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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집권 한 달

궤멸한 한국 보수, 영국 보수당에 삶의 길을 묻다

300년 이어온 영국 보수당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생존했나?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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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버트 필, 곡물법 폐지 등 개혁정책 추진, 보수당으로 개칭(1830~1840년대)
⊙ 디즈레일리, ‘하나의 국민’ 내세우며 사회개혁 적극 추진하면서 ‘국민정당’으로 탈바꿈
    (1860~1870년대)
⊙ 스탠리 볼드윈, 노조·노동당 끌어안는 ‘새로운 보수주의’ 주장해 좌우극단 세력 방지(1920년대)
⊙ 1945년 총선 참패 후 조사국·청년보수운동·보수정치센터 만들고 충원구조 개선…, 젊은 피 수혈
⊙ 대처, 자유주의 내세워 노조 파업 진압하고 ‘영국병(英國病)’ 치유(1980년대)
⊙ 1964년, 1997년 총선 패배 후에는 당수(黨首) 선출 제도 개혁해 새로운 리더 출현할 길 열어
⊙ 이념보다는 선거 승리 우선시하는 실용주의, 충성과 결속 강조, 조직과 홍보에서도 경쟁 당 앞서
  5월 9일 실시된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종래 한국 보수 세력을 대표해 오던 자유한국당은 참패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의 득표는 24.03%에 그쳤다. 민주정의당→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으로 이어진 보수가 이렇게 적은 표를 얻은 것은 처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 보수 세력은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이런 한국의 보수가 배워야 할 ‘선배 정당’이 바로 영국의 보수당이다. 토리(Tory)라는 이름의 당파로 등장한 것부터 하면 340년, 보수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때로부터는 190년이 되어 가지만 보수당은 여전히 건재하다.
 
  건재할 뿐만 아니라 20세기 이후에도 4분의 3 가까운 기간을 집권당으로 군림했다. 미국·프랑스·독일 등 구미(歐美) 선진국 가운데서 이렇게 압도적 위상을 자랑하는 정당은 없다. 그것도 스스로 ‘보수당(Conservative Party)’임을 전면에 내세우고 거둔 성과라는 점이 경이롭다.
 
  340여 년간 영국 보수당이 탄탄대로만을 달려온 것은 아니다. 때로는 10~60년간 정권을 잃었다. 영국에서 1830년대 이후 보수당은 대략 7번의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철저한 자기 개혁을 감행해 화려하게 재기(再起)했다.
 
 
  1.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 로버트 필
 
  ▶ 시대적 배경
 
  1783년 이후 1830년 초까지 영국 정치는 간혹 휘그당이 정권을 잡기는 했어도 토리당이 장악해 왔다. 이 기간 영국은 윌리엄 피트 Jr.(小피트)의 영도 아래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늘도 있었다. 이 시기의 정치 쟁점은 두 가지였다.
 
  첫째, 의회 및 선거제도의 개혁이었다. 18세기 말부터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상공업 계층과 노동자 계층이 등장했다. 농촌인구는 줄고 도시인구는 늘었다. 그런데도 선거구는 농업이 산업의 전부이던 17세기 스튜어트 왕조 시절에 만들어진 그대로였다.
 
  상공업·노동자 계층에게 투표권을 확대하고 농촌 선거구를 줄이는 대신 도시 선거구를 늘리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의원 대부분이 지주·귀족이었던 토리당은 개혁에 소극적이었다. 토리당은 나폴레옹전쟁을 치르는 동안 법과 질서를 내세워 정치적 자유를 통제했던 타성에 젖어 있었다.
 
  둘째, 곡물법 폐지 문제였다. 1815년 제정된 곡물법은 외국산 곡물에 고율의 관세를 매겨서 국내 농업을 보호하는 법이었다. 이는 토리당의 주류 세력인 지주 계층에게 유리했다. 비싼 값으로 곡물을 소비해야 하는 도시 노동자나 상공인들의 입장에서는 악법이었다.
 
  상공인들은 값싼 외국산 곡물을 수입하는 대신 영국이 우위인 공산품을 수출할 수 있는 자유무역체제를 선호했다. 이들은 1838년 공업 중심지이던 맨체스터에서 반(反)곡물법연맹을 만들었다. 영국 잡지 《이코노미스트》는 반곡물법연맹 주도자인 제임스 윌슨이 창간한 것이다.
 
  토리당은 이런 문제들에 소극적으로 임하다 1830년 총선에서 패해 휘그당에 정권을 내줬다. 그레이 수상이 이끄는 휘그당은 개혁에 호의적인 새 국왕 윌리엄 4세의 지원 아래 1832년 개혁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농촌 선거구는 대거 폐지되고 도시 선거구가 늘어났다.
 
  도시 중산층에게 새로 투표권을 주면서 유권자 수가 약 50만명에서 81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개혁에 저항했던 토리당은 1832년 총선에서 심판을 받았다. 휘그당 및 개혁 동조 세력이 483석을 차지한 반면, 토리당은 175석에 그쳤다. 토리당은 끝장난 것 같았다.
 
