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속재산처리법·원조정책·韓日 국교 정상화·중화학공업·IMF 사태가 전환점
⊙ 美, 군사원조까지 합하면 50억 달러 이상 제공(1946~1961년)
⊙ 박정희와 전두환의 色 다른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중진국 도약
李榮薰
1951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同 대학원 경제학 박사 / 한신대 경제학과 조교수,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한국고문서학회 회장, 한국경제사학회 회장 역임. 現 이승만학당 교장 / 저서 《대한민국 이야기》 《한국경제사》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호수는 어디에》 《반일 종족주의》(공) / 하성학술상(1989), 청람상(1990), 경암학술상(2013), 시장경제대상 출판부문 대상(2013), 월봉저작상(2017)
⊙ 美, 군사원조까지 합하면 50억 달러 이상 제공(1946~1961년)
⊙ 박정희와 전두환의 色 다른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중진국 도약
李榮薰
1951년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同 대학원 경제학 박사 / 한신대 경제학과 조교수,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한국고문서학회 회장, 한국경제사학회 회장 역임. 現 이승만학당 교장 / 저서 《대한민국 이야기》 《한국경제사》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호수는 어디에》 《반일 종족주의》(공) / 하성학술상(1989), 청람상(1990), 경암학술상(2013), 시장경제대상 출판부문 대상(2013), 월봉저작상(2017)
- 사진=조선DB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편입된 것이 오늘날의 번영을 이룬 원동력입니다.”
‘전쟁을 치른 지 70년밖에 되지 않은 한국이 경제 11위의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묻자 이영훈(李榮薰) 전(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이 교수의 설명을 듣다 보면 이해가 갔다. 이영훈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한국고문서학회 회장, 한국경제사학회 회장을 지낸 경제학자로, 한국 경제사 연구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그가 쓴 《한국경제사》는 경제학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한국 경제사에 대한 교과서로 꼽힌다. 이영훈 교수를 지난 6월 11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이승만 학당’에서 만났다.
다섯 번의 전환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유 통상으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미국이 펼친 자유세계 시장의 기회와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 것이 우리 경제 부흥을 이끈 밑거름이었습니다. 이런 대전제를 바탕으로 한국 경제의 70년을 되돌아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전후(戰後) 70년 한국 경제의 전환점이 됐던 다섯 가지 정책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의 ‘귀속재산처리법’(1949년), 미국의 원조 경제 정책, 박정희 대통령의 ‘한일(韓日) 국교 정상화’,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색(色)이 다른 ‘중화학공업 육성’, 김영삼 정부의 IMF 사태를 꼽았다.
1946년 9월에 일본 정부와 주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가 공동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에 남은 일본 재산은 총 52억4650만 달러(남조선 22억7000만 달러, 북조선 29억7000만 달러)였다. 소유 주체별로는 기업 소유가 67.6%(35억여 달러), 정부 소유가 19%(10억여 달러), 개인 소유가 13.4%(7억여 달러)였다. 이들 일본 재산은 이후 귀속재산(歸屬財産)으로 불렸다. 1948년 10월에 미군정은 귀속재산 모두를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했다. 귀속재산의 가치는 총 3053억원에 달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세출(歲出) 예산이 351억원이었으므로, 귀속재산의 가치는 그의 9배나 되는 거액이었다.
초대 이승만 정부의 의지는 정부 조직 내에 기획처를 설치하는 것으로 구체화했다. 기획처는 경제에 관한 종합적 계획을 수립하고 정부 예산을 편성하는 기구로서 국무총리 산하에 설치됐다. 기획처는 예산국, 경제계획국, 물동계획국, 물가계획국의 4개국으로 구성됐다.
이들 자산은 대한민국 국가 소유의 자산이 될 수 있었다. 일종의 ‘국가자본주의적 경제 정책’을 앞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민영화하기로 결정했다.
귀속재산처리법으로 한국 기업 성장의 발판 마련
이승만 정부는 1949년 12월,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했다.
“귀속재산처리법은 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인수한 귀속재산 가운데 국영 또는 공영으로 정한 것 이외의 사업체·부동산·동산·주식 등을 민간에 매각도록 규정했습니다. 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인수한 귀속재산은 1812개에 달하는 귀속사업체를 비롯해 그 규모가 방대했습니다.”
― 어떤 방식으로 매각했습니까.
“선량하고 능력이 있는 연고자와 종업원, 농지개혁에 의해 농지를 매수당한 지주에게 우선 매각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매각 대금은 최장 15년 분할로 내게 했습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시 재정 확보, 인플레이션 억제, 군수품의 생산 증대와 같은 긴급한 요구에 밀려 귀속재산 매각은 속도를 더했습니다.”
― 그 결과 어떻게 됐나요.
“국영으로 남은 대한석탄공사와 대한조선공사 등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귀속사업체가 민영화됐습니다. 이는 신생국의 경제체제를 민간 기업이 주도하는 자유시장경제체제로 변모시켰습니다. 귀속재산의 취득은 상당한 특혜를 의미했습니다. 귀속사업체의 불하(拂下) 가격은 시가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조선방직 부산공장의 경우 정부의 사정(査定) 가격은 35억원이었으나, 불하가격은 22억원에 불과했습니다.”
― 일종의 특혜군요.
“이로 인해 귀속재산의 불하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온상으로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의 전후 70년을 이끈 첫 번째 사건으로 꼽은 이유는 이승만 정부의 과감하고 신속한 귀속재산 불하가 자본 축적이 빈약한 한국의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에 활동한 주요 대기업은 상당 부분 귀속사업체의 매수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이들 대기업의 상당수는 직접 또는 인수, 합병의 간접 경로를 통해 오늘날의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美 원조는 국민소득의 13.3%에 달해(1956년)
이영훈 교수가 꼽은 두 번째 사건은 미국의 원조 경제 정책이다.
“1950년대까지 미국과 자유 통상을 할 만한 나라가 없거나, 매우 적었기 때문에 미국은 여러 국가에 원조를 했습니다. 심지어 영국, 독일조차도 전쟁의 피해로 인해 자력(自力)으로는 국제 수지를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유럽 복원을 위해서라도 경제 원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 한국도 이들 국가 중 하나였죠.
