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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년 6월호

[鄭樞] 음악도, 하루아침에 인민군 중좌가 되다

러시아어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인민군 최고사령부 차출
공습으로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 학생들 떼죽음
김창만·김일 등 북한 고위층, 공공연히 김일성 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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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樞 카자흐스탄 공훈 문화인
⊙ 1923년 출생. 소련 국립모스크바음대(차이코프스키음대) 졸업. 카자흐스탄 국립사범대학
    명예어문학 박사.
⊙ 1958년 반(反)김일성운동을 벌이다가 소련 망명, 카자흐스탄 국립여성사범대학 음악학부 교수,
    카자흐스탄 국립사범대학 국제관계학부 교수 역임.
  광주(光州) 출신인 나는 1946년 12월 월북(越北)했다. 북조선공산당 선전선동부에서 남한의 문화예술인들을 대거 불러모았는데, 거기에 나도 포함된 것이다. 형 정준채(鄭準采)는 이미 월북해 국립영화촬영소를 만들어 활약하고 있었다. 형은 내게 보낸 편지에서 “영화촬영소에서 음악활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항일(抗日)의식이 강했던 나는 광복 후에도 친일파(親日派) 청산이 안 되고 있는 남한의 현실에 실망하고 있었다. 사회주의적 개혁이 시작되고 있다는 북한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아버지도 형을 찾아간다고 하니 반대하지는 않았다.
 
  월북 후 나는 평양음악대학 교수, 국립영화촬영소 음악과장 등을 지냈다. 젊은 나이에 출세했다면 한 것이지만, 나는 점차 북한의 현실에 실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식인에 대한 폄하가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생각하는 ‘새로운 조국’의 모습은 ‘지식인, 노동자, 농민 등이 하나로 뭉쳐 만드는 부강한 나라’였다. 그러나 ‘노동자·농민의 나라’를 내건 북한에서 지식인, 특히 남한 출신 지식인이 설 자리는 좁았다.
 
  내가 6·25 발발 소식을 접한 것은 평양노어(露語)대학(현 평양외국어대) 기숙사에서였다. 당시 나는 평양노어대학을 졸업하고, 평양음악대학 교수(작곡부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었다. 대공포 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놀라서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전쟁이 났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정의의 전쟁이 시작됐다”는 성명이 나왔다.
 
 
  음악도, 인민군 중좌가 되다
 
  전쟁이 나자 남한 출신들은 우선 징집되어 최전선 부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1948년 월북해 평양노어대학을 졸업한 후 상업성에서 근무하던 동생 정권(鄭權)도 징집됐다. 그 후 동생 소식은 두 번 다시 듣지 못했다.
 
  요행히 나는 징집을 면할 수 있었다. 아마 일찍 월북한 데다가 문화선전상 허정숙(許貞淑),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녀 정설송과 결혼한 작곡가 정율성(鄭律成) 등과의 친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금방 끝날 것 같던 전쟁은 지루하게 계속됐다. 미군의 폭격이 심해지면서 대동교 건너 서(西)평양 사동에 있는 교수요원 지하대피소에서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9월 어느 날, 민족보위성(국방부) 최고사령부에서 출두 명령이 내려왔다. 내가 불려 간 곳은 최고사령부 정치총국이었다. 노어대 교수 등 모두 다섯 명의 교수 요원이 불려 왔는데, 그중 네 명은 고려인(소련출신 한인)이었다. 간부국장 유일(柳一) 소장(한국군의 준장)이 “정치총국 소련고문(소장)과 노어로 면담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면담을 끝낸 우리는 그 자리에서 유일로부터 중좌(中佐·한국군 중령) 계급장을 받고, 최고사령부 부(副)부장이 됐다. 나는 최고사령부 조직보충국 대열부(隊列部·하사관 이하의 징집과 인사를 담당하는 부서) 부부장이 됐다.
 