 
  ▶ 보수당의 대응
 
  보수당으로 개칭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 로버트 필.
  이때 등장한 인물이 로버트 필(1788~1850·수상 재임 1834~1835년, 1841~1846년)이다. 필은 면직물 산업으로 부(富)를 축적한 신흥 공업 가문 출신이었다. 전임자인 웰링턴이 전통 귀족이자 전쟁영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출신 배경부터 달랐다.
 
  첫째, 필은 도시 상공인들에게 접근했다. 1834년 발표한 ‘탬워스 강령’이 그것이다. 필은 자기 지역구인 탬워스의 유권자들 앞에서 발표한 이 선언에서 반동(反動)과 혁명을 모두 거부하면서 1832년의 개혁을 존중하고 추가적인 개혁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이 선언은 선거 직전 정당이 정강·정책이나 선거공약집을 발표하는 선구(先驅)가 됐다.
 
  둘째, 당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정비했다. 필이 1830년대 초부터 ‘토리’ 대신 ‘보수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보수당’으로 당명(黨名)이 바뀌었다. 조직사업을 담당하는 유급 직원을 채용하고 지구당 조직을 구축하고 원내총무(Chief Whip) 제도를 도입한 것도 필이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필은 1841년 총선에서 승리했다. 국왕이 지명한 사람이 아니라 선거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한 정당의 당수가 수상이 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다.
 
 
  곡물법 폐지
 
  수상이 된 필은 1846년 곡물법 폐지를 단행했다. 여기에는 그 무렵 발생한 아일랜드의 대기근을 수습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지주와 소작인들은 “곡물세가 폐지되면 영국의 농업은 망한다”고 반대했다. 보수당 내 농촌 출신 의원들이 이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러나 필은 보수당 내 개혁 세력과 자유무역주의를 지지해 온 휘그당의 도움을 받아 곡물법 폐지에 성공했다.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 앨버트 공이 “경(卿)이 나라를 살렸다”고 칭송했지만 그 대가는 컸다.
 
  보수당 내 벤저민 디즈레일리 등 ‘보호무역주의 보수파’는 휘그당과 결탁해 1846년 필 수상 정부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필은 보수당이 무조건 기득권을 옹호하는 반동집단이 아니라 내홍(內訌)을 감수하고라도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정치 세력임을 보여주었다. 필은 지금 ‘근대 보수주의의 아버지’라 불린다.
 
토리와 휘그의 등장과 의회 정치의 발전
 
  영국에서 보수당의 전신(前身)인 토리(Tory)당이 등장한 것은 1670년대다. 당시 영국 의회는 찰스 2세의 동생으로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의 왕위(王位) 계승 수용 여부를 놓고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가톨릭교도지만 왕가(王家)의 후예가 왕위를 계승하는 걸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게 토리였다. 가톨릭 신자인 제임스 2세가 즉위하면 영국 의회 제도와 성공회(국교회)가 위기에 처한다고 생각한 게 휘그(Whig)다.
 
  ‘토리’는 아일랜드어로 ‘산적(山賊)’이라는 뜻이다. ‘휘그’는 스코틀랜드어로 ‘말도둑’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빨갱이’니 ‘극우’니 하면서 상대방을 욕하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당’이라고 하지만 토리당이나 휘그당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념과 조직을 가진 정당이었던 것은 아니다. 계급적으로 토리는 귀족과 농촌 지주들의 입장을, 휘그는 도시의 신흥상공업자들을 대변한다고는 했지만 경계는 느슨했다.
 
  1714년 앤 여왕이 죽고 하노버 왕조가 들어선 후 60년간 영국 정치는 휘그당이 좌우했다. 토리당은 제임스 2세의 후손을 왕위에 올리려 한 반면 휘그당은 앤 여왕의 6촌뻘인 독일 하노버의 조지 1세를 적극 밀었기 때문이었다.
 
  휘그당 정권은 1770년 조지 3세가 장기 집권해 온 휘그당을 견제하기 위해 노스를 수상으로 임명하면서 막을 내렸다. 본격적인 토리당 정권은 1783년 집권한 윌리엄 피트 주니어(小피트) 때부터 시작됐다.
 
 
  2. ‌‘보수당의 아버지’ 벤저민 디즈레일리
 
  ▶ 시대적 배경
 
  로버트 필의 개혁정책, 특히 곡물법 폐지는 보수당의 분열을 가져왔다. 보수당의 전통 주류였던 지주 계층은 필의 개혁에 반발했다. 필의 사후(死後) 그의 반대파들이 보수당을 장악했다. 이에 실망한 필의 지지자들은 휘그당으로 당적(黨籍)을 옮겼다.
 
  이때 휘그당으로 간 필 수상 지지자들 중에는 후일 자유당 출신 수상이 되는 윌리엄 글래드스턴(1809~1898·수상 재임 1868~1874, 1880~1885, 1886, 1892~1893)도 있었다. 1859년 이들과 기존 휘그당 세력은 자유당(Liberal Party)을 창당했다. 19세기 후반 영국 정치를 주도했던 보수당과 자유당은 모두 로버트 필의 자식들인 셈이다.
 
