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호 사고 직접적 심리외상자 최소 3000여 명… 현재 분노·체념상태, 쇼크 후 2~3개월이 관건
⊙ 희생자 유족의 주변인이 유념할 점 ▲잠을 잘 재워라 ▲혼자 두지 마라 ▲괜한 말을 시키지 마라
⊙ 운동·미술·음악 등 집중할 수 있는 예술치료도 효과적… 놀이치료, 집단치료, 약물치료 등 동원해야
⊙ 주변인은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최선
⊙ 희생자 유족의 주변인이 유념할 점 ▲잠을 잘 재워라 ▲혼자 두지 마라 ▲괜한 말을 시키지 마라
⊙ 운동·미술·음악 등 집중할 수 있는 예술치료도 효과적… 놀이치료, 집단치료, 약물치료 등 동원해야
⊙ 주변인은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것이 최선
- 세월호 사고 이후 보건복지부가 안산에 설치한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 사고 후유증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한 시설이다.
“버스가 불타오르는 가운데 나를 구해준 친구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던 모습이 14년 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2000년 부일외고 수학여행 참사 생존자 A씨)
“수업할 때 아이들을 보면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 내가 이 아이들을 모두 지킬 수 있을까, 살아남은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에 수업에 집중이 안 됩니다.”(교사 B씨)
“세월호 사고 이후 밤이면 중학생 딸이 침몰하는 여객선 속에서 ‘엄마! 엄마!’를 부르짖는 꿈에 시달립니다. 일어나면 눈물로 베개가 젖어 있어요. 언제쯤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주부 C씨)
4월 16일 세월호 사고 이후 ‘트라우마(trauma·의학용어로는 외상을 뜻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또는 충격을 뜻하는 용어)’라는 단어가 전 국민을 휩싸고 있다. 희생자와 생존자 주변인은 물론 뉴스를 지켜본 모든 국민이 우울과 분노, 실의에 빠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안타까운 선택도 줄을 이었다. 희생자가 가장 많은 단원고의 교감이 자살했고, 학부모 몇 명이 자살을 시도했으며, 심지어 현장 자원봉사자가 “학생들이 불쌍해 견딜 수 없다”며 자살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희생자와 주변인에 대한 심리치료가 절실하다는 여론이 대세다. 트라우마 및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 정신적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까지 나섰다. 하지만 이 같은 ‘재난심리치료’는 아직 국내 학계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상태라고 보기는 힘들다. 최근 대형 사건사고가 줄을 잇는 가운데 재난심리치료는 어떻게 진행돼야 할지 《월간조선》이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었다.
보건복지부, 안산에 트라우마센터 설립
경기도 안산시청 옆 단원보건소 본관 옆에는 작은 별관이 있다. 안산 시민들을 위한 ‘안산시 정신보건센터’다. 정신과 전문의 또는 심리치료사 등 전문가로부터 무료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5월 1일 이곳 2층에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가 들어섰다. 세월호 사고로 정신적 충격을 입었거나 우울증,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센터다. 국립서울병원 소속 정신과 의사와 정신전문간호사, 심리치료사 등 전문인력이 상주하며 세월호 관련 피해자 및 시민들의 정신건강 회복을 돕고 있다.
평일 오전 찾은 센터에는 10여 명의 직원이 있었고, 몇 명은 전화로 상담을 하고 있었다. 센터 접수 담당 직원은 “센터 취재는 곤란하다”며 “상담 인력이 안정적인 상담을 할 수 있도록 취재에 응하지 않는 점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안산 전체에 24곳의 심리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주로 전화상담이나 상담원의 방문상담이 많고 상담센터나 상담소를 직접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현재 안산 24개 상담소를 통해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접수된 안내 및 상담 건수는 사고 후 1만2000건을 넘어선다.
국립서울병원(舊 국립서울정신병원)은 4월 16일 세월호 사고가 난 지 약 일주일 후인 24일부터 현지에 정신과 전문의와 간호인력 등을 파견해 심리치료와 상담에 나서왔다. 이 밖에도 신경정신학회 등 여러 곳에서 심리상담 지원이 이어지면서 보건복지부는 경기도와 안산시, 대학병원 등으로 흩어져 있던 재난심리치료 기능을 통합해 5월 1일 센터를 발족시키면서 하규섭 국립서울병원장을 센터장으로 임명했다. 하 원장은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등 대형사고 당시만 해도 생존자나 희생자 가족에 대한 심리치료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지만, 대구지하철참사를 계기로 트라우마 치료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커지고 있다”며 “국민 정신건강을 위해 보건복지부가 통합 심리지원센터를 마련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보통 재난이나 대형사고의 경우 사망자보다 부상자가 많습니다. 부상자들은 병원에 입원・치료하면서 심리치료도 병행합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는 부상자가 많지 않고 생존자는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심리치료할 시스템이 시급한 이유죠.”
태안캠프 사고 때도 학교에서 집단트라우마 치유
국내 재난심리치료의 역사는 길지 않다. 2003년 대구지하철화재참사를 계기로 학계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 관련 논문들을 내놓으면서 재난심리치료에 대한 관심이 구체화됐다. 또 광주 5·18 희생자들의 심리상담을 맡아오던 ‘광주트라우마센터’가 2012년 10월 상시기구로 문을 열었고, 최근 태안 해병대캠프 사고, 경주리조트 사고 등으로 희생자와 생존자에 대한 심리치료를 전문가들이 담당해 왔다.
생존자와 유가족에 대한 심리치료 연구는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급격히 활발해지는 분위기다. 익명을 요청한 한 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실시간으로 죽어나가는 것을 생중계로 보고 있는데 집단 급성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라며 “사고수습이 마무리되는 대로 정부와 언론은 대국민 심리치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보건복지부 안산트라우마센터와 별개로 단원고에는 교육부가 ‘학생정신건강지원센터’를 설치했다. 센터장은 정운선 경북대 소아정신과 교수가 맡았다. 태안 해병대캠프 및 경주리조트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 심리치료를 맡아왔던 인물이다.
정운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지난해 7월 태안캠프 사고의 생존자들은 1년여에 걸친 심리치료로 겉으로는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번 세월호 사고로 더 예민해지고 상처가 재발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정 교수의 얘기다.
“사고 생존자에게서는 보통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 나타납니다. 친한 지인을 잃었을 경우는 더 심하고 특히 예민한 10대 학생들의 경우 성인에 비해 훨씬 심해요. 일상생활로 돌아가기가 힘들죠. 태안 생존자들 중 몇 명은 지금도 우울증과 스트레스성 장애 치료를 받고 있는데, 이번 사고를 계기로 괜찮아 보였던 학생들에게서 다시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 치료는 1~2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찰과 상담이 필요합니다.”
