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금융위기 때 국제금융가에서는 한국의 ‘은행위주 금융’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니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기업 부채비율을 200% 밑으로 낮추기 위해 보유자산을 외국에 헐값에 팔게 만들었다. 그런데 국제금융기관들은 자본금의 두 배 정도가 아니라 백배, 천배가 넘는 부채를 활용해 투자하다 지금의 금융위기를 불러왔다. 자신들이 지키지 않고 믿지도 않는 것들을 왜 남에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강요했을까.
申璋燮 싱가포르 국립大 교수
⊙ 1962년 서울 출생.
⊙ 서울大 경제학과, 영국 케임브리지大 경제학 석·박사.
⊙ 매일경제신문 경제부 차장, 논설위원, 姜萬洙 전 기획재정부 장관 자문관 역임.
⊙ 저서: <한국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라> 〈The Economics of the Latecomers〉
〈Restructuring Korea Inc.〉 <삼성반도체 세계일등 비결의 해부> 외 다수.
⊙ 수상: 싱가포르 중앙은행(MAS) 주최 경제논문 현상모집 최우수상(2003)-‘소요함의 동학, 국궁’.
申璋燮 싱가포르 국립大 교수
⊙ 1962년 서울 출생.
⊙ 서울大 경제학과, 영국 케임브리지大 경제학 석·박사.
⊙ 매일경제신문 경제부 차장, 논설위원, 姜萬洙 전 기획재정부 장관 자문관 역임.
⊙ 저서: <한국경제, 패러다임을 바꿔라> 〈The Economics of the Latecomers〉
〈Restructuring Korea Inc.〉 <삼성반도체 세계일등 비결의 해부> 외 다수.
⊙ 수상: 싱가포르 중앙은행(MAS) 주최 경제논문 현상모집 최우수상(2003)-‘소요함의 동학, 국궁’.
- 2008년 9월 29일 美 하원이 7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법안을 놓고 투표를 하는 동안, 뉴욕증권거래소 앞에 모인 시민들이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번 금융위기는 미국 중심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세계경제는 지금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라는 위기에 빠져 있다. 한국경제는 위기를 더 심하게 겪고 있다. 많은 나라들이 경기침체에만 빠지고 있는 반면, 한국은 일부 신흥국들과 더불어 경기침체와 외환위기를 동시에 당하는 그룹에 들어가 있다. 주가 하락률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원화가치 하락률은 거의 꼴찌 수준이다.
10여 년 전 금융위기를 겪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상 가장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경제는 왜 이렇게 금융위기에 취약한가? 말로는 ‘성공적 구조조정’이었지만 실제로는 ‘실패한 구조조정’이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전의 경제 패러다임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꿨는데, 이것이 문제투성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성적표를 살펴보자. 경제성장률이 반 토막 났다. 1997년 이전에는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7.5%였는데 그 후 4%대로 추락, 세계 평균수준에 불과하다. 세계에서 손꼽히던 ‘우등생’이 ‘보통 학생’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동안 투자는 극도로 부진했다. 그나마 4%대 성장도 금융위기 전에 ‘과잉투자’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투자를 많이 해놓았던 덕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성장률이 떨어지고 투자가 위축되더라도 ‘개혁론자’들은 구조조정을 통해 금융안정성이 강화된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지금 세계 경제위기가 벌어지고 보니 금융안정성마저도 허구였다는 것이 판명났다. 이번 금융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그 이후 한국경제를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지는 IMF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 잘못론’과 ‘쟤들 잘못론’
IMF 식 구조조정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 재정·금융·기업 부문의 건전성 등 ‘펀더멘털’을 강화해 놓으면 국가경제에 대한 신인도가 올라가고, 이에 따라 자금이 몰려든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IMF 패러다임에서의 핵심 주체는 외국인 투자자들이다.
전 세계에 돈이 널려 있으니 한국경제를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기에 매력적으로 만들어 놓으면 경제가 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위기도 돈 빼내가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렇게 만드는 금융 위기국이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IMF 프로그램은 100% ‘우리 잘못론’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
한국은 여기서 더 나아가 ‘120% 우리 잘못론’을 받아들여 ‘IMF 플러스’를 실행했다. IMF야 원래부터 표준화된 처방을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 아무 나라에 가서나 사용하니까 논외로 치더라도, 당시 국내에서는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던 지식인이건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던 지식인이건 개혁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금융위기를 당한 것은 한국이 무슨 큰 죄를 지어서 벌어진 일이고, 따라서 뼈아프게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는 분위기가 한국사회를 지배했다. 금융위기가 ‘위장된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라면서 드디어 제대로 된 개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필자는 1997년 금융위기도 따지고 보면 한국이 잘못한 것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번 금융위기를 보자. 여기에는 ‘우리 잘못론’을 적용할 여지가 없다. 100% ‘쟤들 잘못론’을 적용해야 한다. ‘서브프라임’은 미국에서 수입이 제대로 없는 사람들에게 빌려준 모기지다. 당연히 떼일 염려가 많고 이자율은 높은 ‘고위험 고수익’ 상품이다.
그런데 세계에서 잘나간다는 금융기관들이 이것을 이리저리 섞어서 ‘저위험 고수익’ 파생상품으로 둔갑시켜 팔았다. 이런 연금술이 일어날 수 있도록 패니 메이, 프데디 맥과 같은 정부 산하기업들이 보증을 해줬고, 무디스와 같은 국제 신용평가기관들도 트리플A(AAA)라는 최고 신용등급을 줬다.
