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雲龍 전 IOC 부위원장
⊙ 1931년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미 조지워싱턴대 대학원 수료.
⊙ IOC 부위원장, 16대 국회의원, 세계태권도협회(WTF) 창설 총재, 국기원(KKW) 창설 원장.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역임.
⊙ 現 대한체육회(KOC) 고문, 대한태권도협회 명예회장.
1950년 5월, 나는 연희대 1년을 마치고 제2회 행정고시 3부(현 외무고시) 준비에 한창이었다. 1학년을 마치면 본(本)고시를 치를 수 있었기 때문에 입학하면서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931년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미 조지워싱턴대 대학원 수료.
⊙ IOC 부위원장, 16대 국회의원, 세계태권도협회(WTF) 창설 총재, 국기원(KKW) 창설 원장.
대한체육회장 겸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역임.
⊙ 現 대한체육회(KOC) 고문, 대한태권도협회 명예회장.
그땐 6월에 1학기가 시작됐기 때문에 5월 말에 2학년 진급자격을 얻어 8월에 시험을 볼 예정이었다. 나도 다른 고시(考試) 준비생들처럼 밥 먹는 시간과 화장실 가는 시간, 자는 시간 등 4~5시간을 빼고는 하루종일 공부만 했다.
외교관 시험은 고등고시 행정3부로 헌법·행정법·국제법·영어와 선택 과목 하나를 치러야 했다. 책을 달달 외웠다. 영어는 자신 있었기에 그만큼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바야흐로 만 19세에 외교관 시험 합격이라는 ‘신기록’ 수립이 눈앞에 다가오는 듯했다.
원서 마감일인 1950년 6월 20일, 종로세무서에서 2000원짜리 인지(印紙)를 사서 붙여 지금의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모퉁이에 있던 고시위원회에 원서를 냈다. 행정3부는 8월 4일부터 12일까지 본고시를 치게 돼 있었다. 8월 3일 시험장에 모여서 4일부터 12일까지 시험을 볼 예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최연소 합격의 꿈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원서를 제출한 지 닷새 만에 6·25가 터진 것이다. 외교관 시험은커녕 국가가 존망(存亡)의 기로에 서게 됐다.
6월 27일 학교 측이 학생 전원을 노천극장에 소집했다. 서울이 함락되던 날 아침이었다. 전교생 1000여 명 가운데 600여 명이 모인 것 같았다. 인민군 야크전투기(소련제 프로펠러 전투기)가 여의도 비행장을 폭격하고, 국군을 실은 화물열차가 서울 서북쪽 수색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김윤경(金允經) 총장서리가 “국가위기사태로 휴교(休校)한다”고 선언했다. 결사대를 모집했는데 2명이 신청했다. 그때 비장했던 분위기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미 인민군은 서울 북부인 미아리, 창동 등지까지 밀고 내려와 있었다. 하지만 서울 시민들은 상황을 전혀 심각하게 파악하지 않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국군이 서울을 사수(死守)할 것이라고 믿었다.
휴교령(休校令)이 내려진 직후, 나는 대구 고향친구이자 야구선수인 변응원(고인)과 함께 바로 서울역으로 갔다. 어머니가 계신 대구로 달려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역원(驛員)은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열차는 이제 없다”고 했다. 열차가 하나 서 있었는데 피란민이 열차 지붕에까지 새까맣게 올라가 있었다. “열차가 안 간다”는 승무원의 말을 순진하게 믿고 돌아왔다가 꼼짝없이 서울에 갇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기차는 몇 시간 뒤에 서울을 떠났다고 한다. 아마 그것이 마지막 남행열차였던 것 같다. 하는 수 없이 변응원과 함께 서울 종로구 명륜동3가 ‘경(經)학원’ 앞에 있는 그의 2층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전쟁이 터지자 매일같이 대구역 앞에 나와 아들을 기다리셨다고 한다. 나는 그 열차를 놓친 후 서울이 수복될 때까지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나는 1931년 3월 대구 봉산동에서 김도학(金道鶴)·이경이(李慶伊)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북 영천 사람으로 대구 조선민보사 경리부장이었고, 어머니는 전주 이씨로 친가 쪽은 왕족(王族)이었다.
내가 여섯 살 때인 1936년, 아버지는 급성폐렴으로 돌아가셨다. 기적의 묘약(妙藥)이라던 페니실린이 들어오기 6개월 전이었다.