태안 사고 당시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은 대부분이 외상후장애에 시달렸다. 학생들은 등교거부를 하기도 하고, 과격해지고, 실언을 하고, 우울증으로 잠만 자는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났다. 정 교수는 의료진 20여 명과 함께 한 달간 학교(공주사대부고)에 상주하며 전교생의 심리치료를 맡았다.
학생과 교사를 일대일로 수차례씩 면담했고, 집단면담도 여러 차례 가졌다. 학부모에게 배려와 전문가 치료를 권하는 가정통신문도 보냈다. 학습진도에 연연하지 않고 수업은 독서나 체육활동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눈물이 나는 학생은 언제 어디서든 실컷 울도록, 주변사람들은 다함께 감싸 안고 위로하도록, 우울감에 말 한마디 없는 학생은 교사와 친구들이 말없이 손을 잡아주도록 했다. 사고 후 전학생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작년 해당 학년의 전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집단치유의 힘이었다.
단원고 학생들 “부모님과 선생님이 걱정돼요”
정운선 교수는 현재 단원고의 상황에 대해 “아이들이 친구를 잃은 자신의 슬픔보다 죄책감이나 주변 배려가 더 앞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마음은 아직 슬픔이나 분노, 체념 중 어느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복잡한 상태입니다. 남은 친구들끼리 잘 지내다가도 문득 죄책감을 느끼고, 좋은 일이 있어도 웃으면 안 될 것 같고, 동네 어딘가에 기자들이 있을 것 같아 불안해하고요.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보다 주변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어요.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더 걱정해 의사나 상담사에게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많이, 잘 봐달라는 학생들이 많아요.”
친구와 제자를 잃은 학생과 교사의 상처는 물론이고, 싸늘한 제자들의 신원을 확인해야 했던 일부 교사들의 상처도 심했다. 성인으로서, 교사로서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기본이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교사로서 자격이 없다는 자책으로 더욱 우울증에 빠져드는 등 악순환이 이어졌다. 자책감이 심해 심리상담을 거부하는 교사도 많아 정 교수팀은 이들을 상담하고 설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0대 학생들을 위해 운동과 미술 등 예술치료를 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축구나 농구를 하잖아요. 사고 후엔 왠지 죄책감이 든다며 못 하더라고요. 억지로라도 운동을 시키고 있어요. 탁구부가 유명해 아이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어 전교생 탁구 시간도 마련하고, 미술과 음악 등으로 예술치료를 하는 시간도 마련했습니다.”
정 교수의 얘기다. “생존자나 희생자 주변인에게 가장 먼저 해주어야 할 일은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대부분 웃을 일이 있어도 죄책감에 웃지 못하고 더 우울감에 빠져들게 돼요. 웃을 땐 웃어도 된다, 할 일은 해야 한다, 이게 기본입니다. 학생의 경우 수업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운동도 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단원고는 주변에서 걱정할 정도로 침체된 분위기는 아닙니다. 센터 인력들이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노력하고 있어서 학생들도 어느 정도 마음을 열고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있는 분위기예요.”
외상 정도의 분류와 개별치료가 중요
전문가들은 생존자, 희생자 가족, 관계자 등 심리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분류하고 상처의 단계를 파악한 후 맞춤형 치료법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쇼크 후 심리는 ① 현실부정 ② 분노 ③ 체념 ④ 수용의 4단계로 진행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현실부정이나 분노, 체념에서 더 발전하지 못하고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경우 정신질환이나 극단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체념과 실의라는 3단계에서 수용으로 발전하지 못하면 깊은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규섭 국립서울병원장은 “의학적으로 볼 때 ‘고위험군’은 분명히 있지만 그런 말을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써선 안 되고 A그룹, B그룹 등으로 나눠 치료법을 제시하고 몇 명을 모아 집단치료에 나선다”며 “사람마다 슬플 때 대응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심리치료에서는 일대일 개별면담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제대 부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도운 교수는 “정신적 외상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면 ‘외상 후 성장’이라는 정신적 성숙이 일어나 이전보다 더 성숙해진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도운 교수의 얘기다. “사고 후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고 스스로 잘 극복해 나간다면 아픔을 뛰어넘어 더 사려 깊고 성숙한 인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주변인의 관심과 배려, 전문가 상담과 치료 등이 적절히 이뤄져야 하는데, 이런 재난의 경우 국가가 나서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 주변인은 생존자나 희생자 가족이 심리치료를 회피하거나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지 않도록 위로하는 동시에 전문가 상담을 독려해야 합니다. 전 국민이 함께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집단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그는 사고 후 스트레스를 받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웃고 일상을 즐기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평소 스트레스에 약하다면 뉴스는 어느 정도 피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했다.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했으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머릿속에서 떠나보내기 어려우면 산책이나 운동, 쇼핑 등 사고를 잊을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데도 증세가 한두 달 이상 호전되지 않거나 증상이 심각하면 즉시 전문가에게 치료를 의뢰해야 합니다.”
