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宗 황제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밀사 파견을 결단했다. 당시 高宗은 「영국과 미국,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결코 용인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헤이그 회의에서 한국문제가 검토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무라세 신야(村瀨信也) 일본 上智大 교수
1943년 일본 아이치縣 나고야市 출생. 東京大 법학박사. 美 하버드大 객원연구원, 유엔본부 법무담당관,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 강사 등을 거쳐 1993년부터 조지대학으로 옮겼다. 저서에 「국제입법」 「자위권의 현대적 전개」 등이 있다.
무라세 신야(村瀨信也) 일본 上智大 교수
1943년 일본 아이치縣 나고야市 출생. 東京大 법학박사. 美 하버드大 객원연구원, 유엔본부 법무담당관, 헤이그 국제법 아카데미 강사 등을 거쳐 1993년부터 조지대학으로 옮겼다. 저서에 「국제입법」 「자위권의 현대적 전개」 등이 있다.
- 헤이그 밀사 파견을 크게 다룬「만국평화회의담보」.
올해는 1907년 高宗(고종) 황제의 密命(밀명)을 받은 李儁(이준) 열사 등 3人의 사절이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알리러,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헤이그 밀사 사건」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일본의 외교전문誌(지) 「외교포럼」은 6월호와 7월호에 걸쳐 헤이그 밀사 사건 논문을 실었다.
국제법 전공 학자인 무라세 신야(村瀨信也) 조지대학(上智大) 교수는 일본 외무성 電文(전문) 등 미공개 외교문서를 발굴해 을사늑약 체결로 孤立無援(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 노력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했다.
새로 찾아낸 「신한민보」 등 사료를 토대로 再구성한 李瑋鍾(이위종)의 후반기 인생 역정이 읽을 만하다. 당시 「오사카 마이니치(大阪每日) 신문」의 헤이그 특파원으로 현지에 파견돼 밀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유일한 일본인인 다카이시 신고로(高石眞五郞) 기자의 회고록 등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일본 측 시각이 투영된 측면이 있는 논문이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한 좀더 넓은 역사적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注〕
미국인 실업가, 밀사에게 여비 전달
1907년 6월15일,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선 제2차 세계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6월25일, 헤이그에는 대한제국 高宗 황제의 밀명을 받은 3명의 사절이 나타났다. 前 의정부 참찬 李相卨(이상설), 前 평리원(대법원) 예심판사 李儁, 前 駐러시아공사관 서기관 李瑋鍾 등이다. 그들은 황제의 옥새가 찍힌 전권위임장을 내보이며 회의 참가를 요구했다.
목적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1905년 11월7일의 「제2차 韓日협약(을사늑약)은 일본의 무력에 의한 협박下에 체결된 조약이고, 황제 재가도 받지 않는 위법적인 조약인 만큼, 헤이그 회의에서 심의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高宗 황제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밀사 파견을 결단했다. 당시 高宗은 「영국과 미국,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결코 용인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헤이그 회의에서 한국문제가 검토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高宗의 「확신」은 「희망적 관측」에 지나지 않았다.
제2차 한일협약 이후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엄격한 통제下에 놓여 있던 高宗은 이미 궁정 비용조차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밀사들의 여비도 서울에서 전차·전등사업을 하고 있던 미국인 실업가의 도움을 받았다.
高宗에게 밀사파견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가 밀사와 동행했다. 그는 서울 출발 전 프랑스·러시아 영사와 만나 본국 정부에 알선을 요청했다.
프랑스 영사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며 알선을 거부하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밀고했다. 헐버트는 1907년 4월 초 서울을 출발했고, 李儁는 며칠 뒤 그 뒤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미 망명 중인 李相卨과 합류했다. 일행은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러시아의 외면
페테르부르크에는 前 한국공사 李範晉(이범진·1853~1911)이 본국에서의 공사관 폐쇄·철수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체재하고 있었다. 사절들은 李範晉의 손을 거쳐 한국 황제의 친서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 전하면서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의 대응은 사절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새 외상에 취임한 이즈볼스키는 駐日(주일)공사를 경험한 對日 화해파 인물로, 러시아는 이미 그때까지의 對日 강경자세를 전환했던 것이다.
駐러시아 일본대사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郞)가 이즈볼스키에게 밀사 접촉 문제를 확인하자 『韓人들이 여러 가지 음모적 상담을 해오고 있음에도 우리쪽에선 절대 상대하지 말라고 엄명해 두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라』고 해명했다(6월29일-외무성으로 보낸 電文).
이즈볼스키 외상은 『한국사절들의 비상식을 질타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러시아는 헤이그 회의의 의장국으로서, 회의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한국의 대표자격을 인정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사절들에게 분명히 전했을 것이다.
비관과 낙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한국의 사절들은 駐러시아대사 李範晉의 차남 李瑋鍾을 일행에 추가해 헤이그를 향해 다시 여행을 계속했다.
객관적 정세는 사절들이 예상한 것보다 엄혹했다. 한국 황제가 의지하던 미국은 러日전쟁에서 일본 승리가 결정되자마자 「가쓰라·태프트 협정」(1905년 7월29일)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했고, 영국은 「제2차 英日동맹」(1905년 8월12일)에서 이를 승인했다. 프랑스는 헤이그 회의 직전(1907년 6월10일) 같은 협약에 조인했다. 바야흐로 제국주의 시대였다.
한국 대표 회의 참가문제는 이미 관계국들 사이에서 인정하지 않기로 결론이 나있었지만, 3人의 사절이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헐버트와 李儁이 한국을 출국할 때는 「밀사」였지만, 헤이그에 도착하자마자 공개활동에 들어간다. 그들이 투숙한 헤이그의 「드용 호텔」 앞 현관에 당당히 태극기가 게양됐다.
