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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년 1월호

김영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 제1분과위원 朴寬用

“前 정권의 對北 비밀접촉 내용까지도 인수받아야”

글 : 裵振榮 월간조선 기자  
사진 : 徐炅利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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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정부에서 북한과 비밀리에 접촉했던 내용들에 대해서까지 확실하게 인계를 받았으면 합니다. 과거 남북 간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를 모르고서는 북한과 대화를 하기 어렵습니다. 실패했으면 실패한 대로 정부가 북한과 접촉하거나 정책을 추진했던 내용들을 인수받아야 합니다”

박관용
75세. 동아대 정치학과 졸업. 한양대 행정대학원 박사. 국회 전문위원, 11~16대 국회의원,
남북국회회담 대표, 대통령비서실장, 국회 외무통일위원장, 신한국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부총재·총재권한 대행, 제16대 국회의장 역임. 現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이사장.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은 김영삼(金泳三) 민주자유당 후보였다. 줄곧 야당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990년 1월 3당 합당(合黨)을 통해 여당으로 변신한 그는 치열한 당내 투쟁 끝에 대통령 후보 자리를 쟁취했고, 결국 대통령이 됐다.
 
  그의 당선은 전통 여당 내에서의 정권 이양이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정권으로 이어지는 30년간의 군부(軍部) 출신 대통령 시대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김영삼 당선자 스스로도 자신의 정부는 ‘문민(文民)정부’임을 되풀이 강조했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가 구성되기는 했지만, 이런 의미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인수위원회가 사실상 첫 번째 인수위원회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출범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구성은 묘했다. 위원장을 맡은 정원식(鄭元植)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인수위원 대부분이 김영삼 직계(直系)가 아니었다. 대개는 민정계(民正系)였다가 당내 후보 결정 과정에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에게 줄을 선 사람들이었다. 그 때문인지 인수위는 철저하게 실무적인 역할만 수행했다.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은 인수위에서 외무부·국방부·통일원·안기부 등을 담당하는 제1분과위 위원을 맡았다. 그는 이후 김영삼 정권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인수위에서 다루었던 국정과제들이 어떻게 실천에 옮겨지는지를 지켜볼 수 있었다.
 
 
  “‘100일 계획’, 서류상으로 그친 것 많아”
 
  —인수위는 어떻게 운영되었습니까.
 
  “후일 다른 정권의 인수위와 비교할 때, 실무 중심으로 운영되었어요. 각 부처에서 국장급 공무원을 한 명씩 파견받아서 자료나 받아보는 수준이었습니다. 요즘처럼 장관을 불러서 호통치거나, 점령군처럼 구는 분위기는 아니었습니다.
 
  인수위는 새 정부가 들어선 후 당장 해야 할 정책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각 부처별로 시정해야 할 현안 문제들을 살펴보는 데 주력했습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새 정부 출범 후 100일 동안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일들을 정리한 ‘100일 계획’이었습니다.”
 
  —사실상 첫 번째 인수위원회였는데, 인수위 운영에서 참고한 모델이 있습니까.
 
  “역시 미국의 인수위원회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김무성(金武星)씨의 인수위 행정실에서 미국 인수위에 관한 자료를 만들어 돌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00일 계획’도 미국의 예(例)를 본뜬 것이고요.”
 
  —인수위는 어떤 사람들이 중심이 됐습니까.
 
  “대통령 선거에서 앞장서 일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됐고, 전문가들이 많이 모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인수위는 전문위원, 자문위원회까지 뒀지만, 우리 때는 규모가 작았어요.”
 
  —‘100일 계획’은 얼마나 구체성이 있는 것이었습니까.
 
  “솔직히 중요한 어젠다를 선정해 나열한 정도였고, 바로 정책으로 옮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1분과위 사무는 아니지만, 인수위에서 실명제(實名制)를 상당히 구체적으로 논의했어요. 나중에 실명제를 실시하고 보니 실명제 실시 이후에 대한 대비가 부족한 게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나중에 비서실장의 관점에서 ‘100일 계획을 보니 어떻던가요.
 
  “참고는 됐는데, 경험 부족한 사람들이 만들다 보니 프로그램대로 진행되지 않는 걸 느꼈습니다. 각 부처 장관들이 얘기하는 것이 우선시되고, 나중에 수석비서관들이 새로 들어오고 하면서, 결국 서류상으로 그친 것도 많았습니다.”
 
