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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상)

20대 그룹으로 자리매김한 ‘금융 외길’ 미래에셋의 어제, 오늘

국내 금융회사 최초로 20위권 그룹

글 : 정혜연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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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세 패기 넘치는 젊은이의 꿈으로 시작된 미래에셋
⊙ 1년 만에 수익률 95%를 기록한 ‘박현주 1호’로 이름 날려
⊙ 회사의 성공이 불투명하던 때 장학재단 만들어 9000명에게 혜택 줘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한 번씩 국내 대기업의 자산 순위를 발표한다. 지난해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부채비율이 늘었고, 반도체와 석유화학의 부진으로 SK그룹의 당기 순이익이 대폭 줄었다는 실적도 이 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정확한 명칭은 ‘공시대상 기업집단 순위’인데 통상 ‘재벌그룹의 순위’라고 한다. 2020년 5월 기준으로 재벌그룹 순위는 삼성-현대차-SK-LG-롯데-한화-GS-현대중공업-신세계-CJ(공기업 제외) 순(順)이다. 10년 전인 2009년에는 삼성-현대차-SK-LG-롯데-GS-현대중공업-금호아시아나-한진-한화 순이었다. 또 그보다 10년 전인 2000년에는 현대(계열분리 전)-대우-삼성-LG(계열분리 전)-SK-한진-쌍용-한화-금호-롯데-동아 순이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국내 20대 그룹은 부침을 겪었다. 2000년대에 상위권이었던 대우와 쌍용그룹이 1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2009년 상위에 랭크된 금호아시아나와 한진은 또다시 10년 만에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룹의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와중에도 불문율 같은 것이 있었다. 제조업에 기반을 둔 회사만이 국내 굴지의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공식을 미래에셋그룹이 깼다. 단순히 한 번만 20대 그룹에 포함된 것이 아니다. 미래에셋그룹은 2016년 재계순위 19위권에 랭크된 뒤 2020년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조업에 기반을 두지 않은 순수 금융회사가 재벌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곳은 미래에셋이 유일하다. ‘반도체·자동차 회사는 글로벌 플레이어가 될 수 있어도, 금융은 단순한 국내 기업에 머물 것’이라는 암묵적인 원칙을 한 방에 깨버렸다. 미래에셋은 현재 글로벌 15개 지역에 40개가 넘는 법인 및 사무소를 보유한 글로벌 금융그룹이다. 회사는 앞으로 글로벌 IB(투자은행·Investment Bank)로 재도약을 준비 중이다. 한국 자본시장을 넘어서 세계 자본시장에 도전하는 미래에셋의 어제와 오늘을 짚어봤다.
 
 
 
  총 운용자산 460조원으로 매머드급 규모 자랑
 
  미래에셋그룹은 국내 유일의 금융그룹이다. 미래에셋대우, 미래에셋생명, 미래에셋자산운용, 멀티에셋자산운용, 미래에셋캐피탈, 미래에셋벤처투자 등이 주요 계열사다. 자기자본은 15조4000억원, 전체 운용자산은 460조원에 육박한다. 이 자산은 5년 사이에 부쩍 더 늘었다. 8조6000억원대던 그룹의 자기자본이 11조7000억원(2016년), 13조1000억원(2017년)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다. 전체 운용자산 역시 3배 가까이 늘었다. 187조원(2015년)이던 운용자산이 2016년 360조원, 2017년 417조원을 넘었다.
 
  미래에셋은 계열사가 포트폴리오 형태로 고객 자산을 골고루 운용한다. 미래에셋대우가 239조원, 미래에셋자산운용이 169조원, 미래에셋생명이 42조원을 굴린다. 미래에셋 직원은 국내 9800명, 해외 3000명에 이른다. 홍콩, 중국 등 아시아 지역을 시작으로 영국, 미국과 같은 선진 자본시장까지 국내외 14개국에 진출해 있다. 미래에셋은 ‘고객’을 최우선으로 한다. 핵심 가치 중 첫 번째는 ‘미래에셋은 고객을 위해 존재한다’이다.
 
