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聖煥
⊙ 1956년 대구 출생.
⊙ 고려大 경제학과 졸업, 美 펜실베이니아大 경제학 석·박사.
⊙ 한국은행 조사부·워싱턴사무소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역임,
現 고려大 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 저서: <얼굴 없는 대통령> <직장인을 위한 생존경제학>.
⊙ 1956년 대구 출생.
⊙ 고려大 경제학과 졸업, 美 펜실베이니아大 경제학 석·박사.
⊙ 한국은행 조사부·워싱턴사무소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역임,
現 고려大 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 저서: <얼굴 없는 대통령> <직장인을 위한 생존경제학>.
“첫째, 아이디어를 낸다. 둘째, 회사를 세운다. 셋째, 회사를 판다.”
미국에서 부자가 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이 우리나라로 건너오면 어떻게 변할까. 두 번째까지는 같지만 마지막이 다음과 같이 바뀌지 않을까.
“셋째, 회사를 물려준다.”
이는 곧 미국의 경우 自手成家(자수성가)형 부자가 많은 반면 한국은 相續(상속)형 부자가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가 미국 내 400대 부자를 발표하기 시작한 해는 1982년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자수성가형과 상속형이 각각 212명과 188명으로 거의 절반씩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자수성가형이 70%로 늘어난 반면 상속형 부자는 30%로 줄어들었다. 상속형 부자의 경우 여러 명의 자손에게 지분이 넘어가면서 큰 부자 대열에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억만장자 10명 중 3명 정도가 상속에 의한 부자라면 적지 않은 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미국의 경우에도 1800년대 중반을 전후한 산업자본 초기만 해도 창업이나 부동산 투자를 통해 부자가 된 사람들은 자손들에게 富(부)를 상속하는 것이 인생의 최대 목표였다.
당시에 나온 소설들을 읽어보면 그들도 어떻게 자식들에게 기업 등 재산을 잘 넘겨주느냐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후 미국의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가는 동시에 貧富(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란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라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1870년대 후반 미국 석유시장의 95%를 독점하면서 미국 경제를 주무르던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온갖 편법을 써서 석유사업의 동맥인 철도를 장악하는 것은 물론 뇌물과 리베이트로 경쟁자를 물리쳤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록펠러가 얼마나 善行(선행)을 하든 그 부를 쌓기 위해 저지른 惡行(악행)을 갚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인들은 그에게 ‘우리 시대에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록펠러는 말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神(신)에게서 돈을 버는 재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면서 외아들 록펠러 2세가 자선사업가로 설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했다. 그는 사업에서 손을 뗀 후에는 평소대로 검소하고 신앙심 깊은 농부로 살다가 죽었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 (카네기)
록펠러는 죽기 전에 ‘위대한 기부자’라는 말을 듣기 시작하면서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와 함께 존경받는 부자 패밀리의 선구자가 되었다.
카네기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평소 소신대로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했고 은퇴 후에는 자선사업에 헌신했다.
당시 최대의 부자였던 카네기와 록펠러가 경쟁적으로 자선사업에 나선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행운이었다. 무엇보다 큰 부자가 큰 자선사업을 할 수 있다는 좋은 先例(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미국이 弱肉强食(약육강식)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도 부자들에 대한 반감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이들과 같은 존경받는 부자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내일도 그냥 평범한 하루일 뿐이야(It’s just another day).”
난데없이 웬 폴 매카트니의 노래가사냐 하겠지만, 이는 워런 버핏이 2006년 6월 재산의 85%(310억 달러)를 기부하기로 발표하기 전날 기분이 어떠냐고 물은 데 대한 대답이었다. 버핏이 세 자녀와 두 손자, 빌 게이츠 부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타임>과 <포천> 출신의 두 기자(피터 번스타인, 애널린 스완)가 <포브스>의 400대 부자들을 25년간 추적해서 쓴 <리치>(The Rich)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버핏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재단을 따로 만들지 않고 기부금의 70% 정도를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절친한 친구이자 부자 순위 1, 2위를 다투던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는 그 열흘 전 2008년이 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게이츠 재단을 운영하는 데 전념하겠다고 발표했고, 그는 이 약속을 지켰다.
