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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취재] 趙己淑 前 청와대 홍보수석은 탐관오리 고부군수 趙秉甲의 증손녀

東學革命 후 대한제국 판사가 된 趙秉甲은 1898년 7월18일 동학교주 崔時亨 선생에게 사형선고

김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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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관오리 趙秉甲 후손이 청와대 고위 인사」
청와대 홍보수석 시절의 조기숙씨.
  지난 9월 말 한 모임에 참석했다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참석자 한 명이 東學農民革命(동학농민혁명)의 導火線(도화선)이 됐던 당시 古阜(고부) 군수 「趙秉甲(조병갑)」의 후손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고부 군수 趙秉甲의 功德碑(공덕비)가 경남 金海 어디엔가 있다. 최근 그의 後孫들이 공덕비를 새로 만들어서 제사를 지냈다. 「공덕비를 찾아온 후손 가운데 盧武鉉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말이 선뜻 믿기지 않았다. 趙秉甲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탐관오리」의 전형으로 실린 사람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후손들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무시하고 그의 공덕비를 새로 세웠다는 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또한 「역사 바로 세우기」를 앞세우는 盧武鉉 정권의 청와대에 趙秉甲의 後孫이 고위 관계자로 있다는 얘기도 의아했다.
 
  이런 의심이 들어, 자세히 캐물었지만, 얘기를 전한 참석자는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지 못했다.
 
1898년 동학교주 최시형은 趙秉甲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음날 月刊朝鮮 편집회의에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다. 선배들은 『趙秉甲 후손들이 새로 공덕비를 세웠다면 그것만도 뉴스』라는 반응을 보였다. 趙秉甲의 후손들이 공덕비를 새로 세웠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우선 「國史大辭典(국사대사전)」(문학박사 이홍직 편저)에서 「趙秉甲」 항목을 찾아봤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와 있었다.
 
  <조선 高宗 때의 貪官汚吏(탐관오리). 1893년(고종 30년) 古阜 군수로서 萬石洑(만석보: 貯水池)를 수축할 때 동원시킨 군민에게 임금도 주지 않고 터무니 없이 水稅(수세)를 징수하여 총 700여 섬을 횡령 착복하였고, 또 군민에게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강제로 稅米(세미)를 징수하여 사복을 채웠었다.
 
  이 밖에 泰仁(태인) 군수를 지낸 자기 아버지 趙奎淳(조규순)의 碑閣(비각)을 세우기 위하여 군민으로부터 금전을 착취하고 富民(부민)에게 억지로 죄명을 씌워 불법 착복하는 등 갖은 貪虐(탐학)을 恣行(자행)하였다.
 
  이에 격분한 농민들은 군수의 불법에 항의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드디어 전주로 몰려가 전라감사 金文鉉(김문현)에게 애소하였으나 감사는 이를 수리하지 않았을뿐더러 도리어 그 대표자를 잡아 가뒀다.
 
  이리하여 1894년(고종 31년) 2월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석보 남쪽에 집합하여 제방을 끊고 읍내로 들어가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불법 징수한 세곡을 원주인에게 돌려보내니 趙秉甲은 몰래 도망하였으나 후에 파면되고 귀양 갔다.
 
  趙秉甲의 이러한 虐政(학정)에 대한 반발로써 東學革命이 일어났다>
 
 
  金海 등 세 곳에 있는 功德碑
 
정읍에 있는 東學農民革命 기념비.
  趙秉甲에 관한 중·고등학교 교과서의 기술도 이와 비슷했다.
 
  관련 사서와 인터넷을 뒤졌지만, 「趙秉甲의 功德碑」나 「趙秉甲의 後孫」에 관한 이야기는 찾기 어려웠다.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한참 헤맨 끝에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의 曺光煥(조광환·전북 학산여중 교사) 이사장이 쓴 「趙秉甲을 위한 변명」이라는 글을 찾았다. 이 글에 趙秉甲의 功德碑에 관한 얘기가 나와 있었다.
 
  <게다가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善政碑(선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거둔 돈이 1000여 냥이나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술 더 떠 그는 大同米(대동미)를 쌀로 받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질 나쁜 쌀을 사다 바쳐 차액을 착복하였습니다. 이렇게 백성을 수탈하고, 나라 財政(재정)을 파먹었으니, 그는 관리가 아니라 강도였지요.
 
  마침 善政碑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말씀 더 하지요. 경남 함양읍 상림 북측 역사인물공원 앞엔 「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라는 이름의 趙秉甲 善政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곧바로 曺光煥 이사장과 전화통화를 했다. 그는 현재 전북 井邑(정읍)에서 교사생활을 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古阜는 현재의 전북 정읍시 관할지역이다.
 
  ―선생님이 쓰신 글에서 古阜 군수 趙秉甲의 善政碑에 관한 얘기가 들어 있더군요. 저는 「趙秉甲의 功德碑가 경남 金海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功德碑가 경남 함양에 있는 거군요.
 
  『金海에도 있고, 함양에도 있습니다. 趙秉甲의 功德碑는 여러 군데 있어요. 趙秉甲은 古阜 군수로 가기 전에 金海, 함양에서도 벼슬을 했거든요. 제가 확인한 것은 金海시 생림면과 하동군에 있는 것까지 모두 세 개입니다』
 
 
  『趙秉甲 後孫을 알면 가르쳐 달라』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曺光煥 이사장.
  ―혹시 「최근에 趙秉甲의 後孫들이 功德碑들 가운데 하나를 새로 단장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를 들어 보셨습니까.
 
  『아니, 누가 그래요. 정말 그 後孫들이 功德碑를 새로 단장했답니까? 함양에 있는 것은 새로 단장하지 못했을 겁니다. 거기는 역사인물공원이라서 관광객들이 많습니다. 그런 공개된 곳에서 後孫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았을 겁니다. 그보다 後孫들이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는 게 사실입니까. 저는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동학농민단체에서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된 趙秉甲의 後孫에 대해서 모르십니까.
 
