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공천 파문으로 현역의원들이 대거 탈락한 가운데 2008년 3월 19일 오전 여의도 남중빌딩에서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와 홍사덕 의원 등 20여명이 기자회견을 갖고 미래한국당 입당 선언했다. 서 전 대표와 홍 의원은 미래한국당은 입당 후 당 명칭을 (가칭)친박연대로 바꾸어 4.9 총선에 나섰다. 사진=조선DB
4.10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의 공천과정에서 비명(이재명)·친문(문재인)계가 대거 탈락하면서 “공천학살” 논란이 커지고 있다. 친명계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도 공천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들릴 정도이다. 이번 공천파동은 어떤 결말을 낳을까?
과거에는 이런 식의 승부수가 통했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8년 총선에서도 공천학살 논란이 거셌다. 한나라당 비주류였던 친이(이명박)계가 당권을 장악하면서 주류였던 친박(박근혜)계를 공천에서 잇따라 탈락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공천학살에 따른 친박연대 창당 등 연쇄탈당에도 불구, 한나라당은 과반수 의석의 제 1당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뒀다.
갓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안정 호소와 뉴타운 개발 등의 공약을 내건 집권당에 표심이 대거 쏠렸던 것이다.
2008년 3월 24일 오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친박연대 개편대회가 열렸다. 서청원 대표(오른쪽)와 이규택 의원이 친박연대 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조선DB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체제 역시 비주류에서 당권을 장악, 총선을 앞두고 비명 혹은 친문(문재인)계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에 나섰다는 점에서는 친이계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집권당이 아닌 상황에서 총선과 차기 대선을 앞두고 공천학살을 강행한 것이 유권자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얻을 수있을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더불어민주당 텃밭인 호남의 민심이 총선 승부의 최대 가늠자가 될 것이란 점이다. 이 지역에서 조차 확실한 승기를 잡지 못할 경우 전국 판세가 힘겨운 국면으로 기울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호남 의원들이 잇따라 공천에서 떨어지고 있는 상황과 이낙연 대표의 새로운미래에 대한 이 지역 표심의 호응 정도에 더불어민주당의 운명이 걸려있는 셈이다.
2000년 3월 8일 국회에서 열린 민주국민당 창당대회에서 당 지도부가 꽃다발을 들어올려 당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이수성 전 총리, 조순 전 부총리, 김윤환, 이기택, 박찬종 전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조선DB
조순 창당준비위원장을 비롯한 민주국민당(가칭) 지도부가 2000년 2월 28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발기인 대회에서 꽃다발을 받아들고 손을 들어 참석자들에게 답례하고 있다. 사진=조선DB
공천학살 논란에도 제1당을 차지했던 2000년 총선 때의 야당인 한나라당과도 다르다. 당시 이회창 총재 측은 텃밭인 영남지역을 겨냥했으나,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결속 차원에서 김윤환·이기택 등 당내 세력을 갖고 있는 거물급을 주 타깃으로 물갈이를 했다. 계파갈등에 따른 더불어민주당의 공천학살과는 결이 달랐던 것이다.
이 총재의 경우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들어와 대선을 거치면서 당내 주도권을 장악했기에 계파 갈등이란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친문계와 달리 전직 대통령 계보의 결집력도 약화돼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선거결과 정권교체 열기가 뜨거웠던 영남표심은 공천파동에도 한나라당 후보를 모두 당선시켰던 것이다(정몽준 후보가 당선됐던 울산에는 공천하지 않았음).
더불어민주당의 비명·친문 공천학살과는 비교되는 지점이다. 이번 공천파동에는 무엇보다 이 대표의 차기대선 출마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사법적 리스크 문제가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공천이후 본격화될 총선 정국이 친명측 셈법대로 전개될 지는 불투명하다.
2005년 11월 11일 열린우리당 당사 앞에서 창당 2주년 기념식에서 정세균 당의장 겸 원내대표 등 참석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축하 화환 옆으로 행사장에서 나오고 있다. 사진=조선DB
진보 측 물갈이는 보수 측과 달랐다.
2004년 총선에서는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의 비주류였던 친노(노무현)계가 탈당, 열린우리당을 창당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뒀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역풍의 영향이 컸지만 정치권 개혁에 대한 호소도 표심에 주효, 돌풍이 일어났던 것이다.
대선 직후까지도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당권을 장악한 동교동계와 친노계·호남소장파 간의 당 쇄신 갈등이 깊어져 갔고, 결국 분당사태로 까지 치닫게 됐다. 그리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던 친노계 등이 총선 압승과 새천년민주당 참패를 통해 호남 텃밭 물갈이를 이뤄냈던 것이다.
이처럼 집권후 신당 창당을 통해 호남 구주류세력의 교체가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재명 대표체제의 더불어민주당과는 다르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으나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선 친노계 등이 당내 역학구도상 주도권을 차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만큼 인적 쇄신에 나서기에는 한계에 부딪혔던 것이다. 결국 신당 창당으로 이어졌고 총선 압승을 통해 집권당을 리모델링했던 셈이다.
보수, 진보 양측의 이런 전례들과 비교하면 더불어민주당의 공천논란 과정은 달랐던 것이다.
이 대표 개인의 사법적 리스크가 계파갈등의 저변에 깔려있고 뇌관이 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대표와 친명계가 쫒기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들의 공천학살 승부수도 앞서 전례들처럼 총선에서 통할까?
새누리당 제공 무성이 옥새들고 나르샤 유튜브 캡처. 김무성 대표의 ‘옥새파동’을 패러디한 새누리당 홍보기획본부의 선거 동영상이다. 사진=조선DB
2016년 총선 때 새누리당의 비박 공천학살 상황이 오버랩 된다. 당시에는 새누리당이 180석을 차지할 것이란 압승 전망까지 나돌았으나, 공천과정에서 ‘비박 학살·진박 논란’에 휩쓸렸고 김무성 대표의 옥새 파동까지 겹치면서 총선결과 제1 당 자리마저 빼앗기는 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이 같은 선거결과를 초래한 저변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의 위기감이 자리해 있었다. 비박계가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 상황은 임기말로 치닫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레임덕을 가속화시킬 수 있고 차기 대권경쟁에서도 친박계가 밀려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때문에 친박 측은 총선을 통해 당권을 재장악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갖게 됐고 이에 청와대도 가세, 공천과정에 개입했던 것이다.
결국 이재명 대표의 사법적 리스크와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레임덕 가속화 우려가 계파 갈등을 심화, 공천학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양측이 유사하다.
때문에 이 대표와 친명계는 비명 공천학살을 승부수라고 던졌지만, 패착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