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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Room Exclusive
  1. 칼럼

북방 관소와 풍류(風流)

장상인  JSI 파트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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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1842-1898)'의 <바다의 소슬바람>이라는 시(詩)에 미지의 여행을 동경하는 뜻이 짙게 담겨있다.


"나는 떠나리라/ 기선은 바람에 흔들리며/ 먼 이국(異國)을 향해 닻을 올린다."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시인에 앞서서 여행을 통해 풍류를 즐긴 일본 시인이 있다.

"구름이 조각조각 바람에 불리어 흘러가는 것만 보아도, 먼 길 떠나고 싶은 마음 불현듯 치밀어 정처 없이 떠돌다가, 강가의 초라한 집으로 돌아와 거미줄을 치웠다."
그는 17세기에 일본을 주름잡던 음유시인 바쇼(芭蕉, 1644-1694)라는 사람이다. 그의 '동북일본 기행(이만희 역, 학문사)'에 이러한 글이 있다.


<그럭저럭 시라카와(白河) 관소를 넘고 이제 아부쿠마(阿武常)강을 건넌다. 왼편에는 반다이산(磐梯山, 1,819m)이 높이 솟아있고, 오른편으로 이와키(岩城)·소마(相馬)·미하루(三春) 지방이 건너다보이고, 뒤편으로는 산이 연이어 있어 히타치(常陸)·시모츠케(下野)를 경계 짓는다.>


필자가 그의 글을 인용한 것은 최근에 반다이산(磐梯山), 시라카와(白河), 이와키(岩城) 등을 돌아보고 왔기 때문이다. 여행은 배움이라 했던가. 필자는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와 흘러간 역사를 접했다.

시라카와(白河) 관소


일본에는 예로부터 북방을 방어하는 '동북일본의 3대 고관(古關)'이라 불리우는 굴지의 관소가 있었다. 내륙지방의 시라카와(白河) 관소와 태평양 쪽 해안에 있는 나코소(勿來) 관소, 동해안 쪽에 있는 네즈(鼠) 관소를 말한다. 관소는 요즈음의 검문소에 해당된다. 바쇼(芭蕉)는 '동북일본 기행'에서 관소에 대해 이렇게 썼다.


"대망의 시라카와(白河) 관소에 도착한다. 이 관소는 에조(蝦夷)족을 방비하기 위해서 세운 관문이다. 관소라는 것은 요로(要路) 또는, 번(藩)의 경계에 통행인이나 통과물자를 검문검색 함으로써 탈출이나 침입에 대비하고자 설치하는 구조물이다."


여기에 나오는 에조(蝦夷)족은 일본의 동북 및 홋카이도 지역 주민으로써, 고대 야마토(大和)로 부터 이민족(異民族)으로 취급되었던 집단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근세의 에조(蝦夷)는 아이누(Ainu)족을 일컫는다. 아이누족을 만족(蠻族)이라고 했으니 그들의 아픔도 컸을 것이다.


걸식여행을 하면서 고난(苦難)을 스스로 체험한 시인 바쇼(芭蕉)는 "관소는 검문소의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수많은 풍류객들이 시가(詩歌)를 남긴 명소로 손꼽힌다"고 했다.


"많은 관소 중에서도 이 시라카와(白河)는 삼관(三關)의 하나로 꼽히며, 자고로 수많은 풍류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옛 노래 속의 시라카와에 부는 추풍(秋風)이 귀에 맴돌고 단풍이 눈에 아른거리니 지금 보는 시라카와의 나뭇잎이 더 한층 정취(情趣)롭다."


"사모관대 대신 고광나무 꽃을 머리에 꽂고
 시라카와(白河) 관소를 넘는다."

나코소(勿來) 관소


바쇼(芭蕉)가 풍류를 즐기며 거닐었던 이 지역을 필자는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차를 타고 질주했다. 도로변 산자락들은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굽이굽이 물줄기도 기력을 잃은 듯 흐름이 더디었다. 필자는 바쇼(芭蕉)가 배를 타고 건넜던 강을 자동차를 타고 건넜고, 그가 숨을 몰아쉬며 넘었던 고갯길을 터널로 가름했다. 문명의 이기(利器)로 편리성은 있었으나 자연적인 운치는 덜했다.


