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프트웨어 산업을 건설업의 잣대로 들이대고 있다”
⊙ 소프트웨어 유지·보수비, 한국은 10% vs. 미국과 일본은 20%
⊙ 소프트웨어 유지·보수비, 한국은 10% vs. 미국과 일본은 20%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7월 23일, 판교테크노밸리 공공지원센터에서 열린 ‘소프트웨어중심사회 실현 전략보고회’에 참석, 인사말을 하고 있다.
A사는 지난 2002년, 대기업 시스템통합업체(이하 SI업체·System Integration) S사에 전산망 구축 시스템을 의뢰했다. S사는 하청을 냈고, 중소 소프트웨어사인 B사(社)와 C사는 각각 6억, 2억원에 낙찰받았다. B사가 작업을 시작해 보니 의외로 일이 많았다. 자신들이 낙찰받은 금액 6억원 이상의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됐다. 알고 보니 애초에 발주한 A사는 50억원 가까이 주고 사업을 맡긴 터였다. 대기업인 S사가 수주 금액의 대부분을 관리·감독 명목으로 가져가게끔 돼 있었다. B사 대표의 얘기다.
“원 발주자인 A사는 고비용을 냈으니 당연히 소프트웨어 업체들에 요구사항이 많았습니다. 저희는 예상보다 일이 많아서 인원을 더 투입해야 했고, 그만큼 비용이 더 들게 됐죠. S사에 물었더니 ‘선수끼리 왜 이래’라는 식(式)이었습니다. 이번에 좀 손해를 보더라도 다음에 다시 끼워 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식이었습니다.”
—프로젝트에서 대기업 SI의 역할은 뭡니까.
“전산망 구축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우리 같은 재하청업체들을 관리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습니다.”
—실무는 중소업체들이 하는데 대기업이 관리 명목으로 그 많은 돈을 챙긴다는 것이 납득 가지 않습니다만.
“그게 현실입니다. 중소업체는 특정 분야의 소프트웨어 기술력은 있지만 브랜드가 없습니다. A사와 같은 발주처는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수 있는 이름 있는 대기업 SI업체에 발주하고, 또 대기업이 재하청 주도록 돼 있습니다. 이것이 소프트웨어 업계가 굴러가는 방식입니다. 영세한 업체들은 이렇게 한두 번만 일을 하면 망하는 구조입니다. 그마나 자금력이 나은 업체는 버티지만요. 많은 영세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이렇게 사라졌습니다.”
B사 대표는 이 일을 겪고 난 뒤, 수주금액이 적더라도 직접 납품할 수 있는 회사들을 상대로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계속해 왔다고 한다. 대기업 SI로부터 재하청을 받으면 오히려 손해 보는 일이 많아서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갑을(甲乙) 관계다. 하지만 B사 대표의 얘기는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이제는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소프트웨어 업체에 관심이 없는 이유
기자는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협회를 통해 “사업을 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었던 이들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10명 이상 인터뷰에 응했다. 자사(自社) 고유의 기술을 타업체에 넘겨 손해가 막심했다는 이, 자사 제품을 무료로 배포해 타격을 받았다는 이, 고비용을 들였지만 헐값에 납품할 수밖에 없었던 이, 우리나라에서 사업하기 힘들어 해외로 눈을 돌렸다는 이 등 복잡다단한 사연이 이어졌다. 그들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었다. 소프트웨어 업계를 취재한 결과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취재를 마치며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첫째, 이들이 납품하는 소프트웨어 자체가 제조업체들의 생산물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이들이 자사 고유의 기술이라고 주장하는 ‘특정 업종용(用) 전산망’, ‘지리정보를 이용한 시스템’, ‘전산 인프라 시스템’ 등은 모두 지적(知的)인 무형 자산이었다. 자기들 업체끼리도 처지가 비슷한 타업체가 정확히 어떤 분야에서, 어떤 식으로 특화돼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둘째로, 이들은 일반인의 관심 밖인 ‘B to B(Business to business)’ 영역에 속해 있었다. 일반인은 매일 식탁 위에 올라오는 식재료에 문제가 있다면 발끈한다. 하지만 나와 딱히 연관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설령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가 대기업에 기술을 도용당했다고 한들, 그 문제는 두 회사 간의 문제일 뿐으로 일반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입장에서 그 프로그램은 자신이 몇 년에 걸쳐서 밤잠을 못 자고 탄생시킨 자식과 같지만 말이다. 그들이 울분을 토해 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3년 소송 끝에 승소했지만…
(주)한국비즈텍은 건설산업 경영정보화에 필요한 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구축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다. 1991년 출범한 회사는 전사관리시스템인 ‘COC'S’라는 것을 개발해 저작권위원회에 등록했다. 이 회사는 한신공영, 한솔건설, 두산건설, 코오롱건설, 일성건설 등 여러 건설회사에 ERP 프로그램 제작 및 납품을 하고 있었다. 사단이 난 것은 2008년 말이었다.
회사는 미국발(發) 금융위기와 건설업계의 불황으로 인해 위기에 직면했다. 이즈음 회사의 핵심기술을 책임지는 직원 셋이 순차적으로 퇴사했다. 이들은 중견 건설회사인 ㈜신한이라는 곳으로 나란히 입사했고, 신한의 ERP 프로젝트 개발에서 중책을 맡았다. 신동선 한국비즈텍 대표의 얘기다.
“이들이 신한ERP 구축에 사용한 전사관리시스템은 우리가 저작권위원회에 등록한 우리만의 기술이었습니다. 저희는 사업을 시작할 초기부터 건설업체들만을 위한 특화된 전사시스템을 만들 요량으로 이에 초점을 맞춰 작업해 왔습니다. 우리가 평생 개발한 ERP 생산공정과 지식 재산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한에 납품했다면 비용이 20억원 가까이 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신 대표는 지난 2010년 4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직원 세 명을 고소했다. 신한에 대해 압수수색(2010년 6월)이 이뤄졌고, 저작권위원회는 신한의 전산프로그램이 한국비즈텍의 것과 유사하다고 판정(2011년 11월)했다. 2014년 9월, 2심 재판부는 신한으로 이직한 직원 셋이 소프트웨어 제품을 무단 복제했고, 컴퓨터프로그램 핵심기술을 절취한 죄를 인정, 실형 6개월을 선고했다. 직원 개인에 대한 죄를 물은 것이다.
