 정부 부처(部處)를 옮기겠다고 했지만, 수정안은 이를 전면 백지화(白紙化)하고 대신 삼성·롯데 같은 대기업과 고려대·카이스트(KAIST) 같은 대학을 유치하기로 했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기자는 군수실에서 유한식 군수와 만났다. 군청 앞 천막에서 주민들과 릴레이식 단식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유 군수의 얼굴은 초췌했다. 유 군수는 “오늘 수정안은 외부인들이 보면 대단히 거창해 보이지만 정부 부처 이전계획을 제외하기 위한 것이 핵심내용”이라고 말했다. 유 군수의 설명이다.
“기존의 행정중심복합도시는 정부기관 이전을 핵심 내용으로 하면서, 기업도시를 함께 추진했던 사업이었습니다. 의료·복지, 첨단지식산업, 교육·연구기관, 국제·문화 시설 등이 모두 포함된 복합도시이자 자족도시로 설계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심’인 행정이 빠지면 그냥 단순한 기업도시가 되는 것이죠. 우리가 기업도시 유치하자고 수백 년 삶의 터전을 버리는 희생을 받아들인 게 아닙니다.”
유 군수는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시절부터 지금까지 무려 12차례나 행정도시에 대해 예정대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며 “대통령의 약속이 이렇게 쉽게 뒤집히는데 앞으로 무슨 약속을 한들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세상에 이런 나라도 있습니까. 정부시책에 의해 5년간 추진되었고, 예산의 4분의 1이 집행된 국가사업을 뿌리째 뒤바꾸는 경우가 있는지요? 우리는 지금 신뢰를 배신당한 것입니다. 이주민들은 지금 애초 수용목적으로 쓰이지 않는다면 사기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다시 땅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연대회의 “영호남에서 이런 欺罔행위 할 수 있나”
오후 2시가 되자 군청 앞마당이 다시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행정도시 원안사수 충청권 연대회의’란 단체에서 ‘원안사수 투쟁 선포식’을 연 것이다. 연대회의는 성명서에서 “이명박 정권이 과연 영호남을 대상으로도 이런 기망행위를 시도할 수 있는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집회에 참석한 100여 명이 머리에 ‘행정도시 사수’라는 붉은 띠를 맨 채 연방 과격한 구호를 외쳤다.
집회장에서 만난 행정도시사수 연기군 대책위원회 김성구(金成九·56) 위원장은 “세종시 규모가 7290만㎡(2200만평)인데 이는 연기군 면적의 절반에 해당한다”며 “연기군의 노른자위 땅이 모두 행정도시에 포함됐기 때문에 이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연기군은 앞으로 미래가 없는 기형적인 군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먼저 행정도시를 하자고 한 것이 아니잖으냐”며 “정부의 배신으로 연기군민과 충청도민의 자존심에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행정도시 사업을 무슨 청계천 사업 대하듯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택시를 타고 세종시 건설 부지를 돌아보았다. 군데군데 부지 조성을 위한 중장비만 보일 뿐 인적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이 있던 곳은 빈집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고, 종촌면이란 곳은 아예 면 소재지 자체가 없어졌다.
3년 전 조치원 읍내에 아파트를 사서 이주한 이완수(李完秀)씨는 “이주민들은 주로 연기군에 70%가 살고 있고, 나머지는 주변 공주나 대전, 청원군 등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고 말했다. 이주 전에는 종촌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작은 가게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현재 이주민 향우회 대표를 맡고 있다. 이주민 2000명 정도가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고 한다. 그는 “고향을 떠난 대부분의 사람이 아무것도 할 일이 없어 그냥 놀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사는 아파트 33평형이 현재 1억5000만원입니다. 2년 전 보상비 받아서 이주할 때 많은 사람이 2억2000만원에 분양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비싸게 분양받아 왔는데 아파트 미분양으로 값이 내려가 손해를 본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이씨에 의하면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제기된 노무현 정부 때부터 조치원읍 내에는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들 아파트 대부분은 시세 차익을 노린 서울 등의 외지인이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많은 아파트가 들어서다 보니 분양이 안돼 부도난 건설회사도 많다고 했다. 이완수씨 본인이 사는 아파트도 미분양으로 건설회사가 자금난에 시달리자 2억2000만원짜리를 1억5000만원에 공매처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주민들은 왜 그렇게 쉽게 이주에 동의했는지요.
“당시 입주권만 되팔아도 2억~3억원은 받는다는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시골 사람들에게 그게 얼마나 큰 돈입니까. 그 와중에 그해를 넘기면 노무현 대통령이 행정도시를 추진하지 못할 것이라는 온갖 소문이 떠돌았습니다. 그래서 서둘러 합의를 해 준 것입니다. 주민들은 이런 국책사업을 처음 겪는 노인들이고, 상대는 노련한 토지공사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들의 수완에 놀아난 것 같아요.”