“미국은 한국 경제 부흥을 위해 연간 2억~3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며 한국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줬습니다. 군사 원조를 포함해 미국으로부터 100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받은 단일 국가는 한국뿐입니다. 아프리카 전 대륙에 미국이 쏟아붓는 원조보다 많았을 정도니까요. 이것이 소비재 공업을 중심으로 한 기초공업의 건설에 도움이 됐고, 한국 정부의 재정 안정에 이바지했습니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한 것은 1967년 무렵입니다.”
1952년 8월, 미국 대통령의 특사 마이어와 한국 정부 사이에 한국 경제의 복구와 양국 정부 간의 원활한 협력을 위한 한미경제조정협력이 체결됐다. 그 결과 한미 양측의 대표 1명씩으로 구성되는 합동경제위원회가 서울에 설치됐다. 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사》에 따르면 한국 경제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1953년의 국민소득에서 10% 이상의 비중을 차지했다. 원조 비중은 1956년 최고에 달해, 같은 해 국민소득의 13.3%를 차지했다. 1958년 이후부터는 줄었으나, 1960년에도 여전히 국민소득의 7.6%를 차지했다. 이영훈 교수는 “전쟁 이후 한국 경제가 이룩한 연평균 4~5%의 경제 성장은 거의 대부분 원조에 의한 투자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원조로 기간산업 건설”
“미국의 원조는 한국인의 부족한 소비재를 공급함으로써 사회와 정치의 안정을 이루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전력·비료·시멘트 등 기간산업의 건설과 도로·항만·통신·수리시설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도 적지 않은 이바지를 했습니다.”
― 미국 원조에 대해 인색하게 평가하는 부류도 있지요.
“1950년 당시부터 일부 경제학자들은 미국의 원조가 후진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기보다 동서냉전의 목적으로 정치적, 군사적 고려로 이뤄진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언설(言說)은 대부분 부정확한 관찰이거나 단기적 관점에서 성급하게 내려진 결론입니다. 전쟁 후 불과 6년 만에 한국 정부가 이룩한 공업화의 성과는 동시대 다른 후진국과 비교해 평균 이상이었습니다. 면방직·제분·제당 등 소비재공업의 발전은 국민의 소비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기간산업의 건설은 꽤 광범하게 의욕적으로 착수됐고, 그 성과는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예컨대 1950년대에 재건된 면방직·철강업·목재업 등은 1960년대 들어와 수출 산업의 선두주자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원조에 관한 평가는 원조 물자가 도입돼 민간에 배분된 직접 효과에만 주목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 무상(無償)으로 주어진 원조는 민간에 유상(有償)으로 매각됐으며, 그 대금으로 적립된 대충자금은 한국 정부의 재정자금으로 이관돼 그 일부가 사회간접자본, 기간산업의 건설에 투자됐습니다. 원조의 효과를 냉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경제 원조와 별도로 군사 원조까지 검토해야 합니다. 군사 원조의 금액과 내역은 무역·원조의 통계에서 빠져 그 내역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미국 정부의 자료에 의하면 1946~1961년에 걸쳐 31억3730만 달러의 경제 원조 외에 총 15억7300만 달러에 달하는 군사 원조도 제공됐다. 군사 원조는 여러 경로로 한국 경제 성장에 이바지했다. 상당 부분은 군사분계선 지역의 군사용 도로·교량·구조물 공사에 투입됐다. 이영훈 교수는 “한국의 많은 토목·건설회사가 그 공사를 수주해 성장했고, 미국군의 엄격한 감리를 받는 가운데 선진적인 토목·건설 기술을 습득했다”며 “1950년대에 걸쳐 약 8000여 명의 장교와 하사관이 해외연수를 다녀와 그 결과 한국군은 조직과 행정에서 가장 선진적인 집단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경제는 1963년부터 고도성장을 시작했다. 1962년 GDP 성장률은 2.1%에 불과했는데, 1년 뒤인 1963년 9.2%로 올랐다. 이런 고도성장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을 때까지 이어졌다. 34년 동안 한국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9.1%였다.
“때마침 탄생한 박정희 정부가 미국의 충고를 적극적으로 따랐고, 국가 경제를 개방하고, 금리를 낮추고, 환율을 자율화하면서 1960년대 후반에는 한국의 비교 우위가 확실해졌습니다. 세계무대를 향한 본격적인 수출 정책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후진국의 공업품을 수입했고, 세계에 자본과 기술을 공급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결국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미국적 질서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깊숙하게 편입돼 세계 시장의 구조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한 덕분입니다.”
1965년 韓日 국교 정상화
이영훈 교수는 세 번째 전환점을 ‘한일 국교 정상화’로 꼽았다. 1965년 6월,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양국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대한 조약’과 4개의 부속협정에 서명했다. 동시에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도 체결했는데, 양국 간의 채권·채무 관계, 곧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 저리 차관을 제공키로 했다.
― 한일 국교 정상화는 외교뿐 아니라 경제적 전환점 또한 되는 사건이군요.
“미국적 질서에 편입됐다고 해서 한국과 미국이 직접적 관계를 정립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국가는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긴밀했거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과 협력합니다. 우리에게는 일본이라는 매우 유리한 협력 상대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지역 공동체를 매개로 미국에 함께 맞설 수 있는 상대였습니다. 한국 역사에 있어서 일제 치하는 분명히 아픈 역사이지만 분명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부흥을 이끌었지만, 박 대통령이 나라를 물려받기 이전에 잘 정비된 제도가 있었습니다. 자유경제의 기본인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돼 있었고, 일찍부터 민법(1958년), 상법(1962년)이 제정돼 있었습니다.”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건국 헌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했다. 또 헌법은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했는데(제15조), 이들 조항에 근거해 헌법학자들은 대한민국의 경제체제가 통상적으로 자본주의로 불리는 자유시장경제를 성립했다고 보고 있다.
