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온 제가 인터뷰 대상이 되나요?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야스다 우타코(安田詩子·65)' 씨의 유창한 우리말이다. '45년을 한국과 인연을 맺고 살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생각했지만, 너무나 능숙했기에 깜짝 놀랐다.
그녀와의 만남은 영등포의 어느 한식당에서 <세 번 건넌 해협/ 한국판 '해협'>의 번역자 정혜자(66) 씨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야스다(安田) 씨와 정혜자 씨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이웃사촌이란다. 한국어 번역판 <해협>도 '야스다 우타코(安田詩子)' 씨의 추천으로 태어났다.
번역자 정혜자 씨는 우타코(詩子) 씨를 "우타코(詩子)라는 이름대로 시적(詩的)인 사람이다"고 했다. 필자도 그렇게 느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詩)와 같은 음률(音律)이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자 정혜자 씨는 우타코(詩子) 씨를 "우타코(詩子)라는 이름대로 시적(詩的)인 사람이다"고 했다. 필자도 그렇게 느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시(詩)와 같은 음률(音律)이 있었기 때문이다.
![]() |
야스다 우타코(왼)씨와 해협의 번역자 정혜자(오)씨 |
20살 때 단돈 5만엔 들고 무작정 해협을 건너
"스무 살 때 무작정 한국으로 건너왔습니다. 대책 없이요."
'야스타(安田)' 씨는 20세 때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한국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한국은 그녀에게 생소한 나라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정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4명의 가족이 한 방에서 기거할 정도였습니다. 어디로 가야할까?"
![]() |
45년전을 회상하는 야스다씨 |
"어디론가 가보고 싶은 충동이 가슴을 도리질 했습니다. 그 곳이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저는 단돈 5만 엔(50만원)을 들고 한국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홀홀단신 김포 공항에 내렸다. 그런데, 출입국관리소와 세관 통과 중에 문제가 생겼다. 작은 가방하나 들고 입국한 일본 아가씨의 모습이 아무래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혹시 스파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아 3시간이나 붙잡혔다. 1970년 대 초이니 그럴 만도 하다. 불현듯 한국을 찾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도 한국을 찾은 이유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한자를 쓰면서 히라가나·가타카나가 아닌 독특한 자신들만의 문자를 쓰고, 전통적인 불교보다도 기독교가 왕성한 한국이라는 나라에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섬광처럼 스쳐가는 영감이랄까? 뭐 그런 것이었습니다."
일본 효고현(兵庫縣) 출신의 스무살배기 시골 처녀는 부모님 몰래 왕복 비행기 표만 들고 한국에 첫발을 내딛었다. 지금으로부터 45년 전의 일이다. 그녀의 한국과의 인연은 이렇게 당돌하게 시작됐다. 운명처럼 다가온 인생의 갈림길이다. 다행스럽게 택시 운전사를 잘 만나서 연세대학교의 좋은 카운슬러를 소개 받았다. 1주일간의 여행은 서울뿐만 아니라, 새마을호를 타고 부산까지 갔다. 카운슬러 선생은 서울역에서 옛 친구를 30년 만에 우연히 만나서 일본 처녀를 안전하게 부산까지 여행하게 했다. 그 친구는 '야스다(安田)' 씨를 자신의 집에까지 데려가 숙식을 제공했다. 경비 절약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이다.
식을 줄 모르는 한국어 공부의 열정
도서관을 좋아하고 책읽기를 즐겼던 '야스다(安田)' 씨는 후쿠오카 죠가쿠인(福岡女學院)에 직원으로 취직했다. 근무처는 도서관이었다. 그러면서도 공부를 계속했다.
"그 대학에 2년간 재직한 이유로, 지금도 연금이 나온답니다."
정혜자 선생이 옆에서 거들었다. 일본의 복지제도에 대한 찬사다. 2년 후 그녀는 오사카(大阪)로 갔다. 오사카(大阪) 채플대학 학장이 캐나다 토론토 대학 유학 시절 룸메이였던 이화여자대학 교수를 소개해 준다고 했다. 한국에 공부하러가기로 맘먹고 한국영사관을 찾아가 직원에게 '한국말을 가르쳐달라'고 매달리기도 했다.
![]() |
도봉산에 올랐을때 '아! 여기로구나'생각이 들었다는 야스다 씨 |
"도봉산에서 산 아래를 굽어보니 '아! 여기가 내가 살았던 곳이로구나!' 감탄사가 절로 나왔습니다. 처음 가본 도봉산이 무척 눈에 익은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봉산의 알 수 없는 정기를 안고 일본으로 돌아가 고베(神戶)의 고난(甲南) 여자대학교에 교직원으로 취직을 했다. 고난(甲南) 여자대학교는 급료도 높고, 시간도 많았다. 그러나, 한국어 공부에 대한 열정은 '야스다(安田)' 씨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는 직원들 몰래 국립오사카외국어대학에 들어가 한국어를 전공했다. 이 대학은 일본의 유명 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1923-1966)'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런데, 직업을 가지고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이 밝혀져 난처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야스타(安田)' 씨는 6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한국의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다. 그녀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다. 이화 여대 대학원 입학은 후쿠오카 죠가쿠인(女學院)의 '에노모토(榎本)' 학장과 이화 여대 '손승희' 교수와의 친분으로 성사됐다.