서울에서 이화여고를 다니던 어머니는 결혼한 뒤 대구에서 살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식들을 데리고 다시 상경했다. 당시로는 현대적인 교육을 받았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서양식 테이블 매너를 가르친 이른바 ‘신여성’이었다. 어머니는 1968년 68세로 별세했다. 36세에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30여 년간 아들 둘을 키운 뒤 고난의 인생을 끝마쳤다.
방송국, 녹음기 틀어놓고 다 도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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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 14일 구만리발전소에서 필자. |
6·25 직후 서울시민들은 전쟁소식에 목이 말랐다. 그러나 뉴스를 방송하는 곳은 남산 KBS 라디오뿐이었다. 그러나 방송국 사람들은 전쟁이 발발하자 녹음기만 틀어놓고 다 도망가 버렸다.
6월 27일 오후가 되니 포탄 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그날 밤 한강철교는 폭파됐다. 서울시민은 꼼짝없이 시내에 갇히게 됐다. 동대문시장에서는 스리쿼터 트럭을 세워놓고 헌병들이 “빨리 귀대하라”고 확성기로 소리치고 있었다.
듣기로는 포천서 밀려오는 인민군과 국군이 미아리에서 격전을 벌였고, 다음 날 새벽 인민군이 서울로 들어왔다.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변응원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혹시 포탄이 집에 떨어지면 어쩌나’ 하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그날 밤, 인민군은 서울을 완전히 장악했다. 6월 28일 새벽까지 “쾅~! 슝~!” 하는 포격소리가 들렸다. 나는 변응원과 집에 함께 있었다. 좀이 쑤셔 종로4가 근처로 나가 보니 거리 곳곳에는 임시진지에서 저항하다 죽은 국군의 시신이 즐비했다.
이틀 후, 인민군은 혜화동 서울여자의과대학병원(지금 이대부속병원 자리)에 있던 부상자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그곳에 진주(進駐)했다. 인민군의 사기(士氣)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고, 병원의 인민군 부상병들은 따발총을 마구 쏘아대곤 했다. 인민군은 거리를 활보하며 하늘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친구와 나는 총성(銃聲)에 놀라 화장실 창문으로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았다. 인민군 2개 분대가량이 도로 양측을 2개 조로 나뉘어 행군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방으로 숨었다. 잠시 후 변응원은 개를 끌고 밖에 산보를 나갔지만, 나는 그대로 방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인민군 10여 명이 착검(着劒)을 하고 집에 들이닥쳤다. 우리를 국군 패잔병으로 본 것이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천장과 가구, 다다미 마루 등을 마구 칼로 찔러댔다. 그중 하나가 “총을 쏜 놈이 누구냐, 무기는 어디에 숨겼느냐”며 눈을 벌겋게 뜨고 소리쳤다.
변응원의 모친은 울며불며 “왜 이런 짓들을 하느냐”고 소리쳤다. 아래층에서 소란을 피운 그들은 내가 있는 2층으로 올라왔다. 내 멱살을 쥐더니 “무기를 내놔!”하고 윽박질렀다. 나는 그순간 ‘이렇게 죽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다.
금테에 별 표시가 있는 견장을 단 인민군 중위가 권총에 총알을 장전하더니 나한테 “베란다로 나오라”고 했다. 나가면 방아쇠를 당길 것 같았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며 안 나가고 버텼다. 그때 개를 끌고 밖에 나갔던 변응원도 인민군에 끌려 들어왔다.
그가 옥신각신하는 사이, 잠시 위기를 모면하고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우리보다 한 해 선배인 서울대 법대 3년생 한태원이 변응원의 집에 들렀다가 붙잡힌 것이다.
그가 평소 좌익운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가 돌아오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인민군 군관(軍官)을 향해 당시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혁명’ ‘조직 책임자’ 등의 좌익 용어를 써가며 “내가 서울대 법대 오루구(조직책)”라며 열변을 토했다.
그의 기세에 눌린 인민군 중위는 총을 거두며 살기 등등한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군관은 우리를 감시할 병사 한 명을 남겨두고 집을 빠져나갔다.