“1950년대 한국은 최빈국 아냐”
“일본의 조선 통치는 우리 민족에게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나라를 자국(自國)의 영토로 합병시킬 목적으로 한국을 지배했기 때문에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이식했습니다. 그래서 소유권 제도가 잘 정비돼 있었고, 회사나 공장·거래소 등 시장을 작동시키는 기구가 원활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훈련된 한국인이 아주 많았고, 철도·항만 등 사회간접 자본도 풍부했습니다.”
― 전쟁을 치렀지만, 기본 인프라는 있었군요.
“저는 1950년대 한국이 최빈국(最貧國)이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해방과 전쟁으로 상황이 나빠진 것은 사실이나 사회간접자본의 수준으로만 보자면 이미 중진국 수준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성장 잠재력이 풍부한 사회였습니다.”
― 잠재력이 큰 국가였군요.
“맞습니다. 국가의 방향성을 올바로 잡기만 하면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했는데 그 부분을 일정 수준 남겨준 것은 일본입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룬 것을 경제 발전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받은 자금이 차례로 국내에 도입됨으로써 국가 경제의 시드머니가 됐습니다. 포항제철을 세운 것뿐 아니라, 연수생을 일본 제철 회사에 보내며 일본 기업과 협력했습니다.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주가 조선소를 세울 때에는 일본의 가와사키 조선소와 협력했습니다. 일본 입장에서 한국이 잘되는 것이 자국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철저히 경제적 판단에 따라 그들의 설계 능력을 한국에 전수한 겁니다. 법률구조, 기술 체계가 같고, 문화가 유사한 점이 양국 간의 협력을 증진시킨 요인이었습니다.”
“韓日 FTA 체결해야”
이영훈 교수의 역작인 《한국경제사》는 2016년도에 출간됐다. 이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협력 관계가 언제쯤 끝날까 생각하며 책을 출간했는데,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 놀라는 중이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무역 흑자를 안정적으로 달성하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입니다. 신기하게도 한국의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는 때부터 대일(對日) 무역 적자는 굉장히 심화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은 일본 무역수지 적자를 토대로 다른 국가에 대해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는, 일종의 지역 내(內) 분업 구조를 이어가는 겁니다.”
― 쉽게 말해 일본에서 원자재를 수입해 재가공해서 다른 국가에 수출한다는 거죠.
“1998년부터 한국의 대일 무역수지는 200억~250억 달러 적자인데, 반면 전체 무역수지는 300억~400억 달러 흑자입니다. 가령 일본으로부터 정밀 소재, 부품을 들여와서 한국에서 반도체·자동차·조선·기계를 만들어 전(全) 세계에 수출해 흑자를 이뤄내는 구조입니다. 신기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이런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 흔히 ‘한국은 왜 일본처럼 원(原)소재를 만들지 못하느냐’고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죠.
“그걸로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밀 부품이나 고급 소재를 일본에서 들여오는 것은 일본이 선두주자이고, 한국이 그걸 자체 개발하는 것보다 수입하는 것이 경제적 이득이 커서입니다. 일본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물류비가 싸고, 시장 자체가 연결돼 있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지정학적 비교 우위라고 합니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과 인접한 대만,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는 대부분 이런 지정학적 이점을 누리고 있습니다.”
― 좋은 거네요.
“공업 대국을 지척에 두고 있다는 것은 한국 경제에 좋은 겁니다. 그걸 가능케 한 것이 한일 국교 정상화였으니, 경제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볼 밖에요. 저는 한국과 일본이 시장 통합을 하면 훨씬 국제 경쟁력이 높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통합이요.
“한일 FTA를 체결하는 겁니다. 한국과 미국이 했듯이 일본과의 무역 장벽을 없애고, 해저터널을 뚫어서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협조하는 것이 양국이 윈윈 하는 길입니다. 이를 가로막는 것은 한국의 마음의 장벽입니다. 저출산, 청년실업률 1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시장 통합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매우 클 겁니다.”
중화학공업 육성
이영훈 교수는 네 번째 전환점으로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을 꼽았다. 그는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이 전두환 정부로 건설적으로 이관됐다고 보고 있다. 다만 색깔은 다르다. 박정희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이 ‘정부 주도’였다면, 전두환 정부는 ‘민간 주도’를 추진했다.
“미국 질서에 편입되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로 한국의 비교 우위가 현실화됐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소재, 기술을 가져와서 우리의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으로 탈바꿈시켜서 미국, 동남아 시장에 팔았습니다. 한때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즐비했습니다. 이런 수출 전략이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지다가 정부가 중화학공업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면서 달라집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경공업에 치중할 때에도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포항제철이 있었지만, 1973년부터 본격화됩니다. 박정희 정부가 1973~1979년까지 정부 주도형 중화학공업을 일궈냈다면, 전두환 정부는 1985~1995년까지 민간 주도의 중화학공업화를 이뤄냈습니다.”
수출 100억 달러, 애초 예상보다 4년 빨리 달성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 추진을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국무총리 소속의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청와대 안에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을 뒀다. 기획단 단장은 청와대 경제제2수석비서관인 오원철이 임명됐다. 그해 6월에 기획단은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을 발표했다. 1981년까지 총 88억 달러를 투자해 철강·비철금속·기계공업·조선·전자·화학의 6개 공업을 육성하며, 이로써 1981년까지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GNP 983달러를 달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되면 전체 공산품 수출에서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은 65%가 될 전망이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화에 참여한 기업에 막대한 지원을 베풀었다. 정부는 산업기지개발공사를 설립해 토지를 매수하고 공장부지를 조성한 다음에 기업들에 헐값에 분양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화에 소요되는 투자자금도 공급했다. 투자자금의 구성은 내자 53억 달러와 외자 35억 달러였다. 내자 조달을 위해 정부는 국민투자기금을 조성했다. 1973~1978년에 걸쳐 총 112억 달러의 외자가 도입됐다. 일부 경제학자들의 비판적 예측과 달리 중화학공업화는 조기에 낙관적인 실적을 거뒀다.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은 애초 계획보다 4년 빠른 1977년에 이뤘고,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의 약속도 4년 빨리 달성했다.