"입학 당시 김순회 교수님은 교무처장이셨습니다. 김 교수님은 교무처장을 하시면서 필수 선택 과목인 일본어를 가르치셨습니다. 지도 교수는 기독교육학과의 손승희 교수님이셨고요. 제9대 총장을 역임하셨던 정의숙 교수님도 은사이시고, 역시 제11대 총장을 하신 장상 교수님으로부터는 신약성서를 배웠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쟁쟁한 사람들이다. 야스다(安田) 씨는 "훌륭한 교수님들로부터의 배움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화여대 대학원에서의 전공은 기독교 교육학이었다. 대학원은 남보다 길게 3년이나 다녔다. 80년 5·18로 인해 공부를 못하기도 했고, 언어의 장벽도 늦장 졸업에 힘을 보탰다. 입학 당시 교무 처장이던 김순회 교수의 '어려운 한국말 질문에 면접에서 고배를 마시기도 했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하지만, 훗날 김순회 교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국인과의 결혼이 생애 최고의 선택
![]() |
남편의 이야기가 나오자 부끄러워 하는 야스다씨 |
"교양 일본어 강사를 13년 동안 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닙니다. 그 당시 김옥길 총장께서 '일본인은 절대로 강단에 설 수 없다'고 극구 반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숙집 아저씨의 소개로 지난 3월 타계한 선우종원(전 장면 국무총리 비서실장, 1918-2004) 씨와 김순회 교수의 설득으로 강단에 서게 됐다. 하숙집의 은덕은 또 있다. 오늘의 한국인 남편 황재성(기업인·69) 씨도 하숙집 소개로 만났다. 황재성 씨는 당초 그녀의 출입국관리 보증인이었다. 출입국 보증인이 훗날 인생의 보증인으로 발전했다. 그녀는 마흔 살의 나이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에 골인했던 것이다.
<한국인과 결혼한 것을 후회해본 적 있으십니까?>
"전혀 없습니다. 제 일생에서 가장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이 고집스러운, 한국의 전통적 양반 스타일이어서 더욱 좋습니다."
<슬하에 자녀분을 몇 분을 두고 계시나요?>
"두 아들을 두고 있습니다. 집에서 일본어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만, 캐나다에 유학을 하다가 다시 일본으로 가서 공부하더군요. 도쿄에서 취직해 직장에 다니다가 지진이 무섭다고 빠져 나왔습니다. 천생 한국인이에요."
'야스다(安田)' 씨의 고향에는 '직계 가족은 없고, 친척들은 아직 많이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성(姓)과 이름은 일본인 그대로 남아 있다. 노모(老母) 때문이란다. 90세의 친정 어머니를 서울에서 모시고 산다. 그러나, 마음은 45년 전 이미 한국인으로 굳어 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말에서 유머와 재기가 넘쳤다. 자신이 한국말을 열심히 배운 이유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오히려 한국 사람들을 더 이해하게 되는 밑거름이 됐다. 가족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요즈음 한일관계가 삐걱거립니다. 일본과 비즈니스를 하는 저와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얼마 전 <소서노>라는 뮤지컬을 봤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가 녹아 있어서 재미있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否定)은 곧 자기 부정입니다. 일본의 일부 정치인들은 사실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래서, 민간인들의 교류가 중요합니다. 정치적인 복선이 없는 순수한 민간인 교류를 통해서, 서로 이해하면서 발전적인 중지를 모아야 합니다."
하하키기(帚木) 선생의 열혈 팬-우리는 백제인의 후손이다
<작가 '하하키기 호호세이(帚木蓬生·67)' 선생을 좋아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십니까?>
![]() |
자신의 가족사를 설명하다가 잠시 침묵하는 야스다씨 |
"저희 아버지로부터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집안의 내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백제인의 후손이다. 그런데 '하하키기(帚木)' 선생의 사진과 작품을 보는 순간 '백제인이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고쿠도우(國銅)'라는 소설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가졌습니다. 물론, 그의 작품 세계가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소설 <고쿠도우>는 나라(奈良)를 무대로 대불상(大佛像)을 건립하는 과정을 다뤘다. 소설을 읽다 보면 백제인의 피가 흐르지 않고서는 쓸 수 없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하하키기(帚木)' 선생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녀를 끌리게 한 작가다. 작가 자신이 정신과 의사인 관계로 소설에서 사람들의 심리를 기가 막히게 잘 묘사한다. '야스다(安田)' 씨가 열혈 팬이 된 이유다. 그녀는 50여 편이 넘는 '하하키기(帚木)' 선생의 소설을 거의 다 읽었다고 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남동생의 아픈 사연 때문에 '그 작가를 더욱 좋아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의 남동생이 22살부터 52살까지 30년 동안 정신 병원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렵고 힘들 때 선생의 소설을 읽으면서 많은 위안을 받았습니다. 선생의 소설을 통해서 저 자신을 치유(治癒)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하하키기(帚木)'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순간 '야스다(安田)' 씨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서렸다. 남동생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필자도 '하하키기(帚木)' 선생의 소설 <폐쇄병동>의 한 구절을 떠올려 봤다.
![]() |
필자가 직접 만난 하하키기 호세이 씨의 모습 |
"벚꽃 병동으로 돌아와 베란다의 분재에 물을 주었다. 모과나무 꽃이 마침 만발해 있었다. 주 씨는 매화보다는 가련하고, 복사꽃보다는 청초한 이 꽃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야스다 우타코(安田詩子)' 씨가 바로 '매화보다도 가련하고 복사꽃보다 청초한 모과나무 꽃'이었다. 그녀는 일본 고대사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토대로 일본의 역사 부정을 낱낱이 들추고 다닌다. 일본인으로보다는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삶에 더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다.
'야스다 우타코(安田詩子)' 씨는 인터뷰를 마치면서 "오늘이 있기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많은 한국 사람들과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소망이다"고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자 햇살이 건물 안으로 눈부시게 다가왔다. 그녀의 소망도 햇살처럼 눈부시게 이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