과천 이모집으로 피신
해가 진 후, 인민군들은 다시 한 번 집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나와 한태원 등을 포함해 변응원 가족 전원을 끌어내 보위부 사무실로 쓰는 안호상(安浩相) 초대 문교부장관 집으로 끌고 갔다. 한밤중에 끌고 가는 것은 반드시 죽이려고 그러는 것이라 여기면서도, 우린 무기력하게 순순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보위부 소좌는 우리를 하나하나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태원이 다시 일장연설을 한 덕에 “오해받을 짓을 하지 말라, 보름 동안 가택연금한다”는 훈시(訓示)를 듣고 밤늦은 시간에 풀려났다. ‘왜 인민군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을까’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인민군이 학교 앞을 행군하고 있을 때, 누군가 2층집 창문으로 밖을 내다본 것을 인민군들은 자신들을 쏘려고 했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인민군 보초는 일주일 동안 집을 지켰으나, 변응원 모친이 끼니를 챙겨주며 잘 구워삶는 바람에 큰 봉변을 당하지는 않았다.
하루는 “동네 사람 모두 나오라”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가 보니 동네 사람은 서너 명에 불과했고, 어린 아이들만 앉아있었다. 큰 소나무 아래 동회(洞會·동사무소) 직원 등 두 명이 손을 뒤로 묶인 채 꿇어앉아 있었다.
모자에 빨간 완장, 카빈총을 거꾸로 멘 자가 “너희 놈은 동회 자금으로 고리대금업을 하며 인민의 고혈(膏血)을 빨아먹고…”라더니, “즉결처분하려는데 찬성하는 사람은 박수를 치라”고 을러댔다.
앞줄의 어린아이들이 영문도 모르고 박수를 쳤다. 그가 목덜미에 총구(銃口)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는 메마른 총성이 나고, 두 사람은 볏단처럼 옆으로 푹 고꾸라졌다. 시체를 가마니로 덮어놓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이 나타나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다. 말로만 듣던 인민재판이었다.
불안해진 나는 노량진에서 나룻배를 타고 과천 우면산 기슭에 있는 이모 집으로 피신했다. 더 이상 친구집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천은 노량진이나 말죽거리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인민군들은 개전 초기와는 달리 ‘의용군’이란 명목으로 징병(徵兵)을 시작했다.
2개월 동안 이모댁이 있는 우면산(牛眠山)에서 숨어지냈다. 그곳도 인민군 점령 치하(治下)이긴 마찬가지였다. 중학동창 이중우와 함께 논두렁에서 자기도 하고, 청계산에 올라가 도토리를 따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우면산으로 피란 온 사람 중에 한통숙(韓通淑) 상공부 차관도 있었다.
이모가 가끔 몰래 주먹밥을 가져다주었다. 정해진 시간에 이모가 오지 않으면, 산기슭 밭에서 오이를 따 먹거나 도토리를 따 먹기도 했지만, 허기질 때가 많았다.
인천상륙 소식 듣고 방공호서 나왔다 ‘발각’
그러던 어느 날, 미군(美軍)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함포사격 소리가 들려 우면산 꼭대기에 올라가 보니 거대한 전함에서 함포가 번쩍번쩍 불을 뿜는 것이 보였다. 미군이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미군의 그림자도 볼 수가 없었다.
인민군들은 미군들의 상륙을 피해 산속으로 도망쳐 올라왔다. 우리는 인민군을 피해 산 중턱으로 내려와 볏짚단 속에 숨어 있었다. 미군 정찰대가 전차를 끌고와 산을 향해 포격을 가하자, 인민군은 단말마적(斷末魔的)으로 저항했다.
조금 있으니 인민군들의 “만세” 소리가 들렸다. 미군 정찰대가 적의 저항에 후퇴한 것이다. 이튿날 미 공군 폭격기가 날아와 폭격을 해댔다. 인민군 패잔병들은 미 공군 폭격기, 전차 로켓포 공격에 맥을 못췄다. 나는 볏짚단 속에 숨어 있다가는 양쪽에서 포탄을 쏘아대는 바람에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판단, 동네사람들이 파놓은 방공호 속에 숨었다.
9월 25일 무렵, 새벽에 전차 소리와 미군 병사들의 영어 대화가 들려왔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바깥 구경을 하러 나왔다가 그만 후퇴하던 인민군 패잔병에게 걸렸다. 그들은 미군들의 인천상륙에 밀려 산속으로 도망쳐 왔던 것이다.
