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 노래는 조용필씨의 「돌아와요 부산항」이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으리라.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을 일본가사로 부르기도 하며, 발음은 어눌하지만 우리말로 부르는 용감한(?)사람들도 너무나 많다. 특히, 후쿠오카(福岡)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부산과 후쿠오카가 196.5km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 때문일까?
아니다. 그들이 부산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산(釜山) ― 후쿠오카(福岡) 포럼 설립
일본의 새총리가 탄생되기 전인 지난 9일. 부산에서 「부산 ― 후쿠오카 포럼」이 개최되었다. 「지역 연대」와 「차세대 육성」이라는 두 개의 테마를 논의하고 부산의 문화와 후쿠오카의 문화에 정통한 부후인(釜福人)의 육성과 특구의 설치, 해협(海峽)대학 창설, 영화제 공동개최 등의 안(案)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정치적인 문제로 충돌하고 있지만, 민간차원에서 국경을 초월한 지역 간의 공동모델 구축이라는 큰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여러 가지의 안건 중에서 ‘부후인(釜福人)육성’이라는 테마가 눈길을 끈다.
그렇다. 많은 부후인(釜福人)이 육성되면 한․일관계가 눈에 띄게 개선될 것이다.
부산시(市)와 후쿠오카시(市)처럼.
부산시(市)와 후쿠오카시(市)는 1989년부터 자매결연을 맺어왔지만, 「부산 ― 후쿠오카 포럼」이 설립되기까지 꽤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2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연을 안고 흘러왔을까?
긴장의 파고(波高)를 넘어
서일본신문사 상무로 재직하고 있는 ‘사카구치 다카요시(坂口隆義, 65세)’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살벌했던 시대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저는 한국과 관계를 맺은 지가 어언 30년이 되었습니다.”면서 말문을 연 그는 “1977년 난생처음으로 세미나 참석차 서울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때는 야간에 호텔 밖을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안내원이 매일 밤, 숙박객의 이름, 여행예정지 등을 6매씩 복사해 정부기관에 제출하였습니다.”면서 ‘긴장의 서울 세미나’였다고 했다.그는 ‘긴장의 세미나를 무사히 마치고 부산으로 향했다. 부산으로 가는 도중의 시골풍경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으며 첫 방문이었지만, 마치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었다.’고 했다.
필자의 경우를 소개한다.
15년 전쯤의 일 인 것 같다. 비즈니스 차원에서 일본 기업인들과 부산에 갔다. 자갈치 시장, 국제시장, 해운대, 영도다리 등의 관광을 마치고 호텔의 한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호텔 앞에 있는 가라오케를 갔다. 일본사람들은 가라오케 가는 것을 즐겨하기 때문이다.
일본사람이 노래를 부르자 ― 갑자기 유리컵이 날아왔다.
“아니 ― 이 쪽발이 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패싸움이 벌어졌다.
“적개심이나 반항심이란 것은 압박과 학대에 정비례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민족적으로 활로를 얻는 유일한 수단이?” (염상섭의 만세전)
그러나, 필자의 비즈니스는 활로를 찾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갔다.
부산대와 규슈대(九州大)도 교류확대
“부산대와 규슈대는 이날. 교수를 상호 파견하여 상대편의 대학에서 수업을 하는 「교환수업」등의 학술교류를 시작하기로 합의하였다.” (서일본신문, 9월 10일)
“지난 해, 독도문제나 역사교과서 문제 등으로 한․일관계가 악화돼 가고 있던 시기에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관광객 24만 4천여 명으로 전년 동기대비 27.4%나 증가했다. 또 한국의 드라마나 연예인, 영화, 요리 등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급증하는 한류붐은 한․일 관계개선을 위한 좋은 디딤돌이 되고 있다.” (부산일보, 9월 9일)
‘부산 ― 규슈 포럼’의 리더 격인 JR규슈 사장 ‘이시하라 스스무(石原進)’씨는 “상호간의 진실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신뢰관계를 구축하고 싶다.’고 했다.
부산일보의 김종렬(金鍾烈)사장도 “협력을 통해서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방법을 모색하자.”고 했다.
국경을 초월한 한국과 일본의 공동의 발전을 위한 「부산 ―후쿠오카 포럼」의 회원은 22명이다. 부산시(市)와 후쿠오카시(市)의 각계 리더들로 구성되었다. 이 포럼은 정치세계와는 관계없이 민간인 차원에서 결실을 맺었다.
하카다회(일명 나들이클럽)의 부회장 ‘우츠미 케이이치’(內海敬一, 63세)씨는 “후쿠오카 시내에서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 반가워서 ‘안녕하세요?’라고 말을 건넵니다. 그러면 한국인들이 일본말로 ‘곤니찌와-’라고 답을 할 때 너무나 기뻤습니다.”고 한다.
이러한 작은 일들이 부후인(釜福人)을 키우는 씨앗이 될 것 같다.
“문화는 어머니요, 제도는 자식이다.”라는 말이 있다.
‘부후인(釜福人)육성’은 부산의 문화와 후쿠오카의 문화를 서로 잘 이해하는 사람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부후인(釜福人)이라는 옥동자가 언제쯤 태어날 수 있을까?
손꼽아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