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현대문학의 거장이자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가 지난 3월 3일 세상을 떠난 것이 뒤늦게 알려졌다. 오에 겐자부로는 세계 평화운동과 핵(核) 반대운동, 소수자와 생명권을 옹호하는 운동을 펼친 인물이자, “과거 치유와 인류화해가 일본의 제1과제”라고 한 비판적 지성이었다. 사르트르, 카뮈 등에게 문학적 영향을 받았다.

노벨상을 수상한 그해 일본 정부가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자상을 수여하자 “나는 민주주의 그 이상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수상을 거부한 일도 있다.

1957년 도쿄대 불문학과 재학 중 <기묘한 일>이란 소설로 데뷔했으며 이듬해 <사육>을 발표, 일본의 최고권위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신(新)좌익’의 입장을 고수했다고 전한다. 젊은 시절부터 미일(美日) 안보조약 반대투쟁에 앞장선 일도 있고 줄곧 일본의 방위력 증강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왔다. 솔제니친과 김지하의 석방 운동에 적극 참여해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오에 겐자부로는 1995년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와 초청한 <해방 50년과 패전 50년>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訪韓)해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조선일보 1995년 2월 2일 자 27면에 실린 인터뷰에서 “평소 존경해 오던 시인 김지하씨를 비롯한 한국의 여러분들과 대화를 나누게 돼 기쁘다. 내가 한일 양국의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과 두려움 두 가지를 가지고 왔다”고 말했다.

또 “아시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일본 때문에 상처를 많이 입었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또는 21세기의 첫 10년 동안 그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것이 일본의 역할”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21세기 이후 일본 국민과 정부가 주변 국가들의 상처에 대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오에의 말을 되새김질해 본다.

고인은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 100주년이었던 지난 2010년, 병합 조약은 무효라고 선언한 양국 지식인 1000여 명 공동성명에 이름을 올렸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오에 겐자부로는 2017년 일본의 전쟁 범죄를 비판하면서도 《제국의 위안부》 저자인 박유하 세종대 교수가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국내외 학자·예술인 90여 명과 함께 박 교수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혔었다.

고인의 문학 전집이 국내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도서출판 고려원이 그와 저작권 계약을 체결하고 전집을 출간한 일이 있다. 그의 3부작 《타오르는 푸른 나무》의 <제1부 구세주의 수난>을 필두로 2년여에 걸쳐 매월 5일 1권씩 출간했다.

기자의 기억에 남아 있는 책으로 《히로시마 노트》가 있다. 원폭이 투하된 히로시마를 찾아가 피폭자들을 접하고 목격한 체험기다. 전범 국가라는 비난을 짊어진 채 참담한 상처를 견뎌야만 했던 피폭자들의 실상을 고발하고 일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또 다른 감회를 갖게 하는 글이었다.

1963년 발표한 대표작 《개인적인 체험》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실제로 소설가로서 막 주목받기 시작할 무렵, 오에 겐자부로의 큰아들 히카리(光)가 장애를 안고 태어난다. 아이는 어려운 수술을 거쳐 간신히 목숨은 건지지만 평생 지적 장애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개인적인 체험》의소설 속 화자(話者)인 27세의 학원 강사 버드는 결혼 후 아기가 생겨도 아프리카로의 모험 여행을 꿈꾸는 젊음이다. 아기가 뇌 손상을 가진 장애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유를 잃어버린 현실에 절망한다. 아기에 대한 책임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과 옛 여자 친구에게 집착하게 된다. 그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이 작품은 지적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의 죽음을 원하는 청년의 방황, 절망과 일탈의 나날을 보여준다. 출구가 없는 현실에 놓인 현대인들에게 재생의 희망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오에 겐자부로의 인생과 작품 세계에 전환점이 된 이 소설은 노벨 문학상 수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전한다.

훗날 오에의 뇌성마비 아들 히키라는 골든 디스카상을 수상하는 작곡가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 과정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집 《회복하는 가족》을 펴냈다. 이 책에서 장애를 지닌 아들, 치매에 빠진 장모와 수십 년 동안 함께 살며 깨달은 회복과 재생, 치유와 공생의 깊은 의미를 담백하면서도 유장한 문체로 묘파한다. 오에의 부인 유카리가 아들의 초상 등 삽화를 그려 넣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