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仁德 전 통일부 장관
⊙ 1932년 출생. 한국외국어大 노어과 졸업. 경희大 정치학 박사.
⊙ 중앙정보부 해외정보국장·심리전국장·북한국장, 극동문제연구소장, 통일부 장관 역임.
1950년 6월 26일 아침, 나는 여느 날처럼 학교에 갔다. 무장한 인민군이 학교를 포위하고 있었다. 하루 전날 전쟁이 났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졸업반이었던 우리 평양고보 3학년생들은 학교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 후가 기말시험이었기 때문이다.⊙ 1932년 출생. 한국외국어大 노어과 졸업. 경희大 정치학 박사.
⊙ 중앙정보부 해외정보국장·심리전국장·북한국장, 극동문제연구소장, 통일부 장관 역임.
돌이켜보면,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부터 학교는 시끄러웠다. 2학년 후배, 3학년 동기생 가운데 일부가 인민군 장교로 학교를 떠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사변(事變)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를 포위한 인민군은 선생님들을 닦달했다. ‘학생들을 인민군으로 자원입대하도록 설득하라’고 한 것이다. 일부 선생님은 눈치를 봤지만, 몇몇 기개 있는 선생님은 인민군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중에 연세대 사학과 교수를 지낸 차창열 선생님, 형법을 가르친 정영석 선생님은 지원서를 주지 않고 딴청만 부렸다. 이분들이 며칠 늑장을 부리는 사이 미군의 폭격이 28일부터 시작됐다. 평양 전체에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기회는 그때뿐이었다. 우리는 학교 담을 넘어 사방으로 튀었다. 멀리서 우리를 보고 있었을 선생님들의 모습이 아련하다. 나는 한달음에 고향집으로 향했다. 내 고향은 평양시에서 남쪽으로 20리(약 8㎞)에 있는 대동군 용연면 소리다. 고향집에서 막내아들을 노심초사(勞心焦思) 기다리던 부모님이 나를 반겼다.
막내아들 위해 굴을 파놓은 아버님
고향집에서 나는 아버님이 마련해 놓은 피란처에 들어가서 살았다. 아버님은 당신 연세 50세에 본 막내아들이 혹시 인민군에게 끌려갈까 봐 집 근처에 굴을 파놓고, 집 천장 한구석에 피란처를 만들었다. 내 고향집은 북한 정권의 감시대상이었다. 아버님이 파놓은 피신처가 아니었으면 나는 곧장 인민군에 끌려갔을 것이다.
우리 집이 북한 정권의 감시대상이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우리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집안사람들은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우리 집안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抗日)운동을 했는데, 형님들은 조국해방단 소속으로 활동했다. 형님들은 1944년 조국해방단 소속인 것이 드러나 형무소에 수감됐다. 1945년 광복 후 겨우 풀려나와 조국 광복의 기쁨을 맛보게 됐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풀려나온 형님들에게 더 큰 시련이 닥쳤다. 김일성(金日成)이 항일무장단체인 조국해방단을 자신의 어용(御用)단체인 민주청년동맹의 기관단체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일성의 사촌동생인 김원주가 넷째 형님과 ‘너나’ 하는 사이로 조국해방단 소속이었다. 김일성은 항일운동을 했던 사촌동생과 그 조직을 자신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도구로 만들고 싶어했다.
장(長)형님을 제외한 나머지 세 형님은 고민 끝에 고향을 등지고 1945년과 1946년, 서울로 남하했다. 이로써 고향에는 부모님과 장형님, 출산이 임박한 누님 한 분이 남아 있었다.
영국군과 중공군의 주둔지가 된 강씨 집성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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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중정부장의 극비 방북에 이어 이산가족 상봉 등 인도적 사업추진을 위한 남북 적십자회담이 열렸다. 1972년 8월 30일 평양 대동강 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차 본회담. |
나는 10월 중순이 돼서야 피신처인 굴과 천장에서 나왔다. 10월 16일로 기억한다. 아버님이 불러서 나가 보니, 영국군 선발대가 우리 집 마당에 짐을 풀고 있었다. 당시 우리 집은 고향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컸기 때문에 영국군 선발대가 우리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내 아버님은 젊었을 때 고향 마을 인근에 약 1만5000평의 땅을 사서 우리 가족 집을 짓고, 당신 사촌, 육촌 가족에게 땅을 나눠줘 집을 짓게 했다. 한마디로 ‘강씨’ 가족의 작은 집성촌(集姓村)을 만들었다. 나중에 항공사진으로 우리 고향 마을을 보니, 마을과 따로 떨어져 있는 정사각형 모양의 우리 집성촌 윤곽이 뚜렷했다.
