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이건희가 예측한 미래는 현실이 됐다
⊙ 新경영의 핵심은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 1990년대 초반 이건희가 전념했던 반도체와 휴대폰, 2021년 삼성전자 사상 최고 실적 이끌어… 세계시장 1위
⊙ 세계 초일류기업 삼성의 원동력이 된 ‘이건희 신경영’ 키워드 5가지는?
⊙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했던 이건희는 사람 한 명, 기계 한 대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 기업은 물론 야구, 신문, 레슬링, 영화도 1등을 원했던 이건희
⊙ “이건희, 자동차는 기계가 아닌 전자제품이라 강조… 삼성자동차 제대로 됐다면 지금 테슬라 앞섰을 수도”
⊙ 현재 전 세계적 화두인 ESG의 기본 틀 1990년대에 만들어
⊙ 新경영의 핵심은 ‘미래를 위한 준비’였다
⊙ 1990년대 초반 이건희가 전념했던 반도체와 휴대폰, 2021년 삼성전자 사상 최고 실적 이끌어… 세계시장 1위
⊙ 세계 초일류기업 삼성의 원동력이 된 ‘이건희 신경영’ 키워드 5가지는?
⊙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했던 이건희는 사람 한 명, 기계 한 대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 기업은 물론 야구, 신문, 레슬링, 영화도 1등을 원했던 이건희
⊙ “이건희, 자동차는 기계가 아닌 전자제품이라 강조… 삼성자동차 제대로 됐다면 지금 테슬라 앞섰을 수도”
⊙ 현재 전 세계적 화두인 ESG의 기본 틀 1990년대에 만들어
- 사진=조선DB
2021년 3분기에 삼성전자는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삼성전자가 10월 초 공개한 3분기 실적에 따르면 국내 기업 최초로 매출 70조원을 돌파해 매출 73조원, 영업이익 15조8000억원으로 전기 대비 매출은 14.65%, 영업이익은 25.70% 증가했다. 코로나19로 인한 전 세계적 불황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가 실적 기록을 경신해나간 원동력은 반도체와 신형 스마트폰이다. 부문별 실적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반도체에서만 10조원에 가까운 영업이익을 거둔 것으로 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스마트폰 부문도 갤럭시Z폴드3와 Z플립3 등 신상품을 중심으로 매출이 계속 오르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0년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1위이며, 메모리반도체 또한 시장점유율 1위다. 각각 미국의 1위 업체인 애플과 인텔에 앞서는 순위다.
이 같은 오늘의 삼성을 만든 사람이 일찌감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국내에 반도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1970년대에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고, 휴대폰이라고는 카폰과 ‘벽돌(벽돌만큼 크고 무겁다는 뜻) 휴대폰’이 전부였던 1990년대 초에 “전 국민이 휴대폰을 한 대씩 보유하고 오지에서도 언제든 전 세계와 통화할 수 있는 시대”를 준비했다.
BTS를 비롯한 K-팝, K-드라마 〈오징어게임〉 등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K(Korean) 문화가 탄생한 배경에는 IT 강국인 한국의 저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IT 강국을 이건희 회장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IT 강국의 기반을 마련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2021년 10월 25일은 이건희 전 회장이 별세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동안 전 세계에도 대한민국에도 삼성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만 이건희 전 회장의 1주기를 앞두고 삼성전자가 최고 실적을 기록해 하늘에 있는 이 전 회장이 한결 마음을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월간조선》은 2020년 10월 25일 이 전 회장 별세 직후 이 전 회장의 업무 지시 육성 녹음테이프 40여 개(총 27시간 분량)를 입수해 2020년 12월호부터 4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그가 1990년대 초반 그룹 회장으로 ‘신(新)경영’을 시작하면서 약 3년간 현명관 비서실장에게 전한 내용들과 사장단회의 등에서 발언한 내용이다. 기사를 읽은 전직 삼성맨들은 “연수원에서 들었던 이건희 회장의 이야기를 지면으로 다시 보니 무척 그립다” “그땐 힘들었지만 그런 시간들이 지금의 IT 강국 대한민국을 만든 것 같다” “지금 대한민국에 이 회장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음성자료를 구할 수 없겠느냐”며 기자에게 연락해오기도 했다.
이번 11월호에서는 1주기를 앞두고 이 전 회장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이건희의 신경영’을 재조명한다. 이전에 소개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추가했다. 이건희 전 회장을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세계시장을 향해 나아가는 경영인들에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전 회장의 육성은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건희 신경영의 키워드 5가지
이건희 전 회장은 1987년 11월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후 쓰러져 병석에 누운 2014년 5월까지 회장직을 수행했지만 그가 직접 그룹의 대소사를 챙기고 경영철학을 설파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병철 창업주의 3남이면서 만 45세의 나이에 그룹 수장이 된 이건희 회장은 초반에 자리 잡기가 쉽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그때까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 등 그룹 핵심이 아닌 계열사에만 근무해왔고, 그룹의 컨트롤타워인 비서실과 그룹 사장단은 대부분이 ‘이병철의 사람들’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에 나선 시점은 1993년 6월이었다. 신경영의 시작점,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이 회장은 반나절에 걸쳐 혁신을 강조하며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했고, 질 위주의 경영, 신경영을 주창했다.
이때부터 이건희 회장은 비서실과 사장단을 향해 업무를 일일이 챙기고 지시했으며, 자신의 지시사항을 모두 녹음해 한 치 틀림이 없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은 1996년 말까지 약 3년간 이어졌다. 이 회장은 1996년 12월 이학수 비서실 차장이 비서실장으로 승진, 삼성의 2인자가 되면서부터 비서실과 사장단에 자율성을 부여한다. 3년의 노력 끝에 신경영의 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고 생각해서다. 이후부터는 이 회장이 각 계열사에 직접 세세한 지시를 하거나 업무 지시를 녹음하도록 시키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따라서 《월간조선》이 입수한 이 3년(1993~1996)간의 육성테이프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내용이 응축돼 있는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 회장의 육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신경영은 5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양보다 질 ▲미래를 보는 눈 ▲일등주의 ▲위기관리 ▲사회적 책임 등 5가지다. 기사에서는 각 키워드에 해당하는 이 회장의 발언 내용을 소개한다. 기사 중 따옴표 안의 이건희 회장 발언은 녹음테이프에 실린 이 회장의 말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옮긴 것이다.
[1] 量보다 質이다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외치며 가장 많이 사용하고 강조한 문구 중 하나가 ‘질(質) 위주의 경영’이었다. 당시 삼성 임원들은 ‘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이 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건희 회장이 이 문구를 임원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했던 이유가 있다. 이 회장은 그룹 회장에 취임한 1987년부터 질 위주의 경영을 강조해왔지만 이병철 체제에 익숙한 삼성 임원들은 변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계열사 임원들 입장에선 양을 포기하라는 것은 매출, 즉 실적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질이 중요하다 해도 매출 규모가 줄어들면 책임은 우리에게 전가될 것”이라며 반발하는 임원이 대다수였다. 이 회장은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직전 삼성전자 세탁기 공장을 촬영한 사내방송 비디오에서 뚜껑 부분에 불량이 생긴 세탁기를 직원들이 조금 손봐서 출시하는 장면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이수빈 실장에게 퍼부은 이 회장의 말이다.