  필 지지 세력의 이탈로 인한 분당(分黨) 사태와 리더십 부재(不在)로 인해 보수당은 1846년부터 1874년까지 정권을 잃었다(1868년 보수당 정부가 출범했지만 단명했다).
 
  이 시기에도 정치 쟁점은 선거권 확대였다. 1832년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유권자 수는 여전히 제한돼 있었다. 1850년대부터 투표권을 도시 노동 계급에게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졌다. 프랑스·독일 등 대륙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이 확산됐다. 프랑스에서는 1871년 보불전쟁 패배의 와중에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가 유혈 진압됐다(파리코뮌).
 
 
  ▶ 보수당의 대응
 
  제2차 선거법 개혁 선도
 
영국 보수당의 이념을 제시한 벤저민 디즈레일리.
  보수당을 되살린 것은 벤저민 디즈레일리(1804~1881·수상 재임 1868, 1874~1880)였다. 국교도로 개종한 유대계 상인의 아들인 디즈레일리는 귀족-지주-국교회 신자라는 보수당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소설가이기도 했다.
 
  디즈레일리는 숙제였던 제2차 선거법 개정을 주도했다. 그는 1867년 자유당의 주장보다 더 진보적인 제2차 선거법 개정안을 제안해 의회에서 통과됐다. 그 결과 100여만 명의 유권자가 늘어났는데, 이들 대부분은 도시 노동자들이었다.
 
  이듬해 빅토리아 여왕은 디즈레일리를 수상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새로 선거권을 갖게 된 유권자들은 그해 총선에서 자유당을 지지했다. 디즈레일리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제2차 선거법 개정을 선도함으로써 보수당은 시대가 필요로 하는 개혁을 거부하지 않는 정당임을 재입증했다. 야당이 된 디즈레일리는 다시 보수당을 바꾸어 나갔다.
 
 
  3대 이념 제시, 당 조직 정비
 
  첫째, 보수당의 이념을 제시했다. 1872년에 행한 연설에서 디즈레일리는 “보수당만이 왕정·의회·국교회와 같은 영국 헌정질서를 보존하고, 대영제국을 수호하며, 일반 국민의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헌정질서 보존(애국주의), 대영제국 수호(제국주의), 국민 생활 수준의 증진(사회개혁)이라는 세 원칙은 이후 보수당을 규정하는 강령이 됐다.
 
  둘째, 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보수당을 ‘국민정당’으로 개조했다. 디즈레일리는 ‘하나의 국민(One Nation)’이라는 가치를 특히 강조했다. 그는 1845년 발표한 《시빌, 혹은 두 개의 국민들》이라는 소설에서 당시 영국을 소통도 동정심도 없고 서로를 잘 모르는 ‘두 개의 국민’으로 갈라진 사회로 묘사했다.
 
  디즈레일리는 그 이유가 기득권층, 엘리트층이 자기 책임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 그는 이렇게 강조했다.
 
  “보수당은 엘리트나 어느 특정 계급의 당이 아니라 전 국민의 당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덕분에 보수당은 종래 귀족과 지주들의 정당에서 산업혁명 이후 성장한 자본가나 중산층, 전문직은 물론 도시 노동자도 끌어안는 ‘국민정당’으로 거듭났다.
 
  셋째, 당 시스템을 근대화했다. 1867년에는 보수당의 원칙과 이념을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해 보수헌정단체전국연맹(전국연맹)을, 1870년에는 기금 모금과 홍보를 담당하는 보수당 중앙사무국을 설립했다.
 
  넷째, 1850년대에 경험했던 분열에서 교훈을 얻어 당원들에게 충성과 결속을 강조했다. 디즈레일리는 말했다. “빌어먹을 너의 원칙을 버려라. 그저 당에 충성해라.” 보수당의 경쟁자였던 자유당은 후일 분열로 자멸했지만 보수당은 이후 분당에 이르는 극심한 분열을 겪지 않았다.
 
 
  광범위한 사회개혁 단행
 
  이런 노력에 힘입어 디즈레일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1874년 총선에서 승리, 28년 만에 정권을 탈환했다. 정권을 잡은 디즈레일리는 공중보건법, 식품의약법, 직공거주법, 굴뚝소년법, 공장법을 제정하는 등 광범위한 사회개혁을 단행했다.
 
  1875~1878년 발칸반도 문제를 놓고 조성된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 열린 베를린회담에서는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고 키프로스섬을 손에 넣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1876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을 영국의 식민지이던 인도 황제로 추대해 대영제국의 영광을 과시했다. 이런 대외 행보는 국민들의 애국주의·제국주의적 열정을 충족시켜 주었다.
 
  디즈레일리는 침체에 빠졌던 보수당을 재기시켰을 뿐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보수당의 가치를 정립했다. 그가 제시한 ‘하나의 국민’이라는 가치는 20세기에 보수당이 복지국가 개념을 수용한 이념적 바탕이 됐다. 디즈레일리는 ‘보수당의 아버지(founder of the party)’라 불린다.
 