우선 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넬리도프는 『그런 문제에 개입할 입장이 아니다』며 면회를 거절했다. 네덜란드 외무성을 방문해 외무대신 면담을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의 소개가 없으면 면담은 힘들며, 평화회의에 참가를 인정할 수 없다」고 통고받았다.
「각국은 보호조약下에서 한국이 일본에 외교권 이양을 인정했고, 이미 2년간 외교관계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헤이그 평화회의가 그런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장소가 아니라며, 사절들이 요구한 중재재판에 관한 제1위원회 참가를 거부했다.
사절들이 영국·프랑스·독일 및 중국(淸나라) 대표를 잇따라 개별 방문해 협력을 요청했지만 모두 문전박대했다. 미국대사가 유일하게 면회에 응해 주었지만, 동정을 표시하면서도 대답은 같았다.
한국사절단 대변인인 李瑋鍾은 그날 신문기자의 인터뷰에 응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넬리도프氏가 면회를 거부한 것은 놀랍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미국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양호했기 때문에 이 두 나라가 우리에게 지원을 거부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1905년 여름 「포츠머스 조약」 체결 이전에, 한국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이 회의 참석 통지를 받고, 페테르부르크의 한국공사에게 대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내렸다』(6월30일자 「뉴욕 타임스」)
한국사절 만난 다카이시 신고로 특파원
헤이그 회의의 일본 수석대표 쓰쓰기 게이로쿠(都築馨六) 대사가 각국 대표들에게 미리 한국사절과는 만나지 말도록 손을 썼다는 기록이 「일본외교문서」(제40권 제1책)에 남아 있다. 일본 국내의 신문 중에서 「오사카 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現 마이니치 신문)이 회의 취재를 위해 특파원을 파견했다.
나중에 마이니치 신문의 주필 겸 회장을 지낸 다카이시 신고로(高石眞五郞) 특파원은 현지에서 한국사절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유일한 일본인이었다. 그는 6월 말 어느 날 사절들이 묵고 있던 드용 호텔을 찾아가 『친구라도 방문한 것처럼 그들의 안부를 묻고 명함을 건네니, 그들이 방으로 안내를 했다』고 회고담을 남겼다.
쓰쓰기 대사는 매일 본국 외무성에 한국사절의 일일 동정을 보고했지만, 그 정보는 모두 다카이시 기자로부터 제공받은 것이다. 그는 일본 대표부에 면회를 오라는 쓰쓰기 대사의 전언을 사절들에게 전하는 역할도 했다. 이에 대해 사절들은 『당신은 신문기자니까 만나지만, 일본 관료는 만날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다카이시 기자는 李相卨과 李瑋鍾을 만나 대화를 나눴으나, 李儁은 「몸이 아파서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기사를 송고했다.
결국 한국사절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헤이그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프랑스語로 번역한 抗告詞(항고사) 문서를 배포하는 등 선전활동뿐이었다. 이 문서는 당시 회의장 주변에 배포된 비공식 회의보인 「만국평화회의보」 6월27일자에 게재됐다.
사절들 가운데 가장 젊은 李瑋鍾은 당시 스무 살 청년이었다. 외교관인 아버지(李範晉 前 駐러공사)를 따라 일곱 살 때부터 구미 각국에서 생활하면서 프랑스語 등 7개국語에 능통했다. 프랑스 파리의 장송 릴리중학교를 거쳐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그때 그는 이미 러시아 귀족의 딸과 결혼하고 있었다. 구미신문들은 그를 高宗의 조카, 「프린스」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쓰쓰기 대사는 『사칭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국 황제에 그런 혈연은 없다』고 단언했지만, 헤이그에선 「프린스」라는 호칭이 정착돼 있었다. 李瑋鍾이 황제의 본관과 같은 전주李氏라는 점, 이름 끝자가 황제와 같은 「종」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이 그렇게 추측했을지 모른다. 李瑋鍾 자신도 「프린스」라는 호칭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만국평화회의보 발행인 미국인 저널리스트 윌리엄 스티드는 사절들을 동정해 7월8일 「국제회의의 모임」에서 한국사절들의 강연회를 개최하고 스스로 사회를 맡았다. 청중 대다수는 기자들이었다.
李瑋鍾의 일본 비난 연설
李瑋鍾은 스티드로부터 「프린스」로 소개받고 연단에 섰다. 그러나 스티드는 연설회 직전에 쓰쓰기 일본대사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시종일관 일본 입장을 두둔했다.
『한국 입장은 동정하지만, 쥐는 이미 고양이 입 안에 있는데 고양이를 더 이상 화를 내게 해선 안 된다. 네덜란드 정부가 회의 참가를 거부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 한국의 현 상황에 대해 항의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한국의 최종적인 병합을 가속화하는 것이 아니기를 기원할 뿐이다』
스티드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항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책임의 일단은 프린스(李瑋鍾)가 여기서 발언하는데 달렸다』고까지 말했다. 스티드는 일본을 배려하기 위해 겨우 스무 살의 젊은이에게 『한국의 명운은 모두 당신 발언에 달렸다』면서 거의 공갈에 가까운 표현으로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李瑋鍾은 이에 흔들리지 않고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을 시작했다.
쓰쓰기 일본대사가 본국 외무성에 보낸 7월9일자 電文에 따르면 『만원의 청중 앞에 서 그는 프랑스語로 1시간 정도 웅변조로 격렬하게 일본을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청중은 깊이 감동했다. 연설이 끝나자 몇 명이 일어나 한국에 동정을 표명했다. 그중 한 사람이 『對日 비난을 결의하자』고 동의했다.
그러나 사회자인 스티드가 『그런 결의는 한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해, 결의문에서 결국 일본 비난 내용은 삭제되고 한국에 대한 동정 표현만 남았다. 스티드는 만장일치로 채택된 이 결의를 만국평화회의보에 게재하는 것도 거부했다. 이날 연설회 모습은 「헤이그 신보」 7월10일자에 상세하게 보도됐다.