“그런 엉터리 물건 만들어서 내보내? 왜 양이 필요하냐고. 한 공장에서 불량품 한 대라도 나오면 죄악이야. 그런 라인은 완전히 스톱시켜야지! 라인 멈추고 돌려보내서 그런 일이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해야지 왜 그걸 안 해. 라인 일주일 스톱시킨다고 생산량이 날아가나? 불량품 내놓으면 팔면 팔수록 이미지 나빠지고 장사는 더 안되는데 그렇게 단순한 계산이 안 돼? 그런 거 산 사람들 다시는 절대 삼성 제품 안 사잖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공장 세우라고!”
이어 이 회장은 “당분간 양은 버려도 좋으니 무조건 질 위주로 가. 시장점유율 떨어져도 좋으니 질에 자신 없으면 공장 멈춰. 손해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라며 자신이 지금까지 한 말을 녹음한 테이프를 사장단과 직원들에게 들려주라고 요구했다. 이 회장은 “시장점유율 금성(現 LG전자), 대우보다 떨어져도 좋아. 질 개선하면 우리가 다시 올라갈 거니까. 이거 안 되면 삼성 절대 안 돼.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신임 임원들을 향해서는 “지난 십몇 년간 양 위주로 일했던 습관은 빨리 버려라”며 “21세기를 대비하는 지금은 그런 사고방식을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경영의 질이 좋아질 때까지 양은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양보다 질을 이룬 사람에게 더 높은 인사고과를 줘라, 양은 당분간 버려도 된다”는 말도 반복했다. 매출을 늘린 사람에게 높은 고과를 주는 관행을 없애라고 지시하며 “이런 사고방식을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또 “질에 자신 없으면 공장을 멈춰라, 손해는 내가 책임진다”는 말도 사장단 회의 때마다 잊지 않고 했다.
[2] 미래를 보는 눈
이건희 회장의 탁월함은 경영 능력뿐만이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에서도 두드러진다. 그가 신경영을 진행한 3년여 동안 강연과 회의 등을 통해 한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이 회장은 현재의 기업을 경영하는 경영인인 동시에 미래를 기획하는 기획자였다. 그는 삼성의 미래를 고민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의 미래를 고민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그가 가장 관심을 뒀던 점은 “많은 것이 바뀔 21세기를 어떻게 대처할 것이냐”였다. 그는 후대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해 고민했다.
이 회장은 삼성 임원들을 향해 “지금 한국은 30대 이하 인구가 더 많고, 곧 마주하게 되는 21세기에는 창조성과 개성이 있는 업종과 사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젊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신바람 나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어 “철강, 반도체, 자동차, 전자 같은 투자집약적인 대형 산업하고 도로 같은 인프라를 지금 다 해놓지 않으면 후대에서 원망을 들을 수 있다”며 미래를 위해 기성세대가 맡은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1990년대 초반 신경영에 집중하면서 20~30년 후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전망을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 모두 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 맞아떨어진다.
이 회장은 휴대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1990년대 초에 ‘1인 1휴대전화 시대’와 ‘제5이동통신’을 예측했다. 삼성전자가 세계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30년 전 이 회장의 예측과 판단, 실행 능력이 발휘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이 회장이 1990년대 초반 미래에 대해 한 얘기들이다.
“21세기엔 개인이 전부 전화를 가지고 세계 어디로 가도 전화가 다 돼야 하거든. 앞으로 정보화 사회에 바로바로 전화가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하겠어. 그러니까 도로나 항공 같은 하드 인프라도 중요하지만 교육과 통신 같은 소프트 인프라도 아주 중요해.”
“지금 제1, 제2 이동통신 나오는데 곧 제4, 제5 통신 시대로 갈 거야. 이 인프라 만드는 걸 21세기로 넘길 순 없잖아. 후대에서 원망 들을 수 있어.”
“10년쯤 지나면 카드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에서 신용카드도 되고 전화고 뭐고 다 되는 세상이 온다고.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도 바로 집으로 전화할 수 있어. 미국, 일본은 벌써 그런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우리도 경쟁력을 여기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되잖아.”
뿐만 아니라 이 회장은 30여 년 전 사장단 회의에서 “배터리 사업을 빨리 시작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인력을 대거 확보해야 한다” “우주산업이 곧 대중화될 것”이라면서 사업계획을 내놓으라며 사장단을 닦달했다. 삼성전자를 제외한 계열사 사장들은 “첨단 산업인 반도체 따라가기도 힘든데…”라는 반응이었지만 이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래 먹거리를 고민하고 내놓으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2021년 현재 소프트웨어와 배터리는 명실상부한 고부가가치·고성장 산업이며, 우주산업은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 등 민간 기업이 잇달아 참여하고 있다.
이 회장은 거대 도시 서울을 변화시킬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서울을 여러 개의 소도시로 복합화하면 시민도 기업도 국가도 편리하면서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서울에) 지구별로 선(線)을 쳐야 돼. 각 거점 1평방킬로미터 안에 복합화를 하는 거지. 서울시에 22개 구 512개 동이 있는데(1994년 당시-편집자주) 22개 구를 특화를 해서 일주일 동안은 자기 거점에서 나올 필요가 없게 하는 거야. 그럼 도로가 안 복잡하잖아. 중구나 용산구 같은 중간 지역에는 각 구에서 오기 좋은 센터를 만들고.”
이는 지난 4월 7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내놓은 공약과도 똑 닮았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는 “서울을 인구 50만명 기준의 자족적인 21개의 다핵 분산도시로 전환하고, 권역별로 21분 내 모든 이동이 가능한 생활권을 조성하겠다”는 ‘콤팩트 도시’ 공약을 내놓았다. 여당 서울시장 후보가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내용을 이건희 회장은 27년 전 간파했던 것이다.
이 회장의 예측은 이 밖에도 틀린 것이 없을 정도다. 그는 “1997~98년쯤엔 (우리나라의) 기본 경쟁력이 부족하다 보니 진짜 불경기가 온다. 지금 대비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며 IMF 외환위기 사태를 예고했고, “미래엔 제조업이 쇠하고 고부가가치인 제약업이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며 제약회사, 병원, 의과대, 간호대 등 관련 업종을 지속적으로 인수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코로나19의 창궐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더라도, 어느 정도의 대비는 해놓은 셈이다.
[3] 일등주의
이건희 회장은 모든 분야에서 최고를 지향했다. 삼성 계열사 사장들에게 “삼성은 모든 분야에서 1등이어야 한다. 1등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게 있다면 내가 다 지원하겠다”고 강조한 그는 1등 인프라가 있어야 1등 기업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회장은 계열사의 직원 채용, 부동산 구입, 기계와 물품 구입 등을 결정해야 할 땐 늘 “가장 좋은 것으로 하라”고 했고, 사람 한 명, 기계 한 대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이 일류여야 기업이 일류가 된다”고 생각한 그는 각 분야에서 최고의 인재를 끌어오도록 했다. 늘 우수한 인재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똑똑한 아이들 골라서 맞춰가지고 키워야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연령과 경력 및 학력,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한국식 인사(人事)의 틀을 깬 사람도 이 회장이다. 그는 성과주의를 도입해 급여와 상여금에 능력 및 업무별로 차등을 두도록 했고, 고졸 사원의 임원 승진길도 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이 실적만을 중시하거나 비정(非情)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사람은 주기가 있어서 잘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는 거야. 실수했다고 바로 바꿔버리고 그러면 사람이 클 수가 있나. 인간이 일 년에 석 달 꽃 피지 못해. 잘못되면 빨리 수습하고 반성하고 기록하면 되고 그걸 숨겨놓는 게 나쁜 거야.” 임원 대상 강의에서도 “사람을 볼 때는 단기적으로 보지 말고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전체적으로 평가를 해. 실수 좀 하는 건 야단도 치지 마”라고 강조했다.