한국의 중화학공업화가 성공을 거둔 것은 국가 경제의 공학적 건설과 세계 경영을 지향한 정부의 개발 정책이 과학적이고 강력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초시설, 자금, 숙련노동을 풍부하게 지원했고, 독점과 경쟁의 산업 정책이나 보호와 개방의 시장 정책에서 능숙한 조정의 솜씨를 발휘했다. 1980년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은 해체됐다.
전두환의 ‘공업발전법’(1986년)은 한국 시장경제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 법의 제정과 더불어 1960년 이래 기계·조선·전자·철강·비철금속·섬유화학·섬유 등 7개 공업의 진흥을 위해 정부의 개입과 통제를 정당화해 온 기계공업진흥법(1967년) 등 7개 법률이 폐지됐다. ‘공업발전법’은 ‘개방, 자율, 경쟁을 기반으로 시장경제원리를 정착시키겠다’는 의도에서 제정됐다. 이영훈 교수는 “새로운 법은 1960년대 이래 고도성장을 이끌어온 정부의 행동 원리가 더는 직접적인 개입과 통제를 용인하지 않을 정도로 민간 기업 부문이 성장하자 그에 맞춰 자신을 조정, 개량한 결과”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의 체질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탈피시킨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 경영을 본격적으로 지향할 수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이어받은 중화학공업의 육성 시기에는 때마침 중국 시장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투자는 그야말로 마중물이 되었고, 1985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 기업이 중진국으로 진출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사실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도약하기는 쉬운데 거기부터 정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많은 나라가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한국은 그걸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우위를 선점한 IT는 표준화된 기술이어서 가능”
― 어떤 일이 있었기에 가능했을까요.
“이병철(李丙喆), 박태준(朴泰俊), 정주영, 구자경(具滋暻) 등 걸출한 경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에 적극적으로 부응했고, 전두환 정부를 거쳐 중화학공업이 민간 주도로 바뀌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경영인들입니다.”
― 그럼에도 아직 이들 기업인에 대한 혹독한 평가도 있죠.
“기계, 화학은 실험실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기술력이 조금씩 축적됩니다. 독일의 제약회사처럼 방대하게 축적한 자료는 어느 국가도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브라질처럼 섣불리 따라가려다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성숙한 암묵적 기술이 어떻게 개발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오랜 장인들, 숙련 노동자들의 반복 노동과 실험을 통해 축적되는 기술입니다. 일본이 아직 기계 정밀, 고급 철강 분야에서 세계 최고인 것처럼 말입니다.”
― 우리 경영인들의 판단이 뛰어났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우위를 선점한 IT는 다행히 표준화된 기술입니다. 기술 축적이 없는 나라도 모험적 투자를 통해 선진국 수준의 기술을 취득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신(新)산업의 기술은 수명이 짧고 끊임없이 개선됩니다. 반도체, 자동차 다 그렇습니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성공했습니다. 오너 경영인을 앞세운 대규모 기업집단의 이점입니다. 결국 19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IT산업에 민간 기업가들이 투자함으로써 점진적인 공업 생산력의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민주화 앞세운 경제자유화가 국가 경제 발목 잡아”
1997년의 금융위기는 정전 이후 한국 경제의 마지막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이영훈 교수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경제 성장의 활력을 잃고 감속 성장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1997년의 위기는 성격이 굉장히 복잡한데 김영삼(金泳三) 정부의 성급하고, 무책임한 개방 정책이 주요인이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민간 기업, 정부, 관료 간에는 기밀한 조정과 협동 체제가 작동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통치자들의 강력한 개발의지, 효율적이고 강력한 관료집단, 전경련으로 대표되는 기업집단, 그리고 기능공을 중심으로 한 노동 세력까지 말입니다. 그들의 한국 고도성장을 이끌어온 그 개발체제를 김영삼 정부가 해체했습니다.”
― 어떤 방식으로요.
“자유화와 개방화를 하려면 신중하게 단계적으로 속도 조절을 해야 하는데 한꺼번에 금융시장을 전면 개방했습니다. 선진화를 앞세운 포퓰리즘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1년 동안 수많은 기업이 구조조정을 하고, 도산하고,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2007년까지 약 3000억 달러의 국부가 해외로 유출됐습니다. 은행이 외국계 자본에 장악되고, 재매각됐습니다. 결국 긴밀하게 작동한 고도성장의 개발체제가 민주화의 이름으로 성급하게 해체됐고, 대중적 인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 그 사건이 벌써 26년 전입니다.
“이후 기업 육성 정책은 사라지고, 기업을 억압하는 기업 규제 정책이 소득의 재분배라는 이름으로 강화되면서 국가 경제의 활력이 떨어졌습니다. 경제 성장의 핵심은 투자인데 갈수록 투자 증가율이 감소했습니다. 한국의 GDP 규모가 1997년에 이미 세계 11위였는데 2022년도 그러합니다. 26년이 지났는데도 똑같다는 소리입니다. 제대로 된 정치적 리더가 있었다면 적어도 세계 경제 7~8위까지는 치고 올라갈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1997년에 끝이 났습니다.”
― 김영삼 정부의 잘못이 크군요.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경영체로서 본질적으로 기업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장이 무능하면 기업이 망하듯이 저질의 정치 지도자가 들어서면 나라 경제도 결국 망합니다. 정부는 연간 생산된 부가가치의 근 30%를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거둬가는데 이건 일종의 폭력이고, 그렇게 거둬진 세금이 비효율적으로 쓰이면 그 나라 경제는 정체하기 마련입니다. 정치의 질(質)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빠지고 있습니다.”