총을 들이대고 “너는 뭐야” 하고 묻기에 엉겁결에 “교원(敎員)이오” 하고 대답했다. 그는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그냥 갔다. 마침 연희대 교복인 감청색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교원 복장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이젠 살았구나’ 싶어 방공호 속으로 쏙 들어갔다. 정말 죽을 고비를 두 차례나 넘긴 셈이다.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계속 북상(北上)했다. 과천 고개를 걸어넘어 서울로 다시 들어갔다. 징병 소집령이 집집마다 나왔는데, 서울에서 며칠 지내다 보니 장교후보생 모집도 있었다. 국군과 미군의 연합작전이 절대적일 때였으므로 마침 ‘육군본부 국제연합 연락장교단 모집’ 공고가 나붙었다. 영어에 자신이 있어 이건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응시 자격이 21세 이상이었다. 내 나이 19세. 나이를 속여야 지원할 수 있었다. 종로1가에 있는 연희대 학도호국단 본부로 가 2학년 재학증명서를 뗀 뒤, 4학년으로 고치고 나이도 21세로 올렸다.
함께 피란 생활을 했던 한통숙 차관에게 “신원보증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군대에 간다는데 문제될 게 무어냐”며 추천서를 써준 덕분에 합격할 수 있었다. 공문서 위조(?)였지만 전쟁 통에는 다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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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요찬 1군사령관 전속부관 시절, 1군사령부를 방문한 미군 장교들과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가운데가 송요찬 1군사령관, 앞줄 왼쪽 둘째가 박정희 참모장, 맨뒷줄 오른쪽 두번째가 필자다. |
가수 玄仁을 피신시켜
나는 첫 장교생활을 6사단에서 시작했다. 처음 전방 배치 발령을 받고 부임한 부대가 보병 6사단 7연대였다. 장소는 연대본부가 위치한 충북 광혜원리의 광혜의원이었고, 연대장은 임부택(林富澤) 대령이었다. 그는 이른바 카이저(Kaiser) 수염을 하고, 방한모와 방한복을 입는 등 독특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임부택 대령은 6·25전쟁 발발 직후 춘천(春川)에 있는 6사단 7연대장으로 서울이 2일 만에 함락당하는 등 모든 전선이 무너질 때, 인민군 침공을 6일간이나 막아냈다.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할 때, 그는 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합창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압록강 물을 떠서 보낸 것도 임부택 대령이었다.
임부택 대령을 만난 것은 1951년 1월 7일이었다. 이때 7연대는 압록강 초산에서 밀려 내려와 동두천을 거쳐 광혜원리까지 남하해 있었다.
상급부대인 6사단 사령부(張都暎 사단장)는 충북 진천에 위치했다. 진천(鎭川)서 광혜원리는 40리(16km)로 중간에 하천이 있는데, 당시는 다리가 없어 오갈 때는 걸어서 물을 건너야 했다.
1950년 12월 23일 밤 10시, 청량리 역에서 육군본부 보급품과 쌀가마를 잔뜩 실은 화물열차를 탔다. 쌀가마를 천장 바로 밑까지 가득 실은 까닭에 그 위에 앉은 나는 머리를 숙여도 자꾸 천장에 방아를 찧었다. 그렇게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자세로 기차를 탄 채 중앙선, 즉 양평-문경-안동-영천을 거쳐 다음날인 12월 24일 오후 4시 대구역에 도착했다.
앞서 유엔 연락장교단은 서울의 명동 천주교회 내의 소학교에 있었는데, 갑자기 비상소집령이 내려지고 모두 청량리역에 집결하게 된 것이다.
주번사관이 현 중위(가수 玄仁의 동생)였는데, “나는 외출이 안 되니 청진동에 있는 형 현인에게 가서 청량리로 나오라고 이야기 좀 해달라”고 사정했다. 갔더니 어떤 여자와 함께 있기에 얘기를 전했다. 우리 초급장교들은 쌀가마 위에서 추위에 벌벌 떨고 있었고, 현인은 서국신 중령과 스토브 옆에 있었다.
유엔 연락장교단의 초임장교들은 대개 서울대, 연희대, 고려대 학생들이었다. 현인에게 ‘신라의 달밤’을 불러달라고 주문하자, “나라가 이런 상태인데 좀 그렇다”며 “이 다음에 회복이 되면 부르겠다”고 사양하는 것을 지켜봤다.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쳐 대구에 왔고, 대구향교에 주둔했다. 곧 이듬해인 1951년 1월 3일 서울이 중공군에 의해 함락되고 나는 1월 4일 대구를 출발해 남하하는 수많은 피란민과는 반대 방향으로 대전과 천안에서 각각 1박을 하고 진천에 있는 6사단 사령부를 찾아간 것이다.