1등, 일류를 강조한 이 회장의 압박은 삼성 계열사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원동력이 됐다. 삼성 계열사가 해당 업계에서 1등이 아니라면 1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회장의 뜻이었다. 주력 계열사가 아닌 《중앙일보》와 삼성라이온즈조차 “왜 1등을 못 하냐”는 이건희 회장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전 세계 1등을 해도 변하는 시대에 앞서가기 어려운데 국내 1등도 못 해갖고는 미래가 있겠어?”
삼성이 새로 진출하려 한 제약 사업에 대해서도 1등과 최고를 강조했다. “삼성이 한다면 최고급으로, 1등으로 해야 한다”며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최고로 만들어서 세계로 진출하라”고 당부했다. “그룹 총동원해서 세계 최고 신약을 사 오든 특허를 사 오든 최고 수준으로 해야 돼. 1년에 1000억원 이상 집어넣을 각오를 하고 최고급 인력들이 오고 싶어 하는 회사를 만들어야 된다고. ”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이 회장의 확고한 뜻은 기업경영이 아닌 문화, 체육 등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레슬링을 좋아했던 그는 한국 레슬링이 세계 1위가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한국 레슬링을 지원했고 이 회장의 지원하에 한국 레슬링은 전성기를 맞았다. 미술품에도 관심이 많아 국내 최고의 컬렉션(이건희 컬렉션)을 만들었다. 삼성이 세계 영화계를 좌지우지할 뻔한 순간도 있었다. 미국에 거주하던 조카 이미경(現 CJ 부회장)이 귀국해 이 회장에게 “삼성이 영화 사업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즉시 영화계에서 당대 최고 대우를 받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를 만나 영화 산업에 대해 논의했다. 결국 범(汎)삼성가에서 영화 산업은 CJ의 이미경 부회장이 도맡아 하게 됐지만, 이건희 회장의 “삼성이 한다면 최고로 한다”는 지론을 보여주는 일화다.
[4] 위기관리
이건희 회장은 위기상황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이 회장이 강한 행동을 보이는 때는 자신이 강조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였다. 신경영 진행과 함께 삼성그룹이 점점 커지면서 크고 작은 사고도 끊이지 않았는데, 주로 회장의 시선이 닿기 힘든 건설과 중공업 등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6년 삼성건설 춘천 현장의 가스파이프 폭발 사고와 같은 해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한국중공업 사업장에 무단으로 출입해 스파이 혐의로 경찰에 고발당한 사건이다. 이건희 회장은 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장단 회의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내가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오너가 그만둘 리는 없었고,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이 회장이 크게 분노한 모습을 본 사장단은 그동안 안일했던 생각 등 문제점을 반성하며 계열사별로 향후 신속하고 확실한 위기관리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고, 이 회장의 지시에 따라 이를 자필(自筆)로 적어 제출했다. 이른바 ‘자필 반성문’ 사건이다.
이 회장은 계열사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고를 겪으면서 수차례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 정신머리로 어떻게 일을 해? 내가 물러나겠어. 회장이 미래를 준비하고 우리 그룹 장래를 생각하고 임직원 복지를 생각해야지 사고 수습하고 있어야 돼?”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벌어진 ‘애니콜 화형식’도 같은 맥락이다. 1994년 휴대폰 애니콜 불량률이 10%를 넘는다는 보고를 받은 이 회장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직전 세탁기 불량품 출고 상황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던 이 회장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온 미래산업인 휴대폰에서 두 자릿수의 불량률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다 필요 없다, 불태워버려라”라고 지시했고, 15만여 대의 휴대폰과 팩시밀리 약 500억원어치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 회장의 이 같은 결기가 없었다면 오늘날 삼성전자 휴대폰의 성공신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5] 사회적 책임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매출과 이익 1등뿐만 아니라 복지와 사회공헌 1등 기업으로 만드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회사는 임직원 의식주, 건강, 자식교육 이런 걸 회사 영역으로 갖고 와야 돼. 직원들이 당장 잘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희망이 있어야지. 직원들 부모 자식 걱정이 없어야 돼. 내가 사업이나 공장 새로 시작할 때마다 노인정·탁아소 같이 만들라는 게 그런 이유야.”
삼성은 직원 복지에 그치지 않고 전 국민을 향한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 회장이 “이익의 10%는 사회 소외계층을 돕는 데 쓰라”고 직접 지시하면서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은 인류에 공헌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얘기했다. 기업이 이익을 실현하고 나면 직원과 주주들에게 이익을 배분하는 것은 물론 가난한 사람을 돕고 문화사업에 이바지하는 등 인류에 공헌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 취임 직후인 1989년 삼성복지재단을 설립해 어린이집 설립과 소년소녀가장 돕기, 불우청소년 돕기 등 어린이·청소년 관련 사회공헌 사업을 시작했다. 또 주거취약계층, 이른바 ‘달동네’ 개선 사업을 하라는 지시도 한다. “달동네에서 불우하게 자란 애들이 많아지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어. 삼성이 벌어들인 이익을 우리가 좀 더 가져간다고 이 나라가 나아지나? 벌어들인 만큼 사회에 베풀어야 되는 거야.”
이건희 회장은 우리나라가, 민족이 잘살아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삼성 회장이 뭐가 답답해서 변해야 한다고 부르짖겠어. 나는 3대가 먹고살 게 있는데 내 자산 5%나 10% 늘어나는 게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재산이 1억에서 2억 되는 건 큰 차이가 있겠지만 1조에서 2조 되는 건 뜻이 없어. 우리나라가 일류국가냐 이류국가냐 판가름 나는 게 지금인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지금 늦으면 완전히 기회상실을 하는 거라고.”
이 회장은 일부 임원이 “경기가 나빠 수익도 좋지 않을 때 웬 사회공헌이냐”며 불만을 표시해도 개의치 않고 “삼성이 하면 된다”며 뜻을 밀고 나갔다.
“우리나라에 없는 사례를 삼성이 만들어. 우리가 잘되면 경쟁사들도 다 따라오게 돼 있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겪으며 안전 문제에 경각심을 갖고 국내 최초 민간구조단인 ‘삼성 3119 구조단’을 만든 사람도 이 회장이다. 이 회장은 항상 “삼성이 모범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전 세계 정부 및 기업의 화두인 ESG(Environment·Social·Governance: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사회·지배구조를 뜻하는 말)의 내용은 상당 부분 이건희 회장이 이미 진행해왔던 것이다.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건희의 자동차 사업 진출 꿈이 이뤄졌다면
삼성은 1990년대 신경영으로 질과 양 모두 엄청난 성장을 했지만, 모든 사업에서 승승장구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삼성자동차다. 삼성은 1990년대 초반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려 했지만 이에 대한 정부 허가를 받지 못하면서 김영삼 정부와 긴장관계가 계속됐다. 이 회장의 “정치는 4류, 관료는 3류, 기업은 2류”라는 불만 섞인 발언도 이 시점에 나온 것이다. 정부는 삼성이 국내 모든 사업을 독식하려 해 제동을 걸겠다는 입장이었고,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에 대한 기존 자동차 업체들의 반발과 로비도 강력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대통령에게 왜 삼성이 자동차 사업을 해야 하는지,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이 국가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상세하게 적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정치적인 이유로 이 회장의 애초 계획보다 대폭 축소된 ‘반쪽짜리’ 삼성자동차가 출범했고 날개가 꺾인 삼성의 자동차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왜 자동차 사업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뛰어들고자 했는지는 다시 한 번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삼성이 잘나가면서 문어발식으로 자동차까지 욕심을 냈다”고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 회장은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는 확고한 명분을 갖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의 경쟁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삼성이 자동차 하겠다는 건 이권이나 내 욕심 때문이 아니야. 국내에 자동차 회사가 더 많아야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더 발전을 한다고. 인구가 5000만명 넘는 나라 중에, G7(선진국 7개국) 중에 자동차 회사가 잘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어. 전자나 조선은 안 해도 자동차는 다 하잖아. 우리나라 자동차가 왜 외국에서 우리나라 전자제품만큼 잘 안 팔리나. 제품경쟁력이 없어서 그래. 더 많은 회사가 경쟁을 해야 더 좋은 제품이 나오잖아. 게다가 우리나라가 전자, 철강, 중화학, 조선, 기계, 로봇 이런 산업을 주로 하고 있는데 자동차는 이 산업들하고 상호 파급효과가 아주 크다고. 그걸 알면서도 내가, 삼성이 자동차 산업을 안 한다는 건 기업가로서의 양심이 없는 거야.”
