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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년 6월호

[柳亨錫] 16세 입대…전장에서 두 兄 잃어

피란지에서 방위군에 붙들린 큰형님 대신 입대
2년4개월 만에 휴가 나와서 두 형님 戰死 소식 들어
젊은이들에게 6·25를 제대로 알리고자 6·25 전사 8권 직접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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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亨錫 세무사
⊙ 1934년 출생. 대구농림중 2년 재학 중 입대. 건국대 졸업. 연세대 행정대학원 석사.
⊙ 1950년 8월 21일 입대~1954년 6월 15일 제대. 감사원, 국세청, 재무부 근무. 재무부 이사관 퇴직.
    서울대 법대·성균관대 경영대 겸임교수 역임. 세무사 개업.
  나는 경북 선산군 고아면 문성동에서 살았다. 구미역 북쪽 5km, 낙동강 서쪽 3km 지점이다. 대구 농림중 2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6·25로 7월 5일 휴교하여 집에 와 있었다. 7월 말경 소개령이 내려 피란을 떠났다. 11식구 중 54세이신 아버지는 일가(一家) 어른들과 집에 남았다.
 
  만삭인 둘째 형수도 함께 피란을 갔다. 우리 집은 소와 자전거가 있어 기동력이 좋은 편이었다. 자전거는 내가 기차 통학을 하면서 구미역까지 타고 다닌 것이다.
 
  짓골나루 주변 낙동강 양안(兩岸)이 피란민으로 메워져 그 넓은 백사장에 빈 곳이 없었다. 배가 도착하면 수백 명이 몰려들어 서로 먼저 타겠다고 난리를 쳤다. 일부 젊은 사람들은 물이 가슴팍에 차는 곳까지 들어가서 기다렸다가 오는 배를 타고 와서 자기 가족을 태웠다.
 
  나는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봇짐을 등에 진 노인이 배에 오르다가 걷어차여 물속에 거꾸로 처박히는 것을 보았다. 뒤로 벌렁 자빠지면서 머리가 물속에 처박혔고 이어서 다리가 물 위로 솟구쳤다가 그대로 가라앉았다. 순간 ‘저 노인 죽었구나!’ 하고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한참 후에 물 위로 갓이 솟아오르더니 다시 그 배에 매달렸다.
 
  우리 동네는 20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인데 류가(柳哥)가 13가구이고 타성(他姓)이 7가구였다. 류가는 모두 나와 동고조(同高祖)로 8촌 이내 친척들이다. 고조의 종손인 3종(8촌) 형님의 아들이 선산경찰서 경찰관으로 그곳에 나와 있었다. 이 사람이 우리 류가를 경찰가족이라고 하여 비교적 쉽게 배를 탈 수가 있었다.
 
 
  둘째 형수 피란길 산비탈에서 출산
 
  짓골나루는 선산군 강동 4개 면과 인근 의성, 군위 지역의 농산물을 구미역(경부선)으로 수송하는 통로가 되어 우마차를 운반할 수 있는 큰 배가 있었다. ‘구루마’(달구지의 일본말) 배라고 불렀다. 그래서 구미〜선산 간 국도(3등 도로)에서 이 나루로 큰길이 나 있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에 북한군 제15사단 주력(主力)이 이 길을 통해 낙동강으로 접근했다. 나루터에는 피란민이 길 양쪽에 두 줄로 끝이 안 보이게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우리 가족은 두 번으로 나뉘어 어두워질 무렵 강을 건넜다. 낙동강 흙탕물로 저녁밥을 지어 먹고, 백사장에서 홑이불을 덮고 밤을 새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강둑을 따라 한참을 하류로 갔다. 염천의 햇살이 달아오르자 백사장에서 뿜어내는 열기가 더하여 찌는 듯했다. 둘째 형수가 처지기 시작하더니 저만큼 뒤에 주저앉았다.
 