전쟁 중에 고향집이 중공군의 야전병원이 됐다는 얘기를 훗날 들었다. 강씨만의 작은 집성촌을 만들겠다던 아버님의 바람과 달리, 고향집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국제 성씨(姓氏)들의 집합소가 됐다.
4개월 만에 피신처에서 나온 나는 고등학교에서 배운 짧은 영어로 영국군의 심부름을 하며 얼마간을 지냈다. 하루는 아버님이 나를 부르더니 ‘서울로 가라’고 하셨다. 서울로 떠난 세 형님의 안위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길로 짐을 싸서 서울로 향했다. 인민군들은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퇴각했고, 서울로 내려가는 길은 국군과 연합군 차지였다.
인민군 포로 수송 열차를 타기 위해 평양역에 도착하자, 낯익은 얼굴들이 사방에서 보였다. 모두 평양고보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평양 치안대에 있거나, 국군에 입대해 포로수송을 담당하고 있었다. 평양고보 친구들의 배려로 경기도 수색까지 쉽게 기차를 타고 내려갔다. 수색에서 곧장 형님들이 있는 영락교회로 가서 형제 상봉을 했다. 이때가 1·4후퇴 한 달 전이었다.
대구 피란길에 가고파의 김동진 선생 만나
1950년 12월 중순부터 북쪽에서 유엔군과 국군이 내려왔다. 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과 국군이 후퇴하기 시작했다. 서울은 아우성이었다. 고향집에 계시던 장형님이 서울로 내려왔다. 행방이 묘연했던 넷째 형님은 납북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서울 중구 충무로 극동빌딩 인근에서 인민군에 납치돼 끌려가는 걸 봤다는 목격자가 있었다. 남아 있는 형제는 대구로 내려갔다. 고향집에 계신 부모님과 누님 소식은 들을 방법이 없었다. 그저 살아계시기만 바랄 뿐이었다.
대구로 피란 와서 나는 학도병에 지원했다. 당시 지원서를 받은 곳이 대구 효성여대였다. 지원서를 쓰고 나오는 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가곡 ‘가고파’의 작곡가인 김동진(金東振) 선생님이었다. 김동진 선생님은 나의 형님들 숭실학교 후배였다. 나와 친구들이 “선생님”하고 부르자, 선생님이 “오호, 너희 평양놈들이구나”하며 반색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작곡을 하나 했는데, 노래 한번 불러보자”고 했다. 선생님이 풍금을 치고 우리가 노래를 했는데, 가사가 이렇게 시작됐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 데 초개(草芥)로구나.’
가사는 역사학자인 이선근(李瑄根) 선생님이 지었다고 했다. 전쟁 중에 두 천재가 의기투합해서 저 유명한 군가를 만들었다. 이선근 선생님은 말 그대로 양반(兩班)이었다. 군인으로 별을 달아서 무반(武班), 학자로 대학교 총장, 문교부 장관, 초대 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을 지내서 문반(文班)이었다.
공산주의 공부할 젊은 장교 발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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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29일 태극기가 꽃밭을 이룬 평양시민들의 이승만대통령 평양입성 환영대회. |
김동진 선생님은 나를 이선근 선생님에게 소개를 했고, 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이었던 이선근 선생님은 다시 정훈국으로 데려갔다. 나는 의정부 미 1사단 산하 예비 1사단으로 배치됐다.
이곳에서 전쟁 내내, 의정부부터 연천까지 일대 재건 사업을 담당했다. 민간 교회를 만들고 소학교를 만들어주는 작업을 했다. 당시 군대에 군종장교가 없어서 내가 군종장교를 불러오는 일을 도맡아 했다. 전선(戰線)이 수십 차례 오르락내리락한 끝에 결국 1953년 휴전이 됐다.
