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별책부록
  1. 2011년 4월호

裵今子 - 《시빌액션》 조나단 하 著

가난한 시민 편에 선 공익변호사와 대기업 편에 선 거대 로펌의 대결 그려

글 : 裵今子 해인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 기사목록
  • 프린트
裵今子
⊙ 50세. 부산대 사학과 졸업. 미국 하버드 로스쿨 석사.
⊙ 사법고시 합격. 뉴욕주 변호사 시험 합격. 부산지법 및 동부지원 판사, 동서로펌(現 광장로펌) 변호사,
    방송위원회 고문변호사 역임. 김보은 사건, 김부남 사건, 우 조교 성희롱 사건, 군산 윤락가 화재 참사
    국가배상소송, 한국 최초 흡연피해자공동소송 등 담당.
  조나단 하(Jonathan Harr)가 1996년에 발표한 논픽션 《시빌액션》(A Civil Action)은 1980년대 매사추세츠주 연방법원에서 장장 9년에 걸쳐 진행된 환경공해 소송 과정을 담은 책이다.
 
  1998년 가을, 나는 뉴욕주(州) 변호사 시험을 마치고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존 그리샴의 소설 《스트리트 로이어》(The Street Lawyer)와 함께 이 책을 샀다. 《시빌액션》은 개인변호사가 거대 기업을 상대로 환경공해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험난한 과정을 다룬 실제 사건이고, 《스트리트 로이어》는 대형 로펌에 근무하던 변호사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공익 변호사로 변신하여 헌신하는 것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이 두 권의 책은 공익변호사로 살고자 하는 내 삶과 영혼을 자극하는 양서(良書)이다.
 
 
  실제 소송 사건 다룬 논픽션
 
  《시빌액션》은 유해폐기물로 식수원을 오염시킨 거대 기업의 책임을 끈질기게 추궁한 실제 사건의 기록이다. 이 책은 재판에서 판사의 가치관과 독단, 직권남용이 얼마나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지, 거대 기업의 거짓말과 조직적인 증거 은닉, 기업에 불리한 과학적인 증거의 왜곡, 기업을 대변하는 대형 로펌의 횡포가 얼마나 심한지, 이로 인해 배심원들이 어떻게 잘못된 판단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64~1979년 사이, 미국 매사추세츠주(州) 보스턴 북쪽의 외곽도시 위번시 주민들은 수도에서 녹물이 나오고 고약한 표백제 냄새를 풍기자 당국에 무수히 민원을 제기했다. 그 기간 동안 이 지역의 어린이 20여 명이 백혈병으로 죽어갔다.
 
  시 당국은 수돗물 공급원인 우물이 산업용 솔벤트인 TCE와 퍼크(과염화에틸렌) 등 화학물질로 심하게 오염돼 있음을 확인하고 우물을 폐쇄 조치하였다. TCE와 퍼크는 신경중추계에 손상을 입히는 발암가능물질로 환경보호청에서 분류하고 있던 물질이다. 조사결과 지하수를 오염시킨 유력한 기업은 다국적 화학기업인 그레이스와 비트리스 푸드에 합병된 피혁업체인 라일리로 추정되었지만 확실한 증거는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레이스와 비트리스는 《포천》지(誌) 선정 500대 기업에 들어가는 대기업이다. 그레이스는 이 지역에서 음식 포장용 스테인리스 설비를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하였고, 라일리는 피혁업체를 운영했다. 이 회사들은 공장 기계의 기름을 제거하는 데 TCE와 퍼크 등을 사용했고, 그 폐기물을 땅과 도랑에 버린 것으로 추정됐다.
 
  보스턴에서 작은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개인상해 전문 변호사 잰 슐릭만(Jan Schlichtmann)은 돈을 벌기 위해 사건을 맡는 평범한 변호사에 불과했다. 이 소송은 당초 ‘공익을 위한 변호사 모임’에서 하기로 한 것이지만 증거조사 비용이 엄청나게 예상되자 슐릭만 변호사에게 승소금 일부를 기부하기로 하는 조건하에 이양했다.
 
  슐릭만의 파트너 변호사는 “이 사건은 블랙홀”이라면서 맡지 말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슐릭만은 피해자들에게 사건 수임 불가를 통보하러 갔으나 “우리 아이들을 죽인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묻고 싶어요”라고 외치는 피해자들의 간절한 호소를 물리칠 수 없어 “사건을 맡겠어요”라고 대답해 버리고 만다. 돈과 명예를 추구하던 변호사가 공익과 정의, 피해자 인권에 이끌려 막강한 상대와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하는 사건에 뛰어든 것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비용과 소요될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른 채 모험을 시작한 셈이다.
 
