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신문을 읽고 있는 오츠보 씨
본란에 게재된 필자의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의 칼럼은 일본 사람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중에서 필자의 오랜 지인(知人)인 오츠보 시게타카(大坪重隆·69/ 전 방송인)씨의 편지가 한국인의 아픈 마음과 굴절된 역사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의 양해를 구해 전문을 그대로 번역하여 소개한다. 제목은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감상>이었다. 필자는 혹시라도 그에게 피해가 갈까봐 전화를 걸었다.
"오츠보(大坪) 씨의 편지를 실명으로 공개하려 합니다. 오츠보 씨의 집에 누군가가 돌멩이를 던지면 어떻게 하지요?"
"아- 그런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저의 주변 사람들도 대체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번역에 있어서 다소 어색한 부분이 있는 것은 당사자의 뜻을 존중하여 직역을 했기 때문임을 밝혀둔다.
위화감을 느낀 건물, 침략은 범죄다
"1980년 처음으로 서울에 갔다. 회사 차원의 여행이었다. 관광 가이드의 안내를 받으며 조선 왕조의 상징적 건물인 경복궁의 견학을 위해서 세종로를 걸었다. 길에서 바라본 정면의 건물은 구(舊) 조선총독부이며, 거기를 돌아 처음으로 경복궁의 건물 군(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커다란 위화감과 조화가 잡히지 않는 배치에 의념(疑念)을 가지고 보았던 일이 생각난다. 1916년에 이 건물이 생겨났다고 알고 있었지만, 한반도 당시의 사정은 그 이전에 일어난 동학란 이후 청나라가 조선에 간섭하기에 이르렀다. 더불어 러시아의 극동 진출로 일본도 외교와 방위상의 문제로 군사 행동을 일으키는 상황이 생겨나고 있었다고 역사서에 쓰여 있다.
청·일 전쟁을 거쳐 한반도에서 청나라를 배척하고 패권을 잡은 일본은 드디어 대국 러시아와 맞서서 일·러 전쟁으로 돌입한 결과, 한반도도 일본에 의한 통치가 가능해졌다.
일본 근대 역사서의 상당수는 '한반도가 외국의 식민지가 되면 일본은 방위상 커다란 위협이 파생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근대국가 건설도상국인 일본도 많은 사람들이 외교 교섭 뿐만 아니라 군사적 행동도 옳다'고 했던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한반도의 독립을 존중하고 자주적 국가 건설을 청나라가 인정하게 한 일본의 외교 노력이 있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의 방위가 최우선이었으며, 민족 독립을 전면적으로 지지해 끝까지 지원할 수 없었다'는 것은 역사가 알고 있다. 오늘날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일본의 한반도 통치는 침략(侵略)이며, 성숙한 인류의 현재적 사고(思考)로서는 '침략은 범죄이다'라는 인식이 보편적인 상식이다."
일본 근대화가 침략의 근원
"19세기는 전쟁의 시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동양에 있어서도 영국을 비롯하여 서양 열강의 진출로 근대화가 뒤떨어진 나라가 식민지화 되어 그 영향 아래 들어간 불행한 시대가 있었다. 생각 하건데 영토 확장과 자원의 확보가 정당화 되어 국력 증강이 경쟁적이었던 시대의 흐름에 휘말렸던 것이다. 에도(江戶) 막부 말기, 미국의 페리 함대가 내항해 일·미 불평등 조약(정식으로는 일·미 통상조약)을 체결해 개국한 이래로 발 빠르게 근대화에 임한 일본이 서양 열강으로 부터 정치·군사·문화를 받아 들였지만, 그로 인하여 국경을 접한 나라들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취해진 수단도 동일한 것을 답습하게 되었다. 단, 한 가지만은 다른 대응이 있었다. 서양 제국의 진출에서는 그리스도교의 포교가 반드시 있었지만, 일본의 경우 황실 숭배의 영향을 진행시켰을 뿐 유교의 교리가 일부 스며들어있는 불교의 나라에 그리스도교가 유입되어 종교로 감화 시키는 일은 결코 없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 그는 누구인가?
