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취재] ‘오세훈의 自充手’ 무상급식 주민투표 누가 밀어붙였나 : 월간조선

서울시의 8·24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실시된 지 한 달 남짓 지난 지금 오세훈(吳世勳)이란 이름 석 자는 이미 서울시민의 머리 속에 없다. 한 달여 전까지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포퓰리즘과 반(反)포퓰리즘 전선(戰線)의 주역이었던 그가 주민투표 무산과 함께 유권자들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다. 대신 그 자리를 안철수(安哲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더욱 넓게, 더욱 크게 차지했다. 안철수 교수가 서울시민 주민투표의 최대 수혜자가 된 셈이다.

오 전 시장은 반 포퓰리즘의 선봉에 서서 장렬하게 ‘전사(戰死)’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보수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를 것을 염두에 뒀는지는 모르지만 결과는 그의 의도와 정반대로 치달았다. 내년 대선에서 재기(再起)가 점쳐지던 정치인 오세훈은 이제 정치권의 긍정적 평판과 시민적 인기를 한꺼번에 잃은 그야말로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오세훈 전 시장은 무슨 생각으로 무상급식 주민투표라는 아이디어를 냈고, 누가 밀어붙였을까.

오 전 시장의 주민투표 추진은 정치권을 알 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충수(自充手)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었다. 무상급식 투표가 부결될 것이란 전망이 아니라 개표의 요건인 33.3%를 채울 수 없다는 예상이었다. 그럼에도 오 전 시장은 주민투표를 밀어붙였고,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보수의 사활이라도 건 양 지원을 했다. 여권 전체가 얼굴을 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더구나 그 여파로 이른바 제3세력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름으로써 단순히 무상급식 투표 무산의 차원을 넘어 정치권 전체에 충격파를 던져주었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여권의 불협화음은 또 어떤가. 오세훈의 서울시와 한나라당이 따로 놀고, 한나라당 내에서도 지도부와 하부 조직이 따로 노는 오합지졸의 양상은 과연 대한민국 보수가 이토록 허약했던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이번 무상급식 투표의 진행과정은 투표가 끝났다고 해서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누가 이런 일을 기획했고, 누가 밀어붙였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잘못된 판단을 했는지를 철저히 복기(復棋)해 볼 필요가 절실하다.

작년 11월 정무라인이 돌파카드로 주민투표 아이디어 내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주민투표 얘기를 서울시 관계자들과 나눈 것은 작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년 6·2지방선거 결과, 민주당이 서울시의회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지방자치단체장과 의회가 대결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는 시의회는 사사건건 오 시장의 시정을 발목 잡았다.

노태우(盧泰愚) 정부 시절의 3당 합당을 떠올리면 된다. 반수를 훌쩍 넘는 야당에 맞서 노태우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한두 명의 국회의원을 영입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명분이야 무엇이 됐든 노태우 정부가 이를 돌파할 수 있는 카드로 3당 합당을 기획하게 된다.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자민련과의 내각제 합의를 깬 후 상황도 비슷하다.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합쳤을 때는 의석이 158석(국민회의 105석, 자민련 53석)으로 의회의 반수를 넘어 문제가 없었으나 내각제 합의 파기 후에는 의석이 부족해 무소속과 한나라당 의원들을 상대로 대거 강제 영입에 나선 것이 그것이다.

지금의 서울시의회는 완전히 다르다. 3당 합당 때는 김영삼(金泳三)의 민주당과 김종필(金鍾泌)의 신민주공화당이란 두 당이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었고, 또 한 사람은 권력에 참여해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 당시에는 정보기관 등의 정치관여와 검찰·경찰의 사정활동이 어느 정도 먹혔던 상황이기도 하다.

지금 서울시의회는 민주당 일색이다. 4분의 3이 민주당 소속이다. 의원 몇 명 옮긴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오 전 시장은 ‘돌파 카드’를 떠올렸다는 얘기다. 오 전 시장의 핵심 참모인 강철원 전 서울시 정무조정실장의 이야기다.

“시장님 아이디어입니다. 지난해 6·2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전면 무상급식 공약을 들고 나와 당선됐고, 우리는 단계적 무상급식 공약으로 당선됐는데 서울시의회의 4분의 3이 야당의원이다 보니 시장님이 재의요구를 해도 협상이 이뤄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장님이 주민들에게 의사를 물어보는 게 맞다고 판단했고 (측근들과 함께) 검토했던 것이죠.”