같은 재판부는 그러나 회사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신한사를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위반으로 처벌해 달라고 한 한국비즈텍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3년 넘게 법적 공방을 벌이는 데 치중하느라 사세는 기울었다. 신 대표는 “애당초 저작권위원회가 유사제품임을 입증해 단순한 소송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지연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 상대로 소송 건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
㈜한국공간정보통신은 한때 직원 270명, 연 매출 160억원을 기록했던 꽤 규모 있는 중소기업이었다. 지난 1998년에 설립해 누적매출 1000억원을 기록한 회사는 현재 직원 12명뿐이다. 정부가 이 회사의 고유 시스템을 대가 없이 사용한 것이 이처럼 사세가 약화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 업체 측의 주장이다. 업체는 지난 2013년 6월, 소프트웨어 응용프로그램의 무단·불법 사용 등을 이유로 국토해양부, 안전행정부 등 정부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회사의 고유 기술은 ‘GIS(지리정보시스템)’라는 것으로, 지하망 지도를 웹상에서 구현하는 기술이다. 구글이 제공하는 ‘구글어스’ 지도보다 먼저 개발된 세계 최초의 지하지리정보시스템이다. 김인현 한국공간정보통신 대표의 얘기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지난 2006년 11월부터 2011년 7월까지 시군구 도로명주소 관리시스템을 시행하면서 저희 회사의 고유한 ‘GIS’ 엔진을 사용하고도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전행정부는 저희의 허락 없이 저희 엔진을 전국 240여 개의 지자체에 배포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지적재산권 침해행위입니다. 저희가 해당 대가를 요구했지만 안전행정부는 ‘새주소 관련’ 규정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이후 새주소 관련 법이 통과돼 예산이 생겼지만 여전히 저희 기술 사용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 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내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소프트웨어는 마음대로 배포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정부의 입장은 다르다. 안전행정부 관계자는 “정부가 해당 회사의 동의 없이 전국 지자체에 프로그램을 배포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해당 회사로부터 동의를 받고 계약서에 명기된 대로 했는데 당혹스럽다”는 입장이다. 이들의 소송은 아직 1심 진행 중이다.
“저작권 침해 여부는 논쟁거리”
한국비즈텍이나 한국공간정보통신 모두 자사의 ‘고유 기술’ 문제를 들고 나온다. 한국비즈텍이 승소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것은 ‘원천 소스코드’가 도용된 점에서였고, 한국공간정보통신은 ‘GIS’라는 고유 기술 얘기를 꺼낸다. 저작물, 저작권 불법 도용에 대한 얘기를 들어 봤다. 이성환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팀장의 얘기다.
“저작권이란 저작물에 대한 권리입니다. 저작물은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이 표현된 모든 것입니다. 노래, 시, 무용 등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낸 것들이 저작물이죠. 어린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저작물로 보지는 않습니다. 저작물로 인정받으려면 저작물성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 노래, 시 등에 적용됐는데 점차 소프트웨어가 저작권 범주 내에 들어왔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 역시 인간의 어떤 사고를 프로그램 소프트웨어로 표현해 낸 것이니 저작권으로 보호받을 범위에 넣었습니다.”
—저작권 침해냐, 아니냐로 대립하던데요.
“저작권 침해 여부는 굉장히 복잡한 얘기입니다. 만일 누가 모나리자 그림을 비슷하게 그렸다면 이것은 저작권 침해입니까, 아니면 패러디입니까. 소프트웨어의 경우 A라는 회사가 만든 기능인데 B사가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고 할 때, 그것이 베낀 것이냐 아니냐는 늘 논쟁거리입니다.”
—원천코드 얘기를 하던데요.
“프로그램을 구동시키는 원천코드가 있는데 그 코드가 똑같다면 원 소유자로부터 도용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프로그램 코드가 완전히 다른데 그 결과물이 비슷할 경우에는 이것이 저작권 침해인지 아닌지 애매합니다. 새로 만든 사람이 ‘과거의 것을 보고 만든 게 아니라 나의 저작물’이라고 주장하면 입증이 어렵습니다.”
참 어렵다. 사실 저작권이 법으로 보호된 것은 지난 1957년부터다. 이 팀장의 얘기다.
“저작권이 문제가 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산업이 일어나면서 외국의 것을 마구 가져다 쓰던 시기였죠. 그때 외국에서 ‘남의 것을 함부로 가져다 쓰면 안 된다’고 일종의 푸시를 하면서 우리도 저작권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저작권 보호니, 저작권 침해니 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저작권이 제대로 논의된 것은 음악을 다운로드 받는 MP3 시장이 커지면서부터입니다. 사람들이 예전처럼 CD를 구입하지 않았고, 불법으로 음악을 다운로드 받아 음반 시장이 무너지면서 관심거리가 됐습니다. 저작권이라는 것이 한 산업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겁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학가에서 교재를 아무렇게나 근처에서 복사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인기 가요를 짜깁기한 테이프를 버젓이 팔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1990년대 들어서야 ‘남의 권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는 차원에서 40여년 만에 저작권 법이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 업계에 저작권이 적용된 것은 이보다 몇 년이 지나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국산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앤도비 등 외국산 소프트웨어를 컴퓨터에 깔아서 사용하던 시기였다. 유일하다시피 했던 국산 소프트웨어 업체인 ‘한컴(한글과 컴퓨터)’이 무너지면서 ‘소프트웨어도 저작권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어렴풋하게나마 생겼다고 한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저작권 정책, 산업, 보호의 3개 과가 저작권 주무 부서가 됐다. 그리고 지난 2000년을 전후해 국산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IMF 여파로 인해 실직자가 늘던 시절이었고, 벤처 붐이 불던 때였다.
원발주자→대기업 SI→중소 소프트웨어 업체
우리나라 대기업이 소프트웨어 산업에 뛰어든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삼성SDS, LG CN, SK C&C(과거 대한텔레콤) 등이 생겼다. 그런데 대기업들이 이 시장에 뛰어들 당시부터 시장의 왜곡이 있었다는 것이 일부 업체들의 주장이다. 한 소프트웨어 회사 대표의 얘기다.
“대기업 SI 회사들이 IT에 진입한 이유는 계열사에 필요한 전산과 서버, 통신장비를 구매 대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에는 A계열사에 전산, 서버만 주기로 했는데 A사가 소프트웨어 기술도 같이 요구하게 된 겁니다. A사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려면 SI업체들이 사람을 파견해야겠죠. 그래서 기술자들을 뽑아서 A사에 필요한 제품을 개발해 줬습니다. A사는 SI업체에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어떻게 지불을 산출했겠습니까. SI업체의 산출물을 산 것이 아니라, SI업체가 파견한 용역 인건비를 지불한 겁니다. 그러니 SI가 A사를 위해서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소유권은 당연히 A사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겁니다. A사의 입장에서는 ‘내가 돈 주고 사람 써서 개발했으니 내 것’이라고 한 겁니다.”
—이게 문제가 됩니까.
“SI업체가 자사 계열사의 시스템을 깔았을 때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다른 중소업체가 직접 A회사에 납품을 할 때 그 소유권을 두고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구조는 어때야 하는 겁니까.