― 한국 경제가 다시 도약할 수 있을까요.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색이 같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또한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전임 정부의 원칙, 정책을 계승하지 않고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국가라는 거대 기업을 이끌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정신, 의지, 비전이 확실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한국 경제는 어떤 리더가 이끄느냐에 따라 선진국의 문턱에서 다시 미끄러질 수도, 다시 도약할 수도 있습니다.”⊙
‘전쟁을 치른 지 70년밖에 되지 않은 한국이 경제 11위의 경제 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묻자 이영훈(李榮薰) 전(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렇게 답했다. 이 교수의 설명을 듣다 보면 이해가 갔다. 이영훈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한국고문서학회 회장, 한국경제사학회 회장을 지낸 경제학자로, 한국 경제사 연구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그가 쓴 《한국경제사》는 경제학도는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한국 경제사에 대한 교과서로 꼽힌다. 이영훈 교수를 지난 6월 11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이승만 학당’에서 만났다.
다섯 번의 전환점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유 통상으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고자 했습니다. 미국이 펼친 자유세계 시장의 기회와 이점을 충분히 활용한 것이 우리 경제 부흥을 이끈 밑거름이었습니다. 이런 대전제를 바탕으로 한국 경제의 70년을 되돌아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영훈 교수는 전후(戰後) 70년 한국 경제의 전환점이 됐던 다섯 가지 정책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의 ‘귀속재산처리법’(1949년), 미국의 원조 경제 정책, 박정희 대통령의 ‘한일(韓日) 국교 정상화’,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색(色)이 다른 ‘중화학공업 육성’, 김영삼 정부의 IMF 사태를 꼽았다.
1946년 9월에 일본 정부와 주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총사령부(GHQ)가 공동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조선에 남은 일본 재산은 총 52억4650만 달러(남조선 22억7000만 달러, 북조선 29억7000만 달러)였다. 소유 주체별로는 기업 소유가 67.6%(35억여 달러), 정부 소유가 19%(10억여 달러), 개인 소유가 13.4%(7억여 달러)였다. 이들 일본 재산은 이후 귀속재산(歸屬財産)으로 불렸다. 1948년 10월에 미군정은 귀속재산 모두를 대한민국 정부에 이관했다. 귀속재산의 가치는 총 3053억원에 달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세출(歲出) 예산이 351억원이었으므로, 귀속재산의 가치는 그의 9배나 되는 거액이었다.
초대 이승만 정부의 의지는 정부 조직 내에 기획처를 설치하는 것으로 구체화했다. 기획처는 경제에 관한 종합적 계획을 수립하고 정부 예산을 편성하는 기구로서 국무총리 산하에 설치됐다. 기획처는 예산국, 경제계획국, 물동계획국, 물가계획국의 4개국으로 구성됐다.
이들 자산은 대한민국 국가 소유의 자산이 될 수 있었다. 일종의 ‘국가자본주의적 경제 정책’을 앞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미국 생활을 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민영화하기로 결정했다.
귀속재산처리법으로 한국 기업 성장의 발판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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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은 직접 원자력연구소 건설부지를 제안하고 공사현장을 수시로 둘러보며 연구자들을 격려했다. 사진=국가기록원 |
“귀속재산처리법은 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인수한 귀속재산 가운데 국영 또는 공영으로 정한 것 이외의 사업체·부동산·동산·주식 등을 민간에 매각도록 규정했습니다. 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인수한 귀속재산은 1812개에 달하는 귀속사업체를 비롯해 그 규모가 방대했습니다.”
― 어떤 방식으로 매각했습니까.
“선량하고 능력이 있는 연고자와 종업원, 농지개혁에 의해 농지를 매수당한 지주에게 우선 매각하도록 규정했습니다. 매각 대금은 최장 15년 분할로 내게 했습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시 재정 확보, 인플레이션 억제, 군수품의 생산 증대와 같은 긴급한 요구에 밀려 귀속재산 매각은 속도를 더했습니다.”
― 그 결과 어떻게 됐나요.
“국영으로 남은 대한석탄공사와 대한조선공사 등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귀속사업체가 민영화됐습니다. 이는 신생국의 경제체제를 민간 기업이 주도하는 자유시장경제체제로 변모시켰습니다. 귀속재산의 취득은 상당한 특혜를 의미했습니다. 귀속사업체의 불하(拂下) 가격은 시가와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조선방직 부산공장의 경우 정부의 사정(査定) 가격은 35억원이었으나, 불하가격은 22억원에 불과했습니다.”
― 일종의 특혜군요.
“이로 인해 귀속재산의 불하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온상으로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경제의 전후 70년을 이끈 첫 번째 사건으로 꼽은 이유는 이승만 정부의 과감하고 신속한 귀속재산 불하가 자본 축적이 빈약한 한국의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1950년대에 활동한 주요 대기업은 상당 부분 귀속사업체의 매수를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이들 대기업의 상당수는 직접 또는 인수, 합병의 간접 경로를 통해 오늘날의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美 원조는 국민소득의 13.3%에 달해(19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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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8일, 외무부장관실에서 한국 측 정일형 외무부 장관과 미국 측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한미경제원조단일협정을 조인했다. 사진=조선DB |
“1950년대까지 미국과 자유 통상을 할 만한 나라가 없거나, 매우 적었기 때문에 미국은 여러 국가에 원조를 했습니다. 심지어 영국, 독일조차도 전쟁의 피해로 인해 자력(自力)으로는 국제 수지를 방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으로서는 유럽 복원을 위해서라도 경제 원조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 한국도 이들 국가 중 하나였죠.
“미국은 한국 경제 부흥을 위해 연간 2억~3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며 한국 경제를 안정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해줬습니다. 군사 원조를 포함해 미국으로부터 100억 달러 이상의 원조를 받은 단일 국가는 한국뿐입니다. 아프리카 전 대륙에 미국이 쏟아붓는 원조보다 많았을 정도니까요. 이것이 소비재 공업을 중심으로 한 기초공업의 건설에 도움이 됐고, 한국 정부의 재정 안정에 이바지했습니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한 것은 1967년 무렵입니다.”
