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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1년 4월호

張在植 - 《공자의 생애와 사상》 김학주 著

‘인간’ 공자의 순수한 면모와 思想을 알 수 있어

글 : 張在植 前 산업자원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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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在植
⊙ 76세. 서울대 법대 졸업, 하버드대 대학원 국제조세과정 수료, 중앙대 경제학 석사·박사.
⊙ 前 국세청 차장, 주택은행 은행장, 14·15·16대 국회의원, 민주당 정책위 의장.
  공자(孔子)는 세계 3대 성인의 한 사람이며, 공자의 유교(儒敎)는 중국을 비롯한 동양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기본을 이루고 있다. 또한 유교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 및 동양제국의 도의(道義)·정치·문화·음악·예술·사회생활 전반의 기반이 됐다. 특히 한(漢) 무제(武帝)가 유학(儒學)을 그 정치의 기본원리를 설명해 주는 학문으로 정립한 후 중국의 정치·사회는 2000년 동안 유교원리에 바탕을 두고 발전했다.
 
  따라서 중국의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공자의 사상에 대한 이해 없이는 그 내용을 깊이 이해할 수 없으며 중국의 영향을 받았던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일본·미국 등에서 많은 관련 서적이 출간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우수한 저작물이 출간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공자의 생애와 사상》은 내용이 풍부하고 꼭 읽을 가치가 있는 저서로 높이 평가돼 권하고 싶다. 이제까지의 많은 저자는 ‘공자는 성인(聖人)’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생애와 사상을 다뤄 공자의 ‘참다운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공자의 생애와 사상》은 ‘인간’ 공자의 생애와 사상을 올바로 쓴다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저자는 인간 공자의 순수한 모습과 사상을 추구하는 데 성과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그러한 저자의 노력을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魯)나라에서 태어났는데, 나이 많은 아버지 숙량홀(叔梁紇·60)과 젊은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와의 야합(野合·예에 맞지 않은 또는 비정상적인 남녀의 결합관계)의 소산이었다. 숙량홀은 노나라의 시(施)씨 집안에 장가들어 9명의 딸을 낳았다. 그는 아들을 얻으려 첩을 들였지만, 맹피(孟皮)라는 불구 아들을 낳았다. 그 뒤 60세의 나이로 어린 안징재와 결합해 공자를 낳았다. 이에 대해 저자는 “공자가 서출 또는 사생이었다 해도 성인으로서의 공자의 위상에 조금도 손상되는 일은 아니다”고 밝혔다.
 
  공자는 논어(論語)에서,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은 상급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다음이고 곤경에 빠져 배우는 사람은 그다음이라 했다. 공자는 인격·학문·지식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들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높은 수준에 도달해 지성선사(至聖先師·지식과 인격이 거룩한 전무후무한 스승)라 불렸다. 필자도 이 책을 몇 번 읽어 보고 공자의 생애와 사상, 지식이 높은 수준에 있음을 인지했을 때 경악했고 존경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한 가지 매우 놀란 것은 공자가 ‘스승을 모시고 공부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집이 가난해서 스승을 모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공자는 논어 술이(述而)편에서, “세 사람이 같은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다. 이는 주위의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이 ‘스승’이 됐음을 의미한다. 공자는 실제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찾아가 묻고 공부했다. 즉 스승 없이 자기 혼자서 공부했던 것이다.
 
  공자는 논어의 위정(爲政)편에서 밝혔듯이 15세에 배움에 뜻을 뒀다. 30세에는 사고와 행동에서 자립했고, 40세에는 미혹되지 않게 됐다. 50세에는 천명(天命)을 알게 됐으며, 60세에는 귀로 듣는 대로 모든 것을 순조로이 이해하게 됐다. 70세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탁월한 자질과 꾸준한 학문적 노력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공자의 다능(多能) 박학(博學)함은 설명하기 어려운 정도다. 예(禮)·음악(樂)·활쏘기(射)·수레 몰이(御)·글쓰기(書)·셈하기(數) 등의 육예(六藝)는 물론이요, 모든 분야에 걸쳐 모르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공자는 육예에서 예와 음악을 중시했다. 사람에게 ‘예’가 겉이라면 ‘악’은 속으로 서로 표리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했다. 공자는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이며 예란 천지의 질서”라고 말했는데, 예와 음악을 통한 다스림은 그의 정치이상이었다. 저자는 공자가 사회교화와 정치에 있어서까지도 음악의 효용을 크게 생각한 것은 덕치주의(德治主義)의 이상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공자의 교육법은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케임브리지·옥스퍼드의 방식과 닮아
 