  『趙秉甲의 무덤이나, 後孫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무덤이 어디인지, 後孫들이 어디서 사는지, 얼마나 되는지 알기 어렵더군요. 혹시 後孫들이나 무덤이 어디인지 아시게 되면 저희에게도 알려 주십시오』
 
  趙秉甲의 후손에 대해서는 얘기를 듣지 못했지만, 공덕비가 여러 군데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수확이 있었다. 함양의 공덕비는 새로 세워졌을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하니 무작정 김해에 내려가서 공덕비를 찾아볼까 하다가, 김해市 상림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면사무소의 여직원은 『趙秉甲인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면사무소 앞에 비석 다섯 개가 있다』며 『마을의 어른들에게 확인한 후 연락을 해주겠다』고 했다. 여직원의 친절이 고마웠다. 뜬금없는 소리로 들렸던 「趙秉甲의 功德碑」가 어렴풋하게 잡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생림면사무소 여직원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趙秉甲의 집안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本官(본관)을 안다면, 그 집안의 족보에서 趙秉甲 후손들을 알아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趙秉甲의 본관에 대해서는 「풍양 조씨」, 「함안 조씨」, 「양주 조씨」라는 세 가지 說(설)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한국의 주요 姓氏(성씨) 族譜(족보)를 알려 주는 「韓國名家」라는 사이트를 발견했다.
 
  이 사이트의 명단에서 우선 「楊州 趙氏(양주 조씨)」를 클릭하자, 楊州 趙氏의 대표 인물 이름들 가운데 趙秉甲의 行列(항렬)로 보이는 동시대 인물 몇 명이 눈에 띄었다. 趙秉世, 趙秉徽, 趙秉式, 趙秉稷….
 
  趙秉甲은 보이지 않았다. 「풍양 조씨」, 「함안 조씨」를 차례로 검색했지만, 「고부 군수 趙秉甲」은 없었다.
 
  생림면사무소의 연락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趙秉甲 後孫이 功德碑에서 제사 지냈다』
 
김해시 생림면에 있는 趙秉甲의 공덕비 모습. 왼쪽은 정면, 오른쪽은 뒷면이다.
  지난 9월29일, 경남 김해시 생림면으로 출발했다. 생림면사무소의 여직원이 『면사무소 앞에 있는 비석 가운데 하나가 趙秉甲의 功德碑가 맞다』고 확인해 줬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을 주민 가운데 이 비석들의 內歷(내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KTX를 타고 부산에서 내려, 김해로 가는 105번 버스를 탔다.
 
  김해는 부산에서 1시간 남짓 걸렸다. 김해시에 내려서 金海文化院(김해문화원) 홍관표 원장을 찾았다. 김해문화원에서 향토사학자나 학예연구원을 소개받아, 趙秉甲의 功德碑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였다. 마침 홍원장은 功德碑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7년인가 8년 전이죠. 제가 부원장으로 있을 때 생림면에 있는 功德碑에서 김해문화원 주관으로 제사를 지낸 적이 있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전임 원장님과 창원전문대 송종복 교수님이 적극적으로 나섰지요. 송종복 교수가 趙秉甲의 功德碑를 처음 발견했거든요. 그래서 그 後孫들이 참석해서 간단하게 제를 지낸 겁니다』
 
  「趙秉甲의 후손들이 모여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는 아마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사전과 교과서에 趙秉甲은 「탐관오리」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의 功德碑가 서 있습니까. 설사 功德碑가 있다고 해도 김해문화원이 주관해서 趙秉甲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당시 趙秉甲의 제사를 지내는 데 대해 반발은 없었습니까.
 
  『송종복 교수님을 찾아가면 그간의 사정을 잘 아실 수 있을 겁니다. 趙秉甲의 功德碑에 대해서는 송교수님이 전문가시니, 송교수님과 함께 功德碑를 보러 가시죠』
 
 
  趙秉甲「永世不忘碑」확인
 
생림면사무소 최형권 면장과 마을주민 박두정씨가 功德碑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때 趙秉甲의 後孫들이 정말 참석했습니까.
 
  『저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한 분이 참석했어요. 그런데 이름도 안 가르쳐 주고 말씀도 없이 제사만 지내고 가시더만요. 당시 문화원장님과 송교수님께 인사하는 것을 듣고 알았어요. 그 분에 대해서도 송종복 교수님이 잘 아실 겁니다』
 
  송종복 교수를 만나기 위해 창원전문대 홍보실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송종복 교수를 만날 수 없었다. 癌투병으로 오래 고생하던 송교수의 부인이 전화를 건 그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喪中(상중)인 분을 번거롭게 할 수는 없었다. 송교수의 전화번호를 얻은 후, 혼자 생림면사무소로 향했다. 김해시내에서 택시로 20여 분을 달리자, 2층짜리 건물의 생림면사무소가 보였다. 면사무소에는 崔亨元(최형원·55) 면장과 마을 주민 朴斗正(박두정·57)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朴斗正씨는 이 마을에 오래 살았고, 지난해까지 면사무소에서 총무계장으로 일했기 때문에 功德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功德碑 5개는 면사무소 정문 우측 담장 앞에 있었다. 功德碑는 170~ 190cm 높이로, 맨 왼쪽에 功德碑를 세운 내력을 적은 「宣恩臺(선은대)」가 있었다. 그 우측으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沈舜澤(심순택), 관찰사 李鎬俊(이호준: 李完用의 養父)에 이어 趙秉甲의 功德碑가 세워져 있었다.
 
  功德碑들은 모두 세월의 풍화에 닳아 글씨가 정확히 보이지 않았으나, 趙秉甲의 功德碑는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趙秉甲의 功德碑 가운데 肉眼(육안)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府使趙侯秉甲 永世不忘碑…」
 
  ―이 功德碑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습니까.
 