이토 히로부미, 高宗의 밀사 파견 방치
한국사절이 헤이그에 나타나 활동을 개시하자 즉각 일본 외무성에 보고됐다. 3명의 정확한 이름과 지위도 판명됐다.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연일 헤이그에 파견된 다카이시 기자의 특종기사를 게재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 대한 일본 국내 여론은 급속히 악화됐다(다카이시 기자 회고록).
高宗이 헤이그 회의에서 비밀리에 사절을 파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예견돼 있었다. 일본 정부內에선 이토 히로부미의 태만을 비난하는 지적이 있었지만, 이토는 한국 측을 방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했다고 추정된다.
헤이그의 일본 대표단은 한국사절이 나타났을 때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대처 방침이 확실하게 일본 대표단에게 전해져 있었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의 출국과 그의 목적에 대해 일본 정부는 늦어도 5월 초순 단계에는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마음먹기에 따라 밀사 파견을 저지할 수도 있었다. 사절들이 출국한 뒤라도 高宗에게 되돌아오라고 사절들에게 명령하도록 시키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은밀하게 저항을 계속하는 高宗을 골탕 먹이고 있었고, 그의 폐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토는 밀사들을 오히려 「방치」함으로써 일거에 高宗 퇴위와 한국 병합의 계기로 이용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추측된다. 실제로 한국의 정국은 그런 시나리오대로 전개된다.
밀사들의 헤이그 활동을 보고 받자 이토는 7월3일, 高宗을 만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 없다』며 힐책하고, 한국 총리대신 李完用(이완용)에게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황제 폐위를 실행하도록 지시한다.
일본군 증강 배치 속에 高宗 퇴위
일본 정부는 7월10일 각의에서 「對韓(대한)처리방침」을 결정, 하야시 다다스(林董) 외상을 서울에 급파한다.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한 7월18일 밤, 高宗 퇴위와 황태자에의 讓位(양위)를 결정했다. 44년간 재위에 있던 高宗은 어전회의에서 불과 4시간여 만에 퇴위당한다. 讓位 선언은 심야인 7월19일 새벽 2시에 있었다. 한 시간 후 詔勅(조칙)이 발표되고, 같은 날 오후 2시30분 새 황제가 내외 신료들을 引見(인견)하고 즉위를 공표했다.
한국 민중의 저항운동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7월19일 밤 포병대를 포함한 일본군 부대를 각지에서 서울로 집결시키는 동시에,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총리에게 1개 여단의 증파를 요청했다. 7월24일까지 한국 주둔 일본군은 1개 사단, 1개 여단으로 강화됐다.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야시 외상은 「對韓 처리방침」에 따라 7월24일 제3차 韓日협약을 체결하고, 거의 완전하게 한국의 국가 전권을 장악한다. 8월1일에는 한국군이 해산됐다.
7월8일 밤 헤이그에서의 李瑋鍾 연설회는 사절들의 활동에서 하나의 정점이었다. 그렇지만 헤이그 회의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高宗 황제의 입장이 날로 위험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李瑋鍾은 부모를 만날 일이 생겨(부인의 병세가 악화됐기 때문이라는 說이 있다) 일단 헤이그를 벗어나 며칠 동안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헤이그로 돌아온 뒤 두 사람과 합류해 함께 뉴욕으로 떠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래서 李相卨과 李儁만이 헤이그에 남았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독립운동의 투사였지만, 성격과 사고방식이 꽤 달랐던 게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현실주의적인 李相卨에 비해 이상가형의 李儁은 기독교 신자이고, 법률가이다. 1895~1898년까지 와세다大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平理院(평리원·대법원) 예심판사(검사)를 사임했다. 한국 적십자사 창설자로 초대 의장을 지냈고, 몇 개의 학교 개설에도 관여했다.
국제법 연구에 종사한 그는, 국제분쟁은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중재재판에 관한 제1위원회 출석을 요구한 것은 李儁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을까.
7월14일(일요일), 프랑스 독립기념일인 이날 저녁 비극이 그들을 덮쳤다. 아파서 자리에 몸져누워 있던 李儁이 중태에 빠져 호텔에서 사망한 것이다. 7월17일자 「만국평화회의보」와 「헤이그신보」, 「더 텔리그라프」 등은 『얼굴에 생긴 종양 수술이 원인이 돼 사망했다』, 『얼굴의 종기를 잘라내는 수술을 한 결과, 丹毒(단독: 상처에 균이 들어가 생기는 급성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전했다.
李儁이 사망하기 2주일 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의 다카이시 특파원이 처음으로 사절들을 방문했을 때 이미 『李儁은 병세가 무거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李相卨·李瑋鍾 두 사람이 걱정스런 표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비판·분노가 李儁의 죽음을 앞당긴 것이 확실한 만큼, 그의 죽음은 「憤死(분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향년 48세였다.
쓸쓸한 장례식
李儁의 유해는 7월16일 헤이그 공동묘지에 假(가)매장됐다. 李相卨과 호텔주인만이 참석한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만국평화회의보 발행자인 윌리엄 스티드는 『유일하게 李儁의 최후를 지켜본 李相卨이 영어로 「So sad, so sad(너무 슬프고 슬프다)」라는 말을 되뇌었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기분이기도 했다』고 적었다.
한편, 서울에선 7월18일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號外(호외)를 발행해 『李儁 열사가 헤이그에서 장렬하게 자결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날 밤부터 다음날에 걸쳐 서울에선 2000명의 군중이 高宗 양위 반대의 시위를 벌였다. 그 주체는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등 抗日(항일)독립운동단체와, 「李儁 자결」 소식을 접하고 분노한 기독교청년회의 사람들이었다.
