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즈시마(神津島)’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로써 정치범들이 유배된 곳이다. 불문곡직 일단 그 섬에 들어간 사람은 거기서 죽어야 했고, 죽으면 유배인 묘지에 묻혔다. 어느 선교사는 이 섬을 “궁핍하고 불쌍한 어부의 초가 오두막이 아홉 채나 열채 밖에 없고,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지극히 결핍했다”고 토로했다.오늘날도 도쿄에서 출발하는 객선으로 가면 1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오다 쥬리아’가 유배되었던 그 시절에는 얼마나 멀고 먼 뱃길이었을까? 망망대해, 절해고도.......어떠한 말을 다 갖다 대어도 모자랄 듯싶다.
오다 줄리아는 첫 번째 유배지 오오시마(大島)에 흘러가 30일 정도 체류했다. 그리고 더 멀리 떨어진 니이지마(新島)에 15일 동안 격리되었다. 종착지 고즈시마(神津島)에 유배된 그녀는 그 곳에서 섬사람들을 깨우치고 봉사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존경받는 묘지
일본 나고야 지역 기후 현의 한 신도(信徒)가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고즈시마(神津島) 사람들로 부터 존경받고 있는 묘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섬사람들은 십자가에 향(香)을 올리고, 그 무덤에 정성껏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무덤의 유래를 알지 못하고 몇 백 년 동안 그저 참배만 했습니다. 후(後)에 연구를 통해 ‘오다 줄리아’라고 하는 여성이 떠올랐습니다.....
<줄리아님은 공상의 인물이 아니고, 역사상의 인물로서 문헌에 그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의 카토릭 신부가 로마에 보낸 편지에도 나옵니다. ‘그녀는 조선 태생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부인의 시중을 들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조선에 출병을 했으므로 그 때 그녀를 일본에 데려 올 수 있었겠지요. 그리고 아마도 ’고니시 (小西)‘ 집에서 자랐겠지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기독교인 박해는 가내의 무사로부터 시작하여 궁중의 여성들에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 ‘줄리아’의 박해에 대해서는 일본에 온 ‘마치우스’라고 하는 선교사가 예수회 앞으로 보낸 1613년 1월 12일자의 보고서에 자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자신의 느낌을 소상하게 밝힌 글이었다. ‘오다 줄리아’가 수 백 년이 지난 오늘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자신이 느낀 대로 기술한 것이다.
유리아고려국왕족녀야(儒立亞高麗國王族女也)’
필자는 소설 ‘오다 줄리아’의 작가 표성흠(61세)씨와 통화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표 작가는 ‘오다 줄리아’에 대한 소설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서 “1970년대 초반 일본에서 ‘오다 줄리아’의 유물들이 한국에 온다는 신문기사를 읽고부터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부터 ‘오다 줄리아’를 소설화 해 보겠다는 욕심이 생겼으나, 이미 일본작가가 이를 소재로 소설을 썼기에 글쓰기를 포기 해 버렸습니다”고 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 그는 일본 작가의 글에 빠뜨려진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다 줄리아’가 조선의 왕녀이었다는 사실을 일본 작가가 간과했으며, 그녀를 실존 인물이 아닌 전설적인 인물로 묘사했기 때문에 그가 다시 펜을 들었다는 것이다.
표 작가는 그녀가 조선의 왕녀였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렇게 밝혔다.
