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정권 秘線의 1차 방정식 - 의혹→은폐→노출→구속 : 월간조선

1999년 12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서른여섯 살의 김한정(金漢正)씨를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임명했다. 대통령을 전담, 보좌하는 자리를 맡은 김한정씨는 ‘야당 지도자 김대중’ 시절부터 그를 가까이 모신 인물이었다.

“출근 첫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청와대 부속실 직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직원이 말하기를 ‘실장님, 관용차로 모시러 갈 테니 댁에서 기다리시면 돼요’라고 하더군요. 잠시 후 나이 지긋하신 분이 검은색 승용차를 몰고 와 저를 태우더니 곧장 청와대로 향했습니다.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청와대 정문을 일사천리로 통과한 후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본관에서 내렸습니다. 제1부속실은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있었어요. 대통령이 부르면 곧바로 달려갈 수 있는 곳이었지요. 제1부속실은 거리상 비서실장실보다 더 가까웠어요.”

권력 심장부에서 본 국가 非常연락망

청와대 문고리 비서관 3인방으로 지목된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왼쪽부터).

권력의 심장부에 들어간 김한정씨는 출근 당일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신문지만 한 크기의 비상(非常) 전화번호부를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대통령 비서실과 경호실은 물론이고 총리실, 행정부의 모든 장관실, 각 군(軍)의 최고 지휘관, 시·도지사, 국회의장, 검찰총장, 국정원장, 경찰청장, 기무사령관, 대법원장과 감사원장, 국세청장 등 국가를 떠받치는 핵심 기관장과 직통하는 번호들이었습니다. 전화번호부를 보는 순간 덜컥 겁이 났어요. 대통령 휘하 국가조직의 규모와 위력을 단번에 느꼈던 겁니다. 가슴은 쿵쾅거렸고 심장 떨리는 소리가 천둥 치는 것처럼 들렸어요.”

김한정씨는 그로부터 김대중 정권이 끝나는 날까지 3년3개월 동안 김 대통령을 별 탈 없이 보좌했다. 스스로 조심하고 또 조심한 결과였다. 직전(直前) 김영삼(金泳三) 정권 때 제1부속실장이었던 장학로씨가 여러 기업으로부터 거액의 뇌물(賂物)을 받은 사건이 터지면서 정권의 뿌리가 휘청거렸던 일을 익히 알고 있었다. 부속실장 자리가 권력의 칼날로 변해 자신의 목을 날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의 일이지만 노무현(盧武鉉) 정권의 초대 부속실장도 ‘향응 파문’으로 물러났다.

김대중 비서 출신의 김한정씨는 청와대 부속실장으로 공식 계통에서 일했지만 정권 핵심부에서 비선(秘線)의 구조와 생리 그리고 비참한 결말을 두 눈으로 경험했다.

“제1부속실이 주목받는 이유는 매일 대통령과 대면하기 때문입니다. 국가 1급 기밀인 대통령 일정이 제 손에 들어 있었지요. 그만큼 보안에 철저해야 했어요. 대통령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의 유혹이 쉴새없이 계속돼 주변 관리에도 늘 신경을 썼습니다.”

김대중 정부 시절 3년3개월간 청와대 제1부속실장을 지낸 김한정씨.

김씨는 김대중 정권 말 대통령의 아들(홍일·홍업·홍걸)이 각종 권력형 비리에 휘말렸던 이른바 ‘홍삼트리오 게이트’ 시절을 이렇게 기억했다.

“임기 마지막 해였던 2002년 봄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대통령은 아태재단 의혹과 이른바 ‘아들 게이트’로 심한 정신적 충격에 빠졌습니다. 건강도 상당히 나빠졌고요. 민주당 탈당까지 한 상황에서 마침내 대통령 3남 홍걸씨가 최규선이라는 사업가의 유혹에 넘어갔던 겁니다. 사건이 불거지자 부속실 소속 모 국장을 통해 최규선씨와 접촉해 자초지종을 알아봤지요. 뭔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확인 결과 최규선씨가 홍걸씨에게 생활비 명목으로 상당한 액수를 수차례 건넸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대통령 내외분이 받을 충격이 걱정됐습니다. 곧바로 대통령께 보고했고, 당신께서는 제게 미국에 있던 홍걸씨를 직접 만나 확인해 보라고 지시하셨어요. 은밀히 비행기를 타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습니다.