그러다 이 금융상품들이 핵폭탄처럼 터졌다. 뒷수습을 하려니 현찰이 많이 필요하게 됐고, 미국이나 서유럽 금융기관들은 ‘디레버리징(차입축소)’을 하면서 전 세계의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돼 버렸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시장에서만 1년 사이에 60조원을 넘게 빼내갔다. 외환보유액의 4분의 1이나 되는 돈이다. 덕분에 주가가 떨어지고 원화가치도 폭락했다.
IMF 처방이 한국에 맞는 것이었을까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경제가 아무리 좋은 펀더멘털을 갖고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려 해도 돈이 들어오지 않는다. ‘쟤들’이 다급해서 손절매까지 하면서 나가는데 이를 되돌릴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이번 금융위기는 ‘우리 잘못론’에 입각해서 만들어놓은 패러다임이 ‘쟤들 잘못’으로 돈을 빼내갈 때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세계경제는 ‘우리 잘못’이건 ‘쟤들 잘못’이건 간에 금융위기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지뢰밭이라고 봐야 한다. 누구 잘못으로 위기가 벌어지건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금융위기라는 지뢰가 항상 ‘우리 잘못’ 때문에 터진다고 생각하고 경제 패러다임을 가져가는 것은 아둔하다. ‘쟤들 잘못’으로 위기가 벌어질 경우에도 돈 빠져나가고 원화가치 폭락하는 것을 ‘우리 잘못’으로 생각하고 ‘구조조정’ 드라이브를 걸면서 돈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도하거나 애걸하겠다는 얘기다.
IMF 패러다임은 갑자기 외환위기를 당하고 급전이 필요할 때 한국에 좋은 것인지 제대로 검토할 겨를도 없이 받아들인 시스템이다. IMF 돈도 8년 전에 이미 다 갚았고, 이번에 ‘쟤들 잘못’으로 큰 피해까지 당했는데, 한국경제 입장에서 어떤 패러다임을 다시 만들어야 할지 주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이 통화 헤게모니를 갖고 있지 않는 중진국이라는 사실이다. 이 좌표에서 시작해야 한다. 통화 헤게모니를 가진 미국이나 서유럽국들은 금융위기가 벌어지면 自國(자국) 통화를 찍어내서 해결할 수 있다. 통화가치 유지를 위한 다양한 군사외교 능력 및 상징조작 능력 등도 구축해왔다. 내수시장도 크다. 그래서 자본이 자유로이 움직이고 환율이 ‘시장’에 의해 결정되더라도 금융위기로 인한 충격이 상대적으로 작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없다. 그렇다면 내실을 다지는 한편, 급격한 자금 유출·입과 환투기가 경제를 뒤흔드는 것을 막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 ‘펀더멘털론’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환율제도를 복수통화환율제, 즉 ‘바스킷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한국은 처음에 고정환율제를 택하다가 1980년대 후반 미국으로부터 ‘환율 조작국’이라는 비난을 받은 뒤 바스켓 방식으로 바꿨다. 그리고 IMF 이후에는 자유변동환율제로 이행했다. 지금 세계에서는 마치 자유변동환율제가 글로벌 스탠더드처럼 돼 있다. 시장에서 환율이 아무리 널뛰는 것 같아도 결국 펀더멘털에 따라 환율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개입해봤자 시장만 왜곡시키고 부작용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계 외환시장의 실상은 이런 펀더멘털론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2007년 세계 외환거래량은 연간 800조 달러가 넘는다. 반면 세계 상품교역량은 12조 달러가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서비스 교역까지 합쳐봤자 외환거래액의 3% 이내만이 실물과 연결되어 있다. 나머지 97% 이상은 단기차익 거래다. 펀더멘털론이 맞으려면 실물과 관계된 3%가 나머지 97%를 결정해야 한다.
외환을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 오히려 단기차익 때문에 오가는 97%가 시장환율을 결정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금융시장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된 정책을 취하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통상 ‘몸통’이라고 생각하는 것(펀더멘털)이 실제로는 꼬리이고, ‘꼬리’라고 생각하는 것(투기적 거래)이 몸통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환율이 실물경제의 필요에 맞춰 결정되는 것이 비정상이고 실물경제가 투기적 외환거래의 영향을 받는 것이 정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경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몸통이 경제를 지나치게 흔들지 못하도록 규제를 도입하는 수밖에 없다. 바스켓 방식은 주요 교역상대국 통화가치 변화라는 ‘몸통’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한국경제의 필요성이라는 ‘꼬리’를 지키기 위해 정부가 개입할 여지를 넓히는 제도다.
물론 규제에 따른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어느 제도건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부작용을 걱정하기보다 한국경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현실성 있는 대안을 찾고 부작용을 다스려야 한다.
실제로 외환시장을 시장에 완전히 자유롭게 맡겨 놓고 잘되는 나라는 많지 않다.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아시아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장경제라고 하는데, 외환시장은 그렇지 않다. 홍콩은 홍콩 달러가치를 미국 달러에 고정시켜놓고 있다. 싱가포르는 환투기꾼들의 천국이지만 싱가포르 달러에 대해서만은 투기를 금지하고 있다. 실제 가용 외환보유액을 ‘국가기밀’로 밝히지 않는다. 또 바스켓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렇게 3박자가 결합되니까 정부가 환율을 필요에 따라 결정하는 능력이 생긴다. 중국도 ‘바스켓 방식’을 택하고 자본통제를 하고 있으니까 외환위기를 겪지 않는다.