이 회장은 이를 위해 미국 자동차 빅3 업체(포드·GM·크라이슬러)에서 눈에 띄는 좋은 인재를 데려오라고 지시하고, 기존 자동차 업체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일류 자동차 디자이너를 스카우트해 오라며 “그런 사람이 있다면 현금 100억원을 주더라도 데려오라”고 했다.
이 회장은 로봇 산업과 AI(인공지능)에도 관심이 지대했고 자동차 사업을 키워 기존의 자동차를 뛰어넘는 미래형 자동차를 생산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이 회장이 계획해 주변에 이야기했던 미래형 자동차는 현재의 전기차, 자율주행차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펼쳐나가던 3년간 회장 비서실장으로 사실상 24시간을 함께했던 현명관 전 비서실장 역시 자동차 사업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현 전 실장은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가 기계가 아닌 전자제품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동차의 70%는 전기장치라는 게 이 회장의 생각이었고, 미래 자동차에 탑재될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기능에 대해서도 1990년대 초에 수차례 언급했다. 이 회장이 휴대폰을 2G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발전시키는 기반을 마련했듯이, 자동차도 기존의 기계식 자동차에서 미래형 자동차로 진화시키는 꿈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 전 실장은 “그때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계획대로 자동차 산업을 제대로 시작했다면 지금쯤 테슬라를 앞섰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이어 “이건희 회장이 도약시켜놓은 한국 경제가 이제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할 시점인데 적절한 인재가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며 “지금 우리에게 이건희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토로했다.
이재용의 삼성 앞날은
이건희 회장 별세 후 1년이 지나고 상속 및 지배구조 문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서 향후 ‘이재용의 삼성’에 온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2월 1일 이 회장의 백일재(百日齋), 즉 탈상(脫喪) 때는 구속 중이어서 부친의 가는 길을 지키지 못했다. 지난 8월 가석방되면서 부친의 1주기는 지킬 수 있게 됐지만 사면이 아닌 가석방인 만큼 경영권 행사와 업무에는 아직 제약이 많다.
이 부회장은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후 본격적인 3세대 경영을 위해 꾸준히 그룹을 재정비해왔다. 전자, 바이오, 금융을 중심으로 지배구조와 사업 재편에 나섰고, 일부 사업 매각 등으로 선택과 집중을 택했다. 그러나 국정농단 사태로 실형을 선고받아 200일 이상 복역하면서 제대로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고, 사업구조 재편 과정의 합병 관련 의혹 등 남아 있는 사법 리스크도 존재한다. 다만 여론은 “코로나19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재용 부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며 이 부회장의 경영활동 재개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다. 이 부회장은 작년 대국민사과를 통해 경영권 승계 문제나 무노조경영 등 삼성의 문제점을 쇄신하고 새로운 삼성으로 변화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 8월 가석방된 후엔 정부와 국민의 기대에 보답하듯 대규모 투자 계획도 밝혔다. 코로나19 미래질서 재편에 대비하기 위해 향후 3년간 투자 규모를 기존보다 33% 확대한 총 240조원으로 늘리고, 직접 고용과 기업 M&A에도 과감하게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산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에 대해 불세출의 기업인이었던 부친의 그늘을 벗어나기엔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갖은 고난을 이겨낸 만큼 그가 기치로 삼은 ‘뉴 삼성’을 만들어나갈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볼 만도 하다.
작년 10월 이건희 회장 영결식에서 이 회장의 한 친구는 추모사를 통해 “선대로부터 회사를 넘겨받아 지금의 삼성을 키워놓은 이건희 회장의 예를 전 산업사(史)에서 접하지 못했다며 ‘승어부(勝於父·아버지보다 나음)’라는 말을 꺼냈다. 이 부회장은 작년 말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최후진술에서 이 단어를 언급하며 “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효도라는 말씀을 하셨다. 제가 꿈꾸는 승어부는 더 큰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이 ‘승어부’에 성공할지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이 같은 오늘의 삼성을 만든 사람이 일찌감치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국내에 반도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1970년대에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었고, 휴대폰이라고는 카폰과 ‘벽돌(벽돌만큼 크고 무겁다는 뜻) 휴대폰’이 전부였던 1990년대 초에 “전 국민이 휴대폰을 한 대씩 보유하고 오지에서도 언제든 전 세계와 통화할 수 있는 시대”를 준비했다.
BTS를 비롯한 K-팝, K-드라마 〈오징어게임〉 등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K(Korean) 문화가 탄생한 배경에는 IT 강국인 한국의 저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IT 강국을 이건희 회장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IT 강국의 기반을 마련한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2021년 10월 25일은 이건희 전 회장이 별세한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그동안 전 세계에도 대한민국에도 삼성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다만 이건희 전 회장의 1주기를 앞두고 삼성전자가 최고 실적을 기록해 하늘에 있는 이 전 회장이 한결 마음을 놓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월간조선》은 2020년 10월 25일 이 전 회장 별세 직후 이 전 회장의 업무 지시 육성 녹음테이프 40여 개(총 27시간 분량)를 입수해 2020년 12월호부터 4차례에 걸쳐 보도했다. 그가 1990년대 초반 그룹 회장으로 ‘신(新)경영’을 시작하면서 약 3년간 현명관 비서실장에게 전한 내용들과 사장단회의 등에서 발언한 내용이다. 기사를 읽은 전직 삼성맨들은 “연수원에서 들었던 이건희 회장의 이야기를 지면으로 다시 보니 무척 그립다” “그땐 힘들었지만 그런 시간들이 지금의 IT 강국 대한민국을 만든 것 같다” “지금 대한민국에 이 회장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음성자료를 구할 수 없겠느냐”며 기자에게 연락해오기도 했다.
이번 11월호에서는 1주기를 앞두고 이 전 회장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이건희의 신경영’을 재조명한다. 이전에 소개하지 못했던 이야기들도 추가했다. 이건희 전 회장을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세계시장을 향해 나아가는 경영인들에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전 회장의 육성은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건희 신경영의 키워드 5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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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8일 오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운구차량이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사진=조선DB |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에 나선 시점은 1993년 6월이었다. 신경영의 시작점,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사장단 회의를 소집한 이 회장은 반나절에 걸쳐 혁신을 강조하며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했고, 질 위주의 경영, 신경영을 주창했다.