제법 긴 터널을 통과하자 "국경(國境)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雪)의 고장이었다"가 아니라, '이와키'의 가을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터널을 통과하기 전과 빠져나온 후의 분위기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이와키 시내에 들어서자 필자는 나코소(勿來)라는 지역에서 새로운 고통을 당했다. '勿來'를 '나코소'로 발음한다는 것이 암호 해독보다도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또 다른 바벨탑을 세웠나? 왜 이렇게 지명 읽기가 어려운거야?'

나코소(勿來) 역에서 차로 20 여 분 쯤 달리자 나코소(勿來) 관소가 있었다. 실제로 이곳은 '오는 것을 금지한다'는 의미로서 북방 인들의 남쪽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 설치되었던 관소라고 했다. 천 삼백 여년 전의 관소이라서인지 비석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 볼거리는 하나도 없었다. 입구에는 말을 탄 장군의 동상과 시비(詩碑)가 있었다.

'오지 말라'는 곳-


"나코소(勿來) 관(關)에 부는 바람
 만발한 산(山)사쿠라 길 위에 지는구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 후기의 무장 '미나모토 요시이에(源 義家, 1039-1106)'가 쓴 와카(和歌)다. 필자가 이 부문의 전문가가 아니라서 번역이 어설프지만 대체로 그러한 내용이다. 그는 미나모토 요리노부(源 頼信, 968-1048)의 손자로서 '하치만 타로우(八幡太郞)'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이 지역의 반란군을 진압한 장군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1185-1333)의 기초를 다진 장본인이라 했다. 이 시기는 대체로 일본의 고대말기에 해당하는 때이다. 그는 세상을 떠난 후에 후세 사람들에 의해서 영웅으로 추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인물이다.
필자는 오솔길을 따라 나코소 관소의 역사 속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름들이 나무마다 세월이 깃들어 있었고, 문인들의 시비(詩碑)마다 파란 이끼가 끼어 있었다. 고갯길을 오르자 단아한 정자가 하나 서 있었다. 멀리 남태평양의 파도가 먹구름과 함께 세차게 몰려오고 있었다. 고개 아래에는 '이와키시 나코소관(勿來關)문학역사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화역사관에도 "나코소는 '오지 말아주세요'라는 의미의 고대일본어다"고 '勿來'의 뜻을 풀이하고 있었으며, 도시 이름이 '이와키'로 명명되기 전에는 '나코소(勿來)'이었다는 사실도 표기되어 되었다.


독일의 '요한 고트프리드 폰 헤르더(Johan Gottfried von Herder, 1744-1803)’는 <인류 역사철학에 대한 이념>이라는 책에서, "세월을 겪으면서 현명해진 노인은 무덤에 묻히고, 노인이 겪었던 길을 그 후손이 어린아이로서 똑같이 시작한다.......오래된 장소의 오래된 것들은 어쩔 수 없이 사라진다"고 했다.


하지만, 사라진 역사를 통해서 미래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다고 본다. 사라진 곳에서 보다 새로운 것이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흘러간 역사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생각이다. '오지말라'는 나코소(勿來) 관소도 존재 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입력 : 200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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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팬택전무(기획홍보실장) 동국대 행정학과/연세대 언론홍보대학원(석사)/인하대 언론정보학과대학원 박사(수료). 육군 중위(ROTC 11기)/한국전력/대우건설 문화홍보실장(상무)/팬택 기획홍보실장(전무)/경희대 겸임교수 역임. 현재 JSI파트너스 대표/ 부동산신문 발행인(www.renews.co.kr) 저서:홍보, 머리로 뛰어라/현해탄 波高 저편에/홍보는 위기관리다/커피, 검은 악마의 유혹/우리가 만날 때마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오타줄리아(공저) 기타:월간조선 내가 본 일본 일본인 칼럼 215회연재/수필가, 소설가(문학저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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