차명호 평택대 피어선심리상담대학원장은 일대일 상담을 비롯한 각종 심리치료 방법 중에서도 ▲유사 경험자와 함께하는 집단상담 ▲청소년을 위한 놀이치료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방법이 트라우마 극복에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유사 경험자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은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고, 청소년들은 끔찍한 사건이 있어도 자신들만의 놀이를 통해 극복해 나간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또 신경정신과 치료에 동반되는 약물치료에 거부감을 갖지 말고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직접적인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의 치료에는 기본적으로 전문가의 심리치료가 중요하고 그 주변사람들도 치유과정에 함께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사고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에는 ‘말없이 공감하고 들어주기’가 최선으로 꼽혔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채정호 교수는 “비탄이나 애도, 분노가 아주 심하면 자해나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는 주변인의 힘으로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채 교수의 얘기다. “인명은 재천이라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잊어라, 살 사람은 살아야지 등 어설픈 위로의 말이 가장 위험합니다. 슬픔에 대해 공감해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슬퍼할 때는 슬픔을, 분노할 때는 분노를 함께 해주는 것이 전문가가 아닌 주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해외 전문가 그룹도 한국에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세월호 사고 관련 정신건강 지침’을 통해 주변에 고통스러운 일을 당한 지인이 있다면 ▲긍정적인 확신을 주고 ▲매체 보도를 지나치게 접하지 않도록 돕고 ▲일이나 육아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그들의 회복 노력을 인정하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면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의 심리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전문가들은 지나친 분노와 상호비방을 들었다. 고대안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고영훈 교수의 얘기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때 그 결과와 관련해 서로 비난하거나 감정이 격앙돼 분노감을 표출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 정도의 분노는 표출할 필요가 있지만 상호비방과 비난은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어요. 특히 근거 없는 소문을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정신건강을 위해 좋지 않습니다. 분노에 너무 몰두할 경우 사고와 상관없는 쪽으로 생각이 발전하게 되고, 지나친 격앙으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고 교수는 이와 함께 어린 학생들의 경우, 사고와 관련해 지나친 뉴스나 인터넷 노출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어린 학생의 경우 어른과 달리 감정을 컨트롤하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사실로 극도의 분노감과 불신감을 갖게 되는 일은 보호자가 막아줘야 합니다.” 정운선 교수 역시 “어린 아이들이 사고뉴스에 계속 노출될 경우 급성스트레스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가져올 수 있는 만큼 적절히 노출시키고 설명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해외 트라우마 전문가들도 한국을 찾았다. 트라우마 연구에 관한 선진국으로 꼽히는 곳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민간구호기구 ‘이스라에이드’ 의료진은 지난 11일 한국을 찾아 향후 2년간 세월호 트라우마 치료에 나선다고 밝혔다. 이스라에이드는 정신과 교수들로 이뤄진 조직으로, 미국 9·11 테러와 일본 대지진 등 테러와 자연재해 등의 트라우마를 치료해 온 세계적인 심리치료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최근 진도를 방문한 요탐 폴라이저 이스라에이드 아시아지국장은 “이스라엘은 잦은 테러와 전쟁으로 트라우마 치료가 체계화돼 있고 사례도 다양하다”며 “향후 2년 동안 50명의 트라우마 치료 전문가를 파견해 지속적으로 치료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는 “세월호 사고의 경우 인재(人災)였다는 이유로 일반적인 재난보다 국민들의 분노와 죄책감이 매우 큰 상황”이라며 “민간 차원의 심리치료도 중요하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국민의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미국은 1989년 베트남 참전용사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보훈처 산하에 국립 PTSD센터를 설립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연방재난관리청이 재난관리와 심리치료를 담당하도록 일원화했고, 테러 발생 10년 후까지 피해자들을 관찰 및 조사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미 정부는 9·11 테러 이후 생존자와 경찰, 소방공무원, 구조요원뿐만 아니라 목격자들도 트라우마 치유를 무료로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심리치료에만 3조원을 쏟아부었다. 뿐만 아니라 사고로 직장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등 다각적인 지원을 펼쳤다.
관계자 심리치료도 필요
한편 이번 사고와 관련해 자원봉사자, 공무원, 잠수부, 기자 등의 정신건강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올 초 여당은 소방·경찰 등 위험직 공무원의 정신건강 관리를 국가가 책임지는 법안(정신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도 제출했다. 발제자인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은 “이들 공무원은 직무 특성상 화재, 건물붕괴, 살인, 강도, 폭력 등 사건·사고 현장에서 살해당하거나 부상을 입은 피해자들을 목격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동료의 부상이나 사망을 목격함으로써 정신적인 충격에 장기간 반복적으로 노출돼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경찰청은 2010년부터 심리상담제도 도입 및 경찰 트라우마센터 설립을 추진 중에 있고, 소방방재청도 2012년부터 5억85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해 재난심리지원센터를 운영, 공무원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있다. 국방부도 국군수도병원에 PTSD클리닉을 설치해 치료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재난심리지원은 소방방재청이 맡고 심리치료는 보건복지부가 담당하는 등 정신건강 관리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세월호 사고는 전 국민에게 큰 아픔을 남겼다. 사고 후 한 달이 지났지만 실종자가 남았고, 사람들은 슬퍼하고, 분노하고, 우울해하며 상호비방을 하기도 한다. 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고 ‘외상 후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을지는 우리 모두의 과제다.⊙
[인터뷰]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장 河圭燮
“잠 못 자고 밥 못 먹으면 전문가 상담 반드시 받길”
매일 국립서울병원과 안산을 분주하게 오가고 있는 하규섭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장은 신경정신과 중 조울증이 전공이다.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자살예방학회장과 국제조울증학회 부회장을 지냈고, 보건복지부가 1962년 국민 정신건강을 위해 설립한 국립서울병원의 병원장으로 2013년 파견됐다.
그는 간간이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월간조선》 인터뷰에 응했다. 정신과 의사와 기자는 공통점이 있다. 남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자세히 들어야 하고 공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몰입은 업무를 방해한다.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데서 끝내야지 옳고 그름을 판단해선 안 된다.
세월호 사고를 취재하는 기자들은 슬픔과 울분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업무에 임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주변인을 상담 및 치료해 주고 있는 정신과 의사도 마찬가지다. 하 원장은 가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지만, 인터뷰 내내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며 현황을 설명했다.
―현재 센터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무엇입니까.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 친지와 친구 등 희생자 또는 생존자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 심리적 상처가 큰 사람들을 찾아 심리적 안정을 찾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단원고 학생과 교사의 심리치료는 교육부가 학생정신건강지원센터에서 맡아 하고 있고요.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는 학생의 가족들, 주변인들을 직접 찾아 치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희생자 가족들이 스스로 상담센터를 찾을 겨를이 없을 듯한데, 구체적으로 센터가 어떤 일을 하는지요.
“일단 희생자 주변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희생자가 270여 명이면 그 부모가 500여 명이죠. 형제자매를 포함하면 더 많고요. 또 근로자가 많은 이 지역 특성상 조부모, 외가, 삼촌, 고모 등 친척들이 가까운 거리에 모여 사는 경우가 많다 보니 희생자의 친지가 최소한 1000여 명입니다. 또 희생자들이 대부분 학생이다 보니 그들에겐 친구와 선후배, 이성친구 등등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또래 집단이 1인당 최소한 4~5명은 됩니다. 이 인원이 또 1000여 명이죠. 게다가 한 동네에 희생자가 몰려 있다 보니 희생자나 그 부모를 잘 아는 주변 상인들, 이웃들도 엄청나게 많아요. 또 그 학교에 가야 할 초등 및 중학생들까지 하면 직접 심리적 외상을 입은 인원이 최소 3000여 명에 달합니다.”
―3000여 명을 다 치료하기는 힘들 것이고, 충격이나 슬픔의 강도가 다를 텐데요. 어떤 방법으로 치료에 나섭니까.