  『원래 일제시대에 만든 옛 면사무소 앞에 있었습니다. 관리를 안 하고 관심이 없으니까, 풀에 뒤덮여 있고 엉망이었어요. 그러다 지금 면사무소를 새로 만들면서 1982년에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110년 만에 밝혀진 功德碑 주인
 
  ―그런데 이 功德碑가 趙秉甲에 관한 것인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가 뭘 아나요. 「趙秉甲」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누구인지 몰랐어요. 1999년인가 2000년인가 창원전문대 교수 한 분이 功德碑 임자를 찾아냈어요. 그래서 우리도 알게 됐지요』
 
  ―功德碑를 세울 정도로 趙秉甲이 이곳에서 선정을 베풀었나요.
 
  『선은대에 있는 내용을 마을 어르신 한 분이 풀어 놓은 것이 있어요. 거기에 보면, 趙秉甲이 어떤 일을 했는지 적혀 있어요』
 
  朴斗正씨가 가져온 자료에 功德碑를 세운 내력이 나와 있었다. 자료는 1986년 작고한 마을 주민 김상하(무형문화재 11호 김수로왕릉 전례절차 전수자)씨의 遺筆(유필)을 요약한 것이다.
 
  <朝鮮 高宗 21년(1884)에 金海市 생림면 지역에 극심한 가뭄으로 농작물이 皆無(개무) 상태로 民生(민생)이 塗炭(도탄) 지경이었다. 이때 지방 유지들이 피해지역의 地稅(지세) 면제 건의서를 金海 부사 趙秉甲에게 제출한 바 趙秉甲 부사는 이를 도관찰사에게 上申(상신)하였다.
 
  경상도 관찰사 李鎬俊은 이곳을 순시하고 그 사실을 朝廷(조정)에 奏請(주청)한 바, 영의정 沈舜澤의 주선으로 전면 면제 혜택을 받았다. 그 후 이곳 생림면민의 誠金(성금)으로 고종 25년(1888) 9월에 宣恩臺를 세웠고 동시에 趙秉甲 부사, 李鎬俊 관찰사, 沈舜澤 영의정의 功德碑를 세웠다>
 
 
  『조상 碑 지켜 줬는데 인사도 안 하더라』
 
  ―몇 년 전 功德碑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하던데요. 어떤 이유로 제사를 지냈는지 기억나십니까.
 
  『그 창원전문대 교수가 功德碑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고, 옛날에 우리 마을에서 善政을 베푼 사람이라고 하니까, 간단하게 제사를 지낸 겁니다. 당시 김해문화원장님도 의미가 있다고 하시고 해서, 저희 면사무소에서 간단히 음식을 차렸지요』
 
  ―당시 趙秉甲의 後孫들이 왔다던데요.
 
  『예, 맞아요. 한 분인가 오셨는데, 말씀도 없으시고 한쪽 구석에 있다가 절하고 가시더만요. 다른 사람들하고 말씀도 통 없으시던 게 기억납니다』
 
  ―「최근에 그 後孫들이 다시 와서 功德碑를 새로 단장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얘기는 못 들어보셨습니까.
 
  『제가 작년까지 면사무소에 다녔는데, 功德碑를 새로 단장했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아, 맞다. 작년 언젠가 功德碑 앞에 세 명인가가 서서 한참을 만지고 절하고 그랬는데, 생각나네. 後孫들이 오기는 왔는기라. 면장님도 기억나지요?
 
  하도 오랫동안 그 앞에 있어서 우리는 비석에 해코지하나 싶어 뛰어나가 보지 않았능교. 그랬더니 자신들이 「趙秉甲의 後孫들」이라고 하데예.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하더니 그냥 휑하고 가요』
 
  ―면사무소분들하고 인사도 없었나요.
 
  『인사는 무슨, 그래도 우리가 저들 조상 碑를 관리하고 제사도 지내 줬는데, 인사라도 하고 그러면 안 좋나.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냥 갔어요』
 
  ―어찌됐든 면사무소에서 자신들의 조상 비석을 보존해 준 거나 다름 없는데요.
 
  『그 조상이 안 좋은 일로 역사에 남아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꺼. 그렇다고 해서 누가 이제 해코지하는 사람이 있나, 뭐라 하나. 좋은 일도 있고 안 좋은 일도 있는 거지. 참 내, 그 사람들도』
 
  「承政院 日記(승정원 일기)」 高宗 31년 2월15일조에 보면 趙秉甲의 年表(연표)가 나와 있다.
 
  趙秉甲은 1887년 8월6일 당시 43세에 金海 부사로 와서 1889년 2월10일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부임했다. 이어 1889년 2월10일에 충북 영동 현령으로 발령받았지만, 2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자신과 조선 왕조에 운명의 장소가 된 古阜에 군수로 부임하게 된다.
 
  군수로 발령받은 지 3개월 후 母親의 別世로 군수직을 사퇴한다. 趙秉甲은 3년간의 母親喪(모친상)을 마치고 1892년 5월에 古阜 군수로 재임용된다. 그는 1893년 11월30일 익산 군수를 거쳐, 전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던 1894년 1월9일 古阜 군수로 다시 기용됐다.
 
  부임한 지 한 달을 조금 넘긴 2월15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시위대는 東學農民혁명을 일으켰으며, 趙秉甲은 이를 피해 고향집이 있던 공주 근처에서 은둔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대한제국 고종 황제. 그 왼쪽이 이토 히로부미. 오른쪽 네 번째가 조중웅. 맨 오른쪽이 이완용의 처남인 조민희.
 