林富澤 연대장의 전속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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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10일 제3군단 제1사단에서 실시된 보전포 협동작전장에서 김정렬 국방장관의 통역을 하고 있는 필자. |
6사단사령부에 찾아가니 “6사단 7연대로 가라”고 했다. 6사단 7연대에는 연희대의 임익순(任翊淳·연세대 상경대학장 역임), 고려대의 최영춘(崔永椿·한독 상임고문 역임) 등 학생장교들이 임관해 와 있었다.
연대장에게 신고를 했는데, 어린 19세의 학생장교를 귀엽게 보았는지 임 대령은 나를 계속 대동하고 다녔다. 그때부터 임부택씨가 연대장-부사단장-사단장을 지내는 동안 동고동락하는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한미 연합작전이 절대적이고 미8군이 작전권을 갖고 있어 대대까지 미국 군사고문이 나와 있을 때였다. 1951년 1월 25일 유엔군은 일제히 용인, 이천, 여주, 원주선을 공략하며 재차 북진을 시도했다. 이때 6사단 7연대는 용인(그 당시 금낭장)의 네거리 서북쪽의 151고지를 점령했다.
나도 임부택 연대장을 따라 경기도 백암의 전방지휘소까지 갔다. 용인 전투가 끝나자, 7연대는 사단 예비연대가 돼 장호원리까지 이동해 보름쯤 있었다.
7연대는 그 후 광탄에서 고립된 적이 있었는데, 탄약 등 보급품은 낙하산으로 공수(空輸) 받았고, 음식은 쌀과 파와 소금밖에 없어 소를 잡아먹기도 했다. 이후 다시 횡성, 여주 쪽으로 전진했고, 임부택은 부사단장이 됐다. 나도 사단 작전처로 옮겼다가 부사단장 부관이 됐다.
한번은 장호원에 연대가 주둔하고 있을 때다. 가수 고복수(高福壽)가 찾아와 “울산 고향에 가야 하는데, 미군이 허가를 안 해 줄 것 같다”며 사정을 하기에, 연대 행정반의 영문타자기를 가져와 영어로 미군 허가증을 그럴듯하게 책임자(소령)의 사인까지 해주었던 일이 있다.
1951년 4월, 사단사령부가 가평 강변에 천막을 치고 전방부대가 사창리에 올라갔을 때, 중공군 2개 사단의 인해전술로 6사단은 괴멸 직전 상태로 후퇴했다.
미군 사단도 후퇴를 해야 했을 때, 임 부사단장이 박창원 (朴昌源·인사참모)소령 외 2명과 적지(敵地)에서 전투 지휘 중 포위돼 후퇴를 못하고 말았다.
임 부사단장은 나무껍질을 뜯어먹으면서 나흘을 헤매다가 춘천의 미군진지 앞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미군의 사격을 받았으나, 한국군 부사단장으로 판명돼 미군의 도움으로 후송돼 왔다. 장도영 사단장도 겨우 빠져나왔다.
6사단은 용문산(1157고지)까지 후퇴했고, 사단사령부는 용문산역 근처 벌판에 마련했다. 7사단 예하 2연대·7연대·19연대는 용문산 일대 방어를 위해 배치됐다. 즉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에 대비한 것이다.
임부택은 용문산에 배치돼 있는 각 연대 소대장 이상을 소집시켜 놓고 ‘사주방어(四周防禦) 7원칙’을 강의하고 다녔다. 이때는 사병은 물론이고, 장교들도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용문산에 가려면 은행나무로 유명한 용문사에서 차를 내려 능선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두세 시간이 족히 걸렸다. 그래도 임부택은 뛰다시피 달려 올라갔다. 나와 헌병 연락병, 둘이서 수행하는데 20세 청년인 나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그때 산을 너무 올라다녀 산에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곧 5월 중공군 2차 춘계공세가 있었고, 중공군은 한 봉우리에 하루 저녁 포탄 10만 발을 퍼부었다. 이곳에서 세계 전사상(戰史上) 최초의 ‘사주방어’에 성공한 것이다.
100 대 1 경쟁 뚫고 포트베닝 유학
1951년 7월 초, 6사단이 춘천과 화천을 점령하고 있을 때, 슬슬 연락장교 임무에 회의가 생겼다. ‘남자로 태어나 부하들을 이끌고 전투를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 동래(東萊)에 있 보병학교에 입교해 4개월 교육을 받고 ‘보병장교’가 됐다. 1951년 12월 보병 중위로 진급한 나는 동해안 양양의 5사단에 배속됐다.