1952년 8월, 미국 대통령의 특사 마이어와 한국 정부 사이에 한국 경제의 복구와 양국 정부 간의 원활한 협력을 위한 한미경제조정협력이 체결됐다. 그 결과 한미 양측의 대표 1명씩으로 구성되는 합동경제위원회가 서울에 설치됐다. 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사》에 따르면 한국 경제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1953년의 국민소득에서 10% 이상의 비중을 차지했다. 원조 비중은 1956년 최고에 달해, 같은 해 국민소득의 13.3%를 차지했다. 1958년 이후부터는 줄었으나, 1960년에도 여전히 국민소득의 7.6%를 차지했다. 이영훈 교수는 “전쟁 이후 한국 경제가 이룩한 연평균 4~5%의 경제 성장은 거의 대부분 원조에 의한 투자로 설명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원조는 한국인의 부족한 소비재를 공급함으로써 사회와 정치의 안정을 이루는 데 큰 몫을 했습니다. 전력·비료·시멘트 등 기간산업의 건설과 도로·항만·통신·수리시설 등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에도 적지 않은 이바지를 했습니다.”
― 미국 원조에 대해 인색하게 평가하는 부류도 있지요.
“1950년 당시부터 일부 경제학자들은 미국의 원조가 후진국의 경제 발전을 위해서라기보다 동서냉전의 목적으로 정치적, 군사적 고려로 이뤄진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언설(言說)은 대부분 부정확한 관찰이거나 단기적 관점에서 성급하게 내려진 결론입니다. 전쟁 후 불과 6년 만에 한국 정부가 이룩한 공업화의 성과는 동시대 다른 후진국과 비교해 평균 이상이었습니다. 면방직·제분·제당 등 소비재공업의 발전은 국민의 소비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이바지했습니다. 기간산업의 건설은 꽤 광범하게 의욕적으로 착수됐고, 그 성과는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예컨대 1950년대에 재건된 면방직·철강업·목재업 등은 1960년대 들어와 수출 산업의 선두주자로서의 역할을 했습니다. 원조에 관한 평가는 원조 물자가 도입돼 민간에 배분된 직접 효과에만 주목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 무상(無償)으로 주어진 원조는 민간에 유상(有償)으로 매각됐으며, 그 대금으로 적립된 대충자금은 한국 정부의 재정자금으로 이관돼 그 일부가 사회간접자본, 기간산업의 건설에 투자됐습니다. 원조의 효과를 냉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경제 원조와 별도로 군사 원조까지 검토해야 합니다. 군사 원조의 금액과 내역은 무역·원조의 통계에서 빠져 그 내역을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미국 정부의 자료에 의하면 1946~1961년에 걸쳐 31억3730만 달러의 경제 원조 외에 총 15억7300만 달러에 달하는 군사 원조도 제공됐다. 군사 원조는 여러 경로로 한국 경제 성장에 이바지했다. 상당 부분은 군사분계선 지역의 군사용 도로·교량·구조물 공사에 투입됐다. 이영훈 교수는 “한국의 많은 토목·건설회사가 그 공사를 수주해 성장했고, 미국군의 엄격한 감리를 받는 가운데 선진적인 토목·건설 기술을 습득했다”며 “1950년대에 걸쳐 약 8000여 명의 장교와 하사관이 해외연수를 다녀와 그 결과 한국군은 조직과 행정에서 가장 선진적인 집단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경제는 1963년부터 고도성장을 시작했다. 1962년 GDP 성장률은 2.1%에 불과했는데, 1년 뒤인 1963년 9.2%로 올랐다. 이런 고도성장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을 때까지 이어졌다. 34년 동안 한국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9.1%였다.
“때마침 탄생한 박정희 정부가 미국의 충고를 적극적으로 따랐고, 국가 경제를 개방하고, 금리를 낮추고, 환율을 자율화하면서 1960년대 후반에는 한국의 비교 우위가 확실해졌습니다. 세계무대를 향한 본격적인 수출 정책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후진국의 공업품을 수입했고, 세계에 자본과 기술을 공급하는 국가가 됐습니다. 결국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은 미국적 질서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깊숙하게 편입돼 세계 시장의 구조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한 덕분입니다.”
1965년 韓日 국교 정상화
이영훈 교수는 세 번째 전환점을 ‘한일 국교 정상화’로 꼽았다. 1965년 6월,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는 양국의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는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대한 조약’과 4개의 부속협정에 서명했다. 동시에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도 체결했는데, 양국 간의 채권·채무 관계, 곧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3억 달러의 무상자금과 2억 달러의 장기 저리 차관을 제공키로 했다.
― 한일 국교 정상화는 외교뿐 아니라 경제적 전환점 또한 되는 사건이군요.
“미국적 질서에 편입됐다고 해서 한국과 미국이 직접적 관계를 정립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국가는 구체적으로 역사적으로 긴밀했거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과 협력합니다. 우리에게는 일본이라는 매우 유리한 협력 상대가 가까운 거리에 있었습니다. 지역 공동체를 매개로 미국에 함께 맞설 수 있는 상대였습니다. 한국 역사에 있어서 일제 치하는 분명히 아픈 역사이지만 분명한 이점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부흥을 이끌었지만, 박 대통령이 나라를 물려받기 이전에 잘 정비된 제도가 있었습니다. 자유경제의 기본인 사유재산제도가 확립돼 있었고, 일찍부터 민법(1958년), 상법(1962년)이 제정돼 있었습니다.”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건국 헌법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자유, 평등과 창의를 존중하고 보장했다. 또 헌법은 개인의 재산권을 보장했는데(제15조), 이들 조항에 근거해 헌법학자들은 대한민국의 경제체제가 통상적으로 자본주의로 불리는 자유시장경제를 성립했다고 보고 있다.
“일본의 조선 통치는 우리 민족에게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우리나라를 자국(自國)의 영토로 합병시킬 목적으로 한국을 지배했기 때문에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이식했습니다. 그래서 소유권 제도가 잘 정비돼 있었고, 회사나 공장·거래소 등 시장을 작동시키는 기구가 원활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훈련된 한국인이 아주 많았고, 철도·항만 등 사회간접 자본도 풍부했습니다.”
― 전쟁을 치렀지만, 기본 인프라는 있었군요.
“저는 1950년대 한국이 최빈국(最貧國)이었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해방과 전쟁으로 상황이 나빠진 것은 사실이나 사회간접자본의 수준으로만 보자면 이미 중진국 수준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성장 잠재력이 풍부한 사회였습니다.”