“심각하게 손상된 자존심이 문제”
세종시 문제는 처음부터 정치적 타산 속에서 탄생했다. 결국은 문제 해결의 열쇠도 정치권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년 12월 초 세종시 원안고수를 주장하며 현직을 사퇴한 이완구(李完九) 전 충남지사는 “수정안 발표는 새로운 논쟁의 출발점”이라며 “결국 이명박 대통령에게 모든 부담이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정안대로 실제 추진하기 위해 법률 준비 하고 세부 설계 하는 등 준비하는 데 최소 2년이 걸립니다. 제가 지사직에 있으면서 프로젝트를 많이 해 봐서 잘 압니다. 그렇다면 그 2년 동안은 어떤 구체적인 성과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정치인들이 대통령에게 ‘도대체 세종시 수정안 만들어 놓고 해 놓은 것이 뭐냐’고 엄청나게 공격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는 “한 치 앞을 못 보는 참모들이 이 대통령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전 지사는 또한 “현재 조성된 토지를 평당 40만원 안팎에 기업에 분양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시장 교란”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큰 틀을 깨는 것이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수정안에 쉽게 동의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전 지사는 “이번 수정안은 국가균형발전, 수도권 과밀화, 충청권의 근본적인 발전, 혁신도시와의 관계, 타(他) 도시와의 역차별 문제 등 애초 행정중심도시가 추진되었던 문제의 본질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며 “따라서 세종시 문제는 수정안 발표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장기 표류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이 전 지사는 “지금 충청주민들은 정부가 충청도를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존심이 많이 상한 상태”라며 “정치권은 당리당략(黨利黨略)이 아닌 국가라는 큰 틀에서 문제를 봐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인다”고 말했다.
역시 충남지사를 지낸 심대평(沈大平) 의원은 충남 연기군이 지역구다. 그는 이번 정부 발표와 관련해서 ‘충청권 자주결정론’이라는 것을 주창하고 나섰다. 즉 세종시에 대해 더는 정부나 정치권에 끌려다니지 않고 충청도민의 의사를 반영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심 의원의 설명이다.
“저는 앞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충청 주민의 마음을 달래는 데 최선을 다할 겁니다. 현재 국가 정책 지도자 중에 충청인들의 정서를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행정기능의 반이라도 옮기자고 해서 추진된 사업입니다. 이런 것을 지역 정서를 모르는 사람들이 나서서 하루아침에 뒤집었으니 얼마나 배신감과 낙담이 크겠습니까.”
그는 “충청도가 서울이 된다는 자긍심이 아니었으면 주민들이 이주에 대한 거의 아무런 민원도 일으키지 않고, 희생을 감수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번 사태로 정부와 충청도민 간에 신뢰가 무너진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말했다.
“정치권은 충청인들의 상한 마음은 모른 채 ‘이때다’ 하며 지역에 내려와서 이 지역 민심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충청인은 이 지역을 정쟁의 도구나 희생물로 삼는 것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 東西 양상 띤 여론 … 대세는 설 연휴 후 결판날 듯
정치권만 떼놓고 보면 세종시 여론은 복잡다단하다. 여야뿐 아니라 여당 내 ‘전쟁’도 일촉즉발이다. 여기에다 지역구에 따라 다르고 지역의 사정에 따라서도 또 다르다. 어느 한쪽으로 현저하게 기울지 않고 있다. 동아일보는 세종시 수정안 발표 후 수정안의 국회통과 열쇠를 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의견을 분석했다. 수정안에 대해 찬성 50%, 반대 20%, 유보 21%였다. 계파별로 볼 때 친이(親李) 계열은 50%가 ‘수정안 강행’인 반면, 친박(親朴)계의 80%는 ‘원안에 자족기능을 강화해서 추진’이었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은 현재 당론으로 수정안에 반대다.
이와 달리 아직 대세가 이렇다고 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국민 여론을 놓고 보면 대체로 흐름이 나온다. 세종시 수정안 발표 직후 한국일보가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긴급 조사한 결과로는 세종시를 ‘교육·과학 중심 경제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수정안 지지 답변이 51.3%, 원안대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은 37%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지율 격차는 17.3%포인트로 지난해 12월 26일 조사와 비슷한 결과를 보였다. 동아일보가 1월 11일 코리아리서치센터에 의뢰해 시행한 조사는 좀 더 복합적이다. 수정안을 ‘지지한다’는 응답이 54.2%로,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응답(37.5%)보다 16.7%포인트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충청권만 놓고 보면 53%가 원안, 40.7%가 수정안을 지지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호남권에서 원안 추진 찬성이 54.9%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오차 범위 내이지만 논란의 중심인 충청권에서보다 오히려 높은 수치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세종시 문제가 단순한 정책사안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 여부를 바탕에 깔고 있는 복잡한 정치 사안이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분석하고 있다.
자동응답전화로 주로 하는 여론조사 기관인 리얼미터 조사에 따르면 오히려 원안 지지율이 42.1%, 수정안 지지율이 37.4%여서 전화 설문조사 방식을 쓴 다른 조사와는 상반된 결과를 나타냈다.
이명박 대통령을 포함한 여권은 앞으로 대대적인 여론전을 펼친다는 계획이다. 향후 1~2주일 안에 세종시 수정안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충청과 호남의 강한 수정안 반대 기류가 뒤집힐 것인가. 지금 단계에서 어느 쪽이라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울에 있는 한 여론조사기관 전문가는 사견을 전제, 이렇게 말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여론이 확 뒤집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의 추세에 크게 변화가 없을 것이란 게 정확한 진단일 것입니다. 그러나 설 연휴(2월 13~15일) 때가 중요합니다. 대가족이 함께 모여 어떤 얘기들을 나누고 그게 어느 방향으로 모이느냐에 따라 수정안의 생사가 갈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