  古阜 군수 세 번 만에 東學農民革命 일어나
 
  金海를 떠난 지 5년 만에 趙秉甲은 東學農民혁명의 도화선이 되어 역사에 길이 남게 됐다. 金海의 功德碑에 나온 「永世不忘(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글귀를 보면서, 「趙秉甲이 자신이 惡名으로 잊혀지지 않을 것을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趙秉甲이 정말로 김해에서 善政을 베풀었는지, 비석을 찾아와 제사를 지낸 趙秉甲의 後孫들은 누구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아직 喪中인 창원전문대 송종복 교수에게 연락을 취했다.
 
  송교수는 『내가 정신이 없어서 정확히 말해 주지는 못한다』면서도, 趙秉甲의 功德碑와 趙秉甲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功德碑를 어떻게 발견했습니까.
 
  『제가 사학과(부산大 사학과 65학번)를 졸업했습니다. 1999년 부산大 사학과에서 나오는 논문집인 「釜大史學」 제22집에 「金海 부사 교체, 치적에 관한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했어요.
 
  당시 수령직 교체 실태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趙秉甲의 金海 재임時 행적에 관한 사료를 입수했어요. 그때 功德碑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보니, 金海의 趙秉甲이 古阜 군수였던 趙秉甲이라는 짐작을 했어요. 그래서 정읍시문화원 최현식 원장에게 확인해 보니, 古阜 군수였던 趙秉甲이 맞더군요』
 
  ―정말 趙秉甲이 金海에서 功德碑를 세울 만큼 선정을 베풀었습니까.
 
  『가뭄이 들어서 세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여러 차례 朝廷에 減稅(감세)를 건의했습니다. 그래서 減稅가 됐고, 지역 농민들과 지주들이 한숨을 돌린 거죠』
 
  ―경남 함양에도 趙秉甲의 善政碑가 있더군요.
 
  『네, 맞습니다. 함양 상림에 「郡守趙侯秉甲淸德善政碑」(군수조후병갑청덕선정비)라는 이름의 趙秉甲 善政碑가 있습니다. 金海에 오기 전에 함양에서 군수를 했거든요. 함양에 있는 碑는 고종 24년(1887) 7월에 세웠습니다. 만약 趙秉甲이 정말 선정을 베풀지 않고 억지로 만든 것이라면, 전국에서 농민들이 亂(난)을 일으켰는데 그 碑들이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호남 수령들의 재물 욕심 특히 심해』
 
압송되어 가는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그런데 趙秉甲이 5년 후 탐관오리로 지목돼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는 이유는 뭘까요. 「고종실록」 등에 그가 백성들을 수탈한 내용들이 상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까.
 
  『조선후기 수령들의 평균 재임기간이 불과 1년 6개월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령들은 자신이 언제 물러날지 몰라서 전전긍긍합니다. 그러니 힘있는 사람들에게 뭐라도 줘야 하고, 신분이 불안하니까 재물에 욕심을 낸 거죠.
 
  趙秉甲이 부임했던 古阜의 경우는 당시 곡창지대라서 수령들의 재물 욕심이 특히 심했어요. 그런 와중에 趙秉甲이 가뜩이나 안 좋을 때 부임해서 난리가 난 겁니다. 제가 조사한 바로는 趙秉甲이 前任地(전임지)에서 古阜에 내려가기 전에, 古阜 관아가 습격당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와도 별수 없었다는 말이 됩니다』
 
  趙秉甲은 자신이 東學農民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에 억울함을 호소했다.
 
  1894년 전라도 강진 고금도에 귀향을 떠난 지 4년 후인 1898년 8월19일자 「독립신문」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해명성 기사를 실었다.
 
  <民擾(민요)는 古阜 민요 수월 전에 고산 등 각 군에서 먼저 일어났고, 동요는 보은 등 각 군 지방에서 1893년 가을에 일어났고, 갑오동요는 전봉준이가 사월에 무장에다 방을 걸고 고창 등 각 군에서 작요한 것은 그때 감사 김문현씨의 등보가 있었으니 古阜 동요가 아닌 것은 가히 알겠으며 또 민요로 말할진대 백성이 관장의 탐혹을 못 이겨 일어났다 할진대 趙秉甲씨가 범죄 사실이 없는 것은 그때 명사관 조명호·안핵사 이용태·염찰사 엄세영·감사 김문현 제씨가 다섯 번 사실하였으되 소위 장전이라 이르던 1만6000냥 내에 2800냥은 당초에 허무하고 1만3200여 냥은 보폐가 분명한지라 만일 안핵사 이용태씨가 빨리 장계를 하였더라면 趙秉甲씨는 다만 민요로 논감만 당하였을 것을 이용태씨가 무단히 석 달을 끌다가 비로소 무장군 동요 일어난 후에 겨우 장계를 하여 그해 정월에 갈려간 趙秉甲씨로 하여금 오월에 와서야 파직되고 귀양간 일을 당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저간의 시비는 세계 제 군자가 각기 짐작을 하시오>
 
 
  『趙秉甲의 직계 증손녀 趙己淑 前 청와대 홍보수석』
 
  ―몇 해 전에 趙秉甲의 功德碑 앞에서 祭祀를 지냈다고 하던데요. 그때 後孫들이 참석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자료를 확인하고, 後孫들을 수소문해서 찾아봤습니다. 그래서 연락이 간 거지요. 처음에는 안 오려고 했는데 趙秉甲 그 어른의 손자가 왔습니다』
 
  ―손자들이 많습니까.
 
  『저도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하지만 趙秉甲의 손자 이름이 「중환」인가 「중훈」인가 그래요. 아, 그분의 딸, 그러니까 趙秉甲의 증손녀가 청와대 홍보수석 했던, 梨花女大 교수 己淑이에요. 趙己淑(조기숙) 교수. 지금은 그만두고 미국 갔다고 하던데』
 
  「趙秉甲의 후손이 청와대 고위인사로 재직하고 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趙己淑씨라는 증언이었다.
 