  둘째 형님이 한참 앞으로 가서 짐을 내려놓고 자전거를 가지고 가서 태워 왔다. 피란민이 좁은 강둑길을 메워 자전거를 가지고 거슬러 가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큰형님은 짐을 지지 못하여 자전거를 끌어야 했고, 지게질이 몸에 밴 둘째 형님은 짐을 많이 질 수가 있었다. 둘째 형수가 못 걷게 되자 자전거에 태워서 둘째 형님이 몰아야 했으므로 자전거에 짐을 실을 수가 없었고, 또 둘째 형님이 짐을 질 수가 없게 되면서 우리 일행은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결국 큰형님은 자전거에 짐을 싣고, 둘째 형님은 지게에 한껏 지고 한참 앞으로 가서 짐을 내려놓고 가족이 쉬는 동안 둘째 형님이 자전거를 몰고 가서 뒤에 처진 형수를 태우고는 한참 앞질러 가서 내려놓고, 다시 돌아와서 짐을 싣고, 지고 가는 방법을 택했다.
 
  정오 무렵 산등성이를 넘어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한참을 가다가 쉬고 있는데 1개 소대 규모의 군인이 분대 단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한 무리가 우리와 마주쳤을 때 한 군인이 다가와서 자전거를 뺏으려고 했다. 큰형님은 겁에 질려 어찌할 줄 몰랐다. 그때는 군인이 달라고 하면 무조건 주어야 했던 시절이다. 반항했을 때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가로막고 나서서 “안 됩니다. 저 사람을 태우고 가야 합니다” 하며 뒤에 처져 있는 둘째 형수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머쓱해진 군인은 되돌아갔다. 어머니(모성)의 힘이었다.
 
  얼마를 가다가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이 들렸다. 미군이 결전을 앞두고 피란민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강물에 네이팜탄을 투하한 것이다.
 
  낙동강 백사장에는 피란민이 버린 자루(包袋)가 허옇게 널려 있었다. 다급하니까 쌀만 다 가져가고 보리쌀은 버린 것이다. 우리 마을에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많은 집이 있었다. 그 집 형제가 4명인데 마지막까지 강가에 남아 있다가 버려진 보리쌀을 잔뜩 지고 가서 피란생활 중에 가장 배불리 먹은 집이 되었다.
 
  우리는 그날 천생산 남쪽 산비탈에 자리를 잡았다. 선산군 장천면 신장리다. 며칠 지나고 나서 8월 5일 둘째 형수가 산비탈에서 조카를 순산(順産)했다. 일주일쯤 더 있다가 어머니와 산모인 둘째 형수 내외 그리고 막냇 동생은 그곳에 남고, 다른 여섯 식구는 다시 길을 떠났다.
 
1952년 1월 파주 1사단 11연대 1대대 통신대원. 앞줄 왼쪽이 필자. 거치한 소총은 카빈총인데 통신병, 연락병, 헌병, 중대장, 소대장 등은 M1보다 더 가벼운 카빈 소총을, 일반 전투 보병은 M1소총을 지급받았다.

 
  셋째 형님은 피란지에서 강제 입대
 
  10여 일 후 영천군 화산면 냇가에 이르렀다. 버드나무 가지를 얼기설기 엮어서 햇볕만 가릴 수 있게 움막을 만들고 살림을 차렸다. 비가 오면 피할 방법이 없어서 사람도 살림살이도 다 비를 맞았다.
 
  어느 날 부인들을 따라 조롱 바가지를 들고 간장동냥을 나섰다. 종일 동냥하러 다녀 커피잔 반 정도를 얻어왔다. 길가에 청년방위대 초소가 있었고, 방위대원 두 사람이 상주하면서 모병을 하고 있었는데 젊은 사람은 보이는 대로 잡아갔다. 이들을 방위군이라고 했다.
 
  8월 17일 셋째 형님(20세)이 방위군에 붙들려 입대했다. 그날 나는 열두 살 난 동생을 데리고 하양(河陽-경산군 하양면) 시장에 가서 사과 두 접(200개)을 사왔다. 팔기 위해서였다. 하양 시장에선 사과값이 말도 못하게 쌌다. 한 접에 3000원씩에 샀는데 피란지에서 3배는 받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30세 된 큰형님도 방위군에 붙들려 갔다. 큰일이었다. 큰형님이 무슨 일을 당하면 집이 망한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나는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채 방위군 초소로 달려가 대신 입대를 자청했다. 내 나이 16세였다.
 
