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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民族’을 다시 생각한다

丹齋史觀의 문제점

폐쇄적 민족주의·집단주의로 이어지면서 자유민주주의 위협

글 : 서명구  성신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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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신채호, 亡國 상황에서 ‘有機體的 국가’ ‘낭만적 민족주의’ ‘무정부주의적 민중’ 주창
⊙ ‘근대적 시민’보다 ‘민족구성원 전체’ 중시하는 ‘분단사학’으로 이어져
⊙ 공산주의적 혁명노선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더 급진적인 체제 변혁 논리 펼치는 한국적 민중론은 무정부주의에 기초한 단재 사상의 영향

徐明九
1953년 출생.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성신여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통일원 보좌관, 대통령 정책조사비서관, 국회의장비서관 등 역임. 現 성신여대 강사
‘민족주의 사학’의 시조가 된 단재 신채호.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1880~1936)는 근대 역사학을 본격 연구한 학자요 사상가였으며, 무엇보다 탁월한 독립투사이자 혁명가였다. 그는 역사를 발전적으로 이해하고, 특히 역사 속에서 인과(因果)관계를 규명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또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 역사학의 시조(始祖)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다.
 
  반면 그의 사관(史觀)은 근대적인 것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적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먼저 그의 사관이 민족과 민중적 관점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논자(論者)에 따라서는 그것이 단재 사학이 갖는 근대성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종족적·문화적 민족을 강조한다는 점, 그리고 근대적 시민이 아니라 민중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안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그가 보여준 역사서술도 객관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변증법적(辨證法的)인 것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문제는 단재 사관이 갖고 있는 종족적·저항적·민중적 민족주의 측면이 오늘날 한국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한국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무차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반미(反美) 민족주의, ‘우리 민족끼리’로 대표되는 폐쇄적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의 밑바탕에는 단재의 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다만 이 글은 여러 가지 여건상 단재 사관의 전모와 여러 특성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의 사관이 갖고 있는 주요 특징을 정리하고, 이것이 현실에 미치는 영향을 점검, 평가하는 데 국한할 것이다.
 
 
  국가·민족·민중이 핵심
 
  단재 사관의 특징을 정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사관 자체가 시기에 따라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자강주의(自彊主義)를 바탕으로 한 국가주의적 관점을 강하게 보여주었는가 하면, 후기에는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생애 마지막에는 안타깝게도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사상의 발전이 멈추어진 가운데 부분적으로는 국제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하면서 단재 사관의 특징을 살펴본다면, 중요한 키워드는 국가·민족·민중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가 말하는 국가와 민족, 그리고 민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그가 활동했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재는 대한제국 시기에 활동을 시작, 한일합방을 계기로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최근 대한제국 시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일각에 존재하고 있지만, 청일전쟁 이후 조선왕조는 적어도 국제정치적으로는 국가로서의 자립 능력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예민한 감각과 사명감을 가진 젊은 선비 신채호가 엄중한 위기의식을 갖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단재는 이 시기에 무엇보다 국가를 강조하면서 특히 국가의식을 올바로 세울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검토가 필요하다. 효(孝)가 충(忠)에 우선한다는 가치관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조선왕조는 집안[家]의 연장으로서의 일종의 가족국가 원리를 토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단재는 당시 가(家)와 국(國)은 있지만, 법적 결합체로서의 국가(國家)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면서, 새로운 근대적 국가의 상(像)을 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가 제시한 국가상은 중화(中華)질서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립된, 일종의 자기완결적 성격을 강하게 갖는 것이었다. 단재는 중화질서라는 당시까지의 보편적 기준을 부정하고 그 대척점(對蹠點)에 새롭게 국가를 위치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게다가 당시는 외세의 침탈로 국가의 존립 자체를 최우선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단재는 국가를, 일정한 강역 위에서 핏줄과 문화를 함께 이어온 겨레 혹은 동포들로 구성된 ‘유기체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이는 동(同)시대에 활약한 장지연(張志淵)이 국가를 ‘단체적 결합’으로 파악한 것과 대조되는 것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만큼 단재가 상황을 절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급박한 현실은 단재로 하여금 자국(自國) 중심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목적으로 설정하도록 하였다. 단재의 초기 사관은 바로 이렇게 국권(國權) 수호를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정신적 요소를 강조하여 국혼(國魂)을 중요시하였고, 군사적·정치적 영웅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정치적 낭만주의’와 丹齋의 민족
 