― 잠재력이 큰 국가였군요.
“맞습니다. 국가의 방향성을 올바로 잡기만 하면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했는데 그 부분을 일정 수준 남겨준 것은 일본입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이룬 것을 경제 발전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받은 자금이 차례로 국내에 도입됨으로써 국가 경제의 시드머니가 됐습니다. 포항제철을 세운 것뿐 아니라, 연수생을 일본 제철 회사에 보내며 일본 기업과 협력했습니다. 정주영(鄭周永) 현대그룹 창업주가 조선소를 세울 때에는 일본의 가와사키 조선소와 협력했습니다. 일본 입장에서 한국이 잘되는 것이 자국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철저히 경제적 판단에 따라 그들의 설계 능력을 한국에 전수한 겁니다. 법률구조, 기술 체계가 같고, 문화가 유사한 점이 양국 간의 협력을 증진시킨 요인이었습니다.”
“韓日 FTA 체결해야”
이영훈 교수의 역작인 《한국경제사》는 2016년도에 출간됐다. 이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협력 관계가 언제쯤 끝날까 생각하며 책을 출간했는데,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 놀라는 중이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무역 흑자를 안정적으로 달성하는 것은 외환위기 이후입니다. 신기하게도 한국의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는 때부터 대일(對日) 무역 적자는 굉장히 심화합니다. 그러니까 한국은 일본 무역수지 적자를 토대로 다른 국가에 대해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는, 일종의 지역 내(內) 분업 구조를 이어가는 겁니다.”
― 쉽게 말해 일본에서 원자재를 수입해 재가공해서 다른 국가에 수출한다는 거죠.
“1998년부터 한국의 대일 무역수지는 200억~250억 달러 적자인데, 반면 전체 무역수지는 300억~400억 달러 흑자입니다. 가령 일본으로부터 정밀 소재, 부품을 들여와서 한국에서 반도체·자동차·조선·기계를 만들어 전(全) 세계에 수출해 흑자를 이뤄내는 구조입니다. 신기한 것은 오늘날까지도 이런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는 겁니다.”
― 흔히 ‘한국은 왜 일본처럼 원(原)소재를 만들지 못하느냐’고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죠.
“그걸로 한국 경제가 일본에 종속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밀 부품이나 고급 소재를 일본에서 들여오는 것은 일본이 선두주자이고, 한국이 그걸 자체 개발하는 것보다 수입하는 것이 경제적 이득이 커서입니다. 일본이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물류비가 싸고, 시장 자체가 연결돼 있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지정학적 비교 우위라고 합니다. 한국뿐 아니라 일본과 인접한 대만,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는 대부분 이런 지정학적 이점을 누리고 있습니다.”
― 좋은 거네요.
“공업 대국을 지척에 두고 있다는 것은 한국 경제에 좋은 겁니다. 그걸 가능케 한 것이 한일 국교 정상화였으니, 경제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볼 밖에요. 저는 한국과 일본이 시장 통합을 하면 훨씬 국제 경쟁력이 높아질 거라 생각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통합이요.
“한일 FTA를 체결하는 겁니다. 한국과 미국이 했듯이 일본과의 무역 장벽을 없애고, 해저터널을 뚫어서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협조하는 것이 양국이 윈윈 하는 길입니다. 이를 가로막는 것은 한국의 마음의 장벽입니다. 저출산, 청년실업률 10%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시장 통합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매우 클 겁니다.”
중화학공업 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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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2월, 수출입국–공업입국의 깃발 아래 출범한 울산 공업센터의 기공식 모습이다. 사진=조선DB |
“미국 질서에 편입되고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로 한국의 비교 우위가 현실화됐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소재, 기술을 가져와서 우리의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으로 탈바꿈시켜서 미국, 동남아 시장에 팔았습니다. 한때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즐비했습니다. 이런 수출 전략이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지다가 정부가 중화학공업 캐치프레이즈를 내걸면서 달라집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경공업에 치중할 때에도 울산석유화학공업단지, 포항제철이 있었지만, 1973년부터 본격화됩니다. 박정희 정부가 1973~1979년까지 정부 주도형 중화학공업을 일궈냈다면, 전두환 정부는 1985~1995년까지 민간 주도의 중화학공업화를 이뤄냈습니다.”
수출 100억 달러, 애초 예상보다 4년 빨리 달성
1973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 추진을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국무총리 소속의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를 설치하고, 청와대 안에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을 뒀다. 기획단 단장은 청와대 경제제2수석비서관인 오원철이 임명됐다. 그해 6월에 기획단은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을 발표했다. 1981년까지 총 88억 달러를 투자해 철강·비철금속·기계공업·조선·전자·화학의 6개 공업을 육성하며, 이로써 1981년까지 수출 100억 달러와 1인당 GNP 983달러를 달성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되면 전체 공산품 수출에서 중화학공업 제품의 비중은 65%가 될 전망이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화에 참여한 기업에 막대한 지원을 베풀었다. 정부는 산업기지개발공사를 설립해 토지를 매수하고 공장부지를 조성한 다음에 기업들에 헐값에 분양했다. 정부는 중화학공업화에 소요되는 투자자금도 공급했다. 투자자금의 구성은 내자 53억 달러와 외자 35억 달러였다. 내자 조달을 위해 정부는 국민투자기금을 조성했다. 1973~1978년에 걸쳐 총 112억 달러의 외자가 도입됐다. 일부 경제학자들의 비판적 예측과 달리 중화학공업화는 조기에 낙관적인 실적을 거뒀다. 수출 100억 달러 달성은 애초 계획보다 4년 빠른 1977년에 이뤘고,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의 약속도 4년 빨리 달성했다.
한국의 중화학공업화가 성공을 거둔 것은 국가 경제의 공학적 건설과 세계 경영을 지향한 정부의 개발 정책이 과학적이고 강력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초시설, 자금, 숙련노동을 풍부하게 지원했고, 독점과 경쟁의 산업 정책이나 보호와 개방의 시장 정책에서 능숙한 조정의 솜씨를 발휘했다. 1980년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은 해체됐다.