나는 인민군에 끌려갈 고비를 넘기고, 여러 차례 포탄을 피한 끝에 겨우 한국에서 살아남았다. 우리 가족은 남북분단처럼 둘로 나뉘었다. 부모님, 누님, 넷째 형님은 북한에 남았고, 형님 세 분과 나는 타향인 남한으로 내려왔다. 분단이 된 이후부터, 북에 있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시 부모님의 연세가 이미 일흔을 앞두고 있었고, 누님은 출산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김일성이 싫다고 피란 온 넷째 형님은 북으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난 후, 정훈국에 남아서 진로를 고민했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대학 갈 형편이 못 됐다. 정훈국 소속으로 KBS에서 대북방송을 했다. 당시 육군본부는 젊은 장교 가운데 공산주의에 대한 공부를 시킬 사람을 찾고 있었다. 실향민(失鄕民)으로 대북방송을 하는 내가 제격이라고 판단했는지, 나를 발탁했다. ‘공산주의 공부를 하면 학비를 대준다’고 해서 더 생각하지 않고 공산주의 책을 보기 시작했다. 공산주의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내가 병법을 맡을 테니,자네는 군사전략을 공부하게”
산더미처럼 쌓인 공산주의 관련 서적 사이에 야전침대를 놓고 밤새도록 읽고 또 읽었다. 국군이 북한 노동당 사무실 등에서 노획한 문서, 공산당 선언 등을 베껴 쓰면서 공부했다. 1954년 한국외대 노어과에 입학하면서부터,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엥겔스 등의 저술을 원전(原典)으로 공부했다.
1955년 대학 생활과 정훈국 장교 생활을 겸하며 생활하고 있을 때, 정훈국에 해병대 장교 한 명이 찾아왔다. 자신을 국방대학원 교수라고 소개하는데, 이분이 초대 교수부장을 했던 문희석(文熙奭) 장군이었다. 문 장군은 내가 공산주의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난 후부터 나를 유심히 지켜봤다. 어느 날, 다시 나를 찾아온 문 장군은 내게 이렇게 제안을 했다.
“내가 병법을 공부하고 있으니, 자네가 군사전략을 공부하게. 그럼 내가 영국 IISS(국제전략연구소) 회원이니 자네를 그곳에 소개시켜 주겠네.”
문희석 장군은 전쟁 전엔 중앙대 교수였다. 그는 병법에 관심이 있어,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군에 남은 사람이다. 그만큼 병법에 관심과 조예가 깊었다. 몇 번 만나 보니, 문 장군이 진실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의 의견을 따랐다. 대학 졸업 때까지 그와 함께 공산주의에 대한 공부를 했다.
당시 외대 옆에 사상계 사무실이 있었다. 공산주의 공부를 하다 막힐 때면 사상계에 가서 양호민 (梁好民) 선생님 등에게 조언을 받았다. 당시 사상계에 있던 분들은 “어린놈이 공산주의 공부를 하네”하시면서 귀여워했다. 신일철(申一澈) 전 고대 철학과 교수와 함께 여러 선생님에게 개인교습을 받았으니, 학자로서는 이보다 행복할 수가 없는 시절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해병대에 입대했다. 물론 문희석 장군의 권유 때문이었다. 해병학교를 거쳐 해병대 사령부에서 낮에는 해병장교로 일하고, 밤에는 밤을 새워 공산주의 책을 읽어 내려갔다. 얼마 있지 않아, 김성은 장군(국방부 장관 역임)이 해병사령관이 되고 문희석 장군이 작전국장이 됐다. 두 분이 나를 해병대 정보국으로 보내서 전략분석관으로 일했다.