홍걸씨를 만나 심문하듯 사실관계를 따져 물었어요. 그는 ‘최규선씨의 호의를 아무런 대가 없이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했습니다. 금품 수수 사실을 인정했던 거죠. 귀국하자마자 대통령께 모든 것을 보고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크게 낙담하셨어요. 돈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잘못이라며 제게 ‘수사에 성실히 응하고 죄가 있으면 달게 받으라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당시 최규선씨는 이런저런 사업을 추진하면서 청와대를 팔고 다닌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많았습니다. 홍걸씨가 검찰 수사를 받으러 귀국하는 당일, 일부 방송사는 헬기까지 띄워 귀국 장면을 생중계했습니다. 김 대통령 내외께서는 그 장면을 지켜봤는데 두 분이 가졌던 참담함이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홍걸씨는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으나 정상이 참작돼 형 집행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러나 둘째 아들 홍업씨는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기소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대통령 아들에게 보고하는 안기부장

1997년 김영삼 정권 말기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석방돼 승용차로 자택으로 가고 있는 대통령 차남 현철씨.

권력의 속성상 대통령 친인척이나 주변 측근들에게는 온갖 청탁이 끊이지 않는다. 우리 현대사가 이를 증명한다. 사람들은 대통령 친인척이나 측근, 이른바 비선 실세들이 공식 라인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다고 믿어 왔다. 실제로 대통령 친인척들은 막후에서 상당한 권력을 휘둘렀다.

대통령 친인척 중 가장 영향력을 크게 행사한 사람 중 한 사람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를 꼽는다. 그는 YS 정권 당시 ‘소통령’으로 불렸다. 아버지의 호(號) 거산(巨山)에 빗대 ‘소산(小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정권 핵심(核心) 비선 조직인 ‘나사본(나라사랑운동본부)’을 이끌며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김영삼 정부 때 권력의 한 축에 깊숙이 관여했던 한 인사의 말이다.

“나사본 외에 현철씨 사조직으로 광화문팀과 삼사회라는 게 있었어요. 삼사회는 전직 교수와 언론인 출신이 중심이 돼 현철씨를 도왔고, 광화문팀은 고려대 출신의 젊은이들이 중심이 돼 움직였습니다. 광화문팀 중 상당수는 집권 후 청와대에 들어가 민정수석실, 정무수석실에 포진했습니다. 또 일부는 외곽에서 권력을 행사했지요. 이들은 주기적으로 만나 국정에 관여했습니다. 물론 그들이 모인 것은 비리를 저지르자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문민정부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진정성이 있었지요.”

2002년 11월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던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

청와대와 정부 주요 기관에 들어간 현철씨 인맥은 집권 초기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현안(懸案)과 관련해 여러 정보를 수집, 분석해 현철씨에게 보고하고 대응방안을 강구하기도 했습니다. 현철씨의 비선 조직은 정권 중반까지 어느 정도 성과를 냈습니다. 대표적인 게 정치개혁을 통한 세대교체입니다. 김문수(金文秀), 이재오(李在五)씨를 영입하는 데 역할을 했고, 당사자는 부인하겠지만 이회창(李會昌)씨 영입에도 관여했습니다. 처음 밝히는 얘기지만 현철씨가 이회창씨를 직접 만난 적도 있어요. 문민정부 때 나온 개혁 조치들 중에서 현철씨 라인에서 나온 게 적지 않습니다.”

현철씨는 대통령께 민심(民心)을 전달하는 역할도 하고 새로운 국정 아이디어도 많이 냈다고 한다. 문제는 그의 영향력이 비대(肥大)해지면서부터였다고 한다.

“현철씨 비선 라인이 발호(跋扈)를 하자 박관용(朴寬用)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 견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찰이 생기면서 현철씨는 박 실장 교체를 추진했습니다. 결국 현철씨가 원하는 대로 비서실장이 바뀌었습니다. 그 무렵 국정 현안과 관련해 안기부장이 현철씨에게 직접 보고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장소는 주로 워커힐호텔 내 빌라형 숙소를 이용한 걸로 압니다. 또 다른 안기부 실세는 신라호텔에서 현철씨를 만나 별도 보고를 하곤 했지요.”

