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의 명함을 들고 있는 기타오 씨
"장 선생님! 저는 '기타오 요시후미(北尾吉史)' 라고 합니다. 저를 기억하시는 지요?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찾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회사도 옮기셨고 집도 이사를 하셨더군요."
일본에서 필자의 휴대폰으로 걸려온 전화는 바로 이러한 내용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꽤나 오래된 듯싶었다. 업무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없었지만, 그래도 얼굴 윤곽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당시 필자가 근무하던 회사의 여직원을 소개해 주었던 기억이 났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쯤의 일이다. 그 때는 지금보다 국제결혼 문제. 더욱이 일본사람과의 결혼이 어려운 시절이라서 당초부터 기대가 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기타오(北尾) 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중매(?)를 섰던 것이다. 그는 그때 하자마구미(間組)라는 일본 굴지의 건설회사 오사카(大坂) 지점에 근무했던 사원이었다. 하자마구미(間組)는 일본 강점기 시절 압록강의 수풍 땜을 건설했던 회사이고, 후쿠오카에서는 필자가 근무하던 대우건설과 후쿠오카 한국영사관공사를 공동(JV)으로 건설했던 회사이다. 기타오(北尾) 씨와의 인연은 하자마구미(間組) 규슈지점에 근무하던 하시모토(橋本: 현 영업부장) 계장의 소개로 만났었다. 한 두 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한국 여성과 결혼을 하고 싶다는 강력한 의지로 한국어를 공부했다'는 기억이 떠올라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제가 후쿠오카(福岡)를 자주 갑니다. 참, 이번 주말에 가게 될 것 같습니다. 그날 만날 수 있을까요?"
20년 만에 만난 나의 명함
필자는 지난 주 말 아침 비행기로 후쿠오카(福岡)에 갔다. 마침 미팅이 오후 2시로 잡혀 있어서 점심시간에 맞추어 기타오(北尾) 씨를 만나기로 약속했다. 특별한 용건은 없었지만, 그가 필자를 애써서 찾은 그 자체가 반가워서였다. 하카다(博多) 역 뒤편에 있는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는 신칸센으로 20분이면 올 수 있는 기타규슈(北九州)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취재 차 기타규슈(北九州)를 간적이 있었는데 '미리 알았으면 그에게 번거로움을 덜어 줄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옛 연인(戀人)을 기다리는 것과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때 마침 강풍을 동반한 비가 늦가을의 정취를 앗아가려는 듯 창밖 가로수의 노란 이파리들을 송두리째 떨어뜨렸다.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보낸 가을을 후쿠오카에서 또 한 번 보낸 셈이다.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면서 세월의 빠름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약속 시간이 되자 소박한 차림으로 하얀 비닐우산을 든 사나이가 나타났다. "아- 세월의 눈물이었던가." 한 눈으로 보아도 옛날 그 모습이었으나 혈기 왕성하던 청년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덧 중년이 되어 있었다.
"아! 기타오(北尾) 상-" "아! 장(張) 상-"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군요." "제 나이가 어느덧 50고개를 넘었습니다."
서로의 모습에서 흘러간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아련한 추억들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우리가 언제 만났지요? 꽤나 오래 전의 일인 것 같은데요."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없었다. 그가 테이블 위에 내놓은 필자의 명함(名刺)에 답이 있었기 때문이다.
<1990년 11월 26일. (주)대우 기획실 차장 장상인/ 서울 남대문로 5가 541번지(대우센터)
1995년 홍보실장, 전화번호 752-5216>
가로 9cm, 세로 5cm의 작은 명함 앞면에는 필자와의 만난 일자와 바뀐 전화번호, 뒷면에는 집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세세하게 적혀 있었다. 1990년 11월 26일. 당시 필자가 차장이었으며, 1995년에는 홍보실장 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은 지 오래인데, 그는 날자 별로 기록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그와는 약 20년 전인 1990년 11월 26일에 만났고, 5년 후인 1995년에 한차례 더 만난 셈이다. 그리고서 그 인연이 철새처럼 어디론가 날아갔다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과 명함을 교환한다. 그런데, 이사를 가거나 책상 정리를 하면서 버리는 명함이 많다. 휴먼네트워크 양광모 소장은<100장의 명함이 100명의 인맥을 만든다>는 책에서 "명함을 소중하게 보관하라. 명함을 자신의 얼굴처럼 생각하고 깨끗하게 간수하라"고 했다. 그리고, "내 명함도 마찬가지겠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명함은 더욱 그러하다. 인맥이 재산이라면 명함이 곧 재산이다. 재산을 관리하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에게서 받은 명함을 잘 관리하라"고 했다. 백 번 옳은 말이다. 기타오(北尾) 씨가 20년 가까이 필자의 명함을 간직하고 있었던 정성은 '인맥이 재산'이라는 말과 관계없이 필자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인연(因緣)에 대하여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필자에게 특별한 일을 주문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만나고 싶었다는 것이다. 업무를 마치고 저녁 시간에 이자카야(居酒屋)같은 데서 담소를 나누기로 하고 일단 헤어졌다. 업무를 마치자 어느새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와의 만남을 위해 나카스(中洲)의 작은 골목길 인형소로(人形小路)의 가츠도미(一富)라는 곳으로 갔다. 필자는 그곳으로 오츠보 시게다카(大坪重隆 ․ 69)씨를 초청했다. 우리는 맥주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그런데 맥주잔 받침에 5엔짜리 동전이 들어있었다. 인생을 달관한 오츠보(大坪) 씨가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다.
"5엔(円)을 일본어로 '고엔'이라고 발음하는데, 이 '고엔'이란 인연의 연(緣)에 어(御)를 붙여서 쓰는 단어가 '御緣(고엔)' 즉, '5엔'과 발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만나서 좋은 인연(緣)을 만들라는 뜻에서입니다."
실제로 일본인들은 절이나 신사에 가서 5엔짜리 동전을 던지고 절을 하며, 지갑을 새로 사서 선물할 때 5엔짜리 동전을 넣어서 주는 풍습이 있다. 다분히 미신적인 요소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애잔함이 들어있는 것이다.
필자는 5엔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었다. 5엔의 소중함이 1만 엔의 가치보다 빛나보였다.
아직도 독신생활
일본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사(私)생활에 대해서 묻는 것을 가급적 절제한다. 그러나 필자는 입이 간지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기타오(北尾) 씨! 결혼은 하셨나요?"
"아닙니다. 아직도 독신입니다."
"지금도 한국 여성과 결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시나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그러한 기회가 된다면 너무나 행복하겠습니다."
그는 아직 독신으로 85세가 된 노모를 모시고 산다고 했다. 12살 때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효자였다. 이미 귀가 어두워지고 허리가 굽으신 어머니- 어머니는 기타오(北尾)의 모든 것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삶의 바다를 노(櫓) 저으며 살아온 기타오(北尾) 씨- 그는 일찍이 하자마구미(間組)를 퇴사하고 부동산 중개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세계적인 부동산 회사(CBRE)에서 일하고 있다. 그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힘찬 박수를 보낸다.
필자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서울 하늘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첫눈(初雪)이 내린 것이다. 문정희(1947- ) 시인의 '첫눈'을 떠올려 보았다.
"기도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내 잃어버린 시간에
쓰러지는 눈빛으로
당신의 내의를 마련합니다.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머뭇거리며
저만치서
눈 감은 사랑
밤새도록 용납한
꿈이었다가
산이 되어
내 이름을 부르시는
아아 한 생애에 돌아오는
목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