“가장 먼저 배려해야 하고 집중적으로 돌봐야 사람들은 물론 희생자 또는 실종자의 부모와 그 형제자매입니다. 270여 명의 가족을 조사해 보니 부모 500여 명, 미성년자인 형제 150여 명이 집계됐는데 이들이 가장 먼저 관심과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만 최소 3000여 명
―자식을 잃었는데 심리치료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도 많을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을 지내고 조울증을 전공하면서 가족을 잃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가족을 잃은 경위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가족을 잃고 나서 심리치료 지원에 응하는 경우는 10~20%에 불과합니다. 이번에 사고 지원에 나서고 센터를 열면서 30% 정도만 응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희생자 가족 중 상담과 치료에 응하는 비율이 70%에 달합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높은 수치인데요. 다들 심리상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까.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지기도 했죠. 국내에 대형사고가 많았지만 심리치료라는 이슈가 떠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삼풍백화점 사고 때는 생존자나 희생자 가족의 심리치료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언론보도 또는 주변의 지나친 관심과 오해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고요. 대구지하철참사 때 이런 개념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번 세월호 사고로 남은 사람들에 대한 안정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국립서울병원은 2013년 공공정신보건사업단을 발족해 소방관, 사회복지공무원 등 심리적 외상 경험이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심리상담과 치료를 해왔어요. 이런 노하우를 세월호 현장에서 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70%가 상담에 응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집단 트라우마의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 본 결과 직접 가가호호 방문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발인을 마친 희생자 가족 242가구 중 231가구를 우리 상담원들이 직접 방문했어요. 30여 가구는 면담도 상담도 필요 없다고 했고, 40여 가구는 몇 번을 찾아가도 집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혼자 밥해 먹을 기운도 없고 집에 있으면 아이 생각이 나서 집에 있기 싫다며 친척집에 기거하는 분도 많았어요.”
“우리 아이가 얼마나 착하고 예쁜 아이였는지…”
―상담을 가면 유가족들은 주로 어떤 얘기를 하나요.
“대부분 첫 면담엔 아이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합니다. 가족끼리 좋았던 이야기, 재미있었던 이야기가 끝도 없이 나와요. 또 아이가 얼마나 착하고 예뻤는지 이야기만 해도 몇 시간이 지날 정도죠.”
―유가족이 도움을 요청하는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부모가 가장 걱정하는 점은 남은 형제자매입니다. 부모를 위로해 드리러 가면 대부분 ‘저 아이(형제자매) 먼저 상담해 달라’고 요청해요. 자신의 상처보다 남은 아이의 상처를 더 걱정하는 게 부모입니다. 부모는 형제나 자매가 있으니 찢어지는 심정을 마음껏 표현하지도 못합니다. 그런 부모들의 모습이 가장 가슴 아파요.”
―자식 잃은 부모에게 어떤 위로가 힘이 될까요.
“우리나라엔 자식 잃은 부모는 죄인이라는 정서가 있어요. 내 심리적 안정을 얻겠다고 상담을 받고 심리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곤 합니다. 하지만 남은 사람이 잘 살아야 먼저 간 사람의 뜻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이잖아요. 돌아간 사람도 산 사람이 건강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이런 심리치료와 정신건강 회복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사고 후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 현재 유족들의 심리상태는 어떻습니까.
“큰 사고를 겪은 사람은 그 슬픔과 불안이 2~3개월은 지속됩니다. 뉴스로 사고를 접한 국민이라면 2~3주 정도면 어느 정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직접 겪은 사람은 보통 2~3개월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상처가 장기화, 만성화되지 않으려면 이 2~3개월 안에 심리적 안정을 찾거나 심리치료를 해야 합니다.”
―사고의 충격과 슬픔이 보통 2~3개월은 간다는 거죠.
“사고의 충격은 보통 4단계에 걸쳐 진행됩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현실부정 ▲분노 ▲절망과 체념 ▲수용의 4단계를 거치며 상처는 남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됩니다. 현재 유족들과 국민은 분노의 시점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희생자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1~2주가 지나자 현실이 다가왔고, 정부를 비롯한 모든 대상에 대해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거죠. 이 분노가 지나고 나면 절망과 체념, 실의에 빠지는 단계가 옵니다. 이 세 번째 단계를 안정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어요.”
“잘 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하 원장은 심리적 상처의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잠’을 꼽았다.
―상처가 큰데 잠이 잘 오겠습니까.
“당연히 잠이 안 오죠. 그런데 안 자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점점 더 안 좋은 생각에 빠져들어요. 잠을 안 자면 몸이 힘들고 안 자는 그 자체로 우울해지고 불안과 공포, 혼돈이 찾아옵니다. 가장 좋은 회복법은 무조건 자는 겁니다. 제가 사건 초기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 밤이 되면 진도체육관 불을 좀 끄라는 거였어요. 정 잠을 잘 수 없고 TV 뉴스를 봐야겠다는 사람들은 따로 장소를 마련해 주고, 모두들 밤에는 잠을 자야 날이 밝으면 다시 힘을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잠 외에 중요한 것은.
“희생자 가족을 전문상담사가 24시간 지켜주기는 어렵기 때문에, 주변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세 가지입니다. 잠을 잘 재우고, 혼자 두지 말고, 말을 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을 혼자 두면 불안해지고 우울해집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 저런 말 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아요. 무슨 말을 해도 상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을 잃었는데 어떻게 잃었는지 심정이 어떤지 물어보는 게 옳은 일인가요. 또 말하기 싫은데 주변인이 자꾸 말을 시키면 사람을 피하게 됩니다. 혼자 두면 안 된다고 했죠. 그냥 입 다물고 손만 잡아주면 됩니다.”
―유족들에게 계속 말을 거는 기자들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이군요.
“당연합니다. 게다가 쫓아가서 계속 물어보고 하는 건 범죄예요. 상처 난 사람의 상처를 벌리는 행위나 같습니다.”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이 최선의 위로라는 거죠.
