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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위기의 민주주의

권위주의로 복귀한 헝가리와 폴란드

왕년의 민주투사들, ‘非자유’ 민주주의 외치며 ‘도둑권위주의’ 도입

글 :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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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정권 말기 反共연설로 스타 된 빅토르 오르반, 집권 후 ‘非자유’ 민주주의 추구
⊙ 오르반 헝가리 총리, 개헌 등 통해 헌법재판관·판사·검사 親정부 인사로 물갈이… ‘균형 잡히지 않고 혐오스러운’ 보도 언론에 거액 벌금 부과
⊙ 폴란드 법과정의당 정권, 법무장관·검찰총장 겸임케 해 검찰 및 법원 장악
⊙ 폴란드 국가방송委, 의회 주변 反정부 시위 보도한 매체에 거액 벌금 부과

李榮祚
1955년생.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 대학원 정치학 박사 / 한국정치학회 부회장,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 회장,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역임. / 現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사)시장경제와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 저서 《현대정치경제학의 주요 이론가들》(공저) 등
2018년 1월 3일 헝가리를 방문한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신임 총리(오른쪽)와 함께 의장대를 사열하는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헝가리와 폴란드는 나란히 ‘도둑권위주의’를 향해 가고 있다. 사진=AP/뉴시스
  헝가리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조금 나이 든 세대는 교과서에서 배운 1956년의 반공(反共)혁명이 떠오를 것이다. 그만큼 공산독재에 대한 저항이 컸고, 당연히 동구권(東歐圈) 공산독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도 가장 먼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수용했다.
 
  폴란드 하면? 레흐 바웬사와 그가 이끈 자유노조운동 솔리대리티가 떠오를 것이다. 자유노조운동은 동구권 민주화운동의 물꼬를 텄다. 이후 폴란드는 헝가리와 함께 동유럽에서 가장 모범적인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왔다.
 
  하지만 소련·동구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지 30년이 지난 지금, 동구의 진주(眞珠)였던 두 나라의 민주주의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퇴행(退行)하고 있다. 정부 권력에 대한 제도적 견제와 균형을 제거했다. 특히 사법부와 검찰 그리고 헌법재판소를 무력화(無力化)시켜 정권의 시녀(侍女)로 만들었다. ‘언론 개혁’을 통해 언론도 정부의 선전기관으로 만들었다. 정권에 대한 도전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야당에 불리한 선거제도를 도입했다. 시민단체에 대한 통제도 강화했다.
 
  주목할 것은 이 모든 일이 형식적으로는 합법적 절차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선거 결과와 여론에 기대어 주권자인 국민이 원하니 뭐든 할 수 있다는 논리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2014년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공언했듯이, 이들이 지향하는 것은 동방의 러시아·중국·싱가포르·터키 같은 ‘비자유(illiberal) 국가’다. 하지만 그리로 가는 과정에서 이용하는 방법은 서방 민주주의 절차와 수사(修辭)다.
 
 
  빅토르 오르반, “의회는 반대파 없이도 작동한다”
 
  헝가리의 민주주의 퇴행을 이끌고 있는 이는 제1야당인 피데스(FIDESZ·청년민주동맹)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다. 1963년생인 오르반은 대학 졸업 이듬해인 1988년 피데스의 창립 멤버 중 하나가 되었다. 청년 오르반은 1989년 6월, 헝가리혁명(1956년) 때 친소(親蘇)정권에 처형된 임레 나기 전 총리와 다른 희생자들의 이장(移葬)을 위해 부다페스트의 영웅광장에서 열린 행사장에서 자유선거와 소련군 철수를 요구하는 연설을 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후 오르반은 소로스재단 장학금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 펨브로크칼리지에서 폴란드 출신 헤겔 연구자 지비그니뉴 펠친스키 밑에서 정치철학 공부를 했다. 하지만 변화의 일선에 서고 싶었던 그는 1990년 1월 헝가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첫 민주의회 선거에 피데스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다.
 
  임기 도중인 1993년 4월 그는 피데스의 첫 당대표로 선출된다. 그가 이끄는 동안 피데스는 급진적 자유주의 학생 조직에서 우파 인민당으로 서서히 변화했다.
 