5사단은 백선엽(白善燁) 장군이 지휘하는 1군단 소속이었다. 예비사단이었던 5사단은 1952년 1월 “일선 사단으로 전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양양에서 간성으로 올라갔다.
그때 건봉사(乾鳳寺)에는 11사단의 1개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전투 중 실화(失火)로 사찰을 다 태웠다. 건봉사는 한국의 4대 사찰로 불릴 만큼 큰 절이었다. 신라 법흥왕 시절 창건됐을 때 이름이 원각사였고,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僧兵)을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1953년 1월, 나는 1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미국 보병학교(포트 베닝) 유학 시험에 합격했다. 한국에는 4년제 육사가 없던 시절이라 정규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가 부족했다.
장교 중에서 250명을 뽑아 150명은 미국 본토의 포트 베닝(Fort Benning) 보병학교로, 100명은 포트 실(Fort Sill) 포병학교로 보내 6개월간 훈련시킨 뒤 일선 작전장교로 배치할 때였다. 총 5차까지 진행됐는데 나는 4차였다. 이전 멤버 중에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포트 실)과 김종필(金鍾泌) 전 총리(포트 베닝)도 있었다.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로 가서 1개월간 소양교육을 받았다. 미국 풍물, 간단한 영어, 넥타이 매는 법, 양식 먹는 법 등이었다. 소금국만 먹던 장교들이 미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것을 예상하고 사전교육을 했던 것이다.
3월 15일 우리는 부산에서 2만톤급 미국 군함을 타고 20일간의 태평양 횡단 길에 올랐다. 출발 전 백선엽 참모총장이 우리를 격려하러 대구역에 나왔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20일 걸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목적지인 조지아주(州)까지 나흘간 기차로 갔다. 우여곡절 끝에 조지아주 포트베닝에 있는 미 육군보병학교에 도착했다. 훈련은 사격·학술교육·전술훈련 등이었다. 미국 노인들은 우리가 6·25전쟁에서 귀국한 2세인 줄 알고 “집에 가는 거냐”며 물었다.
매일 세 끼를 양식으로 먹는데 20명이 앉는 테이블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장교가 한 명씩 배치됐다. 내가 “스크램블드 에그” 하면 나머지 사람은 모두 “세임(Same)” 하고, “프라이드 에그” 하면 또 “세임” 하는 식이었다. 한 달치 ‘핫소스’가 사흘 만에 다 떨어졌다고 했다.
교내에 조지아대 분교가 있었다. 훈련 중이었지만 미국 대학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한 달에 150달러씩 지급하는 월급을 아껴 25달러를 내고 ‘미국정치론’ 한 과목을 등록했다.
라디오나 손목시계가 PX에서 10달러 하던 시절이었다. 한국군에서 영어를 제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은 나였지만, 미국 대학 강의는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1953년 5월 30일, 백선엽 대장이 포트베닝을 방문해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그는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한국군의 미래를 짊어진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군사학 지식을 쌓으라”고 격려했고, 우린 담배를 나눠 피워가며 격의 없는 토론을 했다. 그때 교육받던 이들은 차규헌(車圭憲·육사8기) 대장, 윤필용(尹必鏞·육사8기) 전 수경사령관, 박종규(朴鐘圭·육사8기) 전 경호실장 등이다.
훈련을 받던 도중인 1953년 7월 23일, 휴전협정이 맺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승만 대통령이 “도미(渡美) 유학생들을 귀국시키도록 조치했다”는 라디오 방송도 있었다.
포트 베닝의 유학생 단장은 손희선(孫熙善·육본 인사참모부장 역임) 대령이었다. 그는 “아직 명령을 못 받았다”며 교육에 계속 참가하게 했으나 포트 실에서는 교육을 중단시키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우리는 9월 2일 졸업식을 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항을 떠날 때 갑판에서 스카이라인을 보며 “언제 다시 미국에 오겠는가” 하고 아쉬워했다. 그때는 나중에 미국을 안방 드나들 듯이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9월 27일 인천에 도착한 우리는 대구로 가서 해산했다. 내가 배속된 27사단은 양양 낙산사 앞 벌판에 있었고, 나는 양양 산골의 79연대 정보주임장교로 부임했다.