  군 경력이 전혀 없는 우리가 하루아침에 최고사령부의 고급 군관(장교)으로 발탁된 것은, 한마디로 소련 군사고문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였다. 당시 최고사령부의 각급 부서에는 모두 소련군 장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소련이 공식적으로 참전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6·25는 사실상 ‘소련의 전쟁’이었다. 내가 일하게 된 대열부에도 코진이라는 소련군 대위가 있었다. 대열부장은 전선으로 나갔기 때문에 내가 사실상 부장 역할을 해야 했다.
 
  그때 이미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고, 인민군은 곳곳에서 패퇴(敗退)하고 있었다. 유엔군 비행기는 ‘유엔군이 원산~인천선(線)을 가위로 자르는’ 그림이 그려진 삐라를 평양시가지에 뿌려댔다. 코진은 “유엔군이 북진할 경우 후방에서 병력을 보충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일을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에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했다.
 
 
  유엔군 공습으로 혁명 유자녀들 피투성이
 
1950년 9월 인민군 중좌가 된 후의 정추.

  10월 초 어느 날, 후퇴명령이 떨어졌다. 최고사령부에서 후퇴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데 유엔군 공습이 시작됐다. 급한 김에 군기고(軍旗庫·군기를 보관하는 창고)로 들어갔다. ‘쿵’ ‘쿵’ 하는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폭격이 끝난 후 나와 보니, 직경 10m 깊이 5m의 구멍이 나 있었다. 민족보위성, 최고사령부, 총참모부 등 3~4층짜리 건물들이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교수 출신 군관들과 방공호(防空壕)로 들어갔더니 장령(將領·장군)들이 있었다. 병사 하나가 들어와 “참모부 기숙사 건물 쪽에서 신음이 들리고 있다”고 보고했다. 참모부 기숙사 건물에는 만경대혁명유자녀학원 학생 50여 명이 묵고 있었다. 그들은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동료 등 북한체제를 지탱하는 엘리트들의 2세였다.
 
  김일성(金日成)이 그들을 친자식처럼 아끼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장령들은 우리에게 “어서 나가서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라”고 명령했다. 명색이 중좌급이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우리가 제일 말단이었다.
 
  폭격 현장은 참혹했다. 손이나 발, 머리가 떨어져 나간 15~20세 사이 청소년들의 시신이 진홍색 피를 쏟으며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구조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적기의 기총소사(機銃掃射)는 계속됐다. 간신히 한 명을 끄집어냈다. 누구냐고 묻자 그는 “김책(金策) 동지의 조카”라고 대답했다. 김책은 산업상과 전선(戰線)사령관을 지낸 북한 정권의 최고위급 인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구조 작업을 마치자, 우리를 내보냈던 장령이 와서 “위험을 무릅쓰고 혁명유자녀들을 구해낸 공로를 높이 사 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식 진급도 전에 우리는 후퇴를 시작했다.
 
 
  김일성의 마지막 명령서
 
  유엔군이 원산을 점령한 다음 날인 10월 11일, 김일성은 ‘조국의 위기에 처하여 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녹음, 방송했다.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형제자매 여러분, 영웅적인 우리 인민군 장병 여러분, 용감한 남녀 빨치산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강도놈들은 태평양 지역에 있는 전 병력을 동원하여 총공격을 개시했다. 우리 인민군은 전투를 계속하면서 할 수 없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의 책임을 남한에 미루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울에서 압수한 제(諸)문서·자료가 증명하듯이, 이승만(李承晩) 일당은 이미 1949년에 북벌(北伐)을 기도했다. 그런데 남조선에서의 광범한 빨치산운동과 신뢰할 수 없는 이승만 군대, 기타의 정세로 인해 미(美)제국주의 놈들은 조선에서의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전쟁을 1950년까지 연기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1950년 5월 말 38선 이북으로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확실한 정보를 얻고 이 침공을 격퇴하기 위한 대책을 적시(適時)에 강구할 수가 있었다.”
 
