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 대한제국 정부는 일제의 독도 침탈 사실을 언제 알게 되었는가? 또 일본정부는 언제 이 사실을 대한제국 정부에 통보해 주었는가?
A : 대한제국 정부는 1906년 3월 27일까지도 일본의 독도 침탈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국 측이 일본정부의 ‘독도’ 침탈과 일본으로의 ‘영토 편입’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06년 3월 28일이었다. 알게 된 과정도 일본정부가 대한제국 정부에 조회해 오거나 통보해 온 것이 아니다. 일본의 시마네현 오키시마사(隱岐島司) 일행이 독도를 시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울릉도에 들러 울도군수 심흥택(沈興澤)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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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시마 신서(神西) 일행이 울릉도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1906년 3월). 오른쪽 기와집 지붕 위에 태극기가 보인다. |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렇게 간접적으로 알린 방식과 시기이다. 일본정부는 1905년 2월 독도 영토 편입 당시 대한제국 정부에 조회 또는 통보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06년 말에도 대한제국 중앙정부에 통보하지 않았다. 시마네현 말단 지방관리의 간접적인 말을 통해 울도군수에게 알린 것뿐이었다. 일본정부의 이런 방식은 독도 침탈이라는 중대한 사실을 대한제국 정부가 가능한 한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사건으로 처리하게 하고, 또 현지 지방관이 항의하는 경우에도 이를 일제 통감부가 사소한 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하여 대한제국 중앙정부에 알리는 것을 극력 회피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073]
Q : 일본이 ‘독도’를 영토에 편입한 사실을 1906년 3월 말 울도군수에게 통보한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A : 일본이 1906년 3월 말을 택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일제는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조약 체결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일제는 곧바로 무력으로 조선 궁궐을 위협하여 1905년 11월 17일 그들이 초안한 ‘을사5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조약 내용의 요점은 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일본이 한국외교권을 행하고 ② 일제 통감부를 서울에 설치하여 한국의 정치 일반을 감독한다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조약체결권자인 황제 고종은 ‘을사조약’의 승인과 서명 날인을 끝까지 거절하여 국제법상 이 조약은 성립되지 않은 무효임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무력으로 이를 강제 집행했다. 일제는 1905년 12월 20일 ‘한국통감부 및 이사청 관제’를 공포했다. 이어 대한제국 외부(외무부)가 1906년 1월 17일 완전히 폐지됐다. 1906년 2월 1일에는 서울에 일제통감부가 설치됐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통감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일본 측은 이상과 같은 조치를 한 후 이러한 시간표에 맞추어 1906년 3월 28일 시마네현 오키시마사라는 지방관을 통해 울도군수 심흥택에게 독도를 일본에 ‘영토 편입’한 사실을 누출시킨 것이었다. 울도군수 심흥택이 이것을 중앙정부에 보고하더라도 대한제국의 중앙정부는 일본통감부의 지배하에 있어 대한제국이 일본정부에 외교적으로 항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외교권을 가진 일제는 대한제국이 항의서조차 제출할 수 없도록 완벽히 준비한 후, 1906년 3월을 택해 일본의 독도 침탈 정보를 누출한 것이었다.
[074]
Q : 울도군수 심흥택은 1906년 3월 울도를 방문한 일본 관리들로부터 ‘독도’를 ‘영토 편입’했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대응했는가?
A : 심흥택은 그들이 떠나자마자 이튿날인 1906년 3월 29일(음력 3월 5일) 그의 직속 상관인 강원도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은 긴급 보고를 올렸다.
<<鬱島郡守 沈興澤의 報告書>>(1906년 3월 29일)
本郡所屬 獨島가 在於本部外洋百餘里許이옵더니 本月初四日 辰時量에 輪船一隻이 來泊于島內道洞浦而 日本官人一行이 到于官舍하야 自云獨島가 今爲日本領地故로 視察 次來島였다이온바 其一行則 日本島根縣隱岐島司東文輔及 事務官神西由太郞 稅務監督 局長吉田平吾 分署長警部 影山岩八郞 巡査一人 會議員一人 醫師技士各一人 其外隨員 十餘人이 先問戶摠人口土地多少하고 次問人員及經費幾許 諸般事務를 以調査樣으로 錄去이압기 玆以報告하오니 照亮하심을 伏望.