환율이 불안하면 투기꾼들의 돈 벌 기회는 많아질지 몰라도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엉클어진다. 환율이 갑자기 큰 폭으로 변동하는데 그 속도에 맞춰 재빠르게 구조조정할 수 있는 기업들은 별로 없다.
장기적 안목을 갖고 실물투자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장기무역거래도 어려워진다. 모든 기업들이 ‘환 투기’건 ‘환 헤지’이건 환율 로또 판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키코(KIKO)로 대표되는 통화옵션상품 대규모 손실은 이런 와중에서 벌어진 일이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환율 급변동의 부작용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경제의 장기성장 패러다임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IMF 패러다임은 금융위주다. 과거 경제발전기에는 산업발전을 위해 금융이 희생됐다고 해서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됐다. 산업자본은 ‘사고뭉치’로 취급 받았다. 대신 ‘금융허브’, ‘세계적 투자은행 육성’ 등의 금융산업발전 대책들이 속속 나왔다.
주식시장에 대한 환상이 산업자금 감소 초래
금융산업이 중요해지는 것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대세다. 지금의 세계경제를 ‘펀드 자본주의’라고 하는데 이번 금융위기의 타격이 있더라도 기본 추세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노령사회가 되면서 연·기금이 많이 쌓이고, 사람들이 부자가 되면서 여윳돈이 많이 생기는데 어떻게든 굴려야 한다. 이것과 관련된 금융서비스는 발전할 수밖에 없다. 금융이 차세대 성장산업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금융은 ‘경제의 핏줄’이라는 말처럼 다른 산업이 잘 굴러가게 혈액을 공급해주는 역할도 함께해야 한다. IMF 패러다임에서는 이 부문의 문제가 심각했다. 1997년에 금융기관에서 기업부문으로 공급된 돈은 118조원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연평균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투자부진은 당연한 결과다. 사람도 크려면 피가 잘 공급돼야 하는데 이렇게 혈액공급이 줄어들어서는 경제가 커 나가지 못한다.
산업자금 공급이 줄어든 가장 큰 원인은 주식시장에 대한 환상에 있다. 금융위기 이후 개혁론자들은 한국기업들이 지나치게 은행대출에 의존해서 성장했으니까 위기를 당했고, 앞으로는 주식시장 위주로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행대출이 줄더라도 주식시장을 잘 만들어 놓으면 돈이 공급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애초부터 아무 근거가 없는 생각이었다. 선진국에서조차 역사를 살펴보면 주식시장이 기업부문에 자금을 제대로 공급해준 적이 없다. 오히려 돈을 빼내갔다. 메이어의 연구에 따르면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영국에서는 주식시장의 신규 자금조달 순기여가 -3%였다. 미국은 1%, 캐나다는 3%, 독일 3%, 일본 5%에 불과했다.
앨런과 게일은 1970~1989년 사이에 벤처캐피털 투자를 포함해 선진국들의 신규투자 자금조달 경로를 분석했다. 주식시장을 통해 조달된 자금 비중이 미국 -8.8%, 영국 -10.4%, 독일 0.9%, 일본 3.7%, 프랑스 6%로 나왔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대에 들어 주식시장에서 유상증자 등을 통해 기업 쪽으로 자금이 공급된 것보다 배당, 자사주 취득 등으로 빠져나간 돈이 연평균 1조원 이상 더 많았다.
은행 통해 투자자금 공급해야
주식시장이 산업자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것은 주식투자자들이 대부분 단기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벤처투자에서 보듯 일부 길게 내다보는 투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조차 당장 영업이익은 나지 않는다 해도, 투자 주식의 가치가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에 단기적으로 올라갈 전망이 있을 경우에 더 많이 투자한다.
실제로 주식시장은 투자자금 조달보다 富(부)를 실현시키는 기능이 더 크다. 대부분 기업들은 안정적으로 매출을 늘리고 영업이익을 올린 뒤 주식시장에 상장한다. 투자자 보호를 위해 증권거래소가 이러한 상장기준을 두고 있다. 상장할 수 있을 정도로 영업이 안정된 기업은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절박하지 않다. 오히려 그동안 경영을 잘해서 쌓아 놓은 기업가치를 주식시장을 통해 실현시키려는 목적이 더 크다.
그러면 기업들의 투자자금은 어디에서 공급되는가. 선진국은 기업들이 축적해 놓은 돈이 많으니까 유보금으로 장기투자를 한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중진국에서는 유보금 많은 회사들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은행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동안 기업부문으로 돈이 흐르지 않은 것에 대해 국내에서 지배적인 견해는 株主(주주)들이 투자보다 배당 받는데 신경 썼고, 그래서 기업이 돈을 빌려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삼성전자, 포스코와 같이 유보를 많이 쌓아 놓은 일부 대기업들에나 해당되는 말이다.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들은 유보자금이 별로 없다. 이런 기업들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려면 은행에서 장기성장자금이 공급되어야 한다.
금융위기 이후 최정상에 있는 기업들은 더 빨리 성장했고, 나머지와 격차가 벌어지는 양극화가 진행됐다. 경제에 활력이 있으려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기업들이 많아야 한다. 이들에 대한 산업금융 지원은 은행밖에 담당할 기관이 없다. 은행을 통해 투자자금이 잘 공급되도록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데 장기성장동력 확보의 성패가 달려 있다.