서울시의회, 오 시장 발의 안건 하나도 통과 안 시켜

강철원 전 서울시 정무조정실장은 “안 교수의 휘발성 있는 50% 여론지지와 주민투표율 25.7%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오 전 시장의 선거 캠프에서 공보특보로 활동했고 무상급식 주민투표 직전까지 서울시 대변인을 한 이종현씨도 같은 입장을 밝혔다.

―주민투표가 오 시장 본인의 아이디어가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지난해 10월 5일 민주당은 민주당 소속 시의원 전원의 동의로 전면 무상급식을 위한 조례안을 발의했고 서울시와 협의를 하던 도중, 12월 1일 민주당 시의원들이 의장석을 점거하고 한나라당 시의원들을 물리적으로 몰아낸 뒤 조례안을 본회의에 기습 상정해 통과시켰습니다. 오 시장이 재의요구를 해 협상이 시작됐지만 결국 결렬됐고, 12월 30일 시의회는 무상급식 조례를 재의결했습니다. 올해 들어 1월 5일, 서울시가 친환경 무상급식 조례안 공포를 거부하자, 다음 날 시의회 의장 직권으로 조례안을 공포했습니다. 그래서 주민투표를 제안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민투표 논의는 언제부터 한 것입니까.

“사실 서울시의회의 4분의 3을 차지한 민주당은 오 시장이 발의한 조례안을 단 한 건도 통과시키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오 시장과 참모들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당시 오 시장의 정무라인이 ‘다른 나라에서는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주민투표 제도를 이용한다’는 아이디어를 냈죠. 이때가 작년 11월입니다. 하지만 당시 주민투표를 검토했을 때는 실효성이 없었습니다. 주민투표 청구 서명인 수가 정족수(서울시 유권자의 5%인 40만명)를 채우기가 어렵다는 판단을 했던 거죠. 서명 없이 주민투표를 실시하는 방법을 도입하려 해도 4분의 3을 차지한 민주당 시의원들이 도와줄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12월 1일 민주당이 무상급식 조례를 통과시킨 이후 대응방안이 주민투표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주민투표를 검토하게 된 것입니다.”

―결과론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철수 현상’이 정치권을 뒤흔든 후부터는 여권 곳곳에서 오 전 시장의 자충수를 탓하는 목소리가 큰데요.

“안철수 국면과 맞물려 (주민투표 결정을) 후회하는 것처럼 보는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안 교수의 휘발성 있는 50% 여론조사 결과는 투표장에 직접 나와 투표한 25.7%와는 질이 다릅니다. 집권까지 가는 데 어떤 것이 강고한 표심인지 시간이 지나면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주민투표는 의미 있는 것입니다.”

유권자의 25.7%가 우파로 결집한 것은 큰 의미를 담고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오 시장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대결한 2010년 서울시장 선거의 투표율은 53.9%였다. 투표한 유권자에 대한 득표율은 오 시장이 47.4%, 한 전 총리가 46.8%였다. 이를 전체 유권자에 대한 득표율로 환산하면 오 시장은 25.5%, 그리고 한 전 총리는 25.2%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번 투표율이 오 전 시장 득표율보다 높기 때문에 꼭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주민투표가 오 시장과 오 시장 참모들의 작품이라는 데에는 그와 친분이 있는 당내 몇몇 의원도 같은 의견을 내놓고 있다. 오 전 시장의 고려대 선배인 주성영(朱盛英) 한나라당 대구시당위원장은 “오 시장을 잘 아는데, 그는 성급하지 않고 고개를 숙일 줄 안다. 아마 차차기를 바라보고 자신이 직접 결정을 내렸을 것”이라고 밝혔다.

박형준 대통령특보가 올 초 한나라당 의원에 무상급식 협조 요청

박형준 사회통합특보(左)는 주민투표 추진 과정에서 당과 청와대에 도움을 요청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현 전 대변인과 강철원 전 실장의 얘기는 조금 다르다. 강 전 실장은 오 전 시장 본인이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고, 이 전 대변인은 정무라인이 냈다고 한다. 서울시 정무라인에는 조은희 정무부시장, 강철원 정무조정실장, 이종현 대변인, 황정일 시민소통특보 등이 있다. 오 전 시장이 직접 냈느냐, 아니면 정무라인이 냈느냐는 사실 큰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어차피 항상 정무적인 일을 결정할 때는 오 전 시장이 이들과 상의해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100% 신뢰한다면 오 전 시장 측이 이니셔티브를 쥔 것이 된다.

