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메뉴
메인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별책부록
  1. 2010년 6월호

[李萬燮] 戰時에 空士 들어갔으나 교내 소란에 책임지고 퇴교

연세대 입학 25일 만에 전쟁발발…열흘 만에 도보·뗏목 타고 대구로
피란 도중 만난 인민군 장교, “대구 가서 환영 준비나 하라우”
소련군의 헝가리 강점 때 ‘헝가리 학도의용군’ 조직하기도

著者無   

  • 기사목록
  • 프린트
李萬燮 전 국회의장
⊙ 1932년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연세대 명예정치학 박사.
⊙ 동화통신·동아일보 기자, 제6·7·10·11·12·14·15·16대 국회의원, 국회의장 역임.
  1950년 봄 나는 고민에 빠졌다. 대구에서 정미소를 하던 아버지가 사업에 망해 합천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대륜중학교 시절 농구선수로, 수영선수로 또한 응원단장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했지만 대입을 앞두고 막막해졌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의과대학에 진학하라고 권했지만 나는 큰물에서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꿈은 통일된 한국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었다. 내 안의 피를 뽑아 주전자에 담아 삼팔선을 지워야겠다는 나름 순수한 열정을 가졌었다. 나의 서울행 결심에는 대구 대륜중 선생님들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다.
 
  “학비야 가정교사를 하든 장학금을 받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니 만섭이 넌 주저하지 말고 서울로 가라.”
 
  그해 신입생 선발은 연세대가 가장 빨랐다. 백낙준(白樂濬) 박사가 총장으로 계실 때였는데 서울대와 고려대보다 20일 정도 빨리 특차 전형을 했었다. 그런 만큼 많은 학생이 몰려 경쟁률이 24대 1이나 됐다.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가장 기쁜 일은 결혼과 대학교 합격,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대학 합격이 가장 기쁜 일로 생각된다.
 
  문제는 대학 등록금이었지만 나는 내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 막연하게 믿었다. 그러나 부모님은 내 합격증을 보고도 그리 기뻐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 학비를 벌어서라도 서울로 진학하겠다고 끝까지 우겼다.
 
  마침 나의 사정을 잘 아시는 대륜중학교 선생님이 월급을 떼어내 입학금과 한 달치 하숙비를 마련해 주셨다. 만약 스승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의 정치인생도 없었을 것이다. 학비 마련에 앞장서 주신 권진태(權鎭泰) 담임선생님과 반기화(潘基華) 선생님은 그래서 더욱 각별하다. 선생님 덕택으로 1950년 6월 1일 무사히 입학식을 치렀고 서대문 충정로에 하숙집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정외과 입학 동기로는 한기춘(韓基春·전 한국외대 교수)·이종익(李鍾益·전 청주대 총장)·한배호(韓培浩·전 고려대 교수)·서대숙(徐大肅·전 하와이대 교수)·임철규(林喆圭·전 시사저널 사장) 등이 있었다. 이 중 서대숙 박사와 한배호 박사는 6·25 직후 미국 유학을 갔다. 또한 같은 해 입학했다가 6·25동란이 발생하자 바로 군에 입대한 오자복(吳滋福) 전 국방장관과 민족일보 조용수(趙鏞壽) 사장도 입학 동기다.
 
  그러나 원대한 꿈에서 시작했던 서울 생활은 고달프기 짝이 없었다. 첫 달 하숙이 끝나감에 따라 학비를 벌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서울 돈암동에 살던 이갑성(李甲成·제2대 민의원) 의원을 찾아가 가정교사 자리를 부탁한 일도 있다. 이 의원은 몇 달 전 선거운동차 모교 졸업식장에 오셨다가 졸업생 송사로 눈물바다를 만든 나의 웅변을 보시고 “서울에 오면 한번 찾아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연세대 응원단장으로 활약하던 시절.

 
  ‘골골골’ 소리의 정체
 
  하지만 입학 25일 만에 전쟁이 터졌다. 우리가 그렇게 당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라디오를 틀면 온종일 국민을 안심시키는 이승만 대통령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친애하는 서울 시민 여러분. 지금 불법 남침을 개시한 북한 괴뢰군은 우리의 충용무쌍(忠勇無雙)한 국군의 반격으로 도처에서 섬멸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군은 가까운 시간 내에 공산 괴뢰군을 완전 섬멸하게 될 것인즉, 이를 굳게 믿고 시민 여러분은 추호도 불안해하거나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말 것이며….”
 
  27일 밤엔 밤새도록 서대문 쪽에서 ‘골~골~골’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라디오엔 군가와 북진 중이라는 얘기만 흘러나왔다. 하도 이상하다 싶어 이튿날 아침 일찍 서대문 네거리로 나가 보았다.
 
