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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서평

이완범의 《미국의 한국정치 개입사 연구》

미국 정부의 눈에 비친 한국 정치 실상 보여줘

글 : 김학준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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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정권이 민주적이건 권위주의적이건 공산화 가능성 있는 경우 정권 교체 공작 입안
⊙ 저자 이완범 교수, 30년간 한반도 분할, 신탁통치, 6·25전쟁,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 등 천착
⊙ “신탁통치안은 소련·중국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미국이 게임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들고 나온 전략”
⊙ 美, 부산 정치파동 당시에는 장면 지지했으나 장면의 나약함을 보고 이기붕 지원으로 선회
⊙ 5·16은 미국이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능력한 정부’보다는 ‘혁명을 억압할 능력을 가진 안정된 정부’를 선호한다는 사실 보여줘
⊙ 한국, 미국의 압박·제거 공작 좌절시키면서 미국의 對韓정책에 대한 자율성을 증대
《미국의 한국 정치개입사 연구》
  ·이완범(李完範), 《신탁통치》 전 3권(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23년 12월)
  ·이완범,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전 6권(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22년 12월~2024년 11월)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사진=조선DB
  1945년 8월 15일 한(조선)반도의 해방과 분단 이후 남한(1948년 8월 15일 이후 대한민국)에서 전개된 정치사 그리고 한미관계사에 관해 대단히 중요한 저서들이 출판되었다.
 
  우선 저자 이완범 교수의 학문적 성장 과정에 대해 살피기로 한다. 1961년생인 저자는 연세대 사회과학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서 1986년 2월에 〈한반도 신탁통치와 국내정치, 1943~1948〉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데 이어 같은 곳에서 1994년 8월에 〈미국의 한반도 분할선 획정에 관한 연구, 1944~1945〉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두 개의 논문 제목은 저자가 이미 20대 청년 때부터 한국 현대사 연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분단’을 학문적 고뇌와 사색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데, 놀라운 것은 그가 이제 정년을 앞둔 시점까지 무려 40년에 걸쳐 이 주제 하나에 매달려 매우 심층적이면서 독창적인 해석을 담은 많은 저서와 논문을 출판해 왔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학위를 받은 뒤 국사편찬위원회 편수사(編修士)로 출발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를 거쳐 현재 그 후신인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학대학원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미국 하버드대 옌칭연구소를 비롯해 조지타운대와 에모리대에서 방문학자로 자신의 연구를 심화했다. 이 대목에서 상기되어야 할 사실은 그는 연구와 강의 및 집필 그리고 학회 활동 이외의 어떤 영역에도 관여함이 없이 오로지 순수한 학자로서 외길을 걸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했기에 한 개인이 무려 100여 편에 이르는 저술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료의 분석을 통한 실증적 검증’
 
  그 저술들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들만 적시하기로 한다.
 
  첫째, 우선 자료에 관해서다. 연구의 출발점은 자료의 발굴과 정리이다. 저자는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메릴랜드주 칼리지파크의 미국 연방정부 산하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NARA)에서 미국 역대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관한 원자료들을 철저히 점검했다. 이어 특히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대에 관해서는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의 케네디대통령기념도서관, 텍사스주 오스틴의 존슨대통령기념도서관, 캘리포니아주 요바린다의 닉슨대통령기념도서관, 미시간주 앤아버의 포드대통령기념도서관, 그리고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카터대통령기념도서관 등이 소장한 자료들 역시 철저히 점검했다. 이 자료들 외에 미국 국무부가 편찬한 《미국대외관계문서집(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FRUS]: Diplomatie Papers)》 역시 살폈다.
 