“곁에 있어 주면서 상태를 주시해야죠. 정신건강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바로 전문가에게 데려가야 해요. 세 가지만 보면 됩니다. 이번 사고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을 때 유념하세요.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고, 외출을 전혀 안 하고 집에만 머문다면 바로 전문가에게 데려가야 합니다. 보통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수업할 때 아이들을 보면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 내가 이 아이들을 모두 지킬 수 있을까, 살아남은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라는 불안감에 수업에 집중이 안 됩니다.”(교사 B씨)
“세월호 사고 이후 밤이면 중학생 딸이 침몰하는 여객선 속에서 ‘엄마! 엄마!’를 부르짖는 꿈에 시달립니다. 일어나면 눈물로 베개가 젖어 있어요. 언제쯤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주부 C씨)
4월 16일 세월호 사고 이후 ‘트라우마(trauma·의학용어로는 외상을 뜻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정신적 외상 또는 충격을 뜻하는 용어)’라는 단어가 전 국민을 휩싸고 있다. 희생자와 생존자 주변인은 물론 뉴스를 지켜본 모든 국민이 우울과 분노, 실의에 빠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안타까운 선택도 줄을 이었다. 희생자가 가장 많은 단원고의 교감이 자살했고, 학부모 몇 명이 자살을 시도했으며, 심지어 현장 자원봉사자가 “학생들이 불쌍해 견딜 수 없다”며 자살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희생자와 주변인에 대한 심리치료가 절실하다는 여론이 대세다. 트라우마 및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 정신적 외상후 스트레스장애)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까지 나섰다. 하지만 이 같은 ‘재난심리치료’는 아직 국내 학계에서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상태라고 보기는 힘들다. 최근 대형 사건사고가 줄을 잇는 가운데 재난심리치료는 어떻게 진행돼야 할지 《월간조선》이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었다.
보건복지부, 안산에 트라우마센터 설립
경기도 안산시청 옆 단원보건소 본관 옆에는 작은 별관이 있다. 안산 시민들을 위한 ‘안산시 정신보건센터’다. 정신과 전문의 또는 심리치료사 등 전문가로부터 무료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5월 1일 이곳 2층에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가 들어섰다. 세월호 사고로 정신적 충격을 입었거나 우울증,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센터다. 국립서울병원 소속 정신과 의사와 정신전문간호사, 심리치료사 등 전문인력이 상주하며 세월호 관련 피해자 및 시민들의 정신건강 회복을 돕고 있다.
평일 오전 찾은 센터에는 10여 명의 직원이 있었고, 몇 명은 전화로 상담을 하고 있었다. 센터 접수 담당 직원은 “센터 취재는 곤란하다”며 “상담 인력이 안정적인 상담을 할 수 있도록 취재에 응하지 않는 점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안산 전체에 24곳의 심리상담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주로 전화상담이나 상담원의 방문상담이 많고 상담센터나 상담소를 직접 찾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은 편”이라고 말했다. 현재 안산 24개 상담소를 통해 온라인·오프라인으로 접수된 안내 및 상담 건수는 사고 후 1만2000건을 넘어선다.
국립서울병원(舊 국립서울정신병원)은 4월 16일 세월호 사고가 난 지 약 일주일 후인 24일부터 현지에 정신과 전문의와 간호인력 등을 파견해 심리치료와 상담에 나서왔다. 이 밖에도 신경정신학회 등 여러 곳에서 심리상담 지원이 이어지면서 보건복지부는 경기도와 안산시, 대학병원 등으로 흩어져 있던 재난심리치료 기능을 통합해 5월 1일 센터를 발족시키면서 하규섭 국립서울병원장을 센터장으로 임명했다. 하 원장은 “삼풍백화점이나 성수대교 등 대형사고 당시만 해도 생존자나 희생자 가족에 대한 심리치료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지만, 대구지하철참사를 계기로 트라우마 치료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커지고 있다”며 “국민 정신건강을 위해 보건복지부가 통합 심리지원센터를 마련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의 얘기다.
“보통 재난이나 대형사고의 경우 사망자보다 부상자가 많습니다. 부상자들은 병원에 입원・치료하면서 심리치료도 병행합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고는 부상자가 많지 않고 생존자는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 별다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심리치료할 시스템이 시급한 이유죠.”
태안캠프 사고 때도 학교에서 집단트라우마 치유
 |
| 단원고 학생들은 교육부가 학교 내에 설치한 학생정신건강센터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
생존자와 유가족에 대한 심리치료 연구는 세월호 사고를 계기로 급격히 활발해지는 분위기다. 익명을 요청한 한 정신과 의사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실시간으로 죽어나가는 것을 생중계로 보고 있는데 집단 급성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라며 “사고수습이 마무리되는 대로 정부와 언론은 대국민 심리치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보건복지부 안산트라우마센터와 별개로 단원고에는 교육부가 ‘학생정신건강지원센터’를 설치했다. 센터장은 정운선 경북대 소아정신과 교수가 맡았다. 태안 해병대캠프 및 경주리조트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 심리치료를 맡아왔던 인물이다.
정운선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지난해 7월 태안캠프 사고의 생존자들은 1년여에 걸친 심리치료로 겉으로는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번 세월호 사고로 더 예민해지고 상처가 재발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정 교수의 얘기다.
“사고 생존자에게서는 보통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 나타납니다. 친한 지인을 잃었을 경우는 더 심하고 특히 예민한 10대 학생들의 경우 성인에 비해 훨씬 심해요. 일상생활로 돌아가기가 힘들죠. 태안 생존자들 중 몇 명은 지금도 우울증과 스트레스성 장애 치료를 받고 있는데, 이번 사고를 계기로 괜찮아 보였던 학생들에게서 다시 증세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 치료는 1~2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찰과 상담이 필요합니다.”
태안 사고 당시 공주사대부고 학생들은 대부분이 외상후장애에 시달렸다. 학생들은 등교거부를 하기도 하고, 과격해지고, 실언을 하고, 우울증으로 잠만 자는 등 다양한 증상이 나타났다. 정 교수는 의료진 20여 명과 함께 한 달간 학교(공주사대부고)에 상주하며 전교생의 심리치료를 맡았다.
학생과 교사를 일대일로 수차례씩 면담했고, 집단면담도 여러 차례 가졌다. 학부모에게 배려와 전문가 치료를 권하는 가정통신문도 보냈다. 학습진도에 연연하지 않고 수업은 독서나 체육활동으로 대체하도록 했다. 눈물이 나는 학생은 언제 어디서든 실컷 울도록, 주변사람들은 다함께 감싸 안고 위로하도록, 우울감에 말 한마디 없는 학생은 교사와 친구들이 말없이 손을 잡아주도록 했다. 사고 후 전학생이 많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지만, 작년 해당 학년의 전학생은 한 명도 없었다. 집단치유의 힘이었다.