  놀랍게도 인민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보무도 당당하게 거리를 행진하는 게 아닌가. 밤새도록 요란하게 울린 그 소리는 탱크 소리였던 것이다.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거리로 나온 시민 표정 역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인민군 탱크는 홍제동에서 독립문을 지나 서대문 네거리로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전쟁으로 인한 고생은 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6월 28일 한강 다리가 끊어지자 이젠 정말로 적지에 남게 된 것이다. 게다가 29일부터는 식량 구하기조차 어려워져 얼마 안 되는 양식을 아껴야 할 상황이 됐다. 내가 거처하던 하숙집에서는 밥까지 끊어버렸다. 선생님 월급에서 뗀 한 달 하숙비가 소용이 없게 된 것이다.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이상직(李相直·전 구미시장)·김병렬(金秉烈·개인사업) 등 중학 동기생들의 하숙집을 전전해야 했다. 염치없게도 공깃밥을 나눠 먹고 ‘눌은밥’을 축내야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자 경기도 양주에 사는 먼 친척집을 찾아갔다. 모내기 일을 거들어 주고 감자 한 자루를 얻어다 삶은 감자로 끼니를 이었다. 얻어온 감자를 형편이 딱한 하숙집 주인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쇠라도 녹여 먹을 나이에 굶게 되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해 7월 8일 결국 정외과 동기인 김경덕(金景德·전 국회의장 보좌관)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영어사전 하나만 달랑 챙겨 길을 재촉했다. 친구 김경덕의 고향은 경북 선산군(現 구미시) 장천면이었다. 광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경기도 이천을 지나 장호원, 충주, 수안보 쪽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인민군 최전방 부대 바로 뒤를 따라간 셈이었다. 한번은 인민군 정훈장교가 우리를 “여보, 여보” 하며 불러 세웠다. 나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랬더니 인민군 장교는 “대구 가서 환영 준비나 하라우”라고 했다. 조사도 안 하고 돌려보낸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아마 며칠 후면 남한 전체를 붉게 물들일 수 있으니 이까짓 대학생 한둘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내려가는 내내 배가 고팠지만 그나마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길가에서 과일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길가의 수박과 참외를 따 먹으며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했다. 피란길에 국군을 보지는 못했다. 그만큼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열흘 만에 대구 도착
 
미8군 사령단 테일러 장군과 악수하는 공사 생도 대장 시절.

  지금 생각하면 다소 무모했지만 그나마 7월 초 일찍 남쪽으로 떠난 것은 아주 잘한 일이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7월 20일쯤 대학에서 재학생 소집령을 내렸던 모양이다. 그때 서울에 남아 학교에 간 사람은 그대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결국 인민군에 입대해 사망하거나 국군에게 붙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끌려간 이도 적지 않았다. 또 인민군 연락장교로도 많이 갔다.
 
  게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인민군들은 눈에 띄는 족족 젊은 학생들을 끌고 가 총알받이로 삼았다. 그러니 전선(戰線)에 여유가 있을 때 남하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인민군 뒤를 따라 도보로 낙동강까지 도착하는 데 일주일가량이 흘렀다. 제대로 먹지 못했고 잠은 산속에서 잤던 터라 친구와 나는 피골이 상접했다. 그즈음 경북 상주 인근 낙동강 상류에서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온종일 총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쌕쌕이’(무스탕기)가 나타나 인민군 점령지를 폭격했다. 속도전으로 밀어붙이던 인민군이 그곳에서 3일간 지체했다.
 
  나는 이틀 동안 산속에서 자며 숨어 지내다 마을 노인이 알려준 산길을 따라 허겁지겁 걸어 마침내 낙동강가에 다다랐다. 강 하나만 건너면 되는데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강 건너가 경북 선산 땅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피란 가는 뗏목에 겨우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류로 내려가니 선산 장천이 나타났다. 김경덕의 고향에 온 것이다. 친구와 헤어지고 대구행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7월 18일이었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꼭 열흘이 걸린 셈이었다.
 
  이승만(李承晩) 정부는 7월 16일 이미 대전에서 대구로 옮겨와 있었다. 나를 본 어머니는 깜짝 놀라시며 눈물로 맞으셨다. 아버지는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간 합천에 계셔서 뵙지 못했다. 당시 전황은 참혹했다. 대구와 부산의 길목만 제외하고 모든 지역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갔었다.
 