프랑스대혁명 당시 소집된 삼부회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스스로를 ‘국민의회’라고 선언, 국민을 새로운 주권체로 선포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단재는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특히 국가 부재의 상황을 맞아 자연스럽게 민족을 최고 가치로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단재가 염두에 둔 ‘민족’이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민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민족은 서구어 ‘nation’의 번역어이다. 그런데 이 ‘nation’이라는 개념이 형성될 당시,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는 대혁명과 연결되어 새롭게 주권체(主權體)로 등장한 ‘국민’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여기에서 ‘국민’은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서 권리와 의무를 갖춘 개인’을 전제로 성립되는 것이다. 문제는 아직 새로운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서의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가치를 현실화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눈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혈연적·종족적·문화적 공동체를 있는 그대로 찬양·미화하려는 경향, 즉 ‘정치적 낭만주의’가 등장하는 데 있다. 전(前)근대적인 집단인 낭만적 민족 위에 정치체제, 즉 국가를 세우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당시 후발국(後發國) 독일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특히 독일인들은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으면서 서구적 가치, 특히 프랑스적 요소들을 배척하고, 독일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개인과 이성(理性)을 토대로 하는 시민화(市民化)라는 의미의 문명(civilization) 개념 대신, 감성과 유기체적 집단성을 강조하면서 언어·민화(民話)·집단서사·영웅을 부각시켰고, 특히 시민적 가치보다는 교양과 같은 내면의 가치를 중시하는 문화(Kultur)를 앞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독일뿐 아니라 많은 후발 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나로드(Narod)가 이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비(非)유럽 세계, 특히 동아시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경우 겨레, 동포라는 것이 실체로 존재하였지만, 아직 국민은 없는 상태였다.
 
  단재가 말하는 민족은 바로 이러한 전근대적인 혈연적·문화적 공동체로서의 민족, 다시 말해 낭만적 민족이었다. 전근대적인 국가가 멸망하고 근대적 국민이 부재한 상태에서 당장의 외세의 침입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전근대적인 민족공동체라도 붙잡고 늘어지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의미의 민족은 강력한 저항적 특징을 수반하면서, 전쟁사관을 중시하였고, 특히 군사적 지도자로서의 민족적 영웅을 전면에 부각시켰던 것이다.
 
  단재의 또 하나의 키워드는 민중이다. 특히 단재는 3·1운동에서 충격을 받았다. 이후 그 한계를 성찰하는 가운데 민중의 개념을 발견하였다. 여기에는 그가 영향을 받았던 사회적 다윈이즘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수용한 무정부주의(anarchism)적 요소가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을 강조하면서도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민중을 민족의 핵심으로 보고, 이들이 주도하는 혁명적 민족주의를 제창하였던 것이다. 이 단계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단재 사관의 특징은 ‘절대적 적(敵)’의 등장이다. 대외적으로는 외적(外敵), 즉 일본제국주의, 대내적으로는 부르주아 지배체제는 일체의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적으로 설정되었다.
 
 
  ‘분단사학’
 
단재 신채호의 《조선사》. 그의 사학은 해방 후에는 ‘분단사학’으로 이어졌다.
  단재 사관은 일제 말과 해방 이후 혼란기를 거쳐 1960년대 이래 이른바 ‘민족사학’ 진영을 중심으로 본격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민족사학은 민족주의의 최대 장애물을 분단에 두고 통일을 핵심 과제로 설정하였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민족통일을 위한 지도 원리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근대 민족주의의 핵심을 ‘근대적 국민’에 두지 않고, ‘민족 구성원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는 데 있다. 서구에서 말하는 근대적 국민이란 사실상 유산(有産)계급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민족 구성원 전체’라는 것은 현재 존재하는 혈연적·종족적·문화적 겨레·동포를 그 자체로서 이상화(理想化)시키는 것으로서, 이는 전형적으로 낭만적 민족주의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종족적·문화적 민족을 이상화하는 낭만적 민족주의는 근대사회를 형성하고 근대국가를 건설, 완성해 나가는 도정(道程)에서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
 
  첫째, 낭만적 민족주의는 근대사회의 가치 자체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어 왔다. 근대사회란 기본적으로 인간 개체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 인권을 존중·보호하는 것을 최대 가치로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근대국가의 정치체제, 즉 헌정(憲政)체제로 나타나며, 이 경우 국가의 구성원이 바로 국민인 것이다.
 
  그런데 혈연적·문화적 동질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근대적 민족주의는 동족(同族)으로서의 민족이 모든 정치체제의 차이보다 우선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분단체제’니 ‘분단사학’이니 하는 것들이 단적인 사례인 것이다. 체제와 가치의 차이를 묻지 않고 오로지 동족이 나뉘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남북한은 정치체제가 다른 원리에 입각해 있고, 특히 북한의 경우에는 인권, 다시 말해 개인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하면서 심지어 그러한 체제를 한반도 전체에 확장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자임(自任)하는 집단이 지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동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북한이 통합될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시각이 범람하면서, 북한의 ‘우리민족끼리’라는 선전 구호가 속절없이 먹혀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근대국가의 주권자로서의 국민, 즉 민족을 형성한다는 근대적 가치 자체가 크게 훼손 받고 있으며,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주의체제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집단주의
 