李儁 열사의 죽음을 놓고 한때 「독살설」까지 나돌기도 했지만, 1962년 한국 정부 조사에서 李儁의 죽음은 病死(병사)로 확인됐다.
李瑋鍾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헤이그로 돌아온 것은 7월18일. 그는 李儁의 假매장 절차에 참석하지 못했다.
李瑋鍾이 李儁의 죽음 앞에서 받은 충격을 상상해 본다.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의 주권을 유린한 데 대해 모든 나라가 외면한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력으로 대항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20세의 감수성 예민한 청년이 李儁의 무덤 앞에서 이를 갈면서 그렇게 결단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李儁 열사의 정식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李瑋鍾이 한 달 여 동안 미국을 다녀온 뒤다.
장례식은 9월6일 오전 11시부터 열사의 동생과 한국의 前외교관,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했다. 헤이그 YMCA 회장인 A.E.멕케이 남작이 한국 YMCA 초대 총재였던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인사말을 했다.
한국말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李儁의 독립운동 투사로서의 활동이 소개됐고 장례식은 끝났다. 李儁의 유해는 한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현지 공동묘지에 정식 매장됐다. 그의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간 것은 56년 후인 1963년이다.
李相卨, 사형판결을 받다
헤이그 사절단 수석 대표격인 李相卨은 그 후 어떤 인생을 보냈을까. 그는 1905년 보호조약 체결時 정부 고관이었기 때문에 누구 이상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격정적인 그의 성격은 항의 사임, 자살미수, 망명이라는 그 후 1년 반에 걸친 행적에서도 잘 드러난다. 헤이그 땅을 떠날 때, 그도 역시 한국의 독립이 외교적으로 실현되지 않는 이상 무장투쟁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을 것이다.
1907년 7월19일 헤이그를 떠난 李相卨은 李瑋鍾과 함께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실정을 미국 언론에 호소했다. 在美(재미)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지원도 요청했다.
미국 체재 중인 8월9일, 일본 정부 압력下에 놓여 있던 한국의 재판소는 궐석재판을 통해 李相卨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사망한 李儁과 李瑋鍾에게는 종신형).
李相卨은 본거지인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李相卨은 그 후 시베리아에서 한국인 자제들을 대상으로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학교 설립에 매진하면서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抗日군사조직 주석을 지내고, 「신한혁명단」 등의 망명정부 조직 수립에 진력하기도 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그런 정치활동이 결실을 거두진 못했다. 헤이그 회의 10년 후인 1917년 3월2일, 李相卨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병사했다. 향년 48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安重根(안중근)은 처형되기 전 옥중에서 李相卨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李相卨, 세계 대세에 밝고 동양의 時局(시국)을 꿰뚫어보다. 기국이 크고 사리가 밝은 큰 인물로, 大臣(대신)으로서의 인물됨을 잃지 않았다. 才士(재사)로서 법률에 해박하고, 영어·프랑스어·일본어가 유창했다. 애국심이 강하고 교육 진흥을 꾀하면서 국가 백년대계를 세운 사람다웠다. 동양 평화주의를 품고 있었고, 이 사람처럼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드물 것이다』
赤軍에 가담한 李瑋鍾
젊은 청년 李瑋鍾의 그 이후 인생은 어떻게 전개될까. 헤이그 밀사 세 명 가운데 구미언론으로부터 가장 주목받은 인물인 李瑋鍾의 후반기 인생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한국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참가해 「赤軍(적군)」에 입대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일까.
李瑋鍾은 헤이그 회의 다음해(1908년) 4월 러시아에서 崔在亨(최재형·1860~1920)의 지원을 받아 李範允(이범윤)·安重根 등과 함께 抗日의병 조직인 「同義會(동의회)」를 결성하고 부대장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출신답게 탁월한 지휘 능력을 발휘해 조선과 러시아 및 만주의 국경지대에서 치러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李瑋鍾은 최재형과 함께 1920년 4월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과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李瑋鍾은 그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자료가 발견되고 있다.
在美 한국인 단체가 발간한 「신한민보」 1919년 5월22일자 기사에는 『일본 당국이 李承晩과 李瑋鍾을 체포하기 위해 상금을 걸고 혈안이 돼 있다』면서 『그들은 모습을 숨기고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1920년 6월29일자 기사는 『작년부터 경성에 여러번 나타난 『李瑋鍾』은 실은 가짜」라고 전하고 있다.
1925년 7월 조선총독부 警務局(경무국)이 작성한 「在유럽 조선인 개황」이라는 문서의 「요주의 조선인 명부」 가운데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李瑋鍾의 이름이 나오고 「러시아 국적」, 「중위」 등으로 기재돼 있다. 이로 미루어 그는 그 이후에도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에는 「在유럽 한국인 공산주의 운동」에 관한 기술이 있고, 그 중심인물에는 「李瑋鍾처럼 오랜 기간 러시아 수도에 머물며 러시아人 사이에 상당한 신망을 갖고 있는 자가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李瑋鍾의 그룹은 「언어와 칼」이라는 제목의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그 편집부가 「국제사관학교 공산당 고려부」, 발행장소는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 제2포병학교」로 돼 있다. 그렇다면 李瑋鍾의 「赤軍입대설」은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당시 상황에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가 공산주의 운동에 개입해 가는 大전환은 헤이그에서의 굴욕적인 경험이 깊이 영향을 준 것이리라.
李瑋鍾이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낸 것은 확실하다. 자신의 신념대로 정직하게 살면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그런 의미에서 매력적인 인물이다.