  趙己淑씨는 2005년 2월부터 2006년 2월까지 청와대 홍보수석으로 재직했다. 『나는 자고 일어나면 朝鮮日報를 어떻게 죽일까 생각한다』는 그녀의 발언이, 月刊朝鮮 2005년 12월호에 보도되는 등 재직기간 내내 朝鮮日報·東亞日報 등 주요 언론사와 대립했다.
 
  ―정말 趙己淑 前 홍보수석이 趙秉甲의 直系 증손녀인가요.
 
  『맞습니다. 제가 趙己淑 교수를 한 번 만난 적이 있어요. 趙교수에게 「당신 증조할아버지가 역사책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분만은 아니다」, 「당시 좋은 일도 했다」고 말해 줬어요』
 
  ―당시 홍보수석할 때였나요.
 
  『네, 그때였어요. 정확히 언제인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 2005년의 일입니다. 제가 그렇게 얘기하니까 趙교수가 굉장히 좋아하더군요. 안 그랬겠어요? 다들 자기 증조할아버지가 안 좋다고 하는데, 제가 좋은 분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趙수석이 뭐라고 하던가요.
 
  『뭐라 그러겠어요. 「아이구, 그래요. 저희 증조부가 그랬군요」 뭐 이러면서 활짝 웃죠. 정말 좋아하데요. 몇 번을 功德碑 내용에 대해서 물어보고, 웃고 그랬죠. 그래서 내가 「한번 金海에 내려와서 功德碑도 보시라」고 했어요. 「한번 내려온다」고 하더니, 바빠선지 못 왔지요』
 
 
  『후손들이 어떻게 나서겠습니까』
 
  ―1999년 功德碑 앞에서 제사 지낼 때 온 분이 그럼 趙己淑 前 홍보수석의 부친입니까.
 
  『예, 맞습니다』
 
  ―그때 참석했던 분들 얘기로는 『다른 사람들과 거의 얘기를 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싫어서인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역사책에 탐관오리라고 떠들고, 동학관련 단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그 後孫들이 어떻게 나서겠습니까. 그 사람들도 피해의식이 크지요. 거기다 잘못해서 墓(묘)가 어디 있는지 알려져서, 동학관련 後孫들이 파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송종복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기자가 모임에서 처음 들은 「趙秉甲 功德碑와 後孫 이야기」는 「後孫들이 功德碑를 새로 단장했다」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사실에 일치했다.
 
  서울에 올라와서 趙己淑 前 청와대 홍보수석과 父親에 대해서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다. 하지만 송교수가 얘기해 준 趙己淑씨의 아버지 「조중환」·「조중훈」은 검색이 되지 않았다. 朝鮮日報의 인물 DB에 들어가서 「趙己淑」으로 검색해 보았다.
 
  趙己淑 前 홍보수석의 가족란에는 남편과 아들밖에 나오지 않았다. 趙己淑씨의 간단한 약력과 가족 관계이다.
 
  <趙己淑(47) 인디애나大 동창인 梁亨鎭(양형진·49) 고려大 물리학과 교수 사이에 2男 ▲경기 안성 ▲이화女大 정치외교학과 ▲미국 인디애나大 박사▲인천大 조교수 ▲이화女大 부교수 ▲盧武鉉 대통령 취임사 준비위원 ▲열린우리당 공천심사위원·총선기획단 자문위원장·정당개혁추진단장 ▲「참언론을지지하는모임」 자문위원 ▲대통령비서실 홍보수석실 홍보수석비서관>
 
  송교수가 얘기해 준 趙己淑씨 부친의 이름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趙己淑&아버지」로 검색을 했다.
 
  「趙己淑 교수의 아버지 趙重完(조중완)…」이라는 기사가 여러 건 검색됐다. 「趙己淑 교수의 부친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으며, 趙 前 수석은 그곳에 자신의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趙己淑의 부친 趙重完씨는 품질경영 전문가
 
  趙己淑씨 父親이 운영하는 홈페이지(http://www.newqm.org)에 들어가서, 그의 약력을 살펴봤다. 그의 홈페이지와 朝鮮日報 DB에서 요약한 趙重完씨의 약력이다.
 
  <趙重完 1933년 12월6일. 사회경영전략연구원 원장. 아호는 海岩(해암). 원적: 대전. 본관: 양주. 대전高, 서울大 화학과 졸업. 사회경영전략연구원 원장으로 「한국형 TQM」 개념 개발에 전념함. SQC, VE, TPM, TPS, CS 등을 결합한 기업수준을 고려한 맞춤식 「한국형 6시그마 프로그램」 개발. 현대·기아차 사무직용 「6시그마」 사이버과정 교재 개발. 전략경영과 TQM의 방침관리를 융합한 「한국형 경영혁신 프로페셔널 프로그램」 개발. 「맞춤식 경영혁신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세방전지 등 컨설팅 실시, 크게 성과를 올림>
 
  홈페이지에 혹시 집안 이야기가 있는지 확인했지만, 그런 얘기는 전혀 없었다.
 
  趙己淑 前 수석은 부친의 홈페이지에「새 정치, 새 품질」이라는 이름의 게시판을 2003년 1월20일부터 2005년 3월4일까지 운영했다. 칼럼은 趙己淑씨가 청와대에 入城하면서 끝났다. 게시판에 올린 글들은 신문에 기고했던 칼럼과 게시판 게재용 글을 모아 놓은 것이었다.
 
  趙己淑씨의 글 가운데 「역사 바로 세우기」, 「과거사 청산」, 「친일잔재 청산」에 관한 글이 꽤 있었다. 「동학혁명에 대해서 감동했다」는 글도 눈에 띄었다.
 