이때부터 이건희 회장은 비서실과 사장단을 향해 업무를 일일이 챙기고 지시했으며, 자신의 지시사항을 모두 녹음해 한 치 틀림이 없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은 1996년 말까지 약 3년간 이어졌다. 이 회장은 1996년 12월 이학수 비서실 차장이 비서실장으로 승진, 삼성의 2인자가 되면서부터 비서실과 사장단에 자율성을 부여한다. 3년의 노력 끝에 신경영의 틀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다고 생각해서다. 이후부터는 이 회장이 각 계열사에 직접 세세한 지시를 하거나 업무 지시를 녹음하도록 시키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따라서 《월간조선》이 입수한 이 3년(1993~1996)간의 육성테이프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내용이 응축돼 있는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 회장의 육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신경영은 5가지 키워드로 요약된다. ▲양보다 질 ▲미래를 보는 눈 ▲일등주의 ▲위기관리 ▲사회적 책임 등 5가지다. 기사에서는 각 키워드에 해당하는 이 회장의 발언 내용을 소개한다. 기사 중 따옴표 안의 이건희 회장 발언은 녹음테이프에 실린 이 회장의 말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옮긴 것이다.
[1] 量보다 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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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6월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에서 200여 명의 임직원들에게 신경영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계열사 임원들 입장에선 양을 포기하라는 것은 매출, 즉 실적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아무리 질이 중요하다 해도 매출 규모가 줄어들면 책임은 우리에게 전가될 것”이라며 반발하는 임원이 대다수였다. 이 회장은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직전 삼성전자 세탁기 공장을 촬영한 사내방송 비디오에서 뚜껑 부분에 불량이 생긴 세탁기를 직원들이 조금 손봐서 출시하는 장면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당시 비서실장이었던 이수빈 실장에게 퍼부은 이 회장의 말이다.
“그런 엉터리 물건 만들어서 내보내? 왜 양이 필요하냐고. 한 공장에서 불량품 한 대라도 나오면 죄악이야. 그런 라인은 완전히 스톱시켜야지! 라인 멈추고 돌려보내서 그런 일이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해야지 왜 그걸 안 해. 라인 일주일 스톱시킨다고 생산량이 날아가나? 불량품 내놓으면 팔면 팔수록 이미지 나빠지고 장사는 더 안되는데 그렇게 단순한 계산이 안 돼? 그런 거 산 사람들 다시는 절대 삼성 제품 안 사잖아.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공장 세우라고!”
이어 이 회장은 “당분간 양은 버려도 좋으니 무조건 질 위주로 가. 시장점유율 떨어져도 좋으니 질에 자신 없으면 공장 멈춰. 손해는 내가 책임질 테니까”라며 자신이 지금까지 한 말을 녹음한 테이프를 사장단과 직원들에게 들려주라고 요구했다. 이 회장은 “시장점유율 금성(現 LG전자), 대우보다 떨어져도 좋아. 질 개선하면 우리가 다시 올라갈 거니까. 이거 안 되면 삼성 절대 안 돼.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신임 임원들을 향해서는 “지난 십몇 년간 양 위주로 일했던 습관은 빨리 버려라”며 “21세기를 대비하는 지금은 그런 사고방식을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경영의 질이 좋아질 때까지 양은 중요하지 않다” “무조건 양보다 질을 이룬 사람에게 더 높은 인사고과를 줘라, 양은 당분간 버려도 된다”는 말도 반복했다. 매출을 늘린 사람에게 높은 고과를 주는 관행을 없애라고 지시하며 “이런 사고방식을 완전히 뜯어고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또 “질에 자신 없으면 공장을 멈춰라, 손해는 내가 책임진다”는 말도 사장단 회의 때마다 잊지 않고 했다.
삼성전자 ‘이건희 시대’의 성과
그랬던 삼성전자는 이 회장 취임 직후인 1988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삼성전자에 합병시킨 것을 시작으로 1992년 세계 최초로 64M D램 개발에 성공하며 세계 반도체 시장의 강자로 부상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후 성장세는 더 가팔라졌다. 삼성전자는 이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단 한 번도 세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고 성장을 계속했고 삼성전자 주가도 1995년 10만원을 돌파했다. 이 시기에 삼성전자는 휴대폰 생산도 시작했고, 반도체와 휴대폰은 삼성전자의 양대 기둥이 됐다. 삼성전자의 주가는 IMF 외환위기로 한때 추락하기도 했지만, 반도체와 휴대폰에 힘입어 1999년 국내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2000년대 후반에는 애플의 스마트폰 아이폰이 전 세계적 열풍을 일으키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갤럭시 시리즈를 출시하며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 회장이 쓰러져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2014년 5월 당시 삼성전자 주가는 133만5000원, 시총은 196조6446억원(2014년 5월 9일 종가 기준)에 달했다. 1987년 회장직 취임 당시와 비교하면 주가는 단순 수치로 약 50배(증자·액면분할 등 반영한 수정주가 기준 약 100배), 시총은 약 500배로 치솟았다. |
[2] 미래를 보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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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오른쪽)과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이 반도체 신제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조선DB |
이 회장은 삼성 임원들을 향해 “지금 한국은 30대 이하 인구가 더 많고, 곧 마주하게 되는 21세기에는 창조성과 개성이 있는 업종과 사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젊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신바람 나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어 “철강, 반도체, 자동차, 전자 같은 투자집약적인 대형 산업하고 도로 같은 인프라를 지금 다 해놓지 않으면 후대에서 원망을 들을 수 있다”며 미래를 위해 기성세대가 맡은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건희 회장은 1990년대 초반 신경영에 집중하면서 20~30년 후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인 전망을 여러 차례 얘기했는데, 모두 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현실과 맞아떨어진다.
이 회장은 휴대폰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1990년대 초에 ‘1인 1휴대전화 시대’와 ‘제5이동통신’을 예측했다. 삼성전자가 세계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30년 전 이 회장의 예측과 판단, 실행 능력이 발휘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이 회장이 1990년대 초반 미래에 대해 한 얘기들이다.
“21세기엔 개인이 전부 전화를 가지고 세계 어디로 가도 전화가 다 돼야 하거든. 앞으로 정보화 사회에 바로바로 전화가 되는 게 얼마나 중요하겠어. 그러니까 도로나 항공 같은 하드 인프라도 중요하지만 교육과 통신 같은 소프트 인프라도 아주 중요해.”
“지금 제1, 제2 이동통신 나오는데 곧 제4, 제5 통신 시대로 갈 거야. 이 인프라 만드는 걸 21세기로 넘길 순 없잖아. 후대에서 원망 들을 수 있어.”
“10년쯤 지나면 카드 하나만 있으면 전 세계에서 신용카드도 되고 전화고 뭐고 다 되는 세상이 온다고.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도 바로 집으로 전화할 수 있어. 미국, 일본은 벌써 그런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우리도 경쟁력을 여기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되잖아.”
뿐만 아니라 이 회장은 30여 년 전 사장단 회의에서 “배터리 사업을 빨리 시작해야 한다” “소프트웨어 인력을 대거 확보해야 한다” “우주산업이 곧 대중화될 것”이라면서 사업계획을 내놓으라며 사장단을 닦달했다. 삼성전자를 제외한 계열사 사장들은 “첨단 산업인 반도체 따라가기도 힘든데…”라는 반응이었지만 이 회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미래 먹거리를 고민하고 내놓으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 2021년 현재 소프트웨어와 배터리는 명실상부한 고부가가치·고성장 산업이며, 우주산업은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의 ‘스페이스X’ 등 민간 기업이 잇달아 참여하고 있다.
이 회장은 거대 도시 서울을 변화시킬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서울을 여러 개의 소도시로 복합화하면 시민도 기업도 국가도 편리하면서 경쟁력이 생길 것”이라고 했다. “(서울에) 지구별로 선(線)을 쳐야 돼. 각 거점 1평방킬로미터 안에 복합화를 하는 거지. 서울시에 22개 구 512개 동이 있는데(1994년 당시-편집자주) 22개 구를 특화를 해서 일주일 동안은 자기 거점에서 나올 필요가 없게 하는 거야. 그럼 도로가 안 복잡하잖아. 중구나 용산구 같은 중간 지역에는 각 구에서 오기 좋은 센터를 만들고.”
