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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년 4월호

鄭晋錫 - 《위대한 만남 서애 류성룡》 宋復 著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보여주는 비판적 역사서

글 : 鄭晉錫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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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晋錫
⊙ 72세. 중앙대 영문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신문방송학 석사. 英런던대 언론학 박사.
⊙ 관훈클럽 사무국장,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사회과학대학장, 방송委 위원 역임.
⊙ 저서 ; 《한국언론사》 《언론조선총독부》 《극비 조선총독부의 언론검열과 탄압》 《납북》 등.
  남북분단은 언제, 누구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이처럼 비극적이고 풀기 어려운 민족의 멍에가 되었는가. 송복(宋復) 연세대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반도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終焉)과 함께 시작되지만, 그 원류(源流)를 더듬어 가면 1592년의 임진왜란(壬辰倭亂)에 가 닿는다. 임진왜란은 왜(倭)의 입장에서 보나 명(明)의 입장에서 보나 ‘조선분할전쟁’이었다.”
 
  그의 《위대한 만남 서애 류성룡》은 전체적으로는 임진왜란의 역사연구서인 동시에 류성룡(柳成龍)이라는 인물의 리더십에 대한 연구서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가 1945년 일본 패망 이후, 햇수로 66년 전이 아니라 무려 41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부터가 특이하다. 원래 중국의 영향 아래 놓여 있었던 조선은 청일(淸日)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일본과 러시아가 서로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각축하다가 마침내 러일전쟁이 터지게 된 것이다. 일본은 이런 과정을 거쳐 한반도를 강점(强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일본은 19세기 후반 정한론(征韓論)이 제기되던 때부터 눈독을 들여 식민지로 집어삼켰던 한반도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송복 교수는 이보다 더 멀리 지금부터 353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임진왜란 때부터 분단의 싹은 트고 있었음을 실증적으로 추적한다. 미리 말할 것은 역사책을 읽을 때 느끼는 진부한 표현, 이로 인한 지루함 같은 것은 이 책에서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신문 칼럼을 쓰는 자세의 날카로운 필치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10만 양병론’은 허구다!
 
  류성룡은 어떤 인물인가. 그가 《징비록》(懲毖錄)을 쓴 사실은 고졸(高卒) 정도 학력이면 다 아는 일이지만 막상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은 많지 않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6년7개월 가운데 5년간 정무(政務)와 군무(軍務)의 겸직인 전시(戰時)수상(영의정)과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맡아서 전쟁을 치렀다. 그는 이 동안 명나라와 일본이 4년여에 걸친 물밑 강화(講和)협상을 통해 조선분할을 획책하는 것을 막는 일에 힘을 쏟았던 인물이다.
 
  류성룡은 그 자신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이순신(李舜臣)을 ‘역사의 인물’로 만든 사람이기도 했다. 류성룡이 아니었다면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라는 수군(水軍)의 중책을 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순신이 그런 직책을 맡아 왜군과 싸울 기회를 갖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기 싫은 일이지만 그때 벌써 일본의 일부가 되었거나 중국화(中國化)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류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이야말로 ‘위대한 만남’이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조선민족을 구한 하늘이 주신 궁합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도 이미 이 같은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류성룡의 가장 큰 공로는 다른 일보다도 충무공을 등용시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공로였음을 설파한 것이다.(이익, 《서징비록후집》(書懲毖錄後集))
 
  역사를 쓰는 사람들은 기존의 저서나 논문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확대재생산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임진왜란에 관한 서술 가운데 대표적인 허구와 잘못된 인식으로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10만 양병론(養兵論)’이 있다. 율곡 선생과 10만 양병은 동일시되는 논리다.
 
  그런데 송복 교수는 이율곡은 한번도 ‘10만 양병론’을 주장한 일이 없다고 단정한다. 놀랍고도 파격적인 주장이다. 10만 양병론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구체적인 방법론이었고, 호전적(好戰的)인 북한정권과 대치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다. 그런데 율곡이 그런 주장을 한 일이 없다니! 송 교수에 의하면 ‘10만 양병론’은 율곡 사후(死後)에 제자들이 쓴 비문에 처음 나오고 또 그 제자의 제자가 쓴 <율곡연보>에만 나와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율곡이 생전에 단 한 번도 주장한 일이 없는 말을 그가 죽은 후에 제자들이 정치적 목적에서 만들어 냈다는 사실을 문헌상으로 밝히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과연 당시 조선의 실정으로 10만 병사를 양성하는 일이 가능했겠는지 통계적인 방법, 인구학적인 수치로 추정한다.
 