 
  미국자료 맹신을 경계
 
  한국정치에 미친 미국의 영향력을 사실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미국측 자료들을, 특히 비밀 자료들을 점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완범 교수는 이 자료들을 무조건 따라갈 것이 아니라 미국측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긴요함을 지적했다. “미국은 비밀 자료를 공개할 때 자신의 정책을 합리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선택적으로 공개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미국 자료를 맹신한다면 그들의 의도에 말려들어가 미국 정책의 합리화에 동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어 “따라서 사료(史料) 비판을 통해 엄밀성을 확보하고 다른 나라의 자료 등을 비교하는 교차 사료 분석 등으로 이를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제의했다. 그것에 바탕을 두고 저자는 우선 〈해방 전후사 연구 10년의 현황과 자료〉(정해구·류상영·김명섭 등 공저,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89, 507~588쪽) 및 〈한국 현대사 자료의 정리 현황과 활용 방안〉(《한국근현대사 연구》 제7호, 1997년 12월, 130~155쪽) 등을 발표했다. 이 논문들은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려는 후학들에 유익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다음은 연구방법론이다. 이완범 교수는 ‘사료의 분석을 통한 실증적 검증’을 주요한 방법으로 활용하는 ‘역사적 접근법’을 채택했다. 그에 따르면, “역사적 연구방법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문헌자료 중심으로 찾아내고 그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정확히 기술하는 동시에 그 일들 사이의 관계성을 추출해 내는 방법이다.”
 
  여기서 그는 ‘비판적 해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으로 해석한 일종의 ‘해석된 사실’을 통해 그 숨겨진 의미를 간파하자”는 뜻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 교수는 ‘주관적 이해’의 방법은 보조적으로만 채택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이 방법의 남용은 학문적 업적 자체를 상대화시키고 객관적 자료의 신빙성을 의심하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단’이 아닌 ‘분할’
 
《한반도 분할의 역사》(2013)
  둘째, 이 교수의 ‘평생을 건 연구’의 주제인 한반도 분할에 관해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가 ‘분단’이라는 용어 대신에 ‘분할’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분단’은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에 ‘분할’은 언젠가는 통일이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함축한다.
 
  그 첫 저서가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심화한 《삼팔선 획정의 진실, 1944~1945》(지식산업사, 2001)로, 이 교수는 이 저서로 2001년에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받았다. 저자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더 깊이 파고들어 분단이 낳은 비극인 6·25전쟁에 관해 《한국전쟁: 국제전적 조망》(백산서당, 2000)과 《한반도 분할의 역사: 임진왜란에서 6·25전쟁까지》(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3) 등 묵직한 두 책을 출판했다. 이 책들을 통해 저자는 6·25전쟁에 관한 국내외의 많은 저술들을 점검하고 거기에 나타난 쟁점들을 소개한 뒤 자신의 해석들을 제시했다. 그 해석들 가운데 하나가 “이 전쟁은 김일성의 주도와 스탈린의 지원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일어난 일종의 공동전쟁이었다”이다. 여기서 보이듯 저자는 이 전쟁에 관한 ‘내전설(內戰說)’과 ‘남침유도설’을 분명하게 배척했다. 6·25전쟁 연구에 대한 저자의 열정은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의 뒤 네 자리 수를 ‘0625’로 한 데서도 나타난다.
 
  서평자는 6·25전쟁에 대한 저자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전쟁은 ‘좌파 수정주의자’들은 물론이고 때로는 우파 학자들도 말하는 내전의 산물도 아니었고, 북한의 남침을 유도해 반격함으로써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립하려는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측 전략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한 전역을 점령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김일성(金日成)의 무모하면서도 무책임한 의도, 그리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후원한 스탈린의 공산화 확대 전략의 산물이었다. 이렇게 볼 때 미국을 비롯한 서방 16개국의 참전 그리고 그에 따른 김일성 남침 전쟁 저지는 정당화된다.
 
