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26일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에 있는 다자이후(太宰府)를 찾았다. 그동안 관광차원에서 수차례 다자이후를 들락거렸으나, 이번에는 과거와는 달리 '장보고 CEO 포럼' 회장인 황상석(전남대 세계한상문화연구단 연구교수) 박사와 연구원·학생(일부 가족)들과 같이 방문했다.
자원봉사자 야마모토 치에코 할머니 |
후쿠오카의 나카무라 조리학교 이사장인 '나카무라테쓰(中村哲·60)'씨의 소개로 '다자이후 덴만구(太宰府天滿宮)'의 안내를 맡은 자연봉사자 '야마모토 치에코(山本千惠子)'씨의 제1성이다. 물론 한국어로 한 인사말이다. 발음이나 단어 선택이 다소 빗나가기는 했으나, 의미 전달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완벽한 한국어 구사보다는 다소 어눌한 말이 오히려 일행들에게 재미를 더해 역사탐방이라는 학구적인 무거움을 덜어주는 청량제가 됐다.
백제 사람들-
"아! 정말 반갑습니다. 백제 사람들이 오셨군요."
야마모토(山本)씨는 방문객이 전남대 교수와 학생·가족들이라는 것을 인지하고서 '백제 사람들-' 이라고 다시 한 번 인사했다. 참으로 재치 만점인 할머니 안내원이었다. 후쿠오카의 날씨치고는 손이 시릴 정도로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설명 자료를 한 보따리 들고 나온 귀여운(?) 할머니 '야마모토 치에코(山本千惠子)'씨- 그녀의 열정에 일행들은 입을 딱 벌렸다. 야마모토(山本)씨는 먼저 다자이후행정청(太宰府正庁)이 있었던 유적지로 일행을 안내했다.
"여러분! 심호흡을 하세요. 공기가 좋지요? 바람도 좋지요? 동서남북 사방이 산과 언덕으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산세가 아주 좋은 곳입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너무나 훌륭한 터전입니다."
일단 이곳의 산세를 설명하던 야마모토(山本)씨는 찬바람 속에서 자료를 펼쳐들고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능숙하게 설명했다.
수성의 구조에 대해서 설명하는 야마모토 씨(좌)와 이상걸 총무(우) |
"660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에서 구원병을 보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덴지천황(天智天皇, 626-672) 입니다. 안타깝게도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하자 일본은 성(城)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664년 쓰시마(對馬島)와 하카다(博多)에 군사를 배치하고, 외교·정치·문화 등을 담당하는 행정관청을 내륙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다자이후행정청입니다. 500년간 번영을 누린 일본 서부지역의 수도인 셈이지요. 건물은 없어졌지만 인고(忍苦)의 세월을 견디어온 주춧돌들이 일부 남아 있습니다. 색깔이 퇴색되고 깨진 돌들이 바로 그 당시에 놓였던 주춧돌입니다."
모두가 역사적인 사실이다. 일본은 백촌강 전투에서 400여 척의 전함과 2만 7천명의 구원병을 모두 잃었다. 이 전투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급한 것은 일본-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은 정부차원에서 신라와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해 미즈키(水城)과 오노조(大野城)을 축조했다. 미즈키(水城)는 길이 1.2km, 폭 60m, 높이 14m의 토성(土城)이며, 오노조(大野城)는 다자이후 북쪽에 있는 시오지산(四王寺山) 정상에 위치한 8km의 토담과 석벽이다. 특히, 이 성은 665년 백제 망명자들의 아이디어를 따라 덴지천황(天智天皇)이 진두지휘해서 쌓은 백제식 산성이다. 그만큼 백제와 일본은 깊은 관련이 있었기에 전남대 관계자들의 방문을 야마모토(山本)씨가 더욱 반긴 것이다.
다자이후 행정청의 남문터 |
<옛날,
여기에 다자이후정청(大宰府正庁)이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자고 있는
이 쓸쓸한 초석 위에
'멀리 조정'이 우뚝 솟았구나.
나그네-
보이지 않는 주홍의 원주(円柱)에 기대어
잠깐 휴식을 취하구나.
(..........)
천년의 매화 향기를 옷깃에 꽂고
다시 여행을 떠나는구나.>
이 시(詩)에는 이곳에 거대한 관청건물이 있었고, 교토와 멀리 떨어진 '먼 조정'이라는 말을 담고 있으며, '매화와 관련한 깊은 사연이 있으리라는 것'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일행은 전시관에서 전반적인 역사적 사실을 공부하고서 수학여행단 처럼 줄을 지어 덴만궁(天滿宮)으로 이동했다.
황소 조각상에 소원을 빌어
"황소 조각상을 만지면서 소원을 빌면 모두 이뤄집니다. 얼마 전 한국 학생들이 '서울대학교-'를 외치면서 황소를 만지더군요. 아마 그 학생들은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을 것입니다."