권력의 공룡화

금품 수수 혐의로 처벌받은 노무현 대통령의 형 건평씨.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花無十日紅)이라고 했든가. 현철씨는 1997년 YS 정권 마지막 해에 터진 한보게이트(한보그룹 특혜대출 비리 의혹)에 연루됐고 기업인으로부터 활동비 명목으로 거액을 받고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혐의로 사법처리됐다. 현직 대통령 아들의 구속은 정권에 치명타를 가했다.

김영삼 정권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사의 계속되는 얘기다.

“정권의 타락은 핵심권력을 둘러싼 주변 인물의 타락에서 시작됩니다. 아버지를 열심히 도우려고 했던 현철씨의 주변 사람들이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게 눈에 보였습니다. 현철씨를 중심으로 권력의 공룡화가 이뤄졌어요. 현철씨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중간에서 가로막고 개인적 호불호(好不好)에 따라 면담 여부를 결정했습니다. 물론 현철씨 스스로가 무너진 탓도 있어요. 저는 비선의 유용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분명 긍정적 역할이 있습니다. 공식 라인을 통해 확인하기 어려운 사안은 비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정 사안에 집중적으로 조사, 확인함으로써 정확성을 꾀할 수 있지요. 이런 점에서 대통령도 비선 라인의 보고서를 신뢰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비선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돈, 위세 등 온갖 유혹을 견뎌내는 게 쉽지 않지요. 타락하게 되는 거죠. 결국은 사람 문제입니다. 사람을 제대로 보고 판단한다는 것, 그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비선 실세 당사자는 자연스럽게 자기 오류에 빠지게 되죠. 자기가 하는 일은 무조건 옳다는 함정에 빠지는 겁니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는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李明博) 정권에서도 발생했다. ‘봉하대군’으로 불렸던 노 대통령의 형 건평씨는 정권 초기부터 각종 이권에 개입한다는 소문에 시달렸다. 실제 노 대통령이 “많이 배운 분이…”라며 형 건평씨에게 청탁을 한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을 비난, 남 사장의 자살을 초래하기도 했다. 이런 즈음에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노건평씨를 직접 조사하기도 했지만, 건평씨를 둘러싼 비리의 커넥션을 막지는 못했다. 건평씨는 2006년 농협이 세종증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세종캐피탈 사장에게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 이상득(李相得) 전 국회부의장은 ‘영일대군’ ‘만사형통(萬事兄通)’의 주인공으로 불리며 이권에 개입했다. 그는 여러 저축은행으로부터 억대 금품을 받은 혐의로 이명박 대통령 재임 말기에 구속돼 실형을 살았다.

권노갑·안희정·이광재·박영준

김대중 정권 시절 무관의 제왕으로 통했던 권노갑 민주당 고문.

역대 정권에서 대통령 측근들의 비리도 친인척 비리와 함께 국정운영에 큰 해악을 끼쳤다. 대통령 당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핵심 측근들은 비선 조직을 운영하며 비리의 몸통 역할을 했다.

김영삼 정권의 경우 나사본을 비롯한 각종 비선 조직에서 활동했던 현철씨 측근들이, 김대중 정권 때는 권노갑(權魯甲) 고문을 비롯해 아태재단 핵심 관계자들이 대표적이다.

DJ 정권 당시 권노갑 고문은 ‘무관(無冠)의 실세’로 통했다. 동교동계 가신(家臣)그룹을 이끌었던 그는 대선 기간 중 다른 가신 출신들과 함께 “김대중 후보가 당선돼도 임명직엔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실제 그는 임명직에 진출하지 않았다. 그러나 권력의 실세에게 ‘임명직’ 여부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흔히 ‘부나방’으로 불리는 권력에 기웃거리는 세력은 자리보다 힘을 더 중시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무관인 정윤회씨가 주목을 받고 온갖 구설에 오르는 이유도 그가 힘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권노갑 고문은 김대중 정부 내내 외곽에 머물렀다. 그러나 결국 공천(公薦)과 인사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나중엔 대기업으로부터 돈까지 받아 구속됐다. 실제 권 고문의 최측근으로 동교동계 특무상사로 불렸던 이훈평(李訓平) 전 의원이 이력서를 한 무더기씩 들고 다니는 것을 목격한 사람도 여럿 있다. 당시 국회의원회관 주변에서는 인사 청탁을 하려면 권 고문에게 접근해야 하고, 그 중간 루트가 이훈평 의원이라는 얘기가 파다했다. 이훈평 국회의원실의 보좌관, 비서관의 씀씀이도 상당해 주변 의원실 비서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했다.