李瑋鍾의 부인 엘리자베타 사이에 세 명의 딸이 있다고 전해진다. 둘째 딸의 핏줄을 잇는 「이나 에프게나」가 건재하고 있고, 그녀에게는 李瑋鍾의 증손자에 해당하는 2명의 여성, 타치아나 프로야이바, 율리아 피스클로바가 있다고 한다.●
번역·정리=鄭權鉉 朝鮮日報 도쿄특파원〈khjung@chosun.com〉
일본의 외교전문誌(지) 「외교포럼」은 6월호와 7월호에 걸쳐 헤이그 밀사 사건 논문을 실었다.
국제법 전공 학자인 무라세 신야(村瀨信也) 조지대학(上智大) 교수는 일본 외무성 電文(전문) 등 미공개 외교문서를 발굴해 을사늑약 체결로 孤立無援(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여 있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외교 노력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했다.
새로 찾아낸 「신한민보」 등 사료를 토대로 再구성한 李瑋鍾(이위종)의 후반기 인생 역정이 읽을 만하다. 당시 「오사카 마이니치(大阪每日) 신문」의 헤이그 특파원으로 현지에 파견돼 밀사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유일한 일본인인 다카이시 신고로(高石眞五郞) 기자의 회고록 등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이다. 일본 측 시각이 투영된 측면이 있는 논문이지만,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한 좀더 넓은 역사적 지평을 확보하기 위해 요약 소개한다. 〔편집자 注〕
미국인 실업가, 밀사에게 여비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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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高宗 황제. |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6월25일, 헤이그에는 대한제국 高宗 황제의 밀명을 받은 3명의 사절이 나타났다. 前 의정부 참찬 李相卨(이상설), 前 평리원(대법원) 예심판사 李儁, 前 駐러시아공사관 서기관 李瑋鍾 등이다. 그들은 황제의 옥새가 찍힌 전권위임장을 내보이며 회의 참가를 요구했다.
목적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간 1905년 11월7일의 「제2차 韓日협약(을사늑약)은 일본의 무력에 의한 협박下에 체결된 조약이고, 황제 재가도 받지 않는 위법적인 조약인 만큼, 헤이그 회의에서 심의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高宗 황제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밀사 파견을 결단했다. 당시 高宗은 「영국과 미국,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을 결코 용인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헤이그 회의에서 한국문제가 검토될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高宗의 「확신」은 「희망적 관측」에 지나지 않았다.
제2차 한일협약 이후 일제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엄격한 통제下에 놓여 있던 高宗은 이미 궁정 비용조차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밀사들의 여비도 서울에서 전차·전등사업을 하고 있던 미국인 실업가의 도움을 받았다.
高宗에게 밀사파견을 건의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가 밀사와 동행했다. 그는 서울 출발 전 프랑스·러시아 영사와 만나 본국 정부에 알선을 요청했다.
프랑스 영사는 『어리석은 행동』이라며 알선을 거부하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밀고했다. 헐버트는 1907년 4월 초 서울을 출발했고, 李儁는 며칠 뒤 그 뒤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미 망명 중인 李相卨과 합류했다. 일행은 시베리아 철도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러시아의 외면
페테르부르크에는 前 한국공사 李範晉(이범진·1853~1911)이 본국에서의 공사관 폐쇄·철수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체재하고 있었다. 사절들은 李範晉의 손을 거쳐 한국 황제의 친서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 전하면서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러시아 정부의 대응은 사절들의 기대를 저버렸다.
새 외상에 취임한 이즈볼스키는 駐日(주일)공사를 경험한 對日 화해파 인물로, 러시아는 이미 그때까지의 對日 강경자세를 전환했던 것이다.
駐러시아 일본대사 모토노 이치로(本野一郞)가 이즈볼스키에게 밀사 접촉 문제를 확인하자 『韓人들이 여러 가지 음모적 상담을 해오고 있음에도 우리쪽에선 절대 상대하지 말라고 엄명해 두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으라』고 해명했다(6월29일-외무성으로 보낸 電文).
이즈볼스키 외상은 『한국사절들의 비상식을 질타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러시아는 헤이그 회의의 의장국으로서, 회의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한국의 대표자격을 인정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사절들에게 분명히 전했을 것이다.
비관과 낙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한국의 사절들은 駐러시아대사 李範晉의 차남 李瑋鍾을 일행에 추가해 헤이그를 향해 다시 여행을 계속했다.
객관적 정세는 사절들이 예상한 것보다 엄혹했다. 한국 황제가 의지하던 미국은 러日전쟁에서 일본 승리가 결정되자마자 「가쓰라·태프트 협정」(1905년 7월29일)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승인했고, 영국은 「제2차 英日동맹」(1905년 8월12일)에서 이를 승인했다. 프랑스는 헤이그 회의 직전(1907년 6월10일) 같은 협약에 조인했다. 바야흐로 제국주의 시대였다.
한국 대표 회의 참가문제는 이미 관계국들 사이에서 인정하지 않기로 결론이 나있었지만, 3人의 사절이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헐버트와 李儁이 한국을 출국할 때는 「밀사」였지만, 헤이그에 도착하자마자 공개활동에 들어간다. 그들이 투숙한 헤이그의 「드용 호텔」 앞 현관에 당당히 태극기가 게양됐다.
우선 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넬리도프는 『그런 문제에 개입할 입장이 아니다』며 면회를 거절했다. 네덜란드 외무성을 방문해 외무대신 면담을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의 소개가 없으면 면담은 힘들며, 평화회의에 참가를 인정할 수 없다」고 통고받았다.
「각국은 보호조약下에서 한국이 일본에 외교권 이양을 인정했고, 이미 2년간 외교관계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헤이그 평화회의가 그런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장소가 아니라며, 사절들이 요구한 중재재판에 관한 제1위원회 참가를 거부했다.
사절들이 영국·프랑스·독일 및 중국(淸나라) 대표를 잇따라 개별 방문해 협력을 요청했지만 모두 문전박대했다. 미국대사가 유일하게 면회에 응해 주었지만, 동정을 표시하면서도 대답은 같았다.