전두환의 ‘공업발전법’(1986년)은 한국 시장경제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 법의 제정과 더불어 1960년 이래 기계·조선·전자·철강·비철금속·섬유화학·섬유 등 7개 공업의 진흥을 위해 정부의 개입과 통제를 정당화해 온 기계공업진흥법(1967년) 등 7개 법률이 폐지됐다. ‘공업발전법’은 ‘개방, 자율, 경쟁을 기반으로 시장경제원리를 정착시키겠다’는 의도에서 제정됐다. 이영훈 교수는 “새로운 법은 1960년대 이래 고도성장을 이끌어온 정부의 행동 원리가 더는 직접적인 개입과 통제를 용인하지 않을 정도로 민간 기업 부문이 성장하자 그에 맞춰 자신을 조정, 개량한 결과”라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한국 경제의 체질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탈피시킨 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 경영을 본격적으로 지향할 수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이어받은 중화학공업의 육성 시기에는 때마침 중국 시장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투자는 그야말로 마중물이 되었고, 1985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 기업이 중진국으로 진출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사실 후진국에서 중진국으로 도약하기는 쉬운데 거기부터 정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많은 나라가 ‘중진국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한국은 그걸 벗어났습니다.”
“우리가 우위를 선점한 IT는 표준화된 기술이어서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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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자동차 등 IT 업계는 후발주자인 한국 기업이 진출하기에 적절한 산업군이었다. 사진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생산라인. 사진=SK하이닉스 |
“이병철(李丙喆), 박태준(朴泰俊), 정주영, 구자경(具滋暻) 등 걸출한 경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에 적극적으로 부응했고, 전두환 정부를 거쳐 중화학공업이 민간 주도로 바뀌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경영인들입니다.”
― 그럼에도 아직 이들 기업인에 대한 혹독한 평가도 있죠.
“기계, 화학은 실험실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기술력이 조금씩 축적됩니다. 독일의 제약회사처럼 방대하게 축적한 자료는 어느 국가도 따라잡기 어렵습니다. 브라질처럼 섣불리 따라가려다 실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성숙한 암묵적 기술이 어떻게 개발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오랜 장인들, 숙련 노동자들의 반복 노동과 실험을 통해 축적되는 기술입니다. 일본이 아직 기계 정밀, 고급 철강 분야에서 세계 최고인 것처럼 말입니다.”
― 우리 경영인들의 판단이 뛰어났을까요.
“오늘날 우리가 우위를 선점한 IT는 다행히 표준화된 기술입니다. 기술 축적이 없는 나라도 모험적 투자를 통해 선진국 수준의 기술을 취득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신(新)산업의 기술은 수명이 짧고 끊임없이 개선됩니다. 반도체, 자동차 다 그렇습니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성공했습니다. 오너 경영인을 앞세운 대규모 기업집단의 이점입니다. 결국 198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IT산업에 민간 기업가들이 투자함으로써 점진적인 공업 생산력의 생산성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민주화 앞세운 경제자유화가 국가 경제 발목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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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가 터지자 한국은행은 1998년 2월 26일 기업은행이 ‘금 모으기 운동’을 통해 모은 금 290kg을 12개의 금괴로 만들어 처음으로 사들였다. 사진=조선DB |
“1997년의 위기는 성격이 굉장히 복잡한데 김영삼(金泳三) 정부의 성급하고, 무책임한 개방 정책이 주요인이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민간 기업, 정부, 관료 간에는 기밀한 조정과 협동 체제가 작동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통치자들의 강력한 개발의지, 효율적이고 강력한 관료집단, 전경련으로 대표되는 기업집단, 그리고 기능공을 중심으로 한 노동 세력까지 말입니다. 그들의 한국 고도성장을 이끌어온 그 개발체제를 김영삼 정부가 해체했습니다.”
― 어떤 방식으로요.
“자유화와 개방화를 하려면 신중하게 단계적으로 속도 조절을 해야 하는데 한꺼번에 금융시장을 전면 개방했습니다. 선진화를 앞세운 포퓰리즘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1년 동안 수많은 기업이 구조조정을 하고, 도산하고, 실업자가 생겼습니다. 2007년까지 약 3000억 달러의 국부가 해외로 유출됐습니다. 은행이 외국계 자본에 장악되고, 재매각됐습니다. 결국 긴밀하게 작동한 고도성장의 개발체제가 민주화의 이름으로 성급하게 해체됐고, 대중적 인기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그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 그 사건이 벌써 26년 전입니다.
“이후 기업 육성 정책은 사라지고, 기업을 억압하는 기업 규제 정책이 소득의 재분배라는 이름으로 강화되면서 국가 경제의 활력이 떨어졌습니다. 경제 성장의 핵심은 투자인데 갈수록 투자 증가율이 감소했습니다. 한국의 GDP 규모가 1997년에 이미 세계 11위였는데 2022년도 그러합니다. 26년이 지났는데도 똑같다는 소리입니다. 제대로 된 정치적 리더가 있었다면 적어도 세계 경제 7~8위까지는 치고 올라갈 수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1997년에 끝이 났습니다.”
― 김영삼 정부의 잘못이 크군요.
“국가는 하나의 거대한 경영체로서 본질적으로 기업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장이 무능하면 기업이 망하듯이 저질의 정치 지도자가 들어서면 나라 경제도 결국 망합니다. 정부는 연간 생산된 부가가치의 근 30%를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거둬가는데 이건 일종의 폭력이고, 그렇게 거둬진 세금이 비효율적으로 쓰이면 그 나라 경제는 정체하기 마련입니다. 정치의 질(質)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나빠지고 있습니다.”
― 한국 경제가 다시 도약할 수 있을까요.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색이 같았고, 이명박·박근혜 정부 또한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전임 정부의 원칙, 정책을 계승하지 않고 일관성 없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국가라는 거대 기업을 이끌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정신, 의지, 비전이 확실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한국 경제는 어떤 리더가 이끄느냐에 따라 선진국의 문턱에서 다시 미끄러질 수도, 다시 도약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