그동안 일반 금융기관들이 산업자본 공급을 등한시하고 있을 때에 그나마 장기산업자본을 공급해주던 곳이 산업은행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것도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산업은행을 투자은행으로 바꾼다는 것은 장기대출을 하는 대신 주식투자를 시키겠다는 얘기다. 주식투자로 산업은행이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기업에 공급되던 장기자금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개방을 해야 선진국 된다?
IMF 패러다임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축은 ‘개방’이다. 한국은 IMF 프로그램에 따라 개방을 대폭 확대했으면서도 각종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개방을 더 강화해서 선진국에 진입하려고 한다. 그러나 ‘개방을 더 해야 선진국이 된다’는 명제는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야 한다.
선진국의 경험을 보자. 지금의 선진국들이 많이 개방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나라들이 개방했기 때문에 선진국이 된 것이 아니라 선진국이 된 다음에 개방했고, 다른 나라에 개방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19세기 후반에 평균 40%가 넘는 고관세를 유지했다. 1930년대 대공황 때에도 관세율을 높이는데 앞장선 나라도 미국이었다. 미국이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것은 2차 세계대전 후 명실공히 헤게모니 국가가 된 다음이었다.
영국도 마찬가지로 산업혁명 이전에는 보호무역을 했고, 산업혁명에 성공해서 경쟁력을 갖춘 다음에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한국경제가 1997년 금융위기를 당했을 때 개방을 대폭 확대한 명목은 그동안 지나치게 ‘폐쇄적’이어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이 명제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한국의 경제기적을 얘기할 때 첫손에 꼽는 것이 ‘수출주도 산업화’다. 中南美(중남미) 국가들이 ‘수입대체산업화’를 해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한국은 수출시장에서 경쟁했으니까 경제기적을 일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출을 많이 하면 수입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자원도 없고 기계산업도 발전하지 못한 나라에서 이것들을 수입해야 가공해서 수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은 경제개발 내내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수입규제라는 것들 중 상당수는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경제가 ‘기적’을 이룬 것은 오히려 개방을 적절히 잘했기 때문이었다.
FTA 진행과정을 보면 개방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것 같다. 한미 FTA를 보자. 한국이 현재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촛불시위까지 겪으면서 간신히 통과시켜 놨는데 미국에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오면서 미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닭’이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정부는 국책기관을 통해 한미 FTA로 국내총생산(GDP)이 중장기적으로 1.99% 늘어난다는 수치를 만들어서 홍보했다. 그러나 모델에서 나온 숫자들은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 가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 것을 통째로 내주는 것은 진정한 개방이 아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미국은 低(저)관세국이다. 이 나라에 들어가는 관세율을 좀 더 낮춘다고 한국 수출품의 경쟁력에 얼마나 득이 될까.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FTA를 추진한다. 그러면 경쟁력 상승효과가 줄어든다. 필자가 만난 기업인들 중에는 관세인하보다 통관절차가 쉬워지는 것을 반기는 분들이 많았다.
닭이 있었다기보다는 기껏해야 병아리나 달걀 정도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한국은 여기에 마치 國運(국운)이 걸려 있는 듯 FTA 드라이브를 너무 강하게 걸었던 것 같다.
수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큰 방향과 거기에 담겨 있는 철학이다. 한미 FTA 추진 세력은 명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외부충격을 통한 내부개혁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다. 한국경제는 아직도 문제가 많으니 외부 강제수단을 통해 더 개방시키고 내부시스템도 더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교통상부에서 “능동적인 시장개방과 자유화를 통해 국가 전반의 시스템을 선진화하고 경제체질을 강화한다”고 내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동안 수많은 개방과 개혁을 해 놓고도 왜 더 많이 시급하게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스스로 하지 못하고 왜 외부 강제수단을 통해서 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은 찾아볼 수 없다.
필자는 가능한 개방된 체제를 갖추고 개방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개방을 통해 보다 많은 자본과 아이디어를 활용할 수 있고, 한국경제가 커나갈 수 있는 시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송두리째 내주는 것이 개방은 아니다. 나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고 개방을 통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 개방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어려운 협상과정의 시작일 뿐이다.
이런 입장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하던 것들을 진지하게 다시 살펴봐야 한다. 세계시장에서 교류하려면 서로 인정하는 교류의 틀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따라야 하는 규범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것이 한국에 실제로 좋은 것인가. 글로벌 스탠더드는 국제교류의 언어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선진국 은행들은 부채비율 200% 지켰나?
지금 국제언어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영어다. 영국이 2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고, 그 후 미국이 반세기 이상 세계를 지배하면서 영어가 국제교류의 인프라가 됐다. 국제교류를 하려면 이 인프라를 써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국어를 영어로 바꿔야 할 필요는 없다.
국어를 발전시키면서 영어교육을 강화하면 된다. 외국자본 끌고 오기 위해 국어를 영어로 바꾸는 것은 지나친 서비스이고 사대주의다. 외국인들이 편히 들어와 살 수 있게 영어표지판 더 많이 만들고 각종 편의시설 갖춰주면 된다.