  1998년 오르반의 피데스는 헝가리민주포럼과 독립소지주, 농업노동자, 시민당과 연합해 42%의 지지율로 총선에서 승리했다. 그 결과 오르반은 헝가리 역사상 두 번째로 젊은 나이 총리가 되었다.
 
  오르반은 곧바로 정부 조직을 개편하는 한편 헝가리를 자유시장 경제로 변화시키는 여러 조치도 취했다. 친(親)서방정책을 펼쳐 1999년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하고 유럽연합(EU) 가입도 준비했다.
 
  하지만 이때 이미 2010년 이후에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1988년 2월 야당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국회 전원회의를 3주에 한 번만 열기로 결정해, 의회의 입법 활동과 정부 감시 기능을 축소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오르반은 10개월 동안 의회의 대정부 질문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르반은 “의회는 반대파 없이도 작동한다”는 등의 반민주적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마자르 민족주의도 이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99년 주변국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주변국에 거주하는 약 300만명의 헝가리계 소수(少數)민족에게 국민에 준하는 지위를 부여하는 ‘지위법(Status Law)’을 만들어 교육 및 보건 혜택과 취업 권리를 제공했다.
 
  오르반의 첫 정부는 인플레이션을 줄이고, 안정적인 성장률을 달성하고, 국가 채무도 상당히 줄이는 등 경제실적을 보였다. 하지만 집권 연합의 여러 인사가 연루된 각종 의혹사건으로 2002년 선거에서 헝가리사회당에 참패했다.
 
 
  改憲 등 통해 헌재·법원·검찰 장악
 
  글로벌 금융위기 상황에서 치른 2010년 4월 총선에서 피데스는 긴축 대신 경제성장을 기치로 내걸고 52.7%의 득표율로 전체 의석(386석)의 3분의 2를 넘는 263석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헝가리의 민주주의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후퇴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오르반 정부는 먼저 사법부와 검찰의 독립성을 허물었다. 헌법 개정과 부수법안의 개정을 통해 판사와 검사의 정년 연령을 70세에서 62세로 낮추었다. 이전 정권부터 활동하던 나이 든 판검사를 강제 퇴직시키고 친정부 인사들로 물갈이하기 위한 것이었다. 강제 퇴직한 고위직 판사만도 274명에 달했다. 또한 법원의 운영을 책임지며, 고위직 판사 임명권, 동의 없이 판사를 일시 전보할 수 있는 권한, 그리고 사건을 다른 법원으로 이관시키는 권한 등을 지닌 법원행정처장을 의회가 임명하게 만들었다.
 
  정부 견제의 역할을 수행해온 헌법재판소(헌재)의 권한도 대폭 축소되었다.
 
  먼저, 2011년 8월 헌법재판관 임명절차를 바꾸었다. 이전에는 헌법재판관의 임명은 의회 3분의 2 동의와 각 정당이 1표씩 갖는 특별위원회의 의결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새 임명절차에서는 특별위원회의 투표권을 정당 의석 점유율에 따라 배정해 친여(親與) 인사만 임명되게 했다. 또한 2011년 9월 의회는 헌법재판관 수를 11명에서 15명으로 늘렸다. 이미 공석이 하나 있었기 때문에 정부·여당은 5명의 새 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었다. 곧 강제 퇴직자까지 발생해서 친여 재판관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논란이 되는 법안들에 대해 정부 입맛에 맞는 의견을 내게 됐다.
 
  둘째, 새 헌법은 예산과 관련된 법률에 대한 헌재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켰다. 공공부채가 GDP의 5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한 헌재는 예산·조세·의료보험비·관세 등과 관련된 법안은 심사할 수 없게 되었다. 헌재는 기본권과 시민권에 관련된 사안만 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셋째, 당사자가 아닌 사람들이 당사자를 대신해 위헌(違憲)심사를 제청(提請)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 결과 직접 헌법적 권리가 침해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시민단체 등은 헌법소원을 낼 수 없게 되었다.
 
