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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두 조국에 살다간 '아사카와 다쿠미'-1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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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파도처럼 밀려가는 듯싶더니 다시 밀려와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산을 내려온 단풍이 서울 거리를 수놓은 주말 오후, 필자는 카메라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일본인으로 태어나 조선인으로 살다간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 씨가 묻힌 망우리(忘憂里) 공원묘지를 찾기 위해서다. 그에 대해서는 오래 전 광화문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와 조선 최초의 서양음악회를 개최한 '야나기 가네코(柳兼子)'에 관한 취재를 하면서부터 인지하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이 바빠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침내 발길을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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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 
달아나는 가을을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마음을 한데 모았을까? 강변북로, 내부 순환도로, 시내도로가 대부분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서울 시내를 반 바퀴나 돌다시피 해서 3시간 만에 망우리 공원묘지 표지판을 만났다. 인천공항에서 도쿄(東京)까지 가고도 남을 만큼의 시간을 길바닥에서 소모했다. 참으로 먼 길(?)이었으나 평소와 달리 짜증이 나질 않았다. 나 자신이 스스로 정한 뚜렷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망우리 공원, 사색의 길

공원입구는 성묘 철이 아닌데도 차량들이 가득했다. '사색의 길'을 찾는 등산객들이 많아서다. 필자는 차를 주차장 귀퉁이에 가까스로 비집어 넣고 두리번거리다가 공원 관리사무소의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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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리공원 입구
"실례합니다. 저-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씨의 묘소를 찾으려고 하는데요."

"여기에서 좌측으로 1.5km 쯤 가시면 동락천(同樂泉) 약수터가 있습니다. 약수터 가기 직전 오른 편 언덕에 있습니다."

관리소 직원은 주저하지 않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망우리 공원묘지에 있는 30,000여 기(基) 중 유일한 일본인 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뜻 있는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다쿠미(巧)' 씨의 기일(忌日)을 전후해 성묘를 하고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원묘지를 오르는 길은 아스팔트로 잘 포장이 돼 있었다. 길 양쪽으로는 크고 작은 봉분(封墳)들이 질서 정연하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자연스럽게 터를 잡아 세월에 물들고 있었다.

비탈길 나뭇가지에는 형형색색의 이파리들이 힘겹게 매달려 있었고, 이미 손을 놓은 이파리들은 방향을 잃고 길가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낙엽들이 '스스르' 소리를 내며 발밑으로 굴러왔다. 낙엽의 우는 소리가 아프게 들렸다. 학창시절 되뇌던 '구르몽(Gourmont)'의 시(詩) 한 구절이 자연스레 떠올려졌다.

"시몬, 너는 아느냐? 낙엽 밟는 소리를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산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발아래 구리시가 한 눈에 들어왔고, 한강물이 멀리서 큰 흐름을 이어가고 있었다.

동락천(同樂泉) 약수터 가기 전 언덕에-

필자는 다쿠미(巧)' 씨의 묘소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지도도 없이 언덕길을 올랐으나 그리 쉽지는 않았다. 나이가 들어 뵈는 등산객들에게 물었지만 고개만 절래절래. 가는 길목에서 지석영(1855-1935) 선생의 묘소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종두법(種痘法)을 보급시킨 근대의학의 개척자인 선생의 묘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도 큰 수확이었다.

필자는 다시 길을 재촉해 동락천(同樂泉) 약수터부터 찾기로 했다. 숨이 더욱 가빠질 즈음 동락천 약수터를 발견했다.

'一杯一杯更少年(한 잔 한 잔, 다시 소년이 된다)'이라는 약수터의 안내문을 읽으면서 웃다가 오른 편 언덕에 있는 도자기 모양의 하얀 석조물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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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지


'바로, 저기로구나.'

필자는 다시 발길을 돌려 '하얀 석조물'의 묘소로 향했다. 10여 개 정도의 돌계단을 오르자 큰 소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있었고, 양지바른 언덕에 그의 묘지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었다. 묘지 상석(床石)에 한글과 한자로 쓰인 <삼가 遺德을 기리며 冥福을 빕니다>는 글귀가 맨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필자 역시 잠시 그의 유덕(遺德)을 기리며 명복(冥福)을 빌었다. 묘지 옆에는 시들지 않은 꽃바구니(국화)가 여러 개 놓여 있었고, 도자기로 된 작은 술잔하나가 외로이 앉아 있었다. 묘지 오른쪽에는 '淺川巧功德之墓(아사카와 다쿠미 공덕의 묘)'라는 비문과 그가 생전에 좋아했던 조선의 도자기 형상을 본뜬 석조물이, 왼쪽에는 검은색 바탕의 돌에 흰 글씨로 다음과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한국의 흙이 된 다쿠미(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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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이 비석은 1966년 한국의 임업시험장 직원들이 정성껏 모은 돈으로 세워졌다. 일본인의 공덕비가 한국 땅에 세워진 것은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업시험장 직원들이 이러한 비석을 세운 이유를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교수는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에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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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카와 다쿠미' 공덕의 묘
<'아사카와 다쿠미' 씨가 임업시험장 재직 중 시험 연구 분야에 여러 중요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언제나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을 이해하려고 했고, 불운한 한국인을 도와주는 등 당시 한국인들에게서 많은 존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고인의 유덕을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웁니다. 한국인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해 준 멋진 일본인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로 그가 한국을 위해, 나라를 잃은 한국인을 위해 어떠한 일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음이다. '아사카와 다쿠미' 씨는 1891년 일본의 야마나시(山梨)현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자연 속에서 들국화와 코스모스를 사랑하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1897년 4월 심상소학교에 입학했고, 1906년 야마나시(山梨) 현립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어릴 때부터 꽃과 나무를 좋아했던 그는, 야마나시(山梨)현이 나무를 무더기로 벌채하는 바람에 하천이 범람해 232명이 목숨을 잃은 참상을 목격하고 치수(治水)의 근원인 조림의 중요성을 가슴 속 깊이 새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9년 3월 현립농업학교를 2등으로 졸업한 그는 아키타(秋田)현 오다테(大館) 영림서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운명의 여신은 그를 조선으로 불렀다. 아버지처럼 여기는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淺川伯敎)'가 조선으로 가게 됐기 때문이다. 1914년 5월 17일 '다쿠미(巧)'는 조선의 경성부 독립문 통 3-6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아사카와 다쿠미 평전>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다쿠미(巧)는 일본의 무단통치가 이루어지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 조선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임업시험소의 직원이 됐다. <조선총독부 임업 시험장 일람>에 의하면 당시 임업 시험장은 1913년 4월에 조선 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아래 촉탁 한 사람과 직원 두 사람을 두고 임업시험소라는 이름으로 막 발족한 참이었다. 다쿠미(巧)는 임업시험소에서 조선에서 자라는 나무 및 수입된 나무종의 묘목을 기르는 등 임업 관련 시험 조사에 종사했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조선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한복을 입었다. 한복을 입은 까닭에 본부 현관에서 순사로부터 검문을 받기도 했다. 그는 두 조국을 사랑했던 것이다(계속).

입력 : 201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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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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