한국사절단 대변인인 李瑋鍾은 그날 신문기자의 인터뷰에 응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넬리도프氏가 면회를 거부한 것은 놀랍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미국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양호했기 때문에 이 두 나라가 우리에게 지원을 거부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1905년 여름 「포츠머스 조약」 체결 이전에, 한국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이 회의 참석 통지를 받고, 페테르부르크의 한국공사에게 대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를 내렸다』(6월30일자 「뉴욕 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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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직후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일본군 사령관. |
한국사절 만난 다카이시 신고로 특파원
헤이그 회의의 일본 수석대표 쓰쓰기 게이로쿠(都築馨六) 대사가 각국 대표들에게 미리 한국사절과는 만나지 말도록 손을 썼다는 기록이 「일본외교문서」(제40권 제1책)에 남아 있다. 일본 국내의 신문 중에서 「오사카 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現 마이니치 신문)이 회의 취재를 위해 특파원을 파견했다.
나중에 마이니치 신문의 주필 겸 회장을 지낸 다카이시 신고로(高石眞五郞) 특파원은 현지에서 한국사절들과 만나 대화를 나눈 유일한 일본인이었다. 그는 6월 말 어느 날 사절들이 묵고 있던 드용 호텔을 찾아가 『친구라도 방문한 것처럼 그들의 안부를 묻고 명함을 건네니, 그들이 방으로 안내를 했다』고 회고담을 남겼다.
쓰쓰기 대사는 매일 본국 외무성에 한국사절의 일일 동정을 보고했지만, 그 정보는 모두 다카이시 기자로부터 제공받은 것이다. 그는 일본 대표부에 면회를 오라는 쓰쓰기 대사의 전언을 사절들에게 전하는 역할도 했다. 이에 대해 사절들은 『당신은 신문기자니까 만나지만, 일본 관료는 만날 필요가 없다』고 거부했다. 다카이시 기자는 李相卨과 李瑋鍾을 만나 대화를 나눴으나, 李儁은 「몸이 아파서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기사를 송고했다.
결국 한국사절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헤이그 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에게 프랑스語로 번역한 抗告詞(항고사) 문서를 배포하는 등 선전활동뿐이었다. 이 문서는 당시 회의장 주변에 배포된 비공식 회의보인 「만국평화회의보」 6월27일자에 게재됐다.
사절들 가운데 가장 젊은 李瑋鍾은 당시 스무 살 청년이었다. 외교관인 아버지(李範晉 前 駐러공사)를 따라 일곱 살 때부터 구미 각국에서 생활하면서 프랑스語 등 7개국語에 능통했다. 프랑스 파리의 장송 릴리중학교를 거쳐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 그때 그는 이미 러시아 귀족의 딸과 결혼하고 있었다. 구미신문들은 그를 高宗의 조카, 「프린스」라는 호칭으로 불렀다.
쓰쓰기 대사는 『사칭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국 황제에 그런 혈연은 없다』고 단언했지만, 헤이그에선 「프린스」라는 호칭이 정착돼 있었다. 李瑋鍾이 황제의 본관과 같은 전주李氏라는 점, 이름 끝자가 황제와 같은 「종」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이 그렇게 추측했을지 모른다. 李瑋鍾 자신도 「프린스」라는 호칭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만국평화회의보 발행인 미국인 저널리스트 윌리엄 스티드는 사절들을 동정해 7월8일 「국제회의의 모임」에서 한국사절들의 강연회를 개최하고 스스로 사회를 맡았다. 청중 대다수는 기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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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 |
李瑋鍾은 스티드로부터 「프린스」로 소개받고 연단에 섰다. 그러나 스티드는 연설회 직전에 쓰쓰기 일본대사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시종일관 일본 입장을 두둔했다.
『한국 입장은 동정하지만, 쥐는 이미 고양이 입 안에 있는데 고양이를 더 이상 화를 내게 해선 안 된다. 네덜란드 정부가 회의 참가를 거부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 한국의 현 상황에 대해 항의할 수 있지만, 그것이 한국의 최종적인 병합을 가속화하는 것이 아니기를 기원할 뿐이다』
스티드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항의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책임의 일단은 프린스(李瑋鍾)가 여기서 발언하는데 달렸다』고까지 말했다. 스티드는 일본을 배려하기 위해 겨우 스무 살의 젊은이에게 『한국의 명운은 모두 당신 발언에 달렸다』면서 거의 공갈에 가까운 표현으로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李瑋鍾은 이에 흔들리지 않고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을 시작했다.
쓰쓰기 일본대사가 본국 외무성에 보낸 7월9일자 電文에 따르면 『만원의 청중 앞에 서 그는 프랑스語로 1시간 정도 웅변조로 격렬하게 일본을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고 한다.
청중은 깊이 감동했다. 연설이 끝나자 몇 명이 일어나 한국에 동정을 표명했다. 그중 한 사람이 『對日 비난을 결의하자』고 동의했다.
그러나 사회자인 스티드가 『그런 결의는 한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반대해, 결의문에서 결국 일본 비난 내용은 삭제되고 한국에 대한 동정 표현만 남았다. 스티드는 만장일치로 채택된 이 결의를 만국평화회의보에 게재하는 것도 거부했다. 이날 연설회 모습은 「헤이그 신보」 7월10일자에 상세하게 보도됐다.
이토 히로부미, 高宗의 밀사 파견 방치
한국사절이 헤이그에 나타나 활동을 개시하자 즉각 일본 외무성에 보고됐다. 3명의 정확한 이름과 지위도 판명됐다.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연일 헤이그에 파견된 다카이시 기자의 특종기사를 게재했다. 이에 따라 한국에 대한 일본 국내 여론은 급속히 악화됐다(다카이시 기자 회고록).