1. 스트레스와 충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역경을 이겨나갈 용기가 있음을 다짐한다. 2. 가벼운 운동을 하고 술과 커피, 담배를 끊어 자신의 몸을 돌본다. 3.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진다. 4. 일상생활로 돌아가되 이사나 이직 같은 큰 결정은 당분간 미룬다. 5. 사고 소식은 정규 뉴스 정도로 충분하다. 재난과정을 반복적으로 보는 일은 피한다. 6. 친한 사람, 감정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들과 어울린다. 7. 아이들이 인터넷과 SNS 등 2차적인 외상에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한다. (자료 :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대한정신건강재단 재난정신의학위원회) |
단원고 학생들 “부모님과 선생님이 걱정돼요”
정운선 교수는 현재 단원고의 상황에 대해 “아이들이 친구를 잃은 자신의 슬픔보다 죄책감이나 주변 배려가 더 앞서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마음은 아직 슬픔이나 분노, 체념 중 어느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복잡한 상태입니다. 남은 친구들끼리 잘 지내다가도 문득 죄책감을 느끼고, 좋은 일이 있어도 웃으면 안 될 것 같고, 동네 어딘가에 기자들이 있을 것 같아 불안해하고요.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보다 주변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어요.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더 걱정해 의사나 상담사에게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많이, 잘 봐달라는 학생들이 많아요.”
친구와 제자를 잃은 학생과 교사의 상처는 물론이고, 싸늘한 제자들의 신원을 확인해야 했던 일부 교사들의 상처도 심했다. 성인으로서, 교사로서 아이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기본이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교사로서 자격이 없다는 자책으로 더욱 우울증에 빠져드는 등 악순환이 이어졌다. 자책감이 심해 심리상담을 거부하는 교사도 많아 정 교수팀은 이들을 상담하고 설득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0대 학생들을 위해 운동과 미술 등 예술치료를 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축구나 농구를 하잖아요. 사고 후엔 왠지 죄책감이 든다며 못 하더라고요. 억지로라도 운동을 시키고 있어요. 탁구부가 유명해 아이들이 자부심을 갖고 있어 전교생 탁구 시간도 마련하고, 미술과 음악 등으로 예술치료를 하는 시간도 마련했습니다.”
정 교수의 얘기다. “생존자나 희생자 주변인에게 가장 먼저 해주어야 할 일은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대부분 웃을 일이 있어도 죄책감에 웃지 못하고 더 우울감에 빠져들게 돼요. 웃을 땐 웃어도 된다, 할 일은 해야 한다, 이게 기본입니다. 학생의 경우 수업도 하고, 동아리 활동도 하고, 운동도 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단원고는 주변에서 걱정할 정도로 침체된 분위기는 아닙니다. 센터 인력들이 학생들 눈높이에 맞춰 노력하고 있어서 학생들도 어느 정도 마음을 열고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있는 분위기예요.”
외상 정도의 분류와 개별치료가 중요
 |
| 유사 경험자들과 함께하는 것은 PTSD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9·11테러 후 뉴욕 심리치료 프로그램에서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 안아주며 위로하고 있다. |
하규섭 국립서울병원장은 “의학적으로 볼 때 ‘고위험군’은 분명히 있지만 그런 말을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써선 안 되고 A그룹, B그룹 등으로 나눠 치료법을 제시하고 몇 명을 모아 집단치료에 나선다”며 “사람마다 슬플 때 대응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심리치료에서는 일대일 개별면담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인제대 부산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정도운 교수는 “정신적 외상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면 ‘외상 후 성장’이라는 정신적 성숙이 일어나 이전보다 더 성숙해진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도운 교수의 얘기다. “사고 후 적절한 치료가 이뤄지고 스스로 잘 극복해 나간다면 아픔을 뛰어넘어 더 사려 깊고 성숙한 인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주변인의 관심과 배려, 전문가 상담과 치료 등이 적절히 이뤄져야 하는데, 이런 재난의 경우 국가가 나서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또 주변인은 생존자나 희생자 가족이 심리치료를 회피하거나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지 않도록 위로하는 동시에 전문가 상담을 독려해야 합니다. 전 국민이 함께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집단트라우마를 치유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그는 사고 후 스트레스를 받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일반 국민들에게는 “웃고 일상을 즐기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말고, 평소 스트레스에 약하다면 뉴스는 어느 정도 피하는 편이 낫다”고 조언했다. “충분히 슬퍼하고 분노했으면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머릿속에서 떠나보내기 어려우면 산책이나 운동, 쇼핑 등 사고를 잊을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데도 증세가 한두 달 이상 호전되지 않거나 증상이 심각하면 즉시 전문가에게 치료를 의뢰해야 합니다.”
차명호 평택대 피어선심리상담대학원장은 일대일 상담을 비롯한 각종 심리치료 방법 중에서도 ▲유사 경험자와 함께하는 집단상담 ▲청소년을 위한 놀이치료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방법이 트라우마 극복에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
그는 “유사 경험자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은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수 있고, 청소년들은 끔찍한 사건이 있어도 자신들만의 놀이를 통해 극복해 나간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또 신경정신과 치료에 동반되는 약물치료에 거부감을 갖지 말고 전문가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됩니다.”