이는 지난 4월 7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여당 후보가 내놓은 공약과도 똑 닮았다.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후보는 “서울을 인구 50만명 기준의 자족적인 21개의 다핵 분산도시로 전환하고, 권역별로 21분 내 모든 이동이 가능한 생활권을 조성하겠다”는 ‘콤팩트 도시’ 공약을 내놓았다. 여당 서울시장 후보가 심혈을 기울여 내놓은 내용을 이건희 회장은 27년 전 간파했던 것이다.
이 회장의 예측은 이 밖에도 틀린 것이 없을 정도다. 그는 “1997~98년쯤엔 (우리나라의) 기본 경쟁력이 부족하다 보니 진짜 불경기가 온다. 지금 대비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며 IMF 외환위기 사태를 예고했고, “미래엔 제조업이 쇠하고 고부가가치인 제약업이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다”며 제약회사, 병원, 의과대, 간호대 등 관련 업종을 지속적으로 인수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코로나19의 창궐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더라도, 어느 정도의 대비는 해놓은 셈이다.
삼성은 어떻게 반도체 산업에 뛰어들었나 반도체는 지금의 삼성전자를 만든 일등공신이며 삼성전자의 핵심이다. 이건희 회장은 임원들에게 삼성이 반도체 산업을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여러 차례 설명한다. 한국에 반도체 조립회사가 생긴 것은 1960년대 말로, 아남산업과 금성사는 외국의 반도체 조립 기술을 배워와 기술자를 양성했다. 국내 최초의 반도체 생산 회사는 1974년 1월 설립된 한국반도체로 미국에서 온 강기동 박사(삼성반도체 사장 역임)가 설립자다. 이 한국반도체가 삼성 반도체사업부의 모체다. 강기동 박사는 1966년 미국 모토로라 투자단으로 한국에 왔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 강 박사는 박 대통령에게 반도체 공장을 건립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이에 매료된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전자공업진흥법을 제정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딸 박근혜를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시켰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 부녀와 인연을 맺어온 강 박사는 한국으로 와 한국반도체를 설립한다. 그러나 1974년 설립된 한국반도체는 몇 개월 만에 자금난으로 문을 닫을 처지가 된다. 이때 이 회사를 인수한 사람이 이건희 회장이다. 당시 이 회장은 동양방송·《중앙일보》 이사였고 삼성의 주력 계열사와는 거리가 있었으며, 창업주의 3남으로 형들이 건재한 만큼 그룹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이때 삼성전자 강진구 사장이 과거 같은 회사에 근무해 친분이 있던 이건희 회장에게 “한국반도체를 사야 한다”고 제안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지금의 위상과는 전혀 다른, 가전제품 위주의 작은 회사였다. 이 회장은 직원들 앞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박근혜 스승(서강대 임 모 교수-편집자주)이 부탁한다며 한국반도체에 100억 넘게 투자를 했다더라고. 과잉 투자가 돼 있어서 겁을 내서 아무도 못 사는 형편이었어. 삼성전자 돈으로는 살 수가 없는 거야. 내 개인 돈도 넣고 그랬어. 3~4년 계속 적자 났지. 강진구 회장(신경영 당시 삼성전자 회장)이 붙어살면서 다 만들어놓은 거야.” 이어 이 회장은 “첨단 기업은 정부가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반도체도 정부에다 맡겨놨으면 지금 아무것도 아냐. 대통령이 과잉 투자하고 아무도 손 안 대려는 거 내가 선대(이병철) 설득해서 사 온 거야. 처음엔 반도체가 뭔지도 정확히 몰랐는데 투자를 계속하다 보니 앞으로 이익이 계속 날 거라는 예측이 되더라.” 그때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면 지금의 한국 경제는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
[3] 일등주의
이건희 회장은 모든 분야에서 최고를 지향했다. 삼성 계열사 사장들에게 “삼성은 모든 분야에서 1등이어야 한다. 1등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게 있다면 내가 다 지원하겠다”고 강조한 그는 1등 인프라가 있어야 1등 기업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 회장은 계열사의 직원 채용, 부동산 구입, 기계와 물품 구입 등을 결정해야 할 땐 늘 “가장 좋은 것으로 하라”고 했고, 사람 한 명, 기계 한 대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일하는) 사람이 일류여야 기업이 일류가 된다”고 생각한 그는 각 분야에서 최고의 인재를 끌어오도록 했다. 늘 우수한 인재에 대한 욕심이 있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똑똑한 아이들 골라서 맞춰가지고 키워야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연령과 경력 및 학력,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한국식 인사(人事)의 틀을 깬 사람도 이 회장이다. 그는 성과주의를 도입해 급여와 상여금에 능력 및 업무별로 차등을 두도록 했고, 고졸 사원의 임원 승진길도 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이 실적만을 중시하거나 비정(非情)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사람은 주기가 있어서 잘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는 거야. 실수했다고 바로 바꿔버리고 그러면 사람이 클 수가 있나. 인간이 일 년에 석 달 꽃 피지 못해. 잘못되면 빨리 수습하고 반성하고 기록하면 되고 그걸 숨겨놓는 게 나쁜 거야.” 임원 대상 강의에서도 “사람을 볼 때는 단기적으로 보지 말고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전체적으로 평가를 해. 실수 좀 하는 건 야단도 치지 마”라고 강조했다.
1등, 일류를 강조한 이 회장의 압박은 삼성 계열사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원동력이 됐다. 삼성 계열사가 해당 업계에서 1등이 아니라면 1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회장의 뜻이었다. 주력 계열사가 아닌 《중앙일보》와 삼성라이온즈조차 “왜 1등을 못 하냐”는 이건희 회장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전 세계 1등을 해도 변하는 시대에 앞서가기 어려운데 국내 1등도 못 해갖고는 미래가 있겠어?”
삼성이 새로 진출하려 한 제약 사업에 대해서도 1등과 최고를 강조했다. “삼성이 한다면 최고급으로, 1등으로 해야 한다”며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최고로 만들어서 세계로 진출하라”고 당부했다. “그룹 총동원해서 세계 최고 신약을 사 오든 특허를 사 오든 최고 수준으로 해야 돼. 1년에 1000억원 이상 집어넣을 각오를 하고 최고급 인력들이 오고 싶어 하는 회사를 만들어야 된다고. ”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해야 한다는 이 회장의 확고한 뜻은 기업경영이 아닌 문화, 체육 등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레슬링을 좋아했던 그는 한국 레슬링이 세계 1위가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한국 레슬링을 지원했고 이 회장의 지원하에 한국 레슬링은 전성기를 맞았다. 미술품에도 관심이 많아 국내 최고의 컬렉션(이건희 컬렉션)을 만들었다. 삼성이 세계 영화계를 좌지우지할 뻔한 순간도 있었다. 미국에 거주하던 조카 이미경(現 CJ 부회장)이 귀국해 이 회장에게 “삼성이 영화 사업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즉시 영화계에서 당대 최고 대우를 받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를 만나 영화 산업에 대해 논의했다. 결국 범(汎)삼성가에서 영화 산업은 CJ의 이미경 부회장이 도맡아 하게 됐지만, 이건희 회장의 “삼성이 한다면 최고로 한다”는 지론을 보여주는 일화다.