권 고문으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없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의 말이다.

“당시 권 고문은 많은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어요. 정권 초기부터 많은 시선이 쏠렸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국민의 정부 초대 비서실장이었던 김중권 실장이 당으로 복귀하고 한광옥 비서실장 체제가 들어서면서 1년 정도 적게나마 힘이 붙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어요. 솔직히 김대중 대통령 옆을 평생 지켜온 사람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았지요. 하지만 박지원 실장이 권 고문을 상당히 견제했습니다. 당시 두 분 사이가 아주 안 좋았던 게 사실입니다. 그때 권 고문은 ‘집권까지 했는데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다’며 불만을 자주 터트리곤 했습니다. 결국 권 고문은 의혹, 비리의 핵심으로 세간(世間)의 주목을 받으면서 옥고(獄苦)를 치러야 했고 이후 해외에 반강제로 나가 있어야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으로는 ‘좌희정 우광재’로 불렸던 안희정(安熙正) 현 충남지사와 이광재(李光宰) 전 강원지사를 빼놓을 수 없다. 노 대통령과 사실상 정권 동업자 관계였던 이들은 정권의 운영 방향을 결정짓는 친노(親盧) 핵심 실세로 통했다. 이 때문에 당시 여권에서조차 이들의 전횡을 거론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2003년 노무현 정권 출범 초기 대선자금 수수 혐의로 구속된 안희정씨와 달리 이광재씨는 정권 출범과 함께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을 맡으며 상당한 힘을 발휘했다.

나가는 권력, 들어오는 권력

불법 정치자금을 받아 구속된 이명박 대통령의 친형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김대중 정부 제1부속실장을 지낸 김한정씨가 2011년에 발간한 《나의 멘토 김대중》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2003년 2월 노무현 당선자의 대통령 인수위 시절에 이미 대북(對北)송금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인수위 시절 노 당선자 주변에서 특검(特檢) 불가피론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것을 감지했다.(중략) 나는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어 가는 것이 걱정스러워 이광재를 만났다. 그는 참여정부의 핵심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미 대북송금 의혹이 불거졌고 야당이 특검을 요구하고 있다. 언론과 여론도 그냥 넘어갈 분위기가 아니다. 그러니 김 대통령 쪽에서 퇴임 전에 이 문제를 일단락 지어 노 당선자의 부담을 덜어주었으면 한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나는 이광재에게 박지원 비서실장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좋겠다고 제의했다.

며칠 뒤, 플라자호텔에서 셋이서 만났다. 나가는 권력은 들어오는 권력에 예를 갖췄다. 박지원 실장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이광재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면서 대북송금의 배경과 경위, 야당 주장의 문제점, 청와대의 입장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남북 관계는 통치 행위의 영역이고 대북 문제의 특수성을 감안해 특검을 수용키 어렵다는 뜻을 전달했다. 이광재는 실망하는 눈치였다. 이로부터 며칠 뒤 인수위 고위 관계자들이 일제히 ‘김 대통령 퇴임 전에 대북송금 문제를 털고 가야 한다’ ‘청와대에는 왜 아무도 총대 메는 사람이 없는가. 책임 있는 사람들이 김 대통령 뒤로 숨고 있다’는 등의 공세를 퍼부었다.〉