직접적인 정신적 상처를 입은 사람의 치료에는 기본적으로 전문가의 심리치료가 중요하고 그 주변사람들도 치유과정에 함께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사고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에는 ‘말없이 공감하고 들어주기’가 최선으로 꼽혔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채정호 교수는 “비탄이나 애도, 분노가 아주 심하면 자해나 자살로 이어질 수 있는데, 이는 주변인의 힘으로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채 교수의 얘기다. “인명은 재천이라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잊어라, 살 사람은 살아야지 등 어설픈 위로의 말이 가장 위험합니다. 슬픔에 대해 공감해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슬퍼할 때는 슬픔을, 분노할 때는 분노를 함께 해주는 것이 전문가가 아닌 주변인이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129 보건복지부 콜센터(긴급복지, 자살, 알코올중독 상담 등) 1577-0199 정신건강위기상담, 자살예방희망의전화 031-411-7559, 403-4764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 |
해외 전문가 그룹도 한국에
 |
| 세월호 사건으로 심리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안산트라우마센터(031-411-7559)로 문의하면 안내와 상담을 받을 수 있다. |
반면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의 심리안정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전문가들은 지나친 분노와 상호비방을 들었다. 고대안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고영훈 교수의 얘기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을 때 그 결과와 관련해 서로 비난하거나 감정이 격앙돼 분노감을 표출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느 정도의 분노는 표출할 필요가 있지만 상호비방과 비난은 상태를 더 나쁘게 만들어요. 특히 근거 없는 소문을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정신건강을 위해 좋지 않습니다. 분노에 너무 몰두할 경우 사고와 상관없는 쪽으로 생각이 발전하게 되고, 지나친 격앙으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고 교수는 이와 함께 어린 학생들의 경우, 사고와 관련해 지나친 뉴스나 인터넷 노출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어린 학생의 경우 어른과 달리 감정을 컨트롤하기엔 역부족이기 때문에 정확하지 않은 사실로 극도의 분노감과 불신감을 갖게 되는 일은 보호자가 막아줘야 합니다.” 정운선 교수 역시 “어린 아이들이 사고뉴스에 계속 노출될 경우 급성스트레스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가져올 수 있는 만큼 적절히 노출시키고 설명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해외 트라우마 전문가들도 한국을 찾았다. 트라우마 연구에 관한 선진국으로 꼽히는 곳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민간구호기구 ‘이스라에이드’ 의료진은 지난 11일 한국을 찾아 향후 2년간 세월호 트라우마 치료에 나선다고 밝혔다. 이스라에이드는 정신과 교수들로 이뤄진 조직으로, 미국 9·11 테러와 일본 대지진 등 테러와 자연재해 등의 트라우마를 치료해 온 세계적인 심리치료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최근 진도를 방문한 요탐 폴라이저 이스라에이드 아시아지국장은 “이스라엘은 잦은 테러와 전쟁으로 트라우마 치료가 체계화돼 있고 사례도 다양하다”며 “향후 2년 동안 50명의 트라우마 치료 전문가를 파견해 지속적으로 치료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그는 “세월호 사고의 경우 인재(人災)였다는 이유로 일반적인 재난보다 국민들의 분노와 죄책감이 매우 큰 상황”이라며 “민간 차원의 심리치료도 중요하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 국민의 상처 치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미국은 1989년 베트남 참전용사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보훈처 산하에 국립 PTSD센터를 설립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연방재난관리청이 재난관리와 심리치료를 담당하도록 일원화했고, 테러 발생 10년 후까지 피해자들을 관찰 및 조사해 보고서를 만들었다. 미 정부는 9·11 테러 이후 생존자와 경찰, 소방공무원, 구조요원뿐만 아니라 목격자들도 트라우마 치유를 무료로 받을 수 있게 하는 등 심리치료에만 3조원을 쏟아부었다. 뿐만 아니라 사고로 직장생활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등 다각적인 지원을 펼쳤다.
관계자 심리치료도 필요
한편 이번 사고와 관련해 자원봉사자, 공무원, 잠수부, 기자 등의 정신건강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올 초 여당은 소방·경찰 등 위험직 공무원의 정신건강 관리를 국가가 책임지는 법안(정신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도 제출했다. 발제자인 새누리당 강은희 의원은 “이들 공무원은 직무 특성상 화재, 건물붕괴, 살인, 강도, 폭력 등 사건·사고 현장에서 살해당하거나 부상을 입은 피해자들을 목격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동료의 부상이나 사망을 목격함으로써 정신적인 충격에 장기간 반복적으로 노출돼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경찰청은 2010년부터 심리상담제도 도입 및 경찰 트라우마센터 설립을 추진 중에 있고, 소방방재청도 2012년부터 5억85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해 재난심리지원센터를 운영, 공무원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있다. 국방부도 국군수도병원에 PTSD클리닉을 설치해 치료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재난심리지원은 소방방재청이 맡고 심리치료는 보건복지부가 담당하는 등 정신건강 관리가 산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세월호 사고는 전 국민에게 큰 아픔을 남겼다. 사고 후 한 달이 지났지만 실종자가 남았고, 사람들은 슬퍼하고, 분노하고, 우울해하며 상호비방을 하기도 한다. 이 상처를 어떻게 극복하고 ‘외상 후 성장’을 이뤄낼 수 있을지는 우리 모두의 과제다.⊙
[인터뷰]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장 河圭燮
“잠 못 자고 밥 못 먹으면 전문가 상담 반드시 받길”
| 河圭燮 ⊙ 서울대 의학과 졸업·同 대학원 박사. 서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교수. ⊙ 한국자살예방협회 회장, 국제조울증학회 부회장 역임. ⊙ 現 보건복지부 국립서울병원 원장. |
매일 국립서울병원과 안산을 분주하게 오가고 있는 하규섭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장은 신경정신과 중 조울증이 전공이다. 서울대 의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자살예방학회장과 국제조울증학회 부회장을 지냈고, 보건복지부가 1962년 국민 정신건강을 위해 설립한 국립서울병원의 병원장으로 2013년 파견됐다. 그는 간간이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며 《월간조선》 인터뷰에 응했다. 정신과 의사와 기자는 공통점이 있다. 남의 이야기를 가감 없이 자세히 들어야 하고 공감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친 몰입은 업무를 방해한다.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데서 끝내야지 옳고 그름을 판단해선 안 된다.
세월호 사고를 취재하는 기자들은 슬픔과 울분의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업무에 임하고 있다. 희생자들의 주변인을 상담 및 치료해 주고 있는 정신과 의사도 마찬가지다. 하 원장은 가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지만, 인터뷰 내내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며 현황을 설명했다.
―현재 센터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가 무엇입니까.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 친지와 친구 등 희생자 또는 생존자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 심리적 상처가 큰 사람들을 찾아 심리적 안정을 찾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입니다. 단원고 학생과 교사의 심리치료는 교육부가 학생정신건강지원센터에서 맡아 하고 있고요.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는 학생의 가족들, 주변인들을 직접 찾아 치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희생자 가족들이 스스로 상담센터를 찾을 겨를이 없을 듯한데, 구체적으로 센터가 어떤 일을 하는지요.
“일단 희생자 주변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희생자가 270여 명이면 그 부모가 500여 명이죠. 형제자매를 포함하면 더 많고요. 또 근로자가 많은 이 지역 특성상 조부모, 외가, 삼촌, 고모 등 친척들이 가까운 거리에 모여 사는 경우가 많다 보니 희생자의 친지가 최소한 1000여 명입니다. 또 희생자들이 대부분 학생이다 보니 그들에겐 친구와 선후배, 이성친구 등등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또래 집단이 1인당 최소한 4~5명은 됩니다. 이 인원이 또 1000여 명이죠. 게다가 한 동네에 희생자가 몰려 있다 보니 희생자나 그 부모를 잘 아는 주변 상인들, 이웃들도 엄청나게 많아요. 또 그 학교에 가야 할 초등 및 중학생들까지 하면 직접 심리적 외상을 입은 인원이 최소 3000여 명에 달합니다.”
―3000여 명을 다 치료하기는 힘들 것이고, 충격이나 슬픔의 강도가 다를 텐데요. 어떤 방법으로 치료에 나섭니까.