“어떤 회사가 자기 기술력으로 제품을 만들고, 그 제품을 필요로 하는 수요처에 납품하는 것이 정상적인 구조입니다. 물론 해당업체에 따라 조금씩 변경은 가능하겠지만요. 이렇게 되면 제품을 납품하고, 또 나중에 제품 A/S까지 하는 정상적인 프로세스를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전산망이라는 것이 필요하니까, 이미 수요처가 있는 상태에서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SI업체들을 만든 겁니다. 거꾸로 됐죠. 우리나라는 재벌그룹이든 은행이든, 중소기업이든 전부 SI업체 하나씩은 갖고 있습니다. 건설전문 SI, 금융전문 SI, 이런 게 없죠.”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사업을 하는 수많은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이 대기업 SI의 재하청 업체로 일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기술력이 있더라도 인지도와 납품 역사가 없으니, 직접 다이렉트로 원 발주처와 일을 하기란 쉽지 않다. 애초에 말한 ‘다음에 끼워줄 테니 이번에는 그냥 하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업제안서 쓸 때부터 문제점투성이
중소기업인 C사는 현재 대기업 SI업체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한 정부 부처가 지난 2000년대 중반 전산망시스템 구축사업을 발주했고, 이를 SK C&C, 대우정보통신, KT ENS가 나눠 수주했다. C사는 이들 중 한 곳과 함께 일을 하기로 하고 ‘제안요청서(RFP·Request for Proposal)’를 함께 썼다. 하지만 C사에 일정 수준의 일감을 나눠 주기로 했던 회사는 사업을 수주한 후, C와 비슷한 일을 하는 싼 업체에 일감을 줬다. ‘상도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C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결국 소송을 냈다. 이 업계에서 가장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라고 한다. C사 대표의 얘기다.
“원 발주처로부터 사업을 수주하려면 ‘RFP’를 제출합니다. 대기업 SI의 명의로 ‘RFP’를 쓰지만 여기에는 이 대기업에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는 업체들의 아이디어가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원 발주처가 대기업 SI업체에 ‘너희가 그림 한번 그려 봐’라고 합니다. 그러면 대기업이 다시 우리 같은 전문업체를 부르고 전문업체가 그림을 그립니다. 이 그림을 그리는 비용은 거의 공짜예요. 만약에 대기업 SI사가 이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우리랑 같이 할 것으로 믿고 그냥 하는 겁니다.”
—그런데 대기업 SI업체가 수주를 해 놓고 같이 RFP를 썼던 소프트웨어 업체를 끼워 주지 않는다는 겁니까.
“그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H소프트는 한때 업계에서 유망하다고 소문난 업체였습니다. 이 회사가 RFP를 쓸 때 자기네 아이디어만 잔뜩 주고 팽당했습니다. 정작 이 업무를 수주한 곳은 H사보다 값이 싼 곳이었으니까요. 그럼 값이 떨어질 것이고 원 발주처인 정부는 생색을 냅니다. ‘국가예산 절감했다’고요. 그들은 예산절감에만 관심이 있지, 그 절감으로 인해 한 회사가 죽고, 그 회사의 고용이 없어진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수주한 이후에 약속대로 하는 곳도 있지요.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RFP라는 것이 워낙 두루뭉술해요. 업무를 하다 보면 그대로 되기 힘들 정도로 주먹구구예요. 발주자들은 예산이 이 정도뿐이니까 니들끼리 어떻게든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중간에 낀 대기업 SI업체가 적자를 감수할까요? 결국 밑에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겁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또 다른 D사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D사 대표이사의 얘기다.
“SI업체나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나 단독으로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서로 패키지로 묶여서 해야 하는데, 이때 갑인 대기업이 ‘우리가 이런 것들을 제안하려고 하는데 일단 필요한 기술이랑 인원 좀 달라’고 하면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디어만 뺏길 수 있는데도요.
“가령 건축물을 납품하기 위해 계량기가 필요한데 ‘내가 수주하면 너희 계량기를 쓸게. 그러니까 일단 너희 계량기 스펙이 뭔지 알려줘’라고 하면 말해 줘야지 어쩝니까. 대기업 SI업체가 정말 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죠. 그래 놓고 수주 후에 계량기를 싼 걸로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가격을 싸게 하기 위해서지요.”
—RFP를 쓸 당시에 이런 조항을 미리 써 놓고 시작하면 안될까요.
“소프트웨어 업체의 위치가 굉장히 높아졌을 때나 가능할 겁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인터뷰에 응한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과거와 비교하면 대기업 SI들의 ‘상도’는 많이 좋아진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을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갑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대기업 SI 빠지고 나니, 중견 SI의 횡포가
그리고 2014년 8월, 삼성SDS, LG CNS, SK C&C 등과 같은 대기업 SI 업체들의 공공정보화 시장 참여를 금지한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럼 이제 이들 업체의 숨통은 트였을까. 모 업체 대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형 SI사들이 빠지고 난 자리에 중견 SI업체들이 들어왔는데 횡포가 더 심하더군요. 대형 SI사들은 갑을 관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얘기가 나오면서 조금씩 나아지던 터였습니다. 물론 여전히 나쁜 곳도 있었지만 좋은 곳도 있었습니다. S사는 자기들이 수주를 하면 우리 같은 업체들을 주욱 모아 놓고 지원해 줘서 고맙다는 말 정도는 잊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낀 대형 SI 업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제를 빨리하는 것뿐이니, 적어도 이는 약속하더군요.”
—대형 SI 빠진 자리를 중소 SI가 꿰찼군요.
“N사는 업계에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회사입니다. 고객이 바꾸라고 했다면서 RFP를 쓴 업체를 걸핏하면 바꿉니다. 그나마 통보라도 해 주면 좋은데 아무 말도 없이 ‘모르셨어요?’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불공정거래로 신고할 수 있을 텐데요.
“왜 안 해 봤겠습니까. 그런데 불공정거래로 패널티를 무는 것이 싼 업체를 써서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 싼 겁니다. 그러니 그냥 계속 저러는 겁니다. 중견 SI들이 더하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대기업 SI업체인 S사는 요즘 차라리 속이 편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정부에서 발주한 소프트웨어 사업은 이윤을 남기기 어려웠다. 갑의 횡포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그룹의 이미지 때문에 중소업체들에 책임을 전가할 수도 없었고, 하청업체에 꼬박꼬박 제때 자금을 지급했다”며 “정부에서 일정 규모 이하의 사업에 대기업 SI업체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SI, 왜 하는지 모르겠다. 완전 막장인데…”
이런 상황하에서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주장처럼 ‘제값 받기’란 허무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가격은 꽤 공정한 과정을 거쳐 매겨진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소프트웨어 한 관계자의 얘기다.
“소프트웨어 개발비는 모호하게 책정되지 않습니다. 휴대폰 생산처럼 명쾌합니다. 소프트웨어 사업에 기준이 정해져 있습니다. 기술 등급별, 기술사별, 기술비가 다 세세히 나눠져 있습니다. 가령 특급 기술사가 들어가면 단가가 얼마 올라가는 등까지 말이죠. 소프트웨어산업협회에서 매년 물가상승률을 감안해서 기술 단가를 매깁니다. 부풀리기나 완전 덤핑은 하기 어렵습니다.”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힘들여 개발했는데 제값을 못 받는다’고 하소연을 한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지난해 7월 ‘SW(소프트웨어) 중심사회 실현전략’에 참석해 “공공SW 발주 시 불공정 관행 개선을 통해 SW기업이 제값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 3월 9일, 기업이 체감하는 제값 주기 소프트웨어를 발굴하고, 타 사업 간 모범사례로 적용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제값 주기 선도 시범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이를 위해 51개 SW사업자를 시범 선정하고, 사업 발주 전에 예산 대비 사업규모가 적정한지, 사업기간이 사업규모에 맞게 계획됐는지, 하도급 기업의 안정된 수익이 보장되는지, 발주기관이 대가 없이 과업 변경을 요구하는지, 과업 변경 시 적정한 대가를 지급하는지 등을 철저하게 검토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I업체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사례가 최근에 있었다. 정부에서 주관한 한 국책 행사장 사업에서였다. 여러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행사에 필요한 전산망을 S사가 200억원 이상을 받고 수주키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쟁사인 대기업 S사가 100억원대를 부르며 나왔다. 해당 준비 위원회는 릴레이 회의를 이어 갔다. 똑같은 대기업 SI업체에서 2배나 되는 가격을 부르니 그럴 법도 했다. 결론은 “A나 B나 전부 대기업이니까 문제가 생기면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라고 났다. 싼 값을 제안한 곳이 수주했다. 업계 관계자의 얘기다.