 
  외무부 해외공관 축소 추진
 
  —30년 만에 문민 대통령이 등장하는 사실상의 정권교체여서 관료들이 상당히 긴장했을 것 같은데요.
 
  “그렇죠. 노태우 정부가 출범할 때에도 대통령취임준비위원회가 구성되기는 했지만, 우리 인수위가 사실상 첫 번째 인수위였다고 할 수 있지요. 군정(軍政)종식이라는 의미와 정신을 각 부처에 어떻게 불어넣을 것인가를 많이 생각했어요. 새 정부를 문민정부로 부르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지요.”
 
  —‘문민정부’라는 작명(作名)은 어떻게 하게 된 건가요.
 
  “인수위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논의해 결정한 것은 아니고, YS가 개인적으로 만나 자문(諮問)하던 한완상(韓完相·YS정부에서 통일부총리 역임), 김정남(金正男·YS정부에서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 역임), 김덕(金悳·안기부장 역임), 이런 분들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지, 굳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고 이름 붙일 필요가 있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들겠지만, 당시는 군정종식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어요. 그전에는 3공화국, 5공화국 이런 표현을 썼는데, 정통성 없는 정부를 두고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1분과위에서는 어떤 업무에 주력했습니까.
 
  “외무부와 국방부 업무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외무부의 경우 냉전(冷戰)시대에 유엔에서 북한과 대결하기 위해 과다하게 많이 만들었던 해외공관을 줄이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공관 현황과 업무실적을 보고받으면서, 공관을 어떻게 줄일 것인가를 연구했습니다. 통일부는 적극적인 대북(對北)정책을 편다는 방향은 정해져 있었지만, 업무 인수 과정에서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국방부는 역시 하나회 문제가 가장 중요했어요.
 
 
  “안기부가 제일 위축”
 
김영삼 정권의 본격적인 정부조직 개편은 정권이 출범하고 1년10개월이 되어서야 단행됐다. 1994년 12월 3일 종합청사에서 황영하 총무처 장관이 정부조직 개편을 발표하고 있다.

  군부 개혁에 대한 얘기를 듣기 위해 만났던 최모 예비역 중장은 ‘전쟁이 나면, 나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나가서 싸울 거요. 총을 받으면 총알을 장전한 후, 먼저 하나회 장교들을 쏜 후 북진(北進)하겠소’라고 말하더군요.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하나회에 대해 아는 것은 《월간조선》 등에서 관련 기사를 읽은 게 전부였어요. ‘도대체 하나회가 어떤 조직이냐?’고 물었더니, 최 장군은 ‘하나회가 군(軍)을 망쳤다’면서 하나회의 폐해를 낱낱이 얘기해 주더군요. 위관(尉官)급 장교도 만났는데, 그도 하나회의 문제점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나는 비공개적으로 김영삼 당선자를 만나 ‘군내(軍內)에 하나회라는 것이 있는데 아주 문제가 많은 것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김 당선자는 ‘그에 대해서는 나도 잘 듣고 있다’면서 ‘그 문제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논의하지 않도록 하라’고 하더군요.”
 
  —인수위 업무보고 시 군의 분위기는 어떠했습니까.
 
  “군인들이 굉장히 긴장해 있었어요. 군사정부에서 문민정부로 넘어왔으니 장차 군을 괄시하거나 소외되는 것은 아닌가, 국방이 소홀해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분위기가 느껴졌어요.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에 군 인사들을 많이 만나, 군을 격려했어요. 정권 초기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 때인데도, 3군사관학교 졸업식을 다 참석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김영삼 대통령은 이렇게 군부를 달래는 한편, 취임 직후 하나회 출신 김진영(金振永)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徐完秀) 기무사령관을 경질하는 등 하나회 숙정(肅正)을 단행했다.
 
  —인수위 시절, 중학 친구인 김진영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만나 군부 동향에 대해 얘기를 듣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럴 시간이 없었어요. 내가 하나회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김진영 장군을 만나면 그 얘기를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고…. 그리고 김진영 장군은 정치인들과 만나 어울리고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전두환과 휩쓸리기는 했지만 철저한 군인이었어요.”
 
  —안기부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1분과위에서 담당한 부처들 가운데 안기부가 제일 위축되어 있었어요. 김영삼 당선자는 일찍부터 ‘안기부는 대북·대공(對共) 업무에만 전념하라’, ‘정치권과 행정부 출입 요원들을 없애라’, ‘안기부로부터 대북·대공 업무 이외의 보고는 받지 않겠으니, 보고하지 말라’는 원칙을 천명했어요. 인수위에 온 안기부 국장급 간부는 변명하기에 바쁘더군요.”
 