  경북 칠곡 다부동에서 전투가 치열할 때 인민군이 쏜 박격포가 대구 도심에 떨어지기도 했다. 국방부에서는 대구시민과 전국 각지에서 밀려든 피란민에게 피란명령을 내렸다. 사이렌을 울리며 피란을 독려했을 정도다. 그러나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조병옥(趙炳玉) 박사가 대구 사수를 외쳤다. 전세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말을 믿고 피란봇짐을 풀었다. 이미 피란을 갔던 사람까지 되돌아왔다. 조 박사가 대구를 지키지 않았다면 국군이나 피란민 모두 사기가 떨어져 결국 전쟁에서 패했을지 모른다. 만약 대구를 포기했다면, 반도의 끄트머리 부산만으로 어떻게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겠나. 국군과 국민이 대구를 지켰기에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다. 조 박사는 그런 대구와의 인연 덕에 1954년 5월 3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대구에서 출마해 당선됐다.
 
 
  “이군 같은 성격은 비행기 타면 반드시 죽어”
 
  나는 향후 진로를 두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는 합천에 계셨고 형님도 합천중학교에서 교사를 하셨기에 내가 어머니를 모셔야 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론 입대와 공부를 두고 마음이 엇갈렸다. 8월 초 부산에 가보았다. 당시 고려대는 대구에 피란 왔으나 서울대와 연세대는 부산에 정착했다. 부산 영도에 있던 연세대 가교사(假校舍)에 가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 눈에 비친 학생들은 패잔병처럼 보였다. 전쟁 통에 한가롭게 공부한다는 게 내키지도 않았다.
 
  8월 22일 국민병 모집이 시작됐다. ‘그래 이왕이면 공군으로 가자. 하늘 높은 곳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또 하늘에서 조국을 지키자’고 결심했다. 어머니를 두고 입대하는 게 마음 아팠지만 나는 공군사관학교에 지원서를 냈고 대구 칠성초등학교에서 시험을 치렀다. 물론 합격, 1950년 11월 1일 경남 진해의 공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했다.
 
  나는 입학식 때부터 학생 대대장으로 뽑혔다. 미8군 테일러 사령관이 입학식에 찾아와 악수를 하기도 했다. 사관생도 중에는 나처럼 대학에 적을 두고 온 이가 드물었다. 대부분 중학교 5~6학년에 다니다 들어온 사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더러 낯이 익은 친구가 눈에 띄긴 했지만 대부분 대구의 학교 후배들이었다.
 
  그러나 당시 공사 3기생들은 매우 우수했으며 전쟁 중이라 교수진도 대학교수 수준이었다. 동기생 중에는 나중 공군참모총장과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인기(金仁基)를 비롯해 심장섭(沈璋燮·전 대사)·이상운(李相運·백범선생 기념사업회 부회장)·김경복(金慶福·한일교역 회장)·김종훈(金鍾勳) 등도 있었다.
 
  나는 성격이 분명하고 활동적이어서 2학년 때 ‘생도회’ 격인 오성회(五星會)를 조직, 회장으로 활동하며 조종사의 꿈을 키웠다. 현재도 공군 예비역 장교 모임으로 오성회가 있는데 그 뿌리는 당시 내가 만든 오성회다.
 
  그러나 하늘에서 조국을 지키겠다는 내 소박한 파일럿의 꿈은 2년 만에 무산되고 말았다. 임관을 10개월 앞둔 1953년 봄이었다. 3기생들은 경남 사천에서 이뤄지는 비행훈련을 앞두고 종합훈련을 받으러 대전 항공학교에 갔다. 모든 훈련을 마친 뒤 다음 날 사천으로 가기 위해 일찍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임관을 앞둔 행정장교 후보생들이 술에 취해 3기 사관 불침번에게 “사관학교면 제일이냐”며 시비를 걸었다. 막사에 있던 목총으로 패싸움이 나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양측 모두 격해 있었고 피아(彼我)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운 상태였다.
 
  전후 사정으로 볼 때 시발은 행정장교 후보생에게 있었지만 많은 부상자가 생겼고 더구나 전시(戰時)라 공군에서는 그대로 넘기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열 달만 참으면 임관하게 되는데, 최소한 수십 명이 처벌당할 위기였다. 나는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비장한 결심을 했다.
 
  ‘비록 현장에 있진 않았지만 생도회장인 내게 책임이 있다. 그러니 내가 책임지고 동료를 살려야겠다.’
 
  결국 혼자 군법회의에 회부됐다. 그러자 공사 출신 장교들은 물론 옥만호(玉滿鎬·전 공군참모총장)·주영복(周永福·전 국방장관)·유치곤(兪致坤·1965년 전사)씨 등 당시 유명했던 출격 조종사들까지 나의 구명운동에 나섰다. 결국 공사 교장이자 공군참모총장이던 최용덕(崔用德) 장군까지 나서 유치장에 있던 나를 직접 불러 위로했다. 최 총장은 내 용기를 대견스럽게 생각하면서도 안타깝게 여기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평생 조종사 생활을 해봐서 아는데 이군 같은 성격은 비행기 타면 반드시 죽어. 대학을 다니다 왔다니 차라리 복교해서 공부를 계속하는 게 좋겠어.”
 