“이런 일이 있으니까 ‘SI는 무조건 30% 치고 시작하는 게 맞아’라는 시각이 있는 겁니다. 어찌 보면 스스로 업계를 깎아내리고 있는 셈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른 셈법이 있을 수 있습니까.
“분명히 어딘가에 부실이 있는 거죠. 건축물을 지을 때 싼 자재를 쓰면 붕괴의 위험이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SI는 소위 불량품을 납품해도 잘 표시가 안 난다는 데 있습니다. 전산망이 잘 말을 듣지 않는다, 소프트웨어 구동이 느리다 등은 건물 무너지는 것처럼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대기업 SI업체 팀장들과 얘기하면 자기들이 스스로 말합니다. ‘도대체 SI, 왜 하는지 모르겠다. 완전 막장인데’라고요.”
“소프트웨어 유지·보수비 현실화 시급”
기업비즈니스 플랫폼 전문 회사인 투비소프트는 전체 매출의 20%가 일본, 미국에서 나온다. 창업한 지 2년째 되던 때부터 이들은 일본에 연락사무소를 만들고, 일본에서 판로 뚫기에 나섰다. 언어도, 문화도 달랐지만, 소프트웨어의 수출길을 튼 것이 오늘날 이 회사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됐다. 이 회사는 지난해에는 경쟁사인 미국의 ‘넥사웹테크놀로지’라는 회사를 인수해 본격적인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김영현 투비소프트 전무는 “소프트웨어 업체들에 적정한 유지・보수비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얘기다.
“소프트웨어는 한 번 납품을 하면 끝이 아니라 계속 유지・보수를 해야 합니다.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는지, 보수할 부분은 없는지에 대한 A/S계약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유지・보수비가 10% 정도로 턱없이 낮습니다.”
—일본은 어떻습니까.
“일본과 미국 모두 소프트웨어 유지보수비로 20%를 주는데 이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
—프로그램 유지·보수가 어렵습니까.
“사용자 입장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또는 분기별로 한 번 담당자가 업장을 방문해서 쓱 보고 지나가는데 왜 비용을 써야 하느냐고 물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프로그램의 구동을 살피기 위해서 회사 내부에서는 수많은 인원이 실시간으로 해당 회사 전산망을 모니터링하고, 문제가 생기면 경고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 회사만 해도 100여 명의 인력이 A/S업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외에 회사의 장기적 비전을 가져가기 위해서도 제대로 된 A/S비 책정은 필수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가장의 수입이 얼마인지에 따라서 이달에, 다음달에 어느 정도의 비용을 써야겠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소프트웨어 업체들에 그런 밑바탕 자금이 유지・보수비입니다. 소프트웨어 납품은 수주를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유지・보수비는 소프트웨어 업체들에 캐시카우입니다. 업체로서는 이 비용이 계속 들어와야 또 다른 소프트웨어 연구개발(R&D)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소프트웨어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다릅니까.
“판이하게 다릅니다. 엔지니어 출신이 많은 우리나라는 ‘이거 하면 될 것 같다’고 하면 일단 개발부터 하고 보는 편입니다. 반면 일본은 ‘이 제품을 만들면 팔 수 있을까’라는 식의 시장 논리로 산업에 접근합니다.”
—일본에서는 제값 받기가 가능합니까.
“시장가격이라는 게 수혜자 측이냐, 공급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한국 기업들은 ‘우리 예산이 얼마인데 여기에 맞춰서 해 줘’라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반면 일본은 RFP를 받은 다음에 ‘여기에서 디스카운트를 좀 해 주세요’라는 식입니다. 큰 차이가 있죠.”
대학의 종합관리시스템 구축 1위 업체인 토마토시스템의 이상돈 대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 회사는 지난 2006년 일본 도쿄의 수쿠도쿠 대학의 ERP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대표의 얘기다.
“일본 업체에 우리의 사업 계획안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일단 ‘왜 이렇게 비싸?’라는 소리가 먼저 나왔을 텐데 일본 업체는 제안서를 보고 별말이 없었습니다. ‘원가가 저 정도이니 여기에 우리가 얼마의 마진을 받아 최종 제안하면 되겠네’라는 식이었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우리 역시 중간업체가 얼마의 마진을 챙기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프로그램이 제값을 받으면 그뿐이니까요.”
—우리와 다르군요.
“우리는 이런 것 저런 것 떼고 맨 마지막에 우리 같은 업체의 몫이 나오는데, 일본은 우리 것에서 출발해서 거기에 마진 붙여서 높여 가는 식이더라고요.”
소프트웨어業을 보는 차이
미국에 있는 큰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한국 회사로 이직한 S 전무의 얘기는 이렇다.
“미국에서 소프트웨어 사용계약서를 보내면 한국 법무팀에서 검토해서 피드백이 옵니다. 서로 이견이 있으면 조율해서 ‘소프트웨어 라이선스계약(Software Licence Agreement)’을 쓰고 납품합니다. 미국 회사들은 당연히 자사 제품에 대한 사용권을 판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 보고 놀랐습니다.”
—한국 회사들이 사용권과 저작권을 함께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서인가요.
“국내에서는 소프트웨어 사용권과 소유권 모두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미국과 판이하게 다른 점입니다.”
—둘 다 양도하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산출물에 대한 소유권을 A 개발업체와 B 사용업자가 나눠 가져서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고 칩시다. B 사용업체가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고 발전시키고 싶어도, 매번 A사와 협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힘듭니다. 소프트웨어사는 그 회사대로, 고객도 그대로 클 수 없습니다. 소프트웨어의 산출물을 돈을 지불하는 회사에서 갖겠다는 것은 상대방 비즈니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겁니다. 소프트웨어를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미국에서는 소프트웨어의 가치(VALUE)를 인식합니다. 가령 1년에 1조원을 남기는 회사라면 적어도 우리 회사의 소프트웨어가 1000억원 값어치를 했다고 쳐 줍니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가지고 미국 업체를 만나면 ‘이걸로 어떻게 돈을 벌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소프트웨어를 보고 ‘어, 이거 국내에 어디 카피할 곳 없나?’라고 나옵니다. 그러고는 국내 업자를 불러서 ‘이거 대충 비슷하게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릴까?’라고 묻습니다. 소프트웨어 사업을 보는 시각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적재산권을 건설의 노가다판처럼 보는 순간에 답이 안 나오는 겁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의 얘기도 비슷했다.