 
  신탁통치에 대한 3권의 연구서 펴내
 
《신탁통치》 (2023, 전3권)
  이러한 학문적 배경의 이완범 교수는 일찍이 그의 석사논문이 보여주었듯, 일제 패망 이후의 한반도를 구상하면서 한반도에 대해 미국·영국·중국·소련의 네 연합국이 신탁통치를 실시한 뒤 독립을 부여한다는 미국의, 그리고 미국의 주도에 따른 연합국의 ‘신탁통치’안에 대한 분석으로써 ‘분할’과 ‘전쟁’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다. 당연한 수순이다. 만일 연합국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지 않고 즉각적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면 비극의 분할도, 그리고 그 연장선 위의 전쟁도 피할 수 있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이 주제에 관해 세 권의 책을 썼다. 제1권이 《신탁통치 1: 이론과 글로벌 사례》이고, 제2권이 《신탁통치 2: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안》이며, 제3권이 《신탁통치 3: 한국 정치세력의 인식과 대응》이다. 이제까지 국내외를 통틀어 이 주제를, 모두 합쳐 1396쪽에 이르는 방대한 세 권의 책으로 설명한 사례는 없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학문적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제1권에서 이 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세계 11개 지역에서 실시되었고 1994년에 공식적으로 종결된 신탁통치에 관한 이론과 사례를 분석했다. 이 교수도 지적했듯, 신탁통치에 관한 세계사적 연구나 종합적 평가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연구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 교수는 제1권에서 “한반도 신탁통치안을 포함해 다른 나라에 대한 신탁통치 적용 논의와 실행 사례를 종합하여 다루었고, 21세기 내정이 불안한 지역에 대한 신탁통치 적용을 검토하는 문제도 더하여 현재적 의미도” 탐구했다. 결론적으로 이 교수는 “미국은 왜 신탁통치를 전후(戰後)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도입했을까?”라고 물은 뒤, 다음과 같이 정확히 대답했다.
 
  〈이상주의적으로 본다면 신탁통치 자체는 반(反)식민주의적이며 인도주의적 제도이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겉모습에 불과하다. 보다 본질적인 현실주의적·전략적 견지에서 평가하면, 신탁통치는 그 자체가 목적인, 자국(自國)의 국가이익을 확보하려는 수단이다. 인도주의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나, 신탁통치의 역사적 전개를 따라가 보면 ‘미국 세력권의 확대’라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신탁통치안이 구상되었다는 것이 더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제도를 해체함으로써 전후에 이들 식민 지역의 풍부한 경제적 자원에 접근하고자 했던 미국의 적극적 의지, 즉 국익 추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신탁통치는 새로운 형식의 식민지배 방식에 가까워”
 
  저자는 자신의 이 명제를 제2권에서 훨씬 구체적으로 부연했다. “19세기 말 시작된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영향력 공유와 배제 및 교류 현상은 20세기에도 재현되었다”고 관찰한 저자는 한반도 이권(利權)을 두고 벌이는 이러한 경쟁에서 소련과 중국에 비해 후발주자였던 미국이 게임의 판도를 바꾸기 위해 들고 나온 전략이 바로 신탁통치안이었다고 이해했다. 풀어 말해, “신탁통치는 직접 개입을 위한 명분, 그리고 명분이 있는 실익(實益) 모두를 미국에 가져다줄 수 있다는 묘수였고, 군사력을 적당히 투입하되 전쟁 없이 세력 확장을 할 수 있는 문호개방적인 안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으로부터 저자는 “신탁통치안은 미국이 선전한 것처럼 한국에 자치와 독립을 부여하기 위한 인본주의의 발로에서 나온 구상이 아니라, 자국의 이권과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배 방식에 가까웠으며, 한국의 자주성을 훼손하고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미국은 이를 통해 한반도를 자국의 영향 아래 두고 냉전(冷戰)시대의 패권(覇權)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려 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미국이 이러한 의도에서 제의해 카이로 회담, 테헤란 회담, 포츠담 회담 등 일련의 전시(戰時) 연합국 회담에서 관철한 신탁통치안에 대해 한반도의 남북 지도자들은 어떻게 대응했던가? 제3권은 바로 이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접근했다.
 