특히 글로벌 스탠더드의 ‘구호(rhetoric)’와 그 뒤에 숨어 있는 ‘이해관계’를 잘 구분해야 한다. 1997년 금융위기 때 국제금융가에서는 월街(가)의 ‘주식시장 위주 금융’이 글로벌 스탠더드이고, 한국이나 일본의 ‘은행위주 금융’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니까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기업 부채비율을 200% 밑으로 갑자기 낮추면서 보유자산을 외국에 헐값에 팔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세계 금융위기가 벌어진 다음의 상황을 보자. 국제금융기관들은 단순히 자본금의 2배 정도가 아니라 백배, 천배가 넘는 부채를 활용해서 투자하다가 지금의 금융위기를 불러왔다.
자신들이 지키지 않고 믿지도 않는 것들을 왜 남에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강요했을까. 그렇게 해서 따라오게 하면 자신들이 이익 챙길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는 찾을 게 별로 없다.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내세우는 것들 배후의 이해관계를 파악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협상할 것은 협상하고, 거부할 것은 거부해야 한다.⊙
10여 년 전 금융위기를 겪고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상 가장 성공적인 구조조정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경제는 왜 이렇게 금융위기에 취약한가? 말로는 ‘성공적 구조조정’이었지만 실제로는 ‘실패한 구조조정’이었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전의 경제 패러다임에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해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꿨는데, 이것이 문제투성이라는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성적표를 살펴보자. 경제성장률이 반 토막 났다. 1997년 이전에는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7.5%였는데 그 후 4%대로 추락, 세계 평균수준에 불과하다. 세계에서 손꼽히던 ‘우등생’이 ‘보통 학생’으로 전락한 것이다. 그동안 투자는 극도로 부진했다. 그나마 4%대 성장도 금융위기 전에 ‘과잉투자’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투자를 많이 해놓았던 덕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성장률이 떨어지고 투자가 위축되더라도 ‘개혁론자’들은 구조조정을 통해 금융안정성이 강화된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주장해왔다. 그런데 지금 세계 경제위기가 벌어지고 보니 금융안정성마저도 허구였다는 것이 판명났다. 이번 금융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지, 그 이후 한국경제를 어떻게 재구축할 것인지는 IMF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 잘못론’과 ‘쟤들 잘못론’
IMF 식 구조조정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따라 재정·금융·기업 부문의 건전성 등 ‘펀더멘털’을 강화해 놓으면 국가경제에 대한 신인도가 올라가고, 이에 따라 자금이 몰려든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IMF 패러다임에서의 핵심 주체는 외국인 투자자들이다.
전 세계에 돈이 널려 있으니 한국경제를 외국인 투자자들이 보기에 매력적으로 만들어 놓으면 경제가 잘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위기도 돈 빼내가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잘못이라기보다 그렇게 만드는 금융 위기국이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IMF 프로그램은 100% ‘우리 잘못론’에 따라 만들어져 있다.
한국은 여기서 더 나아가 ‘120% 우리 잘못론’을 받아들여 ‘IMF 플러스’를 실행했다. IMF야 원래부터 표준화된 처방을 조자룡 헌 칼 휘두르듯 아무 나라에 가서나 사용하니까 논외로 치더라도, 당시 국내에서는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던 지식인이건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던 지식인이건 개혁지상주의에 빠져 있었다.
금융위기를 당한 것은 한국이 무슨 큰 죄를 지어서 벌어진 일이고, 따라서 뼈아프게 반성하고 고쳐야 한다는 분위기가 한국사회를 지배했다. 금융위기가 ‘위장된 축복(blessing in disguise)’이라면서 드디어 제대로 된 개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필자는 1997년 금융위기도 따지고 보면 한국이 잘못한 것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번 금융위기를 보자. 여기에는 ‘우리 잘못론’을 적용할 여지가 없다. 100% ‘쟤들 잘못론’을 적용해야 한다. ‘서브프라임’은 미국에서 수입이 제대로 없는 사람들에게 빌려준 모기지다. 당연히 떼일 염려가 많고 이자율은 높은 ‘고위험 고수익’ 상품이다.
그런데 세계에서 잘나간다는 금융기관들이 이것을 이리저리 섞어서 ‘저위험 고수익’ 파생상품으로 둔갑시켜 팔았다. 이런 연금술이 일어날 수 있도록 패니 메이, 프데디 맥과 같은 정부 산하기업들이 보증을 해줬고, 무디스와 같은 국제 신용평가기관들도 트리플A(AAA)라는 최고 신용등급을 줬다.
그러다 이 금융상품들이 핵폭탄처럼 터졌다. 뒷수습을 하려니 현찰이 많이 필요하게 됐고, 미국이나 서유럽 금융기관들은 ‘디레버리징(차입축소)’을 하면서 전 세계의 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돼 버렸다. 이 과정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시장에서만 1년 사이에 60조원을 넘게 빼내갔다. 외환보유액의 4분의 1이나 되는 돈이다. 덕분에 주가가 떨어지고 원화가치도 폭락했다.
IMF 처방이 한국에 맞는 것이었을까
 |
|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부총리(가운데)와 이경식 한국은행총재(오른쪽)가 캉드쉬 IMF총재가 지켜보는 가운데 긴급자금을 지원받기 위한 의향서에 서명하고 있다. |
세계경제는 ‘우리 잘못’이건 ‘쟤들 잘못’이건 간에 금융위기가 언제든 터질 수 있는 지뢰밭이라고 봐야 한다. 누구 잘못으로 위기가 벌어지건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금융위기라는 지뢰가 항상 ‘우리 잘못’ 때문에 터진다고 생각하고 경제 패러다임을 가져가는 것은 아둔하다. ‘쟤들 잘못’으로 위기가 벌어질 경우에도 돈 빠져나가고 원화가치 폭락하는 것을 ‘우리 잘못’으로 생각하고 ‘구조조정’ 드라이브를 걸면서 돈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도하거나 애걸하겠다는 얘기다.