 
  3. ‌1차 대전 후의 위기를 극복한 스탠리 볼드윈
 
  ▶ 시대적 배경
 
  디즈레일리 이래 보수당에는 유능한 지도자가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보수당 지도자들은 도토리 키 재기식 인물들뿐이었다. 당내에서는 보호무역주의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됐다. 1850년대에 곡물법 파동으로 인한 분당의 교훈 덕분에 당이 갈라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 각국이 격동에 휩싸였다. 러시아·오스트리아·오스만튀르크제국이 붕괴했다. 러시아에 들어선 소비에트 공산 정권이 혁명을 수출하자 유럽 각국에서 계급투쟁이 벌어졌다. 이탈리아에서는 극우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섰으며 독일에선 1933년 히틀러가 집권했다.
 
  이런 국제 정세는 영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1차 대전의 여파로 대영제국의 위세가 하락하기 시작했다. 전쟁의 충격으로 기성의 가치 체계가 무너졌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경제 침체가 왔고 파업이 자주 발생했다. 여성들이 참정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1922년 총선부터는 보수당의 오랜 맞수이던 자유당이 몰락하고 노동당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 보수당의 대응
 
  ‘새로운 보수주의’ 통해 사회통합 추구
 
‘새로운 보수주의’를 강조한 스탠리 볼드윈.
  도전의 시대에 보수당을 이끌게 된 사람이 스탠리 볼드윈(1867~1947·수상 재임 1923~1924, 1924~1929, 1935~1937)이었다. 볼드윈은 지방의 제철업자 출신으로 보수당의 주류 세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볼드윈은 변화한 사회환경에 다음과 같이 대응해 나갔다.
 
  첫째, 사회적 조화, 산업적 동반자 관계, 대결보다 합의를 중시하는 ‘새로운 보수주의(New Conservatism)’를 주창하고 사회개혁에 나섰다. 그의 집권기간 중 남녀동등선거권 부여, 낙후지역 개발, 대도시 교통체계 개선, 의무교육 기간 연장, 과부·고아·노령연금 도입 등의 개혁이 이뤄졌다. 그는 디즈레일리 이후 가장 적극적으로 개혁을 추진한 보수당 인물이다.
 
  둘째, 보수당이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책임 있고 능력 있는 정당임을 부각시켰다. 볼드윈은 1926년 연설에서 “상대 정당이 ‘분파주의’를 퍼뜨린 결과 영국인들은 사적인 목적만을 추구하게 되었다”면서 “보수당은 ‘어떤 한 계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해 통치하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다’는 점을 유권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학자 닐 R. 매크릴리스는 이 연설을 보수당이 1990년대까지 주도권을 잡게 된 시발로 본다. ‘보수당은 통치에 적합한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유권자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는 볼드윈의 주장은 보수당의 철칙이 됐다.
 
  셋째, 볼드윈은 노동조합이나 새로 등장한 노동당에 대해서도 수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보수당 내 강경파가 주장하던 반(反)노조 입법에 반대했다. 1926년 탄광노조가 중심이 된 총파업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처럼 갈등으로 번지지 않은 것은 볼드윈의 태도에 힘입었다.
 
  볼드윈은 1931년에는 보수당-노동당 연립정부를 성립시켰다. 처칠 등 당내 보수파들은 노동당을 ‘빨갱이’로 보았지만 볼드윈은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당을 헌정의 파트너로 받아들인 것이다.
 
  넷째, 시대의 변화에 맞는 홍보 수단을 적극 도입했다. 1920년대에 보수당은 좌파독서클럽에 맞서 우파독서클럽을 만들어 보수 이념을 전파하고 지지자들을 조직화했다. 초롱불강연, 영화트럭 등 대중친화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막 각광을 받기 시작한 라디오를 자유당이나 노동당보다 먼저 활용했다. 덕분에 그는 ‘많은 유권자가 얼굴을 기억하는 최초의 정당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항상 구닥다리 홍보만 하는 한국 보수당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볼드윈은 한국인들에게는 생소하다. 그는 요란하지 않고 건실하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절제와 중용의 정치인이었다. 볼드윈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좌우 양극단 세력에게 넘어가던 1920~1930년대에 영국의 안정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60년대에 영국 수상을 지낸 해럴드 맥밀런 등 보수당 내 개혁파 정치인들이 볼드윈 시절에 정치에 입문했다.
 
 
  4. ‌1945년 총선 참패 ‑ 복지국가를 받아들이고 ‘젊은 피’ 수혈
 
  ▶ 시대적 배경
 
  1945년 7월 총선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에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전시(戰時)연립정부를 이끌며 전쟁에서 승리한 윈스턴 처칠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국민들은 클레멘트 애틀리의 노동당을 선택했다. 노동당은 47.8%, 보수당은 39.8%를 얻었다. 보수당은 1935년 얻었던 432석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213석에 그쳤다. ‘보수 대학살’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노동당은 1920년대에 짧은 기간 집권했다가 통치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고 무너졌던 그 노동당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립정부에 참여하며 국정수행 능력을 키웠다. 1942년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내세운 〈비버리지 보고서〉를 통해 복지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 주효했다.
 