高宗이 헤이그 회의에서 비밀리에 사절을 파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예견돼 있었다. 일본 정부內에선 이토 히로부미의 태만을 비난하는 지적이 있었지만, 이토는 한국 측을 방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런 태도를 취했다고 추정된다.
헤이그의 일본 대표단은 한국사절이 나타났을 때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대처 방침이 확실하게 일본 대표단에게 전해져 있었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의 출국과 그의 목적에 대해 일본 정부는 늦어도 5월 초순 단계에는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가 마음먹기에 따라 밀사 파견을 저지할 수도 있었다. 사절들이 출국한 뒤라도 高宗에게 되돌아오라고 사절들에게 명령하도록 시키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은밀하게 저항을 계속하는 高宗을 골탕 먹이고 있었고, 그의 폐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토는 밀사들을 오히려 「방치」함으로써 일거에 高宗 퇴위와 한국 병합의 계기로 이용하려고 했던 게 아닌가 추측된다. 실제로 한국의 정국은 그런 시나리오대로 전개된다.
밀사들의 헤이그 활동을 보고 받자 이토는 7월3일, 高宗을 만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 없다』며 힐책하고, 한국 총리대신 李完用(이완용)에게 미리 짜놓은 계획대로 황제 폐위를 실행하도록 지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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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宗의 양위식에 참석하러 가는 이토 히로부미 일행. 거리에 일본군이 배치돼 있다. |
일본 정부는 7월10일 각의에서 「對韓(대한)처리방침」을 결정, 하야시 다다스(林董) 외상을 서울에 급파한다.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한 7월18일 밤, 高宗 퇴위와 황태자에의 讓位(양위)를 결정했다. 44년간 재위에 있던 高宗은 어전회의에서 불과 4시간여 만에 퇴위당한다. 讓位 선언은 심야인 7월19일 새벽 2시에 있었다. 한 시간 후 詔勅(조칙)이 발표되고, 같은 날 오후 2시30분 새 황제가 내외 신료들을 引見(인견)하고 즉위를 공표했다.
한국 민중의 저항운동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는 7월19일 밤 포병대를 포함한 일본군 부대를 각지에서 서울로 집결시키는 동시에,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총리에게 1개 여단의 증파를 요청했다. 7월24일까지 한국 주둔 일본군은 1개 사단, 1개 여단으로 강화됐다.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야시 외상은 「對韓 처리방침」에 따라 7월24일 제3차 韓日협약을 체결하고, 거의 완전하게 한국의 국가 전권을 장악한다. 8월1일에는 한국군이 해산됐다.
7월8일 밤 헤이그에서의 李瑋鍾 연설회는 사절들의 활동에서 하나의 정점이었다. 그렇지만 헤이그 회의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高宗 황제의 입장이 날로 위험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李瑋鍾은 부모를 만날 일이 생겨(부인의 병세가 악화됐기 때문이라는 說이 있다) 일단 헤이그를 벗어나 며칠 동안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헤이그로 돌아온 뒤 두 사람과 합류해 함께 뉴욕으로 떠나기로 예정돼 있었다. 그래서 李相卨과 李儁만이 헤이그에 남았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독립운동의 투사였지만, 성격과 사고방식이 꽤 달랐던 게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현실주의적인 李相卨에 비해 이상가형의 李儁은 기독교 신자이고, 법률가이다. 1895~1898년까지 와세다大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平理院(평리원·대법원) 예심판사(검사)를 사임했다. 한국 적십자사 창설자로 초대 의장을 지냈고, 몇 개의 학교 개설에도 관여했다.
국제법 연구에 종사한 그는, 국제분쟁은 평화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헤이그 평화회의에서 중재재판에 관한 제1위원회 출석을 요구한 것은 李儁의 아이디어가 아니었을까.
7월14일(일요일), 프랑스 독립기념일인 이날 저녁 비극이 그들을 덮쳤다. 아파서 자리에 몸져누워 있던 李儁이 중태에 빠져 호텔에서 사망한 것이다. 7월17일자 「만국평화회의보」와 「헤이그신보」, 「더 텔리그라프」 등은 『얼굴에 생긴 종양 수술이 원인이 돼 사망했다』, 『얼굴의 종기를 잘라내는 수술을 한 결과, 丹毒(단독: 상처에 균이 들어가 생기는 급성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전했다.
李儁이 사망하기 2주일 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의 다카이시 특파원이 처음으로 사절들을 방문했을 때 이미 『李儁은 병세가 무거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李相卨·李瑋鍾 두 사람이 걱정스런 표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비판·분노가 李儁의 죽음을 앞당긴 것이 확실한 만큼, 그의 죽음은 「憤死(분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향년 48세였다.
쓸쓸한 장례식
李儁의 유해는 7월16일 헤이그 공동묘지에 假(가)매장됐다. 李相卨과 호텔주인만이 참석한 쓸쓸한 장례식이었다.
만국평화회의보 발행자인 윌리엄 스티드는 『유일하게 李儁의 최후를 지켜본 李相卨이 영어로 「So sad, so sad(너무 슬프고 슬프다)」라는 말을 되뇌었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의 기분이기도 했다』고 적었다.
한편, 서울에선 7월18일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가 號外(호외)를 발행해 『李儁 열사가 헤이그에서 장렬하게 자결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날 밤부터 다음날에 걸쳐 서울에선 2000명의 군중이 高宗 양위 반대의 시위를 벌였다. 그 주체는 「대한자강회」와 「동우회」 등 抗日(항일)독립운동단체와, 「李儁 자결」 소식을 접하고 분노한 기독교청년회의 사람들이었다.
李儁 열사의 죽음을 놓고 한때 「독살설」까지 나돌기도 했지만, 1962년 한국 정부 조사에서 李儁의 죽음은 病死(병사)로 확인됐다.