 
  소년병 입대
 
  그 사이 가족은 모두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아랫마을 신작로에 사는 어떤 사람이 안동네에 순사 아버지가 있다고 인민군에 일렀다. 어느 날 동네 어른들이 재당숙집 감나무 그늘에 모여 있는데 갑자기 인민군이 들이닥치더니 3종 형님 가슴팍에 삐죽한 창이 달린 장총을 들이대고는 “순사 아버지가 누구야!” 하며 소리를 질렀다. 짓골나루에서 우리를 경찰관 가족이라고 해서 배에 태워준 그 경찰관의 아버지였다.
 
  갑자기 당한 일에 그 형님(60대 초반)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이를 보신 아버지가 인민군에게 “순사 아버지가 죽을 작정을 안 한 이상 어찌 여기 남아 있겠소. 순사 아버지는 여기 없소”라고 타 이르면서 옆으로 비켜 세웠다. 그러자 다른 어른들이 끼어들어 대화를 하는 사이 아버지는 그 형님에게 “소 주게”라고 언질을 주었다. 다들 피란 가면서 소를 몰고 갔는데 그 집에는 소가 있었다. 그렇게 위기를 넘겼다.
 
  순사 아버지는 그 후 공포의 나날을 보냈다.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더니 몇 달 안 가 돌아갔다. 동네에서 남이 따라갈 수가 없게 일을 잘했고, 달밤에도 논을 갈아 화제를 낳았던 분이다. 장수할 거라고 평판이 있던 분인데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내가 방위군 초소에 간 날이 8월 18일이다. 사람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영천으로 가서 1박 한 뒤 기차를 타고 경주로 갔다. 절간처럼 큰 한옥으로 된 어느 학교에서 2박을 하면서 신체검사와 면접을 했다. 모두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몇백 명인지 몇천 명인지 우글거렸다.
 
  여기서 한동네에 사는 일가 5명을 만났다. 모두 강제로 끌려왔고, 나보다 세 살에서 다섯 살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이 군에 안 가려고 아프다거나 독자(獨子)라는 등 별의별 핑계를 다 댔지만 나는 오히려 안 받아 줄까 봐 걱정했다. 나를 면접한 방위군 대위는 “나이가 어려서 안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서 잘 싸울 수 있겠는가를 여러 번 따져 물은 것으로 기억된다.
 
  8월 21일 나는 약 170명의 장정 속에 끼여 방위군 신모 대위 인솔하에 대구로 갔다. 대구역에 내려 인원 점검을 했는데 한 사람이 모자랐다. 대구역에서 도보로 중앙통을 거쳐 삼덕동으로 가는 도중 신 대위는 반대편에서 오는 젊은 사람을 불러 세웠다. 그 젊은이는 당당하게 종이쪽지를 내보였고, 신 대위는 그것을 받아 보지도 않고 북북 찢어 팽개치고는 대열에 합류시켜 인원을 채웠다.
 
 
  요지경 신병 교육대
 
  대봉동 어느 제사(製絲)공장에 설치된 교육대에서 우리는 170여 명을 1개 중대로 하여 6개 초대(哨隊-구대)로 편성되었다. 학생 40명은 독립초대를 편성하여 ‘학도대’라고 불렀다. 첫날 미군이 입었던 헌 작업복을 받아 입고 훈련했는데 다음 날 저녁에 다시 국산 옷과 모자 그리고 신발이 나와서 갈아입었다. 일제 99식 소총이 지급되었다.
 
  후방에 있는 교육대인데도 매끼 주먹밥을 먹었다. 정말로 어른 주먹 크기밖에 되지 않는 밥덩이 속에 공장에서 만든 된장을 티스푼 한 술 정도 넣어 주었다. 이것이 반찬이다. 가끔 소고기 콩나물국이 나왔다. 1개 초대에 한 바께스(양동이) 나오는 데 그릇이 없어 손으로 떠먹었다. 서로 달려들어 손으로 건더기를 건져 밥 위에 얹어 먹었다.
 
  식사시간이면 전쟁이 벌어진다. 큰 밥덩이와 국 건더기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쟁투를 벌였다. 한번은 식사 군기가 나쁘다고 장교가 와서 기합을 준 일이 있다. “식사 중지, 먹던 밥 그대로 두고 밖으로 집합!”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모두 밥덩이를 입이 찢어져라 쑤셔 넣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먹다 남은 밥덩이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집합했다. 교관은 우리를 총을 들어 머리 위로 뻗쳐 올리게 해 놓고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감시했다. 나는 총을 머리에 받쳐놓고 한 손을 살짝 내려 주머니에 있는 밥을 꺼내서 기합받는 동안 다 먹었다.
 