  한반도 내부의 대응이라는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해 기존의 연구들은 대체로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쟁과 대결이 정점에 이르렀던 1946년 초까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대조적으로 저자는 그 이후의 시점까지, 보다 구체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유엔에서 승인받는 1948년 12월까지의 긴 기간 전반을 검토했다. 이 점이 이 책이 갖는 학문적 가치들 가운데 하나이다.
 
 
  “탁치논쟁, 미소 간 타협을 불가능하게 해”
 
신탁통치 찬반 논쟁은 미소 간 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사진=조선DB
  저자가 제시한 결론의 핵심은 한반도의 국내정치 상황이 미소(美蘇) 관계에 영향을 주었다는 데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1945년 12월 하순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연합국 외무장관 회의는 코리아에 ‘통일된 임시정부’를 세우고 그 정부를 4대 연합국이 5년 이내 기간 동안 ‘신탁통치’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이 발표되어 국내에 알려지면서 남한에서는 우익(右翼)세력이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이른바 반탁(反託)운동을 강하게 전개했고, 좌익세력은 ‘통일된 임시정부’ 부분을 존중해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탁치(託治)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북한에서는 소련 점령군과의 교감 속에서 그 결정을 받아들였다. 이완범 교수의 표현으로, “탁치 논쟁은 미소 간 타협을 불가능하게 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파탄시키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국내 좌우대립이 국제 냉전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한반도 분단구조에 잠재해 있었던 내인(內因)과 외인(外因) 가운데 외인이 먼저 명백하게 고착되기 전인 1946년 1월의 시점에서 내인이 먼저 표출되었으니, 탁치논쟁은 분단구조에 잠재해 있던 내쟁적(內爭的) 성격을 최초로 표출했고 이로써 내·외인이 결합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이 분석의 연장선 위에서 저자는 “제3의 논리가 극단적인 입장을 조정하는 균형자로 기능하려고 노력했지만, 갈수록 극단화하는 국내외적 상황이 한국인들을 양극단의 어느 한쪽으로 서게 만들었으므로 (……) 균형 잡힌 중간적이며 실용적인 통합 논리는 힘을 잃었다”고 논평하며, “여기에서 당시 국내 정치지도자들의 분단에 대한 책임”을 적시했다.
 
 
  신탁통치안 자체는 소련의 기만술에서 나와
 
  서평자는 이완범 교수의 논리에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두 가지 강조를 달리하는 대목이 있다.
 
  첫째, 네덜란드 학자 에리크 반 리(Erik Van Ree)가 정확히 지적했듯, 신탁통치안 자체는 최소한 북한을 소련의 세력권 안에 포함시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의 기만술에서 나왔다. 몰로토프에게, 그리고 그의 절대적 상관인 스탈린에게 한반도 통일은 그다음의 목표였다. 이렇게 볼 때, 당시 남한 사회 일각에서 제기된 ‘중간적인 통합논리’는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적 의도, 구체적으로 말해 최소한 북한만큼은 소련의 영향력 아래 묶어놓으려는 속셈을 간파하지 못했거나 경시한 데서 나왔으며, 1948년 4~5월 김구와 김규식의 북행 그리고 소련이 기획한 남북회담에의 참여와 남북 공동성명에 대한 지지는 그들의 애국충정과 통일 열정과는 무관하게 비판받게 된다. 이 교수도 반 리의 분석을 한 차례 언급했으나, 서평자의 의견으로는 좀 더 강조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이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가져온 1948년 5월 10일의 제헌국회 선거 결과를 이승만(李承晩)을 지도자로 하는 ‘분단지향적 세력의 승리’로 보았다. 서평자는 논지가 아니라 표현에서 의견을 달리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북한만을 단위로 하는 정권 수립에 앞장섰던 소련 점령군과 김일성이 종국적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속셈을 지녔음을 간파하고 남한만이라도 공산화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의지를 가진 이승만과 그를 뒷받침한 한민당의 협력에 의해 이뤄진 것이었다. 따라서 5·10총선거는 한반도에 최소한 앞으로 자유민주주의가 성장하고 그것을 확산시켜 한반도를 통일하고자 한 세력의 승리로 귀결된 것이었다.
 