  ‘친애하는 동포, 형제자매, 영웅적인 인민군 장병’들이 그 방송을 듣고 있을 시각, 김일성은 만주를 향해 도주하고 있었다. 10월 17일 평양이 포위당했다. 평양을 지키던 마지막 인민군 병력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후퇴가 시작되기 전, 김세일 조직보충국장(소장)이 나를 불렀다. 그는 내게 종이를 한 장 건네주었다. “후퇴하는 인민군 병력은 영변·박천으로 집결하라”는 김일성의 마지막 명령서였다. 김세일은 “이 명령서를 후퇴하는 인민군 군단장들에게 전달하라”고 했다.
 
  지프를 타고 평양 교외의 용성·서포 쪽으로 나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피란민과 낙오병만 나타날 뿐, 명령을 전달할 만한 고급 군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5시간 만에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지프를 타고 교외로 나가고 있는데,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들렸다. ‘쌕쌕이’ 6대가 내가 탄 지프를 공격하려 하고 있었다. 황급히 지프에서 내려 논두렁으로 몸을 굴렸다. 잠시 후 내가 탔던 지프는 산산조각이 났다. 할 수 없이 걸어서 최고사령부로 돌아왔다.
 
 
  졸지에 임명된 희천 위수사령관
 
  그날 밤 북으로 후퇴가 시작됐다. 고급 군관인 나는 그래도 지프를 탈 수 있었다. 팔다리가 끊어진 병사들이 수 킬로미터에 걸쳐 길에 쓰러져 있었다. “살려 달라”고 소리치던 그들은 우리를 보고 “너희만 살겠다는 거냐?”며 욕을 했다.
 
  묘향산 인근 희천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유엔군의 공습을 받았다. 인민군 지프와 트럭들이 수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자강도(평북) 희천에 도착하니, 희천 당위원회에서 전갈이 왔다. 당위원회로 출두했더니, 당 선전선동부장 겸 최고군사위원인 김창만(金昌滿)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는 전에 형(정준채)의 소개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가 말했다.
 
  “동무를 희천지구 위수(衛戍)사령관으로 임명하오. 후퇴하는 인민군을 재편성해서 반격을 준비하시오.”
 
  황당했다. 비록 중좌 계급장을 달고는 있었지만, 나는 한 달여 전까지만 해도 평양음악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음악도였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군사교육도 받지 않고 벼락치기로 임관(任官)한 내게 위수사령관이라니….
 
  그런 내게 김창만은 “명령에 불복해 후퇴하려는 자는 장령(장성)이라 해도 그 자리에서 사살해도 좋다”면서 즉결처분권까지 부여했다.
 
  하지만 희천 위수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말 것도 없었다. 그날 밤 유엔기들이 희천을 맹폭(猛爆)했고, 우리는 싸워 보지도 못하고 다시 북으로 후퇴해야 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숨고 밤에만 이동하면서 자강도 강계로 후퇴했다. 강계로 가는 길에는 부상병을 싣고 가다가 유엔군의 공습을 당한 트럭들이 200m에 한 대꼴로 널브러져 있었다. 뒤에 수레를 매단 말들이 불에 타 나뒹굴고 있었고, 고기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김창만, “김일성, 그 새끼”
 
  10월 20일경 강계에 도착했다. 최고사령부는 만포 인근 고산진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시 강계를 지나 북으로 가는 길에 처음으로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과 조우했다. 그들의 무장은 초라했고, 어깨에는 장대에 쌀부대나 장작을 매달고 있었다. 꼭 시골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군기(軍紀)는 엄정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조선 땅에 가서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다치지 말라”고 엄명(嚴命)했기 때문이다. 광복 후 소련군의 약탈과 횡포에 시달렸던 북한 주민들은 그런 중공군에게 친밀감을 느꼈다.
 
  만포에 있는 피란민수용소에서 형수(任玉順)와 조카(鄭薰)를 만났다. 평양에서 만포까지 걸어서 피란을 온 그들의 형상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나는 가지고 있던 모포와 외투, 돈을 몽땅 그들에게 줬다. 당시 준채 형은 전쟁뉴스 영화를 찍어 필름작업을 하느라 중국 베이징(北京)에 가 있었다.
 