 
  趙己淑, 『동학혁명에 감동했다』
 
  『저는 4·19 혁명에도 감동하고 동학혁명에 대해서도 감동했습니다. 그러니까 동학혁명의 斥倭洋倡義(척왜양창의)라는 소위 배외주의가 그 시기에 맞다고 해서 오늘도 배외주의가 우리 민주주의의, 소위 민족주의의 기치가 될 수 있는 것이냐, 그런데 이런 것이 하나하나 역사의 인과관계입니다』(「미래를 향한 창, 역사의 인과관계」 中에서)
 
  『나는 단지 朝鮮日報와 싸우기 위해 노빠가 되었고 언론개혁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언론개혁에 나선 이유는 상식적인 사회, 진실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朝鮮日報가 나쁜 것은 단지 親日이나 독재에 협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역사의 질곡에서 저질렀던 행위므로 용서하자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2004년 5월10일)
 
  『과거 親日과 독재를 통해 권력과 부를 쌓아온 기득권 세력이 수시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상황에서는 민주질서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이번 탄핵사태를 통해 얻은 소득이 있다면 누가 민주시민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2004년 4월1일 경향신문 기고)
 
  『학위가 끝나고 미련없이 귀국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초들의 건강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수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서, 수많은 재난 가운데에서 우리 국가가 이렇게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름없는 민초들의 애국심과 자발적인 참여 덕분이다.
 
  민초들의 봉사와 애국심은 나에게 어떤 단기적·장기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는 상류층이 체제유지를 위해 베푸는 시혜와는 거리가 한참 먼 것이다』(2002년 9월20일 여성신문 기고 中에서)
 
  창원전문대 송종복 교수의 이야기 외에 趙己淑씨가 古阜 군수 趙秉甲의 直系 증손녀인지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趙秉甲은 「양주 조씨」임이 확실하다』는 송교수의 증언에 따라, 서울 성북구에 있는 「楊州 趙氏 大宗會」를 찾아갔다.
 
  趙源煥(조원환) 회장과 趙源奭(조원석) 부회장을 만났다. 두 사람은 1994년에 발간한 「楊州 趙氏 족보」(上·中·下) 세 권을 가지고 와서 趙秉甲의 先代부터, 동시대 舊韓末의 주요 門中 인물들에 대해 설명을 해줬다.
 
  『楊州 趙氏는 여러 門派가 있지만, 시조 잠의 증손인 大提學(대제학) 趙末生(조말생) 할아버지의 後孫인 文剛公派(문강공파)가 가장 번성합니다.
 
  「文剛」이란 趙末生 할아버지의 諡號(시호)로, 생원과 문과 중시에 급제해서 이조참판·병조판서·영중추원사를 지냈습니다. 文剛公의 後孫 가운데서는 13세인 趙禧錫(조희석) 할아버지(槐山公: 괴산공) 자손들이 인물이 많습니다.
 
  우리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楊州 趙氏 인물들 대부분이 槐山公의 후세들이죠』
 
 
  趙斗淳·조병식·조병세
 
1889년 對日 방곡령을 내린 조병식.
  ―대표적인 인물들을 소개해 주시죠.
 
  『19세기 조선末 무렵만 봅시다. 시조로부터 19世인 斗淳(두순) 할아버지가 있어요. 대제학과 三政丞(삼정승)을 모두 지낸 분입니다. 이분의 동생뻘이 有淳입니다. 有淳 할아버지의 아드님이 乙巳勒約(을사늑약) 때 閔泳煥(민영환)에 이어 음독 자살한 趙秉世(조병세)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趙秉世의 조카사위가 을사오적 李完用(이완용)이에요. 趙秉世 할아버지는 음독자살 전에 두 번이나 高宗께 상소를 올려 「李完用을 비롯한 을사오적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했어요. 한마디로 자기 조카사위를 죽이라고 한 거죠.
 
  또한 방곡령을 내려 백성들을 살린 조병식 어른도 괴산공의 후예입니다. 그런데 음독자살을 하신 곳은 하필 李完用의 처남, 즉 다른 조카인 民熙(민희) 댁입니다』
 
  趙源煥 회장에 따르면, 「牛峰 李氏(우봉 이씨)」의 족보에는 李完用의 부인인 楊州 趙氏의 이름이 없다고 했다. 楊州 趙氏의 족보에는 李完用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족보에는 「總理大臣(총리대신) 父判書鎬俊(부판서호준: 부친 이름은 호준) 生父監役鎬奭(생부감역호석: 친아버지는 가역을 지낸 호석이다)」이라고 적혀 있었다.
 
  監役(감역)이란, 궁궐·관청의 건축과 수리공사를 감독하는 관리를 말한다. 잠시 앞으로 돌아가면, 趙秉甲의 김해 功德碑 선정 이유에 나오는 감찰사 李鎬俊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趙秉甲의 부친 이름이 奎淳(규순)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楊州 趙氏 주요인물을 소개할 때는 나오지 않더군요. 趙奎淳은 趙斗淳과 어떤 관계입니까.
 
  『斗淳 할아버지의 친동생이 奎淳입니다. 奎淳 할아버지는 호조판서,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지요. 이분의 둘째 아들이 趙秉甲 할아버지입니다. 불운하게 이름이 남았지만, 역사에서 일방적으로 매도만 당할 정도로 나쁜 어른이 아닙니다』
 
  趙源煥 회장은 족보 하권 279페이지를 펼쳐, 趙秉甲의 이름이 나온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趙秉甲의 이름 옆의 관직에는 「通政大夫(통정대부) 行金海府使(金海부사를 지냈다)」라고만 나와 있었다. 古阜 군수를 지낸 사실이 족보에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趙秉甲의 평판에 대한 後孫들의 근심을 짐작할 수 있다.
 