야마모토(山本)씨의 설명과 동시에 필자 일행들도 우르르 몰려갔다. 황소의 뿔은 이미 동(銅) 색깔이 아닌 하얀색으로 닳았고, 몸통 곳곳도 하얗게 변색돼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면서 조각상을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황소 조각상이 세워진 것은 '학문의 신(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스가하라 미치자네' 씨가 소띠이기 때문이란다. 다소 미신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으나, 인간의 속성을 감안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에 수긍이 갔다.
황소 조각상을 만지면서 소원을 비는 김영술 교수와 탐방팀 |
"자- 여러분! 이제 덴만궁(天滿宮)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붉은 다리 세 개를 건너게 됩니다. 첫 번째는 과거의 다리이고, 두 번째는 현재의 다리, 세 번째는 미래의 다리입니다. 불교의 윤회설에서 근거한 것입니다만, 저와 여러분은 전생에 아주 가까운 인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일행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과거와 현재, 미래의 다리를 건너서 '스가하라 미치자네'가 묻혀 있는 덴만궁(天滿宮) 앞으로 다가 갔다. 때마침 휴일이어서인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야마모토(山本)씨는 일본 신사의 유래와 종류에 대해서 설명을 한 후에 '도비우매(飛梅)'- 즉, '날아온 매화(梅花)'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매화(梅花)의 향기를 기다리며
"스가하라(菅原) 선생님은 교토(京都)에서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의 모략으로 이곳 후쿠오카의 다자이후로 좌천됐습니다. 그가 교토를 떠나오면서 자신의 정원에 있던 매화나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떠나더라도 봄에 바람이 불면 너희들의 향기(香氣)를 내가 있는 곳에 날려 보내다오.'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도비우매(飛梅) |
다음 해에 스가하라(菅原)씨가 살던 교토의 정원에 있던 매화나무 한그루가 이곳, 바로 이 자리에 날아왔습니다. 그래서 도비우매(飛梅)- 즉, 날아온 매화(梅花)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물론, 전설(傳說)입니다. 호호호."
'믿거나 말거나' 전설이지만, 애틋한 사연은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고도 남았다. 사람이 살면서 본의 아니게 오해와 질시를 받을 수 있으며, 때로는 억울한 누명을 쓸 수 있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매화나무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을까.
일본 사람들로부터 '학문의 신(神)'으로고 추앙받고 있는 '스가하라 미치자네(菅原道眞)'는 당시 천황의 신임을 받아 대신으로 승진했으나, 주변 사람들의 모함에 의하여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다자이후로 좌천됐다. 그는 이곳에서 가난과 병고와 씨름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스가하라(菅原)'의 제자가 마차에 그의 시신을 싣고 가던 중 마차가 움직이지 않자, 그곳에 그를 매장하고 안락사(安樂寺)를 지었다고 한다.
다시 매화의 이야기로 돌아가 본다. 덴망궁(天滿宮) 주변에는 6.000여 그루의 매화나무가 들어서 있다. 6000그루의 매화나무 중 이 도비우매(飛梅)가 가장 먼저 꽃망울을 터트리고, 뒤이어 나머지 매화들이 꽃을 피운다고 했다. 지난 23일 이 도비우매(飛梅)가 첫 꽃망울을 터트린 날은 방송이나 신문들이 앞을 다투어 이를 보도했다.
'스가하라 미치자네(菅原道眞)'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넘었으나 그는 여전히 존경을 받고 있고, 그와 관련한 매화나무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비록 사후(死後)에 만들어진 이야기라 할지라도 가슴 뭉쿨한 아름다운 스토리(story)다.
중요문화재 신사(志賀社) 앞에서 기념 촬영-중앙이 야마모토 씨, 바로 뒤가 황상석 박사 |
미뤘던 숙제를 다시 시작해
일본의 신사(神社)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필자는 야마모토(山本) 할머니께 개인적인 질문을 했다. 일단 나이에 대한 질문을 했다. 그러자 할머니의 대답은 이렇게 돌아왔다.
"제 나이가 얼마로 보이나요?"
"60, 63, 65, 68.... ???"
"호호호. 올해로 희수(喜壽)입니다."
필자뿐만 아니라 일행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나이 지긋한 할머니라는 것은 예견하고 있었지만, 77세나 됐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나이에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고, 그 열정에 대해서도 손을 들었다. 야마모토(山本) 할머니 자신이 털어놓은 말을 듣고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제가 9살 때까지 북한의 청진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1945년 일본 패전 후 이곳 후쿠오카로 돌아왔습니다. 어렸을 적에 익혔던 한국어를 다 잊어버렸습니다. 60세가 넘어서 다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미뤘던 숙제를 하게 된 셈이지요. 그래서 2002년부터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을 안내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요즈음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환갑(60)의 나이에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10여 년 동안 한국사람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할머니의 향기(香氣)가 매화 향기(香氣) 못지않게 필자의 심금을 울렸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