  고산진에 있는 최고사령부를 찾아갔다. 최고사령부라야 초가집 몇 채를 쓰고 있는 형편이었다. 조직보충국장을 찾으니 김세일 대신 김창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성격이 날카로워 ‘면도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는 내게 대뜸 “희천은 어떻게 하고 퇴각했느냐?”고 따졌다.
 
  나는 “희천방어를 위한 전투원들을 조직할 틈도 없었다”면서 유엔군의 엄청난 공습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 그도 수긍했다. 그곳에서 두 달여를 있었다. 김창만은 “김일성, 그 새끼는 전쟁도 할 줄 모르는 놈”이라고 공공연히 욕을 했다. 그러던 그가 후일 다시 김일성에게 충성을 바쳐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내각 부총리 등 요직을 지냈으니, 세상일은 참 모를 일이다.
 
  김일성을 비판하고 다니던 사람 중에는 민족보위성 문화담당 부상(副相·차관) 김일(金一)도 있었다. 그는 “미국 양키놈들이 참전할 것도 예상치 못했으면서 어떻게 전쟁을 저질렀는가. 나는 이 전쟁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김일성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겠다” “김일성은 ‘쌕쌕이가 없어서 졌다’는 식으로 쌕쌕이 핑계만 대는데, 비행기를 들고 나오리라고 생각지 못한 김일성에게 책임이 있다”고 했다.
 
  만포에는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널빤지로 벽을 댄 허름한 막사였으며, 10개 정도 있었다. 최고사령부의 허가 없이는 포로수용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한 경비병으로부터 “소설가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가 여기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다.
 
 
  김일성의 연설 듣고 환멸 느껴
 
  김일성은 한때 북한을 완전히 떠나 있었다. 평양을 빠져나온 그는 당초 강계에 후방사령부를 만들려 했으나, 그곳에서도 유엔군의 공습이 계속되자 중국 땅인 퉁화(通化)로 옮겼다. 북한의 주요 정부기관과 당기관들도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 사이에 중국 땅으로 이동했다. 조선노동당 중앙당은 퉁화, 외무성연락소는 선양(瀋陽)과 무단장(牧丹江), 중앙당학교는 노일령, 내각간부학교는 창춘(長春), 공공간부훈련소는 공주령에 있었다. 사실상 북한정권이 중국 땅으로 망명(亡命)한 셈이었다.
 
  1950년 12월 21일 중국 땅이 마주보이는 고산진에서 조선노동당 제3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다. 김일성은 당 간부는 물론 군장령, 대·중좌급 고급 군관들까지 참석한 이 회의에서 개전(開戰) 초기부터 그때까지의 상황을 분석, 비판했다. 김일성은 패전(敗戰)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첫째, 유엔군이 참전하리라는 생각을 못 했다.
  둘째, 부대의 규율이 엉망인데도 간부들의 연령이 낮아서 지휘 통솔에 문제가 있었다.
  셋째, 유엔군의 해·공군 포화(砲火)에 대한 사전 방비책이 없었다.
  넷째, 후방 보급활동이 잘 조직되지 못해 후방이 교란됐다.
 
  라디오로 김일성의 연설을 듣고 있던 나는 환멸을 느꼈다. 패배가 명백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자신의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고 군 간부들에게 책임을 전가(轉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후방 보급활동이 잘 조직되지 못했다’고 한 대목에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최고사령부 조직보충국 대열부 부부장이고, 희천에서는 위수사령관으로 임명됐으나 소임을 다하지 못했던 내게도 책임을 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을 공공연히 비판하고 다닌 김일은 이날 회의에서 “패배주의적인 언동을 했다”는 이유로 호되게 비판받은 후 철직(撤職·해임)됐다(훗날 그는 복권되어 노동당 비서, 노동당 정치위원, 제1부수상, 국가부주석 등을 지냈다). 빨치산 출신 최광(崔光·후일 총참모장, 인민무력부장 역임), 임춘추(林春秋·후일 국가부주석 역임), 연안파(延安派) 출신 무정(武亭) 등도 직위해제되거나 책임을 추궁당했다.
 