 
  족보에 이름 올리지 않은 趙秉甲 후손들
 
楊州 趙氏 족보에 趙秉甲의 손자代부터는 이름이 올라와 있지 않다.
  족보에 따르면, 趙秉甲은 1844년 5월15일에 태어나 1912년 5월23일에 70세에 사망했다. 그의 묘는 「공주시 신하면 평소리」에 있다고 적혀 있었다. 判書(판서)를 지낸 全州 李氏 秉文(병문)의 딸과 결혼, 부사를 지낸 靑松 沈氏 永奎(영규)의 딸과 결혼해, 모두 두 번 결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趙秉甲의 後孫은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이 있다. 아들의 이름은 1880년에 태어난 첫째 瓚熙(찬희), 1889년에 태어난 둘째 岡熙(강희)였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아랫대부터 후손들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다. 趙秉甲이 시조로부터 20世이므로, 손자는 22世, 증손자는 23世이다.
 
  趙己淑씨와 부친 趙重完씨가 趙秉甲의 직계가 맞다면, 그 아래에 이름이 올라 있어야 했다. 다른 22世들의 이름을 쭉 훑어보니, 남자들의 돌림字(자)가 「重」자였다.
 
  ―趙秉甲의 손자代부터 후손들의 이름이 등재돼 있지 않습니다. 혹시 絶孫(절손)된 겁니까.
 
  『왜 없겠습니까. 後孫들이 신경질이 나니까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거죠. 하도 동학, 동학 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러면 趙秉甲의 손자들을 만나보셨습니까.
 
  『그럼요. 그런데 종친회도 잘 안 나오고 피하는 것 같아요. 몇 번 얘기했는데, 피하더군요. 조만간 족보를 다시 손봐야 하는데, 그쪽과 연락을 해볼 겁니다』
 
  ―족보에 올리지 않을 정도면 숨어 있다는 말인데, 연락은 되나요.
 
  『연락처는 압니다. 그 손자가 굉장히 유명한 분이에요. 품질경영 관련 컨설팅도 하고, 아주 똑똑하고 그 방면에서는 대한민국 최고 전문가예요』
 
  趙源煥 회장은 「손자의 이름을 알려줄 수 없느냐」는 기자의 요청에 『그쪽에서 싫어하는 걸 어떻게 알려 줄 수 있느냐』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면서 趙회장은 이런 얘기를 했다. 기자는 그의 역사관에 크게 감동했다.
 
  『아픈 역사건, 화려한 역사건, 부끄러운 역사건, 자랑스러운 역사건 모두 우리 집안 것이고 우리나라 역사입니다. 숨기거나 모른 척하는 것은 이해가 안 됩니다. 나는 어디 가서건 「李完用이 우리 집안 조카사위다」, 「丁未七賊(정미칠적) 가운데 한 명인 趙重應(조중웅)이 우리 집안이다」고 떳떳하게 말합니다. 문제가 있다고 다들 숨기고 외면하면, 우리 역사 가운데 남아 있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楊州 趙氏 宗親會(종친회)에서는 趙秉甲의 손자 이름을 확인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품질관리 컨설턴트」라는 종친회 쪽 얘기가 趙重完씨가 홈페이지에 올려 놓은 자신의 이력과 일치했다. 그가 趙秉甲의 손자이지 않겠나, 짐작이 갈 뿐이었다.
 
  하지만 족보에 이름이 올라 있질 않으니, 「趙秉甲과 趙重完, 趙秉甲과 趙己淑」의 관계를 문서로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趙重完씨의 호적등본에서 부친의 이름을 확인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趙重完씨 부친의 이름이 趙秉甲의 아들인 瓚熙·岡熙씨 중 한 명과 일치한다면 「趙重完은 趙秉甲의 손자, 趙己淑은 趙秉甲의 증손녀」라는 사실을 확정지을 수 있다.
 
위쪽 원 안에 판사 趙秉甲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아래쪽 원 안에 「강원도 원주군 평민 피고 최시형」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위쪽 원 안에는 경성주재 일본제국 영사 「회심 내전주증」이라고 적혀 있다. 재판결과를 일본영사에게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功德碑가 학정의 증거물일 수도 있다』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曺光煥 이사장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혹시 曺이사장이 그동안 무슨 정보를 얻은 게 없을까 해서였다.
 
  曺이사장은 기자가 2週 만에 연락을 하자 무척 반가워했다. 그는 『月刊朝鮮이 묻혀진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파헤쳐 주는 것은 정말 의미 있는 일』이라며 『趙秉甲에 대해 그동안 묻어 뒀던 의문에 대해 다시 찾아보고 공부를 했다』고 했다.
 
  ―제가 趙秉甲의 김해 功德碑를 찾아가 봤습니다. 김해 분들이 「東學革命 당시 전국에서 농민난이 있었는데, 趙秉甲의 功德碑가 철거되지 않았다. 이것이 趙秉甲이 김해에서 善政을 베푼 反證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를 합니다.
 
  『한마디로 語不成說(어불성설)입니다. 전북 泰仁에 趙秉甲의 아버지 趙奎淳의 永世不忘碑가 남아 있습니다. 趙秉甲이 백성들을 수탈해서 세운 바로 그 功德碑입니다. 그런데 泰仁이 어디입니까. 古阜 인근이고 泰仁에서도 농민들이 혁명을 일으켰어요. 그 와중에 趙奎淳의 永世不忘碑가 온전합니다. 功德碑가 온전하다고, 그 사람이 善政을 베풀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功德碑 자체가 虐政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曺이사장은 자신이 功德碑에 대해서 쓴 글을 이메일로 보내 줬다. 曺이사장의 글 가운데 일부이다.
 
  <이러한 善政碑가 조선시대로 오면서 급작스레 많아졌고, 명종 때에 벌써 한 고을에 4~5개의 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세운 지 30년 이내의 것은 모두 뽑아 버리라」고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善政碑 건립의 난립을 막으니 백성들이 살기가 좀 나아졌다고 하니 그 폐단이 오죽 심했겠습니까?
 
  善政碑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 군수 ○○의 영세불망비」니 「○○ 송덕비」니 하는 문자를 새겼습니다. 그중에는 정말로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진심에서 세운 善政碑도 있겠지만, 십중팔구는 크고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을수록 백성들을 많이 울린 탐관오리(탐욕스럽고 더러운 관리)로 보는 것이 옳은 듯싶습니다.
 