사람들은 게이츠와 버핏의 기부와 헌신을 ‘부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라는 찬사로 답했다. 카네기와 록펠러가 만든 부자의 전통을 게이츠와 버핏이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기부대열에 참여하는 미국의 부자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쉽지 않다. 고든 무어, 조지 소로스, 엘리 브로드, 월튼 가문, 알프레드 만, 허버트 샌들러, 테드 터너, 마이클 델 등은 2006년 현재 10억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10억 달러면 1조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돈이다. 이들 대다수는 특히 빈손으로 무덤에 들어가기로 약속했다. 보스턴대학의 자선사업연구소가 2005년에 재산이 3000만 달러 이상인 부자 9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중 65%가 죽기 전에 전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할 생각이라고 밝히고 있다. 바로 이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미국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부자의 95%는 자수성가형
이쯤에서 우리나라 부자들에게 화살(?)을 돌려보자. 우리나라에서 ‘부자’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를까?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모르긴 해도 그렇게 그렇게 벌었거나 물려받았겠지. 아마도 상속세도 제대로 내지 않았을거야. 미국에서는 부자들이 오히려 상속세율을 올려야 한다는 청원을 내기도 한다는데 말이야. 임금을 착취하거나 부동산 투기나 일삼는 반면 기부에는 인색하니까 욕을 먹어도 싼 사람들이지.”
우리나라는 상속형 부자가 많을 것이라는 인식이 높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일까?
부자에 대한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통상 메릴린치자산운용과 컨설팅회사 캡제미니가 매년 공동으로 발표하는 ‘세계 부자보고서’에서 부동산과 자동차 등의 자산을 제외한 순수 금융자산으로 100만 달러 이상을 소유한 사람을 부자로 보고 있다.
이에 속하는 부자가 우리나라는 작년에 12만4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금융자산만 100만 달러(약 10억원) 이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부동산 등을 포함하면 적어도 30억~50억원 이상을 가지고 있는 부자라고 할 수 있다.
부자학연구학회 회장인 韓東哲(한동철) 서울여대 교수는 이들 12만여 명 중 상속형 부자는 5% 미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머지 95%는 자수성가형 부자들이다. 자수성가형 부자를 자영업자형(60%)과 전문직 종사자 또는 벤처사업가를 의미하는 전문가형(35%)으로 세분하기도 하지만 둘 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해 부자가 됐다는 점에서 자수성가형으로 합쳐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한동철 교수에 따르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경우 400대 부자와 같은 큰 부자들은 상속형이 30% 정도 되지만 금융자산 100만 달러 이상의 부자(246만명)를 기준으로 할 경우 미국의 상속형 부자는 10% 정도이고, 자수성가형 부자가 90%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이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상속형 부자가 더 많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웬만한 부자들은 대부분 자수성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07년 12월 주요 언론들이 ‘구두쇠와 기부자는 유전자가 다르다’라는 재미있는 연구결과를 보도했다. 이스라엘 히부르 대학의 심리학과 연구팀이 성인남녀 203명에게 각각 12달러씩을 주면서 그 돈을 원하는 대로 사용하라고 기회를 줬다. 단 실험 대상자들에게 주어진 선택모드는 ‘받은 돈을 모두 자신이 가지거나 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남에게 기부하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이들의 선택 결과와 미리 채취한 실험 대상자의 DNA 샘플을 비교해 보았다. 그랬더니 ‘AVPR1a’라는 유전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기부행태가 크게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일종의 단백질 유전자인 ‘AVPR1a’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50% 이상 많은 돈을 기부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부자 유전자’는 따로 있다?
연구팀은 “이번 실험이 DNA의 특정 유전자와 기부와 같은 利他的(이타적) 행동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입증하는 최초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마치 명랑하거나 낙천적인 성격이 유전되는 것처럼 기부 또는 자선활동과 같은 행동도 대를 이어 유전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AVPR1a’라는 기부 유전자가 많은 인종인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AVPR1a’라는 기부 유전자가 적은 인종인가?