  이날 라디오 연설을 들으며 나는 “김일성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어쩌다가 군복을 입고 전쟁에 휘말린 내 운명에 대해 통탄했다. 후일 소련 유학 시절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운동에 공감해서 유학생들을 상대로 반(反)김일성운동을 벌이다가 소련으로 망명하게 되는 싹은 이때 움튼 것인지도 모른다.
 
 
  通化의 후방사령부로
 
  며칠 후 김창만이 나를 불렀다.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읽은 보고서를 작성했던 그는 의기양양해 있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이제 전쟁은 장기전(長期戰)으로 들어가게 됐소. 동무도 이제 음악일터로 돌아가시오. 중국 지안현(集安縣) 퉁화로 가면 내무성합주단이 있으니, 거기 가서 일하시오.”
 
  중공군 개입으로 한숨 돌리게 됐으니, 나처럼 벼락치기로 임관한 군관들은 이제 군복을 벗으라는 얘기였다. 내가 원해서 입은 군복도 아니고, 내가 군인 재목이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지만, 그런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안 좋았다. ‘전쟁 통에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갔다가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했다.
 
  “지금 군복을 벗을 수는 없습니다. 퉁화에 후방사령부가 생겼다니, 그곳에 가서 후방 지원 업무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창만도 내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럼 군복을 벗지 않아도 좋소. 후방사령부로 가든, 내무성합주단으로 가든, 일단 퉁화로 가시오.”
 
  내가 자리를 뜨려 하자 그 자리에 있던 중좌·대좌들이 “정추 동무, 권총은 풀어놓고 가야지”라며 가로막았다. 후방사령부로 가는 마당에 권총까지 들려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소리쳤다.
 
  “너희가 국장 앞이라고 큰소리치는구나. 전쟁터에서 권총을 풀어놓는 군인이 어디 있느냐?”
 
  김창만이 “권총을 차고 가게 해 주라”고 내 편을 들어주었다. 후방사령부 배속명령을 받은 나는 열차 편으로 중국으로 들어갔다. 당시 후방사령관은 민족보위상이던 최용건(崔庸建·후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국가부주석 역임), 총참모장은 이상조(李相朝)였다. 휴전회담 때 북한 측 대표로 나오기도 했던 이상조는 1950년대 중반 김일성의 숙청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다. 이후 우리는 김일성에게 반대하는 동지로 40여 년을 함께했다.
 
  전에 평양에서 최고사령부 조직보충국장으로 있던 김세일은 이때 후방사령부 조직보충국장으로 있었다. 그는 나를 조직보충국 총무부장(대좌)으로 임명했다. 군복·식량 등의 물자를 조달하는 자리였다. 당시 북한군과 피란민을 먹이는 식량이나 옷가지는 모두 중국에서 나왔다.
 
 
  민간인으로 돌아오다
 
  조직보충국 총무부장 자리도 오래가지 못했다. 넉 달쯤 지나 김세일이 나를 불렀다.
 
  그는 “사민(私民·민간인)들은 이제 원래 일하던 직장으로 돌아가게 됐다. 동무도 이제 음악대학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내무성합주단을 찾아갔다. 영화촬영소 시절 동료인 김원균(金元均), 준채 형을 따르던 문인 이문섭 등이 내무성합주단에서 일하고 있었다. 김원균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 ‘애국가’(북한국가로 한국의 ‘애국가’와는 다름) 등을 작곡한 인물이었다. 김원균에게 내 사정을 얘기했다.
 
  “김세일이 내게 음악대학으로 돌아가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김원균은 “무슨 소리냐? 우리 내무성합주단에서 같이 일하자”며 나를 붙잡았다. 김세일도 내가 내무성합주단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때는 1951년 5월이었다.
 
  1951년 6월, 내무성합주단원 50여 명은 기차와 트럭을 번갈아 타면서 20여 일 만에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합주단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영화촬영소로 달려갔다. 준채 형의 소식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베이징에 가 있던 준채 형은 마침 전쟁뉴스 영화 제작을 위해 평양에 나와 있었다. 우리 형제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한참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목숨이니 사진이나 한 장 찍어 놓자”면서 기념촬영을 했다.
 