대한민국 첫 올림픽 금메달 종목이 레슬링이었던 이유
이 회장은 어릴 때 살았던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을 접한 후 레슬링에 매료됐고 고등학교 때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레슬링부에 입부했다. 전국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도 했지만 부상으로 레슬링을 그만둬야 했던 이 회장은 이후 레슬링을 꾸준히 지원해왔다. 이 회장은 1982년부터 16년간 대한레슬링협회장을 맡았고 이 시기에 한국 레슬링 선수들은 올림픽은 물론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계속 메달을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누렸다. |
[4] 위기관리
이건희 회장은 위기상황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했다. 이 회장이 강한 행동을 보이는 때는 자신이 강조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였다. 신경영 진행과 함께 삼성그룹이 점점 커지면서 크고 작은 사고도 끊이지 않았는데, 주로 회장의 시선이 닿기 힘든 건설과 중공업 등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96년 삼성건설 춘천 현장의 가스파이프 폭발 사고와 같은 해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한국중공업 사업장에 무단으로 출입해 스파이 혐의로 경찰에 고발당한 사건이다. 이건희 회장은 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장단 회의에서 불같이 화를 내며 “내가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오너가 그만둘 리는 없었고,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는 이 회장이 크게 분노한 모습을 본 사장단은 그동안 안일했던 생각 등 문제점을 반성하며 계열사별로 향후 신속하고 확실한 위기관리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고, 이 회장의 지시에 따라 이를 자필(自筆)로 적어 제출했다. 이른바 ‘자필 반성문’ 사건이다.
이 회장은 계열사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고를 겪으면서 수차례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 정신머리로 어떻게 일을 해? 내가 물러나겠어. 회장이 미래를 준비하고 우리 그룹 장래를 생각하고 임직원 복지를 생각해야지 사고 수습하고 있어야 돼?”
1995년 3월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벌어진 ‘애니콜 화형식’도 같은 맥락이다. 1994년 휴대폰 애니콜 불량률이 10%를 넘는다는 보고를 받은 이 회장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직전 세탁기 불량품 출고 상황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던 이 회장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온 미래산업인 휴대폰에서 두 자릿수의 불량률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다 필요 없다, 불태워버려라”라고 지시했고, 15만여 대의 휴대폰과 팩시밀리 약 500억원어치가 불길 속으로 사라졌다. 이 회장의 이 같은 결기가 없었다면 오늘날 삼성전자 휴대폰의 성공신화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건희 컬렉션
이 때문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유족들이 상속세 납부를 위해 미술품 처분을 논의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미술계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우리나라의 귀중한 자산이 뿔뿔이 흩어지거나 해외로 반출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이에 유족은 지난 4월 이건희 회장 소유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한다고 밝혔다. 기증된 미술품들은 ‘이건희 컬렉션’으로 불리게 됐고 수량은 총 2만3000여 점에 달한다. 작품 중 고미술품 2만1600여 점은 국립중앙박물관과 산하 국립박물관으로 기증됐고, 국내외 거장들의 근대미술 작품 1400점은 국립현대미술관과 각 지방자치단체미술관 등에 기증하기로 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고미술품은 총 2만1693점으로 전적(典籍·고문헌) 4176점, 도자기 2938점, 서화 783점, 금속 484점, 석재 458점 등에 달한다. 여기에는 〈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와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29호) 등 국보 14점과 보물 46점이 포함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는 국내외 근현대 미술작품은 총 1488점이다. 한국 작품은 1369점으로,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유강열, 장욱진, 이응로, 박수근, 변관식, 권진규 외 한국 작가 238명의 작품이 포함됐다. 이중섭의 〈황소〉 등 유명 작품도 다수 있다. 외국 작품은 119점이며, 폴 고갱,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살바도르 달리, 카미유 피사로, 마르크 샤갈, 호안 미로, 파블로 피카소 외 서양 모더니즘 작가 8명의 작품이 포함돼 있다. 이건희 컬렉션의 감정가는 조(兆) 단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 7월부터 내년 3월 13일까지 이건희 컬렉션을 전시 중이다. 관람료는 없지만 관람을 원하는 날짜 2주 전부터 사전 예약을 해야 입장할 수 있는데, 예약 오픈과 동시에 마감되는 등 예약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건희 컬렉션의 수량이 많다 보니 ‘이건희 미술관’을 새로 건립해야 한다는 의견도 이어지면서 한동안 각 지자체가 유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7월 후보지가 서울 용산과 송현동 두 곳으로 압축됐다고 밝히고 연내 최종 건립지를 결정해 이르면 2027년 완공한다고 밝혔다. |
[5] 사회적 책임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매출과 이익 1등뿐만 아니라 복지와 사회공헌 1등 기업으로 만드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회사는 임직원 의식주, 건강, 자식교육 이런 걸 회사 영역으로 갖고 와야 돼. 직원들이 당장 잘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희망이 있어야지. 직원들 부모 자식 걱정이 없어야 돼. 내가 사업이나 공장 새로 시작할 때마다 노인정·탁아소 같이 만들라는 게 그런 이유야.”
삼성은 직원 복지에 그치지 않고 전 국민을 향한 사회공헌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 회장이 “이익의 10%는 사회 소외계층을 돕는 데 쓰라”고 직접 지시하면서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은 인류에 공헌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얘기했다. 기업이 이익을 실현하고 나면 직원과 주주들에게 이익을 배분하는 것은 물론 가난한 사람을 돕고 문화사업에 이바지하는 등 인류에 공헌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삼성은 이건희 회장 취임 직후인 1989년 삼성복지재단을 설립해 어린이집 설립과 소년소녀가장 돕기, 불우청소년 돕기 등 어린이·청소년 관련 사회공헌 사업을 시작했다. 또 주거취약계층, 이른바 ‘달동네’ 개선 사업을 하라는 지시도 한다. “달동네에서 불우하게 자란 애들이 많아지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어. 삼성이 벌어들인 이익을 우리가 좀 더 가져간다고 이 나라가 나아지나? 벌어들인 만큼 사회에 베풀어야 되는 거야.”
이건희 회장은 우리나라가, 민족이 잘살아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삼성 회장이 뭐가 답답해서 변해야 한다고 부르짖겠어. 나는 3대가 먹고살 게 있는데 내 자산 5%나 10% 늘어나는 게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재산이 1억에서 2억 되는 건 큰 차이가 있겠지만 1조에서 2조 되는 건 뜻이 없어. 우리나라가 일류국가냐 이류국가냐 판가름 나는 게 지금인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어. 지금 늦으면 완전히 기회상실을 하는 거라고.”
이 회장은 일부 임원이 “경기가 나빠 수익도 좋지 않을 때 웬 사회공헌이냐”며 불만을 표시해도 개의치 않고 “삼성이 하면 된다”며 뜻을 밀고 나갔다.
“우리나라에 없는 사례를 삼성이 만들어. 우리가 잘되면 경쟁사들도 다 따라오게 돼 있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겪으며 안전 문제에 경각심을 갖고 국내 최초 민간구조단인 ‘삼성 3119 구조단’을 만든 사람도 이 회장이다. 이 회장은 항상 “삼성이 모범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전 세계 정부 및 기업의 화두인 ESG(Environment·Social·Governance: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사회·지배구조를 뜻하는 말)의 내용은 상당 부분 이건희 회장이 이미 진행해왔던 것이다.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다.