“스티브 잡스가 우리나라에 오면 월 3000만원짜리로 전락할 겁니다. 그 사람이 추구하는 무형의 가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조업의 시각으로 소프트웨어를 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제조업만 돼도 좋습니다. 건설업은 그래도 공사기간이 늦어지면 그에 투입되는 인건비를 추가로 주는데 우리는 전부 우리 책임입니다. 건설은 설계가 변경되면 돈을 더 주는데 우리는 설계가 변경돼도 돈을 못 받습니다. 건설에서 안 좋은 것들만 모아서 잣대를 들이댄 것이 소프트웨어 업계의 현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로 창조경제가 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원 발주자인 A사는 고비용을 냈으니 당연히 소프트웨어 업체들에 요구사항이 많았습니다. 저희는 예상보다 일이 많아서 인원을 더 투입해야 했고, 그만큼 비용이 더 들게 됐죠. S사에 물었더니 ‘선수끼리 왜 이래’라는 식(式)이었습니다. 이번에 좀 손해를 보더라도 다음에 다시 끼워 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식이었습니다.”
—프로젝트에서 대기업 SI의 역할은 뭡니까.
“전산망 구축 납기일을 맞추기 위해 우리 같은 재하청업체들을 관리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습니다.”
—실무는 중소업체들이 하는데 대기업이 관리 명목으로 그 많은 돈을 챙긴다는 것이 납득 가지 않습니다만.
“그게 현실입니다. 중소업체는 특정 분야의 소프트웨어 기술력은 있지만 브랜드가 없습니다. A사와 같은 발주처는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수 있는 이름 있는 대기업 SI업체에 발주하고, 또 대기업이 재하청 주도록 돼 있습니다. 이것이 소프트웨어 업계가 굴러가는 방식입니다. 영세한 업체들은 이렇게 한두 번만 일을 하면 망하는 구조입니다. 그마나 자금력이 나은 업체는 버티지만요. 많은 영세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이렇게 사라졌습니다.”
B사 대표는 이 일을 겪고 난 뒤, 수주금액이 적더라도 직접 납품할 수 있는 회사들을 상대로 소프트웨어 서비스를 계속해 왔다고 한다. 대기업 SI로부터 재하청을 받으면 오히려 손해 보는 일이 많아서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갑을(甲乙) 관계다. 하지만 B사 대표의 얘기는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이다. 이제는 좀 나아지지 않았을까.
소프트웨어 업체에 관심이 없는 이유
기자는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협회를 통해 “사업을 하면서 애로사항이 있었던 이들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이 10명 이상 인터뷰에 응했다. 자사(自社) 고유의 기술을 타업체에 넘겨 손해가 막심했다는 이, 자사 제품을 무료로 배포해 타격을 받았다는 이, 고비용을 들였지만 헐값에 납품할 수밖에 없었던 이, 우리나라에서 사업하기 힘들어 해외로 눈을 돌렸다는 이 등 복잡다단한 사연이 이어졌다. 그들의 격앙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뭔가 문제가 있지 않나” 싶었다. 소프트웨어 업계를 취재한 결과는 한마디로 아수라장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취재를 마치며 왜 그럴까 생각해 봤다.
첫째, 이들이 납품하는 소프트웨어 자체가 제조업체들의 생산물처럼 단순하지 않았다. 이들이 자사 고유의 기술이라고 주장하는 ‘특정 업종용(用) 전산망’, ‘지리정보를 이용한 시스템’, ‘전산 인프라 시스템’ 등은 모두 지적(知的)인 무형 자산이었다. 자기들 업체끼리도 처지가 비슷한 타업체가 정확히 어떤 분야에서, 어떤 식으로 특화돼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었다.
둘째로, 이들은 일반인의 관심 밖인 ‘B to B(Business to business)’ 영역에 속해 있었다. 일반인은 매일 식탁 위에 올라오는 식재료에 문제가 있다면 발끈한다. 하지만 나와 딱히 연관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설령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가 대기업에 기술을 도용당했다고 한들, 그 문제는 두 회사 간의 문제일 뿐으로 일반의 관심대상이 아니다.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입장에서 그 프로그램은 자신이 몇 년에 걸쳐서 밤잠을 못 자고 탄생시킨 자식과 같지만 말이다. 그들이 울분을 토해 내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3년 소송 끝에 승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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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기업에 핵심기술을 뺏겨 4년여간 소송한 소프트웨어 벤처회사 한국비즈텍 신동선 대표이사. |
회사는 미국발(發) 금융위기와 건설업계의 불황으로 인해 위기에 직면했다. 이즈음 회사의 핵심기술을 책임지는 직원 셋이 순차적으로 퇴사했다. 이들은 중견 건설회사인 ㈜신한이라는 곳으로 나란히 입사했고, 신한의 ERP 프로젝트 개발에서 중책을 맡았다. 신동선 한국비즈텍 대표의 얘기다.
“이들이 신한ERP 구축에 사용한 전사관리시스템은 우리가 저작권위원회에 등록한 우리만의 기술이었습니다. 저희는 사업을 시작할 초기부터 건설업체들만을 위한 특화된 전사시스템을 만들 요량으로 이에 초점을 맞춰 작업해 왔습니다. 우리가 평생 개발한 ERP 생산공정과 지식 재산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신한에 납품했다면 비용이 20억원 가까이 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신 대표는 지난 2010년 4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직원 세 명을 고소했다. 신한에 대해 압수수색(2010년 6월)이 이뤄졌고, 저작권위원회는 신한의 전산프로그램이 한국비즈텍의 것과 유사하다고 판정(2011년 11월)했다. 2014년 9월, 2심 재판부는 신한으로 이직한 직원 셋이 소프트웨어 제품을 무단 복제했고, 컴퓨터프로그램 핵심기술을 절취한 죄를 인정, 실형 6개월을 선고했다. 직원 개인에 대한 죄를 물은 것이다.
같은 재판부는 그러나 회사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신한사를 ‘컴퓨터프로그램보호법’ 위반으로 처벌해 달라고 한 한국비즈텍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3년 넘게 법적 공방을 벌이는 데 치중하느라 사세는 기울었다. 신 대표는 “애당초 저작권위원회가 유사제품임을 입증해 단순한 소송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지연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 상대로 소송 건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
㈜한국공간정보통신은 한때 직원 270명, 연 매출 160억원을 기록했던 꽤 규모 있는 중소기업이었다. 지난 1998년에 설립해 누적매출 1000억원을 기록한 회사는 현재 직원 12명뿐이다. 정부가 이 회사의 고유 시스템을 대가 없이 사용한 것이 이처럼 사세가 약화된 이유 중 하나라는 것이 업체 측의 주장이다. 업체는 지난 2013년 6월, 소프트웨어 응용프로그램의 무단·불법 사용 등을 이유로 국토해양부, 안전행정부 등 정부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이 회사의 고유 기술은 ‘GIS(지리정보시스템)’라는 것으로, 지하망 지도를 웹상에서 구현하는 기술이다. 구글이 제공하는 ‘구글어스’ 지도보다 먼저 개발된 세계 최초의 지하지리정보시스템이다. 김인현 한국공간정보통신 대표의 얘기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이 지난 2006년 11월부터 2011년 7월까지 시군구 도로명주소 관리시스템을 시행하면서 저희 회사의 고유한 ‘GIS’ 엔진을 사용하고도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전행정부는 저희의 허락 없이 저희 엔진을 전국 240여 개의 지자체에 배포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지적재산권 침해행위입니다. 저희가 해당 대가를 요구했지만 안전행정부는 ‘새주소 관련’ 규정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이후 새주소 관련 법이 통과돼 예산이 생겼지만 여전히 저희 기술 사용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 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내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소프트웨어는 마음대로 배포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정부의 입장은 다르다. 안전행정부 관계자는 “정부가 해당 회사의 동의 없이 전국 지자체에 프로그램을 배포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해당 회사로부터 동의를 받고 계약서에 명기된 대로 했는데 당혹스럽다”는 입장이다. 이들의 소송은 아직 1심 진행 중이다.