  대공황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 국민들은 개혁 편에 섰다. 일부 보수당 인사들조차 “국민들에게 사회개혁을 주지 않으면 그들이 우리에게 사회혁명을 가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처칠은 전쟁 수행에 여념이 없었고 많은 보수당 인사는 사회개혁을 사회주의로 간주해 거부했다. 보수당의 패배는 예정된 것이었다.
 
  노동당의 압승을 본 보수당 의원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진보적 젊은 세대의 지지에 힘입어 노동당이 향후 20년은 집권할 것이라는 전망이 그들을 절망케 했다. 총선 패배 직후 열린 평의원 모임에서 한 보수당 의원은 넋이 나간 처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나는 보수당이 이제 완전히 죽었구나 하는 두려움을 갖고 그 자리에서 나왔다”고 술회했다.
 
 
  ▶ 보수당의 대응
 
  복지·국유화 등 수용
 
1945년 총선 패배 후 ‘산업헌장’ 채택을 주도한 리처드 버틀러.
  40년래의 최악의 참패를 당한 보수당은 시대의 흐름을 일단 수용하는 한편 철저하게 당을 개혁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당의 중진 리처드 버틀러, 울튼 경, 데이비드 맥스웰-파이프, 퀸틴 호그 등이었다.
 
  첫째, 버틀러는 “로버트 필이 수상으로 있던 시기처럼 보수당은 이제 사회적 혁명에 우리가 제대로 적응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버틀러가 위원장을 맡은 보수당 산업정책위원회는 1947년 ‘산업헌장’을 발표했다. 여기서 보수당은 산업에 대한 국가 개입의 인정, 주요 산업의 국유화, 노사 간 협력, 국민의료보험(NHS) 설립 등 복지에 대한 국가책임 등을 받아들였다. ‘산업헌장’ 초안을 받아본 처칠은 “이제 우리 당에도 사회주의자가 있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1951년 정권을 탈환한 후에도 보수당은 노동당이 도입했던 경제·사회정책의 기조를 유지했다. 이런 상황은 1979년 마거릿 대처가 집권할 때까지 계속됐다. 이 때문에 보수당과 노동당의 경제·사회정책이 비슷했던 1945~1979년의 시기를 ‘합의의 시대’라고 한다.
 
  둘째, ‘밀리언펀드(Million Fund)’운동을 통해 당 조직을 재건했다. 당시 보수당은 전쟁과 총선 패배를 겪으며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당 의장 울튼 경은 1947년 당원들에게 100만 파운드를 모금해 중앙당에 헌납하는 운동을 제안했다.
 
  당시 100만 파운드는 쉽게 모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모금운동 과정에서 침체된 지구당 조직들이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48년 밀리언펀드운동은 당초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중앙당은 든든한 정치자금을 확보했고 당원들은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보수당원은 1946년 93만7000여 명에서 1950년 276만명으로 늘어났다.
 
 
  ‘젊은 피’ 수혈
 
‘청년보수주의운동’을 지원한 울튼 경.
  셋째, 정책연구·교육 기능을 강화했다. 버틀러는 전시 중에 자신이 이끌던 ‘전후문제처리중앙위원회’를 정책자문위원회로 개편하고 전시에 폐지됐던 조사국을 부활시켰다. 조사국은 정책개발, 연설, 선전 등을 위한 기초 자료를 당에 제공했다. 여기서 이안 매클로드, 에녹 파월, 레지널드 모들링 등 차세대 정치인들이 육성됐다.
 
  특히 에녹 파월은 1960년대 이후 자유주의적 경제·사회정책을 주장해 마거릿 대처의 등장을 예비한 인물이다. 2010년에 14년 만에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전 수상 데이비드 캐머런도 조사국 출신이다. 버틀러는 보수당정치센터도 만들었다. 여기서 당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수집하고 소통시켰다.
 
  넷째, ‘젊은 피’를 수혈할 기구를 만들었다. 울튼 경의 지원 아래 1946년 청년보수운동(Young Conservative movement)이 시작됐다. 당시 영국 젊은이들은 경제대공황으로 인한 자본주의에 대한 실망, 1930년대 소련 계획경제의 성공, 파시즘 세력과의 전쟁 때문에 좌경화돼 있었다. 이러한 풍조가 1945년 노동당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울튼 경은 1945년 총선 패배를 교훈 삼아 청년보수당(Young Conservatives)을 창설했다. 1949년 보수당은 2375개의 지역조직과 16만여 명의 청년당원들을 확보하게 됐다. 후일 수상이 되는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등이 청년보수운동을 통해 정치에 입문했다.
 
  다섯째, 재정 모금 및 당 후보 충원 구조를 개혁했다. 데이비드 맥스웰-파이프가 이끄는 위원회는 1948년 공직 후보자나 의원 대신 지구당 조직이 운영 및 선거비용을 부담하는 개혁안을 내놓았다. 공직 후보자는 연간 25파운드, 의원은 연간 50파운드 이상의 금액을 기부하지 못하도록 했다. 모금에 적극적이지 않은 지구당은 중앙당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했다. 소수의 지역 유지보다는 다수의 보통 사람들의 기부에 의지하게 되면서 지구당 조직이 활성화됐다.
 