 
  로펌 변호사들의 법정 공작
 
  슐릭만은 1982년 5월 매사추세츠주 법원에 백혈병 환자 가족을 대리해 그레이스와 비트리스를 상대로 소장을 접수했다. 당시만 해도 그는 피고들이 그 우물을 오염시킨 기업이고, 오염물질이 백혈병을 유발했음을 입증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보스턴의 대형 로펌 두 군데가 이 거대 기업의 변호를 맡으면서 상황은 완전 달라졌다. 주 법원에 제기된 이 사건은 피고 측의 신청에 의해 대기업에 유리한 연방법원으로 이송되었으며, 매사추세츠주 연방법원의 담당 판사 스키너는 피고 비트리스를 대리하는 로펌 대표(패처)와 30년 친구였다. 배심원도 판사의 교묘한 개입으로 기업에 유리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판사는 재판 절차 역시 유해기업과 대형 로펌에 유리하게 진행시켰다. 피고 측 변호사들의 방해공작으로 과학적 증거는 법정에서 여지없이 왜곡되었다.
 
  피고 측 변호사들은 피고 기업이 TCE 등 유해물질을 내다버린 사실도 부인했고, 그 유해물질이 우물을 오염시킨 것도 부인했다. 심지어 TCE와 퍼크 등이 백혈병을 일으키는 의학적 증거도 없다고 주장했다. 피고 측 변호사들은 백혈병의 원인으로 베이컨, 테프론 팬, 플라스틱 샤워 커튼 등 무수한 일반식품과 가정용품을 거론하면서 어떤 물질이 백혈병의 원인이 되었는지 알 수 없다며 배심원들을 현혹시켰다.
 
  피고 측 공장에서 근무했던 유력한 증인 후보들은 대부분 암으로 죽었으며, 남아 있는 증인 중 일부가 TCE 등을 땅과 도랑에 버렸다고 증언했음에도 사주(社主)와 공장장은 법정에서 선서하고도 이 사실을 부인했다. 이 사건에 참가한 원고 측 전문가들은 유해환경의 해독을 알리는 사명감으로 임했고, 원고 측 변호사들은 환경오염에 대한 기업의 책임추궁과 소송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 소송을 진행시켰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이러한 신념은 여지없이 배반당하게 되었고 배심원의 평결을 기다리는 동안 슐릭만 변호사는 “저 평범한 여섯 명의 배심원이 어마어마한 대기업 두 개의 운명을 쥐고 있다니…. 이 나라는 법이 종교가 되어 가고 있다”고 절규한다. 배심원들은 피고 비트리스가 우물을 오염시킨 증거가 없다며 재판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피고 비트리스를 변호한 로펌의 변호사들은 승소파티에서 “슐릭만을 위해 건배”를 외치며 원고 변호사를 우롱한다.
 
 
  한국엔 언제쯤 정의가 바로 설 것인가
 
  슐릭만 변호사는 이 사건의 증거조사 비용 260만 달러를 빚으로 조달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게 되자 결국 피고 그레이스와 800만 달러에 최종 합의를 하지만, 빚을 감당 못한 그는 파산하게 된다. 비트리스사를 상대로 한 항소와 상고가 이어졌지만 기각되면서 1990년 이 사건은 최종 종결된다.
 
  재판이 끝난 이듬해 환경보호청의 최종 조사결과에서 지하수 오염의 주범이 비트리스와 그레이스사임이 밝혀진다. 환경보호청은 비트리스사와 그레이스를 상대로 환경정화비용의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고, 이들 회사는 결국 환경정화비용으로 총 6950만 달러에 달하는 돈을 부담하게 된다.
 
  한편 그레이스사는 환경보호청에 거짓 증언을 한 이유로 연방검찰청에 의해 기소, 최고의 벌금형을 선고받게 되고, 그레이스사의 위번 공장은 폐쇄조치된다. 재판에서 왜곡된 정의는 그 후 환경보호청의 개입으로 유해기업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짐으로써 바로 세워졌다.
 
  이 책은 전미비평가협회상 등 여러 상을 받았고, 미국 유수 로스쿨에서 필독서로 선정되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환경공해소송의 판례가 변경되었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 기업의 책임은 더욱 무거워졌다. 결국 슐릭만 변호사가 소송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킨 덕분에 후대의 사람들이 이익을 본 셈이다.
 
  필자는 무수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담배회사를 상대로 12년째 무료 공익소송을 진행 중이다. 소송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 보고자 시작했지만 솔직히 지칠 때가 많다. 그런 내게 이 책은 남다른 울림으로 기운을 북돋아주곤 한다.
 
  담배회사는 법정에서 원고들의 폐암 원인은 흡연이 아니고 다른 원인이라고 호도한다. 자신들은 니코틴 조작을 하지도 않았을뿐더러 니코틴은 중독성이 없다고 말한다. 온갖 증거를 은닉하는 등 담배회사를 변호하는 대형 로펌의 갖은 횡포는 이 책에 등장하는 피고들과 너무 흡사한 모습이다. 우리나라에는 언제쯤이나 정의가 바로 설지 간절한 마음이 들 뿐이다.⊙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