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동주시비제막식의 모습(四國新聞 2006.6.23)
'내 영혼이 머물게하라.'
“저희 오라버니가 민족을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납니다. 이 시비(詩碑)를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바로보고 또, 젊은 사람이 희생되지 않는 미래가 구축되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6월 23일. 일본의 교토(京都)에서 있었던 윤동주 시비(詩碑) 제막식에서 그의 여동생인 윤혜원(81세)씨가 한 말이다. 민족 시인의 여동생답게 감동적이다.
윤동주 시비(詩碑)는 그가 살았던 교토의 아파트 부지(敷地), 현 교토 조형예술대학의 캠퍼스 내에 세워졌다. 높이 1.2 미터의 시비(詩碑)는 「윤동주 유혼의 비(尹東柱 留魂之碑)」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유혼의 비(留魂之碑) ―
그의 영혼이 거기에 머무를 수 있을까?
아무튼, 이 시비(詩碑)는 한국산과 교토산의 돌로 세워졌다. 양국화합의 의미를 두기 위해서이다. 바로 옆에는 윤동주 시의 세계와 그의 생애를 설명한 돌비석도 자리했다.
월드컵의 함성에 묻혀버렸을까?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8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알려져...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4년 그의 시집(詩集)이 출판(記錄社)되면서 부터이다. 방송에서는 1988년 2월 ‘NHK 라디오 한글강좌’에서 최초로 소개되었다.
1990년에는 시인 故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씨의 수필, 「윤동주에 대하여」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1994년 7월에는, 후쿠오카의 서일본신문(西日本新聞)에 「빼앗긴 시혼(詩魂). 발굴 윤동주의 옥사(獄死)」라는 타이틀로 16회에 걸쳐 윤동주의 인생역정(歷程), 시의 세계 등 모든 것이 연재되었다.
연재기사 중에서 「우리말 수난」과 「조국 소멸의 위기감」부분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윤동주 시인이 가장 중요시하고, 그가 어느 곳에 가더라도 지니고 다녔던 책은 한국의 유명한 국어학자인 최현배(1894~1970)씨가 쓴 「우리말본」이다. 윤동주가 한글 시(詩)를 쓰게 된 것은 그의 은사인 최현배씨의 사상에 공감을 했기 때문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처음 쓴 ‘새로운 길(1938년)’이라는 시이다.
이 시는 학우회지 문우(文友)에 발표되었다. 젊은이의 건강한 활기와 청아한 마음이 가득 들어있다.
자기나라의 언어사수가 조국의 독립과 민족문화 회복에 있어서 최후의 요새라고 본 조선 반도의 사람들 ―
그것에 반해 그들의 언어를 소멸시켜서 내선일체(內鮮一体)화 정책을 완성시키려고 했던 일본의 위정자들 ―
윤동주는 양자의 마찰이 치열했던 시대에 한글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최후까지 버리지 않았다.》
후쿠오카ㆍ윤동주 시(詩)를 읽은 모임 결성
1994년 12월에는 후쿠오카에서 윤동주 시(詩)를 읽은 모임이 결성되었다.
‘한국의 문화ㆍ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는 이모임의 대표 마나기(회사원, 40세)씨의 말이 가슴이 와 닿는다.
‘윤동주 시(詩)를 읽는 모임’의 회원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시인(詩人)의 자세가 맘에 들었고, 매혹적인 그의 시(詩)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입을 모은다. 회원수는 약 40명이다.
1995년 2월에는 후쿠오카 감옥이 있었던 그 자리에서 위령제가 거행되었다. 또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내에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
2003년 6월. 숭실대학교에서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구마키 쓰토무(熊木勉, 현 후쿠오카 대학교수, 40세)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욱 감동적이다.
“일ㆍ한 간에 있었던 한 시인의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윤동주의 연구를 통해서 그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래보고자 함이었습니다.”
“윤동주는 고난의 시대에 민족의 삶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의지와 신념으로서 시에 승화시켰습니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를 연구하고, 애도하며, 시비(詩碑)를 세우면서 그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이제는 그가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후쿠오카 형무소 터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야 할 차례이다.
그러나 윤동주 시(詩)의 번역에 오류가 있다고 한다. 의도적인 왜곡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도쿄경제대학의 재일교포2세, 서경식 교수)
시(詩)의 번역은 뉘앙스에 따라 전혀 다른 얘기로 변질 될 수가 있다. 우리가 또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잘못을 찾아내어 바로 잡는 것이다.
그의 영혼이 일본에 세워진 시비(詩碑)에 잠시라도 머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저희 오라버니가 민족을 뛰어넘어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납니다. 이 시비(詩碑)를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바로보고 또, 젊은 사람이 희생되지 않는 미래가 구축되기를 기대합니다.”