李瑋鍾이 페테르부르크에서 헤이그로 돌아온 것은 7월18일. 그는 李儁의 假매장 절차에 참석하지 못했다.
李瑋鍾이 李儁의 죽음 앞에서 받은 충격을 상상해 본다.
「일본이 무력으로 한국의 주권을 유린한 데 대해 모든 나라가 외면한다면 이제 남은 것은 무력으로 대항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20세의 감수성 예민한 청년이 李儁의 무덤 앞에서 이를 갈면서 그렇게 결단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李儁 열사의 정식 장례식이 치러진 것은 李瑋鍾이 한 달 여 동안 미국을 다녀온 뒤다.
장례식은 9월6일 오전 11시부터 열사의 동생과 한국의 前외교관,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했다. 헤이그 YMCA 회장인 A.E.멕케이 남작이 한국 YMCA 초대 총재였던 고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인사말을 했다.
한국말 찬송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李儁의 독립운동 투사로서의 활동이 소개됐고 장례식은 끝났다. 李儁의 유해는 한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현지 공동묘지에 정식 매장됐다. 그의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간 것은 56년 후인 1963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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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李儁 열사의 묘소. |
李相卨, 사형판결을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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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밀사 사건 후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李相卨. |
1907년 7월19일 헤이그를 떠난 李相卨은 李瑋鍾과 함께 런던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의 실정을 미국 언론에 호소했다. 在美(재미) 한국인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지원도 요청했다.
미국 체재 중인 8월9일, 일본 정부 압력下에 놓여 있던 한국의 재판소는 궐석재판을 통해 李相卨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사망한 李儁과 李瑋鍾에게는 종신형).
李相卨은 본거지인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 李相卨은 그 후 시베리아에서 한국인 자제들을 대상으로 항일민족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학교 설립에 매진하면서 독립운동의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抗日군사조직 주석을 지내고, 「신한혁명단」 등의 망명정부 조직 수립에 진력하기도 했지만, 살아 있는 동안 그런 정치활동이 결실을 거두진 못했다. 헤이그 회의 10년 후인 1917년 3월2일, 李相卨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병사했다. 향년 48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安重根(안중근)은 처형되기 전 옥중에서 李相卨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李相卨, 세계 대세에 밝고 동양의 時局(시국)을 꿰뚫어보다. 기국이 크고 사리가 밝은 큰 인물로, 大臣(대신)으로서의 인물됨을 잃지 않았다. 才士(재사)로서 법률에 해박하고, 영어·프랑스어·일본어가 유창했다. 애국심이 강하고 교육 진흥을 꾀하면서 국가 백년대계를 세운 사람다웠다. 동양 평화주의를 품고 있었고, 이 사람처럼 친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드물 것이다』
赤軍에 가담한 李瑋鍾
젊은 청년 李瑋鍾의 그 이후 인생은 어떻게 전개될까. 헤이그 밀사 세 명 가운데 구미언론으로부터 가장 주목받은 인물인 李瑋鍾의 후반기 인생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한국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가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참가해 「赤軍(적군)」에 입대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일까.
李瑋鍾은 헤이그 회의 다음해(1908년) 4월 러시아에서 崔在亨(최재형·1860~1920)의 지원을 받아 李範允(이범윤)·安重根 등과 함께 抗日의병 조직인 「同義會(동의회)」를 결성하고 부대장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그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 출신답게 탁월한 지휘 능력을 발휘해 조선과 러시아 및 만주의 국경지대에서 치러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李瑋鍾은 최재형과 함께 1920년 4월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과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李瑋鍾은 그 후에도 활동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자료가 발견되고 있다.
在美 한국인 단체가 발간한 「신한민보」 1919년 5월22일자 기사에는 『일본 당국이 李承晩과 李瑋鍾을 체포하기 위해 상금을 걸고 혈안이 돼 있다』면서 『그들은 모습을 숨기고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1920년 6월29일자 기사는 『작년부터 경성에 여러번 나타난 『李瑋鍾』은 실은 가짜」라고 전하고 있다.
1925년 7월 조선총독부 警務局(경무국)이 작성한 「在유럽 조선인 개황」이라는 문서의 「요주의 조선인 명부」 가운데 「페테르부르크에 거주하는」 李瑋鍾의 이름이 나오고 「러시아 국적」, 「중위」 등으로 기재돼 있다. 이로 미루어 그는 그 이후에도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서에는 「在유럽 한국인 공산주의 운동」에 관한 기술이 있고, 그 중심인물에는 「李瑋鍾처럼 오랜 기간 러시아 수도에 머물며 러시아人 사이에 상당한 신망을 갖고 있는 자가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李瑋鍾의 그룹은 「언어와 칼」이라는 제목의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그 편집부가 「국제사관학교 공산당 고려부」, 발행장소는 「레닌그라드(페테르부르크) 제2포병학교」로 돼 있다. 그렇다면 李瑋鍾의 「赤軍입대설」은 더욱 신빙성이 높아진다.
당시 상황에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가 공산주의 운동에 개입해 가는 大전환은 헤이그에서의 굴욕적인 경험이 깊이 영향을 준 것이리라.
李瑋鍾이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낸 것은 확실하다. 자신의 신념대로 정직하게 살면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그런 의미에서 매력적인 인물이다.
李瑋鍾의 부인 엘리자베타 사이에 세 명의 딸이 있다고 전해진다. 둘째 딸의 핏줄을 잇는 「이나 에프게나」가 건재하고 있고, 그녀에게는 李瑋鍾의 증손자에 해당하는 2명의 여성, 타치아나 프로야이바, 율리아 피스클로바가 있다고 한다.●
번역·정리=鄭權鉉 朝鮮日報 도쿄특파원〈khjung@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