  최 총장은 정열적인 내 성격이 비행기 조종사로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일사천리로 공군본부에서 군법회의가 열렸고 난 결국 퇴교조치되었다. 나는 퇴교당하던 그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3, 4, 5기생 모두가 두 줄로 교문까지 도열해 나를 전송해 주었고 특히 동기생들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공사에 근무하던 장교 사병 문관, 심지어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까지 나의 퇴교를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나의 희생적 퇴교는 널리 알려졌고 당시 공사 강의시간에 교관들이 내 이름을 거명하며 나를 귀감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쉽게 공사를 퇴교했지만 군인사법에 따라 공사 3년을 군복무기간으로 환산해 법적으로 병역의무를 마치고 공군 이병으로 전역했다.
 
  그러나 나 혼자 희생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동기생 김재완(金在浣·전 영천시장)·조영근(趙榮根·목사)·조박현(曺博賢·개인사업)도 퇴교를 요구, 할 수 없이 나와 함께 학교를 그만두게 됐다. 친구들의 퇴교를 막으려 했지만 완강했다.
 
 
  2001년 명예졸업장을 받다
 
  그로부터 48년이 지난 2001년 11월 3일 나는 청주 공사 교정에서 공사 명예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감격스럽게도 공사와 공군 당국은 반세기 전에 일어난 그 일을 새롭게 평가하여 3기 사관 입교 50주년 기념행사에서 나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한 것이다. 물론 같이 퇴학당한 세 친구도 이날 함께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그날 감격에 벅찬 나는 인사말을 통해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정의로운 용사가 되어 달라고 당부했다. 공사 개교 이래 제1호인 나의 명예졸업장은 지금도 공사박물관에 영구 보존되어 있다. 그 후 집에서 한동안 쉬며 생각을 정리한 난 대학에 복학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9월 서울행 열차에 올랐다. 그 사이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었고 학교는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간 상태였다. 남들보다 학업이 늦은 만큼 더욱 열심히 공부했다. 최용덕 총장이 공군본부 서울분소에서 내가 거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곳에서 먹고 자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복학해 보니 신촌 캠퍼스는 전시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해이한 상태였다. 3년간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고된 훈련을 견디던 나로서는 쉽게 적응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곤 응원단장을 자처하며 학교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때부터 ‘연대 털보 응원단장’이란 별명이 내 뒤를 따랐다. 어느 정도 유명했는가 하면 미국에 갔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백낙준 총장이 채플 시간에 나를 언급할 정도였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내가 없는 동안 우리 연희 동산의 나무도 많이 자랐지만, 이만섭군의 수염도 많이 자랐겠지….”
 
  그 말씀을 듣고 나는 벌떡 일어서 손을 흔들었고 이에 학생들이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아무튼 이 ‘연대 털보’는 옳지 못한 걸 보면 참지 못하는 특유의 성격을 복학 후부터 발휘하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1956년 소련군이 탱크를 앞세워 헝가리를 강점하려 하자 헝가리 국민이 결사적으로 대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6·25를 경험한 나로서는 헝가리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에 피가 끓어 올랐다. 나는 뜻을 같이하는 학우들과 헝가리 학도의용군을 조직했다.
 
  우리는 곧바로 김용우(金用雨) 국방장관실로 찾아가 우리의 뜻을 전달하고 헝가리로 달려갈 것을 요청했다. 국방부는 우리의 충정을 이해하면서도 국제관계상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만류했다. 그때 같이 행동한 학생이 김각(金珏·전 코리아헤럴드 논설위원), 남홍우(南洪祐·전 대사), 유재건(柳在乾·전 국회의원)씨 등이다.
 
  이 일로 인해 나는 2002년 3월 헝가리를 공식 방문했을 때 헝가리 국회의사당 내 대통령 집무실에서 페렌츠 마들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헝가리 최고 영예훈장인 ‘십자 대훈장’을 받았다. 마들 대통령은 1956년 당시 나의 깊은 뜻과 의로운 행동을 높이 평가했다.
 
  “의장님께서는 1956년 당시 헝가리 독립전쟁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지원군을 조직했던 의인 중의 한 분이셨으며…(중략)…헝가리인의 노력을 알리고 공론화하는 데 일조하셨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자리를 빌려 헝가리 국민을 대표하여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정리=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Copyright ⓒ 조선뉴스프레스 - 월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