지난 6월 23일. 일본의 교토(京都)에서 있었던 윤동주 시비(詩碑) 제막식에서 그의 여동생인 윤혜원(81세)씨가 한 말이다. 민족 시인의 여동생답게 감동적이다.
윤동주 시비(詩碑)는 그가 살았던 교토의 아파트 부지(敷地), 현 교토 조형예술대학의 캠퍼스 내에 세워졌다. 높이 1.2 미터의 시비(詩碑)는 「윤동주 유혼의 비(尹東柱 留魂之碑)」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유혼의 비(留魂之碑) ―
그의 영혼이 거기에 머무를 수 있을까?
아무튼, 이 시비(詩碑)는 한국산과 교토산의 돌로 세워졌다. 양국화합의 의미를 두기 위해서이다. 바로 옆에는 윤동주 시의 세계와 그의 생애를 설명한 돌비석도 자리했다.
월드컵의 함성에 묻혀버렸을까?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80년대 초반부터 일본에서 알려져...
윤동주 시인이 일본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4년 그의 시집(詩集)이 출판(記錄社)되면서 부터이다. 방송에서는 1988년 2월 ‘NHK 라디오 한글강좌’에서 최초로 소개되었다.
1990년에는 시인 故이바라기 노리코(茨木則子, 1926~2006)씨의 수필, 「윤동주에 대하여」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1994년 7월에는, 후쿠오카의 서일본신문(西日本新聞)에 「빼앗긴 시혼(詩魂). 발굴 윤동주의 옥사(獄死)」라는 타이틀로 16회에 걸쳐 윤동주의 인생역정(歷程), 시의 세계 등 모든 것이 연재되었다.
연재기사 중에서 「우리말 수난」과 「조국 소멸의 위기감」부분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윤동주 시인이 가장 중요시하고, 그가 어느 곳에 가더라도 지니고 다녔던 책은 한국의 유명한 국어학자인 최현배(1894~1970)씨가 쓴 「우리말본」이다. 윤동주가 한글 시(詩)를 쓰게 된 것은 그의 은사인 최현배씨의 사상에 공감을 했기 때문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처음 쓴 ‘새로운 길(1938년)’이라는 시이다.
이 시는 학우회지 문우(文友)에 발표되었다. 젊은이의 건강한 활기와 청아한 마음이 가득 들어있다.
자기나라의 언어사수가 조국의 독립과 민족문화 회복에 있어서 최후의 요새라고 본 조선 반도의 사람들 ―
그것에 반해 그들의 언어를 소멸시켜서 내선일체(內鮮一体)화 정책을 완성시키려고 했던 일본의 위정자들 ―
윤동주는 양자의 마찰이 치열했던 시대에 한글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최후까지 버리지 않았다.》
후쿠오카ㆍ윤동주 시(詩)를 읽은 모임 결성
1994년 12월에는 후쿠오카에서 윤동주 시(詩)를 읽은 모임이 결성되었다.
‘한국의 문화ㆍ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는 이모임의 대표 마나기(회사원, 40세)씨의 말이 가슴이 와 닿는다.
‘윤동주 시(詩)를 읽는 모임’의 회원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시인(詩人)의 자세가 맘에 들었고, 매혹적인 그의 시(詩)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입을 모은다. 회원수는 약 40명이다.
1995년 2월에는 후쿠오카 감옥이 있었던 그 자리에서 위령제가 거행되었다. 또 교토의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내에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
2003년 6월. 숭실대학교에서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구마키 쓰토무(熊木勉, 현 후쿠오카 대학교수, 40세)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더욱 감동적이다.
“일ㆍ한 간에 있었던 한 시인의 너무나 가슴 아픈 사연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윤동주의 연구를 통해서 그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래보고자 함이었습니다.”
“윤동주는 고난의 시대에 민족의 삶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의지와 신념으로서 시에 승화시켰습니다.”
일본인들은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를 연구하고, 애도하며, 시비(詩碑)를 세우면서 그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이제는 그가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한 후쿠오카 형무소 터에 그의 시비(詩碑)가 세워져야 할 차례이다.
그러나 윤동주 시(詩)의 번역에 오류가 있다고 한다. 의도적인 왜곡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도쿄경제대학의 재일교포2세, 서경식 교수)
시(詩)의 번역은 뉘앙스에 따라 전혀 다른 얘기로 변질 될 수가 있다. 우리가 또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잘못을 찾아내어 바로 잡는 것이다.
그의 영혼이 일본에 세워진 시비(詩碑)에 잠시라도 머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