삼성家의 이건희 회장 1주기 일정과 상속세 납부 계획 이건희 회장의 1주기 추도식은 10월 25일 경기도 수원시 선영에서 열린다. 추도식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유족과 일부 사장단만 참석하는 등 간소하게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 추도식과 관련해 반도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가전사업 등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업적을 기려 규모 있는 추모행사를 열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유족의 뜻에 따라 1주기 추도식은 소규모로 치러질 전망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부친 추도식에서 경영 관련 메시지를 내놓을 계획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11월 19일 이건희 회장 별세 후 처음 열린 호암(湖巖) 이병철 선대회장 33주기 추도식에서 “기업은 늘 국민 경제에 도움이 돼야 하며 사회에 희망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던 (이건희) 회장님의 뜻과 (이병철) 선대회장님의 ‘사업보국’ 창업 이념을 계승하고 발전시키자”고 말했다. 이건희 회장 추도식에서도 비슷한 수준의 메시지를 내놓거나 별다른 메시지 없이 간소한 추도식으로 끝낼 가능성이 높다. 이 부회장은 지난 8월 가석방으로 출소했고 최근 반도체와 바이오, 차세대 통신 등 미래 전략사업에 240조원 투자계획을 밝히는 등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다. 한편 이 회장이 남긴 주식 재산은 약 25조원으로, 유족이 내야 할 상속세는 12조원이 넘는다. 유족은 상속세를 분납해 낼 수 있는 연부연납제를 활용해 올해 4월 30일까지 2조원을 우선 납부했고, 나머지는 2026년까지 5차례에 걸쳐 나눠 낼 계획이다.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 등 유족은 상속세 납부를 위해 계열사 주식을 매각하고 있다. 홍 전 관장은 지난 10월 5일 삼성전자 주식 1994만1860주를 처분신탁 계약했다. 처분 주식가치를 처분 시점 종가 기준(7만1500원)으로 환산하면 1조4258억원이다.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도 같은 날 삼성SDS 주식 150만9430주를,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은 삼성생명 주식 345만9940주와 삼성SDS 주식 140만9430주를 처분신탁하기로 계약했다. 이들이 처분하는 주식가치는 처분 시점 기준으로 2조1575억원 규모다. 앞서 홍 전 관장과 이재용·이부진·이서현 삼 남매는 상속세 연부연납을 위해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SDS, 삼성생명 등 보유 주식 일부를 법원에 공탁한 바 있다. 아직 내야 할 상속세가 많은 만큼 삼성 일가는 향후 추가적으로 자산 매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
이건희의 자동차 사업 진출 꿈이 이뤄졌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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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부산 르노삼성차공장 모습.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 사업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 사진=조선DB |
결국 우여곡절 끝에 정치적인 이유로 이 회장의 애초 계획보다 대폭 축소된 ‘반쪽짜리’ 삼성자동차가 출범했고 날개가 꺾인 삼성의 자동차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이 왜 자동차 사업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뛰어들고자 했는지는 다시 한 번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삼성이 잘나가면서 문어발식으로 자동차까지 욕심을 냈다”고 기억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 회장은 삼성이 자동차 사업에 참여해야 한다는 확고한 명분을 갖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의 경쟁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봤다.
“삼성이 자동차 하겠다는 건 이권이나 내 욕심 때문이 아니야. 국내에 자동차 회사가 더 많아야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더 발전을 한다고. 인구가 5000만명 넘는 나라 중에, G7(선진국 7개국) 중에 자동차 회사가 잘되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어. 전자나 조선은 안 해도 자동차는 다 하잖아. 우리나라 자동차가 왜 외국에서 우리나라 전자제품만큼 잘 안 팔리나. 제품경쟁력이 없어서 그래. 더 많은 회사가 경쟁을 해야 더 좋은 제품이 나오잖아. 게다가 우리나라가 전자, 철강, 중화학, 조선, 기계, 로봇 이런 산업을 주로 하고 있는데 자동차는 이 산업들하고 상호 파급효과가 아주 크다고. 그걸 알면서도 내가, 삼성이 자동차 산업을 안 한다는 건 기업가로서의 양심이 없는 거야.”
이 회장은 이를 위해 미국 자동차 빅3 업체(포드·GM·크라이슬러)에서 눈에 띄는 좋은 인재를 데려오라고 지시하고, 기존 자동차 업체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일류 자동차 디자이너를 스카우트해 오라며 “그런 사람이 있다면 현금 100억원을 주더라도 데려오라”고 했다.
이 회장은 로봇 산업과 AI(인공지능)에도 관심이 지대했고 자동차 사업을 키워 기존의 자동차를 뛰어넘는 미래형 자동차를 생산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이 회장이 계획해 주변에 이야기했던 미래형 자동차는 현재의 전기차, 자율주행차에 가까운 모습이다.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펼쳐나가던 3년간 회장 비서실장으로 사실상 24시간을 함께했던 현명관 전 비서실장 역시 자동차 사업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했다.
현 전 실장은 “이건희 회장은 자동차가 기계가 아닌 전자제품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동차의 70%는 전기장치라는 게 이 회장의 생각이었고, 미래 자동차에 탑재될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기능에 대해서도 1990년대 초에 수차례 언급했다. 이 회장이 휴대폰을 2G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발전시키는 기반을 마련했듯이, 자동차도 기존의 기계식 자동차에서 미래형 자동차로 진화시키는 꿈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 전 실장은 “그때 삼성이 이건희 회장의 계획대로 자동차 산업을 제대로 시작했다면 지금쯤 테슬라를 앞섰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이어 “이건희 회장이 도약시켜놓은 한국 경제가 이제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할 시점인데 적절한 인재가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며 “지금 우리에게 이건희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토로했다.
이재용의 삼성 앞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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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13일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광복절을 앞두고 가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치소를 나오고 있다. 사진=조선DB |
이 부회장은 2014년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후 본격적인 3세대 경영을 위해 꾸준히 그룹을 재정비해왔다. 전자, 바이오, 금융을 중심으로 지배구조와 사업 재편에 나섰고, 일부 사업 매각 등으로 선택과 집중을 택했다. 그러나 국정농단 사태로 실형을 선고받아 200일 이상 복역하면서 제대로 업무에 집중하지 못했고, 사업구조 재편 과정의 합병 관련 의혹 등 남아 있는 사법 리스크도 존재한다. 다만 여론은 “코로나19 등으로 인한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재용 부회장의 역할이 필요하다”며 이 부회장의 경영활동 재개에 대해 호의적인 편이다. 이 부회장은 작년 대국민사과를 통해 경영권 승계 문제나 무노조경영 등 삼성의 문제점을 쇄신하고 새로운 삼성으로 변화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지난 8월 가석방된 후엔 정부와 국민의 기대에 보답하듯 대규모 투자 계획도 밝혔다. 코로나19 미래질서 재편에 대비하기 위해 향후 3년간 투자 규모를 기존보다 33% 확대한 총 240조원으로 늘리고, 직접 고용과 기업 M&A에도 과감하게 나서겠다는 계획이다. 산업계에서는 이 부회장에 대해 불세출의 기업인이었던 부친의 그늘을 벗어나기엔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갖은 고난을 이겨낸 만큼 그가 기치로 삼은 ‘뉴 삼성’을 만들어나갈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볼 만도 하다.
작년 10월 이건희 회장 영결식에서 이 회장의 한 친구는 추모사를 통해 “선대로부터 회사를 넘겨받아 지금의 삼성을 키워놓은 이건희 회장의 예를 전 산업사(史)에서 접하지 못했다며 ‘승어부(勝於父·아버지보다 나음)’라는 말을 꺼냈다. 이 부회장은 작년 말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최후진술에서 이 단어를 언급하며 “아버지를 능가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효도라는 말씀을 하셨다. 제가 꿈꾸는 승어부는 더 큰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부회장이 ‘승어부’에 성공할지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