 
  미국의 전복 공작들
 
  한국 현대사 연구에 대한 이완범 교수의 일관된 열정은 《미국의 한국정치 개입사 연구》 전6권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미국의 역대 행정부가 한국정치에 개입해 대통령을 비롯해 여러 정치지도자들을 ‘제거’하려 한 시도가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여기서 ‘제거’는 ‘암살’은 물론이고 ‘교체’ 또는 ‘퇴진’을 포함한다. 6·25전쟁 때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세웠던 ‘에버레디 작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이것을 전복(顚覆)시키고자 주한 미국대사관이 여러 차례 벌였던 정치공작, 그리고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의 핵개발 계획을 철회하도록 미국 정부가 여러 차례 압박한 사례 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교수가 모두 합쳐 2745쪽에 이르는 이 여섯 권에 담은 비화(秘話)들은 우선 재미있으면서, 놀라움 그 자체다. ‘우호협력’과 ‘동맹’을 내세우는 두 나라 관계 속에서 미국측으로부터 이러한 공작들이 기획되고 추진되었으며, 때로는 성공했고, 비록 실패했다고 해도 우회적으로는 성공했다는 사실은 국제정치의 현실에 새롭게 경각심을 갖게 한다.
 
  이 교수는 제1권의 〈책머리에: 먼로 독트린과 미국의 세력 확장〉을 통해 미국이 자국의 국가이익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국에 개입해 공작을 벌여 친미(親美)세력으로 하여금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해 반미(反美) 정권을 붕괴시킨 사례들, 또는 대통령선거에 개입해 반미세력을 견제하면서 친미세력의 당선을 유도한 사례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 칠레와 니카라과에 대한 강한 직접적 개입으로, 그것들은 글자 그대로 미국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 주었다.
 
  이러한 전제 아래, 이 교수는 여섯 권을 통해 미국이 한국에서 시도한 사례들을 거의 모두 중앙정보국(CIA)을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의 비밀 자료에 바탕을 두고 설명하고 분석했다. 그러한 분석의 바탕 위에서 이 교수는 미국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가 1823년 12월에 천명한 먼로주의는 일부에서 해석하는 ‘고립주의(孤立主義)’가 아니라 ‘제국주의적 팽창주의’라는 해석을 제시했다.
 
 
  에버레디 작전에서 교수단 데모까지
 
4·19 당시 이승만 대통령 하야에 큰 영향을 미친 교수단 데모는 주한 미국대사관과의 연결 속에 이루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사진=조선DB
  제1권의 부제는 《박정희 제거 공작 편》이다. 그러나 이 책의 상당부분은 이승만 정부와 장면(張勉) 정부 시기에 할애되었다.
 
  〈1부. 1950년대 이승만 제거 공작〉은 1952년 부산 정치파동 때 이 대통령을 제거하려 한 ‘도상(圖上)작전’에 이어, 1953년 휴전협정 체결이 임박하자 거기에 반대하는 이 대통령을 제거하려 한 ‘에버레디 작전’을 상세히 설명했다. 이 과정에서 육군참모총장 이종찬(李鍾贊) 중장과 육군본부 작전국장 이용문(李龍文) 준장, 작전차장 박정희 대령 등이 개입한 몇 차례의 쿠데타 계획이 세워졌으나 모두 불발로 그쳤다. ‘반정(反正)작전’으로 불린 이 계획의 마지막 단계에서 미군이 태도를 번복했기 때문이었다.
 