  넷째, 새 헌법이 발효된 2012년 1월 이전에 내려진 헌재의 판례는 인용(認容)할 수 없게 되었다. 친여적인 헌재는 판례에 구속받지 않고 과거와 다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2013년 3월 수정된 새 헌법은 헌재가 헌법 내용에 대해서는 심사할 수 없게 만들었다. 헌재 심사는 헌법 수정의 절차적 합법성에 국한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수정 헌법은 노숙자 처벌과 같이 이전에 헌재가 위헌 판결을 내린 여러 조항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고 수입에 重과세한 후 언론 장악
 
2017년 5월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오르반 정권의 反유럽정책과 언론탄압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AP/뉴시스
  오르반 정부는 언론을 통제해 비판적 기능을 제거하는 한편, 사실상 정부의 홍보기관으로 만들었다.
 
  2010년 7월 미디어·텔레콤청과 미디어위원회를 설립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미디어위원회의 권한은 방송만이 아니라 종이 매체와 인터넷 미디어까지 미쳤다. 이런 감독기관은 친여 인사로 채워졌다. 같은 사람이 장(長)을 맡은 두 기관은 헝가리 내 모든 미디어로부터 아무 때나 모든 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 영업 비밀이나 기타 보호된 정보에 대해서도 예외가 인정되지 않는다. 요구에 불응하면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고 등록 취소도 가능하다.
 
  의회는 2010년 11월 언론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언론미디어법’을, 그리고 12월에 ‘미디어법’을 통과시켰다. 언론미디어법 13조는 미디어 콘텐츠 공급자가 각각 ‘진실하고 빠르며 정확한 정보’와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보도’를 제공할 것을 규정했다. 미디어법은 ‘균형 잡히지 않고 혐오스러운’ 보도를 하는 방송·신문·온라인 미디어에 거액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게 했다. 진실성·객관성·균형성·혐오성의 판단은 감독기관 몫이기에 이 두 법은 사실상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오르반 정부는 먼저 공영 미디어를 정권에 복속시켰다. 2010년 법에 의거 TV·라디오·통신사 등 모든 공영 미디어는 언론위원장이 관리하는 미디어서비스지원신탁기금(MTVA)에 속하게 되었다. MTVA의 대규모 숙청으로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인은 퇴출되었다.
 
  정부는 민영 미디어도 공익광고와 미디어발전지원금의 배분 등 여러 방법으로 길들였다. 비판적인 미디어는 경영난에 빠뜨려 퇴출시키든지 아니면 다른 소유자에게 넘어가게 했다. 외국인 소유의 미디어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대형 미디어의 경우, 일정 규모 이상의 광고 수입에 대해 2014년 도입된 대규모 세금으로, 경영 실적을 악화시켜 매각을 유도한 후 오르반과 친분 관계가 있는 기업들로 하여금 매입하게 했다.
 
  그 결과, 한 분석에 의하면 현재 헝가리 내 활동하는 미디어의 90%가 친여 성향으로 분류된다. 파리에 본부를 둔 ‘국경 없는 기자회(Reporters without Borders)’는 2013년부터 미디어 자유 지수와 순위를 발표하고 있다. 2013년 조사 대상 180개국 가운데 이미 56위까지 내려간 헝가리는 순위가 계속 내려가 2019년에는 87위까지 떨어졌다.
 
 
  마자르 민족주의 조장
 
  오르반 정부는 2011년 12월 선거법을 개정해 국회의원 정수를 386석에서 199석으로 줄이고, 선거구도 여당에 유리하게 조정했다. 2013년 1월 헌재가 선거법 개정을 승인하지 않자, 그해 3월 4차 헌법 수정으로 헌재 권한을 축소시켜 개정을 관철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중앙은행법 역시 개정하여, 정부는 중앙은행 총재뿐 아니라 부총재 2명의 임명권까지 갖게 되었다.
 
  오르반 정부는 강한 인종민족주의 경향도 보인다. 2010년 5월 의회는 외국에 거주하는 헝가리인들에게 헝가리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게 했다. 1차 오르반 정부의 ‘지위법’을 확대한 것으로 로마(집시)와 유대인 차별 및 반(反)이민 정책을 예고하는 마자르 민족주의의 표현이었다. 2015년 9월 독일 등이 시리아 등지에서 오는 난민을 수용하겠다고 하자 반대하는 등, 오르반은 EU의 ‘난민할당제’에 강경하게 반대했다. 난민이 들어오는 남쪽 국경 전체에 장벽을 쌓아서 국경을 차단했다.
 