 
  증권가 영업의 神
 
27세에 창업해 금융그룹을 일궈낸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
  미래에셋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박현주’라는 이름 석 자다. 미래에셋은 박현주이고, 박현주는 미래에셋이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금수저’도 아니고 유학파로 해외 금융회사에서 근무한 이력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학벌 좋고 똑똑한 20대 청년, 또 직장생활보다 사업을 꿈꾼 사람이라는 정도다. 그는 증권으로 모은 약간의 자본금으로 회사를 만들고 쉼 없이 달려서 오늘날 회사를 20대 그룹으로 일궈냈다. ‘샐러리맨의 신화’다.
 
  박 회장이 증권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대 재학 시절이었다.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말에 감명을 받은 그는 대학 때부터 주식에 관심을 가졌다. 증권사를 돌아다니며 주식의 룰을 알게 된 그는 27세에 주식 투자를 해서 번 돈으로 자문 형태인 내외경제연구소를 차렸다. 연구소를 차리고 얼마 안 돼서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 영업부에 입사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말이 맞기라도 한 듯, 그는 입사한 지 석 달 만에 3억원 규모의 법인 주문을 따냈다. 이후 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으로 옮기고 증권회사 영업에 두각을 나타낸다. 그가 근무하는 지점이 늘 전국 1등을 하더니 결국 서른둘에 박현주 회장은 최연소 지점장으로 발탁됐다. 증권계에 입문한 지 불과 4년 반 만이었다.
 
  ‘젊은 증권회사 지점장’은 포부가 남달랐다. 그는 조직을 기업분석팀, 법인영업팀, 관리팀, 일선영업팀으로 세분화해 조직을 체계화하고 기업 분석을 강화했다. 지금은 증권회사에서 이처럼 부서를 나누는 것이 일반화됐지만 당시는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차별화된 전략에 따라 박현주 당시 지점장은 지점을 약정액 1위에 이어 전국 1위의 점포로 키웠다. ‘샐러리맨의 꽃’이라는 임원 타이틀을 달았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금융에 대한 직관과 경험을 살려 1997년 미래에셋을 창업했다.
 
  20년 뒤에 제조업을 기반으로 한 재벌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금융회사의 출발은 야심 찬 젊은이의 의지 하나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회장은 처음부터 자산운용회사를 설립하려 했다. 하지만 인허가의 어려움으로 인해 벤처캐피털로 회사를 시작해, 이후 미래에셋자산운용을 만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래에셋은 이름도 생소한 작은 신생 회사에 불과했다.
 
 
  ‘고객이 원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을 줘야 한다’
 
  미래에셋이라는 사명(社名)은 그가 회사 설립 초창기부터 확고한 원칙이 있었음을 말한다. 미래에셋이 여전히 고수하는 투자 원칙은 ▲경쟁력의 관점에서 투자 기업을 본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한다 ▲기대수익과 함께 위험을 살핀다 ▲팀 어프로치에 의해 신중하게 의사결정한다는 것이다. ‘미래’와 ‘에셋(자본)’에서 보듯이 고객의 미래를 위해서, 또 고객의 자본을 불리기 위해 회사가 온 힘을 기울인다는 뜻이 내포돼 있다.
 
  미래에셋 관계자는 “미래에셋 바탕에는 고객의 자산관리를 통해 부(富)의 증대를 꾀한다는 핵심 가치가 있다. 고객이 원하는 것보다 고객에게 필요한 것을 줘야 한다는 사명감과 한국 자본시장에 큰 변혁이 필요하다는 위기의식을 통해 미래에셋은 성장했다”고 말했다.
 
