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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1년 4월호

鄭浩承 - 《전태일 평전》 조영래 著

우리나라 노동자의 아버지 全泰壹의 삶과 꿈

글 : 鄭浩承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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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浩承
⊙ 60세.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밥값》,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등 발간.
⊙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이상화시인상 등 수상.
  <쓰러진 짚단을 일으켜 세우고
  평화시장에서 돌아온 저녁
  솔가지를 꺾어 군불을 지피며
  솔방울을 한 줌씩 집어던지면
  아름다운 국화송이를 이루며 타오르는 사람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하늘과 가까워져
  이제는 새벽이슬이 내리는 사람>
 
  위의 시는 ‘전태일’이라는 제목으로 쓴 나의 시다. 나는 이 시를 무척 아낀다. 몇 행 되지 않는 짧은 시이지만 내가 ‘전태일’을 노래한 시는 이 한 편뿐이다. 이 시는 80년대 초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1983년 6월 5일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을 읽은 게 그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초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에 의해 우리 현대사가 거대한 격동의 물꼬를 뒤틀 때였다. 당시 청년기를 보내고 있던 나는 그 격동의 밤에 이 책을 읽으며 지냈다. 나와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난 동시대인이지만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산 한 거룩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나도 전태일처럼 가치 있는 인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태일은 나보다 두 살 위이고 고향도 나와 같았다. ‘내가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와 대학을 다니는 동안, 전태일은 일찍이 서울로 와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면서 살았구나’하는 생각에 내 가슴 한편은 늘 무너져내렸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분신으로, 살신성인의 그 고귀한 자세로 스물두 해의 삶을 마감했다는 사실 앞에 늘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70년대가 다 저물 때까지 그 유신 독재정치 속에서 전태일이라는 이름만 알았지 그가 왜 분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제대로 모르고 살았다. 아니, 80년대 초까지, 그러니까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전태일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하여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의 죽음이 우리 현대사에 어떠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알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그를 알게 되었으며, 그의 성자적 죽음 앞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특히 그가 분신에 임박하여 쓴 글은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사랑하는 친우여, 받아 읽어 주게/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 주게/ 그리고 바라네. 그대들 소중한 추억의 서재에 간직하여 주게/ 뇌성 번개가 이 작은 육신을 태우고 꺾어 버린다 해도/ 하늘이 나에게만 꺼져 내려온다 해도/ 그대 소중한 추억에 간직된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을 걸세/ 그리고 만약 또 두려움이 남는다면 나는 나를 영원히 버릴 걸세/ 그대들이 아는, 그대의 영역의 일부인 나/ 그대들이 앉은 좌석에 보이지 않게 참석했네/ 미안하네. 용서하게. 테이블 중간에 나의 좌석을 마련하여 주게/ (중략)/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중략)>
 
 
  평생 시를 쓴다 해도 이토록 거룩한 시는 쓸 수 없다는 생각
 
  분신을 앞두고 누가 이런 글을 쓸 수 있는가. 그 누구의 시, 누구의 문장이 이토록 인간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가. 인간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절대적 사랑의 자세를 지닐 수 있는가. 죽음을 추월한 사랑 없이는, 또 그 실천 없이는 결코 쓸 수 없는 이 글은 나를 울리고 또 울렸다. 특히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등의 구절은 순간순간 내 심장을 멎게 했다. 내가 평생 시를 쓴다 해도 이토록 거룩한 시는 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배가 고프다”는 그의 마지막 말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는 생명의 숨결이 끊어지는 순간, 잠시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가면서 “목이 마르다”라고 한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남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서 예수가 한 마지막 말과 전태일이 한 마지막 말이 무엇이 다른가. 똑같은 말이다. 예수의 마음이 아니고는 그런 이타적 사랑의 유서를 쓸 수 없을뿐더러 그런 최후의 말을 남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를 우리 시대의 ‘청년 예수’ ‘노동자 예수’라고 생각한다.
 
  그가 평화시장 재단사들을 규합해 만든 친목회인 ‘바보회’ 명칭만 해도 남을 위해 나를 버리고자 하는 희생정신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얼마 전 우리 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께서 당신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한 것처럼 전태일 또한 나를 버리고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뜻을 그렇게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그가 내가 죽어야 비로소 나도 살고 남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 깨닫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을 위한 성자적 삶을 살아야 진정한 바보다. 바보는 성자의 다른 이름이다.
 
  실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을 처음 읽을 때 나는 저자가 누구인지 몰랐다. 지은이가 있지 않고 엮은이만 있었고, 엮은이조차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로 돼 있었다.
 
  이 책을 집필한 이가 조영래 변호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1년에 1차 개정판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1990년 초 조영래 변호사와 광화문에서 점심을 함께한 적이 있는데 그때 비로소 그가 이 책의 저자인 줄 알게 되었다. 조 변호사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 이후 6년 동안 수배생활을 하면서 전태일의 삶에 존경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집필했지만 군사독재 시절이었으므로 저자로서의 이름을 밝힐 수는 없었다.
 
  다행히 1차 개정판은 조영래 변호사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조 변호사는 개정판이 나오기 전에 별세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뒤 2001년에 2차 개정판이 나왔으며, 2차 개정판에서는 《전태일 평전》으로 책명이 바뀌었다. 굳이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고 우회적 표현을 하지 않아도 전태일은 이미 우리 시대의 고유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태일은 우리나라 노동자의 아버지다. 이제 그의 이름은 정의와 사랑의 깃발이다. 오늘날 우리 노동자들의 삶이 그나마 인간다운 삶으로 개선돼 나가는 것은 저 어둠의 70년대에 전태일이라는 ‘한국의 예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태일 평전》을 집필해 우리에게 그의 사상과 사랑을 알 수 있게 해준 조영래 변호사의 노력은 전태일만큼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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