IMF 패러다임은 갑자기 외환위기를 당하고 급전이 필요할 때 한국에 좋은 것인지 제대로 검토할 겨를도 없이 받아들인 시스템이다. IMF 돈도 8년 전에 이미 다 갚았고, 이번에 ‘쟤들 잘못’으로 큰 피해까지 당했는데, 한국경제 입장에서 어떤 패러다임을 다시 만들어야 할지 주체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이 통화 헤게모니를 갖고 있지 않는 중진국이라는 사실이다. 이 좌표에서 시작해야 한다. 통화 헤게모니를 가진 미국이나 서유럽국들은 금융위기가 벌어지면 自國(자국) 통화를 찍어내서 해결할 수 있다. 통화가치 유지를 위한 다양한 군사외교 능력 및 상징조작 능력 등도 구축해왔다. 내수시장도 크다. 그래서 자본이 자유로이 움직이고 환율이 ‘시장’에 의해 결정되더라도 금융위기로 인한 충격이 상대적으로 작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없다. 그렇다면 내실을 다지는 한편, 급격한 자금 유출·입과 환투기가 경제를 뒤흔드는 것을 막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 ‘펀더멘털론’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환율제도를 복수통화환율제, 즉 ‘바스킷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
한국은 처음에 고정환율제를 택하다가 1980년대 후반 미국으로부터 ‘환율 조작국’이라는 비난을 받은 뒤 바스켓 방식으로 바꿨다. 그리고 IMF 이후에는 자유변동환율제로 이행했다. 지금 세계에서는 마치 자유변동환율제가 글로벌 스탠더드처럼 돼 있다. 시장에서 환율이 아무리 널뛰는 것 같아도 결국 펀더멘털에 따라 환율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개입해봤자 시장만 왜곡시키고 부작용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계 외환시장의 실상은 이런 펀더멘털론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2007년 세계 외환거래량은 연간 800조 달러가 넘는다. 반면 세계 상품교역량은 12조 달러가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서비스 교역까지 합쳐봤자 외환거래액의 3% 이내만이 실물과 연결되어 있다. 나머지 97% 이상은 단기차익 거래다. 펀더멘털론이 맞으려면 실물과 관계된 3%가 나머지 97%를 결정해야 한다.
외환을 ‘시장’에만 맡겨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 오히려 단기차익 때문에 오가는 97%가 시장환율을 결정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금융시장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된 정책을 취하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통상 ‘몸통’이라고 생각하는 것(펀더멘털)이 실제로는 꼬리이고, ‘꼬리’라고 생각하는 것(투기적 거래)이 몸통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환율이 실물경제의 필요에 맞춰 결정되는 것이 비정상이고 실물경제가 투기적 외환거래의 영향을 받는 것이 정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경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려면 몸통이 경제를 지나치게 흔들지 못하도록 규제를 도입하는 수밖에 없다. 바스켓 방식은 주요 교역상대국 통화가치 변화라는 ‘몸통’의 움직임을 살피면서 한국경제의 필요성이라는 ‘꼬리’를 지키기 위해 정부가 개입할 여지를 넓히는 제도다.
물론 규제에 따른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어느 제도건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부작용을 걱정하기보다 한국경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현실성 있는 대안을 찾고 부작용을 다스려야 한다.
실제로 외환시장을 시장에 완전히 자유롭게 맡겨 놓고 잘되는 나라는 많지 않다. 홍콩이나 싱가포르가 아시아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장경제라고 하는데, 외환시장은 그렇지 않다. 홍콩은 홍콩 달러가치를 미국 달러에 고정시켜놓고 있다. 싱가포르는 환투기꾼들의 천국이지만 싱가포르 달러에 대해서만은 투기를 금지하고 있다. 실제 가용 외환보유액을 ‘국가기밀’로 밝히지 않는다. 또 바스켓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이렇게 3박자가 결합되니까 정부가 환율을 필요에 따라 결정하는 능력이 생긴다. 중국도 ‘바스켓 방식’을 택하고 자본통제를 하고 있으니까 외환위기를 겪지 않는다.
환율이 불안하면 투기꾼들의 돈 벌 기회는 많아질지 몰라도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엉클어진다. 환율이 갑자기 큰 폭으로 변동하는데 그 속도에 맞춰 재빠르게 구조조정할 수 있는 기업들은 별로 없다.
장기적 안목을 갖고 실물투자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장기무역거래도 어려워진다. 모든 기업들이 ‘환 투기’건 ‘환 헤지’이건 환율 로또 판에 뛰어들 수밖에 없다. 키코(KIKO)로 대표되는 통화옵션상품 대규모 손실은 이런 와중에서 벌어진 일이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일수록 환율 급변동의 부작용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경제의 장기성장 패러다임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IMF 패러다임은 금융위주다. 과거 경제발전기에는 산업발전을 위해 금융이 희생됐다고 해서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이제는 거꾸로 됐다. 산업자본은 ‘사고뭉치’로 취급 받았다. 대신 ‘금융허브’, ‘세계적 투자은행 육성’ 등의 금융산업발전 대책들이 속속 나왔다.