물론 현재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부 유전자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자선관련 연구로 유명한 뉴욕대학의 클래어 가우디아니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나라로 손색이 없다. 미국인들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부금액의 비중이 1.8%(이하 2006년 기준)에 달해 두 번째로 높은 영국의 0.7%에 비해서도 두 배 이상 높다. 세 번째인 프랑스가 0.14%이고 그 뒤를 잇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싱가포르, 터키, 독일 등의 기부금액 비중은 0.1%를 넘지 못한다. 관련 통계가 없지만 우리나라 역시 0.1%를 넘지 못할 것이다.
미국은 비중이 높기도 하지만 절대금액에서는 전 세계 기부금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다. 2006년 한 해 동안 미국인들이 기부한 금액은 2920억 달러로 2006년 우리나라 GDP(8874억 달러)의 30%를 넘는 엄청난 규모다.
자산이 100만 달러 이상인 부자들의 기부 참여율이 98%에 달하는 등 개인의 비중이 83.6%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업의 기부액 비중은 4.8%에 불과하고 나머지 11.6%는 재단으로부터의 기부금이다. 또 총 기부액의 70% 이상이 연봉 3만 달러 이하의 평범한 사람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오고 있다니까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 가릴 것 없이 미국인 거의 모두가 기부에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의 비중은 15.8%에 불과하고 기업의 비중이 67.5%로 절대적이다. 나머지는 사회 및 종교재단이 12.2%, 공공기관이 4.5%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 평균을 보면 미국은 1인당 연간 기부액이 800~1000달러(2007년 기준 약 80만~100만원) 정도인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5만7900원(아름다운 재단, 2004년 20세 이상 대상)으로, 국민소득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우리나라 개인들의 기부액이 미국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일반 국민들은 물론 부자들이 인색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다. 지금 인색하다는 것은 거꾸로 앞으로 기부 여력이 무한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록펠러보다 60년 앞선 임상옥
우리나라도 얼마든지 존경받는 부자를 찾을 수 있다. 10대 300년을 이어온 경주 최부잣집 외에도 전남 구례의 문화 류씨, 전남 해남의 해남 윤씨 등 수대를 이어 자선과 적선으로 유명한 양반가들이 적지 않다. 이들에 대한 관심과 기록, 홍보(?)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다.
정직과 신의로 돈을 벌어 가난을 구제한 巨商(거상) 임상옥. 1770년대 후반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0대 초반에 조선의 인삼독점권을 따내면서 당대의 거부로 올라섰다. 홍경래의 난(1811년) 때는 방수장으로 의주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고, 자신의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 공로를 인정받아 곽산군수를 거쳐 구성부사로 임명됐다.
班常(반상)의 구분이 확실하던 시대에 상인출신이라는 낮은 신분에서 정3품(또는 종3품)의 관직에까지 오를 정도였으니 그가 빈민구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재산을 내놓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임상옥이 단 한 차례 나온다. 헌종1년(1835년) 비변사에서 “비천한 상인을 2년 만에 더 높은 관직에 임명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주청하자 왕이 윤허했다는 것이다.
임상옥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그가 지었다는 <가포집>과 <적중일기>도 전해지지 않아서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지만, 임상옥은 이때 왕과 양반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에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다. 결국 59세 되던 해인 1837년에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이후 77세로 죽을 때까지 빈민구제와 詩(시)로 여생을 보냈다.
1837년이면 미국의 카네기와 록펠러가 기부와 자선사업에 나서기 50~60년 전의 일이다. 조선 최대의 부자가 미국 최대의 부자보다 먼저 은퇴 후 거의 모든 재산으로 자선사업에 나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외에도 임상옥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제주의 빈민을 구제한 김만덕, 일제시대 때 평양의 여성 기부왕 백선행, 원칙과 사회를 위해 살다간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등이 임상옥의 맥을 잇는 존경받는 부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처럼 기부가 사회의 한 흐름이자 문화로 자리 잡게 되면 어려서부터 기부를 받고 기부를 하는 환경에서 자라날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기부와 봉사가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특히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 기부이고 또 선행이라면 없던 유전자도 생겨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시대와 6·25전쟁을 겪으면서 또 농업사회에서 산업자본주의사회로 급격하게 바뀌면서 기부와 적선의 아름다운 전통이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경우 18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시작됐다고 보면 카네기와 록펠러가 기부와 사회공헌에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 최소한 100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우리나라의 자본주의가 시작된 것을 6·25전쟁 이후로 보더라도 아직 50여 년에 불과하다.