이광재씨는 2004년 총선(總選)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고 2010년 강원도지사가 됐다. 그러나 그도 처벌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권 당시 대통령의 후원자로 알려진 박연차씨로부터 5만 달러를 받았다는 혐의가 인정돼 도지사직을 잃었다. 노무현 청와대의 총무비서관으로 일했던 최도술씨도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명박 정부의 측근 실세로는 이상득 부의장 보좌관 출신인 박영준(朴永俊) 전 지경부 차관이 독보적이다. 그는 ‘왕차관’으로 불리며 실세 중 실세로 통했다. 그는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영포회(영포목우회)의 핵심축 역할을 했다. 박 전 차관은 대선 당시 선진국민연대라는 조직도 이끌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자원(資源)외교도 그가 지경부 차관으로 있으면서 실무를 총괄했다. 그는 정권 후반기에 각종 사업 인허가 비리로 구속, 수감된 후 최근 만기 출소했다. 예외 없이 그도 정권 실세의 허망한 몰락을 보여줬다.

이명박 정부의 실세 중 한 명이었던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도 정권 말 복합물류센터 사업 시행업체로부터 8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살았다.

“그 사람들, 말썽 일으킬 사람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동업자였던 친노 실세 이광재 전 강원지사.

최근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 문건’ 유출 사건으로 불거진 비선 실세 논란에서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의 친인척 또는 측근 비리가 사실로 드러난 것은 없다. 그러나 정권 말기도 아닌, 만 2년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박근혜 비서실장’ 출신의 정윤회, ‘국회의원 박근혜’ 보좌관 출신의 청와대 핵심 비서관 3인방(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1부속비서관, 안봉근 2부속비서관) 그리고 대통령 친동생 박지만(朴志晩)씨를 둘러싼 권력갈등 양상은 박근혜 정권의 동력(動力)을 상실케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정윤회씨의 국정 개입 논란과 관련해 “터무니없는 얘기이자 찌라시에나 나오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박 대통령은 동생 박지만씨 부부(夫婦)에 대해서도 “여태까지 청와대에 온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아마 임기가 끝날 때까지는 안 올 것”이라며 권력과 멀리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비서관 3인방에 대해 “15년간 나와 같이 고생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라면 나와 같이 일할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한양대 특임교수로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는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비선 실세 국정 개입 의혹’ 논란과 관련해 자신의 구속 경험을 거론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당시 나는 몹시 억울하고 서운했지만 아버지는 참으로 공사(公私)를 철저히 구분했다. 내가 한보와 관련이 없다고 (수사결과) 나왔는데도 ‘더 파보라’고 검찰에 지시해 결국 표적수사를 하게 했다. 내가 대선 잔금에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검찰은 나를 조세포탈죄로 엮어 ‘억지춘향’식으로 구속해 결국 정국(政局)을 잠재웠다. 그러나 현 정권은 대통령이 오히려 나서서 ‘(현재 거론되고 있는 인사들이) 전혀 문제가 없다’고 강변하고 있으니 검찰수사 결과와 관계없이 망조로 가고 있다.”

현철씨 주장은 당시 그를 수사했던 심재륜 대검 중앙수사부장의 회고와 비교하면 사실관계가 많이 다르다. 심 전 부장은 당시 청와대가 “현철씨 수사는 꿈도 꾸지 말라”고 압박을 넣었고, 대통령 비서실장이 직접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각하가 울고 있어요”라며 압력을 넣은 적도 있다고 했다. 실제 현철씨 사건은 무수한 국정 농단 의혹에도 불구하고 농단의 사례를 밝히지 못한 채 마무리됐다. 현철씨 구속 사유는 기업으로부터 받은 돈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조세포탈)이었다.

김영삼 정권 때 부속실장, 이명박 정부 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정병국(鄭柄國) 새누리당 의원은 최근 〈TBS 열린아침, 고성국입니다〉에 출연해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역대 대통령마다 비선이 있었습니다. 비선 실세로 친인척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이 청와대를 드나들든 대통령과 만남이 잦든 아니든 간에 제3자가 그들을 놔두질 않거든요. 어떤 방식으로든지 통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줄을 대려고 하는 겁니다. 대통령의 통치, 인사 스타일을 보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고 그 요인이 투명하게 해결되지 않고 비밀주의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의혹을 낳았다고 봅니다. 결국은 누가 대통령과 통하느냐를 따지다 보니 소위 말하는 문고리 3인방, 또 밖에 있는 사람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 게 구조적 문제로 비약됐다고 봅니다. 청와대의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이 문제가 어느 정권이 들어와도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청와대 비서실은 너무 비대했습니다. 정부부처가 해야 할 일들조차도 청와대에서 좌지우지합니다. 따라서 대통령이 장관을 직접 대하며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고 봅니다.”