2017년 10월 23일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관계자들은 촛불 1주년 선포 기자회견을 열고, ‘촛불의 명령’ 아래 소위 사회개혁을 요구했다. 사진=조선DB
  둘째, 인간 개체의 독자적 가치를 인정하지 못한 결과, 개인이 집단 전체에 매몰되는 집단주의적 문화와 사고를 부채질해 왔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북한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원래 북한은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서 민족을 부정하였다. 또한 민중이 아니라 인민 개념을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중소(中蘇)분쟁이 표면화되고 김일성유일사상체제가 등장하면서 점차 독자성과 민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흔히 말하는 국가주의와도 다른 것으로서, 민족·민중 중심의 유기체적 몸통으로서의 집단주의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특히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북한헌법 제63조)”라는 말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민중과 한 치의 간극도 없이 결부된 지도자로서의 ‘수령(首領)’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집단적 개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민족이란 저들 스스로 강조하는바 그대로 ‘김일성 민족’인 것이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성격은 최근 한국 정치에서도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국민주권을 특정 집단이 배타적으로 독점, 전유(專有)할 수 있다는 인식이 나타난 것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이른바 촛불사태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특정 집단이 스스로 국민 전체를 대표하고 진리를 독점하고 있는 것으로 자임하면서, ‘촛불의 명령’이라는 미명하에 이를 사회 모든 부문에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국민주권이 특정 집단에 의해 독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의 선거에 의한 대의제(代議制), 권력분립 등 헌정원리 자체가 형해화(形骸化)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 그 결과 근대적 가치의 핵심인 독자적인 개인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존엄성 자체가 크게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저항민족주의
 
  셋째, 단재의 사관은 강력한 저항 민족주의의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해 왔다는 점이다. 특히 ‘절대 적’을 상정하고 이와의 싸움 구도를 설정함으로써, 내부적으로는 정치의 공간을 부정하는 비타협적 자세를 강조해 온 것이다. 단재 사관의 대표적 문건인 〈조선혁명선언〉을 보면 ‘강도 일본’을 적, 그것도 ‘절대적인 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물론 이는 당시 상황에서 독립운동의 지속과 발전의 명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일제 침략과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이를 ‘현실적 적’으로 설정하는 것을 넘어, 일제를 자국 무산(無産)계급의 혈액까지 착취하는 ‘자본주의 강도국’이라고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나아가 식민 통치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 소수(少數) 특권 계급과 일각의 타협주의 노선을 경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지만, 그들 모두를 일괄적으로 ‘민족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절대화된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해방 이후에도 외부 세력을 적, 특히 절대적인 적으로 설정하는 경향을 추동해 왔다. 특히 도식적(圖式的)인 제국주의론을 빌려 미국을 비판하는 이러한 시각은 북한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났지만, 최근에는 한국 사회에서도 반미·반일(反日)을 강조하는 경향을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는 단순히 외세에 저항, 이를 배격할 뿐 아니라, 나아가 모든 근대적 가치와 21세기 날로 세계화되는 현상 자체를 배격한 채 스스로를 전근대적인 자족적이고 폐쇄적 울타리에 가두려는 경향을 조성해 왔다.
 
  이러한 경향은 민중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단재는 3·1운동에서 민중을 발견하였다. 여기에는 단재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시대적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한반도는 일제 식민지 상황이었고, 그가 망명했던 중국 역시 신해혁명 이후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는 점이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무정부주의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고, 단재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그의 민족, 특히 민중론은 국가가 망해 외적의 손에 들어갔거나 혹은 국가가 와해되어 실질적으로 무정부 상태에 있는 상황적 맥락 속에서 전개된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단재의 민중론은 정치체제, 나아가 정치 자체를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주장한 민중은 철저하게 반엘리트적·반관적(反官的)인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춘원의 〈흙〉과 같은 소설 속에서 나타난 센티멘털한 ‘농민’이 아니라, 절대적인 적에 대한 절대적인 부정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폭력이 정당화되는 가치관을 토대로 등장하는 폭력혁명의 주체로서의 민중이었다. 특히 민중이 직접 폭력을 통해 혁명을 일으킨다는 점에서 중간 엘리트의 존재는 부정된다. 현존하는 일본 제국주의와 그 식민통치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 자체가 부정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현대 한국의 민중론이 공산주의적 혁명노선을 표방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이보다 더욱 철저하고 급진적인 체제 변혁 논리를 펼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단재의 사관과 사상적 맥락 속에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단재 偶像化는 곤란
 
  단재의 사관은 구한말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였던 상황, 그리고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특수한 상황에서 독립운동이라는 지상(至上)과제를 위한 실천적 필요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단재 사관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이론과 사관이 마찬가지지만 이 역시 이론적 문제점과 더불어 시대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시대적 맥락을 떠나 단재의 사관을 절대화·우상화(偶像化)하는 태도에 있다. 단재 개인의 상황을 살펴보더라도 그는 영어의 몸이 되어 자신의 사상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했다. 다만 말년에 감옥에서 에스페란토어를 공부한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국제주의적인 측면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의 민족사학자들은 단재가 특수한 상황에서 전개한 논리를 일반화·보편화하여 자신의 편협한 민족주의·민중주의를 합리화하는 데 이용해 왔다.
 
  이제 단재를 더 이상 좁은 틀에 가두지 말고, 그가 활동했던 시대적 맥락 속에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오늘의 미래지향적, 전진적 시각에서 창조적으로 해석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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