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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조선을 사랑한 사무라이(侍)'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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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 기회가 되면 김충선이 왜 조선에 귀순했는지를 일본 사람들에게 설명해주시면 이해가 빠르리라고 생각합니다. 김충선은 조선이 성리학을 받들고 의리를 지키는 나라(國)라고 생각해서, 유교적 관점에서 문명에서 떨어지는 일본이 문명국인 조선을 침략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이 국가를 배신했다는 그런 차원보다는 당시 시대상과 시대를 이끌던 철학 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필자가 본 란(欄)에 쓴 '사야가 김충선'에 대한 어느 독자(이상흔 씨)의 댓글이다. 필자의 생각과 부합되지 않은 부분이 있으나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옮긴다. 그 후 일이 바빠서 후속 취재를 하지 못하고 어언 2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냈다. 참으로 빠른 세월의 흐름이다.



사야가
(沙也可) 김충선(金忠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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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사야가 김충선>
그러던 중 얼마 전 필자는 한 서점에서 우연히 <조선을 사랑한 사무라이, 사야가 김충선>이라는 소설(유광남 저/ 스타북스)을 발견했다. 3권으로 된 이 소설은 '사야가 김충선'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바탕으로 적절한 픽션을 가미해 김충선을 새로이 탄생시켰다.


"선조 25년(1592년) 사야가 김충선은 22세의 나이에 일본 우선봉장으로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하여 4월 15일 방을 내걸고 싸울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다. 4월 20일 조선의 절도사에게 강화를 청했다. 이후 조선을 위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러서 승리하다."


"선조 26년(1593년) 초유사 김학봉과 교류하며 경주 · 울산으로 진을 옮겨서 왜(倭)와 전투를 치르다. 우병사 김응서 장군과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도원수 권률 장군과 이사 한준겸의 장계로 임금으로부터 성명(김충선)을 하사받고 자헌대부에 오르다."


소설 <사야가 김충선>의 말미에 쓰여 있는 김충선 연보의 일부다. 그는 선조 32년(1600년) 진주 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해 대구의 우륵동에 살았으며, 인조 20년(1642년) 우륵동에서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유교적 관점이든, 전쟁의 부당성에 반기를 들었던 간에 그는 일본인으로써 어려운 결정을 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영웅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역적이기 때문이다.



일본인으로부터 처음 들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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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야가 전문가' 일본의
'스즈키 마사히로' 씨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필자 역시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사야가 김충선' 이야기는 2010년 무더운 여름날 일본의 지인으로부터 처음으로 들었다. 동석했던 나고야 중부전략연구회의 멤버들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면서 귀를 쫑긋했다. '사야가 김충선'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는 '스즈키 마사히로(鈴木正紘, 67)' 씨의 설명을 다시 한 번 옮겨본다.


"사야가(沙也可, 1571-1643)는 분로쿠(文祿) · 게이쵸(慶長)의 역(조선에서는 임진왜란)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부하로서 조선에 건너갔으나, 조선군에 투항해 일본군을 격퇴했다고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조선에서는 김충선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영웅으로 취급 되고 있지만, 그 활약의 실태는 불명한 점도 많습니다."


"사야가의 활약에 대해서는 그의 전기 <모하당문집>에 자세하게 쓰여 져 있습니다. <모하당문집>에 의하면, 1592년 4월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선봉부장으로서 부산에 상륙했지만, 곧바로 조선을 동경해 3000명의 병사와 함께 조선에 항복했습니다. 사야가는 화승총이나 대포의 기술을 조선에게 전함은 물론 일본군과도 싸워 그 공적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조선 왕으로부터 '김충선(金忠善)'의 이름을 하사받았습니다. 그 후로도 여진족을 격퇴하는 등 공적에 의해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습니다."


"현재에도 그는 한반도에서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구시 교외의 달성군 가창면에는 사야가의 후예들이 살고 있습니다. 1992년에 기념비가 건립됐습니다."