“1871년 중국 상해의 자모당에서 출판된 <관광일본>의 ‘정유유도조’에 보면 ‘오다 쥬리아’라는 인물이 조선의 왕녀임을 밝히는 ‘유리아고려국왕족녀야(儒立亞高麗國王族女也)’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소설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전설이 아닌 실존 인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적 장막에 가려져 있던 조선인 ‘오다 줄리아’의 삶을 그린 최초의 소설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또한 그는 “일본엔 지금도 기독교가 뿌리 내리기 어려운데, 그 시절 국법으로 금지된 큰 물결을 거슬러 올라갔던 성녀 ‘오다 줄리아’의 순교 정신을 찾아보고자 했다”고 덧 붙였다. 고향에 내려가 창신대 겸임교수를 하면서 후학 지도에 땀을 흘리고 있는 표성흠 작가는 “사료(史料)의 한계로 인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으며, 이견도 제시될 수 있다”면서 "역사 교과서가 아닌 소설로 접해주기를 부탁한다"고 말했다
비록 소설이라고는 하더라도 이러한 작품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역사소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는 자료 수집을 위해 일본을 수 없이 왕래했으며, 이 작품을 집필하는 기간만 3년이 걸렸다고 했다. 결국, 이 소설이 우리들의 곁으로 다가오기까지 37년이 걸린 셈이다.
'마지막 역사소설'
역사소설을 쓰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일단 역사적 사건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깊이 있는 심리 묘사가 있어야 하고, 현대적인 창조성도 발휘되어야 한다. 역사 소설은 앉아서 쓰는 것이 아니라 발로 써야 한다. 역사적 사실을 수집하고, 고증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들은 ‘마지막 역사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는 것 같다.
소설가 최인호 씨도 ‘제4의 제국’을 출간하면서 ‘이것이 나의 마지막 역사 소설이다’고 했다. 표 작가도 이 책을 끝내면서 “나는 오다 줄리아 역시, 그러한(복음전파) 섭리에 의해서 그렇게 태어났고, 또 그렇게 죽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 또한 그러한 오다 줄리아의 생애를 소설로 쓰기 위해 작가로서의 연단을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게 내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 될 것임으로....”
작가 박완서 씨는 ‘호미’에서 '글 쓰는 일이란 몸의 진액을 짜는 일'이라 했다. “나에게 남이 있는 마지막 허영이 있다면 그건 우아하게 늙는 것인데,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든, 알량한 문명을 위해서든, 이렇게 내 몸의 진액을 낭비하다가는 아마 마음씨 좋은 고로쇠나무처럼 불쌍하고 추한 말년이 될 것 같아서다. 글 쓰는 일이란 몸의 진액을 짜는 일이니까.”
청정의 섬 고즈시마는 관광명소
오다 줄리아가 유배되었던 ‘고즈시마(神津島)’는 이즈(伊豆) 제도에 속해있는 작은 섬이다. 섬의 면적이 18.48㎢이며 행정구역상으로는 도쿄도(都) 고즈시마 무라(村)에 해당된다. ‘고즈시마(神津島)’의 관광협회 사무장인 ‘후쿠지(福地, 40세)’씨는 “지금은 ‘고즈시마(神津島)’가 절해고도가 아닙니다. 도쿄의 ‘다케시바(竹芝)’ 부두로부터 초고속선으로 3시간 45분, ‘시모다(下田)’에서는 3시간이면 ‘고즈시마’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고 했다. 물론 야간에 출발하는 객선으로 가면 약 13시간 걸리나 아름다운 일출을 보면서 섬에 다가갈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그 옛날의 고행길이 이제는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섬에 살고 있는 사람의 수도 늘어나 2,100명이나 된단다.
한국인의 방문자에 대해서 묻자 “지난해의 ‘오다 줄리아’ 기념제(5월 3번째 일요일)에는 약 50여명이 참석해서 그녀의 넋을 기렸다면서, 평소에도 그녀의 묘를 찾는 한국사람이 있다고 했다.
‘기후’ 현의 열성 신도도 “치마, 저고리를 입은 다수의 한국 여성들이 줄리아 제(祭)에 참가하여 전원이 ‘줄리아님’의 묘에 헌화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오다 줄리아’님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수 백 년이 지나도 이처럼 그녀의 넋을 기리는 사람들의 따스한 마음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들지 않는 조선의 한 떨기 꽃 오다 줄리아! 그 향기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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