“저작권 침해 여부는 논쟁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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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최대 부호인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중학교 때부터 소프트웨어 만들기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
“저작권이란 저작물에 대한 권리입니다. 저작물은 인간의 감정이나 사상이 표현된 모든 것입니다. 노래, 시, 무용 등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낸 것들이 저작물이죠. 어린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저작물로 보지는 않습니다. 저작물로 인정받으려면 저작물성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 노래, 시 등에 적용됐는데 점차 소프트웨어가 저작권 범주 내에 들어왔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 역시 인간의 어떤 사고를 프로그램 소프트웨어로 표현해 낸 것이니 저작권으로 보호받을 범위에 넣었습니다.”
—저작권 침해냐, 아니냐로 대립하던데요.
“저작권 침해 여부는 굉장히 복잡한 얘기입니다. 만일 누가 모나리자 그림을 비슷하게 그렸다면 이것은 저작권 침해입니까, 아니면 패러디입니까. 소프트웨어의 경우 A라는 회사가 만든 기능인데 B사가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고 할 때, 그것이 베낀 것이냐 아니냐는 늘 논쟁거리입니다.”
—원천코드 얘기를 하던데요.
“프로그램을 구동시키는 원천코드가 있는데 그 코드가 똑같다면 원 소유자로부터 도용한 것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프로그램 코드가 완전히 다른데 그 결과물이 비슷할 경우에는 이것이 저작권 침해인지 아닌지 애매합니다. 새로 만든 사람이 ‘과거의 것을 보고 만든 게 아니라 나의 저작물’이라고 주장하면 입증이 어렵습니다.”
참 어렵다. 사실 저작권이 법으로 보호된 것은 지난 1957년부터다. 이 팀장의 얘기다.
“저작권이 문제가 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산업이 일어나면서 외국의 것을 마구 가져다 쓰던 시기였죠. 그때 외국에서 ‘남의 것을 함부로 가져다 쓰면 안 된다’고 일종의 푸시를 하면서 우리도 저작권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저작권 보호니, 저작권 침해니 하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저작권이 제대로 논의된 것은 음악을 다운로드 받는 MP3 시장이 커지면서부터입니다. 사람들이 예전처럼 CD를 구입하지 않았고, 불법으로 음악을 다운로드 받아 음반 시장이 무너지면서 관심거리가 됐습니다. 저작권이라는 것이 한 산업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겁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학가에서 교재를 아무렇게나 근처에서 복사하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인기 가요를 짜깁기한 테이프를 버젓이 팔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1990년대 들어서야 ‘남의 권리’를 침해하면 안 된다는 차원에서 40여년 만에 저작권 법이 이슈가 되기 시작했다.
소프트웨어 업계에 저작권이 적용된 것은 이보다 몇 년이 지나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에는 국산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앤도비 등 외국산 소프트웨어를 컴퓨터에 깔아서 사용하던 시기였다. 유일하다시피 했던 국산 소프트웨어 업체인 ‘한컴(한글과 컴퓨터)’이 무너지면서 ‘소프트웨어도 저작권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어렴풋하게나마 생겼다고 한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저작권 정책, 산업, 보호의 3개 과가 저작권 주무 부서가 됐다. 그리고 지난 2000년을 전후해 국산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기기 시작했다. IMF 여파로 인해 실직자가 늘던 시절이었고, 벤처 붐이 불던 때였다.
원발주자→대기업 SI→중소 소프트웨어 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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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프트웨어 산업의 중요성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10월 27일, 공생발전형 SW생태계 구축전략을 위한 간담회에 참석한 모습. |
“대기업 SI 회사들이 IT에 진입한 이유는 계열사에 필요한 전산과 서버, 통신장비를 구매 대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처음에는 A계열사에 전산, 서버만 주기로 했는데 A사가 소프트웨어 기술도 같이 요구하게 된 겁니다. A사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려면 SI업체들이 사람을 파견해야겠죠. 그래서 기술자들을 뽑아서 A사에 필요한 제품을 개발해 줬습니다. A사는 SI업체에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어떻게 지불을 산출했겠습니까. SI업체의 산출물을 산 것이 아니라, SI업체가 파견한 용역 인건비를 지불한 겁니다. 그러니 SI가 A사를 위해서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소유권은 당연히 A사의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 겁니다. A사의 입장에서는 ‘내가 돈 주고 사람 써서 개발했으니 내 것’이라고 한 겁니다.”
—이게 문제가 됩니까.
“SI업체가 자사 계열사의 시스템을 깔았을 때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만약 다른 중소업체가 직접 A회사에 납품을 할 때 그 소유권을 두고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구조는 어때야 하는 겁니까.
“어떤 회사가 자기 기술력으로 제품을 만들고, 그 제품을 필요로 하는 수요처에 납품하는 것이 정상적인 구조입니다. 물론 해당업체에 따라 조금씩 변경은 가능하겠지만요. 이렇게 되면 제품을 납품하고, 또 나중에 제품 A/S까지 하는 정상적인 프로세스를 거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단 전산망이라는 것이 필요하니까, 이미 수요처가 있는 상태에서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는 SI업체들을 만든 겁니다. 거꾸로 됐죠. 우리나라는 재벌그룹이든 은행이든, 중소기업이든 전부 SI업체 하나씩은 갖고 있습니다. 건설전문 SI, 금융전문 SI, 이런 게 없죠.”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사업을 하는 수많은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이 대기업 SI의 재하청 업체로 일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기술력이 있더라도 인지도와 납품 역사가 없으니, 직접 다이렉트로 원 발주처와 일을 하기란 쉽지 않다. 애초에 말한 ‘다음에 끼워줄 테니 이번에는 그냥 하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업제안서 쓸 때부터 문제점투성이
중소기업인 C사는 현재 대기업 SI업체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한 정부 부처가 지난 2000년대 중반 전산망시스템 구축사업을 발주했고, 이를 SK C&C, 대우정보통신, KT ENS가 나눠 수주했다. C사는 이들 중 한 곳과 함께 일을 하기로 하고 ‘제안요청서(RFP·Request for Proposal)’를 함께 썼다. 하지만 C사에 일정 수준의 일감을 나눠 주기로 했던 회사는 사업을 수주한 후, C와 비슷한 일을 하는 싼 업체에 일감을 줬다. ‘상도의’에 어긋나는 일이지만 C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고, 결국 소송을 냈다. 이 업계에서 가장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라고 한다. C사 대표의 얘기다.