그 때 필자는 크게 반성을 했다. 일본인이 자세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이순신과 김충선의 만남은 역사적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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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 있는 김충선의 묘(사진제공 유광남작가)
"대구에 녹동서원과 한·일 우호관이 있습니다. 한 때 일본인들이 5000여 명 씩 이곳을 방문해 김충선 장군을 추모했습니다. 일본인 장수로써 조국을 배반하고 조선에 투항한 장군을 기리는 그들의 모습이 좋아보였습니다. 정작 한국 사람들이 김충선 장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이 소설을 쓰게 됐습니다."


소설 <조선을 사랑한 사무라이, 사야가 김충선>의 작가 유광남(劉光男, 53)씨의 말이다. 작가는 "김충선 장군이 일본인으로써 쉽지 않은 결심을 한 것은 의미 없는 전쟁을 막아보자는 평화주의적 판단을 내렸을 것"이라면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소설이 양국의 선린우호 증진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측면도 이 소설의 집필 의도라고 했다.

그렇다. 김충선의 고향으로 알려진 긴키(近畿)지방의 와카야마현(和歌山県)에도 김충선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의 석재로 일본인에 의해서 세워진 이 비(碑)에는 양국의 우호 증진을 기원하는 내용의 글을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겼다.

소설은 상상적인 측면이 많다. 하지만 작가의 말대로 상상의 나래도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필자가 관심이 가는 소설 속의 한 대목은 이순신과의 만남이었다.


"이런 장수가 조선의 수중에 들어오다니, 이것은 우리 조선의 복(福)이 아닐 수 없다."


이순신은 기뻤다. 일본의 군사 사정을 정확히 모르고 있으며, 또한 육전의 패배가 가장 염려스러운 때 '사야가 김충선'이란 인물의 등장은 조선의 외로운 영웅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반가운 존재였다. '사야가 김충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신뢰가 또한 기쁨이었다.


필자는 소설 속에서 묘사된 이순신 장군과의 만남에 대한 내용이 궁금해서 작가에게 물었다.


"이순신 장군과의 만남은 사실입니까? 아니면 픽션입니까?"


"사실입니다. 현존하는 사료(史料)를 토대로 했습니다. 김충선의 화승총 기술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두 영웅의 만남은 전쟁을 마감하는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조선인 어머니의 설정은 픽션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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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유광남 씨의 모습
영웅만이 영웅을 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소설의 주인공 사야가(沙也可)가 일본인 아버지와 조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설정에 대해서 작가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물론 일본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짚어보면 사야가는 전란의 시대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사무라이들의 싸움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으나 그는 어려서부터 꽤나 높은 지식을 쌓았습니다. 정식으로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그 정도의 학식을 갖출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리학을 받들고 의리를 지킨 유교적 관점에서 조선을 침략하는 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 자체도 남달랐습니다. 그 부분에서 어머니가 학식이 높은 조선인이었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생각-그가 '조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이유 중의 하나를 조선인 어머니로 설정했습니다."


그럴 듯한 설정이다. 그 당시 조선과 일본의 왕래는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유광남 작가는 <조선을 사랑한 사무라이, 사야가 김충선>은 3권에 그치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주인공 '사야가'와 '마오'의 뜨거운 사랑처럼 길게.....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세월이 변해도 역사는 지울 수가 없다.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는 후세 사람들의 몫이다. 역사의 근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국과 가까운 쓰시마(對馬島)에 한국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이 한창이라는 보도가 충격적이다. 일례로 쓰시마에 수령 1500년의 은행나무 앞에 그동안 '백제나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는데, 새로운 안내판에는 '백제'라는 단어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한국 관광객이 몰려오는 것을 반대하는 일본인들의 시위도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중앙일보, 10/4).

미래를 위한 발걸음도 급한데, 과거의 틀에서 헤어나지 못한 행동들이 안타깝다. 실익(實益) 없는 싸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왜 과거에 벌어진 일을 왜곡된 기억으로 감싼채 그것이 당신의 현재를 파괴하고 미래마저 물거품으로 만들도록 내버려 두는가?"


미국의 심리학자 '딕 티비츠(Dick Tibbits)'의 <용서의 기술>에 들어있는 한마디를 떠올려본다.

입력 : 201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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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상인 장상인의 세계, 세계인

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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