  전쟁 중인데도 형은 영화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다. 며칠 후 형은 체코슬로바키아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 출품한 ‘조·소(朝蘇)친선의 노래’라는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는 통보를 받고 체코로 떠났다.
 
  그 후 제7기 소련유학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평양거리에 나붙었다. 북한에서는 1945년부터 매년 소련유학생을 보내 왔는데, 종래에는 고위층 당 간부나 그 자제들이 선발되다가 처음으로 공개경쟁 시험을 통해 유학생을 선발하게 된 것이다.
 
  나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얼마 뒤 평양 만경대 앞 양각도에서 교육성 주관 음악콩쿠르가 열렸다. 일종의 유학생 선발시험이었다. 실기는 피아노연주와 작곡의 두 과목, 필기는 노어·음악이론·수학이론의 세 과목이었다. 나는 무난히 시험에 합격했다.
 
 
  형과의 이별
 
  시험에 합격한 후 나는 의주에 있는 소련유학생강습소에서 6개월 단기속성 과정의 노어 회화(會話)교육을 받았다. 이미 노어대학을 졸업한 내게는 그리 어려운 과정이 아니었다.
 
  의주에 있을 때, 형의 소식이 전해져 왔다.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형이 수풍발전소 인근에 새로 마련된 영화촬영소에 와 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형에게 달려갔다. 40여 일 만의 만남이었다. 전쟁 통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었다. 형은 소련유학을 떠나게 됐다는 말을 듣자 크게 기뻐했다.
 
  “너는 꼭 가야 한다. 가서 신(新)문물과 문명을 배워 통일된 조국의 하늘 아래서 큰일을 하는 인재가 되어야 한다.”
 
  강습소 생활이 끝날 무렵, 신의주에 살고 있던 준채 형을 찾아갔다. 헤어질 때 준채 형은 신의주역까지 나를 배웅해 줬다. 내가 열차에 오르려 하는데, 형이 나를 불러세웠다. 형은 손목에 차고 있던 스위스제 노바(NOVA)시계를 풀어 내 손목에 채워 줬다. 이 시계는 50여 년에 걸친 망명생활 내내 내게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이것이 준채 형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의주강습소로 돌아와 보니 문제가 생겨 있었다. 내가 남한 출신이라는 것이 막판에 문제가 된 것이다. 소련유학이 무산될 판이었다. 나는 형을 통해 전에 인사를 한 적이 있는 허정숙 문화선전상을 찾아갔다. 허정숙은 내 얘기를 듣더니, “아새끼들, 별것 다 가지고 생트집이군. 사람을 그리 못 믿어서야 어떻게 하나”라면서 교육성으로 보내는 신원보증서를 써 주었다.
 
 
  고향친구 최석두의 죽음
 
  허정숙과 만나고 나오는데 우연히 고향친구인 시인 최석두(崔石斗)와 마주쳤다. 문화선전성 문화예술국에서 일하고 있던 그는 내가 소련유학을 간다는 말을 듣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시들을 줄 테니, 소련에 유학하고 있는 동안에 그걸 바탕으로 작곡을 해 보면 어떻겠니?”
 
  오래간만에 만난 고향친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며칠 후, 그의 시작(詩作)노트를 받기 위해 다시 문화선전성으로 찾아갔다. 문화선전성 청사 앞 계단에 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자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땅을 흔드는 굉음이 들렸다. 유엔군의 공습이 시작된 것이다. 문화선전성 건물에도 폭탄이 떨어졌다. 최석두가 폭탄 파편을 맞고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폭격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나는 친구에게 달려갔다. 피투성이가 된 그를 끌어안았지만, 그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나는 그의 품 속에서 내게 전해 주려던 시작노트를 꺼낸 후, 폭격을 피해 달렸다.
 
  1952년 1월 중순, 나는 제7기 소련유학생 40여 명과 함께 신의주역을 출발, 소련으로 향했다. 그것이 북한 땅, 그리고 준채 형, 북한에서 만났던 많은 문화예술인과의 마지막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정리=裵振榮 月刊朝鮮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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