“가장 먼저 배려해야 하고 집중적으로 돌봐야 사람들은 물론 희생자 또는 실종자의 부모와 그 형제자매입니다. 270여 명의 가족을 조사해 보니 부모 500여 명, 미성년자인 형제 150여 명이 집계됐는데 이들이 가장 먼저 관심과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들만 최소 3000여 명
―자식을 잃었는데 심리치료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반응도 많을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을 지내고 조울증을 전공하면서 가족을 잃은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가족을 잃은 경위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가족을 잃고 나서 심리치료 지원에 응하는 경우는 10~20%에 불과합니다. 이번에 사고 지원에 나서고 센터를 열면서 30% 정도만 응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희생자 가족 중 상담과 치료에 응하는 비율이 70%에 달합니다.”
―믿기 힘들 정도로 높은 수치인데요. 다들 심리상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까.
“시대가 변하면서 달라지기도 했죠. 국내에 대형사고가 많았지만 심리치료라는 이슈가 떠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삼풍백화점 사고 때는 생존자나 희생자 가족의 심리치료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언론보도 또는 주변의 지나친 관심과 오해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고요. 대구지하철참사 때 이런 개념이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번 세월호 사고로 남은 사람들에 대한 안정과 치료가 필요하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국립서울병원은 2013년 공공정신보건사업단을 발족해 소방관, 사회복지공무원 등 심리적 외상 경험이 있는 분들을 대상으로 심리상담과 치료를 해왔어요. 이런 노하우를 세월호 현장에서 응용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70%가 상담에 응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집단 트라우마의 경험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 본 결과 직접 가가호호 방문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발인을 마친 희생자 가족 242가구 중 231가구를 우리 상담원들이 직접 방문했어요. 30여 가구는 면담도 상담도 필요 없다고 했고, 40여 가구는 몇 번을 찾아가도 집에 사람이 없었습니다. 혼자 밥해 먹을 기운도 없고 집에 있으면 아이 생각이 나서 집에 있기 싫다며 친척집에 기거하는 분도 많았어요.”
“우리 아이가 얼마나 착하고 예쁜 아이였는지…”
―상담을 가면 유가족들은 주로 어떤 얘기를 하나요.
“대부분 첫 면담엔 아이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합니다. 가족끼리 좋았던 이야기, 재미있었던 이야기가 끝도 없이 나와요. 또 아이가 얼마나 착하고 예뻤는지 이야기만 해도 몇 시간이 지날 정도죠.”
―유가족이 도움을 요청하는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부모가 가장 걱정하는 점은 남은 형제자매입니다. 부모를 위로해 드리러 가면 대부분 ‘저 아이(형제자매) 먼저 상담해 달라’고 요청해요. 자신의 상처보다 남은 아이의 상처를 더 걱정하는 게 부모입니다. 부모는 형제나 자매가 있으니 찢어지는 심정을 마음껏 표현하지도 못합니다. 그런 부모들의 모습이 가장 가슴 아파요.”
―자식 잃은 부모에게 어떤 위로가 힘이 될까요.
“우리나라엔 자식 잃은 부모는 죄인이라는 정서가 있어요. 내 심리적 안정을 얻겠다고 상담을 받고 심리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조차 스스로 용납하지 못하곤 합니다. 하지만 남은 사람이 잘 살아야 먼저 간 사람의 뜻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이잖아요. 돌아간 사람도 산 사람이 건강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걸 원치 않을 겁니다. 이런 심리치료와 정신건강 회복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임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사고 후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 현재 유족들의 심리상태는 어떻습니까.
“큰 사고를 겪은 사람은 그 슬픔과 불안이 2~3개월은 지속됩니다. 뉴스로 사고를 접한 국민이라면 2~3주 정도면 어느 정도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만 직접 겪은 사람은 보통 2~3개월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상처가 장기화, 만성화되지 않으려면 이 2~3개월 안에 심리적 안정을 찾거나 심리치료를 해야 합니다.”
―사고의 충격과 슬픔이 보통 2~3개월은 간다는 거죠.
“사고의 충격은 보통 4단계에 걸쳐 진행됩니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현실부정 ▲분노 ▲절망과 체념 ▲수용의 4단계를 거치며 상처는 남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됩니다. 현재 유족들과 국민은 분노의 시점에 있다고 보면 됩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희생자가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1~2주가 지나자 현실이 다가왔고, 정부를 비롯한 모든 대상에 대해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거죠. 이 분노가 지나고 나면 절망과 체념, 실의에 빠지는 단계가 옵니다. 이 세 번째 단계를 안정적으로 극복하지 못하면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어요.”
“잘 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
하 원장은 심리적 상처의 회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잠’을 꼽았다.
―상처가 큰데 잠이 잘 오겠습니까.
“당연히 잠이 안 오죠. 그런데 안 자면 무슨 생각을 합니까. 점점 더 안 좋은 생각에 빠져들어요. 잠을 안 자면 몸이 힘들고 안 자는 그 자체로 우울해지고 불안과 공포, 혼돈이 찾아옵니다. 가장 좋은 회복법은 무조건 자는 겁니다. 제가 사건 초기 가장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 밤이 되면 진도체육관 불을 좀 끄라는 거였어요. 정 잠을 잘 수 없고 TV 뉴스를 봐야겠다는 사람들은 따로 장소를 마련해 주고, 모두들 밤에는 잠을 자야 날이 밝으면 다시 힘을 낸다고 생각했습니다.”
―잠 외에 중요한 것은.
“희생자 가족을 전문상담사가 24시간 지켜주기는 어렵기 때문에, 주변인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세 가지입니다. 잠을 잘 재우고, 혼자 두지 말고, 말을 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을 혼자 두면 불안해지고 우울해집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위로한답시고 이런 말 저런 말 하는 건 도움이 되지 않아요. 무슨 말을 해도 상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을 잃었는데 어떻게 잃었는지 심정이 어떤지 물어보는 게 옳은 일인가요. 또 말하기 싫은데 주변인이 자꾸 말을 시키면 사람을 피하게 됩니다. 혼자 두면 안 된다고 했죠. 그냥 입 다물고 손만 잡아주면 됩니다.”
―유족들에게 계속 말을 거는 기자들은 나쁜 짓을 하는 것이군요.
“당연합니다. 게다가 쫓아가서 계속 물어보고 하는 건 범죄예요. 상처 난 사람의 상처를 벌리는 행위나 같습니다.”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이 최선의 위로라는 거죠.
“곁에 있어 주면서 상태를 주시해야죠. 정신건강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는 바로 전문가에게 데려가야 해요. 세 가지만 보면 됩니다. 이번 사고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을 때 유념하세요.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고, 외출을 전혀 안 하고 집에만 머문다면 바로 전문가에게 데려가야 합니다. 보통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