  미래에셋 사사(社史)에는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는다. 미래에셋이 걸어온 길이 여느 금융회사들과 다르기도 했고, 또 시장에 없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계속해서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금융가에서는 미래에셋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여타의 금융회사와 비슷한 상품을 내놓기보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다이내믹 DNA를 갖추고 있어서라고 평가한다. 그 결과 미래에셋그룹의 계열사들은 오늘날 각자 영역에서 전문성을 바탕으로 경쟁력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뮤추얼펀드’로 세상에 이름 알려
 
  박현주 회장이 미래에셋자산운용이라는 회사를 만들었지만 정작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98년에 ‘박현주 1호’ 펀드가 대성공을 거두면서부터다. 당시 금융투자는 은행에 차곡차곡 적금을 붓거나 거액의 돈을 맡겨 이자 수익을 얻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주식을 한다는 사람들조차 대부분 본인이 직접 객장을 찾아 주식을 사고파는 직거래를 주로 했다. 일부 투신사에서 투자자들이 맡긴 돈을 굴려 수익을 올린 뒤에 돌려주는 간접투자상품을 팔았지만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더구나 박 회장이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를 내놨을 때는 외환위기(IMF)라는 초유의 사태로 인해 투자자들의 심리가 얼어붙은 상황이었다. ‘박현주 1호’는 간접투자상품이라는 점에서는 기존 투신사 상품과 비슷했지만, 투자자들로부터 모집한 자금으로 투자회사를 설립해 투자자가 직접 주주로서 주식과 채권에 투자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1998년 12월, 국내 첫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가 일반 투자자들에게 판매된 날은 미래에셋 역사에서 한 획을 그은 날이다. 당시 박현주 미래에셋자산운용 사장과 그를 믿고 신생 미래에셋으로 이직한 사람들은 긴장했다. 미래에셋의 첫 공모펀드인 ‘박현주 1호’가 제대로 팔리지 않을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박현주 1호’ 펀드는 판매를 시작하자마자 3시간 만에 투자자들이 투자해 목표액 500억원이 금세 차버렸다. 신생 회사, 이름도 낯선 ‘뮤추얼펀드’라는 방식에 투자자들이 대거 몰린 것은 이례적이었다.
 
  그렇게 목표액을 채운 ‘박현주 1호’는 어마무시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사실 투자자들의 돈이 몰렸다고 해도 금융회사가 운용을 제대로 하지 못해 투자자들에게 돈을 돌려주지 못한다면 시장에서 퇴출당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펀드 판매 후에 국내 증시가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IMF 여파로 곤두박질치던 주식이 회복되면서 ‘박현주 1호’ 펀드는 7개월 만에 100% 수익률을 기록했다. 그리고 미래에셋이 투자자들에게 투자금을 돌려주기로 약속한 1년 뒤, ‘박현주 1호’의 최종 수익률은 95%를 기록했다. 신생 펀드에 돈을 맡긴 사람들은 1년 만에 거의 100% 수익금을 손에 거머쥐었다.
 
  당시 현대증권에 근무한 한 이는 “1990년대 후반 증권회사는 현대, 대우 등 재벌그룹에 소속된 회사들이 대부분이었다. 미래에셋이 생겼을 때 일부 부유층의 돈을 굴려주는 부티크 운용회사에 머물 것이라는 시각이 많았다”며 “그런데 신개념의 펀드를 만들고 일반 투자자들로부터 성공적으로 자본을 유치하고, 또 그 자본으로 수익률 100%를 이뤄냈을 때 증권회사들이 깜짝 놀랐다. 그때 박현주라는 이름 석 자가 여의도 증권가에 똑똑히 새겨졌다”고 회고했다.
 
