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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集 신간] 크리스마스에 읽는 박상봉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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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봉 시인과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 사진 배경=조선일보DB

지난 7월에 나온 시집이지만 이제야 읽게 되었다. 불탄 나무의 속삭임(곰곰나루 ).

시집을 읽으니 따스함이 느껴진다. 시인을 만난 적은 없지만 분명 로맨티스트가 틀림없으리라.


날마다 누군가에게 다가간다는 그것

얼마나 설레고 흥미로운 일상인가

-<다가간다는 것> 일부


 

이리 불붙어도 되는 걸까

 

한 나무가 다른 나무 향하는 마음 깊어지면

왕릉 앞인들 상피붙겠다

-<불탄 나무의 속삭임> 일부


시를 다루는 솜씨, 시어를 택하는 손길만 봐도 이 시인의 따스한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분명 낭만적 기품을 지닌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표사(表辭)를 쓴 이하석 시인도 박상봉 시인에게 그리움의 시인이다. ‘가는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면서 (중략) 먼나무의 시인으로 서 있다. 그 나무는 불붙은 나무’”라고 썼다.


시인은 1958년생이다. 1981년 박기영·안도현·장정일 시인 등과 동인지 국시를 통해 시작(詩作)을 경험했고 1990년 현암사가 발간하는 오늘의 시》에 선정되면서 시단에 이름을 알렸다. 1995문학정신가을호에 <쎄씨를 읽는 남자> 등을 발표했고 시집으로 카페 물땡땡(만인사 )과 신간 불탄 나무의 속삭임이 있다.


시인은 이와 관련, “마흔아홉 살에 첫 시집을 내고 예순이 넘어 두 번째 시집을 엮는다. 나의 생은 말없음표로 길게 이어져 있다고 했다.

마흔아홉예순 너머사이에 있었던 삶의 기록이 바로 시집 불탄 나무의…》이다. 그는 시인과 독자의 만남을 비롯, 지역문화 행사를 300회 이상 기획·운영하는 등 다양한 문화산업 기획자로 활동해왔다.


이제는 절로 고개 숙여지는 무르익은 나이

저만치 창가에 차오르는 햇살부터 느낌이 다르다.

 

쨍하고 어수선한 한여름의 그것보다

어딘가 모르게 한풀 꺾인 뉘엿뉘엿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가을

 

지천명의 가을은 오금 저리게 아름답고

한껏 보기 좋은 환한 날이다.

온 산 다 껴안고 나서 비로소 물드는 절정의 단풍나무 숲으로

무거운 짐 벗어놓고 가야 할 길이다

-<늦가을 단풍> 일부


 

칸칸마다 뼈아픈 시절 나누어 싣고 하행하는 기차 안

더듬더듬 캄캄한 동굴 속 지나갈 때, 머뭇거리며

아무도 내리는 이 없는 간이역 지나칠 때, 난간에 기대어

 

참 미묘한 떨림이었네

화끈 낯이 붉어지는 순간, 시가 나를 찾아왔네

언제 가을이 내 안에서 이토록 뜨거운 적 있었던가

 

차창 바깥으로 스러져가는 황혼을 한껏 끌어안고

단풍잎 붉은 차창 밖, 낯선 마을 뒷길에, 감나무에 매달린 홍시 같은

새콤달콤한 맛 오래 음미하고 싶었으나

세월보다 빠른 속도로 달아나는 가을 붙잡아둘 수 없었네

 

늦은 가을날의 키스,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생각날 때마다 몰래 꺼내어 읽을 수 있다면

 

손에 땀이 차는데, 잡은 손 놓기 싫어

역방향으로 자꾸 뒷걸음치던 나,

 

허방 짚고 다닌 삶, 모두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네

-<늦가을 키스> 일부


앞뒤로 배치한 시 <늦가을 단풍><늦가을 키스>는 중년의 시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느끼게 한다.

 

시인은 첫사랑 그 소녀를 평생 찾아다니고’(<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 폭우가 쏟아지듯 나도 쏟아지고 싶을 때가 있’(<빗방울처럼> )으며 사는 일이 땅도 집도 없는 마룻바닥을 뒹구는 먼지 같’(<내 어디 살고 있는지> ), ‘때로 서쪽에서 바람이불어 나무둥치를 뿌리째 뽑아놓고 가기도’(<서쪽에서 부는 바람> )했으며 내가 세운 공장들’(<헌 신발> )을 잃어 버렸지만, 시인은 누구보다 고유(固有)한 향기로 살았음을 문득 깨닫는다. 자신의 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깨닫게 된 것이다.

 

나는 예전에 개미 위에

뜨거운 물을 부어본 적이 있다

새콤달콤한 커피 향기

처음 맡아본 날이다

 

한 숟가락 설탕을 넣기 전에는

내 삶도 진한 향기를 지녔다는 사실

알게 된 날이다

-<향기>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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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기자는 기형도·정호승 시인의 발성이 느껴졌는데 아름답게 잘 빚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에 자꾸 눈길이 가고, 입으로 읽게 된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네

 

살아온 날을 세어보니

기록할 만한 일도 없구나

 

청춘은 어디로 갔나

내가 세운 공장들은 어디에 있나

 

밤늦도록 눈 비비며 보던 책들

밑줄 그은 문장의 길 따라

지치도록 구름 위를 달려왔으나

 

끈이 너덜너덜해진 가방 속

세월을 낭비한 죄의 형량만 무겁네

 

직장생활 십팔 년 아무리 계산해 봐도

한 푼어치 남은 것 없는 밑지는 장사였네

-<헌 신발> 일부



만약 당신이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사랑은 버리고 추억만 가지고 가라

 

사랑의 달콤한 꿀물 맛보고 나서

견디기 힘든 슬픔의 골짜기에 빠지지 않으려면

 

곱게 물든 단풍잎 한장 책갈피에 끼워놓듯

사랑의 추억만 가슴에 간직하고 가라

 

사랑은 추억으로 남을 때

제 빛깔과 향기를 지닐 수 있는 것

 

마음의 빈 의자에 낙엽이 떨어져 쌓이고

겨울이 와서 눈 내리는 동안

 

기어이 사랑을 버릴 수 없다면

눈 덮인 산정으로 곧장 달려가라

 

폭설 휘몰아치는 숲속에서

작정하고 길을 잃어도 좋으리

-<사랑하지 마라> 전문

 

로맨티스트인 시인의 작정하고 길을 잃어도 좋다는 외침이, 벌써, 그의 세 번째 시집을 기다리게 한다.

입력 : 2021.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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