그러나 주민투표를 밀어붙일 때부터 정치권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사회통합특보인 박형준(朴亨埈) 전 의원의 기획이라는 설이 파다했다. 박 특보는 오 전 시장의 대일고등학교와 고려대 1년 선배로 이명박 대통령 정무라인 중 한 명이다. 박 특보 기획설의 실체는 무엇일까.

필자는 무상급식 주민투표 성사과정을 취재하면서 보다 결정적인 정보에 접하게 됐다. 친이(親李)계 핵심 의원은 “박형준 특보가 처음부터 기획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박 특보가 드라이브(추진)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올 1월인가, 2월인가, 박 특보와 만났어요. 그랬더니 박 특보가 부탁을 하는 겁니다. ‘오세훈 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하려고 하는데 도와달라’고. 그러면서 박 특보는 ‘무상급식 문제를 복지 포퓰리즘과의 대결 구도로 몰고 가면 보수층을 결집시켜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박 특보가 원래 말을 설득력 있게 하잖아요. 얘기를 죽 듣고 보니 일리가 있더라고요. 어차피 내년 총선이나 대선에서 복지 포퓰리즘 문제가 이슈가 될 것이고, 보나마나 한나라당보다는 민주당이 턱도 없는 포퓰리즘 공약을 들고 나올 것이 뻔한데 이번 기회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차고 그래서 거의 동의를 했죠. 이미 오 시장과 상당한 교감을 이룬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쿠킹(cooking)이 꽤 된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당에 와서 동료 의원 몇 명과 상의를 했더니 펄쩍 뛰더라고요. ‘상식적으로 투표율이 33.3%를 넘을 수가 없다. 쓸데없이 (주민투표 문제를) 건드리면 안 된다’고요. 그래서 깊이 있게 그 문제를 들여다봤는데, 안 되겠더라고요. 그렇게 지냈는데 나중에 보니 실제 여권에서 추진을 하고 있더라고요.”

올 1~2월이면 오 전 시장이 정무라인 참모들과 시의회와의 교착상태를 돌파할 카드를 구상할 초기 단계다. 그 단계에서 이미 한나라당 의원에게 “협조해 달라”고 했다는 것은 최초 아이디어 자체를 박 특보가 냈거나 아니면 적어도 오 전 시장과 아주 초기 단계에서부터 교감을 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박 특보는 이에 대해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언론 인터뷰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아무리 마녀사냥을 하고 싶어도 최소한 사실 요건은 갖추어야 하는데, 참깨도 콩이라면 콩인 줄 알아야 되는지, 헐~”이라고 썼다. 또 “오세훈 시장 무상급식이 박형준 작품이라니요.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이 문제에 임했던 오 시장에 대한 모독이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해 투표에 참여한 시민들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박 특보, 대통령에게도 무상급식 주민투표 장점 보고

박 특보의 주장대로 ‘박형준 기획설’은 오 시장에 대한 모독일까. 그러나 또 다른 여권 핵심 관계자는 보다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박 특보가 당에만 주민투표 지원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SOS’를 쳤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이다.

“올 봄에 박 특보가 VVIP(청와대 사람들은 대통령을 이렇게 부른다)가 계신 자리에서 무상급식 문제는 주민투표를 통해 돌파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무상급식이 실패하더라도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는 식으로 잘 포장을 해서 보고를 하더군요. 실패하더라도 오 시장이 보수의 아이콘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할 수 있어 여권으로서는 잃을 것이 별로 없다는 식이었습니다. 보고를 다 받은 VVIP는 (주민투표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친박 측은 이번 주민투표가 ‘박근혜 대세론’을 견제하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박 특보를 주민투표기획의 주역으로 지목한다. 친박계 의원들 사이에는 박 전 대표가 정권을 잡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청와대와 친이 일각에서 박 전 대표에게 흠집을 입히기 위해 ‘기획자’로 불리는 박 특보를 앞세워 주민투표를 관철시킨 것이란 의견이 많다. 주민투표가 검토되던 1월 친박계 의원들이 앞 다퉈 “(주민투표를) 정치공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오 시장은 손해만 입을 것이다. 대화와 설득 없이 무상급식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하자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주민투표 기도를 공격한 것도 알고 보면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친박계의 한 재선 의원은 “정확히 확인은 되지 않았지만 박 특보가 오 시장에게 ‘무상급식 문제를 주민투표에 부쳐 승부수를 띄워라. 이기면 보수의 영웅이 돼 박근혜 전 대표의 대항마가 될 수 있다’며 주민투표를 종용했다는 말이 정치권에 정설로 퍼져 있는 게 사실”이라며 “우리가 한나라당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데, 전혀 엉뚱한 정보를 사실인 양 믿고 있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10월 사퇴’에 이의 달지 않아 놓고…”

주민투표 무산 이후 오 전 시장은 ‘시장으로선 졌지만 정치인으로선 승리’했다는 평가를 일부 언론으로부터 받았다. 정치인 오세훈 입장에서 봤을 때 오세훈이란 이름을 보수층에 각인시킨 만큼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많다’는 것이 요지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도 “오 시장은 남는 장사였고, 박 전 대표는 손해 본 장사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사실일까.