“원 발주처로부터 사업을 수주하려면 ‘RFP’를 제출합니다. 대기업 SI의 명의로 ‘RFP’를 쓰지만 여기에는 이 대기업에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는 업체들의 아이디어가 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쉽게 말해 원 발주처가 대기업 SI업체에 ‘너희가 그림 한번 그려 봐’라고 합니다. 그러면 대기업이 다시 우리 같은 전문업체를 부르고 전문업체가 그림을 그립니다. 이 그림을 그리는 비용은 거의 공짜예요. 만약에 대기업 SI사가 이 프로젝트를 수주하면 우리랑 같이 할 것으로 믿고 그냥 하는 겁니다.”
—그런데 대기업 SI업체가 수주를 해 놓고 같이 RFP를 썼던 소프트웨어 업체를 끼워 주지 않는다는 겁니까.
“그런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금은 없어진 H소프트는 한때 업계에서 유망하다고 소문난 업체였습니다. 이 회사가 RFP를 쓸 때 자기네 아이디어만 잔뜩 주고 팽당했습니다. 정작 이 업무를 수주한 곳은 H사보다 값이 싼 곳이었으니까요. 그럼 값이 떨어질 것이고 원 발주처인 정부는 생색을 냅니다. ‘국가예산 절감했다’고요. 그들은 예산절감에만 관심이 있지, 그 절감으로 인해 한 회사가 죽고, 그 회사의 고용이 없어진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수주한 이후에 약속대로 하는 곳도 있지요.
“물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RFP라는 것이 워낙 두루뭉술해요. 업무를 하다 보면 그대로 되기 힘들 정도로 주먹구구예요. 발주자들은 예산이 이 정도뿐이니까 니들끼리 어떻게든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그 얘기를 듣고 중간에 낀 대기업 SI업체가 적자를 감수할까요? 결국 밑에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겁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또 다른 D사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D사 대표이사의 얘기다.
“SI업체나 중소 소프트웨어 업체나 단독으로 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서로 패키지로 묶여서 해야 하는데, 이때 갑인 대기업이 ‘우리가 이런 것들을 제안하려고 하는데 일단 필요한 기술이랑 인원 좀 달라’고 하면 거절할 수가 없습니다.”
—아이디어만 뺏길 수 있는데도요.
“가령 건축물을 납품하기 위해 계량기가 필요한데 ‘내가 수주하면 너희 계량기를 쓸게. 그러니까 일단 너희 계량기 스펙이 뭔지 알려줘’라고 하면 말해 줘야지 어쩝니까. 대기업 SI업체가 정말 줄 거라고 믿는 수밖에 없죠. 그래 놓고 수주 후에 계량기를 싼 걸로 바꿔치기하는 겁니다. 가격을 싸게 하기 위해서지요.”
—RFP를 쓸 당시에 이런 조항을 미리 써 놓고 시작하면 안될까요.
“소프트웨어 업체의 위치가 굉장히 높아졌을 때나 가능할 겁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인터뷰에 응한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과거와 비교하면 대기업 SI들의 ‘상도’는 많이 좋아진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을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갑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대기업 SI 빠지고 나니, 중견 SI의 횡포가
그리고 2014년 8월, 삼성SDS, LG CNS, SK C&C 등과 같은 대기업 SI 업체들의 공공정보화 시장 참여를 금지한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럼 이제 이들 업체의 숨통은 트였을까. 모 업체 대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형 SI사들이 빠지고 난 자리에 중견 SI업체들이 들어왔는데 횡포가 더 심하더군요. 대형 SI사들은 갑을 관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얘기가 나오면서 조금씩 나아지던 터였습니다. 물론 여전히 나쁜 곳도 있었지만 좋은 곳도 있었습니다. S사는 자기들이 수주를 하면 우리 같은 업체들을 주욱 모아 놓고 지원해 줘서 고맙다는 말 정도는 잊지 않았습니다. 중간에 낀 대형 SI 업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결제를 빨리하는 것뿐이니, 적어도 이는 약속하더군요.”
—대형 SI 빠진 자리를 중소 SI가 꿰찼군요.
“N사는 업계에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회사입니다. 고객이 바꾸라고 했다면서 RFP를 쓴 업체를 걸핏하면 바꿉니다. 그나마 통보라도 해 주면 좋은데 아무 말도 없이 ‘모르셨어요?’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불공정거래로 신고할 수 있을 텐데요.
“왜 안 해 봤겠습니까. 그런데 불공정거래로 패널티를 무는 것이 싼 업체를 써서 이윤을 남기는 것보다 싼 겁니다. 그러니 그냥 계속 저러는 겁니다. 중견 SI들이 더하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대기업 SI업체인 S사는 요즘 차라리 속이 편하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정부에서 발주한 소프트웨어 사업은 이윤을 남기기 어려웠다. 갑의 횡포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그룹의 이미지 때문에 중소업체들에 책임을 전가할 수도 없었고, 하청업체에 꼬박꼬박 제때 자금을 지급했다”며 “정부에서 일정 규모 이하의 사업에 대기업 SI업체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SI, 왜 하는지 모르겠다. 완전 막장인데…”
이런 상황하에서 소프트웨어 업체들의 주장처럼 ‘제값 받기’란 허무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가격은 꽤 공정한 과정을 거쳐 매겨진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소프트웨어 한 관계자의 얘기다.
“소프트웨어 개발비는 모호하게 책정되지 않습니다. 휴대폰 생산처럼 명쾌합니다. 소프트웨어 사업에 기준이 정해져 있습니다. 기술 등급별, 기술사별, 기술비가 다 세세히 나눠져 있습니다. 가령 특급 기술사가 들어가면 단가가 얼마 올라가는 등까지 말이죠. 소프트웨어산업협회에서 매년 물가상승률을 감안해서 기술 단가를 매깁니다. 부풀리기나 완전 덤핑은 하기 어렵습니다.”
소프트웨어 업체들은 ‘힘들여 개발했는데 제값을 못 받는다’고 하소연을 한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지난해 7월 ‘SW(소프트웨어) 중심사회 실현전략’에 참석해 “공공SW 발주 시 불공정 관행 개선을 통해 SW기업이 제값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지난 3월 9일, 기업이 체감하는 제값 주기 소프트웨어를 발굴하고, 타 사업 간 모범사례로 적용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제값 주기 선도 시범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이를 위해 51개 SW사업자를 시범 선정하고, 사업 발주 전에 예산 대비 사업규모가 적정한지, 사업기간이 사업규모에 맞게 계획됐는지, 하도급 기업의 안정된 수익이 보장되는지, 발주기관이 대가 없이 과업 변경을 요구하는지, 과업 변경 시 적정한 대가를 지급하는지 등을 철저하게 검토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I업체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사례가 최근에 있었다. 정부에서 주관한 한 국책 행사장 사업에서였다. 여러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행사에 필요한 전산망을 S사가 200억원 이상을 받고 수주키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쟁사인 대기업 S사가 100억원대를 부르며 나왔다. 해당 준비 위원회는 릴레이 회의를 이어 갔다. 똑같은 대기업 SI업체에서 2배나 되는 가격을 부르니 그럴 법도 했다. 결론은 “A나 B나 전부 대기업이니까 문제가 생기면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지”라고 났다. 싼 값을 제안한 곳이 수주했다. 업계 관계자의 얘기다.