쿠바 사태 후 중정 서기관으로 발탁
1년 후에 4·19와 5·16이 잇따라 터졌다. 박정희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중앙정보부가 창설됐다. 나는 중정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쟁이 끝난 후부터 중정으로 옮기기 전까지 약 8년간 공산주의에 관해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그 공부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62년 10월 22일 이른바 ‘쿠바사태’(쿠바미사일위기)가 일어났다. 전 세계가 핵전쟁 위기감으로 긴장했고, 중정 안에서도 갖가지 추측이 난무했다. 대부분의 중정 분석관이 ‘전쟁이 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가 전쟁이 나지 않을 것이라며 한창 떠들고 있는데, 당시 북한과장이 내 얘기를 우연히 들었다. 나를 불러서 갔더니 “왜 전쟁이 안 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하기에, 대략 이런 식으로 대답했다.
“전쟁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흐루시초프와 소련 공산당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쿠바는 미국의 목구멍에 낀 가시 같은 존재다. 전쟁을 해서 쿠바를 잃는 일은 이 가시를 제거하는 건데, 소련 공산당이 가시를 빼버릴 리가 없다.”
과장의 지시로, 쿠바사태 전망에 관한 보고서를 써서 제출했다. 과장은 이를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金鍾泌) 전 국무총리에게 올렸다. 그때부터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 매일 밤마다 외신이 들어오는 기계 앞에서 쿠바사태에 관한 기사를 훑어나갔다. 당시는 새벽 2시부터 4시까지는 외신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때 깜박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타다다닥’ 하는 소리에 잠을 깨보니 외신이 들어오고 있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송고된 기사를 봤더니, UPI발(發)로 ‘쿠바로 행하던 소련 선단(船團)이 소련으로 회항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떴다. 새벽 4시에 남산에서 내려와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가던 가벼운 마음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쿠바사태로 인정을 받은 나는 사무관 승진 6개월 만에 서기관으로 승진했다. 과장을 달기도 전인 1962년부터 대통령에게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북한과장이 됐을 때, 대한민국에 들어오는 모든 북한 정보는 나에게 집중됐다. 정보분석관 출신이었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배려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정보분석관의 중요성을 잘 알았고, 중앙정보부의 정보를 잘 이용하는 유일한 대통령이었다.
나에게 생업, 가족에게 업으로 남은 6·25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있었고 7·4남북공동성명도 발표됐다. 나는 당시 남북대화 사무국장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우리 일행을 태운 헬리콥터가 내린 곳은 내 고향 대동군 용만면 소리에서 불과 10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때 나는 전쟁 이후 헤어진 부모님, 누님, 형님 소식을 처음으로 들었다. 북한 당국은 내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하지만 언제 돌아가셨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납북된 넷째 형님은 살아계신다고 했다. 당(黨) 학교에서 당사(黨史)를 공부하고 가르친다고 했다. 북에 끌려가서 처형될 형편이었지만, 김일성의 사촌동행인 김원주가 넷째 형님을 살려주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만약 김원주가 1960년대에 죽지만 않았으면, 좀 더 편하게 살았을 것이다.
6·25가 발발했을 때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던 누님은 딸을 낳았다고 했다. 누님과 얼굴도 모르는 조카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평양에서 함경북도 회령으로 쫓겨났다. 누님의 남편, 내 매부가 전쟁 중에 동(東)평양 치안대를 맡았다. 매부는 홀로 월남(越南)해서 서울 근교에서 목사로 활동했다. 이런 매부의 전력(前歷) 때문에 북한 정권은 누님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님은 말도 못할 고생을 겪었을 것이다.
내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통일부 장관에 임명됐을 때, 동북 3성 어디선가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내 누님의 사위, 내게는 조카사위가 되는 이가 보낸 편지였다. 그는 북한에서 탈출해 동북 3성 어디선가 살고 있다며 자신을 한국에 데려가 달라고 했다. 나는 이 편지를 한국에 살고 있는 매형에게 보여줬다. 매형이 자신의 사위를 만나기 위해 접촉했지만, 결국 연락이 되지 않았다. 주위에서는 북한의 공작이었을 것이라고 했다.
6·25는 우리 가족을 두 쪽으로 갈라놨다. 하지만 내가 생업(生業)으로 ‘공산주의 연구’를 하게 된 것도 6·25 때문이다. 우리 민족 모두에게 그렇겠지만, 나와 우리 가족에게도 6·25는 업(業)으로 남아 있다.⊙
<정리=金南成 月刊朝鮮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