  2014년의 총선에서 오르반의 피데스는 비록 득표율은 2010년 총선에 비해 10%가량 떨어졌으나, 기독교민주인민당과 합쳐 의회의 199석 중 133석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IMF의 차관(借款)을 모두 갚으며 IMF 체제에서 벗어났고, 유로화 위기에도 극심한 경기 침체 없이 선방한 점이 크게 기여했다.
 
  오르반 역시 이런 점을 의식해 주요 공공 서비스의 국유화 등 경제 부문에 집중한 공약을 전면에 내세웠다. 2018년 4월 총선에서도 기독교민주인민당과 연합한 피데스는 이번에는 이민 문제와 외국의 간섭을 주된 선거 이슈로 내세워 49.3%의 득표율로 199석 중 133석을 차지하는 데 성공해, 오르반은 네 번째로 총리에 취임했다.
 
  하지만 지난 10월 13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야당 연합이 23개 시(市) 가운데 정치적 상징성이 큰 수도 부다페스트를 위시한 11개 시에서 승리함으로써, 그동안 상승불패(常勝不敗)로 여겨진 피데스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번 선거에서 야당이 선전한 것은 피데스의 독주(獨走)를 저지하기 위해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2022년 총선에서도 그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카친스키, 자유노조에서 정치활동 시작
 
야로스와프 카친스키 폴란드 법과정의당 대표(앞줄 오른쪽)는 2015년 12월 22일 의회에서 헌법재판소의 권한을 제약하는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사진=AP/뉴시스
  폴란드의 민주주의 후퇴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법과정의당의 야로스와프 카친스키다. 1949년생인 카친스키는 학창 시절에는 자유노조의 전신(前身)인 노동자보호위원회에서, 그리고 1980년대에는 레흐 바웬사가 이끈 자유노조에서 정치활동을 했다.
 
  2001년 봄 법무부 장관으로 인기를 얻은 일란성 쌍둥이 동생 레흐와 함께 법과정의당을 창설해 같은 해 의회 선거에 참여했지만, 하원 460석 가운데 44석을 얻는 데 그쳤다. 2003년 카친스키는 바르샤바 시장이 된 동생을 대신해 법과정의당 대표에 올랐다.
 
  2001년 총선에서 승리한 민주좌파연합(공산당의 후신) 정권이 대규모 부패 스캔들로 인기를 잃자, 보수적 사회정책과 함께 진보적 경제정책을 표방한 법과정의당은 중도우파인 시민연단과 연합해 2005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2주 뒤 대통령 선거에서는 레흐 카친스키가 시민연단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2006년 법과정의당은 대선(大選) 과정에서 사이가 벌어진 시민연단을 대신해 극우(極右)라고 할 수 있는 폴란드자위당, 폴란드가족연맹과 우익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동생의 대선을 돕기 위해 같은 당의 카지미에시 마르친키에비치에게 총리직을 양보한 야로스와프는 마르친키에비치가 사퇴한 후 2006년 7월 총리에 취임했다. 그 결과 형이 총리고 동생이 대통령인 쌍둥이 정권이 탄생했다.
 
  하지만 연정(聯政)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정 파트너인 폴란드자위당의 대표가 부패와 성희롱 스캔들에 휘말리자 야로스와프는 2007년 연정을 깨고 조기(早期) 총선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 조기 총선에서 시민연단에 패하고 야로스와프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2010년 4월 10일 동생 레흐가 탑승한 전용기가 러시아 서부 스몰렌스크에서 추락해 레흐 부부와 정부 고위 간부들이 사망했다. 형 야로스와프는 동행하지 않아 사고를 피했다.
 
  야로스와프는 2010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결선(決選)투표에서 하원의장으로 대통령 대행을 맡고 있던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에게 패배했다. 2011년 총선에서 법과정의당은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으로 선거에 나서지만 중도파들이 시민연단으로 결집하면서 또 패배했다.
 
  2015년 5월 대통령 선거에서 야로스와프는 같은 당의 안제이 두다를 후보로 내세웠다. 두다는 결선투표에서 현직 대통령 코모로프스키에게 3% 차이로 신승(辛勝)했다. 이어 같은 해 10월 총선에서 법과정의당은 하원 의석의 460석 가운데 235석, 상원 100석 가운데 61석을 차지함으로써 8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했다.
 