 
  채권형, 혼합형, 부동산, PEF 등 업계 최초의 시도
 
  20년 뒤 국내 유일의 ‘금융그룹’으로서 중견 재벌보다 큰 규모를 자랑할 미래에셋의 전설은 이렇게 시작됐다. 박현주 회장은 1999년 미래에셋증권을 만들었다. 파격적인 실험이 이어졌다. 객장에 시세판을 없애고 온라인 수수료를 대폭 낮춰서 고객들이 쉽게 정보를 받고 투자를 결정토록 했다. 그러고 나서 ‘박현주 2호’(1999년 12월)가 세상에 나왔다. 이미 눈에 띄는 수익률을 기록한 전편의 후속작이었으니, 투자자들이 얼마나 많이 몰릴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주식 투자 성공은 종목을 보는 안목 외에도 제반여건, 즉 증시 상황과 궤를 같이한다. 제아무리 좋은 종목을 골랐다고 해도 하락 장세 속에서 높은 수익률을 기대하기란 힘들다. ‘박현주 2호’ 펀드 역시 그랬다. 코스피 지수가 2000년 들어 하락세로 돌아서면서 ‘박현주 2호’ 수익률이 마이너스 40%를 기록했다. 대박을 기대한 투자자들이 들고일어났고, 박현주라는 브랜드가 심히 상처를 입게 됐다. 박현주 회장은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즈음 미래에셋자산운용은 ‘미래에셋인디펜던스펀드’와 ‘미래에셋디스커버리펀드’로 새로운 물꼬를 트고자 했다. 투자자들도 ‘펀드 투자’를 새로운 재테크 수단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래에셋은 미래에셋인디펜던스펀드와 미래에셋디스커버리펀드로 국내 자산운용업의 흐름을 주도했다. 이후 두 펀드는 코스피 지수의 등락과 함께 순식간에 돈이 불었다 빠지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있었다. 미래에셋이 1998년에 선보인 박현주펀드나 디스커버리펀드 모두 고객에게 간접투자라는 새로운 투자처를 만들어낸 시도였다는 점이다. 이후 미래에셋자산운용은 단일화된 주식형 펀드에서 탈피해 채권형, 혼합형, 부동산, PEF, SOC, ETF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는 혁신적인 펀드를 잇따라 내놨다. 오늘날 국내 펀드 시장이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게 된 것은 미래에셋의 새로운 시도 덕이었다.
 
 
  미국 유학을 계기로 해외로 눈을 돌린 박현주
 
지난 2013년 1월 11일, 서울 수하동 미래에셋 센터원 미래에셋자산운용 화상회의 모습. 화상회의 화면 3개 중 가장 왼쪽은 뉴욕, 가운데는 홍콩, 오른쪽은 상파울루 법인 직원들이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이 다양한 상품을 발굴할 즈음에 미래에셋증권 역시 다른 증권사와의 차별화를 모색했다. ‘미래에셋 오블리제 클럽’을 통해 VIP 자산관리 시장에서 입지를 다진 것이 대표적이다. 미래에셋증권은 당시 업계 최대 규모로 세무, 부동산, 법률컨설팅 등의 지원 조직을 구축해 VIP들의 체계적인 자산관리 솔루션 및 서비스를 제공했다. 오늘날 은행, 증권사 등에서 운용하고 있는 ‘VIP 창구’, 즉 원스톱 시스템의 기반을 닦은 곳이 바로 미래에셋증권이다. 미래에셋증권 관계자는 “미래에셋증권이 자산관리에서 어드바이저리, 그리고 컬처까지 연결되는 WM 서비스 시스템을 바탕으로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서비스 제공을 시도했다”고 말했다.
 
  미래에셋의 몇 안 되는 계열사가 각자 새로운 금융 서비스를 시작하던 때에 박현주 회장은 해외로 눈을 돌렸다.
 
  오히려 해외에서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의 해외운용법인인 미래에셋자산운용 홍콩(2003년)을 만든 것이다. 박 회장은 유독 해외 사업을 챙긴다. 홍콩법인을 만든 지 15년이 지나고 회사가 그룹 반열에 오른 후, 그는 여러 이유로 인해 국내 사업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럼에도 그가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직함은 미래에셋대우 홍콩법인 회장과 미래에셋대우 글로벌경영고문이다.
 
