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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책부록
  1. 2011년 4월호

吳世勳 - 《백범일지》 백범 김구 著

백범 선생은 일제 침탈 때도 武力보다 文化의 힘을 강조했다

글 : 吳世勳 서울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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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世勳
⊙ 50세. 고려대 법대 졸업. 고려대 법학박사.
⊙ 26회 사법시험 합격. 숙명여대 법학과 겸임교수, 16대 국회의원, 국회정치개혁특위 한나라당 간사,
    33대 서울시장 역임.
⊙ 저서: 《서울은 불가능이 없는 도시다》 《Shift-생각의 프레임을 전환하라》 《우리는 실패에서
    희망을 본다》 출간.
  범(汎)민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인 ‘3·1운동’을 기념하는 삼일절이 올해로 92주년을 맞았다.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무력도발 등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가슴 아픈 일을 겪은 뒤라 그런지, 올해 삼일절을 맞는 마음은 참으로 남달랐다. 수많은 독립지사가 혼신을 다해 피와 눈물로 지켜낸 이 강산에서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갈라져 벌써 반세기를 넘긴 것도 통탄할 일인데, 아직까지도 냉전 체제 속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고 있으니 무덤에 계신 독립지사(獨立志士)들이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할 듯하다. 통일정부 수립을 제창하다가 미명에 가신 백범 김구(金九) 선생의 경우 그 애달픔은 더하지 않으실까 싶다.
 
  김구 선생의 호인 ‘백범’(白凡)은 다들 아시다시피 백정의 백(白), 일반 사람들을 나타내는 범(凡)자를 썼다. 백정이나 일반 백성들조차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지 않으면 이 땅을 침략한 일본 세력을 물리칠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스스로 지은 호다.
 
  그의 본명은 김창수이다. 몰락한 양반 가문으로 황해도에 터를 잡아 상놈 행세를 하며 살아가던 집안의 종손으로 태어났다.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했고, ‘과거시험’을 준비했으나 여의치 않자 관상과 풍수지리를 공부했다. 이렇듯 그의 일생은 배움의 연속이자 끝없는 구도(求道)의 길이었다. 동학과 불교, 기독교와 개화사상, 민족주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모든 사상과 철학을 스펀지처럼 흡수해 갔다. 이러한 끝없는 배움의 과정을 통해 구한말의 평범한 시골뜨기 김창수가 임시정부의 주석에까지 오르지 않았나 싶다.
 
  그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동학의 선봉장으로 해주성(城)을 공략했고, 교육 현장에서는 스승으로 활동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으며, 이봉창과 윤봉길의 거사 뒤에도 그의 뒷받침이 있었다. 수차례의 투옥과 고문, 일제의 탄압과 고된 망명생활을 자처하며 언제나 세상의 한복판에 서 있었고, 남들이 가기 두려워하는 가장 어렵고 힘든 길을 택해 왔다. 그의 마음속에 늘 민족의 독립과 구원이라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구 선생은 인간적으로도 따뜻하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자서전 중간중간에서 그의 인간적인 실수와 잘못도 종종 목격되곤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치부를 솔직히 까발리며 그 안에서 속죄의 의미를 찾고 있다. 대한 독립을 향한 그의 헌신과 노력 외에 이러한 진실된 인간성이 있었기에 고비마다 도와주는 손길을 만날 수 있었고,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했을 때 그의 모습에서도 많은 걸 배우게 된다. 김구 선생은 청사(廳舍)의 ‘문지기’를 자청했다. 개인의 영달에 가치를 둔 사람이었다면 한 자리 내놓으라고 할 법도 했지만 그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정부를 섬기겠다고 공언할 만큼 겸손하고 우직했다. 그것은 선생께서 생전에 “우리나라가 독립만 이루게 되면 그 나라의 가장 미천한 존재가 되어도 좋다”는 말을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언제나 궂은일은 도맡아 하면서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서는 모든 책임을 기꺼이 떠맡을 줄 아는 그의 모습은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의 모습이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한다.
 
  종종 김구 선생님의 《나의 소원》을 읽곤 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이 글귀를 읽을 때마다 피부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을 느낀다. 나라가 일제침탈에 의해 짓밟힐 때에도 그는 무력이나 경제력보다 ‘문화의 힘’을 강조했다.
 
 
  “문화만큼 강력한 힘은 없다”
 
  요즘 들어 강연 요청이 참 많이 들어온다. 기업 CEO들의 조찬모임에서부터 학부모들의 모임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나를 통해 서울의 미래와 꿈을 듣고 싶어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주저 없이 “서울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도시의 ‘매력’을 키워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문화’만큼 강력한 힘은 없다”고 강조한다.
 
  이제 세계는 소프트파워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교수인 조셉 나이(Joseph S. Nye Jr)는 “21세기에는 군사적 강제력이나 물질적 경제력 대신 보편적 문화, 감성 가치, 아이디어 같은 매력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소프트파워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렇기에 이제 도시도 소프트웨어와 콘텐츠를 만들고 개발해 나가는 것이 핵심 가치가 되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도시만이 풍기는 느낌과 라이프스타일, 문화가 뿜어내는 분위기가 중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백범 김구 선생은 이미 구한말에 시대의 변화상을 예측하고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을 조망한 것이다. 그는 깊은 혜안을 가진 선구자였다.
 
  얼마 전에는 머리가 희끗한 세계적인 경영자 한 분이 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오 시장은 서울을 어떤 도시로 만들고 싶습니까?”
 
  “세계가 존경하는 문화도시, 디자인도시로 만들고 싶습니다.”
 
  노신사는 한참 생각에 잠긴 듯 있다가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서울은 이제 세계적인 경제도시가 될 수 있겠군요.”
 
  이제는 문화가 밥을 먹여주고, 문화가 세상을 리드하는 소프트파워의 시대이다.
 
  수많은 강연장에서, 회의석상에서, 해외 각 도시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내가 우리 문화를 강조하고 다니는 것은 이러한 소프트파워의 힘을 통해 세계인이 서울을 찾고 싶고, 살고 싶고, 투자하고 싶은 사랑받는 도시로 만들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일제의 침탈 아래에서 고통받는 민족의 살길을 열고자 평생을 바치고, 통일 조국 건설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가 세상을 떠난 백범 김구 선생의 외침이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돼 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 그는 내게 “우리 민족인 동시에 혼(魂)이 되는 ‘문화’를 지키고 풍성하게 만들라”는 커다란 숙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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