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리쓰 료지 씨 |
규슈의 야쓰시로(八代) 시립박물관 학예원 도리쓰 료지(鳥津亮二·40)씨가 ‘시리즈 재검증,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강연회에서 발표한 내용이다(小西行長/ 구마모토 우도시 발행).
세스페데스 신부(神父)의 나이는 불혹을 넘긴 42세였고, 한칸 레온은 신부보다 12-3세가 더 많았다.
한국판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도리쓰(鳥津)씨는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에 최초로 발을 디딘 사람으로 한국판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래한 인물)이다”고 했다. 그리고, 세스페데스 신부가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제1군에 고니시(小西)를 비롯해서 규슈의 아리마(有馬)와 오무라(大村) 등 크리스천 다이묘(大名)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
웅천왜성의 잔재 |
사실이다. 고니시 부대에는 크리스천 다이묘들이 많았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고니시는 웅천왜성 완공을 눈앞에 둔 시점에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던 스페인 출신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를 웅천왜성에 초청했다. ‘세스페데스’ 신부는 1593년 12월27일 웅천에 상륙해서 1595년 6월 초순까지 1년 6개월가량 머물며 웅천왜성과 주변성에 있던 왜군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미사 집전과 교리 강론을 하고 이교도(異敎徒) 병사들에게도 세례를 주는 등 목회활동을 했다.
도리쓰(鳥津) 씨는 세스페데스의 조선 방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 |
조선 최초의 미사 집전지('고니시유키나가'에서 발췌) |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에도 필히 그리스도교를 포교하고 싶다’는 열의를 가지고 몇 번이나 웅천왜성을 벗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접근하려고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도리쓰 씨는 실제로 조선 최초로 미사가 집전된 곳을 방문해서 그 사진을 책에 실었다. 그의 말이다.
“세스페데스의 미사에 대한 내용은 프로이스(Luis Frois, 1532-1597)의 기록에도 확실하게 쓰여 있습니다. 역사학자 입장에서 보면 종교를 떠나 중요한 팩트(fact)입니다.”
그리고, 그는 ‘고니시의 행동이 여기에 이르기까지 국경과 시간을 초월해서 영향을 미친 것은 대단한 일이다’고 했다. ‘조선을 침략한 부분은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하면서.
종군(從軍) 신부라고 할 수 없어
![]() |
세스페데스 신부와 한칸 레온(창원의 세스페데스 공원) |
“세스페데스와 그의 동반자 한칸 레온을 소위 종군(從軍) 사제로 부르는 것은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다. 자신의 의사와 반해서 가정과 가족으로부터 무리하게 격리되어 전쟁터로 끌려 나간 병사(兵士)들에게 목회를 하기 위해서 초청된 것에 불과하다.”
‘루이스 메디나(Juan G. Ruiz de Medina)’ 신부의 저서 <머나먼 까울리/ 遙かなる高麗高麗>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이 책은 그 당시(1566-1784)의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서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 신부의 방한 활동은 그와 친분이 두터운 고니시 유키나가 등 다이묘들의 요청에 따라 비밀리에 취해진 것이었으나,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의 방해에 의해서 ‘조선을 넘어 명나라에서 선교 활동을 하겠다’는 큰 뜻이 좌절되고 말았다. 결국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을 떠나게 되었다.
이는 필자가 (1)편에서 제시한 외국어대 박철 교수의 주장과도 맥(脈)을 같이한다. 그 후 세스페데스 신부는 조선 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
고쿠라(小倉)에서 쓰러져
세스페데스 신부-
60평생 중 일본에 머무른 기간만 34년이다. 그는 죽는 날까지 일본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다녔다. 1611년 12월 어느 일요일 아침, 나가사키(長崎)에서 관구장 신부를 알현하고 고쿠라(小倉: 현 北九州)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 유명하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필자는 오쓰보 시게타카(大坪重隆)씨의 안내로 후쿠오카에서 기타규슈로 갔다. 그는 자신의 고향에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는 기억을 더듬으면서 차를 몰았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서 천신만고 끝에 교회를 찾았다. 가톨릭 고쿠라(小倉) 교회였다. 필자는 반가워서 ‘바로 여기로다’ 하고 교회로 들어갔으나 신부님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혹시, 세스페데스 신부님 묘지가 여기에 있나요?”
“없습니다.”
“없습니다.”
세스페데스 신부가 생을 마감한 1611년은 암운(暗雲)의 시기였다. 성당이 파괴되고 사제들은 추방됐다. 1614년에는 크리스천 금교령이 내려졌으며 교회도, 관계자들의 묘지도 모두 파괴됐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흔적...묘지도 사라져
“제가 생각했던 대로 세스페데스 신부의 흔적은 모두 말살(抹殺)되었을 것입니다.”
오쓰보(大坪)씨도 숨을 길게 내쉬면서 말했다.
세스페데스 신부의 유해는 크리스천을 탄압하던 막부(幕府)에 의해서 바람 처럼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또 다른 사실. 그곳은 고쿠라 교회 소속의 ‘가가야마 하야토(加賀山準人)’의 순교(殉敎)를 기리는 곳이었다. 그는 1576년 10세의 어린 나이에 예수회의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디에고(Diego).
![]() |
가톨릭 고쿠라 교회의 역사에 대한 안내문 |
막부의 기교(棄敎)를 거부하던 ‘가가야마(加賀山)’는 1619년 10월 15일 예수와 마리아의 이름을 다섯 번 부르면서 참수 당했다. 54세의 나이에.
17세기 전반 막부의 크리스천 탄압에 의해 순교한 일본인 신도 188명이 바티칸에 의해서 ‘복자’로서 인정됐다. 그들은 오랜 세월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2008년 11월 24일의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가가야마 하야토(加賀山準人)가 세스페데스 신부와 관련이 있는 기록을 찾은 것이다. 가가야마(加賀山)가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세스페데스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모범적으로 젊은 고쿠라 교회 공동체 만들기에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래도 헛걸음은 아니였다’는 생각을 하면서 발길을 돌렸다.
![]() |
가가야마 하야토의 송덕비 |
교회 앞의 순교 송덕비(顕彰碑)에 새겨진 ‘바다의 사랑에 부쳐(寄海戀)’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가가야마 하야토(加賀山準人)’가 작은 배로 처형장 아래에 도착해서 개종(改宗)을 요구하는 관리에게 자신의 마지막 심경(心境)을 토로한 일수(一首)로 알려지고 있다.
“천길 만길 깊은 사랑의 바다는 저기로다.
이 마음 전하면 좋으련만 말조차 떠오르지 않도다.”
이 마음 전하면 좋으련만 말조차 떠오르지 않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