 
  퇴직연금 시장이 생보사의 격전지가 될 것을 예견
 
  증권회사, 자산운용회사, 카드회사, 보험회사, 캐피털회사, 그리고 최종적으로 은행업. 이런 패러다임으로의 확장은 금융업을 하는 대다수 회사의 바람이자 목표다. 이 모든 고지에 올랐을 때 종합금융그룹이라는 타이틀이 생긴다.
 
  자산운용사와 증권사를 만든 박현주 회장은 ‘글로벌 투자전문그룹’을 꿈꿨다. 2005년 6월 인수한 SK생명(현 미래에셋생명)도 그 일환이다. 국내 생명보험 시장은 유독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타사와 차별화된 접근이 필요했던 미래에셋생명은 고객 니즈에 맞는 전문화된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미래에셋생명은 2005년 9월, 생명보험사 중 최초로 일반 공모를 통해 1500억원의 자본금을 증자(增資)했다. 이를 발판으로 그해 11월 업계 최초로 금융프라자(현 고객프라자)를 오픈했다. 고객에게 펀드, 보험 등 금융 서비스를 원스톱으로 앉은 자리에서 제공하겠다는 포부였다. 또 퇴직연금 시장이 격전지가 될 것임을 간파하고 그해 12월에 국내 최초로 ‘퇴직연금사업자 인가’를 취득했다.
 
  이듬해인 2006년 7월, 미래에셋생명은 국내 최초로 FC간접투자증권(펀드) 취득권유제도를 실시했다. 저금리 시대의 대안으로 변액보험 및 펀드 등 투자형 상품에 대한 정책의 첫 번째 시작이다. 이로써 다수의 FC(보험설계사)가 ‘펀드취득권유인’ 자격증을 갖게 됐고, 기존 보장성 보험 위주의 판매를 넘어서 투자형 상품 판매로 포트폴리오를 넓혔다. 당시까지만 해도 생명보험회사는 사망 시 보험금 지급과 같은 기본적인 틀 안에서 약간의 변화를 둔 보험 상품을 주로 판매했다. 하지만 미래에셋생명은 국내 최초로 ‘친디아변액보험’ ‘우리아이사랑 변액유니버셜보험’ 등을 출시했다. 이에 따라 금융감독위원회는 2007년 9월 미래에셋생명에 신탁업 업무까지 인가했다. 보험업계 최초로 생명보험회사가 신탁업에까지 진출한 것이다.
 
  미래에셋생명 관계자는 “출범 초기부터 종합재무컨설팅이라는 목표를 위해 신탁업 진출에 노력했고, 까다로운 사전 승인 절차를 거쳐 결국 업계 최초로 생명보험사의 신탁업 허가를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그해 7월에 회사는 리테일 부문 펀드판매 1조원을 달성했다.
 
  인간 수명이 100세에 육박하리란 것, 그리고 향후 생명보험회사의 주된 업무가 은퇴자를 위한 설계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도 회사는 일찌감치 파악했다. 미래에셋생명이 2009년 내세운 슬로건은 ‘은퇴설계의 명가(名家)’였다. 미래에셋생명은 고령화·저금리의 경제구조에서 장기적으로 자산관리의 필요성이 중요해진다는 점에 주목했고, 은퇴 설계의 솔루션을 제공하겠다는 경영 선언을 했다. 그 결과 미래에셋생명은 2011년에 국내 최초로 은퇴설계전문가 양성 교육체계인 ISO 인증을 받았다. 성장은 외형적인 수치로 나타나 출범 당시 4조7000억원이던 총자산이 5년 만인 2010년에 12조원대로 초고속 성장했고, 현재 40조원을 바라보고 있다. 2015년 7월에는 생명보험회사로는 네 번째로 유가증권 시장에 상장했다.
 