  이완범 교수가 제시한 미국측 자료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초대 내각에서 국무총리와 국방장관을 역임하고 주중(駐中) 대사를 거쳐 내무장관으로 봉직하던 이범석(李範奭)을 ‘제거’하려고 했다. 그의 강경론이 이 대통령을 독재 강화로 이끌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범석은 실각한다.
 
  제1권에 나타난 장면 국무총리와 부통령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시각 역시 흥미롭다. 부산 정치파동을 전후(前後)한 시기에 미국 정부는 장면을 이승만 대통령을 대체할 수 있는 강력한 후보로 보았다. 그러나 그의 성격적 나약함을 파악한 뒤 입장을 바꿔 오히려 당시 이 대통령의 후계자로 꼽히던 이기붕(李起鵬)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1958년에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曺奉岩) 위원장을 비롯한 진보당 지도부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고, 1959년에 대법원이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하자 곧바로 처형했다. 국내 몇몇 연구자들은 미국 정부가 친공(親共)분자의 제거를 위해 조봉암의 사형 집행을 방조했다고 주장했으나, 이 교수는 미국측 자료에 근거해 미국 정부가 오히려 사형 집행을 막으려 노력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교수는 1960년의 3·15 부정선거로 국민적 저항이 확대되자 이 대통령을 하야(下野)시키려고 한 미국 국무부와 주한 미국대사관의 시도를 분석했다. 미국의 일차적 관심은 한국 정부가 민심을 잃어 민중봉기가 일어날 경우 불안정 속에서 그것이 공산화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다. 이 교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결심에 큰 영향을 미친 서울 교수단의 시위가 주한 미국대사관과의 연결 속에 이뤄졌다는 설도 같이 다뤘다.
 
  이승만 정부가 붕괴하는 마지막 단계에서 3·15 부정선거의 원인을 제공했고 그것 때문에 4월 민중봉기를 유도한 것으로 지목받은 자유당의 이기붕 부통령 후보 일가족은 자살했다. 이 비극에 관해 이 교수는 그것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他殺)’이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다뤘다. 그러나 1차 자료의 제시가 없는 점이 아쉬움을 남긴다.
 
 
  1961년 4월 장도영 주도 쿠데타 계획 수립하기도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미국을 방문, 케네디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조선DB
  〈2부. 1961년 장면 제거 공작〉을 보면 미국 정부는 4·19 이후 들어선 장면 정부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미국 정부가 보기에 장면 정부는 남북교류와 통일을 앞세우며 ‘양키 고 홈’을 외치는 좌익세력의 대중동원에 취약한 만큼, 강력한 반공(反共) 정부로 대체하고자 하는 구상을 지녔다는 뜻이다. 이 교수가 발굴한 미국측 자료들 가운데 하나는, 1961년 4월에 미국 정부는 장면 정부가 무능과 부패로 그달을 넘기기 어려울 것으로 보면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張都映) 중장 주도의 쿠데타 계획을 수립했다는 정보를 담았다.
 
  〈3부. 5·16 쿠데타 대응과 박정희 검증〉은 이러한 흐름 속에서 5·16 군사정변의 성공이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다.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 육군소장은 장도영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켜 장면 정부를 붕괴시키고,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출범시키면서 자신은 부의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곧 장도영을 제거하고 의장으로 취임한다. 이완범 교수는 “미국이 박정희의 계획을 처음부터 후원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쿠데타 세력에 대한 무력(武力) 진압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미국은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능력한 정부’보다는 ‘혁명을 억압할 능력을 가진 안정된 정부’를 선호했다고 할 수 있다”고 논평하고, “1961년 5·16 직후 미국 정부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 때문에 즉각적인 승인은 하지 않았지만, 그가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걸자 사실상의 승인 절차를 밟아나갔다”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정변을 주도한 세력 내부의 인맥과 갈등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들에 대한 미국 정부의 다각적 인식에 대해서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
 