光武十年丙午 陰三月 伍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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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관찰사 서리가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서를 전재하여 참정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와 그에 대한 참정대신의 지령문. 울도군수 심흥택은 이 보고서에서 “본군 소속 독도가”라고 하여 독도가 자신의 통치지역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 참정대신은 “일본의 독도 영지설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일본 주장에 항의하고 비판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
심흥택의 보고에서 주목할 것은 “본군 소속 독도가 본부 외양 백여리허에 있삽더니…”라고 해 독도가 자기의 통치군(본군)인 울도군 소속임을 명확히 밝혀 항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흥택은 독도가 울도군 소속임을 명확히 규정해 대한제국 영토이고 자기의 행정책임군인 울도군에 속한 영토임을 명확히 천명한 것이었다. 심흥택은 그다음에 일본인 관리 일행이 자기 관사를 찾아와서 “독도가 이제 일본 영지가 되었기 때문에 시찰차 내도했다”고 말한 것은 일본 측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한 ‘억지주장’이라는 뜻을 담아서 그가 승복하지 않음을 명확히 나타냈다.
[075]
Q : 대한제국 중앙정부의 내부대신은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받은 후 어떻게 반응했는가?
A : 당시 대한제국 내부대신은 지령문을 통해 독도가 일본 속지라고 운운한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며 단호히 부정하고 항의의 뜻을 명백히 했다. 내부대신은 지령문에서 “유람하는 길에 토지면적과 인구를 기록해 가는 것은 괴이함이 없다고 혹시 용납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독도가 일본 속지라고 칭하여 운운하는 것은 전혀 그 이치가 없는 것이니, 이제 보고받은 바가 매우 아연실색할 일이라(遊覽道次에 地界戶口之錄去는 容或無怪어니와 獨島之稱云日本屬地는 必無其理니 今此所報가 甚涉訝然이라)”고 강조했다.
대한제국 내부대신의 지령문은 일본의 주장이 ‘전혀 이치가 없는 것’이라고 단호하게 거부하고 일본의 무리한 침략에 경악해 항의할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은 친일파 대신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독도 침탈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한 것이었다.
[076]
Q : 대한제국 중앙정부의 참정대신은 강원도관찰사 서리의 보고를 받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A : 대한제국 참정대신도 일본이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 영지로 편입시켰다는 보고를 받고 “올라온 보고를 다 읽었고 독도가 일본 영지 운운한 설은 전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에 속하나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이 어떠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다시 조사하여 보고할 것(來報는 閱悉이고 獨島領地之說은 全屬無根하나 該島 형편과 日人 여하행동을 更爲査報할 사)”이라고 지령했다. 대한제국 참정대신도 일본 주장을 일축하면서 독도의 상황과 당시 일본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다시 조사해 보고하라고 지령한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 참정대신 또한 ‘을사5적’의 한 명인 친일파 박제순(朴齊純)이었다. 그 또한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강력히 반대했고, 독도의 형편과 일본인들의 동태를 조사·보고하라고 명령한 것이었다.
[077]
Q : 당시 여론은 어떠했는가? 당시의 신문들은 일본의 독도 침탈, 영토 편입을 어떻게 보도하고 어떻게 평론했는가?