성장을 빨리 한 만큼 기부 문화도 좀 더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들어 기업과 개인 차원에서 기부와 사회공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자의든 타의든 기부와 사회공헌이 이뤄지고 있다.
벌써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교보생명과 대한전선은 1000억원 이상의 상속세를 신고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상속세 기록을 세웠다. 부자들도 부자들이지만 김밥 할머니, 식당 할머니들도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 최경주와 박찬호, 김장훈 등 스포츠스타와 연예인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부자들과 가진 자들을 부정적 시각만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아름다운 선택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물론 기부여건을 만들어 주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미국에서 부자가 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이 우리나라로 건너오면 어떻게 변할까. 두 번째까지는 같지만 마지막이 다음과 같이 바뀌지 않을까.
“셋째, 회사를 물려준다.”
이는 곧 미국의 경우 自手成家(자수성가)형 부자가 많은 반면 한국은 相續(상속)형 부자가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가 미국 내 400대 부자를 발표하기 시작한 해는 1982년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자수성가형과 상속형이 각각 212명과 188명으로 거의 절반씩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자수성가형이 70%로 늘어난 반면 상속형 부자는 30%로 줄어들었다. 상속형 부자의 경우 여러 명의 자손에게 지분이 넘어가면서 큰 부자 대열에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억만장자 10명 중 3명 정도가 상속에 의한 부자라면 적지 않은 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미국의 경우에도 1800년대 중반을 전후한 산업자본 초기만 해도 창업이나 부동산 투자를 통해 부자가 된 사람들은 자손들에게 富(부)를 상속하는 것이 인생의 최대 목표였다.
당시에 나온 소설들을 읽어보면 그들도 어떻게 자식들에게 기업 등 재산을 잘 넘겨주느냐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후 미국의 소득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가는 동시에 貧富(빈부) 격차가 커지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란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라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1870년대 후반 미국 석유시장의 95%를 독점하면서 미국 경제를 주무르던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온갖 편법을 써서 석유사업의 동맥인 철도를 장악하는 것은 물론 뇌물과 리베이트로 경쟁자를 물리쳤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록펠러가 얼마나 善行(선행)을 하든 그 부를 쌓기 위해 저지른 惡行(악행)을 갚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미국인들은 그에게 ‘우리 시대에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록펠러는 말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막대한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神(신)에게서 돈을 버는 재능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주위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한다”면서 외아들 록펠러 2세가 자선사업가로 설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했다. 그는 사업에서 손을 뗀 후에는 평소대로 검소하고 신앙심 깊은 농부로 살다가 죽었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 (카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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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드루 카네기. |
카네기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평소 소신대로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했고 은퇴 후에는 자선사업에 헌신했다.
당시 최대의 부자였던 카네기와 록펠러가 경쟁적으로 자선사업에 나선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행운이었다. 무엇보다 큰 부자가 큰 자선사업을 할 수 있다는 좋은 先例(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미국이 弱肉强食(약육강식)이라는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도 부자들에 대한 반감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도 이들과 같은 존경받는 부자가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내일도 그냥 평범한 하루일 뿐이야(It’s just another day).”
난데없이 웬 폴 매카트니의 노래가사냐 하겠지만, 이는 워런 버핏이 2006년 6월 재산의 85%(310억 달러)를 기부하기로 발표하기 전날 기분이 어떠냐고 물은 데 대한 대답이었다. 버핏이 세 자녀와 두 손자, 빌 게이츠 부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타임>과 <포천> 출신의 두 기자(피터 번스타인, 애널린 스완)가 <포브스>의 400대 부자들을 25년간 추적해서 쓴 <리치>(The Rich)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버핏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재단을 따로 만들지 않고 기부금의 70% 정도를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절친한 친구이자 부자 순위 1, 2위를 다투던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는 그 열흘 전 2008년이 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게이츠 재단을 운영하는 데 전념하겠다고 발표했고, 그는 이 약속을 지켰다.