  몇 사람이나 일을 했을까 모를 작은 공장에 1500여 명의 훈련병이 자고 먹고 쌌다. 아침에 화장실에 가면 입구에서부터 인분이 꽉 차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참고 교육을 나간다. 돌아와 보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그러나 잘못 들어갔다가는 똥 무더기에 빠지고 만다. 기간병이 삽으로 인분을 벽 쪽에 모아놓고 그 위에 겨를 뿌려 눈가림만 해 놓았는데 언뜻 보면 흙더미 같았다. 모르고 밟았다가는 정강이까지 빠진다. 많은 사람이 빠졌다. 10일간 교육받으며 배울 것은 다 배웠다. 분대전투훈련, 각개전투훈련, M1 소총 실탄 사격을 했다. 그러나 이렇게 훈련을 받고 일선에 나간 신병들은 총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여 곤욕을 치렀다.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만 죽어라
 
  나는 9월 1일 팔공산에 있는 제1사단에 배치되었다. 포항에 있는 제3사단으로 가다가 영천이 적에게 점령되어 통로가 차단되었으므로 가까운 제1사단으로 간 것이다. 하양 어느 냇가에 이르렀을 때 장교가 와서 “대학생 일어나!” “중학교 6학년 일어나!” 하고 소리쳤다.
 
  그는 그렇게 일어난 사람 10여 명을 데리고 갔다. 우리는 다시 도보로 큰 개울을 거슬러 한참 올라갔다. 또 어느 지점 개울가에 이르렀는데 어떤 군인이 와서 “중학생 일어서!” 하더니 학년을 묻고는 3학년 이상을 골라서 10여 명을 또 데리고 갔다.
 
  남은 50여 명은 한참을 더 개울을 따라가다가 도로에 이르러 일산 트럭 두 대에 나누어 타고 꼬불꼬불 산길을, 고개를 몇 개씩 넘고, 개울도 건너면서 한참을 올라가서 팔공산 자락에 있는 마을 입구에 내려서 도보로 마을에 들어갔다.
 
  군인들이 득실거렸다. 제1사단 제11연대 제1대대 본부였다. 일등중사 계급장을 단 사람이 와서 “중학생 일어서!” 했다. 나 한 사람밖에 없었다. “국민학교 졸업한 사람” “국민학교 다닌 사람” 이렇게 6명을 선발하여 데리고 갔는데 그곳이 통신대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뽑혀 와도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 몇 있었다.
 
  ‘이렇게 세상을 사는 사람도 있구나! 앞서 학생들을 불러낼 때 나도 학년을 높여서 따라갔으면 좀 더 낫고 편한 곳으로 갈 수가 있었을 텐데….’
 
  한참 뒤에 해본 생각이었다. 우리 신병 6명도 그 후 나와 경찰관 출신 김정기(金正基) 외에는 모두 중대로 전출했다. 먼저 뽑혀 나간 사람은 사단사령부, 두 번째는 연대본부인 것 같고 마지막은 대대본부였다. 결국 배우지 못한 농촌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만 죽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제1사단 제11연대 제1대대 통신병이 되었다.
 
  다행히 내가 팔공산에 간 이후 국군은 더는 후퇴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전선에 있는 전 장병에게 호 밖으로 나와서 고함을 치라고 했다.
 
  “인민군 동무들이여! 손들고 넘어오시오. 전쟁은 끝났습니다.”
 
  우리는 호 밖으로 몸을 드러내 놓고 밤새도록 소리를 질렀다. 온통 금속성 굉음과 화염으로 차 있던 산골짝에 인간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9월 24일경이다.
 
  다음 날 아침에 인민군은 전선에서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연전연패로 전투력을 잃은 데다가 인천상륙작전 소식이 인민군 전선에 퍼지면서 전의(戰意)를 상실한 인민군은 뿔뿔이 흩어져서 북으로 달아났다. 인천상륙이 9월 15일 이루어졌는데 낙동강 전선에 있던 인민군 부대에 알려진 것은 9월 20일 이후다. 숨겨 왔던 것이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왔다. 동명(칠곡군)에서 다부동을 거쳐 북진(北進) 길에 올랐다. 다부동은 불과 한 달 전에 우리 제11연대가 혈전을 치른 전장이다. 고참병들은 그때의 무용담을 화제로 삼으면서 마냥 즐거워했다. 감회가 새로웠을 것이다.
 
