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고야 이누야마 성 근처에 있는 국보 다실 우라쿠엔
다도(茶道)는 차 의식을 말한다. 일본사람들은 다도(茶道)를 대단히 중시한다.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일본의 다도는 주로 분말차(抹茶)를 가루 형태로 다기(茶器)에 넣어 뜨거운 물을 붓고, 대나무로 된 막대로 저어서 거품을 낸 차를 마시는 형태를 말한다. 오늘날도 일본에서는 다도를 통해서 차의 작법은 물론, 예의나 전통적 문화를 가르친다. 다도를 신부 수업을 위한 필수적 과정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어린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즐겨 배우고 있는 관습의 하나다. 다도를 배우는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이렇게 얘기한다.
"몸도 마음도 맑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배움을 통해서 다도의 깊숙함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배우면 배울수록 너무나 어렵습니다."
일본인들은 바쁜 일상생활에서도 잠시 여유를 찾아 다도를 통해 '예의나 문화' 등을 즐긴다. 이러한 다도 문화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일본의 역사 속에서 다도와 함께 살다간 한 기인(奇人)의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기인(奇人)은 바로 '센노리큐(千利休, 1522년-1591년)'라는 사람이다.
센노리큐(千利休)로부터 정립된 차 문화
'센노리큐(千利休)'는 일본의 다도(茶道)를 정립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특히 와비차(わび茶/수심, 한가로운 정취의 뜻)의 원조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를 다조(茶祖: 차의 원조)라 부른다. 조화와 존경, 맑음과 부동심을 의미하는 화경청적(和敬淸寂)의 정신을 강조하여 차 마시는 것을 단순히 마시는 행위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로서의 다도(茶道)를 만들었던 것이다. 리큐(利休)는 1522년 오늘의 오사카 지방인 사카이(堺)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적 이름은 '다나카 요시로(田中與四郞)'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센아미(千阿彌)이고, 아시카와 가문의 도보슈(同朋衆: 장군의 잡무나 예능담당자)로 사카이에서 살았다. 리큐의 성이 센(千) 씨가 된 것은 할아버지의 이름 중 한 글자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로부터 하사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차를 배웠으며, 17세 때부터 기타무키 도친(北向道陳, 1504-1561)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식으로 차를 배웠다. 그 후 리큐(利休)는 도친(道陳)의 소개로 조오의 문하생이 되었다.
58세 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다도 스승이 되었으며,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다도 선생이 되었다. 그는 특히 '히데요시(秀吉)'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를 위해 크고 작은 다도회를 열었다(일본다도의 이론과 실기).
센노리큐의 다실에는 작은 족자 하나와 꽃 한 송이 꽂힌 화병 이외엔 아무 장식이 없는 작고 수수한 다다미 2장의 다실과 ,소박하지만 기품 있는 다기들로 행하는 문화적 행위였다. 리큐는 이러한 미의식 추구를 바탕으로 차 달이기의 의례적인 측면, 다도회의 진행순서, 회석요리 등을 양식화하여 다도를 확립했다.
중국, 일본, 한국의 차 문화도 각각 차이가 있다. 정영선 한국 차 문화 연구소장의 <다도철학>이라는 책을 통해서 3국의 차문화를 비교해 본다.
"각국의 차 문화를 살펴 볼 때 중국은 음예다도(飮藝茶道), 일본은 무예다도(武藝茶道), 우리나라는 문예다도(文藝茶道)로 특정지어진다. 즉, 중국이 차의 종류와 마실 거리에 관심을 두고 일본은 차의 기예에 치중하는 반면, 한국은 차의 철학성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일본의 차 달이기가 '의식을 중시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도와 조선 도자기
당시 일본은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중국산 도자기는 지나치게 화려하여 소박한 미를 추구하는 일본 다도에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에서 만든 도자기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을 때, 조선 도공들을 납치하고 조선 백자를 수집하는 데에 열중했다는 것도 일리가 있다.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도자기에 흠뻑 빠졌던 도자기 광(狂)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도자기를 빼앗아 가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도공(陶工)들을 붙잡아 오도록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규슈(九州)와 시코쿠(四國) 출신의 다이묘(大名)들은 앞을 다투어 도공들을 일본으로 연행하여 갔다. 그후 사쓰마 야키(薩摩燒), 아리타야키(有田燒), 하기야키(萩燒), 다카도리야키(高取燒) 등의 새로운 터전이 되어 오늘날 일본의 도자기 문화를 이끌고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침략 전쟁에는 실패하였지만, 조선의 도공을 수 만 명이나 일본에 납치하여 '세계적인 일본의 요업(窯業)’이라는 도자기 산업을 도입하고, 부흥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아무튼, 도자기와 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다도는 도자기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센노리큐의 죽음
센노리큐(千利休)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자결을 명받아 1591년 2월 28일 자택에서 할복했다. 그가 죽은 이후에도 일본다도는 그의 자손들과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어 귀족층과 일본 중산계급에도 널리 보급된다. 그가 왜 죽임을 당했을까? 얼마 전 출간된 ‘야마모토 겐이치(山本兼一)’의 소설 '리큐에게 물어라(번역본/문학동네)'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이 소설로 일본에서 권위있는 나오키(直木)상을 받았다. 소설을 통해서 그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본다.