주식시장에 대한 환상이 산업자금 감소 초래
 |
| 수출선적부두에서 선적을 기다리고 있는 수출 차량들. 개방과 수입규제를 적절히 조절했기 때문에 한국경제의 성장이 가능했다. (사진은 부산항 컨테이너 부두) |
그러나 금융은 ‘경제의 핏줄’이라는 말처럼 다른 산업이 잘 굴러가게 혈액을 공급해주는 역할도 함께해야 한다. IMF 패러다임에서는 이 부문의 문제가 심각했다. 1997년에 금융기관에서 기업부문으로 공급된 돈은 118조원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연평균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투자부진은 당연한 결과다. 사람도 크려면 피가 잘 공급돼야 하는데 이렇게 혈액공급이 줄어들어서는 경제가 커 나가지 못한다.
산업자금 공급이 줄어든 가장 큰 원인은 주식시장에 대한 환상에 있다. 금융위기 이후 개혁론자들은 한국기업들이 지나치게 은행대출에 의존해서 성장했으니까 위기를 당했고, 앞으로는 주식시장 위주로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은행대출이 줄더라도 주식시장을 잘 만들어 놓으면 돈이 공급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애초부터 아무 근거가 없는 생각이었다. 선진국에서조차 역사를 살펴보면 주식시장이 기업부문에 자금을 제대로 공급해준 적이 없다. 오히려 돈을 빼내갔다. 메이어의 연구에 따르면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영국에서는 주식시장의 신규 자금조달 순기여가 -3%였다. 미국은 1%, 캐나다는 3%, 독일 3%, 일본 5%에 불과했다.
앨런과 게일은 1970~1989년 사이에 벤처캐피털 투자를 포함해 선진국들의 신규투자 자금조달 경로를 분석했다. 주식시장을 통해 조달된 자금 비중이 미국 -8.8%, 영국 -10.4%, 독일 0.9%, 일본 3.7%, 프랑스 6%로 나왔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대에 들어 주식시장에서 유상증자 등을 통해 기업 쪽으로 자금이 공급된 것보다 배당, 자사주 취득 등으로 빠져나간 돈이 연평균 1조원 이상 더 많았다.
은행 통해 투자자금 공급해야
주식시장이 산업자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것은 주식투자자들이 대부분 단기적인 시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벤처투자에서 보듯 일부 길게 내다보는 투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조차 당장 영업이익은 나지 않는다 해도, 투자 주식의 가치가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에 단기적으로 올라갈 전망이 있을 경우에 더 많이 투자한다.
실제로 주식시장은 투자자금 조달보다 富(부)를 실현시키는 기능이 더 크다. 대부분 기업들은 안정적으로 매출을 늘리고 영업이익을 올린 뒤 주식시장에 상장한다. 투자자 보호를 위해 증권거래소가 이러한 상장기준을 두고 있다. 상장할 수 있을 정도로 영업이 안정된 기업은 주식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필요가 절박하지 않다. 오히려 그동안 경영을 잘해서 쌓아 놓은 기업가치를 주식시장을 통해 실현시키려는 목적이 더 크다.
그러면 기업들의 투자자금은 어디에서 공급되는가. 선진국은 기업들이 축적해 놓은 돈이 많으니까 유보금으로 장기투자를 한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중진국에서는 유보금 많은 회사들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은행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동안 기업부문으로 돈이 흐르지 않은 것에 대해 국내에서 지배적인 견해는 株主(주주)들이 투자보다 배당 받는데 신경 썼고, 그래서 기업이 돈을 빌려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삼성전자, 포스코와 같이 유보를 많이 쌓아 놓은 일부 대기업들에나 해당되는 말이다. 중소기업이나 중견기업들은 유보자금이 별로 없다. 이런 기업들이 대기업으로 성장하려면 은행에서 장기성장자금이 공급되어야 한다.
금융위기 이후 최정상에 있는 기업들은 더 빨리 성장했고, 나머지와 격차가 벌어지는 양극화가 진행됐다. 경제에 활력이 있으려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기업들이 많아야 한다. 이들에 대한 산업금융 지원은 은행밖에 담당할 기관이 없다. 은행을 통해 투자자금이 잘 공급되도록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데 장기성장동력 확보의 성패가 달려 있다.
그동안 일반 금융기관들이 산업자본 공급을 등한시하고 있을 때에 그나마 장기산업자본을 공급해주던 곳이 산업은행이었다. 그런데 정부는 이것도 민영화를 추진하고 있다. 산업은행을 투자은행으로 바꾼다는 것은 장기대출을 하는 대신 주식투자를 시키겠다는 얘기다. 주식투자로 산업은행이 돈을 벌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기업에 공급되던 장기자금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개방을 해야 선진국 된다?
IMF 패러다임에서 또 하나의 커다란 축은 ‘개방’이다. 한국은 IMF 프로그램에 따라 개방을 대폭 확대했으면서도 각종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개방을 더 강화해서 선진국에 진입하려고 한다. 그러나 ‘개방을 더 해야 선진국이 된다’는 명제는 근본적으로 다시 검토해야 한다.
선진국의 경험을 보자. 지금의 선진국들이 많이 개방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나라들이 개방했기 때문에 선진국이 된 것이 아니라 선진국이 된 다음에 개방했고, 다른 나라에 개방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미국은 19세기 후반에 평균 40%가 넘는 고관세를 유지했다. 1930년대 대공황 때에도 관세율을 높이는데 앞장선 나라도 미국이었다. 미국이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것은 2차 세계대전 후 명실공히 헤게모니 국가가 된 다음이었다.