 
  김종필을 밀어낸 미국
 
  제2권의 부제는 여전히 《박정희 제거 공작 편》이다. 〈4부. 5·16 쿠데타 세력과 미국의 갈등〉은 박정희 의장의 군정(軍政) 연장 계획을 좌절시키려는 미국 정부의 여러 시도를 분석했다. 미국 정부의 무기는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였고 이것은 효과가 컸다. 동시에 미국 정부는 ‘반군반민(半軍半民)의 과도정부’ 수립을 박 의장에게 권고했고 박 의장은 이것을 마지못해 수용했으나,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미국 정부는 박 의장의 공약인 ‘민정(民政) 이양’ 계획에 따라 1963년 10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에 대비해 친미파 송요찬(宋堯讚) 전 육군참모총장을 앞세워 자유민주당을 창당하게 하고 대통령 후보로 밀었으나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박정희보다 더 ‘반미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고 의심하고 경계한 김종필(金鍾泌)을 일시적으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김종필의 저 유명한 ‘자의 반 타의 반(自意半他意半)’의 1차 외유(外遊)가 그것이었다.
 

  〈5부. 제5대 대통령선거의 사상논쟁〉은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된 제5대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전개된 ‘사상논쟁’을 분석했다. 민정당(民政黨)의 윤보선(尹潽善) 후보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과거 남로당 당원이었고 1948년의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관련되어 무기징역을 받았음을 폭로하고, 공산주의자를 대통령으로 뽑아서는 위험하다고 포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 박 후보가 ‘민족적 민주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윤 후보를 지주 출신의 ‘사대주의적 근성을 지닌 천박한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비난함으로써 출발된 이 논쟁은, 저자에 따르면 결국 박 후보에게 유리한 결과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황태성 사건’이 일어났다. 황태성은 박상희(朴相熙)의 가까운 친구다. 박상희는 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박정희의 친형이면서 김종필의 장인으로, 1946년의 ‘영남 폭동’ 또는 ‘인민항쟁’ 때 좌익 편에 섰다가 총살됐다. 영남 폭동 때 월북(越北)해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副相·차관)을 지낸 황태성이 서울로 잠입해 박정희와 김종필을 접촉해 남북협상을 시도하다 처형된 사건이 황태성 사건이다. 미국 CIA는 이 논쟁에서 불거져나온 황태성 사건을 박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도록 시도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종합적으로 보면 민정당을 사대주의라고 매도한 공화당의 민족주의 캠페인이 민정당의 사상논쟁보다 대중과 지식인들의 마음을 더 많이 얻었다”고 보았다.
 
 
  박정희, 결국 친미파 김재규에 의해 살해돼
 
  〈6부. 미국의 안정 추구와 박정희의 3선 성공〉은 미국이 한국의 안정을 추구한 데다가 박 대통령이 1965년에 미국 정부가 바라는 방향으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성사시키자 박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암묵적으로 지지’한 과정을 분석했다.
 
  〈7부.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한미 갈등〉은 1970년대에 박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시도를 미국이 거세게 견제함으로써 두 나라의 관계가 날카로운 대립으로 치닫는 과정을 설명했다. 이 교수는 “미국에게는 핵개발을 통해 자주국방을 추구하는 박정희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유신(維新)시대 내내 계속된 한미 간의 미묘한 갈등이 더욱 증폭되었으며, 한미 갈등은 10·26사건으로 인해 우회적으로 봉합되는 결과에 이르렀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이 교수는 한미관계의 갈등 속에서 불거진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미국 자료들도 분석했다.
 