사람들은 게이츠와 버핏의 기부와 헌신을 ‘부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행동’이라는 찬사로 답했다. 카네기와 록펠러가 만든 부자의 전통을 게이츠와 버핏이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기부대열에 참여하는 미국의 부자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쉽지 않다. 고든 무어, 조지 소로스, 엘리 브로드, 월튼 가문, 알프레드 만, 허버트 샌들러, 테드 터너, 마이클 델 등은 2006년 현재 10억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10억 달러면 1조원이 넘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돈이다. 이들 대다수는 특히 빈손으로 무덤에 들어가기로 약속했다. 보스턴대학의 자선사업연구소가 2005년에 재산이 3000만 달러 이상인 부자 9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 중 65%가 죽기 전에 전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할 생각이라고 밝히고 있다. 바로 이들이 결코 평범하지 않은 미국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 부자의 95%는 자수성가형
이쯤에서 우리나라 부자들에게 화살(?)을 돌려보자. 우리나라에서 ‘부자’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를까?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모르긴 해도 그렇게 그렇게 벌었거나 물려받았겠지. 아마도 상속세도 제대로 내지 않았을거야. 미국에서는 부자들이 오히려 상속세율을 올려야 한다는 청원을 내기도 한다는데 말이야. 임금을 착취하거나 부동산 투기나 일삼는 반면 기부에는 인색하니까 욕을 먹어도 싼 사람들이지.”
우리나라는 상속형 부자가 많을 것이라는 인식이 높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일까?
부자에 대한 정의가 사람마다 다르지만 통상 메릴린치자산운용과 컨설팅회사 캡제미니가 매년 공동으로 발표하는 ‘세계 부자보고서’에서 부동산과 자동차 등의 자산을 제외한 순수 금융자산으로 100만 달러 이상을 소유한 사람을 부자로 보고 있다.
이에 속하는 부자가 우리나라는 작년에 12만4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금융자산만 100만 달러(약 10억원) 이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부동산 등을 포함하면 적어도 30억~50억원 이상을 가지고 있는 부자라고 할 수 있다.
부자학연구학회 회장인 韓東哲(한동철) 서울여대 교수는 이들 12만여 명 중 상속형 부자는 5% 미만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머지 95%는 자수성가형 부자들이다. 자수성가형 부자를 자영업자형(60%)과 전문직 종사자 또는 벤처사업가를 의미하는 전문가형(35%)으로 세분하기도 하지만 둘 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해 부자가 됐다는 점에서 자수성가형으로 합쳐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한동철 교수에 따르면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의 경우 400대 부자와 같은 큰 부자들은 상속형이 30% 정도 되지만 금융자산 100만 달러 이상의 부자(246만명)를 기준으로 할 경우 미국의 상속형 부자는 10% 정도이고, 자수성가형 부자가 90%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이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상속형 부자가 더 많다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웬만한 부자들은 대부분 자수성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07년 12월 주요 언론들이 ‘구두쇠와 기부자는 유전자가 다르다’라는 재미있는 연구결과를 보도했다. 이스라엘 히부르 대학의 심리학과 연구팀이 성인남녀 203명에게 각각 12달러씩을 주면서 그 돈을 원하는 대로 사용하라고 기회를 줬다. 단 실험 대상자들에게 주어진 선택모드는 ‘받은 돈을 모두 자신이 가지거나 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남에게 기부하는 것’이었다.
연구팀은 이들의 선택 결과와 미리 채취한 실험 대상자의 DNA 샘플을 비교해 보았다. 그랬더니 ‘AVPR1a’라는 유전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기부행태가 크게 달라지는 것을 발견했다. 일종의 단백질 유전자인 ‘AVPR1a’를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50% 이상 많은 돈을 기부한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부자 유전자’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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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런 버핏(왼쪽)과 빌 게이츠. |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AVPR1a’라는 기부 유전자가 많은 인종인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AVPR1a’라는 기부 유전자가 적은 인종인가?