  10월 8일 서울에 입성했고, 10일 개성에서 38선을 넘었다. 다부동을 출발한 지 보름 만이다. 인민군에 쫓겨 후퇴할 때보다 사단장의 독전에 쫓겨 더 힘든 진격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잠도 깨지 않은 상태에서 행군을 했다. 두어 시간 가면 대대 보급차가 밥을 싣고 온다. 아침밥 먹고 또 걸었다. 국도를 걸을 때는 길 양쪽에 서서 행군대형을 이루고 산악이나 도로가 아닌 곳을 갈 때는 한 줄로 간다. 완전무장이다.
 
  며칠이 지났을까. 발바닥이 부르터서 물집이 생겼다 터졌다 하더니 온 발바닥이 빈틈이 없이 물집으로 범벅이 되었다. 엉거주춤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발을 질질 끌면서 M-1 소총을 지팡이 삼아 엉금엉금 기어갔다. 무리한 행군에 지쳐 10분간 휴식에도 잠을 잤고, 걸으면서도 잤다. 앞 사람에 부딪혀서 정지하고 뒷사람에게 부딪혀 걸음을 옮겼다.
 
 
  ‘발’이 ‘차’를 이긴 평양점령 경쟁
 
  부지런한 고참병이 하는 방법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행군 간에 있는 10분 휴식시간에 신발과 양말을 벗어 발에 바람을 쐬고, 가까이 물이 있으면 맨발을 물에 담갔다. 잘 때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을 배낭 위에 얹어 놓았다. 극도로 지쳐 있는 상태에서 무척 하기 힘들었지만 죽지 못해 했고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풍속이 생겨났다. 어떻게 생긴 사람들이 양말을 벗으면 꼭 코로 가져갔다. “아이 인민군 썩는 냄새…” 하며 툴툴 털고는 배낭 위에 올려놓는다. 우리 코에 너무 익숙해진 냄새가 바로 그 냄새였다.
 
  우리가 그렇게 고생한 것은 평양 출신 사단장 백선엽 장군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고향 평양을 먼저 점령하고 싶어했다. 우리 제1사단은 미 제1기갑사단 및 미 제24사단과 함께 미 제1군단에 예속되어 있었고 북진 중 조공(助攻) 사단으로 주공(主攻) 미군 두 사단을 후속하게 되어 있었다. 백선엽 사단장이 밀번 미 1군단장에게 “한국군이 평양을 점령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미 제24사단을 제치고 주공을 맡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제1사단은 기동력을 갖춘 미 제1기병사단과 평양 점령 경쟁을 벌였다. 자동차로 가는 미군을 걸어서 이기겠다고? 가당치도 않은 게임을 했다. 그래서 몰아붙였고, 그래서 발이 차를 이겼다.
 
  우리는 10월 19일 평양을 선착으로 점령했다. 제1사단은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전 장병이 1계급 특진하는 영예를 얻었다. 나는 그때 제2중대 통신병으로 중대장을 따라 대동문을 통해 평양시내로 진격했다. 제2중대 선임장교는 평양사범학교를 나온 육사 제8기생 손달주(孫達周) 중위였다. 그가 중대의 선두에 서서 도로 중앙으로 진출했는데 연도 환영 인파 중에서 그의 동창생들이 뛰어나와 얼싸안고 반기는 모습은 감격스러웠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중공군의 기습, ‘이제는 죽었구나’
 
1951년의 필자. 입고 있는 옷이 당시 국군의 동계복장 모습이다.

  10월 25일 평북 영변에서 중공군 포로를 잡았다. 중국말을 잘하는 백선엽 사단장이 직접 심문하여 중공군 참전 사실을 알았고, 미 제8군을 거쳐 맥아더 사령부에 보고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정규 전투부대가 아니라고 믿지 않았다. 일주일이면 압록강에 도달한다고 들떠 있던 우리는 중공군과 새로운 양상의 전투를 치르면서 한 달여 만에 겨우 평북 운산〜태천에 진격하여 고전했다.
 