 
  의회가 판사 임명권 장악
 
  카친스키의 롤모델은 헝가리의 오르반이었다. 공공연히 ‘바르샤바의 부다페스트’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카친스키는 오르반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오르반은 헌법을 개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 의회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카친스키의 법과정의당은 의회에서 단순 다수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첫 공격대상으로 삼은 것은 법률의 위헌성을 심사하는 헌법재판소(헌재)였다.
 
  2015년 총선 직전인 10월 8일 헌재는 재판관 공석 세 자리에 새 재판관을 선출하면서, 12월에 생길 공석(空席) 두 자리에도 새 재판관을 선출했다. 새 의회의 임기가 11월 12일에 시작되기 때문에 법과정의당은 이 임명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헌재는 2명의 선출은 잘못이었지만 공석을 채운 세 재판관 선출은 유효하다고 맞섰다. 법과정의당은 12월 2일 5명의 새 재판관을 선출하고 몇 시간 뒤 법과정의당 출신 안제이 두다 대통령은 이들을 임명했다.
 
  지루한 법적 공방이 이어지는 가운데 법과정의당은 헌재를 겨냥한 여러 법안을 통과시켜, 헌재가 여기에 대응하느라 다른 법안에는 신경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이렇게 헌재의 견제 기능이 마비된 사이 법과정의당은 여러 법안을 위헌심사 없이 통과시킬 수 있었다.
 
  먼저 2016년 1월 검찰청법 개정으로 법무부 장관이 검찰총장을 겸직게 했다. 이로써 이전의 검찰청법이 지향한 검찰 독립은 끝이 났다. 검찰은 행정부에 편입·정치화되었다.
 
  헌법재판관 임명을 둘러싼 법적 공방은 법과정의당 선출 재판관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어서야 끝났는데, 법과정의당은 이제는 헌재를 이용해 ‘사법 개혁’을 단행했다. 사법부의 정권 시녀화는 세 가지 법률 개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 국가사법위원회(KRS)법이었다. KRS는 사법부의 모든 임명을 관장하는 헌법기관으로서 임명대상을 대통령에게 추천하는 권한과 더불어 사법부와 판사의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한 여러 권한을 가지고 있다. 법과정의당에 KRS는 사법부 장악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KRS는 15인의 판사로 구성되는데, 이전에는 사법부가 선출하던 것을 2017년 12월 의회가 선출하게 법을 고치는 한편, 헌법상 보장된 4년 임기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위원들을 퇴임시켰다. 이로써 판사의 임명은 법과정의당의 수중에 떨어졌고, 사법부의 독립성은 크게 손상되었다.
 
  두 번째, 대법원법 개정으로 대법관들의 정년 연령을 70세에서 65세로 낮추었다. 대법관의 40%가 퇴직 대상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법관 수를 82명에서 120명으로 늘렸기 때문에 대법관의 60%를 정부 여당이 원하는 사람으로 채울 수 있었다.
 
  세 번째, 일반법원조직법의 개정으로 이미 사법 체계에서 막강한 권한을 지니고 있던 법무부 장관 겸 검찰총장에게 더 큰 권한을 부여했다. 개정된 법은 법무부 장관에게 법 시행 6개월 내에 모든 법원장을 임면할 수 있는 권한을 줌으로써 사법부를 법무부 장관의 완전한 통제하에 놓이게 했다. 6개월이 지난 후에도 법무부 장관은 모호하고 자의적(恣意的)인 기준으로 법원장을 해임할 수 있다.
 
  또 정년을 기존 67세에서 남자는 65세, 여자는 60세로 낮추었다. 정년 인하로 정부가 입맛대로 채우게 된 공석은 전체 판사직의 10%에 해당하는 1000개나 되었다.
 
 
  언론 자유도, 18위 → 59위로 추락
 
지난 10월 13일 총선에서 투표를 마친 후 투표소를 나오는 카친스키 대표. 이날 선거에서 법과정의당은 하원 장악에 성공했다. 사진=AP/뉴시스
  ‘언론 개혁’도 했다. 공영 TV와 라디오에서 약 200명이 해고되었다. 이들은 주변부 우익 미디어 출신 저널리스트로 대체되었다. 이제 공영 미디어는 정부의 선전기구로 바뀌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보도를 한다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법과정의당의 대표 3명을 포함해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국가미디어위원회는 카친스키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는다. 또 공영과 민영을 막론하고 모든 TV와 라디오를 감독하는 헌법기구인 국가방송위원회는 전원 법과정의당이 추천한 위원들로 채워졌다.
 