  개혁의 결과 돈은 없어도 젊고 유능한 보수주의자들이 정치에 입문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 1960년대 이후 에드워드 히스,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등 중·하류층 출신 보수당 수상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이었다.
 
 
  보수주의의 정체성 확인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를 출간한 퀸틴 호그.
  여섯째, 보수주의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수당의 중진 퀸틴 호그는 유명한 ‘펭귄문고’에 의뢰해 《보수주의란 무엇인가》라는 문고판 책자를 간행하도록 했다. 호그는 “보수주의는 모든 변화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곧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일시적인 시대적 유행이나 사고방식에 저항하며 사회적 균형을 잡는 것”이라면서 “보수주의는 점진적 변화와 전통을 중시하고 그에 기초한 유기적이고 인본적인 사회를 보호하려는 중도적 입장을 대변한다”고 역설했다.
 
  보수당은 1947년 발표한 ‘산업헌장’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은 국민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믿는다. 보수주의자들은 국민에게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표를 의식해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보수주의의 마지노선은 지키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20년간 정권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던 보수당은 1951년 정권을 탈환, 1964년까지 집권했다.
 
 
  5. ‌1964년 총선 패배 ‑ 당수 선출 제도를 개혁하다
 
  ▶ 시대적 배경
 
  보수당 정권이 13년간 이어지면서 국민들이 피로감을 느꼈다. 실책도 잇따랐다. 앤서니 이든(1897~1977·수상 재임 1955~1957) 수상은 1956년 이집트 나세르 정권이 영국이 관리하던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하자 이를 막기 위해 프랑스·이스라엘과 연합해 군대를 보냈지만 미국·소련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대영제국의 조락(凋落)만 확인시켜 준 것이다.
 
  해럴드 맥밀런(1894~1986·수상 재임 1957~1963) 수상은 경제성장 덕분에 인기를 누렸지만 육군장관의 섹스스캔들(프로퓨모 사건)로 물러나야 했다. 맥밀런의 뒤를 이은 알렉 더글러스-흄(1903~1995·수상 재임 1963~1964)은 1964년 총선에서 노동당의 해럴드 윌슨(1916~1995·수상 재임 1964~1970, 1974~1976)에게 패했다. 젊은 정치인 해럴드 윌슨은 미국의 존 F. 케네디처럼 TV시대에 걸맞은 이미지 정치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귀족(백작) 출신인 더글러스-흄은 낡아 보였다.
 
 
  ▶ 보수당의 대응
 
  1964년 패배 후 보수당은 당수 선출 방식을 개혁했다. 대중 기반이 없는 더글러스-흄이 보수당 당수·수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매직 서클(magic circle)’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원로·중진들이 밀실합의로 당수를 선출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 퇴임하는 당수(수상)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보수당은 소속 하원의원들의 표결로 당수를 선출하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의원들의 투표에서 과반수를 차지하되, 2위 후보보다 득표수에서 15% 이상 표를 얻어야 당수로 당선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1차 투표에서 당선자가 없으면 2차 투표를 실시해 과반수 득표자를 당수로 뽑도록 했다. 2차 투표에서도 당선자가 없으면 상위 3명이 3차 투표를 해 과반수 득표자를 선출하도록 했다.
 
  그 결과 당수 선출 과정이 투명해지고 의원들과 국민여론이 더 잘 반영됐다. 이듬해 에드워드 히스(1916~2005·수상 재임 1970~1974)가 당수로 당선됐다. 그는 중하(中下)에 속하는 집안 출신으로 공립학교를 나와 옥스퍼드대학에 진학한 인물이다. 보수당은 한 발 더 대중에게 다가가는 데 성공했다.
 
 
  6. ‌마거릿 대처·자유주의 혁명으로 ‘영국병’을 고치다
 
  ▶ 시대적 배경
 
1979년 총선 당시 영국 보수당의 포스터. 노동당의 무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히스는 1970년 정권을 탈환했지만 인상적인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지적이고 실무 능력이 뛰어났지만 대중적 매력이나 소통 능력이 부족했다. 히스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을 자랑하던 노조에 맞서 노동법 개혁 등을 추진했지만 노조의 압력에 굴복해 개혁을 포기했다. 히스는 1974년 ‘누가 영국을 통치하는가?’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총선에 임했지만 오히려 노동당에 정권을 내주었다. 보수당 내에서는 히스의 사임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리더십의 위기보다 더 큰 문제점은 ‘정체성의 위기’였다. 1945년 이후 보수당이 노동당이 제시했던 복지국가, 경제에 대한 국가 간섭, 국유화 등을 받아들인 결과 보수당의 정체성이나 정책이 노동당과 크게 다를 바 없어졌다.
 