 
  ‘실패하더라도 경험은 남는다’
 
박현주 회장은 사업 3년 차인 지난 2000년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을 만들어 장학사업을 하고 있다. 미래에셋 해외 장학생으로 선발된 이들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던 날 찍은 사진이다.
  미래에셋은 ‘금융에는 국경이 없다’는 신념을 가진 듯하다. 국내 금융회사에서 해외 진출 성공사례는 찾기 어렵다. 그 때문에 미래에셋자산운용이 2003년 홍콩법인을 만들 때 국내 시장에서는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때 미래에셋이 내세운 말은 딱 하나였다. ‘실패하더라도 한국 자본시장에 경험은 남는다.’ 내가 비록 실패하더라도 나의 경험이 후대에 남는다는 말처럼 미래에셋은 차분히 금융 영토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미래에셋증권은 2007년 홍콩지사를 만들었고, 미래에셋자산운용은 영국 사무소를 만들었다. 이듬해에는 미래에셋자산운용이 미국과 브라질에, 미래에셋증권이 미국 사무소를 만들었다. 미래에셋은 해외에 진출한 지 16년 만인 현재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세계 경제의 중심인 영미권에 진출했고, 동시에 중국, 홍콩, 대만 등 중화권에도 진출했다. 또 브라질, 인도, 베트남 등 이머징 국가에도 진출함으로써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우리나라가 1970년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면서 삼성, 현대, SK, LG그룹 등이 다양한 제조업으로 사업을 확대해 오늘날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재벌그룹을 형성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런 철옹성은 시대의 흐름이 맞아떨어질 때에나 가능하다고 생각해온 회사들에 미래에셋의 성장세는 놀랄 만하다. IMF 시절 금융연구소, 자산운용회사로 출범한 회사가 증권사, 생명보험회사, 해외로까지 사세(社勢)를 확장한 데 걸린 시간은 15년 남짓했다. 눈여겨볼 만한 것은 사업 초창기에, 사실 금융회사로 성공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안 되던 2000년 3월에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이 출범한 사실이다.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은 박현주 회장이 미래에셋을 창업한 지 불과 3년 만에 회사 자본금이 300억원에 불과하던 시절에, 그가 사재 75억원을 털어 만든 재단이다. 그룹 총수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장학재단은 여럿 된다. 하지만 총수 사후(死後)에 만들어지거나, 총수가 은퇴할 즈음에 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서 개인 재단을 설립해온 것이 관행이다. 회사 출범 초기부터 장학재단을 만들어 총수가 거액을 투자한 곳은 미래에셋그룹이 유일하다.
 
  박현주 회장은 ‘따뜻한 자본주의’ 실천을 위해 매년 계열사 보유 주식에 따른 배당금을 재단에 기부하고 있다. 처음 설립된 해에 국내 장학생을 선발해 장학금을 지원한 것을 시작으로 해외교환 장학생 선발, 공부방 설립, 도서 지원 등을 주로 한다. 해외교환 장학 사업은 국내 최대 규모로 연간 600명이 넘는 교환학생을 위한 학업 장려금을 지원한다. 미래에셋박현주재단의 도움을 받은 국내외 장학생은 9000명이 넘는다. 미래에셋의 경영 이념인 ‘열린 마음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인재를 중시하자’는 것이 빈말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미래에셋 초반부는 금융그룹으로서 발판을 다지는 계기였다. 15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에 미래에셋은 자산운용, 증권, 보험회사까지 ‘투자’라는 신(新)개념을 접목시켜 금융그룹으로 아성을 채워갔다. 회사가 본격적으로 도약하는 계기는 2016년에 만들어졌다. 미래에셋이 대우증권을 인수한 사건이다. 박현주 회장은 한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대우증권 본입찰 마감일에 처음으로 낮술을 마셔봤다. 혼자 투자를 하던 20대부터 모든 일이 영화 필름처럼 생각이 났다”고 말했을 정도다. 미래에셋은 2016년 대우증권을 인수하며 재계 순위 29위권에서 19위로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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