  —인수위원회에서 정부조직 개편을 논의하지는 않았습니까.
 
  “인수위 시절 김영삼 당선자가 노태우 대통령에게 건의해서 문화부와 체육부를 문화체육부로, 상공부와 동력자원부를 상공자원부로 통합하는 정부조직 개편을 했어요. 그런데 각 부처마다 국회의원들에게 로비를 하는 바람에 국회에서 이걸 통과시키는 데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때문에 YS는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정부조직 개편하느라 국회와 승강이를 벌이다가는 아무 일도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실제로 YS는 취임 후 한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의사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인수위에서도 YS의 그런 생각을 읽고 있어서 더 이상의 정부조직 개편은 건의하지 않았습니다.”
 
 
  비밀리에 정부조직개편안 만들어
 
1993년 2월 22일 박관용 대통령비서실장 내정자가 최창윤 민자당 대표 비서실장(오른쪽)으로부터 업무를 인수받고 있다.

  김영삼 정부의 정부조직 개편은 1994년 12월에야 단행됐다. 이에 대해 박관용 전 의장은 “정부조직 개편은 내가 강력히 주장해서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비서실장으로 있으면서 서울대 행정학과 교수인 박동서 행정쇄신위원장 등과 자주 만나서 정부조직 개편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런데 그해 11월 김영삼 대통령이 APEC회의에 다녀온 후 ‘세계화(世界化)’를 제창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선언 이후 나는 ‘세계화를 말씀하셨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부조직을 개편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어요. 대통령은 ‘당신은 자꾸 정부조직 개편을 하자는데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고 짜증스럽게 묻더군요. ‘준비된 게 있는데 보여드릴까요?’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요. 사실 나는 유능한 공무원 다섯 명을 선발해 정부조직 개편방안을 연구하도록 하고 있었어요. 극비리에 두 달에 걸쳐 만들어놓았던 정부조직 개편안을 대통령께 갖다 드렸더니, 며칠 동안 검토한 후 그렇게 하자고 하더군요.”
 
 
  “인수위는 정책집행기구가 아니다”
 
  —인수위와 관련해 앞으로 고쳐나가야 할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근래 만들어졌던 인수위는 국정과제를 선정하면서 과거보다 정책공약(公約)을 훨씬 많이 나열하는 느낌이 듭니다. 정치권이 신뢰받지 못하는 것이 공약이 공약(空約)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수위는 대선 때 공약했던 내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무엇이 걸림돌이고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을 중심으로 국정과제를 선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정부가 과거 공약들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이유들도 살펴보면 좋을 것입니다.
 
  아까 인수위 얘기를 하면서 ‘100일 계획’에 구체성이 약했던 게 아쉽다고는 했지만, 사실 인수위가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구체화하는 것은 새 정부가 들어선 후에 하고, 인수위는 새 대통령이 해야 할 정책의 우선순위를 설정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박관용 전 의장은 “인수위는 글자 그대로 정부 업무의 인수에 중점을 두어야지 새로운 정책집행기구로 활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을 박았다.
 
  “점령군처럼 앞 정부의 관료들을 불러다 놓고 과거 문제를 질타하는 것은 인수위 범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인수위는 미래기획위원회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인수인계하는 위원회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통일 문제에 천착해 온 입장에서 인수위원회가 특히 챙겼으면 하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앞 정부에서 북한과 비밀리에 접촉했던 내용들에 대해서까지 확실하게 인계를 받았으면 합니다. 과거의 사례를 보면, 비공개리에 북한과 대화한 게 많아요. 그런데 그게 다음 정부로 인계되지 않고 있어요. 우리도 노태우 대통령 시절에 박철언(朴哲彦) 정무장관이나 서동권(徐東權) 안기부장이 북한과 비밀접촉을 했던 내용들을 전혀 인계받지 못했어요. 2007년 제2차남북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NLL 발언을 둘러싼 논란에서 보듯, 과거 남북 간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를 모르고서는 북한과 대화를 하기 어렵습니다. 역대 정부가 대북정책에서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았던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실패했으면 실패한 대로 정부가 북한과 접촉하거나 정책을 추진했던 내용들을 인수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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