  제3권까지가 《박정희 제거 공작 편》이다. 3권은 8~10부로 구성되었다. 이 시기는 ‘인권’을 강조하는 민주당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미국을 이끌면서 ‘반(反)인권적’ 유신체제를 이끄는 박 대통령과 빚은 갈등으로 특징지어졌다. 이 교수는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 철수와 인권 문제 해결 등을 지렛대로 삼아 박정희 정부를 강하게 견제했다. 박정희는 주한미군 철수가 이루어지면 자신이 제거될 수도 있다고 판단해 총력으로 저지하여 1979년 7월 이를 무산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친미파 김재규에 의해 10월 26일에 살해되는 운명을 맞았다”라는 결론을 제시했다.
 
 
  전두환 제거 계획
 
1983년 11월 13일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조선DB
  제4~6권은 《전두환 제거 구상 편》이다. 4권은 〈1부. 12·12 쿠데타적 사건과 미국의 대응〉과 〈2부. 미국의 전두환 암살공작과 전두환 제거 구상〉, 5권은 〈3부. 1980년 서울의 봄, 신군부의 부상〉과 〈4부. 광주민주화운동과 미국의 대응〉 및 〈5부. 쿠데타를 완성한 전두환〉, 6권은 〈6부. 김대중 구명을 위한 전두환 제거 구상〉 및 〈7부. 6월 민주항쟁 이후 한미관계〉로 구성되었다.
 
  새삼스런 설명이 필요 없듯,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 26일에 암살된 이후 민주화 열기가 일어났다. 그러나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 육군소장이 이끈 ‘신군부’는 12월 12일에 군사정변을 통해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고, 1980년 5월에 광주(光州) 일원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을 무참하게 진압해 많은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다. 전두환은 간접선거를 통해 1981년 3월 3일에 대통령에 취임하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전두환 대통령 시기에 관한 이 세 권의 곳곳에서 이완범 교수는 미국 정부가 전두환을 제거하려는 구상을 가졌던 사실을 밝혀냈다. 이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안정을 선호하는 미국이 12·12와 1980년 ‘서울의 봄’ 이후 광주항쟁 등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일관되게 전두환 정부를 지지했으며 전두환 제거와 같은 무리수는 검토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고 소개하고, 이어 “그러나 전두환 제거 구상이라는 사실 발굴을 통해 미국이 전두환의 권력 장악을 그렇게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전두환 제거계획에 대한 사실 확인이 이루어졌으므로 정설(定說)은 수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부분이 이 교수의 학문적 업적이라고 하겠다.
 
  이 교수는 제4권의 〈책머리에: 반공을 위해 희생된 한국의 민주주의〉에서 이 여섯 권 전체에 관류(貫流)하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미국은 한 정부가 민주적이건 권위주의적이건, 공산화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 정권 교체 공작을 입안했다. 때로는 그 공작을 숨기지 않고 실행한 경우도 있지만, 내정간섭 논란을 피해 가기 위해 대개 비밀리에 추진했다. 따라서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접적이고 우회적 결과를 도모했던 경우가 더 많았고 공산화 우려가 불식된 경우에는 이를 폐기했다.〉
 
 
  미국의 개입보다 한국 내부의 동력이 더 중요하게 작용
 
  이완범 교수의 이 일련의 저서는, 특히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전6권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미국 외교정책의 큰 틀 안에서 소상하게 설명해,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 외교사 가운데 한 분류사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 정부의 눈에 비친 한국 국내정치의 실상을 자세하게 보여주어, 한국정치사 연구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저서에 나타난 한국정치는 매우 동태적(動態的)이며, 그 성격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교수는 미국 정부가 여러 수단을 통해 한국 정치 지도자를 압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쿠데타 또는 역(逆)쿠데타를 통해 제거하려고 했으나 좌절된 사례들을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한국 정부가 미국의 한국정책에 대해 자율성을 증대시켜 왔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그것은 한편으로 압박의 대상이 된 정치 지도자 또는 세력의 대응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화의 진전과 경제력의 신장에 힘입은 것이었다. 종합적으로, 이 교수는 “미국의 압력과 개입보다는 한국 내부의 정치적 동력이 더욱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결론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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