  국가방송위원회는 공공연하게 민간 미디어를 압박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2016년 민영 뉴스시사채널인 ‘TVN-24’에 의회 주변의 시위를 보도했다는 이유로 거액의 벌금을 매긴 사건이다. 나중에 이 벌금은 취소되었지만 반정부적 견해를 보도하는 것만으로도 처벌될 수 있다는 강한 경고였다. ‘국경 없는 기자회’의 발표에 따르면, 2015년 조사 대상 180국 가운데 18위던 폴란드의 언론자유도는 2019년 59위로 떨어졌다.
 
  NGO에 대해서도 공익위원회와 국가자유기구의 두 기관을 만들어 정부 지원과 통제를 집중 관리하고 있다. 정부 인사로 구성된 공익위원회는 시민사회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관장하는 최고의결기구로, 각료인 위원장은 국가자유기구의 이사와 대표도 임명한다. 국가자유기구의 공식적인 임무는 시민사회의 재정과 발전을 지원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지침에 따라 특정 단체와 사업을 우대하거나 차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법과정의당 정부는 2017년 말 선거 관련 법과 제도도 대폭 뜯어고쳤다. 선거와 정당 지원금을 관리하는 전국선거관리위원회(PKW)는 이전에는 헌법재판소장·대법원장·최고행정법원장이 각각 3명씩 임명하는 9명의 판사로 구성되었다. 이제는 헌재소장과 최고행정법원장이 임명하는 2명의 판사를 제외한 나머지 7명의 선관위원은 하원에서 임명한다.
 
  지역선거구를 관리하는 100명의 위원은 내무부 장관이 낸 후보 가운데서 PKW가 임명한다. 이제 각급 지역선관위원장은 판사가 아니어도 된다. 사실 1991년 헌법의 최대 성과 가운데 하나는 선거제도의 사법화(司法化), 탈(脫)정치화였다. 선거 관리, 선거구 획정, 국고보조금 사용의 적절성 감시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기능을 수행하는 선거관리위원을 친여 인사로 충원함으로써 공정한 선거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헝가리의 지방선거와 같은 날 있은 폴란드 총선에서 법과정의당은 하원은 장악했지만 상원에서는 100석 가운데 49석만 얻어 과반 획득에 실패했다. 야당에는 분명 고무적인 일이지만 지금까지 진행된 민주주의 훼손 정도로 보아 4년 뒤 총선에서 야당이 뒤집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도둑권위주의’
 
  오르반과 카친스키를 보면 하버드대학의 새뮤얼 헌팅턴 교수가 생전에 자주 “민주투사가 언제나 민주주의자는 아니다”라고 한 말이 떠오른다. 두 사람 모두 한때 자유민주주의자로 보였지만 지금은 ‘인민의 의지’를 빙자해 민주주의를 빈 껍데기로 만들고 민족 감정을 동원하는 포퓰리스트 독재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고립된 사례가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헌정(憲政) 절차를 통해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쿠데타 같은 극적인 사건을 통해 일어나던 과거의 권위주의적 퇴행과는 사뭇 다르다. 21세기판 민주주의 퇴행의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민주’의 탈을 쓰고 서서히 진행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를 도둑고양이처럼 슬그머니 나타나는 ‘도둑권위주의(Stealth Authoritarianism)’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변화 하나하나의 의미를 놓치기 마련이지만, 어느 날 깨달았을 때는 되돌리기에 너무 늦다.
 
  이런 점에서 보면 지난 2~3년 사이 한국에서 일어난 일들도 새삼 경각심을 가지고 ‘압축’해 점검할 필요가 있다. ‘촛불’ 민심을 내세운 적폐청산, 친여 코드 판사들이 장악한 사법부, ‘개혁’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검찰 독립성의 훼손, 친여 인사들이 장악한 언론 등을 한데 모아놓고 보면 만일의 가능성을 우려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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