A : 당시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대사령부와 통감부는 한국 신문들에 대한 사전·사후 검열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롭게 이를 보도하고 논평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표적 신문인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일본의 독도 침탈에 항의를 하고 이를 비판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6년 5월 1일자 잡보란에서 ‘無變不有(變이 있다라는 뜻)’라는 제목으로 울도군수 심흥택이 내부에 보고한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인용·보도하면서 일본의 독도 침탈을 비판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변(變)이 있다’고 한 제목이다. 국민(독자)들에게 ‘변’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다음으로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를 인용하면서 “울도군 소속 한국 속지인 독도를 일본 관원 일행이 일본 속지로 자칭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대한매일신보》는 독도가 한국 영토로 울도군에 속해 있는 섬인데 일본 관리가 일본 영토라고 자의로 칭하고 있다고 비판·보도하여 항의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독도를 일본 속지라고 칭하여 말한 것은 전혀 이치가 없는 것으로서 이번 보고한 바가 참으로 아연실색할 뿐”이라고 한 대한제국 내부의 지령문을 인용해 일본정부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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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은 일제의 독도 침탈 시도에 대한 항의 표시로 ‘잡보(雜報)’란의 독도 침탈 시도에 대한 기사의 표제 활자 크기를 평소보다 4배로 키워 보도했다. |
《황성신문》은 1906년 5월 9일자 잡보란에서 ‘울쉬보고내부’( ·울도군수의 내부 보고)라는 제목의 활자 크기를 평소보다 4배로 키워 일제의 독도 침탈 시도를 단호하게 부정했다. 《황성신문》은 울도군수 심흥택의 보고에 있는 ‘본군(울도군) 소속 독도’를 주목하게 해서 독도가 울도군에 속해 울도군수 심흥택의 관리를 받고 있는 ‘대한제국 영토’임을 강조했다. 이어 《황성신문》은 일본 관리 일행이 울도군수 관사를 찾아와서 “자의로 말하기를(自云) 독도가 이제 일본 영지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고 한 부분을 지목한 후 “일본이 이제 막 독도를 침탈해서 일본 영토로 만들고 있다”고 했다.
당시 일본군 헌병대사령부와 통감부의 삼엄한 검열제도 속에서도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은 일제의 독도 침탈 시도를 간접적 방법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항의한 것이었다.
[078]
Q : 당시 대한제국 국민들과 지식인들은 이 보도를 읽고 어떻게 반응했는가?
A : 1906년 당시는 일제의 ‘을사5조약’ 강제집행과 국권침탈에 대항해 국민들이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과 항일의병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은 일제의 독도 침탈을 국권 침탈 시도로 보고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행위를 비판한 지식인으로는 매천(梅泉) 황현(黃玹)을 들 수 있다. 그는 《오하기문》(梧下記聞)과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일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울릉도 100리밖에 한 속도가 있어 독도라고 부르는데, 왜인이 이제 일본 영지가 되었다고 심사하여 갔다”고 기록했다.
이어 <매천야록>에서는 “울릉도의 바다로부터 거리가 동쪽으로 100리에 한 섬이 있어 울릉도에 구속했는데, 왜인이 그 영지라고 늑칭(勒稱)하고 심사하여 갔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독도가 그때까지는 울릉도에 구속(舊屬·예부터 속한)한 섬”이라고 하여 대한제국 영토임을 명확히 밝힌 점과, 이어 “왜인이 그 영지라고 늑칭했다”고 한 대목이다. ‘늑칭’은 ‘강제로 칭했다’ ‘억지로 칭했다’ ‘부당하게 칭했다’는 뜻이 모두 들어 있는 용어다.
일본이 독도를 침탈한 사실을 한국정부와 국민들은 1년2개월 후에야 간신히 알게 되었다. 늦었지만 대한제국 정부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당시 언론기관들, 국민과 지식인들은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한 대한제국 영토이고, 독도를 일본으로 ‘영토 편입’한 것은 강제 침탈이다”는 사실을 당시에 명백히 지적해 항의했던 것이다.
[079]
Q : 1906년 이후 ‘독도’는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
A : 대한제국 정부와 당시 한국 국민들은, 대한제국 외부(외무부)가 1906년 1월 17일에 이미 폐지되어 버렸고 일제 통감부가 한국 외교와 내정을 지휘 감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의 독도 침탈에 대해 항의와 항론을 폈을 뿐이지 ‘항의 외교문서’를 일본정부와 국제사회에 제출할 통로와 기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한반도 전체를 식민지로 강점하려 했고, 그 첫 작업으로 독도를 침탈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국민들은 한반도 전체가 일제에 의해 침탈당하는 상황에서 독도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