  1978~1979년 겨울 영국을 마비시킨 공공부문 파업이 일어났다. 영국을 통치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라 노조였다. 쓰레기를 제때 치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료 서비스가 마비돼 수많은 노인이 희생됐다. 경제는 침체됐다. 외국에서는 ‘영국병(英國病)’이라며 조롱했다. 국민들은 이 시기를 ‘불만의 겨울’이라고 불렀다.
 
 
  ▶ 보수당의 대응
 
  뉴라이트의 등장
 
자유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마거릿 대처.
  1975년 보수당은 당수로 여성인 마거릿 대처(1925~2013·수상 재임 1979~1990)를 선출했다. 시골 잡화점 주인을 하다가 작은 도시의 시장을 지낸 아버지를 둔 대처는 전형적인 중산층 출신이었다. 각료 경험이라고는 히스 정권 시절 교육과학부 장관을 지낸 것이 전부였다.
 
  대처는 뉴라이트(New Right)였다. 뉴라이트는 1945년 이후 보수당이 취해온 사회주의 유화적 태도에서 벗어나 자유시장경제 원칙에 바탕을 두고 영국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당 내 개혁 세력이었다.
 
  1979년 ‘불만의 겨울’을 겪은 국민들은 변화를 갈망하게 됐다. 총선에서 보수당은 43.9%의 득표율로 339석을 얻어 승리했다. 과반을 43석이나 넘는 압도적 승리였다. 철저한 자유주의자이자 보수주의자인 대처의 등장 자체가 보수당의 변화를 의미했다. 이후 대처는 3기에 걸쳐 11년간 집권하면서 ‘대처혁명’을 이루었다.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도하다가 좌절했던 히스와는 달리 대처는 영국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철저한 이념 무장
 
  첫째, 철저한 이념 무장이었다. 원래 영국 보수당은 이념보다는 집권을 우선시하는 실용정당의 성격이 강했다. 영국 헌정의 전통에 대한 충성심은 강했지만 실제 정치나 정책에서는 유연했다. 대처는 이런 전통을 뒤집어 버렸다.
 
  대처는 생래적으로 자유주의자이자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정책으로 옮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교육과학부 장관 시절에는 학생들에 대한 우유 무상급식을 폐지해 ‘우유 도둑’ ‘마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74년부터 대처는 키스 조지프 등과 당내에 정책연구센터를 만들어 시장경제이념을 전파했다. 이와 함께 근검·절약·저축·자조·애국심·법질서 등 ‘빅토리아 시대의 가치’를 강조했다. 이런 대처의 행태는 1945년 이후 영국을 지배해 온 ‘합의의 정치’에 대한 난폭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보수당원들과 영국 국민들이 변화를 요구할 때, 대처만이 그에 호응할 준비가 돼 있었다.
 
  둘째, 불퇴전의 신념이었다. 집권 초기 대처는 자유주의적 개혁을 시작했지만 실업률 증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테러 등으로 위기에 처했다. 당내 반대파와 언론은 대처가 히스처럼 곧 자신의 정책을 포기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대처는 1980년 보수당 연례 전당대회에서 일갈했다. “유턴(U-turn)이라는 낯익은 미디어의 표현에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내가 해줄 말은 한 가지뿐이다. 원하면 되돌아가라. 나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대처 1기 정부가 곤경에 처해 있던 1982년 5월 아르헨티나의 갈티에리 군사정권이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했다. 대다수 영국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섬을 탈환하기 위해 대처는 함대를 보냈다. 대처는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국민들은 대영제국의 영광을 회복한 듯 환호했다. 대처는 1983년 총선에서 압승했다. 이를 바탕으로 대처는 그해부터 공공임대주택 및 공기업주식 매각 등 민영화와 노조개혁을 실천에 옮길 수 있었다.
 
  셋째, 철저한 준비 끝에 ‘영국을 통치하던’ 노조를 꺾었다. 1983년 9월 대처 정부는 채산성이 맞지 않는 탄광들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아서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서 스카길이 이끄는 전국광부노조는 1984년 3월 총파업에 들어갔다. 대처는 1년 전부터 석탄을 광부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에 비축하고 운송망을 정비하는 등 노조의 파업에 대비하고 있었다. 파업은 1년 이상 계속됐지만 과거 광부노조 파업 때와 같은 혼란은 없었다. 노조는 1985년 2월 손을 들었다.
 
 
  인두세 문제 등으로 퇴진
 
  대처는 1990년까지 11년간 집권했다. 그때까지 20세기 이후 그처럼 연속해서 장기 집권한 경우는 없었다. 성공에서 자신감을 얻은 대처는 임기 말이 될수록 독선적이 되어 갔다. 1988년 인두세(人頭稅) 도입은 전국적인 폭동을 유발했다. 유럽연합 가입을 놓고도 대처는 미온적 태도를 보여 당내 반발을 샀다.
 
  1990년 11월 대처의 리더십에 반대하는 당내 반란이 일어났다. 대처는 1차 투표에서 다수표를 얻기는 했지만 1964년 마련된 규정에 따라 당수 당선에 필요한 표를 얻지 못했다. 대처는 2차 투표로 가지 않고 용퇴했다. 후임은 존 메이저(1943~·수상 재임 1990~1997)가 되었다.
 