  11월 29일 8시경, 태천전투 마지막 날. 대대 지휘부가 가옥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나는 밥을 먹고 나오다가 선임하사관 지시로 무전병 식사교대를 하게 되었다. 무전병 김광렬 이등중사는 어딘가를 호출하고 있다가 나에게 송수화기를 건네며 “대대장님께 연대 불러” 했다.
 
  나는 바로 연대(주파수 14)를 불렀다. 상대방이 비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연대는 다른 대대와 교신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3대대(13)부터 거슬러 갔다. 조용했다. 제2대대(12)로 갔다. 교신음이 들렸다. 연대와 제2대대의 교신이라고 판단하고 핸드 셋을 눌렀다. 그리고 “로버트(연대)는 레드(제1대대)로 나와라”라고 짧게 말하고 대대 주파수(11)로 돌아와 기다렸다.
 
  교신 중에 제3의 무전기가 핸드 셋을 누르면 교신이 중단되고 이쪽 말이 들린다.
 
  “레드 레드 여기는 로버트….”
 
  곧 연대로부터 호출이 왔다.
 
  “로버트 여기는 레드, 작전주임을 바꿔라. 대대장이다.”
 
  “대대장님, 연대 나왔습니다.”
 
  대대장이 연대와 교신하는 동안 신발끈을 매고 무전기를 등에 졌다. 이때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렸고,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대대장이 방에서 나와 뛰었다.
 
  중공군의 기습이었다. 밖에 나와 보니까 수백 명의 병사가 후방으로 도망치는데 그 모양과 소리가 꼭 메뚜기떼가 나는 것과 흡사했다. 푸른 빛깔의 제복이 그랬고, 쉭쉭하며 나는 듯 뛰는 소리가 그랬다. 키가 유난히 큰 제3중대장 이재인(李載仁) 소령이 버티고 서서 공중으로 권총을 쏘면서 “돌아서라”고 고함을 쳤다.
 
  나는 대대장 꽁무니를 따라 죽을 힘을 다하여 들판을 가로질러 뛰었다. 앞을 막은 산을 넘어야 안전지대다. 숨이 막히고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뒤에서는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고, 옆으로는 총탄이 우박처럼 픽픽 소리를 내며 꽂혔다.
 
  내 일생 그렇게 다급하게 그리고 빨리 뛰어 본 경험이 없다. 30분쯤 지나고 나서 능선 위에 올라섰다. 대대장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참모들과 OP(관측소) 요원들이 모여든 것은 한참 후다.
 
  “중대 불러 봐.”
 
  한숨 돌린 대대장이 말문을 열었다. 중대는 응답이 없었다. 대대장이 지시하는 시각과 집결지를 일방적으로 알렸다. 산악지형에서는 전파 장애가 많아서 들렸다 안 들렸다 한다. 그래서 계속 송신을 하여 이쪽 상황을 알려야 한다.
 
  이것도 내 나름 터득한 경험이다. 오후 5시경 마지막 집결지인 산비탈 밭에 이르러서야 중대로부터 대대에 접근하고 있다는 교신이 왔다. 모든 중대가 내가 전달한 장소에 시각을 맞추어 집결하였다.
 
  각 중대는 내 말을 다 듣고 있었다. 응답만 안 했을 뿐이다. 이날 교신이 되지 않은 것은 중대장이 응답을 못 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중대가 곤경에 처해 있는데 작전명령을 받으면 골치 아프니까 통신병에게 엄명(?)을 내려 응답을 못 하게 한 것이다.
 
  대대장은 나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하사관이 10여 분을 불러도 연결하지 못한 연대를 단 1분도 안돼서 연결했고, 모두가 각개약진으로 제멋대로 도망치는 상황에서 무전기를 메고 대대장을 바짝 쫓아왔고, 중대와 교신이 안되는 상황에서 대대장이 지시한 대로 중대를 유도하여 전 대대가 이상 없이 정한 시각과 장소에 집결할 수 있게 하였다.
 