  여러 자료를 대비해서 오류를 가감한다고 볼 때에 임진왜란 당시의 인구는 많게 잡아도 400만은 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무렵의 호구(戶口)조사에는 230만명 정도로 나와 있는데 거기서 10만명을 동원하여 군인으로 훈련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부터 따져야 한다. 250만 인구 가운데 절반은 여자이고, 나머지 115만명 중 군병(軍兵)이 될 수 있는 연령층 20∼30세는 현재의 인구구성비로 계산해도 전체 인구의 16%인 18만명 정도다. 인구를 400만명으로 잡아도 30만명에 불과하다. 18만명에서 10만명을 빼내 정규군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한껏 많이 잡아서 30만명이라 해도 거기서 3분의 1을 차출하여 군병을 만들 수 있는가. 신체장애자를 제외한 건강한 젊은이는 양반 벼슬아치 자제를 다 포함해도, 10만명을 군인으로 차출하고 나면 생산인구의 대부분이 군대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인구 통계상으로도 10만 양병론을 지탱하기는 불가능했고, 국가의 생산능력과 세수(稅收) 면에서 본다면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구체적인 수치는 생략하지만 조선의 인구상, 국가 재정상 전쟁이 일어날 사태를 대비하여 10만 병력을 양성하기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역사
 
  당시의 조선은 썩을 대로 썩어 어떻게 고쳐야 할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의 나라였다. 관리는 부패했고, 왕은 백성의 사정을 몰랐다. 육지에서 일본군은 무인지경(無人之境)처럼 거침없이 서울로 올라왔다. 왜군은 1592년 4월 14일 제1진이 부산에 상륙한 후에 20일도 채 걸리지 않았던 5월 3일 서울을 점령했다. 부산 상륙 후 불과 2개월 사이에 서울·개성·평양이 모두 함락되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왕이 싸워서 백성을 보호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명나라로 도망가서 붙어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한심한 생각을 가진 왕과 신하들이 지배하는 나라에 류성룡 이순신 같은 인물이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천운(天運)이었다. 《위대한 만남 서애 류성룡》은 이런 상황에서 당한 국난(國難)을 영의정 류성룡이 이순신이라는 명장(名將)을 기용하여 헤쳐 나가는 이야기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많은 교훈을 얻는다. 그 교훈은 있는 그대로를 먼저 파악한 역사에서 얻어야 한다. 잘못된 사실을 토대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려는 태도를 지닌 역사를 쓴다면 독자를 속이고 모독하는 죄악이다. 과거의 잘못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반성하면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참된 역사의 서술이다.
 
  지금까지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던 역사적 사실도 타당한 검증을 거쳐서 해석하는 것이 역사연구의 바른 자세다. 나는 1907년에 있었던 국채(國債)보상운동이 잘못된 계산을 토대로 시작되었던 애국운동이었음을 지적한 일이 있다. 당시 우리의 인구는 2000만명에 채 못 미치는 정도였다. 그런데 2000만 인구 가운데는 어린이를 포함한 미성년자도 많을 것이고, 성인 가운데도 비(非)흡연자도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 가운데도 돈을 내지 않고 담배를 직접 재배하여 피우는 사람이 더 많았다. 아직 담배를 국가에서 전매(專賣)하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입 담배는 특수한 부유층이 아니면 피울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담배를 끊은 돈’으로 국채를 갚는다는 말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는 말이었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기는 했다. 패물(佩物)을 내놓거나 밥을 굶어 절약한 돈을 내놓는 사람도 있었듯이 ‘담배’는 국민의 ‘애국심’과 정성을 상징하는 말이기는 했다. 그렇더라도 국민 모두를 참여 대상으로 가정하여 일률적으로 20전씩을 내어 국채를 갚는다는 계획은 현실성이 없었다. 당시는 그런 구호로 국민의 참여를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더라도 후세의 역사 연구가들은 냉정하고 과학적이라야 한다.
 
  《위대한 만남 서애 류성룡》은 그런 점에서 비판적인 역사 서술의 한 방법을 제시했다고 본다. 한문(漢文) 원전(原典)을 폭넓게 섭렵하여 치밀한 고증(考證)을 한 점도 이 책의 훌륭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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