주민투표 실패로 오 전 시장이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게 정설이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무리했던 주민투표 강행으로 인해, 또 그 과정에서 빚어진 문제로 인해 정치권으로 재진입할 수 있는 길이 사실상 막혀버렸다. 여권으로부터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오 시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기 이틀 전인 8월 24일 한나라당 홍준표(洪準杓) 대표와 김효재(金孝在) 대통령 정무수석, 오 시장 세 명이 만났다. 오 시장의 사퇴시기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이 자리에서 홍 대표는 오 시장에게 “지금까지 서울시정을 책임져 온 만큼 갑자기 사퇴하는 것은 맞지 않다. 서울시정 책임자로서 당당하게 국정감사를 받고 그 다음에 아름다운 퇴장을 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고 한다. 오 시장에게 ‘10월 이후 사퇴’라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다.

당시 여권 수뇌부에서는 “주민투표에서 패배하자마자 곧바로 보궐선거를 치르는 것은 무리”라며 오 시장의 사퇴시점이 10월 이후가 돼야 한다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는 상태였다. 10·26 서울시장 보선을 물건너가게 하려는 의도였다.

오 시장은 홍 대표의 말에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홍 대표와 김 수석은 오 시장이 ‘동의’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오 시장은 자리를 뜨면서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잘 알겠습니다. 우리 사람들과 상의를 한 뒤에 결정을 하겠습니다.”

측근들과 논의 후 사퇴시기를 정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처음 ‘국정감사 후 사퇴’에 이의를 달지 않았기 때문에 홍 대표와 김 수석은 ‘즉각 사퇴’를 발표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설령 ‘즉각 사퇴’를 결정하더라도 최소한 당과 청와대에는 정식 통보해 줄 것으로 믿었다.

회동 하루 뒤인 8월 25일. 갑자기 오 시장이 조기사퇴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홍 대표는 뒤늦게 사퇴의사를 ‘일방통보’하려는 오 시장의 전화를 외면했다. 결국 오 시장은 8월 26일 전격 사퇴를 선언했다. 당과 청와대의 뒤통수를 친 셈이다. 격앙된 홍 대표는 서울 마포구 가든호텔 2층 무궁화룸에서 개최된 서울지역 당협위원장 조찬간담회에서 “어제 오 시장이 전화했을 때 또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게 아닌가 해서 전화를 껐다”며 “오 시장이 당이나 국가를 도외시하고 자기 모양만 중요시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 대표 측 관계자는 “주민투표 실패 이후 오 시장의 사퇴시점이 논란이 됐었는데 오 시장 측에서 10월 이후 사퇴할 것이라는 말이 나와 우리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자신의 결정을 손바닥 뒤집듯 쉽게 번복하더라”고 밝혔다. 한나라당 관계자도 “홍 대표는 오 시장과 박 특보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다. 사석에서는 밖으로 공개되면 안 될 심한 이야기를 할 정도”라고 말했다. 설령 한나라당이 위기에 몰릴지라도 오 전 시장을 정치 상품화하진 않을 것이란 이야기다.

정치권에서는 오 시장이 사퇴 결심을 이미 오래전부터 해왔을 것이란 관측도 많다. 주민투표실시→대권불출마→주민투표율 미달 시 시장직 사퇴가 이미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실제 당의 한 최고위원은 오 시장이 시장직 연계(8월 21일)를 발표하기도 전인 8월 18일 주민투표 실패 시 사퇴한다는 얘기를 한나라당 중진들에게 밝혔다고 전했다. 오 전 시장 본인도 지난 4월부터 자신과 가까운 의원들과 기자들을 만나면 “8월 달이 되면 다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해 왔다. 이는 지금의 시나리오를 이미 4월에 확정했다는 얘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박 특보의 기획설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박 특보가 초기 단계부터 개입한 것이 사실인 만큼 시장직 사퇴 시나리오도 그때 이미 정했다는 추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