  내가 대대 무전병으로 자리를 굳히는 계기였다. 16세, 입대 3개월, 육군이등병. 그 후 전투가 벌어지면 무전기는 내 등을 떠나지 않았다. 대대장은 류중수(柳重秀) 중령(육사 3기생, 1996년 작고). 그는 “류형석이 아니면 대대작전을 지휘할 수 없다”며 나를 무전병으로 묶어 두었고, 이후 2년1개월 동안 대대 무전병으로 근무했다.
 
 
  4년 만에 제대
 
  1952년 10월 1일 육군헌병학교에 입교명령을 받고 정든 제1사단을 떠났다. 그해 8월 사단 사령부에서 헌병학교 입교시험을 봤다. 응시자는 우리 대대에서 나 외에 작전과와 정보과에 근무하는 중학교 5학년 두 사람이었고, 제11연대에서 12명, 사단 전체에서 99명이었다. 시험과목은 국어, 수학, 국사, 지리, 작문이었다.
 
  한 달쯤 후에 합격 통지를 받았다. 대대에서 나 하나였다. 사단 전체에서 12명이고 제11연대에서 3명이었다. 대단한 경쟁이었다. 나는 체면이 섰고, 다시 한 번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대구 수창국민학교에 자리한 헌병학교에서 1개월 교육을 받고, 마산에 있는 제60헌병중대(후에 5헌병대대 제17중대)에 배치되어 복무하다가 1954년 6월 15일 만기제대했다.
 
  대구 근교 허허벌판에 있는 제5헌병대대 막사에서 대대장에게 제대신고를 했다. 영문(營門)을 나서면서 많이 울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정이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고생을 해서였을까? 만 3년10개월 동안 청춘을 바쳤기 때문일까!
 
  군대생활 4년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함께 근무했던 지휘관과 장교들, 선배와 동료 이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많은 참전자가 군대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배고프고 추운 것이라고 했다. 나는 집에서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입었기 때문인지 그런 기억은 별로 없다. 전투가 계속되면 제때 밥을 못 먹는 경우가 있었고, 밥 생각이 날 정도로 배고픈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기억은 다 사라졌다. 매끼 쌀밥을 먹었고, 심심치 않게 고깃국을 먹었다. 농촌 가정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집에서는 구경도 해보지 못한 내복과 외투를 입었다. 이것도 나에게는 호사다. 한겨울에 고지에서 수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지만 추웠다는 기억은 나지 않는다.
 
  통신대 신병들은 기합을 아주 많이 받았다. 주먹으로 맞고 발로 차이고, 침대 몽둥이와 야전삽으로 엉덩이가 짓무르도록 맞았다. 식기에 음식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그것을 핥았다. 제때 밥을 주지 않았다고 어떤 상사가 숟가락 모서리로 왼쪽 광대뼈를 힘껏 때렸다. 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팼다. 의무대도 가지 않고 그냥 버텨 냈는데 한겨울이어서 그런지 덧나지 않고 나았다. 그만큼 나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강인해져 있었다.
 
 
  두 형님의 전사와 몰락한 집안
 
  1952년 11월에 휴가를 갔다. 1950년 7월 말 피란으로 집을 떠난 후 2년4개월 만이다. 동네에서 편지는 내가 제일 먼저 왔는데 휴가는 제일 늦게 왔다고 했다. 나보다 하루 먼저 붙들려 입대한 셋째 형님이 1950년 10월 26일 행방불명된 사실을 알았고, 셋째 형수가 와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셋째 형님은 6·25가 나던 해 5월에 결혼했고 새 형수는 신행 전이었다. 처녀나 다름없는 형수를 데려오다니 이 무슨 몹쓸 일인가? 기가 찼다. 사장(査丈·사돈집 웃어른)댁에서 형님 실종소식을 듣고 “류(柳)가의 귀신이 돼야 한다”며 보낸 것이다.
 
  둘째 형님도 1952년 5월 17일 입대하고 안 계셨다. 28세였고 피란 가다가 낳은 조카가 두 돌이 지난 때였다. 나는 그 형님이 가장 보고 싶었는데 많이 아쉬웠다. 나는 일선에서 새 훈련화가 지급되면 둘째 형님 드린다고 1년씩 가지고 있었다. 그 후 휴가 와서 둘째 형님마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53년 7월 14일이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던 아들이 밟혀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피란지에서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내가 가장 닮았고, 가장 좋아한 형님이다. 나는 아버지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한없이 울었다.
 