영국도 마찬가지로 산업혁명 이전에는 보호무역을 했고, 산업혁명에 성공해서 경쟁력을 갖춘 다음에 자유무역을 주장했다.
한국경제가 1997년 금융위기를 당했을 때 개방을 대폭 확대한 명목은 그동안 지나치게 ‘폐쇄적’이어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이 명제도 다시 살펴봐야 한다.
한국의 경제기적을 얘기할 때 첫손에 꼽는 것이 ‘수출주도 산업화’다. 中南美(중남미) 국가들이 ‘수입대체산업화’를 해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고, 한국은 수출시장에서 경쟁했으니까 경제기적을 일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출을 많이 하면 수입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자원도 없고 기계산업도 발전하지 못한 나라에서 이것들을 수입해야 가공해서 수출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국은 경제개발 내내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수입규제라는 것들 중 상당수는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경제가 ‘기적’을 이룬 것은 오히려 개방을 적절히 잘했기 때문이었다.
FTA 진행과정을 보면 개방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것 같다. 한미 FTA를 보자. 한국이 현재 ‘닭 쫓던 개’ 신세가 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촛불시위까지 겪으면서 간신히 통과시켜 놨는데 미국에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오면서 미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닭’이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정부는 국책기관을 통해 한미 FTA로 국내총생산(GDP)이 중장기적으로 1.99% 늘어난다는 수치를 만들어서 홍보했다. 그러나 모델에서 나온 숫자들은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 가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 것을 통째로 내주는 것은 진정한 개방이 아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미국은 低(저)관세국이다. 이 나라에 들어가는 관세율을 좀 더 낮춘다고 한국 수출품의 경쟁력에 얼마나 득이 될까.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FTA를 추진한다. 그러면 경쟁력 상승효과가 줄어든다. 필자가 만난 기업인들 중에는 관세인하보다 통관절차가 쉬워지는 것을 반기는 분들이 많았다.
닭이 있었다기보다는 기껏해야 병아리나 달걀 정도 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한국은 여기에 마치 國運(국운)이 걸려 있는 듯 FTA 드라이브를 너무 강하게 걸었던 것 같다.
수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큰 방향과 거기에 담겨 있는 철학이다. 한미 FTA 추진 세력은 명시적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외부충격을 통한 내부개혁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다. 한국경제는 아직도 문제가 많으니 외부 강제수단을 통해 더 개방시키고 내부시스템도 더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교통상부에서 “능동적인 시장개방과 자유화를 통해 국가 전반의 시스템을 선진화하고 경제체질을 강화한다”고 내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동안 수많은 개방과 개혁을 해 놓고도 왜 더 많이 시급하게 필요한가, 필요하다면 스스로 하지 못하고 왜 외부 강제수단을 통해서 해야 하는가 등의 질문에 대한 답은 찾아볼 수 없다.
필자는 가능한 개방된 체제를 갖추고 개방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개방을 통해 보다 많은 자본과 아이디어를 활용할 수 있고, 한국경제가 커나갈 수 있는 시장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송두리째 내주는 것이 개방은 아니다. 나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고 개방을 통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야 한다. 개방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어려운 협상과정의 시작일 뿐이다.
이런 입장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하던 것들을 진지하게 다시 살펴봐야 한다. 세계시장에서 교류하려면 서로 인정하는 교류의 틀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이 따라야 하는 규범을 만들어야 하는가. 이것이 한국에 실제로 좋은 것인가. 글로벌 스탠더드는 국제교류의 언어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선진국 은행들은 부채비율 200% 지켰나?
지금 국제언어의 글로벌 스탠더드는 영어다. 영국이 200년 동안 세계를 지배했고, 그 후 미국이 반세기 이상 세계를 지배하면서 영어가 국제교류의 인프라가 됐다. 국제교류를 하려면 이 인프라를 써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국어를 영어로 바꿔야 할 필요는 없다.
국어를 발전시키면서 영어교육을 강화하면 된다. 외국자본 끌고 오기 위해 국어를 영어로 바꾸는 것은 지나친 서비스이고 사대주의다. 외국인들이 편히 들어와 살 수 있게 영어표지판 더 많이 만들고 각종 편의시설 갖춰주면 된다.
특히 글로벌 스탠더드의 ‘구호(rhetoric)’와 그 뒤에 숨어 있는 ‘이해관계’를 잘 구분해야 한다. 1997년 금융위기 때 국제금융가에서는 월街(가)의 ‘주식시장 위주 금융’이 글로벌 스탠더드이고, 한국이나 일본의 ‘은행위주 금융’은 시대에 뒤떨어졌으니까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기업 부채비율을 200% 밑으로 갑자기 낮추면서 보유자산을 외국에 헐값에 팔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세계 금융위기가 벌어진 다음의 상황을 보자. 국제금융기관들은 단순히 자본금의 2배 정도가 아니라 백배, 천배가 넘는 부채를 활용해서 투자하다가 지금의 금융위기를 불러왔다.
자신들이 지키지 않고 믿지도 않는 것들을 왜 남에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강요했을까. 그렇게 해서 따라오게 하면 자신들이 이익 챙길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라는 이유 말고는 찾을 게 별로 없다.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내세우는 것들 배후의 이해관계를 파악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협상할 것은 협상하고, 거부할 것은 거부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