"조선 총독부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는 조슈(長州) 출신(山口)의 무사로 보신(戊辰)전쟁, 세이난(西南) 전쟁(가고시마의 西鄕軍과의 싸움), 청·일 전쟁, 러·일 전쟁 등 4개의 전쟁에 관련된 군인이다. 그가 후일 총리대신까지 오르지만 뛰어난 군략가는 아니고, 조슈벌(長州閥, 메이지 유신 시대를 주름잡던 지배층) 중에서 선발된 자로서 황실 숭배인 황도파(皇道派)에서 무단정치(武斷政治, 군대나 경찰 등 무력으로 행하는 정치)를 추진한 토박이 무인(武人)이다. 당시의 군인이 국제인인 감각이나 민주 평등의 사고(思考)를 가지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에도(江戶) 막부 말기에 태어나 근대국가의 여명기(黎明期)를 군인으로서 살아온 그가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는 당시에 있어서는 기존의 조선 왕조 건조물의 문화적 가치나 역사적인 가치감 등 이 없었고, 국가의 안온(安穩)과 방위(防衛)를 먼저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데라우치(寺內)의 한반도 통치에 있어서는 토지조사사업 ·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박탈 · 헌병, 경찰 제도를 제정해 교육도 일본식 발상으로 시행되었다고 자료에는 있지만, 한민족의 인재육성이나 등용은 등한시하고 곡물 증산과 만주 개발을 위한 철도 정비나 항만 정비가 우선시 되었다. 통치의 중심으로서는 민족의 상징적 지역에 총독부를 짓는 것이 열강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그 존재를 나타내는 최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 것이다.
일본 NHK 방송에서 <언덕위의 구름>이라는 드라마가 최근에 방영되었다. 청·일 전쟁으로부터 러·일 전쟁 무렵까지 일본이 열강에 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유명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 1923-1996)'의 소설이 원작이다. 적극적으로 노력한 것을 미화하고, 학대받은 사람들이 표면에는 나오지 않는 고로(苦勞)는 있으나 일본이 최후에 승리하는 것으로 종료한다. 잊고 있던 선인(先人)의 성공사례를 보는 것보다 과거에 위대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생각나게 해 주는 감동의 작품으로써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일부 사람들은 '지금 왜?' 라고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아시아 진출에 관하여 일어난 일'을 알리는 작품으로서는 이해하기 쉽게 되어 있다.
'역사는 단순한 일로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일이 얽혀 후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고 비판할 것인가?' 는 변화한다고 생각하지만, 이웃의 한국이나 중국과 선린우호의 정신을 가짐으로써 직접적인 이해는 외교로 해결하는 노력을 함과 동시에 민간 교류를 진행시켜 나아간다면 민족의 존엄(尊嚴)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이 평화로운 상황을 유지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제국주의의 잔해로서 반성의 뜻을 담아야'
"한반도와 야마토(大和, 일본국)의 관계는 2000년 이상의 교류의 역사가 있어 많은 교제와 유산이 남아 있다. 조선 총독부의 건물은 건축학 상으로는 귀중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소생(小生)에게 있어서는 최초의 인상이 '위화감이 있는 무례(無禮)가 극(極)에 달한 건축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 역사를 아는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마땅히 건물이 철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야 많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광화문을 방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짧은 기간의 건조물이었지만 일본인으로서 제국주의의 잔해로서 반성의 뜻을 기억에 남겨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 국내에서 커다란 논의 끝에 철거의 결론을 도출한 관계자 분들께 경의(敬意)를 표(表)할 따름이다."
필자는 한일 병탄(倂呑) 100주년을 맞이하여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과정을 중심으로 일본의 식민정책에 대한 실상을 조명한 <일본, 조선총독부를 세우다>라는 책(허영섭)의 출간에 즈음하여 어렵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어 보았다. 분명한 것은 '지나간 100년 보다는 다가오는 100년에 대한 기대'가 희망적이었으면 한다.
21세기의 '노스트라다무스'로 불릴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는 미국의 싱크탱크 스트랫포(STRATFOR)의 설립자이자 CEO인 조지 프리드먼(George Friedman)은 <100년 후>라는 책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다가오는 100년을 주도 한다"고 예언했다. 우리의 100년 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특히 한일 관계는..........(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