  거리마다 善政碑요, 골목마다 頌德碑라. 善政碑가 수천 개나 되었으니 얼마 가지 않아 善政碑의 주인공이 다른 곳으로 가고 그의 세력이 떨어지면 비석에 대한 파괴행위가 심했는데, 이런 일로 그 비석은 근처 논두렁의 다리가 되기도 하고 논물을 막는 물꼬가 되기도 했답니다>
 
趙秉甲의 둘째 아들 趙岡熙. 우측에「父 趙秉甲」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趙己淑 前 홍보수석의 부친 重完씨의 호적등본. 重完씨 이름 오른편 위에「父 趙岡熙」가 적혀 있다.
 
  趙秉甲, 귀양에서 돌아와 판사로 임용돼
 
  ―趙秉甲이 東學革命 후 귀양 갔다 와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제가 金기자와 처음 연락을 한 후 자료를 다시 찾아봤어요. 「승정원 일기」 등에는 趙秉甲이 고등재판소 판사가 됐다고 나와 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건 趙秉甲이 조선末에 고등재판소 판사가 됐고, 동학교주인 崔時亨 선생에게 사형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어쩌구니 없는 역사의 아이러니지요. 동학혁명의 도화선이었던 趙秉甲이 동학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분을 사형에 처하다니』
 
  曺이사장이 찾아낸 「승정원 일기」의 趙秉甲에 관한 부분이다.
 
  <高宗 35년 무술(1898, 광무 2) 5월23일(을해, 양력 7월11일) 좌목 겸임 고등재판소 판사에 법부 민사국장 趙秉甲을 임용하였다.
 
  ●법부 민사국장 趙秉甲을 겸임 고등재판소 판사에 임용하고, 법부 참서관 金澤(김택)을 겸임 고등재판소 예비판사에 임용하였다.
 
  高宗 36년 기해(1899, 광무 3) 9월19일(갑자, 양력 10월23일) 맑음
 
  좌목황해도관찰부 주사 정석 등의 본관을 의원면직하였다.
 
  ●황해도관찰부 주사 정석, 경상남도관찰부 주사 趙秉甲의 본관을 의원면직하였다>
 
  ─趙秉甲이 崔時亨 선생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것도 「승정원 일기」에 있습니까.
 
  『그 내용은 다른 자료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찾아서 金기자에게 보내 드리겠습니다』
 
  趙秉甲에 대한 기록은 「승정원 일기」 1899년 9월19일자 이후 나오지 않는다. 楊州 趙氏 족보에는 趙秉甲이 1912년에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그렇다면 그 후 13년간 趙秉甲은 어떤 벼슬을 하고 어떻게 살았을까. 曺이사장도 그것이 궁금하다고 했다.
 
  『저희도 많은 자료를 봤지만, 趙秉甲의 그 후 행적에 대해서 알 수 없더군요. 지난해에 발표된 親日(친일)인사 명단에서도 趙秉甲의 집안인 趙重應·趙民熙 등 여러 명이 올라와 있는데 趙秉甲은 빠졌습니다. 그 後孫들이 나타나야 조사를 할 수 있을 텐데요』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趙秉甲의 後孫이 청와대 홍보수석이었던 趙己淑 이화女大 교수입니다. 지금은 미국에 교환교수로 가 있습니다. 趙 前 수석의 아버지도 살아계십니다.
 
  『허허, 그래요. 趙己淑 수석 집안이 그 집안이군요. 허 참, 그렇다면 趙교수가 그 사실을 관직에 오르기 전에 얘기했어야 합니다. 盧武鉉 정부에서 親日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이 한창이지 않습니까. 친일파들의 재산환수 작업도 벌어지고 있지요. 그런 상황에서 私人(사인)도 아닌 公人(공인)이 됐으면 집안의 역사적인 진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밝혀야지요.
 
  친일파든 탐관오리든 그 後孫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래도 그런 선조 밑에서 잘 먹고 잘 산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들을 단지 後孫이라고 단죄할 수도 없고, 절대로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고 있는 정권에서 公人이 됐으면, 처음부터 사실대로 밝혀야지요. 일전에 열린당 신기남 의장과 李美敬(이미경) 의원이 부친의 일제 헌병 복무경력이 문제가 돼서 공개하지 않았습니까.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 公人들이 덮어 버리고 쉬쉬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자신들이 그러면서 어떻게 역사 바로 세우기, 親日청산하는 정권에서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국민과 역사 앞에서 재산공개를 하듯이 자신의 집안을 공개하고, 사죄할 것은 사죄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분에게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趙秉甲이 동학교주 崔時亨에게 사형선고』
 
  曺光煥 이사장과 통화한 다음 날 月刊朝鮮 앞으로 석 장의 팩스가 들어왔다.
 
  그동안 취재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한 분이 趙己淑 교수의 아버지 趙重完씨 호적등본을 찾아내서 보내 준 것이다.
 
  호적등본에 따르면, 趙重完씨의 아버지는 趙秉甲의 둘째 아들인 趙岡熙씨였다. 趙岡熙씨 항목 옆에는 「父 趙秉甲, 母 李秉兩」라는 글씨가 박혀 있었다.
 
  趙重完씨의 호적등본을 팩스로 받은 며칠 후 이번에는 曺光煥 이사장이 팩스 석 장을 보내왔다.
 
  팩스는 1994년 총무처 정부기록 보존소에서 발간한 「동학관련 판결문집」이라는 책을 복사한 것이다.
 
  曺이사장이 복사해 보내온 책의 33~35페이지에는 대한제국 고등재판부 판사 趙秉甲이 평민 피고 崔時亨에게 사형을 선고한 사실이 또렷한 글자로 적혀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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