"내가 그런 천박한 사내와 관계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천박한 사내는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말한다. 센노리큐는 '히데요시'를 그만큼 인정하지 않았다. 소설에는 센노리큐의 품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내 일생은 그저 한 잔의 차를 정적 속에서 즐기는 일에만 부심해 왔다. 이 천지에 살아있는 지복을 차 한 잔으로 맛 볼 수 있도록 고안을 거듭해 왔다. 미의 심연을 보여주어 그 거만한 사내(豊臣秀吉)의 콧대를 꺾어주고 싶다.>
센노리큐(千利休)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잘못했다고 한 번만 빌면 살려주겠다'는 '히데요시(秀吉)'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던 것이다.
“70년 나의 다도는 천하를 틀어쥔 권력자라 할지라도 범접하지 못할 것이다.”
센노리큐(千利休)의 심미안은 어렸을 적 조선에서 잡혀온 한 양반집 딸과의 애절한 사연과도 관련지어 진다. 물론, 소설 속의 이야기다. 작가의 상상력인 것 같았으나 가슴이 아렸다.
'槿花一日自爲榮'
센노리큐(千利休)가 어린 시절 잡혀온 조선 여인과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위협으로 인하여 둘이 같이 죽기로 다짐했다. 다완에 쥐약을 부어 차와 섞어서 마시기로 했던 것이다.
<여인이 먼저 쓰러지자 그는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다완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여인의 시체에 엎드려서 울었다. 눈물과 오열과 공포와 노여움과 한심함과 증오와 절망이 섞이어, 그를 뒤흔들었다.>
<'槿花一日自爲榮' 무궁화는 하루뿐이나 스스로 영화를 이룬다. 센노리큐(千利休)가 평생을 간직하고 살아 온 조선 여인의 휘호다.>
센노리큐의 아름다움의 추구-그 아득한 이상에 도달하고자 한 사내의 열정과 혼. 그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이렇게 끝이 났다.
필자는 소설속 조선 여인의 등장에 대해 사실(史實) 여부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직접 알아보기로 마음먹고 일본의 친구(伊藤俊一)에게 부탁하여 작가 선생의 연락처를 알아내었다. 먼저 출판사 PHP 연구소 역사가도 (歷史街道) 편집부 '고토 게이코(後藤惠子)' 씨와 통화했다. 작가 '야마모토 겐이치(山本兼一)' 씨가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내기가 무척 어렵다고 했다. 장시간의 인터뷰로 잘 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간단한 전화 인터뷰라고 했다. 하지만, 전화통화도 시간을 맞추지 못해서 결국 e-메일로 대화하기로 합의(?)를 도출했다.
"소설에 무궁화와 조선의 젊은 여인이 등장하던데, 사실적인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픽션입니까?"
"아! 그것은 픽션입니다. 리큐의 차실에는 고려의 일상적인 밥공기를 이토(井戶)다완으로 칭해서 진중(珍重)하게 생각하는 등 '그가 조선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흔적을 여기저기서 찾아 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최근 들어 리큐의 차실이 '한국의 양반 주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는 설도 주창되고 있습니다. 리큐는 도대체 어떻게 조선의 문화를 알았을까?......본인이 조선에 간적은 없지만 수입된 도구를 사용했다는 것보다는, 보다 더 농후한 동경(憧憬) 이 있었을 듯합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 조선의 여성과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드라마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야마모토 겐이치(山本兼一)' 씨는 "이 작품을 위해서 한국을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수 년 전 민속촌에서 조선의 오래된 주택을 보았다"고 했다. 작가 자신이 민속촌에서 한국의 고가(古家)를 마음속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필자는 다음에 도쿄에서 작가와 직접 인터뷰를 하기로 약속했다.
우리의 선비문화도 다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맑은 정신이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다. 정신을 맑게 하여 집중력을 키워주고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다도(茶道)가 우리 생활에 너무나 필요할 것 같다. 선인(先人)들의 훌륭한 지혜를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천하를 움직이는 것은 무력과 금전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에도 힘이 있다"는 센노리큐의 말이 7월의 불볕더위보다 더욱 뜨겁게 달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