대한항공 땅콩 回航과 박근혜 비선 논란

2012년 대가성 금품 수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이명박 정부의 왕차관 박영준씨.

이명박 정부 시절 한때 실세로 통했던 정치권 인사도 비슷한 견해를 나타냈다.

“비선이라는 게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로 보면 해법이 안 나와요. 대선 과정에서 온갖 문제를 잉태하는데 집권하면 결국 터지게 됩니다. 역대 정권에서 친인척, 측근 비리가 나오는 것은 집권 과정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의 친인척이 있고, 공신(功臣)이 있습니다. 집권 후 그들에게 권력이 몰립니다. 비리의 핵심은 인사와 돈 문제입니다. 특히 돈이 중요한데 대선이라는 엄청난 일을 치를 때면 막대한 자금이 들어갑니다. 가장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친인척이나 최측근에게 돈 문제를 맡기게 됩니다. 대통령 후보자 때든 현직 대통령 때든 당사자가 돈을 직접 관리하기란 쉽지 않아요. 이런 구조를 생각해 보면 답이 딱 나옵니다. 노태우 정부 때는 P씨가 있었고, 김영삼·김대중 정부 때는 아들이 있었고, 노무현·이명박 정부 때는 형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친인척이나 측근들은 감시나 견제도 제대로 받지 않아요. 박근혜 정부는 최근 불거진 대한항공 오너 딸의 ‘땅콩 회항’ 사건에서 교훈을 찾아야 해요. 조현아 부사장은 사건 직후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은 그의 잘못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현 정부 핵심 인사들은 항공사 오너 딸을 닮은 것 같아요. 지금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고 있어요. 고름은 터져야 눈에 보입니다. 친인척과 달리 권력의 측근들은 나중에 권력의 심장부를 향해 거꾸로 돌진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슬픈 현실이죠.”

秘線의 특권

김대중 대통령 부속실장 출신인 김한정씨는 “이번 정윤회 논란은 박근혜 대통령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모든 힘이 대통령에게 집중돼 있습니다. 막강한 인사권도 있고요. 비선 간 다툼은 결국 인사를 놓고 일어납니다. 박근혜 정부 집권 2년 차에 이런 문제가 발생했다는 게 걱정입니다. 너무 빨리 터졌어요. 그것도 내부적으로 곪아 터졌습니다. 이렇게 되면 대통령이 일을 못 하게 돼요. 어느 대통령이든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열심히 하겠다는 숭고한 의지를 갖기 마련입니다. 이번 사건은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가 자초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동안 수첩 인사, 깜짝 인사, 비선 인사를 정권 초기부터 해왔어요. 그게 정윤회 논란으로 불거진 거 아닙니까. 대통령의 리더십에 상당한 훼손이 있을 겁니다. 현재 언론에 거론되고 있는 청와대 비서관 3인방은 사실 여부를 떠나 정상적인 역할을 하기 힘들 거예요.”

김한정씨는 “대통령에게 간언하는 측근이 없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고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과 달리 뼈아픈 ‘배신의 추억’을 갖고 있어요. 그러잖아도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외롭고 고독한 자리인데 박 대통령의 고독은 아주 심할 거라 봅니다. 그렇다 보니 대통령이 쉽게 ‘나쁜 사람론(論)’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요. 더군다나 주변 분들이 이를 부추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고 하면 대통령도 그 말에 흔들리는 거죠. 과거 김대중 대통령도 그런 면이 없지 않았어요. 문제는 박 대통령 주변에 충언(忠言)하는 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비선의 특권이 뭔 줄 아세요.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는 게 특권이 아니지요. 그건 불법입니다. 자신이 모시는 대통령에게 ‘그건 아니 되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게 바로 비선의 진정한 특권입니다. 청와대 수석이나 장관도 그렇게 말하기 힘들어요. 박근혜 대통령 주변에 그런 말을 할 비선이 보이지 않는 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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