“이런 일이 있으니까 ‘SI는 무조건 30% 치고 시작하는 게 맞아’라는 시각이 있는 겁니다. 어찌 보면 스스로 업계를 깎아내리고 있는 셈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른 셈법이 있을 수 있습니까.
“분명히 어딘가에 부실이 있는 거죠. 건축물을 지을 때 싼 자재를 쓰면 붕괴의 위험이 생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SI는 소위 불량품을 납품해도 잘 표시가 안 난다는 데 있습니다. 전산망이 잘 말을 듣지 않는다, 소프트웨어 구동이 느리다 등은 건물 무너지는 것처럼 눈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니 말입니다. 대기업 SI업체 팀장들과 얘기하면 자기들이 스스로 말합니다. ‘도대체 SI, 왜 하는지 모르겠다. 완전 막장인데’라고요.”
“소프트웨어 유지·보수비 현실화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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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전자가 구글의 새로운 소프트웨어를 적용한 제품을 가장 먼저 출시하는 핵심 하드웨어 파트너로 떠올랐다. 구글 ‘안드로이드 웨어’를 적용한 첫 번째 스마트워치인 ‘LG워치’. |
“소프트웨어는 한 번 납품을 하면 끝이 아니라 계속 유지・보수를 해야 합니다. 프로그램이 잘 돌아가는지, 보수할 부분은 없는지에 대한 A/S계약을 해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유지・보수비가 10% 정도로 턱없이 낮습니다.”
—일본은 어떻습니까.
“일본과 미국 모두 소프트웨어 유지보수비로 20%를 주는데 이것이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
—프로그램 유지·보수가 어렵습니까.
“사용자 입장에서는 한 달에 한 번, 또는 분기별로 한 번 담당자가 업장을 방문해서 쓱 보고 지나가는데 왜 비용을 써야 하느냐고 물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프로그램의 구동을 살피기 위해서 회사 내부에서는 수많은 인원이 실시간으로 해당 회사 전산망을 모니터링하고, 문제가 생기면 경고 메시지를 줍니다. 우리 회사만 해도 100여 명의 인력이 A/S업무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 외에 회사의 장기적 비전을 가져가기 위해서도 제대로 된 A/S비 책정은 필수입니다.”
—어떤 의미입니까.
“가장의 수입이 얼마인지에 따라서 이달에, 다음달에 어느 정도의 비용을 써야겠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소프트웨어 업체들에 그런 밑바탕 자금이 유지・보수비입니다. 소프트웨어 납품은 수주를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유지・보수비는 소프트웨어 업체들에 캐시카우입니다. 업체로서는 이 비용이 계속 들어와야 또 다른 소프트웨어 연구개발(R&D)을 할 수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소프트웨어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다릅니까.
“판이하게 다릅니다. 엔지니어 출신이 많은 우리나라는 ‘이거 하면 될 것 같다’고 하면 일단 개발부터 하고 보는 편입니다. 반면 일본은 ‘이 제품을 만들면 팔 수 있을까’라는 식의 시장 논리로 산업에 접근합니다.”
—일본에서는 제값 받기가 가능합니까.
“시장가격이라는 게 수혜자 측이냐, 공급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한국 기업들은 ‘우리 예산이 얼마인데 여기에 맞춰서 해 줘’라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반면 일본은 RFP를 받은 다음에 ‘여기에서 디스카운트를 좀 해 주세요’라는 식입니다. 큰 차이가 있죠.”
대학의 종합관리시스템 구축 1위 업체인 토마토시스템의 이상돈 대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이 회사는 지난 2006년 일본 도쿄의 수쿠도쿠 대학의 ERP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대표의 얘기다.
“일본 업체에 우리의 사업 계획안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일단 ‘왜 이렇게 비싸?’라는 소리가 먼저 나왔을 텐데 일본 업체는 제안서를 보고 별말이 없었습니다. ‘원가가 저 정도이니 여기에 우리가 얼마의 마진을 받아 최종 제안하면 되겠네’라는 식이었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우리 역시 중간업체가 얼마의 마진을 챙기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 프로그램이 제값을 받으면 그뿐이니까요.”
—우리와 다르군요.
“우리는 이런 것 저런 것 떼고 맨 마지막에 우리 같은 업체의 몫이 나오는데, 일본은 우리 것에서 출발해서 거기에 마진 붙여서 높여 가는 식이더라고요.”
소프트웨어業을 보는 차이
미국에 있는 큰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한국 회사로 이직한 S 전무의 얘기는 이렇다.
“미국에서 소프트웨어 사용계약서를 보내면 한국 법무팀에서 검토해서 피드백이 옵니다. 서로 이견이 있으면 조율해서 ‘소프트웨어 라이선스계약(Software Licence Agreement)’을 쓰고 납품합니다. 미국 회사들은 당연히 자사 제품에 대한 사용권을 판매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 보고 놀랐습니다.”
—한국 회사들이 사용권과 저작권을 함께 요구하는 경우가 많아서인가요.
“국내에서는 소프트웨어 사용권과 소유권 모두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미국과 판이하게 다른 점입니다.”
—둘 다 양도하면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산출물에 대한 소유권을 A 개발업체와 B 사용업자가 나눠 가져서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고 칩시다. B 사용업체가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고 발전시키고 싶어도, 매번 A사와 협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힘듭니다. 소프트웨어사는 그 회사대로, 고객도 그대로 클 수 없습니다. 소프트웨어의 산출물을 돈을 지불하는 회사에서 갖겠다는 것은 상대방 비즈니스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겁니다. 소프트웨어를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 다릅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미국에서는 소프트웨어의 가치(VALUE)를 인식합니다. 가령 1년에 1조원을 남기는 회사라면 적어도 우리 회사의 소프트웨어가 1000억원 값어치를 했다고 쳐 줍니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가지고 미국 업체를 만나면 ‘이걸로 어떻게 돈을 벌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소프트웨어를 보고 ‘어, 이거 국내에 어디 카피할 곳 없나?’라고 나옵니다. 그러고는 국내 업자를 불러서 ‘이거 대충 비슷하게 만드는 데 얼마나 걸릴까?’라고 묻습니다. 소프트웨어 사업을 보는 시각이 판이하게 다릅니다. 지적재산권을 건설의 노가다판처럼 보는 순간에 답이 안 나오는 겁니다.”
또 다른 업체 관계자의 얘기도 비슷했다.
“스티브 잡스가 우리나라에 오면 월 3000만원짜리로 전락할 겁니다. 그 사람이 추구하는 무형의 가치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제조업의 시각으로 소프트웨어를 본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
“제조업만 돼도 좋습니다. 건설업은 그래도 공사기간이 늦어지면 그에 투입되는 인건비를 추가로 주는데 우리는 전부 우리 책임입니다. 건설은 설계가 변경되면 돈을 더 주는데 우리는 설계가 변경돼도 돈을 못 받습니다. 건설에서 안 좋은 것들만 모아서 잣대를 들이댄 것이 소프트웨어 업계의 현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로 창조경제가 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