  공자는 37세를 전후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공자는 51세였던 노나라 정공 9년(기원전 501년)에 중도제(中都帝)에 임명된다. 2년 후에는 사공(司空·국토를 다스리는 일을 맡은 벼슬), 그다음 해에는 사구(司寇·지금의 대법원장 겸 법무부장관의 직책)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55세 되던 해, 대사구(大司寇·최고 재판관)로서 재상의 일을 겸했다. 이 5년간이 공자의 일생에서 관리생활의 전성기였는데, 그 직위의 높음과 승진속도가 일반적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공자의 정당한 정치와 곧은 처신은 노나라 권신들의 두려움과 미움을 받게 돼 결국 노나라의 벼슬을 포기하고서, ‘자기의 이상을 실천할 나라’를 찾기 위해 여러 나라(위·진·채·노 등)를 주유(周遊)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서도 기용되지 못했다. 처음에 공자는 위(衛)나라로 갔다. 그는 ‘위나라를 잘 다스려 백성을 부유하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의욕에 넘쳐 있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운한 사태와 사건을 겪고 위나라를 떠나 진(陳)나라에 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3년간 별 소득이 없자 다시 위나라를 거쳐 채(蔡)나라로 갔다. 거기서도 3년간 있다가 별 얻음이 없어 여러 가지 수난 끝에 다시 위나라를 찾아간다. 그러나 역시 그 의욕을 성취하지 못하고 주유 13년 만에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노나라에서도 공자에게 아무런 벼슬도 주지 않았고, 이후 공자는 여생을 ‘교육’과 경전(經典)의 편저에 바치게 된다. 공자는 정치보다는 교육에 일생을 헌신했다. 특히 공자의 교육법은 자유로운 대화를 통한 개성교육(個性敎育)에 있었다. 이는 영국의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 대학원의 교육방식과 비슷해, 참으로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며 앞서 가는 성인의 교육이었다고 호평하고 싶다. 공자와 같이 보기 드문 실력과 능력을 갖춘 성인이 기나긴 시간과 노력을 유교의 발전과 교육에 투입했다면 더 값진 성과를 거뒀을 것이라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여자를 소인 취급해 가정의 행복 이루는 데는 실패
 
  공자는 난세(亂世)를 바로잡고 올바른 사회를 이끌고 갈 사명감이 투철해, 그의 관심은 언제나 인의(仁義)와 충신을 바탕으로 세계를 개혁하려는 데 있었다. 하지만 부인에 대한 사랑과 가정의 행복은 별로 안중에 없었다. 공자는 아들을 낳은 부인과 이혼했는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자들을 모두 소인(小人) 취급했다. 또 하나의 불행은 아들(伯魚)과 손자(子思)가 모두 이혼했으며 공자의 수제자인 증자(曾子)도 ‘부인이 밥을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공자는 인간성에 있어서는 성인의 자격이 결여됐다고 판단하고 싶다.
 
  이어서 공자는 극히 가난한 선비를 요구했다. 그렇다면 이 선비는 어떻게 자녀교육을 할 수 있으며 건강한 가정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선비의 가족이 배우지 못하고 가정이 건전하지 못하다면 그 선비와 가정으로 이루어진 국민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건전한 발전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너무 현세에 치우친 경솔한 비판일까.
 
  《공자의 생애와 사상》은 다양한 사실과 자료를 제공하면서, 공자와 유교에 대한 이해와 존경에 큰 보탬을 줬다. 특히 유가사상의 변천까지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2000여 년의 중국역사를 통해 중국정치의 기본원리이며 사회윤리의 바탕을 이루는 학문으로 군림하게 되는 유학에 대한 충실한 설명은 참으로 큰 공부를 시켜 주고 있다. 또 끝 부분에서 한대의 유학과 송(宋)대의 유학에 대한 상세한 기술과 설명은 향후 유학 연구에 큰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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