1군사령부에서 박정희 소장 처음 만나
정보장교로 있을 때 27사단에서 시범이 있었다. 기존 3각 사단(3개 소대, 3개 중대, 3개 대대, 3개 연대 시스템)을 4각 사단으로 바꾸고, 후방 요원을 전방에 투입하는 개념으로 27사단을 ‘시범사단’으로 정한 것이다.
전군(全軍)에서 모인 군단장들과 군사고문단 앞에서 영어로 브리핑을 했다. 이때 장도영(張都暎) 2군단장, 송요찬(宋堯讚) 3군단장, 최영희(崔榮喜) 5군단장, 이한림(李翰林) 6군단장도 왔다.
브리핑을 좋게 봤는지 장도영 장군과 이한림 장군이 동시에 나를 전속부관으로 요청했던 것 같다. 이형석(李炯錫) 27사단장은 장도영 장군의 신의주(新義州) 동중 선배였다. 의리상 나를 2군단으로 보냈는데, 발령은 6군단으로 났었다.
2군단에 있을 때, 부대원들이 화천 북쪽 적근산(赤根山·해발 1073m)에서 호랑이 새끼를 잡았다. 이승만 대통령께 보낸다고 해서 내가 이송(移送) 책임을 맡았다. 호랑이 새끼를 우리에 넣어 경무대로 가서 이 대통령께 보여드린 뒤 창경원에 보관시켰는데,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2군단과 6군단의 힘겨루기 틈에 끼여 공중에 떠있는 신세였던 나는 1954년 10월, 결국 경기도 포천에 있는 6군단으로 부임했다. 6군단은 의정부에 있는 미 1군단 작전지휘하에 있어서 나를 작전연락장교로 파견했다. 미 1군단에 있으면서 미국소설을 하루에 한 권씩 읽었다. 또 USAFI라는 미군교육원에서 한국말을 가르쳤는데, 학생이 꽤 많았다.
1955년, 미국 유학 기회가 또 생겼다. 이번에는 스페인어를 배울 수 있는 곳을 택했다. 멕시코와 접경지인 텍사스주 엘파소였다. 그곳의 텍사스 웨스턴 칼리지에서 1년간 공부했다.
엘파소 인구의 75%가 멕시코인이었다. 멕시코에서 매일 전차를 타고 엘파소로 통근하는 사람도 많았다. 사용하는 말이 전부 스페인어였고, 라디오에서도 스페인어가 나와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陸士에서 밴 플리트 장군 통역
1958년 4월 20일, 나는 친척 소개로 만난 박동숙과 서울 소공동 외교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응준(李應俊) 체신부 장관(초대 육군참모총장)이 주례를 섰고, 장도영 육군참모차장이 축사를 하고, 조상호가 사회를 봤다.
1959년 2월, 1군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으로, 백선엽 참모총장은 연합참모의장으로, 유재흥(劉載興) 연합참모의장은 1군사령관으로, 장도영 장군은 교육총본부장으로 옮기는 대이동이 있었다.
나는 송요찬 총장의 전속부관이 되어 그를 따라 서울에 올라왔다. 서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계엄사령관 부관으로서 4·19를 겪게 된다.
참모총장실에서는 내가 수석 부관이었고, 김성진(金聖鎭) 대위(훗날 체신·과기처장관)가 내근, 이병간 대위(나중에 소장까지 진급)가 수행 부관이었다. 김 대위는 육사 11기 1등, 이 대위는 12기 1등 졸업생이라 뽑아온 것이다.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부정선거라 해서 전국이 시끄러웠다. 미국 간섭도 심해지고 여기저기서 데모가 일어났다.
3월 31일, 우리나라 육군사관학교에서 밴 플리트 장군 동상 제막식이 있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육사 동기인 밴 플리트 장군은 6·25 때 미8군사령관이었고, 휴전 뒤에는 대통령 특사로 와서 한국경제 부흥을 도운 사람이다.
제막식에서 나는 밴 플리트 장군의 연설문을 통역했다. 매우 추운 날이어서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담요를 덮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연설문을 읽을 때 휘청휘청했고, 이전처럼 즉석 영어 연설도 없었다.
무척 약해진 것 같았다. 원래 밴 플리트 장군은 4월 7일쯤 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미국대사관에 갔다 오더니 그 다음 날 바로 귀국해버렸다. 불과 보름 정도 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는 것을 보면서 영원할 것 같던 자유당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허무한 순간을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