  그때는 이미 동생이 둘이나 가 있었고, 더구나 한 사람은 전사한 상태였다. 얼마든지 안 갈 수 있는 명분이 있었다. 내가 제대했을 때 주변에 군에 안 간 20대 중·후반의 젊은이가 많았다. 이웃동네에 사는 면 직원은 영장을 받고 동네에서 환송회를 열어 주었는데 끝내 입대하지 않았다. 돈이나 권력이 있으면 군에 안 가는 것은 물론 군에 간 사람도 빼내던 시절이다.
 
  둘째 형수는 비록 아들은 하나 있었지만 22세의 청상이었다. 우리 집은 꽤 많은 농사를 지으며 남이 부러워할 만큼 유복하게 살았다. 알짜 같은 두 아들은 없어지고 졸지에 청상과부 두 며느리가 남았다. 집안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큰형님은 농사를 지어 보지 않았다. 땅을 반 정도 처분하여 신작로에 있는 정미소를 사서 경영했다. 정미소와 양조장은 부자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운이 다한 탓일까? 한밤중에 정미소에 화재가 나서 쇳덩이 하나 쓸 수 없게 되었다. 복구하느라고 나머지 땅을 다 팔았다. 돈이 모자라서 빚을 졌고 완전히 망하여 몇 년 동안 피죽도 제대로 못 먹고 살았다.
 
  내 진로가 막막했다. 군에 그대로 있을 걸 하는 후회도 해 봤다. 나는 독학으로 보통고시에 합격하여 1957년 4월 20일 4급공무원(주사)에 임용되어 심계원(감사원 전신)에 근무했다.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녔을 경우 대학 2학년을 마칠 나이였다. 또래보다 평균적으로 4년 앞섰고, 공무원으로 있는 동안 늘 그렇게 앞서 갔다.
 
 
  영화도 진실을 왜곡하진 말아야
 
  나는 <월간조선> 2004년 6월호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일이 있다. 그 영화를 보고 ‘이렇게 6·25를 호도해도 되는가’ 분노했다. 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주인공 이진태의 아내 영신이 죽는 장면에서 “배급 타 먹으려고 여성동맹에 가입한 것이 무슨 죄라고…”라며 되뇌는 대사가 나온다. 그러면서 영신이 배급을 타 오는 장면을 간단하게 보여주었다.
 
  여성동맹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보여주지 않고 단지 배급을 타 오는 장면과 그 말 한마디로 전체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 누구나 말도 안되는 짓이라고 여겼을 것이고 대한민국을 저주했을 것이다. 여성동맹은 민주청년동맹, 농민동맹과 함께 3대 악질조직이다. 물자동원, 인력동원, 의용군 모집, 반동분자 색출에 앞장선 점령정책의 전위조직으로 저들의 혓바닥에 걸리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하지만 여성동맹에 가입하였다는 이유만으로 죽이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체포한 여성동맹원 수십 명을 구덩이에 몰아넣어 총으로 사살한다. 영신이도 그 속에 끼여 죽는다. 우리에게는 없는 북한식 학살방법이다. 우리는 부역행위자를 재판에 넘겨 사형판결을 받았을 때 총살했다. 인민군보다 더 악질적인 부역행위자가 많았기 때문에 한꺼번에 수십 명을 총살한 예가 있었고, 이럴 경우 무연고자는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물론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대량학살로 비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영화와 문학이라도 진실은 제대로 알려야 한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으니, 젊은 사람들이 6·25를 잘 모르고 있다. 이 틈을 비집고 일부 좌경성향의 지식인이나 이념집단이 그릇된 인식을 전파하는 심히 우려할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북한의 생활수준은 우리의 20분의 1인데 군비는 우리의 두 배다. 북한이 주민을 굶겨가며 왜 군비증강에 열을 올리고 왜 핵개발에 올인하는가? 지하 300m에 김정일 가족이 전시에 거처할 지하별장이 있고, 평양교외 30km 지점에 있는 전시 노동당중앙당위원회 건물과 지하터널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시설을 왜 필요로 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나는 6·25를 제대로 알리고자 낙동강방어선 전투에 관한 책(전 8권)을 썼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에서부터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는 데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나의 작은 노력이 젊은이들에게 6·25가 무엇인지, 북한이 어떤 집단인지를 아는 데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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