물론 현재의 상황으로만 본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부 유전자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자선관련 연구로 유명한 뉴욕대학의 클래어 가우디아니 교수에 따르면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하는 나라로 손색이 없다. 미국인들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부금액의 비중이 1.8%(이하 2006년 기준)에 달해 두 번째로 높은 영국의 0.7%에 비해서도 두 배 이상 높다. 세 번째인 프랑스가 0.14%이고 그 뒤를 잇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싱가포르, 터키, 독일 등의 기부금액 비중은 0.1%를 넘지 못한다. 관련 통계가 없지만 우리나라 역시 0.1%를 넘지 못할 것이다.
미국은 비중이 높기도 하지만 절대금액에서는 전 세계 기부금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다. 2006년 한 해 동안 미국인들이 기부한 금액은 2920억 달러로 2006년 우리나라 GDP(8874억 달러)의 30%를 넘는 엄청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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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8월 28일 충남대 ‘정심화국제문화회관’에서 50억원을 기부한 김밥할머니 고 이복순씨의 흉상 제막식이 거행되고 있다. |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개인의 비중은 15.8%에 불과하고 기업의 비중이 67.5%로 절대적이다. 나머지는 사회 및 종교재단이 12.2%, 공공기관이 4.5%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 평균을 보면 미국은 1인당 연간 기부액이 800~1000달러(2007년 기준 약 80만~100만원) 정도인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5만7900원(아름다운 재단, 2004년 20세 이상 대상)으로, 국민소득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우리나라 개인들의 기부액이 미국에 크게 못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일반 국민들은 물론 부자들이 인색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크게 실망할 일은 아니다. 지금 인색하다는 것은 거꾸로 앞으로 기부 여력이 무한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록펠러보다 60년 앞선 임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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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년간 50억원 넘게 기부한 김장훈. |
정직과 신의로 돈을 벌어 가난을 구제한 巨商(거상) 임상옥. 1770년대 후반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0대 초반에 조선의 인삼독점권을 따내면서 당대의 거부로 올라섰다. 홍경래의 난(1811년) 때는 방수장으로 의주성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고, 자신의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 공로를 인정받아 곽산군수를 거쳐 구성부사로 임명됐다.
班常(반상)의 구분이 확실하던 시대에 상인출신이라는 낮은 신분에서 정3품(또는 종3품)의 관직에까지 오를 정도였으니 그가 빈민구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재산을 내놓았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임상옥이 단 한 차례 나온다. 헌종1년(1835년) 비변사에서 “비천한 상인을 2년 만에 더 높은 관직에 임명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주청하자 왕이 윤허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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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박찬호 장학회를 설립하여 야구 꿈나무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박찬호. |
1837년이면 미국의 카네기와 록펠러가 기부와 자선사업에 나서기 50~60년 전의 일이다. 조선 최대의 부자가 미국 최대의 부자보다 먼저 은퇴 후 거의 모든 재산으로 자선사업에 나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외에도 임상옥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제주의 빈민을 구제한 김만덕, 일제시대 때 평양의 여성 기부왕 백선행, 원칙과 사회를 위해 살다간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등이 임상옥의 맥을 잇는 존경받는 부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처럼 기부가 사회의 한 흐름이자 문화로 자리 잡게 되면 어려서부터 기부를 받고 기부를 하는 환경에서 자라날 것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기부와 봉사가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것이다. 특히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것이 기부이고 또 선행이라면 없던 유전자도 생겨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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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주 재단’을 통해 지역아동센터지원과 장학사업을 하는 최경주. |
미국의 경우 18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시작됐다고 보면 카네기와 록펠러가 기부와 사회공헌에 적극적으로 나서기까지 최소한 100년의 세월을 필요로 했다. 우리나라의 자본주의가 시작된 것을 6·25전쟁 이후로 보더라도 아직 50여 년에 불과하다.
성장을 빨리 한 만큼 기부 문화도 좀 더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최근 들어 기업과 개인 차원에서 기부와 사회공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자의든 타의든 기부와 사회공헌이 이뤄지고 있다.
벌써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교보생명과 대한전선은 1000억원 이상의 상속세를 신고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상속세 기록을 세웠다. 부자들도 부자들이지만 김밥 할머니, 식당 할머니들도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 최경주와 박찬호, 김장훈 등 스포츠스타와 연예인들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부자들과 가진 자들을 부정적 시각만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는 아름다운 선택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물론 기부여건을 만들어 주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