  대처는 보수당 역사에서 보기 드문 ‘이념형 지도자’였다. 그는 영국병을 치유한 것은 물론 영국인의 의식까지 자유주의적·시장친화적으로 확 바꾸어놓았다. 그의 정치 이념과 행태를 ‘대처리즘’이라고 하는데, 영국 역사상 수상의 이름 뒤에 ‘이즘(ism·주의)’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대처가 유일하다.
 
 
  7. ‌데이비드 캐머런 ‑ 보수당을 재건하다
 
  ▶ 시대적 배경
 
  대처가 장기 집권하는 동안 노동당은 대처의 자유주의 정책에 반발해 더욱 더 극좌적으로 기울었다. 그러다가 1994년 토니 블레어(1953~·수상 재임 1997~2007)가 당수가 되었다. 41세의 블레어는 ‘제3의 길’ ‘신노동당’을 내세웠다. 당 강령에 있던 사회주의니 국유화니 하는 내용들을 삭제했다. 대처가 추진해 온 국가경쟁력 제고, 노동시장 유연화, 복지지출 축소, 법질서 유지 등을 수용했다. 이 때문에 블레어는 ‘대처의 아들’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1997년 18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노동당은 419석을 얻은 반면 보수당은 165석에 그쳐 1832년 이래 최악의 패배를 맛보았다.
 
  이후 보수당은 대처 유산의 계승 문제, 유럽통합 문제 등을 두고 내홍을 겪었다. 윌리엄 헤이그, 던컨 스미스, 마이클 하워드 등이 잇따라 당수를 맡았지만, 토니 블레어에게는 역부족이었다.
 
 
  ▶ 보수당의 대응
 
39세의 나이로 보수당 당수가 되어 정권을 탈환한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은 당장 효과는 없었지만 필요한 개혁을 하면서 미래를 준비했다.
 
  첫째, 윌리엄 헤이그는 당수 선출 제도를 다시 개혁했다. 과거 의원들만 참여하던 것을 바꾸어 당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형태로 바꿨다.
 
  이 개혁은 2005년 12월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데이비드 캐머런(1966~·수상 재임 2010~2015)이 당선되는 기반이 됐다. 캐머런은 의원들의 투표에서는 패하거나(1차 투표), 근소한 차이로 이겼지만(2차 투표) 당원투표에서는 2배 이상의 득표로 승리했다. 당시 캐머런은 39세에 불과했다. 각료 경험도 없었다. 하지만 당원들은 토니 블레어를 누르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절박감에서 캐머런을 선택했다.
 
  둘째, 보수주의 이념의 재확인이다. 노동당에 연패하는 바람에 보수당의 미래가 불투명하던 2006년에 당시 보수당 당수 마이클 하워드는 신문광고를 냈다. 16개로 된 ‘보수주의자의 신조’였다. 여기서 그는 쉬운 표현으로 자신의 신념을 피력했다. “국민은 그들이 삶의 주인이고 간섭과 지나친 통제를 받지 않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나는 믿는다” “누군가 부자이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이 가난해졌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이는 어려울 때일수록 보수주의의 정체성을 되짚어보는 보수당 전통의 연장이었다.
 
  셋째, 캐머런은 ‘온정적 보수주의(Compassionate Conservatism)’를 제창했다. ‘온정적 보수주의’는 대처가 주장했던 자유시장경제원칙들을 존중하면서도 약자를 배려하고 분배를 중시하며 환경문제 등에도 신경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는 영국 국기 유니온잭을 원용했던 당의 로고를 환경을 강조하는 로고로 바꾸었다.
 
  캐머런은 2010년 자유민주당과 연합해서 13년 만에 정권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2015년에도 총선에서 승리, 보수당 단독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2016년 8월 브렉시트 투표에서 패배하면서 실각하고 말았다.
 
 
  보수당의 길, 자유당의 길
 
  보수당의 생존 비결에 대해 강원택 서울대 교수는 ① 이념적 원칙이나 순수성보다 권력 장악이라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정당이라는 점 ② 변화를 수용하는 유연성 ③ 당의 외연 확장을 위한 노력을 꼽았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는 ① 결속과 충성심 ② 변화에 대한 적절한 대처 ③ 국가경영 능력과 ‘통치에 적합한 정당’ 이미지 ④ ‘국민의 당’ ‘애국정당’ ⑤ 조직과 선전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보수당의 이런 특징은 몰락해 버린 영국 자유당과 대조적이다. 19세기 중·후반 보수당과 함께 영국 의회 정치를 주도했던 자유당은 1910~1920년대에 고전적 자유주의자 허버트 애스퀴스와 급진적 자유주의자 로이드 조지 간의 극렬한 이념·파벌싸움에 힘을 소진하는 바람에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 특히 노동자 계급을 대변하는 노동당이 대두하는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몰락해 버렸다. 오늘날 자유당은 자유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보수는 영국 보수당의 길을 걸을 것인가? 영국 자유당의 길을 뒤따라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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